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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죽은 이를 위한 기도와 천주교식 장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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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11-21 ㅣ No.472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죽은 이를 위한 기도와 천주교식 장례


오래 전에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가 식사를 시작할 때 연옥 영혼이 우리의 밥상 위에 와 앉는단다. 그러다가 식사를 다하고 나서, 우리가 식사 마침기도를 하지 않고 일어서면 그 영혼이 울면서 떠난단다. 그 뒤로 바빠서 얼렁뚱땅 식탁에서 일어설 때나 혹은 비신자들과 밥을 먹어서 격식을 찾기 어려워 속으로 ‘하느님, 땡큐(Thank you)!’라고만 할 때는 늘 마음이 켕긴다.

가톨릭 신자의 식사 마침기도는 “세상을 떠난 모든 영혼들이 하느님의 자비로 영원한 안식을 얻게 하소서.”로 끝맺는다. 이는 매우 특이한 삶의 방식이다. 매일, 그것도 하루 세 번씩이나 밥상 앞에서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한다. 더욱이 내가 본 적도 없는 죽은 이들 전체를 위해 기도한다. 이것이 가톨릭 정신의 대표적 특징의 하나라 하겠다. 사람들 사이의 형제애는 살아 있는 사람들 사이에만 그치지 않고, 산 이와 죽은 이 사이에도 통공(通功, communication)을 이룬다. 가톨릭 신자들은 ‘모든 성인들의 통공’을 믿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가톨릭은 한국에서 박해기간 100년도 더 넘게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내 놓았고, 신앙을 부인하고 교회를 떠났다. 죽은 이들을 그렇게 다정히 생각하는 한, 신자들이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비난받았던 일은 어불성설일지 모르겠다. 가톨릭에서는 죽은 이들에 대한 배려와 효성의 표현 방식이 유교와 다를 뿐이었다. 일반 사회에서는 불교신자들에게 제사지내지 않는다고 하지 않고, 제사를 절에다 모셨다고 하지 않는가? 불교도들이 비록 유교식의 제사를 지내지는 않지만, 불교식으로 죽은 이들과 교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톨릭 신자들은 죽은 교우의 시신을 “오, 주 예수의 지체요, 성령의 궁전”으로 특별히 소중하게 다루고 있다. “교우의 시신은 땅에 심는 아름다운 씨앗같이 보기”를 제안하며 상장(喪葬) 예절도 정중하고 엄격하다. 그래서 박해시대 살아남은 신자들은 순교자들의 시신을 묻어주는데 목숨을 걸었다. 기해박해 당시 앵베르 주교는 박해기간에 남명혁 등 신자 9명이 서소문 형장에서 참수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시신은 처형된 장소에 3일간 버려져 있었다. 주교는 이 죽음을 ‘그들의 영광스러운 제사’라고 하면서 이른 새벽, 어려움을 무릅쓰고 그 시신들을 거두었다.

“나는 고상하고 행복한 우리 유럽에서와 같이 그들에게 귀한 옷을 입히고 비싼 향료를 발라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가난하다는 이유 외에도 이 거룩한 일에 헌신할 교우에게 너무나 큰 위험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남녀별로 그들에게 각각 옷을 입히는 데 그쳤고 그런 다음 시신을 묶어 거적으로 쌌다. 이제 우리는 하늘에 많은 보호자를 가지게 되었고 내가 바라는 것과 같이 언제이고 조선에 천주교가 성행하게 되면 국가적으로 정중히 유해를 모시게 될 것이다.”

앵베르 주교는 이러한 글을 썼으나, 그 자신의 유해도 구덩이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교회는 순교자들의 시신을 여러 군데로 옮기면서 현재의 위치로 모셔왔다. 가령 1868년 울산 장대에서 순교한 허인백, 이양등, 김종륜의 유해도 여러 번 이장되었다. 이들이 치명한 직후 허인백의 부인은 그 시신들을 형장근처에 가매장했다가 이후 세 사람의 연고가 있던 진목정에 합장하였다. 1932년 후손들은 이들을 다시 대구 월배 감천리 천주교 묘지로 모셨고, 1962년 대구가톨릭청년회는 이들을 그 묘지 성모상 앞의 석함 속에 안장했다. 그리고 1973년 이들은 대구 복자성당에 안식의 터를 마련했다. 순교자 유해의 끝없는 여행이다. 이는 모두 순교자 유해에 대한 신심의 표현이며, 현재에도 순교자와의 대화를 지속하기 위해서였다.

종교의 자유가 오자 신자들이 가장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행한 일 중 하나는 성대한 장례의식이었다. 신자들은 외인들의 장례에 비해 초라하지 않도록 준비를 갖추는데 최선을 다했다. 거리를 지나가는 가톨릭 장례의식은 외교인들에게 어느 집이 신자 가정인지를 드러내었을 뿐 아니라 그 자체로 전교가 될 만큼 낯선 충격이었다.

