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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1995년 볼리비아 해외선교 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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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10-14 ㅣ No.609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내가 네가 되었구나!” - 1995년 볼리비아 해외선교 개막

 

 

10여 년 전, 영남지역에서 순교한 선교사들의 고향을 찾아간 적이 있다. 다블뤼 주교가 영세한 성당에 들어섰을 때, 주변에 있던 한 부인이 자기 아들도 다블뤼 주교가 영세한 세례대에서 영세를 했다며 흥분에 겨워 말했다. 기해박해 때 순교한 샤스탕 신부의 친척 후예 중 한 명은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샤스탕 신부가 시성되었다는 사실에 신앙을 되찾았다. 이렇듯 그 선교사들은 우리 땅에서 그들의 생애를 바쳤지만, 그들이 이룩한 사랑은 다시 자신들의 후손과 조국을 덥히고 있었다. 이렇게 세계교회사는 서로 이어간다.

가톨릭은 세계의 다양한 문화와 함께 하는 종교이다. 우리 교회사에서도 첫 신자 이승훈은 중국에서 세례를 받았다. 첫 번째 선교사로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입국했다. 그 후 한동안은 서양인 선교사들이 한국교회를 위해 봉사했다. 그러나 한국은 이미 1930년대부터 만주나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을 대상으로 선교를 시작했다. 이 전통은 1950년대에도 이어졌다. 한국의 각 교구에서는 미국이나 유럽의 교민들을 대상으로 선교에 착수했다. 그래서 1970년대를 전후하여 미국과 유럽 현지에서는 한국인 신앙공동체가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교회 설립 200주년을 전망하면서 본격적인 해외선교를 시작했다. 1975년에 한국외방선교회를 창립하여, 1981년 파푸아 뉴기니아에 4명의 첫 선교사를 파견했다. 이들 중 한국외방선교회의 첫 번째 사제인 김동기 신부는 대구출신이었다. 2011년 현재 80개국에서 792명의 한국 선교사가 활동하고 있는데, 그중 교포사목이 아닌 해외선교를 위해 파견된 교구 소속 사제는 88명이다.
 

이름도 낯선 나라로

대구대교구에서는 1991년 러시아에 사제를 보냈다. 이후 중국에도 사제를 파견했다. 그러나 이 두 나라는 교포사목적 성격을 띠고 있어, 교구의 정식 해외선교는 1995년 볼리비아에 최창호 신부가 선교사로 파견됨으로써 시작되었다. 본래 볼리비아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 선교지원을 요청했다. 잘츠부르크대교구는 자매교구인 대구대교구에 문의했고, 이때 최창호 신부가 자원했다. 그가 처음 간 곳은 브라질과의 국경지역 독일인이 교구장으로 있던 곳이었다. 1년 동안 포교현지를 살펴보고 귀국하던 최 신부는 귀국길에 산타크루즈대교구와 연결되었다. 그는 살바도르성당에서 1년 7개월 사목했다. 대구대교구는 그의 후임들로 신현욱, 서준영, 박상용, 김종률, 정황래, 장희만, 임재우 신부 등을 파견했다. 그리고 현재는 석상희, 마진우, 마석진, 김대식, 허진혁, 고영일, 연상모 신부 등 7명의 사제가 파견돼 있다. 그동안 서준영 신부는 아빠레시다 공동체를 새롭게 열었다. 그리고 산타크루즈대교구에서 임기를 마친 석상희 신부는 2011년 볼리비아 콘셉시온대목구에 성안토니오성당을 열었다.

볼리비아는 남미 대륙에서 그 심장처럼 약간 왼쪽 중앙에 있는 나라이다. 영토는 남한의 10배가 넘는데, 인구는 대구의 4배 정도이다. 고산지역이어서 일교차가 크고, 비가 적다. 언어는 공용어인 스페인어와 36개의 원주민어가 함께 사용되는 다문화 국가지만, 종교는 전체 국민의 70% 이상이 가톨릭 신자이다. 18개 교구에 주교 23명, 볼리비아인 신부 240명, 외국인 선교사 700여 명이 있다. 이중 산타크루즈는 볼리비아 최대 규모의 도시인데. 이 교구는 1605년에 시작되었다. 이러한 곳에 단일민족이라 믿으며, 단일 언어를 사용하던 한국의 대구대교구 사제들이 선교하러 갔다.

