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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 본당과 지역사회 안에서의 장애인 복지와 사목적 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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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3 ㅣ No.216

본당과 지역 사회 안에서의 장애인 복지와 사목적 배려

 

 

이상적인 본당 공동체란 기초 단위의 공동체로서 그 지역에 사는 모든 이들이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어 기쁜 소식을 전하고 함께 성찬을 나누며 형제적 사랑을 실천하는 의미 깊은 만남의 장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어려운 이웃에 대한 사랑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사랑의 표현이다. “오늘의 우리 본당은 과연 이상적인 공동체인가?”라는 질문을 우리 스스로에게 해야 할 것이다.

 

본당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본당을 건물이나 신자들만의 공동체로 생각할 것인가 아니면 그 본당의 관할 구역 내의 모든 하느님의 백성을 대상으로 생각할 것인가의 차이는 매우 크다. 여기에서 지역 사회라는 개념을 정리해 본다면 이는 본당의 관할 구역이 우선적인 지역 사회일 것이고 본당의 능력이 더 있다면 이 지역 사회를 더 확장시킬 수 있을 것이다.

 

국제 까리따스가 제시한 교회의 사회 사목적 모델을 보면 교회는 기도와 성사라는 교회의 기초 위에서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해, 또한 세상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시대의 징표를 읽어야 하며, 시대의 문제에 대응하지 않는 교회는 바람직한 복음적인 교회가 아니라고 한다. 

 

이런 이념은 이미 우리가 수없이 많이 들어왔는데 실제로 본당의 공동체는 스스로 질문해 볼 때 만족스럽지 않은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우선 본당의 주임 사제가 되면 본당의 평신도들의 대표인 사목 위원들과 함께 책임지고 운영을 한다. 각 분과가 있고 주임 사제는 각 분과의 대표자들과 모임을 하는데 사목 위원들은 우선 주임 사제의 사목 목표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따르려고 노력한다. 간혹 주임 사제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목 위원이 다른 의견을 제시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주임 사제의 주장을 따른다. 주임 사제가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들에게 관심은 가지고 있고 강론이나 모임에서 이야기는 많이 하고 있으나 본당 체제에서 어떻게 무엇을 구체적으로 실천할 것인가를 결정하기는 쉽지 않다. 

 

본당 사회 복지 활동의 기본적인 원리인 복음적 사명, 정확한 요구 파악(지역의 특성을 기초로 한), 지구나 교구와 연계성을 가진 프로그램 등을 인식하고 본당 사회 복지 프로그램의 유형을 보자. 

 

우선 사회 행동적 프로그램을 보면, 본당의 모든 신자들과 함께할 수 있는 건전한 사회 조성 캠페인(과소비, 퇴폐 풍조, 환경 문제, 남북 관련 문제, 가스 안전, 국내 입양 권유 등)과 소비자 운동, 사고와 재해 방지를 위한 운동, 도농간 직거래, 우리 밀 심기 운동, 교통 질서를 위한 운동(안전 운전과 경음기 안 울리기 운동 등), 교육 프로그램인 노인 학교, 주부 교실, 한글 교실, 근로자들의 모임, 알코올 중독자들의 모임 등의 프로그램을 들 수 있다. 

 

다음으로 대인 프로그램으로는 긴급 재해 대책반 구성, 노약자, 장애인, 결손 가정, 미혼모, 재소자와 출감자, 도시 빈민, 윤락 여성, 매 맞는 여성, 알코올 및 마약 중독자, 비행 청소년, 도박 중독자, 동성애자, 무료 급식소, 직업 알선, 외인을 대상으로 한 장례 서비스, 가난한 환자를 위한 서비스, 행려자 등을 위한 서비스 등이 있다. 이는 좀 더 효율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하여 개인 복지 기록 카드를 작성하여 서비스가 완료될 때까지 정기적이고 체계적인 서비스를 한다. 

