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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가실성당의 종과 드망즈 주교의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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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6-11 ㅣ No.751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지 않나?”

- 가실성당의 종과 드망즈(1875-1938) 주교의 위로

 

 

플로리앙 드망즈(Florien Demange, 安世華) 주교는 1898년 10월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스물 세 살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 땅에서 선교사 신부로 13년, 주교로 27년을 살았다. 그는 살아생전에 교구의 기틀을 모두 구축해 놓았다. 그는 생애 마지막 해에도 전주감목대리구와 광주지목구를 설정했다. 그는 신자 2만 6천명이었던 대구교구를 맡은 다음, 여기에서 5개 교구를 분리시키고도 현재 신자 50여만 명에 이르는 대구대교구의 초석을 놓았다. 그러나 이 거인이 감내했던 고독과 위로는 대구교구사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그를 응시하다 보면 그가 살았던 세월을 엿볼 수 있다.

 

 

드망즈 주교의 고향 생각

 

드망즈 주교는 1912년 1월 22일 아래와 같은 일기를 썼다. “9시 열차로 김천을 떠나 곧 왜관역에 도착했다. (…) 20리를 채 못 걸어 우리는 가실에 도착했다. 크게 울려 퍼지는 작은 종소리는 내게 많은 추억을 되살아나게 했다. 즉 이 종에 실린, 학교에서 오랫동안 학생들을 불러 모은 프랑스 보즈 산맥 마을의 추억이다. 부르공스 본당 신부는 이 학교가 국유화된 후 그 종을 떼어 부산의 나에게 보내 주었다. 나는 한국의 항구 도시에서 처음으로 삼종을 쳤을 때 지녔던 어린 아이 같은 기쁨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 후 좀 더 큰 종이 생겨서 나는 이 종을 가실로 보냈는데, 이제 그것을 다시 보게 되었다.”

 

드망즈 주교는 교구장이 된 뒤 겨울 공소 사목으로 경상북도 지역을 택했다. 1912년 1월 22일 이날 그를 가장 기쁘게 한 것은 가실성당의 종소리였다. 종소리에 그는 프랑스, 그리고 부산본당을 생각했다. 이 종은 교회에서 경영하던 학교 건물 앞에 걸려 있던 ‘작은 종’이었다. 그 학교가 국유화되려 하자 책임자였던 본당 신부가 종을 따로 떼어 선교사 드망즈 주교에게 보내주었다. 드망즈 주교는 이 종을 다시 가실로 보냈다. 당시 가실성당은 한옥 기와집이었기 때문에 신자들은 종을 공소 옆에 있는 감나무에 매달아 놓았다. 주교는 그 종을 다시 만나면서 사진에 담았다. 가실성당 건물이 서기 전까지 그 종은 주교가 오실 때마다 환영인사를 했을 터이다. 그 감나무는 아직도 있다.

 

플로리앙 드망즈는 1875년 로렌지방의 스트라스부르 교구에서 출생했다. 그러나 그는 그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지 않았다. 1870년 보불전쟁에서 프랑스가 참패하여 로렌지방이 독일에 할양되었기 때문에 그의 가족은 그가 태어난 이듬해 파리로 이사했다. 그는 성 루이 사립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887년 성 니콜라 소신학교에 입학했다. 플로리앙은 뛰어난 지적 능력과 열성으로 학과 면에서 우수한 성적을 올렸다. 그러나 품행성적은 저조했다. 그의 강인한 성격과 발랄한 기질이 소신학교에 어울리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여러 차례 퇴학을 당할 뻔했다. 그러나 소신학교 4학년 때 이 소년에게 변화가 일어났다. 그날은 월례 외출 날이었는데 그는 벌을 받아 외출을 금지당하고 학교 내에 머물러야 했다. 이때 훈육감독이 외출금지 학생들을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성당에서 열리는 새 선교사들의 파견식에 데리고 갔다. 플로리앙은 그 자리에서 자기도 부름 받았음을 느꼈다. 그는 ‘새 사람’이 되었다.

 