선교 사제들은 지역은 넓고 교통이 불편하여 길에서 보내야 하는 시간이 긴데다가 주일에도 일해야 하는 신자들을 찾아 나서거나, 공소를 짓는 일들을 했다. 첫 공동체인 살바도르성당에 파견된 신부들은 6년 동안 사제관, 공소 3, 직업센터 등 총 6~7개의 건물을 지었다. 외형적 건축뿐 아니라 소공동체나 반모임 등을 조직하고 1주일에 한두 번 각 공동체를 찾았다. 첫영성체 교리반, 청년견진교리반, 주일학교 등이 토대를 갖추었다. 사목 외에도 사회복지사업이나 직업교육도 한다. 자립능력을 기르도록 미용, 재봉, 컴퓨터 등을 가르치는 직업센터, 유아원, 어린이집, 장애인 복지센터 등을 운영하고 있다. ‘병원이나 학교’ 운영은 아직 어렵다. 볼리비아 선교 초기에는 개별적 모금으로 이 모든 비용을 충당해야 했다.

볼리비아 선교사는 세 명이 한 공동체를 이루고 산다. 또래 신부들이 함께 생활하면서 소중한 공동체 의식을 얻게 된다. 스페인어의 발음이 한국인에게 어렵지 않고, 또 신부들은 신학교에서 라틴어를 배웠기 때문에 6개월 정도면 입이 열린다. 볼리비아 선교사의 임기는 5년 반이었다. 언어배우는 기간 6개월, 부주임으로 3년, 주임사제로 2년을 사목한다. 임기를 마치면 귀국하게 되지만, 선교를 계속하고 싶다면 공동체를 옮겨서 생활하게 된다. 해외선교 사제는 3년에 한 번 3개월간의 휴가를 얻는다. 그들은 휴가기간에도 일한다. 휴가를 지내기 위해 귀국하는 길에 대개가 볼리비아 주교들을 모시고 왔다. 그리고 3개월의 대부분을 선교지를 위한 모금활동을 다닌다. 간혹 특강 요청에라도 응하다 보면 휴가는 끝나버린다. 또한 대구선교사들은 아미깔(라틴아메리카 한국 가톨릭선교사회)을 구성하는 초석이 되었다. 즉 이 모임은 최창호 신부가 제안했고, 신현욱 신부는 여러 해 총무로 활동했다. 아미깔에서는 매년 중남미 선교사들이 한 곳에 모여 연수를 겸하여 선교정보를 공유하면서 현지 선교활동에 실질적인 도움을 받고 있다. 현재 15차 모임에 이르고 있다.
 

미래를 사는 한국, 현재를 즐기는 라틴아메리카

사제가 부족한 곳에서 마음껏 봉사하고픈 꿈 때문에, 그리고 얼룩 없이 직접 예수님 말씀만으로 사람을 만나고 싶은 이들이 선교사를 지망했다. 선교를 떠날 때에는 한국문화의 옷을 벗고 그 나라 교회의 옷을 입어야 한다고 한다. 선교는 그들에게 한국교회의 관습을 강요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살면서 상처를 보듬어주는 일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선교사들은 처음 도착해서는 적잖이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볼리비아인들은 외향적이고 동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다. 미사도 늘 음악과 춤을 동반한 축제였다. 이는 제사적 성격이 강한 한국의 미사와는 사뭇 달랐다. 그들에게는 조용히 묵상하는 일이 어렵다. 시간 약속에도 너무나 느긋한 태도를 취한다. 그러나 그들은 쉽게 용서하며 현재를 즐긴다. 박상용 신부는 저축의 개념을 이들에게 가르쳐야 하는가를 고민했다고 토로한다. 그러나 선교사는 어느새 자신이 그들이 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네가 되어’ 스스로 변해 버린 까닭이었다. 그리고 선교사들은 이 두 다른 문화를 융합해 내고 있다.

