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일 (화)
(녹)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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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 교회 사회복지 활동의 성서적 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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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3 ㅣ No.201

교회사회복지활동의 성서적 논거

 

 

이 시간에 교회사회복지활동의 성서적 논거를 제시하기 위해 성서 전반에 걸쳐서 살펴볼 수는 없고 다만 21세기 한국 사회 안에서 우리가 무슨 일을 해야 되는가, 무슨 일을 하는 것이 가장 중대한가, 그리고 다음 세기에는 우리가 어떤 정신을 가미고 사회복지사업에 임해야 하는가에 대해 소신껏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들과 똑같은 조건으로 태어나시고 생활하시고 말씀하시고, 그리고 돌아가셨습니다. 죽어야만 부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씀드려 예수님께서 주로 하신 일은 무엇인가. 주로 다니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당시 구약성서의 율법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율법은 “… 하지 말라, … 하면 안된다”는 식으로 주로 자기방어적이지요. 또한 그 율법 못지않은 권위를 지닌 모세의 전통도 있었습니다. 율법은 자기방어적인 원칙이 주종을 이뤘는데, 예수께서는 ‘율법보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더 중요하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해라’ 하시며 여러 차례 율법과 전통에 도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일 처음 말씀하신 것은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그러니 복음을 믿고 복음의 정신대로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을 뽑으시고 그 다음에 주로 하신 일이 병자들을 고치는 것이었습니다 복음 중에 가장 짧고 인상적인 마르코 복음의 I장 14절에서 18절까지를 보면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습니다 여러분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라고 말씀하셨고, 계속해서 29절 이하를 자세히 읽어보면 시몬의 장모를 낫게 하시고 귀신 들린 사람들, 갖가지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과 나병환자를 고치십니다. 2장에서는 중풍병자를 고쳐주시고,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과 식사를 같이 하십니다. 손이 오그라든 병자를 낫게 하시는 3장에 이어 5장에 가면 무덤에서 사는 사람 이야기가 나옵니다. 전혀 사회적인 시스템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 예수님은 그 사람을 고치십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가 병원을 만들고, 소외된 사람들을 고쳐줍니다. 이것은 아주 단순한 논리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제자이기 때문에 그분을 모방하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예수님이 하신 일은 다니면서 가르치신 것입니다. 산상설교와 신약성서에 나오는 약 40개의 비유를 보면 예수께서 아주 굉장한 이야기꾼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께서 무엇을 하셨는가.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셨습니다. 마르코 복음 14장 22절 이하를 보십시오. ‘받아 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 ‘이것은 나의 피다.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 결국 당신 자신을 선물로 내놓는 이른바 사랑의 신비, 이것을 우리가 유카리스티야, 미사라고 하지요.

 

예수께서는 주로 이런 일을 하셨는데, 그렇다면 21세기를 앞둔 우리가 불우하고 소외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무슨 일을 어떤 정신으로 해야하는지, 복음의 많은 귀절들 중에 제가 선정한 것은 루가 복음 10장 25절에서 37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예수님 사상의 핵심이 거기 들어 있습니다.

 

어떤 율사가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일어섰습니다. 율사는 율법을 잘 아는 사람, 우리 같으면 변호사나 국회의원 같은 사람입니다. 율사가 예수님을 보고, ‘이 사람이 사방에 다니면서 율법에 도전을 카고 많은 것을 안다고 하는데, 과연 율법을 얼마나 잘 아는지 한번 보자’며 예수님을 테스트하기 위해서 일어선 것입니다. “선생님, (이 사람이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인정하고 랍비라고 부릅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영원한 생명을 물려받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선생님 제가 어떻게 해야 …’ 이는 행동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함으로써 그 대가로 영원한 생명을 유산으로 물려받겠습니까, 질문은 그겁니다. ‘제가 무엇을 하면 …’ 그러니까 이 사람은 자기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릅니다. 지식이 없습니다. 할 수 있는 행동은 많지요. 전쟁을 한다거나, 정치를 할 수도 있고, 장사를 할 수도 있고, 여러 가지 많은 행동이 있는데 그 많은 행동들 중에서 내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만 그 대가로 영원한 삶을 물려받겠습니까.

