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주간 목요일 - 홀수 해
히브리서 3,7-14 마르코 1,40-45
2015. 1. 15. 이태원
주제 : 하느님을 대하는 자세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은 여러 가지입니다. 내 몸을 벗어난 것이라서 내가 영향을 받을 것을 돈이라고 한다면, 내 몸과 함께 있어 내가 이리저리 관리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라면 건강을 첫째로 꼽을 것입니다. 2가지 말씀드린 것 중에서 우리가 어떤 것을 중요하게 여기든 그것은 우리의 삶에 큰 영향을 남깁니다.
지금 말씀드린 것은 둘 다 신앙에 관련된 요소는 없습니다. 신앙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우리 몸에 관련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신앙의 입장에서 해석할 수는 있습니다만, 그것을 다른 문제로 생각한다면 삶의 모양은 또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대하는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요? 신앙의 입장에서 여러 가지 방법과 자세를 말할 수 있습니다만,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한 가지 표현을 들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다”는 표현입니다. 이렇게 말한 나병환자였던 사람은 참으로 교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삶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바람을 가진 것이 아니었으니, 몸이 깨끗해지도록 하신 예수님께서 하신 명령을 제 맘대로 해석하고 지키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보다는, ‘스승님, 제가 이러저러한 병에 걸려, 하느님께 충실하게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간절히 청하오니, 제 병을 고쳐주시어 제가 하느님을 모시고 충실하게 살도록 해주십시오!’하고 말했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렇게 말하면 그 내용이 너무나 긴 것일까요?
사람이 하느님을 대하는 자세는 여러 가지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른다고 할 수는 있어도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는 모습도 있을 것이고, 온전히 내 생각과 뜻인데도 그 일에 대해서 하느님도 똑같이 판단하실 거라고 우리가 우길 수도 있습니다. 어떤 모양이 낫겠습니까?
인간의 뜻을 하느님의 것인 양 대하는 사람이라면, 그 자세에 맞는 결과만 얻을 것입니다. 시편에 나오는 말씀을 ‘히브리서의 저자’가 인용하여 설명하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안식처에 들어갈 수 있는 합당한 자세는 멀리하고 욕심만 잔뜩 드러낸 사람들’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거나 대하면서 마음과 생각을 완고하게 갖는다는 것은 어떤 것이고, 그에 상대적으로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그 구별은 다른 이의 설명이 필요한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아니 다른 사람의 설명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의 자세이니, 그것이 내 것이 되지 않는다면 별로 의미가 없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삶에서 완고함을 드러내는 것은 ‘죄의 속임수에 넘어가고 거기에 빠질 때’라는 말의 의미는 어떤 것이겠습니까? 내 삶은 그 기준에서 얼마나 멀리 혹은 가까이에 있는지 살필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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