플로리앙은 1893년 7월 바칼로레아 1차 시험인 인문계 고교졸업시험을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하고 그해 10월 이씨(Issy) 대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모범적이고 경건하며 동시에 개방적이며 쾌활한 신학생이었다. 그는 1894년 바칼로레아 2차 시험인 일반대학 인문계 입학자격시험에 합격했고, 1895년 바칼로레아 스콜라철학 자격시험에 합격했다. 그는 그해 6월 7일 삭발례를 받았고, 이어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했다. 따라서 드망즈 주교는 고향 로렌지방에서 보낸 시간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고향을 많이 생각했다. 드망즈 주교의 문장 상단 좌우의 옥잠화와 중앙의 겹십자는 주교의 본 고향 로렌지방의 상징이었다. 또 드망즈 주교는 1923년 대구시의 성당못 북쪽에 성 니콜라오 별장을 지었다. 니콜라는 그가 다녔던 소신학교 이름이었다. 물론 그가 소신학교 때 거국적으로 전개되었던 모금의 경험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드망즈 주교는 1912년 프랑스인들에게 ‘신학교를 지어 달라.’는 호소의 편지를 썼다. 그때 그는 프랑스 국민이 모금을 해서 세운 파리 몽마르트 언덕 위에 있는 하얀색의 예수성심대성당(사크레꿰르대성당)을 기억했다. 이 성당은 프랑스가 1870년 독일과의 전쟁에서 패한 뒤, 국민의 사기를 고양시킬 목적으로 모금하여 세워졌다. 성당은 1876년에 기공되었고 1910년에 완성되었다. 그러니까 1912년에는 이 오랜 모금으로 대성당이 완성된 지 얼마 되지 않을 때였다. 드망즈 주교는 이 모금이 진행되던 때 소신학생이었다. 당시 바늘을 꽂은 카드가 신학생들 사이에 돌았는데, 구멍 하나 뚫는데 1/2 프랑이었다. 각자 자신의 카드에 구멍을 뚫고 그 뚫은 만큼 돈을 내는 것이었다. 소신학생들은 초콜릿 간식 몇 판을 포기하거나 버스를 타는 대신 걸었다. 또 좋은 점수를 딸 때마다 그에 해당하는 동전을 냈다. 이것은 작은 것이었지만 전 국민이 동참했다. 그렇게 해서 예수성심대성당이 세워졌다. 드망즈 주교는 이 모금운동을 프랑스인들에게 환기시키면서, 다시 조선에 신학교를 세우는데 마음을 모아달라고 부탁했다.

 

 한편, 드망즈 주교는 본당 경험이 매우 짧았다. 그는 1895년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하여 비에브르에 있는 신학교에 입학했다가 이듬해 파리에 있는 신학교로 옮겼다. 그는 1898년 6월 26일 사제품을 받고 조선으로 파견되었다. 드망즈 신부는 서울에서 조선어의 기초를 공부한 뒤 1899년 4월 부산으로 파견되었다. 동학농민혁명 때 청국군에게 살해당한 조조 신부가 1890년에 세운 성당이었다. 그는 소성당을 증축하고 성체를 보호할 수 있도록 개조했다. 그는 본당에서 행복했다. 그러나 가을에 여러 공소들을 순회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불편한 잠자리와 먹는 음식은 젊은 선교사에게 고통스러웠다. 이것은 나중에 만성장염으로 악화되었다. 그는 이런 곤경 속에서도 연구와 기도에 대해 정해진 규칙을 엄격히 지켰다. 그는 신자들 사이에서나 외교인들 사이에서나 유쾌하고 부지런히 일했다. 그러나 그의 병은 점점 깊어갔다. 결국 뮈텔 주교는 이듬해 그를 본당 주임 대신, 파리로 발령받은 샤르즈뵈프 신부 후임으로 용산대신학교 교수로 발령했다. 즉 드망즈 주교는 1899년 4월에 부산본당에 부임했다가 1900년 이임되었다. 그리고 이때 그는 경북지방의 포교중심으로, 김성학 신부가 사목하고 있던 가실성당에 이 종을 기증했던 것이다. 가실성당은 투르뇌 신부가 부임하면서 1926년 새로운 성당을 지었다. 그리고 이때 새로 만든 종을 드망즈 주교가 축복했다. 종의 표면에는 2년 전에 자신이 지어준 글이 새겨졌다. “내 이름은 안나이다. 구세주 성당의 선교사 빅토르 투르뇌 신부가 기증하여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 한국에 왔다. 나는 축성자로 아드라스의 주교이며 대구의 대목(代牧)인 플로리아노 드망즈 주교를 모셨고, 대부로는 정 안드레아를 모셨다. 많은 사람들이 내 소리를 듣고, 이 땅에 빛나는 일을 싹트게 할 것이다.”

 

교구 사료실에는 가실성당의 성당 축성 및 종 축복확인서 등 축성(축복) 관련 문서들이 있다. 이 문헌들에 의하면 왜관성당 종은 루르드의 성모 마리아, 경주 성동성당의 종은 예수의 소화데레사, 안동의 원안동성당 종은 데레사, 삼덕성당 종은 성녀 소화데레사를 주보로 축복되었다. 또한 용평성당의 종은 다두, 김천성당 종은 요안나, 제주성당 종은 파트리치오라고 불렸다.