 

이제 율사는 예수를 시험하려고 합니다. 마치 선생의 입장에서 학생에게 묻는 것처럼, 답변의 내용을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얼마만큼 아는지를 평가하기 위해서 질문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역습 질문을 하십니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적혀 있느냐. 너는 율법을 잘 알지 않는가' 그러자 율사가 대답을 합니다. "네 온 마음으로, 네 온 영혼으로, 네 온 힘으로, 네 온 정신으로 너의 하느님이신 주님을 사랑하라." 그런데 이 율사는 상당히 놀라운 사람입니다. 율사의 대답중에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이 말씀은 신명기 6장 5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웃 사랑에 대한 말씀은 레위기 19장 18절에 나옵니다. 과연 어떻게 이 율사가 따로 떨어져 있는 두 내용을 하나로 합쳤는가, 상당히 놀라운 대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 그야말로 우리가 늘 말하는 '애주애인'이지요.

 

그런데 두 사람의 대화 속에 이제 제3의 권위가 개입합니다. 율법이라는 권위죠. 율법은 법입니다 그러나 법이 사람들의 모든 생활을 일일이 다 규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법이란 어떤 투신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너희 하느님이신 주님을 네가 사랑할 것이다. …‘ 그런데 가만히 보십시오. 네 온 마음 …. 마음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인간의 모든 생각, 인간의 모든 욕망이 거기 들어 있습니다, 내가 좋은 것을 원할 때에 마음이 기쁘고, 내가 나쁜 것을 원할 때 내 마음이 슬픕니다. 그러니까 마음이란 인간의 사고와 감정과 의지, 이러한 모든 것들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어떤 사람에게 마음을 주었다는 것은, 서로 사랑한다, 그 소리거든요.

 

그 다음에, '영혼'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만약 영혼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 몸은 썪습니다. 영혼은, 말하자면 인간의 정신과 육체의 원칙입니다. 어떤 사람이 영혼이 없으면, 얼이 빠지면 어떻게 됩니까? 미칩니다. 그러니까 영혼이란 인간의 정신과 육체적인 생활의 원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네 온 힘‘ 이것은 에너지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에너지, 그 다음에 '네 온 생각’ 우리의 생각은 굉장히 빠릅니다. 우리의 생각은 빛보다도 속도가 빠릅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이러한 모든 것이 다 동원되어야만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말하자면 반쯤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동원해야만 그분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하고 아주 다릅니다. 그분은 한 분뿐이십니다. 우리를 만든 분이시고 우리의 생명을 좌지우지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한 분뿐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신명기 6장 4절을 보면 '이스라엘아, 들으라. 네 주 하느님은 한 분뿐이시다' 라고 나옵니다. 유태인들이 아우슈비츠에서 600만이나 살해됐죠. 히틀러에 의해서. 그때 유태인들은 가스방에 들어갈 때 이 구절을 외웠습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하느님이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와 전혀 다르기 때문에 그 한 분뿐이신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온 마음, 온 영, 온 에너지, 온 생각이 요구됩니다.

 

그러면 이웃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처럼 사회사업하시는 분들이 종종 이러한 유혹에 빠지는데요.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해라'고 했을 때의 이웃은 나와 비슷합니다. 하느님은 나와 전혀 달라요.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분이죠. 그러나 이웃은 나와 비슷합니다. 그런데 보통 우리가 이웃을 말로는 사랑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자기의 소유물로 삼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생색을 내지요. 잘사는 나라들이 가난한 나라에 무엇을 줄 때, 옛날 우리 천주교회에 구호물자들을 줄 때, 얼마나 생색을 냈었는지요. 가난한 사람들,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봉사하고 있다는 것을 얼마나 떠들어댔습니까. 한국의 나병 환자들 사진을 사방에 붙여놓고, 제가 방학 때 구라파 어느 나라에 갔더니 한국엔 온통 나병환자밖에 없느냐며, 악수하는 것조차도 꺼려했었습니다. 주는 사람이 그렇게 생색을 내거든요. 우리 보통 사람들끼리라도 '내가 너한테 이만큼 해주었으니 너는 내 말을 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미국이 그랬죠, 과거에 그렇게 많은 돈, 생명까지 우리를 위해 바쳤죠. 그러면서 '너 우리 말 안 들으면 재미없어'하는 식으로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잘났건 못났건, 지식이 찼건 없건, 가난하건 부자건 상관이 없이, 이웃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않고 내 밑으로 종속시키려는 그런 유혹이 특히 시설에서 많이 생겨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때때로 듭니다.

