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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안중근 가문의 독립운동 기반과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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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07 ㅣ No.824

안중근 가문의 독립운동 기반과 성격*

 

 

1. 머리말

 

안중근 가문은 한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 독립운동을 벌였다. 그들은 일제 침략자의 압제와 사슬에서 벗어나 근대적인 자주적 민족국가를 건설하고자 갖은 노력과 희생을 아끼지 않았다. 이를 위해 그들은 국내외에서 그야말로 필설로 형언하기 힘든 온갖 고난을 겪어가며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실로 안중근 가문은 한국 근현대사에 유의미한 족적을 남긴 수많은 가문 중에서 가장 선도적이며 모범적인 역할을 보였다고 평할 수 있다.

 

안중근 가문의 독립운동은 반외세 · 반봉건을 시대적 과제로 삼았던 한국 근대 민족운동사의 축소판이라고 평할 만하다. 그들의 독립운동은 국가와 민족의 위기를 주체적으로 극복하려는 결연한 애국심과 신앙심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또한 국가와 민족이 직면한 위기의 정도에 비례하여 투쟁과 방략의 강도와 성격을 단계적으로 변화 · 발전시켜 나간 특징을 보였다. 그리하여 안중근 가문은 외세의 압제에 시달리던 일반 민중에게 커다란 등불이 되었으며, 장차 도래할 민족해방의 그날에 대한 무한한 기대감을 심어 주었다.

 

기왕에 나온 안중근 가문 연구는 그 가문 내에서 가장 비중 있는 인사인 안중근의 생애 · 사상 · 활동을 다룬 것이 거의 대부분이다.1) 이 연구들은 안중근의 사상형성 및 민족운동 참여과정, 구국계몽운동과 항일의병운동, 정치사상, 同義斷指會의 결성과 이등박문 포살의거, 동양평화론, 일본 및 서양 인식, 천주교 신앙과 교단과의 관계, 안중근 의거에 대한 국내외 반응, 연해주에서의 활동상, 러시아와 일본의 안중근 신병 인도 문제, 안중근의 옥중 공판활동과 문필활동 등등 많은 유익한 사실들을 알려주고 있다. 이외에 안중근의 부친과 동생들 및 조카들의 생애와 활동을 사례별로 다룬 연구들,2) 한말부터 제1 공화국 직후까지 안중근 가문이 벌인 독립운동과 건국 · 통일운동을 개괄한 연구들3)은 안중근 가문의 활동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그러나 기왕의 안중근 가문 연구는 그 가문 인사들에 대한 개별적 인물 연구가 대부분이다. 즉, 안중근을 비롯하여 그의 부친 · 동생 · 조카들의 생애와 활동 및 사상을 개인별로 다룸으로써 연구 경향의 편향성을 드러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안중근 가문이 벌인 독립운동을 개괄한 종합 연구가 충분히 이뤄지지 못한 실정이며, 또 안중근 가문이 어떤 배경과 기반 하에서 독립운동을 벌여나갔는가 하는 중요 문제에 착목하지 못했다.

 

안중근 가문이 한국근대사의 전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데에는 무엇보다도 일제의 한국침략과 한국민의 저항의식이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들이 50년간에 걸쳐 독립운동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시대적 배경 외에도 그 가문에 내재된 특수한 요건들이 필요하다. 그러한 요건으로는 가문전통 · 인적자원 · 경제력 · 군사력 · 사상성(신앙심과 애국사상) · 활동무대 · 지지세력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중에서 안중근 가문에 뚜렷이 드러나는 것은 가문전통과 경제력과 인적자원과 투철한 사상성이었다. 따라서 안중근 가문이 언제 어떻게 이러한 요건들을 갖추었는가 하는 것은 그들이 한국 근현대기에 보여 준 활약상을 구조적 · 체계적으로 이해 · 분석하기 위해 선결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2. 안중근 가문의 범위와 독립운동 개관

 

‘안중근 가문’이란 안중근의 조부 安仁壽(1836~1892)와 그의 아들 · 손자 · 증손자대로 이어지는 4대로 구성된 가계를 말한다. 안중근 가문은 순흥안씨 참판공파의 일파로서 고려 말 문성공 安珦을 시조로 하는 순흥안씨 가문 내에서 제24~27대에 해당한다. 안인수의 13대조 安孝信은 어린 나이에 문단에서 명성을 날릴 정도로 문장에 능했지만 벼슬을 구하지 않고 해주로 내려가 은거하였다. 이후 안효신의 후손들은 대대로 해주 일대에서 향리직을 세습하며 가문을 유지하였다. 그러다가 안인수의 조부 安起玉대에 이르러 다수의 무과급제자를 배출하면서 향촌사회에서 위상을 높이기 시작하였다.4)

 