 

다음으로는 사회 보호적인 프로그램을 들 수 있는데, 맞벌이 부부를 위한 어린이 집, 양로 시설, 장애 아동 방과 후 보호 시설, 무의탁자들을 위한 시설, 미혼모의 집, 출감자의 집, 청소년 쉼터, 매 맞는 여성의 쉼터, 에이즈 환자의 집, 어린이 공부방, 야학, 무료 의료 사업(본당 신자 봉사자 중심으로) 등이 있다. 

 

이것은 한 본당이 독자적으로 운영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이웃 본당이나 같은 지구에 있는 본당들이 연합하여 운영할 수 있고, 본당이 직접 시설을 운영하기보다는 본당 내의 기존 시설과 결연을 맺어 후원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이 밖에도 특정 지역의 개발이나 문제점들을 공동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교회가 주축이 되어 주민들의 참여와 함께 특별 프로젝트를 개발하여 실시할 수 있다. 주택, 교통, 상하수도 문제, 도시 가스 문제, 위생 문제, 각종 문화 시설, 본당을 개방하여 주민들에게 도움을 주는 모든 것 등이 있다. 

 

이렇게 본당에서 할 수 있는 다양한 사회 복지 사업이 있는데 중요한 것은 본당의 구성원들이 얼마만큼 마음을 열고 지역 사회에 다가가느냐일 것이다. 장애인 복지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예를 들어 생각해 보기로 한다. 

 

한 본당의 주임 사제는 부임하고서 가정 방문을 한다. 가정 방문을 하면서 가정 구성원 중에 장애인이나 사회 복지 대상자들이 있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고 구역 반장들을 통하여 신자들은 물론 외인들 중에서도 사회 복지 대상자들이 얼마나 있는지를 파악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구역 반장, 또는 모든 신자들을 대상으로 수 차례 사회 복지 대상자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여 신자들이 사회 복지 대상자들을 쉽게 구분하고 관심을 갖도록 해야 할 것이다. 

 

우선 장애인의 숫자를 보면 100만 장애인이라고 한다. 우리 나라의 인구를 5,000만 명으로 보면 50명 당 1명의 장애인이 있다. 본당 교우 5,000명인 본당에는 100명의 장애인이 있다. 장애인의 부류를 4부류로 구분하여 정신 지체 장애, 청각 언어 장애, 시각 장애, 지체 장애로 나누면 각 25만 명의 장애인이 있다. 그렇다면 교우 5,000명의 본당에는 정신 지체 장애인 교우가 약 25명 정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머리로만 하는 숫자 놀음이 아니다. 실제로 이렇게 많은 장애인이 있는데 거의 드러내지 않고 본당에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나타나지 않고 신자로서의 권리를 포기하고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당에 정신 지체 장애인들을 위한 주일 학교를 개설하는 사목적 배려가 필요하다. 이것은 가능한 것이고 실제로 본당에 장애인 주일 학교가 있는 곳이 6-7군데 있다. 정신 지체 장애인들은 주일에 갈 곳이 없다. 성당에 가도 못 알아듣는 강론을 들어야 하고 그들이 참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들에게 쉽게 교리를 알려 주는 사람도 없으며 주일 학교는 모두 정상인 학생들을 위한 주일 학교이다. 그들도 교리를 들을 권리가 있다. 사회 복지회에서는 장애인을 위한 주일 학교 교사들을 양성하고 있으며 필요한 본당에 파견하고 본당의 주일 학교 교사가 그 과정을 배울 수도 있는 체계를 갖추었다. 지금은 이 장애인들은 방치되어 있든지 아니면 개신교에 가고 있는 실정이다. 장애인의 부모들은 아이들을 위해서 개신교에 가는 것을 마다지 않는다. 본당의 어린이와 학생들을 배려하는 것과 같이 장애인들에게도 같은 배려, 아니 오히려 더 많은 배려를 하여야 한다. 정신 지체 장애인들은 나이가 많아도 어린이와 같기에 나이와 상관없이 한 반 정도로 운영하면 좋다. 