 

이제 그 율사의 대답을 들어봅시다. '하느님인 주님을 네가 사랑할 것이다‘. 즉 미래시제입니다. 그러나 사랑이란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사랑할 것이다'가 아니라 '지금 당장 시작해서 네가 계속해서 온 마음과 온 힘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너는 살고, 그렇지 못하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랑이란 미래에 올 사랑이나 과거의 사랑이 아니라, 현재적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율사의 질문, '내가 무엇을 행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물려 받겠습니까?‘로 돌아가 보면, 예수께서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 '네가 이런 저런 행동을 하면 영원한 생명을 물려받을 것이다'라고 대답하시지 않으시고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었느냐?’고 반문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오히려 예수닝이 점수를 매깁니다. 처음에는 율사가 점수를 매기려고 했거든요. 예수께서는 '올바로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모든 것을 다 잘 아는데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아는 대로 행하시오. 그러면 당신은 살게 될 것입니다.‘ 즉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지금부터 사랑하면 당신은 삽니다'라고 하십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은 이승의 삶이 끝나고 난 뒤 나중에 영원한 왕국을 물려받는다' 라고 대답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하시오. 그러면 당신은 살게 될 것입니다' 즉 '지금부터 살게 된다'고 하십니다. 영원한 삶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으십니다.

 

그러나 율사는 자신을 정당화시키길 원하면서 예수께 또 질문을 합니다. '나는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 즉 말하자면 '누가 나의 이웃이라는 카테고리에 들어옵니까?‘ 라든 질문을 합니다. 고향이 같다든가, 친척이라든가, 같은 학교를 나왔다든가, 우리는 그런 것을 많이 따집니다. 한국은 정치색이 너무 강해서, 정치가 사람들의 마음을 너무 황폐하게 합니다 가령, 어느 지역에서 어느 정당 대표의 욕을 하면 쫓겨날 수도 있고 자칫하면 큰 화를 입을수도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참으로 이상합니다. 같든 민족인데도 50년 동안이나 서로 원수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이북에서도 평안도와 함경도가 서로 또 그렇게 앙숙이라나요. 왜 이렇게 됐는지요. 그러니까 말하자면 나하고 동족이라야만, 나하고 같은 학교를 나왔어야만, 그런 사람만이 나의 이웃이다. 이 사람은 여전히 지식의 포로입니다. ’누가 나의 이웃이라는 카테고리에 들어옵니까?‘ 라는 질문에 예수님은 뭐라고 답하십니까? 예수님은 능청맞습니다. 그 사람의 질문에 대해서 엉뚱한 이야기를 합니다. 이야기란 나 아닌 그, 혹은 그들, 여기 아닌 저기에서, 지금이 아닌 옛날 옛적에 일어난 일들에 관한 것이라서 대단히 큰 힘을 지닙니다.

 

이북체제가 저렇게 유지되는 것도 사실은 이야기로 유지되는 것입니다. 저는 초저녁잠이 많아서, 9시 뉴스를 보려면 아주 졸린데도 그 앞의 연속극이 있기 때문에 그래도 참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가만히 관찰해 보십시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드라마가 전부 바뀝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그렇게 타고났어요. 이야기의 힘이라는 것은 대단합니다. 그래서 세계의 문학작품이나 영화나 연극, 이런 멋들이 사실 사람들의 정신을 사로잡고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예수님은 이야기꾼입니다. 굉장히 이야기를 잘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이야기하시는지 한번 보십시오.

 