안인수는 제주 고씨와의 사이에 泰鎭 · 泰鉉 · 泰勳 · 泰健 · 泰敏 · 泰純 등 6형제를 포함하여 6남 3녀를 두었다. 이 6형제의 아들들인 重根 · 明根 · 定根 · 恭根 등이 대한제국기부터 일제시기까지 활약했고, 아들 · 손자들인 敬根 · 鳳生 · 椿生 · 毅生 · 原生 · 美生 · 偶生 · 樂生 등이 1920년대 이후부터 1970년 이후까지 활동했다. 이중 안중근 가문의 독립운동 · 건국운동 · 민주통일운동사에 두드러진 족적을 남긴 이들은 根字 항렬의 인사들이다. 이들은 한말과 일제시기에 한국독립운동사를 빛낸 역사적 사건들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生字 항렬의 인사들은 대부분 根字 항렬 인사들의 주변과 휘하에서 그들을 보좌하며 독립활동과 건국운동 · 민주통일운동을 벌였다.5)

 

안중근 가문의 시발점에 해당하는 안인수는 부유함을 바탕으로 진해현감이란 관직을 제수받았을 정도로 해주 일대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그의 아들 중에는 진사시에 입격한 셋째 아들 안태훈(1862~1905)이 문무의 기상을 겸비한 호걸형의 인사였다. 다른 형제들은 능력과 기상 면에서 안태훈에 미치지 못했는데, 그중 큰아들 안태진(1853년생)이 해주부의 무반직인 軍司馬직을 지냈으나 비교적 조용히 지내는 편이었고, 안태훈의 바로 아래 동생인 안태건(1868년생)은 무인 기질이 다분하여 조카 안중근과 비슷한 풍모를 보였다.

 

백범 김구에 의하면, 안인수의 아들 여섯은 모두 학식이 풍부하고 인격이 높았는데, 그중 안중근의 부친 안태훈이 가장 탁월했다고 한다.6) 실제로 안태훈은 1892년 부친 별세 후에 가문의 대소사를 실질적으로 주도하며 안중근 가문의 門長 역할을 수행하였다. 따라서 안중근 가문에서는 안인수가 1892년 사거하기 전까지 가문을 이끌었고, 안인수 사후에는 안태훈이 부친의 역할을 계승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905년 안태훈 사거 후에는 泰자 돌림 5형제가 각기 자신들의 가솔을 거느리며 생활하는 분산체제로 접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10여 명에 달하는 안인수의 根字 항렬 손자들 중에서 선두주자는 둘째 아들 안태현의 장자인 安明根과 셋째 아들 안태훈의 장자인 안중근이었다. 이들은 1879년생으로 동갑인데, 7월 16일생인 안중근이 9월 17일생인 안명근보다 대략 3달 남짓 생일이 빨랐다. 그래서 안인수는 살아생전에 맏손자인 안중근을 각별히 아끼고 사랑하였다.7) 14살 되던 1892년에 조부가 돌아가자 안중근은 자신을 사랑하고 길러주던 각별한 애정을 잊지 못하여 반 년 동안이나 중병을 앓기도 하였다.8)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포살하고, 안명근은 이완용 등 매국노를 격살하고 독립전쟁에 필요한 인재양성을 위해 무관학교를 설립하고자 황해도 일대에서 부호들을 상대로 독립자금 모금활동을 벌였는데,9) 이들의 거사는 한국근대사의 전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안중근 · 안명근 아래로는 안인수의 첫째 아들 안태현의 장자인 安宗根과 안태훈의 둘째 아들 安定根이 1884년생으로 동갑이었다. 나머지 根字 돌림의 인사들은 모두 1886년(安莊根)부터 1896년(安敬根) 사이에 태어났다. 이들에게 안중근 · 안명근은 항렬은 같지만 나이는 삼촌뻘인 큰형님들이었다. 이들은 안중근 의거와 안명근 의거 이후에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시달리다가 온 가족을 이끌고 만주와 러시아로 떠나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生字 돌림으로 30명에 달하는 안인수의 증손자들 중에서는 안명근의 큰아들 安毅生이 1899년생으로 가장 일찍 태어났으며 나머지는 모두 1900년 이후에 세상에 나왔다. 이들 중의 상당수는 안창호와 김구를 도와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던 안정근 · 안공근 · 안경근의 주변에서 활동하였다.10)

 

안중근 가문은 안중근 의거(1909. 10)와 안명근 의거(1910. 11~1911. 1) 이후에 일제로부터 엄중한 감시를 받았다. 안중근 가문은 “일제로부터 鍛鍊을 당하여 헌병과 순사들이 매일 그 대문을 두드리고 그 출입자들을 탐문하고 그 의사를 캐물으니 獄吏가 죄수를 감시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을 겪어야만 했다.11) 특히 일제는 “안중근의 두 동생들을 기피하고 심히 정찰하여 어떤 일을 만들어 없애버리려 하였다”고 한다.12) 이처럼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인해 안중근 가문은 망명길에 오르게 되었다. 안중근의 5촌 조카 安民生에 의하면, “일제가 가족은 물론 친척과 후손들까지 괴롭혀 당시 안씨 성을 가진 사람들의 상당수가 만주, 중국 등으로 피신했으며, 국내에 남아 있더라도 예비검속을 당해 수시로 고문을 받고 이유 없이 연행, 투옥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13)

 