경상도 지역 교회설립의 기초를 놓았던 로베르(金保錄, 1863~1922) 신부는 1900년 대구에서 김경화의 모친 장례식을 거행했다. 로베르 신부는 관을 성당에 안치한 후에 미사를 드리고 ‘천당에서의 자유’ 등과 같은 성가를 불렀다. 장례행렬이 나갈 때 신부는 4인용 가마를 타고 마을에서 1시간 30분이 걸리는 장지까지 동행했다. 중백의 속에 검은 수단을 입고 머리 위로 십자가를 들었으며 복사들도 대동했다. 주일학교 어린이 성가대 52명이 행렬을 지어 마을을 가로지르면서 죽은 이를 위한 기도 De Profundis(주여 나 깊고 그윽한 곳에서)와 연도를 선창했고 신자들이 응송 했다. 이 장례행렬에는 가마 15대, 말이 18필 동원되었다.

물론 그 이전부터 외교인 사이에서는 가톨릭 장례에 대한 평판이 있었다. 신자의 장례 행렬을 구경하던 외교인들은 쑤군거렸다. “천주교인들은 일단 교인이 되면 부모도 공경하지 않는다고 하던데, 알고 보니 우리들보다 더 정성스럽게 장례를 지내더라. 천주교인들은 친척관계가 아닌데도 얼마나 서로를 돕는지 모른다. 내 장례식 때도 이렇게 해 줄까?”

당시 신자들은 외교인들의 장례도 힘닿는 데까지 치러주었다. 특히 1886년 무렵 경상도에는 콜레라가 맹위를 떨쳤다. 한 집에서 몇 명씩이나 죽었고, 가족이 몰살한 경우도 많았다. 이렇게 되자 장례를 치를 손이 부족해 사람들은 시체를 길에다 내다 버렸다. 시체에는 개나 새떼들이 몰려들었다. 현감이 시신의 유기를 금하는 엄명을 내렸고, 명을 어기는 자는 태형에 처해졌다. 이때 안의(安義)지방 전교회장 최 아우구스티노는 열의를 가지고 환자들을 보살폈다. 그는 외교인 집안에도 불리어 갔으며, 죽은 이들을 모두 천주교식으로 장례를 치렀다.

이러한 장례행렬은 바로 선교로 이어졌다. 특히 대구 신자들은 장례 봉사로 유명했고, 그 성과도 컸다. 또 마산포 본당의 베르몽(Bermond) 신부도 신자들이 장례를 통해 전교를 잘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수류본당의 뤼까(Lucas) 신부는 몇몇 교회 젊은이들이 따로 임종대세를 주고, 이들이 죽은 다음 장례까지 치러준다고 했다. 그도 이를 실질적인 전교 방법의 하나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교구장 드망즈 주교도 다음과 같은 신부들의 보고를 인정했다. “조상 숭배를 최우선으로 하고 있는 조선에서는 그리스도교적 장례식이 비신자들에게 가장 힘 있는 전교방법이 되고 있다. 이러한 장엄한 장례식을 치르고 난 다음에는 그때마다 우리 신자들의 장례식에 참례한 사람들이 천주교를 믿겠다고 스스로 결정하고 있다.”

장례는 많은 돈이 들어가는 행사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러한 장례업무의 편의를 위해 이를 담당하는 기구를 조직하여 운영했다. 로베르 신부는 1880년을 전후하여 대구 지역에서 무료장례식을 진행시켰다. 이는 서울지역보다 앞서 실천되었던 일이다. 서울지역의 경우에는 블랑 신부가 1882년에야 인애회(隣愛會)를 설립해서 무료장례를 수행했다. 무료장례식은 신앙이 자리를 잡으면서 각 성당내의 조직적인 활동으로 자리 잡아갔다. 이것이 오늘날 연령회의 봉사적 전통을 축적하기 시작한 일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한국전통사회에서 양반들은 부모상을 당하면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했다. 시묘살이 때 사람들은 삶의 의미에 대해 보다 깊이 철학하게 되었을 것이다. 천주교는 11월 한 달을 위령 성월로 살려내어 평생 부모를 생각한다. 특히 연옥 영혼에 대한 배려는 자기 친족을 넘어 모든 죽은 이들에게 미치고 있다. 오늘날의 교회는 한국교회사의 특수상황에서 이 전통을 잘 설명할 필요가 있다.

특히 우리 교회는 박해시대 내내 제사문제 때문에 불효 집단으로 매도되었다. 이 때문에 교회는 제사 대신에 상례에 더욱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현재 우리사회에서 천주교가 표시하는 효의 태도, 죽은 영혼에 대한 배려를 잘 이해하고 있는지 질문해 본다. 더불어 외교인까지 도왔던 무료장례식 활동을 상기하면, 우리의 애긍이 신자 안에서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선조들의 모범을 확인하게 된다. 사람이 슬플 때 함께 하는 일이야말로 사랑의 절실한 실천이 아닌가?

[월간빛, 2011년 11월호,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관덕정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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