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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신학ㅣ사회사목

[사회복지] 시설이 아니라 사회에서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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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3 ㅣ No.220

시설이 아니라 사회에서 살아야 한다

 

 

대구 지하철 참사는, 방화를 저지른 용의자가 장애인임을 부각시킨 언론 때문에 장애인에게도 씻을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한때 사건 관련 인터넷 게시판에는 노골적으로 ‘장애인들을 사회에서 영구히 격리시키자’는 요지의 글이 쇄도했다. 일부 네티즌들이 ‘장애인은 위험 인물이니까 수용 시설에 격리시켜라’고 목소리를 높인 것이다. 

 

이런 의견이 비록 우리 사회 소수 사람들의 생각일지 몰라도, 이렇게 대구 참사처럼 장애인이 개입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장애인들을 수용 시설에서 보호하지 왜 사회에 살게 해서 문제를 일으키게 하느냐.”라는 질타의 반응을 자주 보게 된다. 

 

실제로 지금 많은 사람들이 떠올리는 장애인 모습은 다름 아닌 수용 시설에 수용되어 있는 장애인 모습일 것이다. 비장애인들은 장애인들을 자신과는 다른 보호를 필요로 하는 대상이기 때문에 수용 시설에 있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의 장애인이 서 있는 자리를 단적으로 정의한다면 중심가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수용 시설의 어디쯤인 것이다. 

 

그러면 지금 수용 시설에 수용되어 있는 장애인들은 과연 행복할까?

 

 

1. 시설 비리 끊이지 않고 발생해

 

본론으로 들어가서 수용 시설 문제를 지적하기 전에 먼저 국내 장애인 수용 시설 현황을 살펴보자.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2002년 말 현재 국내에는 203개의 장애인 수용 시설에 1만8천여 명의 장애인들이 수용되어 있다고 한다. 여기에다 2001년부터 장애인으로 포함된, 정신 질환자라고 부르는 정신 장애인 수용 시설은 55개가 있고 약 1만3천여 명의 정신 장애인이 수용되어 있다.

 

이런 복지부 통계는 인가 시설의 경우이다. 현재 정부 인가를 받지 않은 채 운영되고 있는 규모가 작은 비인가 시설까지 합치면 장애인 수용 시설은 약 1,000개에 육박하고 있다. 역시 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국내 미신고 시설이 무려 1,000여 개에 달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 중 70% 이상이 장애인 수용 시설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렇게 유독 장애인 수용 시설이 많은 것은, 간단하게 수요와 공급의 법칙을 적용해 보면, 우선 그만큼 시설 입소를 원하는 장애인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사회가 장애인에게 매우 배타적이기 때문에 장애인이 사회에서 살기 힘들고, 그래서 장애인들이 시설로 몰리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정부의 장애인 정책도 시설 위주이다. 단적인 예로 정부의 장애인 복지 예산은 시설 운영 자원과 기능 보강에 전체 예산의 50%를 넘게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면 정부 예산을 받아서 장애인들을 보호하고 있는 수용 시설에 끊임없이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뭘까?

 

이런 비유가 적당할지 몰라도 필자는 수용 시설을 한 개의 섬으로 바라보고 있다. 대다수 수용 시설이 장애인 보호를 명분으로 지극히 폐쇄적으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립된 섬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외지 사람은 전혀 알 수 없다는 게 문제다. 특히 현재 시설에 수용된 장애인들의 대다수는 자기 방어 능력이 없는 정신 지체 장애인들이다. 정신 지체 장애인들은 특성상 인권 유린에 저항하지 못한다. 결국 시설의 폐쇄적인 운영은 매우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여기서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필자가 그동안 목격한 수용 시설 비리 중 대표적인 비리 하나를 소개해 본다.

 

몇 해 전 국회 국정 감사에서도 문제가 되었던 경남 울주에 있는 이 시설 비리는 먼저 시설측에서 정원 외 76명의 원생들을 불법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정신 지체 장애인 부모들에게 약정서를 쓰게 하고 돈을 받아 문제가 되었다. 국정 감사 자료에 따르면 당시 이 시설이 받은 평생 입소금 명목의 돈은 확인된 인원만 해도 30명에 3억4천1백만 원에 이르렀다.

 

또 이 시설은 친족 경영으로도 문제가 되었는데, 남편이 이사장, 부인이 원장, 둘째 아들이 총무로 있는 전형적인 족벌 체제로 운영되고 있었다. 여기에다 시설장의 친정 식구만 무려 18명이 시설 직원으로 재직하고 있어서 시설이 장애인 복지는 뒷전이고 한 집안을 먹여 살리는 수단으로 전락했음이 드러났다.