 

 

 

 

안중근의 특별 부탁에 따라 안중근 가족은 하얼빈 의거 이전에 평양과 하얼빈을 거쳐 러시아령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했다.14) 1911년 봄에는 안정근 · 안공근 형제가 일제의 가혹한 취체와 탄압을 피해 가족을 이끌고 북간도와 원산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당도하여 안중근 처자와 합류하였다. 당시 연해주에서 안정근 등은 일가 20여 명을 위한 거주지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온갖고초를 겪기도 하였다.15)

 

이미 러시아 연해주로 떠난 안태훈의 후손들을 제외하면, 안태진 · 안태현 · 안태건을 비롯한 다른 형제들의 가족들이 1917~1918년 사이에 중국과 러시아로 건너갔다. 안태진 일가가 1917년 穆陵縣 新韓村으로 이주하자 그의 아들 안종근 · 안장근을 비롯하여 손자 안봉생 · 안춘생 등 수십 명의 가솔들이 시일을 달리하여 망명길에 올랐다. 또 안태현은 북간도 九站으로 이주했는데, 이때 아들 안명근 · 안홍근 등과 손자 안의생 · 안양생 등을 포함해 십여 명을 데리고 갔다. 특히 안태현과 안명근 부자는 북간도에서 進明海星學校를 설립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농장개척에 힘쓰며 독립군의 정착지 마련을 위해 노력하였다. 안태건은 슬하에 안봉근 · 안충근 · 안성근을 두었는데, 이 중 안충근이 만주에서 사거한 것으로 미루어 만주 망명 후에 활동하다가 죽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안태민의 장자 안경근은 1918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하였다.16) 이들 외에도 안중근 가문의 약간의 인사들이 중국과 러시아로 망명하여 활동하였다.

 

안중근 가문에게 중국과 러시아에서의 망명생활은 영광과 인고의 세월인 동시에 새로운 독립운동을 준비하는 모색기였다. 그들은 주변의 한인동포와 중국인들로부터 한민족의 기개를 드높이고 침략자 일제를 징계한 영웅의 일족이라는 찬사와 흠모를 받았던 반면, 그들을 추적하는 일본군과 밀정들로부터 참기 힘든 감시와 핍박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그들은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운동을 전개하고, 어린 자식들에게 민족교육을 시키고, 상점을 경영하여 독립군 기지 건설운동을 추진하고, 무관학교에 입교하여 군사훈련을 받고, 정착지에 벼농사를 처음으로 성공시켜 생활기반을 확보하는 등의 여러 가지 활동을 펼쳤다. 그리하여 망명생활이 점차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하자 안중근 가문은 1919년 이후부터 해방될 때까지 만주와 러시아 및 중국 관내를 무대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활발히 벌였다.

 

안중근 가문은 1905년 을사늑약 후부터 1970년 직후까지 독립운동과 건국운동 · 민주통일운동을 벌였다. 안중근 가문의 독립운동을 형태별 · 방략별로 분류해 보면, 그들은 경술국치 직후까지는 안중근과 안명근이 교육운동 · 강연활동 · 학회활동 · 의병항쟁 · 의열투쟁을 벌였다. 일제시기에는 안중근 · 안명근의 동생들과 子姪들이 외교활동 · 유일당운동 · 특무활동 · 독립단체운영 등을 펼쳤다. 해방 후에는 안경근 · 안우생 · 안민생 등이 남북연석회의 · 민주화운동 · 민족통일운동 · 교원노조운동 등에 가담하였다.17) 이들의 다양한 활동은 한국 근현대시기에 벌어진 모든 운동 양태들을 대표하고 종합하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안중근 가문의 70년간에 걸친 민족운동을 다시 시기별로 크게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제1기(1906~1910)는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포살의거와 안명근의 독립자금 모금활동으로 대표되는 의병운동 · 의열투쟁기이며, 제2기(1919~1949)는 안정근의 청산리전투 기반확충과 안공근의 한인애국단 활동으로 대표되는 독립투쟁기이며, 제3기(1945~1970)는 안경근의 남북협상 주선활동과 민주구국동지회 · 민자통 결성활동으로 대표되는 건국운동 · 민주통일운동기이다. 실로 안중근 가문은 한말부터 1970년 직후까지 한국 근현대사의 중요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실천적인 역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다.

 

한국 근대 민족운동사를 화려하게 장식한 안중근 가문의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위업은 역시 1909년 안중근이 하얼빈 역두에서 일본 근대의 元勳 이토 히로부미를 포살한 사실, 1920년 봄-여름에 안정근이 북간도 일대에서 독립단체 통합운동을 전개하여 청산리전투의 기반을 닦은 사실, 그리고 1930년대 이후 안공근 · 안경근이 중국에서 아들 · 조카들과 함께 김구 및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항일활동에 적극 참여한 사실 등이다. 이 가운데 안중근 의거는 경술국치 전후 한국인들의 구국항쟁과 대일항쟁을 대표할 만한 역사적 의의를 지닌 사건이었을 뿐더러 안중근 가문의 젊은이들과 여타 수많은 한국인들을 독립운동으로 이끈 정신적 자극제가 되었다. 또 안정근 · 안공근 · 안경근의 항일활동은 안중근 가문이 김구 및 임시정부와 밀착하여 활동했음을 입증하는 것으로서 1919년 이후 안중근 가문의 독립운동의 성격을 규정하는 의미가 있었다.