'어느 한 사람이 …‘ 이름도 성도 국적도 없어요.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왔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공간이 거기에 제시됩니다.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그러니까 여기서 '내려왔다'는 표현을 쓴 것은 지리적인 이유에서입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900m, 예리코는 해저, 그러니까 지중해보다 400m가 낮습니다. 전부 합쳐서 1,300m죠. 그래서 이런 표현이 쓰인 것입니다. 험한 길을 내려오고 있었는데, 그가 그만 강도들의 손에 떨어졌습니다. 갑자기 강도들이 나타나서 그의 옷을 벗기고 매질하여 반쯤 묵여 놓고 떠나갔습니다. 그런데, 절대로 의도적으로 그리로 간게 아닙니다. 어떤 제관 한 사람이 그곳을 지나갔습니다. 그 사람이 길을 내려가고 있었는데 쓰러져있는 그를 보고 피해서 길 건너편으로 지나갔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레위 사람도(제관이 사제라면 레위는 부제 정도 됩니다) 우연히 그 길을 지나다가 그를 보고 피해서 길 건너로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이 사마리아 사람은, 가까이 다가가서 그를 보고 단장의 아픔을 느낍니다. 보통 '가엽게 여겼다'로 번역을 하는데, 그리스어로는 '단장의 아픔'이라고 합니다. 옛날에 어떤 원숭이의 새끼를 사냥꾼들이 잡아다 배에 태워 가니까, 그 어미가 새끼를 구하려고 막 따라가서 나루터에 내리려하는 그물을 덮쳤답니다. 그런데 사냥꾼들이 그 어미의 배를 갈라보니까 창자가 다 끊어졌더랍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이 그렇다하여 '단장'이라는 표현이 생겼답니다. 그리스말로도 똑같은 표현입니다. 그래서 그는 접근을 합니다. 접근해서 그 사람의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로 응급치료를 합니다. 그리고 그는 상처를 싸매줍니다. 붕대로 감습니다. 이렇게 이 사람의 행동이 자세하게 묘사됩니다. 그 다음에 그 사람을 자기 짐승에 태웁니다. 그리고 자기는 걸어서 완전히 치료받을 수 있는 곳으로 그를 데리고 갑니다. 다음날 자기 돈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 여관 주인에게 줍니다. 마태복음 2O장 2절을 보십시오. 포도원 일꾼이 하루 종일 일하면 한 데나리온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두 데나리온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자기 돈과 시간도 이웃을 위해서 아끼지 않습니다. 자기의 모든 수고도 아끼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 계획도 포기합니다. 전적으로 포기한건 아니겠지만요. 여행을 하고 있었으니 무슨 목적이 있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 사람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친히 강도 당한 사람만을 위해서 자기의 시간, 자기의 수고, 자기의 돈까지 아끼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인숙 주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을 돌보아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그것을 갚아드리겠소.' 이렇게 이웃을 끝까지 책임집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21세기에 한국 가톨릭 교회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시다. 불우한 이웃, 소외된 사람을 위해서 끝까지 책임질 줄 아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여기 강도한테 맞아서 반쯤 죽은 사람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무 것도 모릅니다. 이 사람의 종교가 뭔지, 이 사람의 이름이 뭔지, 그가 어느 학교를 졸업했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가 인류라는 대가족에 속해 있는 인간이라는 점입니다. 짐승이 아니라 신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입니다.

 

독일 성서학자들 중엔, '이 사람은 유태인이다. 보아라, 사마리아인이 얼마나 마음이 넓은가? 자기 원수 나라에 와서 유태인을 이렇게 끝까지 돌봐줬으니'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텍스트를 아무리 읽어봐도 이 사람이 유태인임을 알 수 있는 부분은 없습니다. 아무리 눈뜨고 봐도 이 사람은 그냥 인간일 뿐입니다. 결국 여기에는 분명히 예수님의 보편사상이 드러납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그의 국적, 그의 성별, 그의 사회적인 계층, 그의 종교를 따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을 보십시오. 제관, 레위 사람들, 이 사람들은 아주 합법적인 종교인들입니다, 물론 사마리아인도 종교인이긴 합니다. 그의 종교는 물론 다르지만요. 그런데 결과적으로 말하면 이 제관과 레위 사람은 둘 다 강도와 비슷합니다. 반쯤 죽여놓았으니까, 이걸 그대로 놔두면 이 사람은 죽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이렇게 끝까지 이웃에 대한 책임을 졌습니다.

 

자, 이야기가 이제 끝이 났습니다. 이야기를 마치고 예수님이 또 율사를 시험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세 사람 가운데 누가 강도 맞은 사람의 이웃입니까' 라고 묻습니까? 아니죠. '누가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고 묻습니다. 이 율사는 지식의 포로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께 '누가 나의 이웃인가 내 이웃을 정의해 보라'고 주문합니다. 사람들은 종종 '불구자, 나병환자, 불우한 이웃, 혹은 감옥에 가 있는 사람들이 나의 이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누가 강도맞은 사람의 구체적인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를 물으십니다. 이웃사촌이란 말이 있죠. 똑같은 얘깁니다. 친척이라고는 하지만 아무런 도움도 안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 이웃은 나의 사촌처럼 나를 도와줍니다. 그러니까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에 예수님은 '이 세 사람 가운데 누가 구체적으로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합니까'라고 되물으십니다.