 

더 가관인 것은 설립자인 이사장이 원생 세 명을 상습적으로 성폭행한 사실이 드러난 부분이다. 또 정신 지체 원생들에 대한 강제 노역도 자행되어서 원생들을 건물 짓는 현장에 강제로 내몰아 이 중 서너 명을 사망하게 만들고, 말을 듣지 않는 원생들은 골방에 감금한 사실이 경찰 수사 결과 드러났다.

 

물론 이 시설 비리를 전체 수용 시설에 적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름대로 모범적으로 시설을 운영하려고 애쓰는 시설장들이 있고, 장애인들을 사랑으로 돌보는 시설도 많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현재 많은 수용 시설이 여전히 족벌 체제로 운영되고 있고, 원생들에 대한 인권 유린 시비가 끊이지 않고 발생하고 있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시설 비리가 가능한 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시설이 지역 사회에 개방되지 않고 폐쇄적으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말이 나온 김에 시설의 폐쇄성 사례를 하나 더 언급해 보면, 필자는 몇 해 전 강원도 철원에 있는 한 장애인 수용 시설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 시설은 전혀 인적을 찾아볼 수 없는 외진 곳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무려 300명이 넘는 장애인들을 수용하고 있었다. 필자는 그 시설을 둘러보면서 시설이 마치 교도소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원생들은 한 번 문안으로 들어서면 평생 그 시설을 나올 수 없었다. ‘이런 곳에서는 심각한 인권 유린이 자행되어도 드러나지 않겠구나’고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시설을 다녀온 얼마 후 그 시설 원장이 원생을 때려 사망하게 만들었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읽을 수 있었다.

 

시설 비리 사례를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감사원은 지난 2000년 서울 등 전국 8개 시도의 40개 수용 시설에 대해 집중 감사를 실시한 적이 있다. 이때 적발된 시설 비리를 살펴보면, 먼저 시설의 30% 정도가 원생들의 우유값을 떼먹거나 도시락 비용을 빼돌리는 등의 수법으로 정부 보조금을 횡령하고 있었다. 인건비를 늘리기 위해 유령 직원을 만들거나 자원 봉사자를 당사자 몰래 유급 직원으로 둔갑시키는 사례도 적발되었다. 또 원생들을 노역에 동원하는 사례도 근절되지 않고 있었는데, 충북 옥천군의 한 정신 장애인 시설은 원생 5명에게 소, 돼지 등 가축 2백 마리를 사육하도록 해 놓고 월급을 전혀 주지 않은 것이 감사에서 적발되기도 했다.

 

그러면 비인가 시설은 어떨까?

 

현재 장애인이 정부가 예산을 지원하는 인가 시설에 들어가려면 미아거나 아니면 생활 보호 대상자여만 한다. 생활 보호 대상자가 아닌 장애인은 실비 입소 제도를 통해 시설에 입소할 수 있으나 실비 입소는 정원의 30%로 제한되어 있고, 시설 측에서 관리의 어려움을 들어 받기를 꺼리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시설에 들어가려는 장애인은 넘쳐나고 있다. 많은 장애인 부모들이 자신의 사후를 염려해 자녀들을 시설에 보내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가슴 아픈 현실이 아닐 수 없는데, 되풀이해 말하면 아직까지는 정신 지체 장애인과 중증 장애인들이 사회에서 사람 대접을 받으며 살 수 없기 때문에 이런 비극적인 일이 발생하고 있다.

 

그렇지만 수요는 많은 반면 인가 시설의 정원은 제한되어 있는 실정이다. 그러다 보니 부모들의 수요를 비인가 시설이 흡수하고 있는 것이다.

 

비인가 시설 또한 인가 시설과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비리가 발생하고 있다. 한 예를 들어보면, 필자는 2001년 7월 “장애인 사육”이라는 제목을 붙여 기사를 쓴 적이 있다.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아이를 맡기고 한 달에 30만 원씩 보내 주시면 돼요. 평생 맡기는 거요? 평생 맡기는 것은 저희가 최하 5천만 원을 받고 있어요.”