 

 

3. 상무적 가풍

 

안중근 가문은 조선중기에 서울을 떠나 해주에 정착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이들은 해주부에서 향리직을 세습하며 생활하다가 안중근의 5대조 安起玉대에 이르러 무과를 통해서 관계 진출을 도모했다. 조선후기에는 향리직을 세습하면서 사회 · 경제적 실력을 갖춘 이서층이 과거를 통해 양반층으로 편입되려는 신분상승운동을 벌이곤 하였는데, 안중근 가문도 당대의 사회분위기에 크게 영향을 받아 향리에서 양반으로의 신분상승운동을 벌인 셈이다.18)

 

안기옥은 安永豊 · 安知豊(안중근의 증조부) · 安有豊 · 安順豊 등 아들 4명을 두었는데, 이들은 모두 무과에 급제하였다. 이처럼 향리 가문의 4형제가 모두 무과에 급제한 것은 가문의 위상을 몇 단계 높인 쾌거였으며, 안중근 가문이 무반직을 획득하기 위해 각별한 공을 들인 대가였다. 또 안지풍의 맏아들 安定祿(안중근의 증조부), 안유풍의 아들 安斗亨, 손자 安仁煥, 안순풍의 아들 安信亨 등이 무과에 급제하였다. 나아가 안유풍의 손자 安仁權이 절충장군의 품계를 받았고, 安仁弼이 중앙 군사조직인 五衛의 정6품 군직인 사과를 받았다. 안중근의 조부 安仁壽는 종6품의 무반직인 진해현감이란 자리를 명예직으로 받았으며, 안중근의 큰아버지인 安泰鎭은 해주부의 무반직인 군사마 자리를 거쳤다.19) 이런 사실들은 15대조 安孝信 이래 벼슬길에 나가지 못한 안중근의 선조들이 향리직을 세습하면서 재부를 축적한 다음, 그러한 재부를 기반으로 7인의 무과급제자를 배출하며 명망 있는 무반 가문으로 성장해 가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안기옥 이래 안중근의 선조들은 무과를 중시하는 상무적 기질과 가풍을 형성해 왔다. 그들은 1894년 갑오경장의 개혁조치로 과거제도가 공식 폐지되기 전까지 무과를 통해 입신양명을 도모한 전형적인 무반 가문의 이루었다. 그들은 무과 응시를 위해 말타기 · 활쏘기 · 창술 등을 비롯한 많은 실전 무예들을 다년간 익혀 나가면서 자연스럽게 무력을 중시하고 그 가치를 인정하는 상무 풍조의 가정환경 속에서 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가정환경이 안인수의 아들들과 손자들의 생애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음은 재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안중근 가문의 상무적 기질과 가풍은 그들이 벌인 여러 활동들을 통해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예컨대, 1894년 안중근 일족의 동학군 진압활동, 대한제국기 포군을 앞세운 천주교 비호활동, 1907~1909년 안중근의 의병활동과 이토 히로부미 포살의거, 1910~1911년 안명근의 군자금 모금운동, 1920년대 안정근의 만주에서의 독립단체 결성활동, 1930년대 이후 안공근의 특무공작단 운영 등을 통해 볼 때에 그러한 측면들을 잘 볼 수 있다. 한마디로 안중근 가문은 문 필력보다는 무용력을 과시하는 무장활동에서 강점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안중근 가문의 상무적 기질과 가풍은 안중근의 부친 안태훈과 그의 형제들에게도 그대로 전승되고 있었다. 5대조 안기옥의 후손들 가운데 유일한 문과급제자인 안태훈이 가문의 전례를 벗어나 무과가 아닌 문과에 응시한 것은, 그 자신의 뛰어난 능력과 부친 안인수가 이룩한 경제력 덕분이었다. 다시 말해 안인수는 자기 당대에 축적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자손들에게 유학교육을 시켜 과거에 급제케 함으로써 무반 가문을 문반가문으로 격상시키려 하였다.20) 그러나 안인수의 바람과는 무관하게 안태훈의 형제들은 가문의 전통인 상무적 기질과 가풍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었다. 1895년 2월부터 5월까지 3개월간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에서 안태훈 형제들과 잠시 생활한 경험이 있는 김구는 안태훈 형제들의 상무적 기질과 가풍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안진사 여섯 형제는 모두 문사의 풍모가 있었으나 유약해 보이는 점이 하나도 없었고, 특히 안진사는 눈빛이 찌를 듯 빛나 사람을 압도하는 기운이 있었다. 당시 조정 대관들 중에 글로써 항쟁하던 자들도 처음에는 안진사를 악평하였지만, 얼굴만 마주 대하고 나면 부지불식간에 경외하는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나의 관찰로는 그는 퍽 소탈하여 무식한 아랫사람에게도 교만한 빛 하나 없이 친절하고 정중하여 위아래 모두 함께 하기를 좋아하였다. …안진사는 또한 黃石公의 素書 구절을 자필로 써서 벽장문에 붙여두고 술기운이 있을 때마다 낭독하였다.21)