 

청각 언어 장애인이나 시각 장애인 그리고 지체 장애인들에게 우리의 마음을 열어서 교회 안으로 끌어 들여야 한다. 우선 청각 언어 장애인의 숫자를 파악하고 그들을 초청하여 교회의 구성원으로 맞아들이면서 본당에서 수화 교육을 실시한다. 수화 교육은 어느 본당에서라도 할 수 있도록 각 교구의 농아 선교회에서는 수화 봉사자들을 양성해 대기 중이다. 본당 공동체의 여러 사람이 수화를 배우면서 청각 언어 장애인들을 맞아들인다면 청각 언어 장애인들도 자기들의 언어인 수화를 배우는 사람들에게 친밀감을 느끼며 사랑의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될 것이다. 그리고 본당의 소공동체 모임이나 성지 순례, 성모의 밤, 척사 대회, 체육 대회 등 거의 모든 행사에 함께 참여할 수 있다. 우리의 약간의 노력과 관심이 이들을 행복하고 기쁘게 해 주며 장애인으로서의 고통에서 구원해 줄 수 있다. 

 

시각 장애인과 지체 장애인들은 더 쉽게 교회의 구성원으로 맞이할 수 있다. 그들은 이동하기가 어려울 뿐 일단 이동만 하면 우리들과 다름없이 모든 대화를 할 수 있다. 

 

5,000명의 신자가 있는 본당에서는 100명의 장애인들을 위한 열린 교회로서 역할을 할 수 있다. 

 

일전에 외국에 몇 군데 다녀온 적이 있다. 대부분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는데 필자가 느낀 것 중에 하나는 선진국일수록 자동차를 운전할 때에 경음기를 울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매우 조심스럽게 운전을 하거나 위험하다고 느끼면 천천히 가고 여유 있게 기다리면서 운전을 하니 경음기를 울릴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경음기를 울린다는 것은 내가 빨리 가려고 하니까 끼어들지 말라는 경우이거나 앞에 있는 차에게 빨리 가라고 재촉하는 경우이거나 보행자에게 비키라는 경우이다. 만약에 그 보행자가 청각 장애인이거나 시각 장애인일 경우에는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또 요즈음에는 청각 장애인들도 운전을 하는데 앞 차의 운전자가 청각 장애인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우리 모두가 한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더불어 사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외치고 있지만 여러 곳에서 우리는 더불어 살지 못하게끔 하는 이기주의가 아직 자리하고 있음을 느낀다. 이제 우리도 잘살게 되어 너도나도 차를 가지고 있으며 운전을 하고 있는 요즈음 경음기 안 울리기 운동을 하는 것도 이웃 사랑의 큰 실천이며 장애인을 위한 배려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청각 장애인들도 마음 놓고 운전하는 사회, 시각 장애인들도 마음 놓고 거리를 다닐 수 있는 사회, 지체 장애인들도 마음 놓고 어떤 지하도이든지 어떤 건물이든지 드나들 수 있는 사회가 될 수 있도록 하는 데에는 우리 모두의 인내와 희생이 있어야 할 것이다. 특히 교회는 모든 이를 위한 모든 것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교회의 구성원 중에는 어느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아름다운 마음이야말로 복음을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를 지시고 우리 모두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속죄의 희생양이 되셨다. 이는 인간을 억압과 고뇌와 장애 같은 것에서 해방시키신 것이다. 주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눈먼 이들을 볼 수 있게 해 주시고 억눌린 이들에게는 자유를 주시고 묶인 이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시는 사명을 띠고 오셨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나환자들을 치유하시고는 그들에게 이제 돌아가서 사제에게 네 몸을 보이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셨다. 사람이 나병에 걸리게 되면 그 병의 전염성 때문에 우선 그 사람은 사회에서 격리되어야 하기에 직장이라든가 사회적인 모든 위치를 잃게 된다. 그리고 가정에서도 아버지였으면 아버지의 자리를 잃게 되고 자기 삶의 존재 근거였던 직장을 잃고 사랑하는 배우자와 자녀들과 생이별을 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그 나환자들에게 나병 그 자체도 고통스럽겠지만 더 고통스러운 것은 사랑하는 가족들로부터의 소외요 인정받던 사회로부터의 소외라고 할 수 있다. 주님께서는 나병 환자의 병을 고쳐 주시고 그가 사제에게 몸을 보이도록 하는 것은 이제 그는 사회의 일원으로 다시 사회성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하고,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다시 아버지의 지위를 되찾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 나환자의 육신의 병을 고치는 것에 머물지 않으시고 더 나아가서 그에게 예전의 지위를 모두 다 찾아 주신다는 것, 이것이 바로 전인격적인 구원이다.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루가 15장)에서 자기의 재산을 챙겨서 나갔던 작은아들이 재산을 다 탕진하고 회개한 후 돌아오자 아버지는 반갑게 맞이한다. 그 작은아들은 진심으로 회개하면서 이렇게 생각한다. ‘아버지에게 이렇게 부탁하자. 그저 나를 아버지 집의 품꾼으로라도 써달라고 청하자.’ 그는 자신의 지위를 찾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집이 그리웠고 가정이라고 하는 공동체를 가까이에서 볼 수만 있어도 족하다는 생각을 했으며, 아버지의 집에서는 굶주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에게 새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워 주고 신발을 신기도록 한다. 나아가서 잔치를 베풀도록 하며 아버지는 작은아들을 예전의 작은아들의 위치, 곧 재산을 챙겨서 집을 나가기 전의 아들의 지위로 회복시켜 준 것이다. 그는 이제 가정이라고 하는 공동체에 속할 수 있고 그 지역에서의 사회성을 다시 회복하게 된다. 