 

무슨 얘기냐 하면, 바로 정신 지체 장애인을 시설에 맡기려고 했을 때 비인가 시설 측에서 요구한 금액이다. 그 시설은 강원도 정선, 인가가 없는 산꼭대기에 있었는데, 콘테이너 가건물 한 동이 시설의 전부였다. 당시 기억을 되살려 보면, 가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정말 심한 악취가 진동해서 코를 막아야 할 지경이었다. 마침 장애인 원생들의 저녁 식사를 목격할 수 있었는데, 라면에 국수를 섞은 된 죽 같은 식사를 장애인들이 허겁지겁 먹고 있었다. 한 여름에 에어컨은 물론 선풍기 한 대 없었고, 습기로 벽지가 찢어져 흉측한 모습을 하고 있는 방에 원생들이 멍하니 허공을 응시한 채 누워 있었다. 물론 보육사도 없었다.

 

믿기지 않겠지만 당시 확인한 사실인데, 시설이 이렇게 열악한데도 입소시키려는 장애인 부모들이 줄을 서 있다는 것이었다. 비인가 시설은 대부분 이처럼 시설이 열악한 게 특징이다. 그리고 이 시설처럼 많은 비인가 시설이 장애인들을 입소시키면서 평생 보호를 명분으로 부모들에게 거액의 돈을 요구하는 것은 이제 공공연한 비밀이다.

 

 

2. 탈시설화와 자립 생활 운동

 

지금까지 국내 장애인 수용 시설의 현실을 비판적인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그러면 외국의 장애인 수용 시설은 어떨까?

 

미국의 언론인 조셉 피 쉐피로가 쓴 미국 장애인 운동사 「동정은 싫다」(NO PITY)라는 책을 펼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노예 제도는 인간을 상품으로 다루는 악의적인 제도였지만 반면 수용 시설은 자신을 돌볼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보호하는 것으로 믿어졌다. 그러나 노예 제도처럼 시설에 있는 사람들은 열등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노예 제도처럼 1960년대 후반까지 주립 시설에서 장애인들을 옷을 벗기고 한 줄로 늘여 세운 다음 정원의 호스로 물을 뿌리는 것으로 목욕을 대신하게 하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노예 제도와 마찬가지로 이른바 그들의 주인은 잔혹한 행위를 장애인들에게 자행하였다. 흑인 노예들이 백인 주인이나 현장 주임으로부터 성적 도구로 여겨졌던 것처럼 시설에서도 강간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시설은 일종의 교도소가 되었다. 한 시설에는 팔과 다리가 묶여 있는 장애인들이 있었고, 그들이 사는 방은 배설물로 악취가 진동했다.”

 

이러했던 미국의 장애인 수용 시설은 현재 장애인들이 시설에 수용되어 있는 것을 보는 것이 오히려 진기한 경우가 되었을 정도로 사실상 수용 시설이 사라졌다.

 

미국에서 탈시설화(Deinstitutinalization)와 자립 생활 운동(Independent Living Movement)이라는 말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다.

탈시설화란 한마디로 수용 시설에 수용되어 있는 장애인, 특히 정신 지체 장애인이 시설에서 나와 가족 친지들이 살고 있는 지역 사회에서 함께 살 수 있도록 해 주자는 것인데, 주로 부모들에 의해 주도된 운동이다.

 

그리고 자립 생활 운동은 장애인 당사자가 주도하고 있는 운동인데, 이 운동은 장애인의 문제는 장애인 당사자가 가장 잘 이해하고 있으며 장애인 자신의 생활 전반에 있어서 선택권 및 자기 결정권은 장애인이 보장받아야 할 기본 인권의 하나라는 이념을 가지고 있다. 이 이념을 바탕으로 자립 생활 운동은 장애인이 시설이 아니라 사회에서 이웃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자립 생활 이념이 특히 장애인에게 매력적인 것은 장애인 자신이 어디서 살 것인지, 누구와 함께 살 것인지, 어떤 생활 양식을 선택할 것인지, 자신의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등에 대한 생활 전반에 걸친 사항을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하는 권리가 누구도 아닌 장애인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시작된 탈시설화와 자립 생활 운동은 이제 서구에서 장애인 복지의 주류로 부상하고 있다. 서구뿐만이 아니다. 가까운 나라 일본만 해도 미국의 영향을 받아 시설이 사라지는 추세이고 시설 대신 장애인들의 자립을 지원해 주는 자립 생활 센터가 속속 생겨나고 있다. 그리고 국내에도 이 이념이 들어와 이제 막 중증 장애인들의 자립 생활 운동이 시작되고 있다.