 

김구는 안태진 · 안태현 · 안태훈 · 안태건 · 안태민 · 안태순 등 안인수의 아들 6형제가 모두 문사의 풍모를 갖추고 있으며 아울러 강건한 무인의 기상을 지니고 있음을 칭탄하였다. 그는 “6형제가 거의 다 술과 독서를 좋아하고 짐승을 사냥해 오면 반드시 한데 모였다”고 하였다. 이때 여섯 형제 중에서 서민적 소탈함을 지니고 있는 안태훈이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압도할 정도의 기상을 발휘했다고 감탄하였다.

 

그런데 김구의 술회에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안태훈이 진나라 말엽의 전설적 병법가인 黃石公의 《소서》(素書) 구절을 자필로 써서 벽장문에 붙여두고 술기운이 있을 때마다 낭독했다는 대목이다. 주지하듯이 황석공의 《소서》는 전략가 장량이 한고조 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건국할 때에 크게 이용되었다고 하는 병법서이다. 그런데 안태훈이 취흥이 일어날 때마다 《소서》의 구절을 읊조렸다는 것은 그가 진사시를 통과한 문사임에도 불구하고 무술가나 병략가의 생애를 매우 흠모하고 있었음을 나타내 준다.

 

안중근 가문의 상무적 가풍은 안인수의 장손자인 안중근의 행동방식과 사고방식에 가장 잘 반영되어 있었다. 나중에 여순 감옥에서 안중근은 자신이 “친구와 의리를 맺고(親友結義),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고(飮酒歌舞), 총을 쏘며 사냥하고(銃砲狩獵), 날랜 말을 타고 달리는(騎馳駿馬)” 4가지를 평생 즐겨 이행했음을 자랑스럽게 술회하였다.22) 안중근보다 3살 많은 김구는 동년배의 안중근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인상 깊은 회고담을 남겼다.

 

안진사(안태훈)은 아들이 셋 있었는데, 맏아들은 중근으로 당년 열여섯에 상투를 틀었고, 자색 명주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서 돔방총을 메고 老人堂과 薪上洞으로 날마다 사냥을 다녔다. 중근은 영기가 넘치고 여러 군인들 중에도 사격술이 제일로, 나는 새나 달리는 짐승을 百發百中으로 맞추는 재주가 있었다. 숙부 泰健씨와 늘 동행했는데, 어떤 때는 하루에 노루와 노라니 등을 여러 마리 잡아와 그것으로 군사들을 위로하기도 하였다. …안진사는 자기의 아들과 조카들을 위해 서재를 만들었다. 당시 빨간 두루마기를 입고 머리를 땋아 늘어뜨린 8, 9세의 정근 · 공근에게는 “글을 읽어라” “써라” 독려하면서도 맏아들 중근에게는 공부를 안한다는 질책을 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23)

 

이처럼 안중근은 어려서부터 부친의 상무적인 자유방임적 교육관에 따라 날마다 숙부 안태건과 함께 사냥꾼을 따라다니며 산이나 들로 쏘다니느라 학문에 힘쓰지 않았다. 그는 《통감절요》에 나오는 “글은 이름이나 적을 줄 알면 그만이다”는 초패왕 항우의 고사를 가슴속에 새기며 항우처럼 대장부의 기상을 드날리는 인물이 되고 싶다는 포부를 나타내고 있었다.24) 또한 그는 16세의 어린 나이에 포군을 거느리고 동학군을 진압하였고, 20대 초반에 萬人契의 사장으로서 채표의 추첨날에 벌어진 군중들의 항의소동을 총을 쏴가며 생명을 내걸고 진정시킨 초인적인 담대함을 보여 주었다.25)

 

이상 안중근의 예화에 나오는 상무적인 사고방식이나 행동양태는 의협심과 무용력이 유달리 뛰어났던 안중근 개인에게만 국한되는 문제라기보다는 안중근 가문의 다수 인사들이 은연중에 품고 있던 기본성향 가운데 하나였다고 판단된다. 그들은 누대에 거쳐 무과를 통해 입신하고자 병서와 병학을 공부하고 무예를 수련하는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는 가운데 자신들도 모르게 상무적 가풍을 형성하게 되었던 것이며, 이러한 상무적 가풍은 을사늑약 이후 안중근 가문이 민족운동에 종사할 때에 직접적 영향을 미쳤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4. 경제 기반과 생활 대책

 