 

누구나 다 '사마리아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했겠죠. 그런데 이 율사는 아주 똑똑한 사람입니다. 그가 이단이기 때문에,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라고만 대답합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잘 대답했습니다. 가서 당신도 그와 같이 하시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회에서는 모든 법이 돈 많고 권세있고 지식있는 사람 위주로, 그 사람들에게 편리하고 이익이 되도록 만들어집니다. 일례로 신체장애인들은 대학입학조차도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사회적 제도장치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법이 안 되어 있는 것입니다. 법이란 힘센 사람들 편입니다. '무전유죄, 유전무죄' 바로 그렇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무엇보다도 중대한 것은 사람들의 정신 속에 이와 같이 이웃에 대해서 끝까지 책임지는 정신을 불어넣는 것입니다. 정신개조를 하지 않으면 복지사업을 아무리 해도 비전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 주님의 어머니이십니다. 마니피캇(루가 2,46-56)을 한번 보십시오. 마니피캇의 비전은 '유전유죄, 무전무죄'를 얘기합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서 마리아에게 '당신이 아들을 잉태할 것이다'라고 합니다 마리아가 '내가 남자를 모르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하자 '걱정하지 마라, 하느님이 다 알아서 하신다. 네 친척 엘리사벳이 임신한지 몇 개월 되었다'고 알려줍니다. 마리아는 기뻐하며 엘리사벳을 방문합니다. 엘리사벳이 '당신은 참 복된 분이다. 당신은 믿음이 있기 때문에 복되다'고 인사합니다 그러자 마리아가 이렇게 읊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기리고 …‘

 

제일 먼저 '나'라는 말이 나옵니다. 내 영혼, 아까 영혼에 대해서 잠시 얘기했죠. '그분' 즉, '주님'과 '나'는 서로 통합니다. 그분과 나 사이에는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집니다. 그분과 나 사이는 마치, 제가 제 조카손녀에게 꼼짝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나'와 '그들'은 서로 통하지 않습니다. 커뮤니케이션이 안됩니다. 그이고 '그분‘ 즉 '주님'과 '그들'도 서로 커뮤니케이션이 안됩니다.

 

그러면 이 카테고리에 누가 속하는지 한 번 봅시다. '내 영혼‘, 내 영혼이 기리는 사람은 누구인가. '내 영혼이 주님을 기린다. …’ 그분은 주님입니다. 내 영혼이 그분을 기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를 세상에 내신 주인 양반이기 때문에, 내 영이 말합니다. 우리말에는 '영'이란 단어에, 바람이란 뜻이 없지요, 그런데 서양말에는 다 이게 바람이란 뜻입니다. 'Spirit', 가령 영어에 'inspiration‘은 '바람을 불어 넣는다’, ‘expiration'은 ’숨을 거둔다‘, ’aspiration‘은 ’먼지를 흡입한다‘, 공기청소기를 영어로 aspirator라고 하거든요. 히브리말도 똑같은데 입김이란 소리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말로 이 '영'이란 단어를 제일 정확하게 번역하려면 '신바람'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내 구원자'라고 합니다. '그분‘, 아까는 '주님'이라고 했죠. 뿐만 아니라 '그분'은 '하느님'입니다 '그분’, '주님‘, '하느님’, '구원자‘, '하느님을 반겨서 내가 신바람이 났다’ 그 소리죠. 성모님이 지금 신바람이 난 거예요.

 

'여종의 비천함을 굽어 보셨다. …' 종이라면 자유인이 아닙니다. 어찌하여 내 영혼이 주님을 이렇게 기리고, 왜 내 영이 내 구원자 하느님을 반겨서 이렇게 신바람이 났는가? 옛날에는 임금님이 신하의 손을 잡으면 어떻게 합니까? 비단으로 감습니다, 임금님이 한 번 화를 내면 신하의 목숨이 왔다갔다합니다. 이렇게 힘이 있는 사람하고 힘없는 작은 사람하고는 서로 통합니다. 이제 비전이 제시됩니다. 21세기 한국사회에서 우리가 누구를 위해 일해야 하는지가 드러납니다. 보통 할아버지가 손녀한테는 꼼짝을 못하는데, 할아버지하고 손녀는 이해관계가 전혀 없지만 아들은 다릅니다. 항상 큰 사람과 작은 사람은 서로 통합니다.