 

주님께서 소외되고 가난하고 억눌린 이들을 사랑하셨지만 특히 자기의 탓 없이 고통을 받고 사는 장애인들에게도 그들 나름대로의 사명을 기대하고 계신다(요한 9장). 그리고 태생 시각 장애인을 치유하시고는 제자들의 공동체와 사회가 올바로 볼 수 있도록 가르치신다. 그리고 그 치유의 행위는 안식일에 행해졌고 이 때문에 주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배척을 받게 된다. 이 배척은 십자가상의 주님의 죽음으로까지 연결된다. 

 

교회는 이러한 시각으로 억눌리고 고통받으며 소외된 인간을 끊임없이 기억하여 왔다. 또한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어 우리가 잘못하여 손상된 고귀한 인간성을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회복시켜 주셨다. 이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은 구세사 전편에 이르러 우리에게 전하시며 우리도 우리의 이웃들 중에 소외되고 고통받으며 자기 탓 없이 어려움을 당하며 사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사회성과 인격의 존엄성 회복을 위하여 헌신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교회는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든 사람들을 사랑한다. 우리 각자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처럼 다른 사람들 모두 가장 소중한 사람들이다. 여기에는 장애인이든 행려자이든 죄인이든 빈민이든 상관없이 모두 하느님의 모습을 간직한 인격체이다. 특히 자기의 탓이 없이 보통 사람들하고 분리되어 취급 받는 사람들을 우리가 특별 관리하거나 소외시키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며, 이는 우리 자신이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것이다. 어떠한 형태의 장애를 지녔든지 장애를 지닌 모든 사람들은 장애를 지니지 않은 사람들과 똑같은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똑같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하느님께서 알려 주신 사명대로 모든 장애인들을 특별 관리하지 말고 우리의 공동체에 함께 수용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예를 들면 어느 본당 구역 내에 가톨릭 농아 학교가 있는 본당에서 농아 신자 학생들을 본당 주일 학교 미사에 함께 참여시키려는 노력이 무산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유는 농아 신자 학생들이 보통 학생들과 함께 주일 학교 미사에 참석을 하면 상처를 받는다는 고마운 배려(?) 때문이다. 그래서 농아 학생들은 특별 관리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보통 학생들과 함께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문은 굳게 닫혀 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끼리만 만나고 다른 세계에 대해서는 저절로 폐쇄적이 되고 이질적인 집단으로 성장하며 많은 것을 포기하면서 자라고 있다. 이것이 국민 소득 10,000달러 시대를 살고 있는 대한 민국의 현실이다. 학생 시절부터 봉사를 많이 시킨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대부분 장애인 시설에 봉사하는 학생들을 보면 그 시설에서 장애인들을 직접 만나서 사랑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그 시설의 회보를 보내는 작업을 한다던가 잡다한 일들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장애인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이상한 세계에서 사는 모자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환경에서 자란 학생들이 어른이 되면 자기 동네에 장애인 시설이 들어오게 되면 자녀들 교육이나 집 값의 하락을 이유로 목청 돋우어 반대를 하게 된다. 