안중근 가문의 비교적 유족한 경제력은 안중근의 조부 안인수대에 확보되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안중근 가문은 5대조 안기옥대부터 무과급제자만 7명을 배출했을 정도로 무과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다가 안중근의 조부 안인수가 해주 일대에서 미곡상을 경영하여 상당한 재산을 축적하였다. 이에 대해 일본 측은 “안인수가 항상 미곡 매입 대금을 지불하지 않는 등 각종 간악 수단을 부려…재물을 모아 거부를 이루었다”거나 “안인수는 성품이 탐욕하고 배부름을 모르고 일상 간계를 써서 타인의 재산을 수중에 넣으려고 하였으므로 당시인들이 ‘安億乏’이라고 다르게 불렀다”고 말하였다.26) 이에 대해 안중근은 자신의 일대기에서 “조부가 성품이 어질고 무거웠으며 살림이 넉넉했을 뿐더러 자선가로서 도내에 이름이 높았다”고 하였다.27)

 

그런데 1911년 한국을 방문하여 안중근 일가의 주거지인 황해도 신천 청계동을 직접 답사한 독일 聖 오틸리엔 베네딕도 수도회의 총장 베버(Norbert Weber) 신부가 작성한 여행기에 의하면, 안인수와 그의 아들 6형제의 가족 36인이 해주에서 일가를 이루고 살았던 당시에 안인수는 4백 석의 토지를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안인수는 해주 연안에서 어부들을 동원하여 1년에 2~6만 마리가량의 청어를 잡아들였다고 한다.28) 이를테면 안인수의 재산은 매년 나오는 청어어획량과 4백 석의 토지였는데, 이 정도의 재산규모라면 안인수는 황해도에서 중등 이상의 부호에 해당한다. 이때 안인수의 토지재산이 4백 석임을 감안할 때에 기왕에 널리 인용되는 것처럼 “안인수가 해주 · 봉산 · 연안 일대의 대토지를 소유하여 황해도 내에서 2~3위를 다투는 부자가 되었다”는 기록은 상당히 과장된 것이다.29)

 

그러나 4백 석의 토지와 청어잡이 어선을 소유하고 있던 안중근 가문은 해주 일대의 향리 가문으로서는 상당한 재산을 축적한 셈이다. 이러한 재력 덕분에 안중근 가문은 해주부 내에서 꾸준히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안중근의 조부 안인수가 과거에 급제하지 않고도 명예직으로 진해현감이란 자리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해주부 일대에서 상당한 경제력과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30) 그리고 안인수가 무과급제자를 다수 배출한 향리가문의 위상을 한 단계 높이기 위해 아들들에게 문과 공부를 시켜 둘째 아들 안태현을 初試에, 셋째 아들 안태훈을 進士에 입격시킨 것도 모두 유족한 경제력에 기반한 것이었다.

 

안인수는 갑신정변 후 개화성향의 셋째 아들 안태훈이 급진개화파 거두 박영효와의 관련 혐의 때문에 피난처를 물색할 때쯤에 일단 가산을 정리한 것 같다. 1885년경에 그는 재산을 친척들에게 분배하고 300석을 추수할 토지만 남겨둔 채 70~80명의 가솔을 이끌고 산수가 수려하고 피난지로 적당한 신천군 斗羅面 淸溪洞으로 이사했다고 한다.31) 1892년 안인수가 사망한 후에도 그의 아들 6형제는 청계동에서 혈연공동체를 이루며 생활했는데, 안인수의 300석 토지재산이 정확히 언제 6형제에게 분배되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하여튼 ‘安億乏’이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로 악착같이 모았던 안인수의 재산은 나중에 그의 손자 · 증손자대인 根字 및 生字 인사들이 국내외에서 생활 · 수학하거나 혹은 장기간 독립운동을 펼치는 데 기본자금이 되었음은 물론이다.32)

 

1885년 이후 청계동으로 이주한 안중근 가문은 1890년대 후반에 재정적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70~80명에 달하는 식솔들의 생활비, 포군 20명의 월급과 유지관리비, 청계동 성당의 건축비와 유지비, 해주관찰부 관료와 이속 및 중앙정계 유력자들과의 교제비 등에 많은 비용이 들어갔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안중근 가문은 189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 초까지 향촌사회에서 포군을 동원하여 토지수수료를 강제로 거둬들이는 무리수를 범하였고, 정부가 엄히 금하는 萬人契를 신천군에 개설하여 안중근으로 하여금 운영하게 하였다.33) 당시 황해도의 천주교도들이 지방정부와 누차 갈등을 빚자 대한제국 정부는 1903년 안핵사 이응익을 파견하여 조사를 벌이게 하였고, 이응익이 안태훈 · 안태건 · 빌렘 신부 · 르각 신부 등을 체포할 것을 고종에게 건의하고 직접 이들에 대한 체포 작전을 개시함에 따라 안중근 가문의 청계동에서의 활동은 크게 위축되었다.34)

 