볼리비아 선교사들을 다리로 양국 교회는 그 관계를 증진시켜 가고 있다. 거의 20년 세월을 지내면서 교구장들의 상호 방문이 이어졌다. 1999년에는 볼리비아주교회의 의장이자 산타크루즈대교구 훌리오 테라사스 산도발 대주교 일행이 대구를 방문하여 감사를 전했다. 2001년 이문희 대주교가 산타크루즈를 답방했다. 2004년에는 훌리오 추기경이 왔고, 휴가 나오는 신현욱 신부가 안내했다. 이듬해 최영수 보좌주교는 산타크루즈대교구 설정 400주년 기념미사에 참석했다. 이때 볼리비아 첫 선교사 최창호 신부가 동행하여 자신이 설립한 성프란치스코 공소 5주년 기념미사를 공동집전했다. 산타크루즈대교구의 보좌주교와 새로 개척한 콘셉시온대목구의 주교는 2011년 대구대교구 100주년 행사에 참석했다. 휴가 길에 오른 마진우 신부가 안내했다.
 
그리고 2013년 5월 조환길 대주교는 이곳을 사목방문했다. 같이 길을 나선 신현욱 신부와 서준영 신부는 볼리비아인들 속에 아직도 살아있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조환길 대주교는 확대된 한국선교사의 사목지역을 일일이 방문하고 견진성사를 집전했다. 그리고 대구대교구 사제가 세운 첫 공동체인 살바도르성당 20주년 행사를 현지인들과 함께 했다. 조환길 대주교가 콘셉시온대목구에서 봉사하는 석상희 신부의 성 안토니오성당을 방문할 때였다. 일행은 산타크루즈에서 새벽 5시에 출발하여 콘셉시온 교구청에 들려 주교와 면담하고 해질녘에야 성 안토니오성당에 도착했다. 마을 어귀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기다렸다. 주교 일행이 보이자 그들은 피리를 불고 북을 치면서 언덕 위 성당까지 행렬해 갔다. 성당 안에서 미사 참례하는 사람보다 성당 밖에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이어 환영잔치가 열렸다. 이는 1911년 베네딕토 수도원의 베버 아빠스가 조선 선교지를 방문했을 때 조선신자들이 환영했던 모습 그대로였다. 볼리비아에서는 한국 신부들의 열정과 한국식 선교방식을 높이 평가했다. 조환길 대주교는 올해 사목방문 동안 산타크루즈교구장과 콘셉시온대목구장 등 교회책임자들과 사목현안에 대해 논의했다. 특히 볼리비아 교회의 선교사 증원 요청에 따라, 우선 선교사의 임기를 5년 6개월이었던 데서 6년으로 연장하게 되었다.
 
대구대교구는 이와 같은 성공적인 선교사례를 대내외에 펼쳐 나가고 있다. 2012년에는 중앙아프리카 선교를 새롭게 시작했다. 교포사목, 해외이주민 사목 등 다른 문화와의 선교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 어떤 일을 하더라도 선교는 선교를 떠나는 당사자만의 일이 아님은 분명하다. 기도와 물질적 지원 등은 교구민의 몫이다. 그래서 그들을 ‘대구의 선교사’라고 부른다. 이 선교지를 위해 이젠 돌아온 선교사까지 힘을 보탤 것이다. 소화 데레사(1873-1897)는 기도로 선교에 동참했다. 당시 베트남이나 한국에서 순교 소식들이 들려오고 있었다. 이제 우리는 북한, 아시아, 아프리카 등의 복음화 및 복음적 복지화를 이루어야 한다. 우리 이웃의 범위는 성체를 영하는 모든 사람, 나아가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 모두이기 때문이다. (도움 : 박석재 신부, 신현욱 신부, 박상용 신부, 김성래 신부, 조광 교수, 변이순, 한 아녜스)
 
[월간빛, 2013년 10월호,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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