 

이제 그 크신 분을 생각해 보세요. 어떤 분입니까 '주님‘, '구원자’, '하느님‘, 그런 분이 작고 비천한 '여종'을 돌보셨습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신바람이 난 겁니다. 왜 자기가 그렇게 신바람이 났는지 그 이유가 설명됩니다. '보라, 이제부터 만세가 …' 여기에서 시간이 제시됩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노래를 하는 이 순간부터 만세가 나를 복되다 할 것이다.' 만세 즉, 세세대대입니다. 거기엔 우리도 포함됩니다. '나를 복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지금부터 시작해서 이 인류의 역사가 끝나는 날까지, 나를 복되다 하리라, …' 그 이유는 '권능을 떨치는 분이 큰 일을 내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을 했는가? 그 내용에 대해서는 말이 없습니다. 물론 그 앞의 이야기를 보면 그분이 크신 분의 아들을 잉태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이것을 큰 일이라고 합니다. 과연 큰 일이죠. 마리아의 이와 같은 순명 내지 신앙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그래서 세세대대로 권능을 떨치는 분, 그분의 이름은 거룩합니다. 그분은 우리와 전적으로 다르신 분, 거룩한 분입니다. '거룩하다'는 단어의 뜻은 '분리되다' 라는 뜻이죠. 거기에는 섞임이 없습니다. 순수합니다.

 

마니피캇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전반부, 즉 47절에서 49절까지를 종교적이고 개인적진 문제로, 그 다음의 50절부터를 사회적인 문제로 보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모두 하나로 꿰뚫어 보아야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분의 자비가 누구에게 미치는가? 당신을 두려워하는 이들,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이들,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 우상을 숭배하지 않는 사람들, 한마디로 당신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다 마리아 편에 섭니다. 이 마리아 편에 하느님의 자비가 넘쳐 흐릅니다. '그분이 당신 팔로 힘을 행사하시어 심사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다. …'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교만한 자들과는 상대도 하시지 않습니다. 권세 부리는 자들, 세도가, 이런 사람들은 권좌에서 내치십니다. 하느님이 역사를 그렇게 움직이십니다. 비천한 자들, 이들은 성모님 편입니다. 이 사람들은 하느님이 들어올립니다. 권세 있는 사람은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비천한 사람은 들어올리십니다. 그러면 권세 있는 사람들과 비천한 사람들이 전쟁을 했습니까? 아닙니다. 투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움직이시는 분은 그분입니다. 그분이 그렇게 하십니다.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렸다. …' 배고픈 사람도 성모님 편입니다. 이북에 있는 모든 우리 동포들은 굶주리고 있습니다. 성모님 편이기 때문에 우리가 도와주어야 합니다, '부요한 자들은 빈손으로 보냈다. …' 그러면 세상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부자들이 서로 커뮤니케이션을 합니까? 부잣집 문턱이 높다고 하죠.

 

'그분이 자비를 기억하시어 정녕 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다. …' 이제 이스라엘의 역사가 언급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즉 성모님은 이스라엘 편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됩니까?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는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토록 미치리라, …’ 아브라함이 여기 나옵니다.

 

21세기는 이렇게 마니피캇의 흐름으로 진행될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확신합니다. 만일 한국이 크리스찬 정신으로 무장된다면 21세기는 이렇게 역사가 미니피캇의 정신으로 진행될 겁니다. '그분‘, '크신 분’과 '작은 사람'들과는 서로 통합니다. 세상의 상대적으로 크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 크신 분과 결코 서로 통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절대적으로 크신 분은 상대적으로 큰 사람들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합니다.

 

결론으로 21세기 한국 가톨릭 사회복지사업의 정신 및 영성은 이미 살펴 본 성서 말씀과 같이 한국 교회가 누구의 편에 서느냐가 제일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한 편을 들어서 싸우라는 말이 아니라 적어도 약자와 빈자는 성서의 논리로도 우선시 될 권리가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작은이들 편에 서서 끝까지 이웃으로 남아 있어야만 진정한 교회의 사회복지사업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출처 : 가톨릭사회복지위원회 전국연수회 자료집, 서인석 신부(대구효성가톨릭대학 교수) / 사이버까리따스센타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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