안인수의 셋째 아들 안태훈의 3형제(안중근 · 안정근 · 안공근)에 국한하여 논급할 경우, 1905년 사거한 안태훈이 물려준 재산 가운데 상당액은 계속 유지되었다. 1906년 3월 이후 안중근은 안정근 · 안공근 두 동생들과 함께 진남포의 천주교계 학교인 돈의학교와 삼흥학교의 재정을 조달하였고, 평양에서 三合義라는 석탄 채굴 · 판매회사를 운영하다가 손해를 보기도 하였다.35) 또 그는 자신이 1907년 봄 집을 떠난 후에도 “부친의 재산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가솔들이 모두 무사히 지내고 있다”고 공술하였다.36) 안중근이 해외로 망명한 후에 3형제의 토지재산을 관리하고 있던 안정근은 안중근 의거 직전에 청계동에서 50리 떨어진 信川에 100두락의 땅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거기에서 매년 풍년에는 100석, 흉년에는 40~50석을 거둬들이고 있었다.37) 이를 보면 안중근의 형제들은 1910년경까지 안인수가 안태훈에게 남겨준 50석 이상의 토지재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안중근 의거 이전에 안중근 가문은 안인수가 물려준 300석의 토지재산을 활용하여 자손들에게 신문물과 신학문을 습득시켰다. 그들은 안인수가 물려준 유산을 밑거름으로 삼아 한국의 독립운동과 건국운동에 적극 가담할 능력과 실력을 배양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안인수의 아들 6형제가 물려받은 토지재산은 수십 명에 달하는 가족 수에 비해 그리 많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안중근 가문은 대체로 1910년쯤에는 경제적으로 궁핍하지는 않지만 넉넉하지는 못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안중근 의거와 안명근 의거로 인해 안중근 가문은 일제의 혹독한 취체를 받으면서 고향을 등지고 만주와 연해주로 망명을 떠나야만 하는 어려운 상황을 맞게 되었다.38)

 

1910년대 이후 안중근 가문은 북만주 · 러시아 및 상해 등지에서 비교적 유족한 생활을 하였다. 예컨대, 안중근 의거 후 안정근은 안중근 일가족의 러시아 정착을 후원한 李甲의 생활비와 치료비를 전담했고, 안공근은 학비 부족으로 중단하기는 했지만 남들은 가기 어려운 모스크바로 수 년간 유학을 다녀왔다. 안정근은 자기 아들과 조카들의 교육을 위해 상해로 이주했는데, 상해에 있는 안정근 저택은 독립운동의 거점으로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 집에 드나들며 묵고 갔다. 또한 극동 러시아령 니콜리스크에 살던 안정근이 형님의 자녀인 安賢生과 安俊生, 자기 장남 安原生, 안공근의 장남 安偶生 등의 교육을 위해 상해로의 진출을 결행한 것도 모두 경제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었다.39) 나아가 안성근(소련) · 안진생(이태리) · 안봉생(독일) · 안양생(중국) 등은 유럽과 중국으로 유학을 다녀왔다.

 

이상의 사실들을 감안할 때에 1910년대에 안중근 가문은 다른 독립운동가들에 비해 비교적 경제형편이 나은 편이었다. 그들은 이미 거만의 가산을 독립운동에 투입하고 간도와 천진 · 북경 등지에서 빈한에 떨며 막심한 고초를 겪고 있던 李會榮 · 李相龍 일족과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40) 1910년대 이후 중국과 러시아로 이주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과 달리 안중근 가문은, 일제의 감시와 추적을 받기는 했지만,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지 않고 착실하게 다음 시기의 독립운동을 모색할 여유를 가졌던 것이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요인이 작용하고 있었다.

 

첫째, 만주-노령에서 안정근 · 안공근 형제는 독립자금과 생활비를 마련하고자 생산 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였다. 1910년 전반에 안정근은 형과 아우의 가족을 포함해 20여 명에 달하는 대가족을 거느리고 중러 국경지대의 목릉과 니콜리스크 일대에서 잡화상을 경영하며 생활비를 벌였다.41) 그러다가 미국에서 안창호가 보내준 자금으로 농장을 개척한 결과 1919년에 니콜리스크 일대에서 처음으로 벼농사에 성공하여 첫해에 200석을 수확하였다. 안정근 형제는 이에 고무되어 대규모 농장건설을 도모하기도 하였다.42)

 

둘째, 안정근은 황해도 신천군의 부호인 王在德(1858~1934)으로부터 거액의 생활자금과 독립자금을 수시로 받았다. 처음에 300석의 토지를 불려 만석꾼에 오른 왕재덕은 국내와 만주에 포진한 천주교회의 조직망은 물론, 비밀리에 국내를 드나드는 자기 딸 李貞瑞를 통해 막대한 자금을 안정근에게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43)

 

셋째, 상해에서 안공근이 구미공사관에 드나들며 생활비를 마련하였고,44)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은 교향악단 바이올린 주자로서 약국을 운영하며 생활대책을 강구하였다.45) 또한 1930년대 이후 안공근은 중국정부의 지원자금을 관리하며 여유로운 생활을 하였다. 넷째, 안정근 · 안공근과 그의 4촌들은 조부 안인수가 물려준 해주와 신천군 일대에 산재한 아직 처분하지 않은 토지로부터 일정한 지세를 거두어들였거나, 아니면 중국과 러시아로 망명할 때에 상속받은 토지를 비롯한 전 재산을 매각한 자금을 가지고 망명길에 올랐을 것으로 보인다.