 

일본 이야기가 나온 김에 덧붙이면, 일본의 경우 필자가 인상 깊게 본 것은 자립 생활 운동 외에 지역에 장애인들의 공동 작업장을 만드는 운동이다. 장애인이 시설에 들어가는 대신 지역에서 비장애인과 함께 소규모 작업장을 만들어 일을 하고 정부는 운영 비용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그리고 지역 사회는 물건을 팔아 주는 방식으로 장애인 작업장을 지원하는 이 운동은, 현재 일본에서 자립 생활 운동과 함께 장애인이 시설이 아닌 지역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한 유력한 수단으로 장려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 장애인 문제에서 더 이상 수용 시설이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추세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한 가지 눈여겨볼 것은 세계적으로 장애인 수용 시설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는 데에는 시설 수용이 비인간적이라는 이유 외에도 경제적 효과가 고려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시설을 만들고 유지하고 직원 인건비를 지원하는 데에는 해마다 엄청난 비용이 든다. 그럼에도 투자에 따른 효과는, 좋게 말해서 장애인들을 보호하고 있다는 것 외에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래서 선진국들은 지금 시설에 투자할 비용으로 직접 장애인 개인에게 장애 수당을 지원해서 장애인이 지역 사회에서 생활하게 하고, 대신 복지관이나 자립 생활 지원 센터 등을 통해 재활 프로그램을 선택하게 하는 방식으로 장애인 정책을 바꿔 가고 있다.

 

 

3. 소규모 시설을 만들어 지역에서 살게 해야

 

이런 세계적인 흐름에 비하면 지금 우리나라 장애인 복지는 거꾸로 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필자가 정부의 장애인 복지 정책 중에서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요양원이라는 이름이 붙은 새로운 수용 시설이 생겨나고 있다는 것이다. 원래 장애인 수용 시설은 재활원만 있었다. 그런데 몇 해 전부터 요양원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 아무리 비교해 봐도 재활원과 요양원의 차이는 거의 없다. 그런데 왜 요양원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장애인 수용 시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를 생각해 봤더니 우선 정부가 시설 중심의 장애인 복지 정책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고, 두 번째 이유는 성인이 된 장애인을 수용하기 위해서라고 보인다. 그리고 시설장의 욕심도 수용 시설이 늘어나는 데 한몫을 하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인데, 시설이 하나 건립되면 시설장은 어떻게든 시설의 규모를 확장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학교를 만들고, 작업장을 만들고 또 새로운 시설을 건립한다. 조금 비꼬아서 이야기한다면 시설장은 자신의 영향이 미치는 왕국을 대규모로 늘리고 싶어하는 것이다. 

 

국내의 장애인 시설 중 그나마 대안으로 꼽히는 시설은 그룹홈이다. 정신 지체 장애인 4-5명이 교사와 함께 지역에 거처를 얻어 생활하고 있는 이 시설은 탈시설화에 부합되는 모델로 부모들과 장애인 복지 전문가들이 선호하고 있는 시설이다.

 

만약 시설의 존재가 불가피하다면 시설의 목표는 시설 생활자의 인간다운 생활 보장이므로 장애인 개개인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게끔 시설 규모가 가급적 작은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그래서 그룹홈이 많이 생겨나야 하는데, 현재 정부나 자치 단체의 예산 지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그룹홈 설립은 빠르게 확산되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는 실정이다.

 

그룹홈이 대안이라고 강조하는 부모들 입장에서 보듯 장애인은 지역 사회에서 비장애인과 더불어 살고 싶어한다. 그리고 장애인이 수용 시설에 수용되지 않고 지역 사회에서 사는 것은 사회와 종교가 장애인들을 조금만 배려한다면 불가능한 꿈이 결코 아니다. 

 

하나의 가상을 해 보자. 가톨릭이 지역마다 있는 성당에 어린이집처럼 장애인 공동 작업장을 하나씩 만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성당에서 예를 들어 빵을 만드는 장애인 작업장을 만들고 교우들이 그 빵을 구입해 준다면, 그리고 더 나아가서 성당이 조그만 그룹홈 형태의 소규모 시설을 하나씩만 만들어 지원한다면, 성당이 있는 지역 장애인들은 수용 시설에 가지 않고 지역 사회에서 충분히 살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수용 시설에서의 장애인의 삶은 주도적인 선택권이나 자기 결정권 등과는 아주 거리가 먼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이유로 합리화한다 해도 결코 바람직한 삶이 아니다. 장애인은 수용 시설이 아닌 바로 우리 곁 지역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사목, 2003년 4월호, 이태곤(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부설 월간 [함께걸음]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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