그 이유는 가까이 다가갈 수 없고 특별 관리를 해야 하는 다른 세계의 모자란 사람들이 우리 동네 가까이에 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이 세상은 모두 다 잘 듣고 잘 볼 수 있는 그리고 지능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사람들만 사는 세상이기에 자동차를 운전할 때에도 경음기를 마구 울려 대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 모두가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신다. 이를 위해서 당신의 고귀한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지상에 보내셨고 그분의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이 세상을 구원하셨다. 이 세상의 구원은 특별 관리나 소외가 아니라 통합이다. 나병 환자이든 작은아들이든 장애인이든 그들이 더 이상 소외되고 특별 관리의 대상이 되지 않을 때에 하느님 나라가 올바로 세워지고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게 될 것이다. 

 

갑자기 장애인이 되는 경우도 점차 늘어난다. 각종 질병과 사고로 시력을 잃기도 하고 청력을 잃기도 하며 지체를 잃기도 한다. 언제 어느 때 누가 하루아침에 장애인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느 시각 장애인은 대기업의 간부로서 매우 실력 있고 덕망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던 그가 지병인 당뇨로 시력을 잃자 직장에서 퇴직을 당하고 가정에서는 장애 아버지가 되고 말았다. 수십년을 노력하여 이룬 그의 사회적 능력은 무용지물이 되었고 권위 있고 존경 받던 가장의 위치에서 이제 주위의 도움을 받아야만 움직이는 중도 시각 장애인이 된 것이다. 3년을 생사의 갈림길에서 고민하던 그는 그 아픔을 딛고 점자를 배우는 것으로 인생을 다시 시작한다고 한다. 

 

이러한 예를 들자면 수없이 많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사는 데 우리와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도 있으며 그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들과 함께 산다는 것은 바로 나를 위한 것이다. 그들을 소외시킬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으로 끌어 들여서 함께 나누는 것이 주님의 나병 치유이며 현시대의 기적이고 우리 모두가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나병 환자가 원하였던 것은 단순히 병을 낫게 해 달라는 것이었고, 작은아들이 원하였던 것은 그저 밥이라도 제대로 먹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육신 문제의 해결 차원을 넘어서서 그들의 전 인격적인 치유와 더불어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시켜 주셨고 그 사회에서 그들을 받아들이도록 하셨다. 더 이상 장애인들을 분리 수용 내지는 특별 관리 또는 후원의 대상으로 생각하여 그들을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더욱더 소외시킬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으로 특히, 우리 자녀들의 성장 과정 속으로 장애인들을 끌어 들여 폭넓은 성장 과정, 열린 마음을 가진 인간으로 교육시키는 데에 교회가 앞장서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서 교회는 장애인들을 마음으로부터 수용하여 구역 모임이나 반모임 때에 또는 레지오 활동이나 각종 행사 때에 지역에 살고 있는 장애인들과 함께 신앙 생활을 하는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생각된다.

 

[사목, 2002년 7월호, 정순오(한국 가톨릭 장애인 복지 협의회 지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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