 

 

“내 성당의 목소리”, 잃어버린 문화

 

성당의 종은 삼종을 알리고 미사시간을 알린다. 또 경사스런 일이나 긴급한 상황을 알릴 때 울린다. 주교가 사목방문을 가면 주교를 환영하는 종을 쳤다. 예를 들면, 1914년 5월 19일 주교일행이 나바위에 도착했다. 마을 입구에서부터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성당에 도착할 때까지 악대 연주도 동반했다. 저녁식사 후에 또다시 산꼭대기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본당신부가 새로 부임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델랑드 남 신부가 용평에 부임할 때였다. 그는 용평파출소 앞에 도착했다. 성당은 파출소 맞은 편으로 약 10분 정도 더 가야 되었다. 거리엔 남자들과 아이들이 마중 나왔는데, 아이들은 모두 예수성심이 그려진 종이 깃발을 흔들고 있었다. 신부가 보이자 신자들은 땅에 엎드려 큰절을 올렸다. 그리고 성당을 향해 가는 동안 계속 종소리가 들렸다. 남 신부는 “그 종소리가 마치 온 힘을 다해 저를 부르는 듯합니다.”라고 했다. 한편, 성당에서는 조종도 울렸다. 1922년 1월 30일에는 교황 베네딕토 15세의 선종을 알리는 조종이 1시간 동안 울렸다. 그 시절에는 종을 대부 대모를 세워서 축복했다. 계산성당은 한옥성당이 화재로 불탄 뒤 1903년 고딕식 성전을 새로 완공했다. 그리고 그해 뮈텔 주교의 주례로 성전을 축성했고, 종탑에 달린 두 개의 종을 축복했다. 종은 서상돈(아우구스티노)과 정규옥의 부인 김 젤마나가 기증했으므로 종의 명칭도 그들의 세례명을 따서 아우구스티노와 젤마나로 명명했다. 이러한 종의 영세식은 해방 이후에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예수성심시녀회는 포항 송정으로 가서 자리 잡을 때 해병대 포항기지 사령관인 남상휘 장군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다. 수녀원의 큰 종을 영세할 때 그들은 남상휘 제독을 대부, 정 마리아 수녀를 대모로 세웠다.

 

 일반적으로 종의 축복식에는 인근의 신부들이 함께 와서 도왔다. 드망즈 주교는 그의 생전에 여러 성당의 종을 축복했다. 그는 나바위 성당과 수류성당(1911년), 제주 신축될 성당(1913년), 전주성당(1915년), 지일성당(1916년), 마잠성당과 용평성당(1921년), 부산진성당(1921년), 대구신학교 새 종(1926년), 경주성당(1927년), 김천성당(1927년), 원안동성당(1932년), 앙샹 신부의 종(1934년), 상주성당(1937년) 등. 기도시간마다 또 천주교 행사 때마다 온 마을에 울리는 종소리는 신자들을 일깨움과 동시에 천주교의 존재에 대한 선포였을 것이다. 몇 명 안 되는 신자가 온 마을에 천주교의 행사를 알렸던 당시의 기개가 자랑스럽다. 그런데 그 많은 종은 다 어디로 갔을까? 일제시대부터 종소리에 대한 시비가 있기도 했다. 1915년 진주성당의 라크루 신부는 일제에 의해 삼종을 금지 당했다. 화재를 알리는 종소리와 혼동하기 쉽다는 이유에서였는데 이는 곧 해명되었다. 성당 종의 최대 위기는 일제 말기 공출이었다. 신자들은 이 때문에 종을 내려 숨기기도 했다. 이때 계산성당 젤마나 종도 공출 당했다가 해방 이후 다시 만들어졌다. 그러나 6·25 이후 우리사회에는 성당의 종소리가 점차 사라져 갔다. 현재까지 종탑이 있는 성당도 탑이 너무 오래되어 위험하다거나 종을 칠 사람이 없어 그대로 모양만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다. 왜, 누구를 위하여 그 많은 종은 울리지 않나?

 

1936년 6월 11일 사람들은 계산성당 정면에 선교사 입국 100년과 교구설정 25년을 기념하여 십자고상을 세웠다. 드망즈 주교는 조선인 사제들이 교구사목을 온전히 담당하게 되는 때 신자들이 이 십자가를 보면서 교구 초창기에 선교사들이 수행한 역할을 기억하기를 기원했다. 드망즈 주교는 그 이듬해부터 아프기 시작하여 1938년이 들어서자 선종했다. 당시 그는 자신의 세기가 끝나가고 있다고 느꼈는지 모른다. 아무튼 주교좌계산성당에서는 아직도 종소리가 울리고 있어, 그의 기원에 답하고 있다. 황사영은 강완숙을 이렇게 평했다. “강완숙은 위로 신부님을 받들고 아래로는 신자들을 접하기를 바르고 정직하게 했다. 그가 강론으로 남을 분발시키는 것은 마치 종을 치면 종소리가 따르는 것과 같았고, 열렬한 사랑으로 남을 끌어들이는 것은 마치 땔나무에 불을 지피는 것과 같았다.” 각 성당마다 강완숙같은 신자를 부르는 종소리가 저녁 해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울려 퍼지면 좋겠다.

 

[월간빛, 2016년 6월호,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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