 

이상의 여러 이유들 덕분에 안중근 가문은 독립운동의 모색기요 무단통치의 극성기로 알려진 1910년대를 착실하게 보내고 1919년 이후 전개되는 독립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을 수 있었다.

 

 

5. 천주교와 민족운동의 융합

 

안중근 가문은 안태훈의 영향으로 투철한 종교적 심성을 갖게 되었다. 1894년 9월경 황해도 전역에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해주감사 정현덕은 안태훈을 義旅長으로 삼아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도록 하였다.46) 11월 중순에 안태훈은 가내에 사병으로 양성한 포군 70여 명과 수십 명의 촌민을 거느리고 농민군을 진압하였다. 이때 그는 농민군에게 노획한 5백 석의 정부소유 군량미를 임의로 사용했는데, 이것이 문제되어 이듬해 여름 그 군량미의 상환문제로 어윤중과 민영준으로부터 추궁을 받았다.47)

 

1896년 8월 안태훈은 해주관찰부의 후원자에게 군량미 문제에 대한 선처를 부탁하는 한편,48) 자신의 정치적 후원자인 중앙고관金宗漢의 측면지원에 따라 서울로 올라가 문제 해결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여의치 못하자 평소부터 믿어볼 생각을 품고 있던 천주학의 진원지인 鍾峴의 천주교당(명동 성당)으로 피신하여 ‘몇 달 동안’ 프랑스 신부들의 보호를 받아가며 그들의 도움으로 군량미 문제를 해결하였다.49) 평소 서양 종교에 호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던 안태훈은 목전의 난제를 해결하려는 현실적 · 공리적인 목적에서 천주교를 수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종현 성당에서 안태훈은 천주교의 기본교리와 신교의 자유를 호교론적 입장에서 기술한 《上宰相書》를 읽고 천주교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킨 다음, 《천주실의》 · 《七克》 등의 서책을 통해 천주교 교리를 깨달았다고 한다.50) 그는 강론을 듣고 성경도 읽으며 지내다가 1896년 10월 말 李保祿와 함께 《교리문답》 · 《12단》 등 120여 권의 종교서와 개화서를 가지고 청계동으로 돌아와 친지들과 촌민들에게 나눠주며 복음을 전파했다.51) 이때 <안태훈의 요청>이란 문건을 주민들에게 보내 천주교 입교를 권했다고 한다.52) 이처럼 신천군의 유력자 안태훈이 전교활동에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서자 두 달 만에 7개 마을에서 천주교로의 개종 움직임이 일어났다.53) 당시 부친의 인도로 천주교에 귀의한 안중근도 열렬한 신앙심으로 빌렘(Nicolas J.M. Wilhelm, 洪錫九) 신부의 服事를 수행하여 해주 · 옹진 등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며 전교활동을 펼쳤다.54)

 

안태훈은 신천군의 천주교 발전을 위해 안악군 마렴 본당의 빌렘 신부를 청계동으로 불러오기로 결정하고 그에게 청계동 공소의 개소를 요청하였다. 빌렘 신부는 2명의 전교회장을 파견하고, 1897년 1월에 세례문답을 통과한 안태훈 일족과 청계동 인근 주민 33명에게 세례를 주었고, 4월 중순 부활절에 다시 66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렇게 영세를 받은 99명 가운데 어린이는 3명뿐이었고 나머지가 모두 가장들인 성인 남자들이었다.55) 하여튼 안태훈 가문은 조상의 제사 때문에 천주교 수용을 거부한 장자 安泰鎭56)과 몇몇 친지, 고용꾼 1인만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남성들이 세례를 받았다.57)

 

1898년 4월 빌렘 신부가 마렴 본당을 다른 신부에게 넘기고 청계동에 정착함으로써 안중근 가문의 근거지인 청계동은 마렴에 이어 황해도의 두 번째 본당이 되었다.58) 전국 각지의 천주교회당을 두루 방문하는 기회에 황해도를 방문한 천주교 조선 교구장 뮈텔 주교는 1896년 11월 27일 빌렘 신부의 인도로 청계동 공소를 방문하여 성당 축성을 축하하고 안중근 일족에게 영세를 주었다. 11월 28일에 안태현과 그의 아들에게 영세를 주었고, 29일에는 안중근의 조모와 모친 및 누이동생을 포함한 19인에게 영세를 주었다.59) 이후 청계동은 해서 교안으로 인해 빌렘 신부가 뮈텔 주교의 소환령을 받아 서울로 올라감과 동시에, 서양선교사(‘洋大人’)라는 보호막이 사라진 안태훈이 지방정부의 체포를 피해 피신하는 1904년 4월 이전까지 황해도에서 천주교 전교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안중근 가문의 원로들은 중국이나 러시아로 망명한 후에도 자손들에게 천주교를 믿도록 가르쳤다. 예컨대 安泰鉉은 1910년대 후반 길림성 방정현에 살 때에 손자들을 수시로 모아놓고 “너희들 천주교 안 믿으면 오늘부터 날 할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나도 너희들 손자라고 취급 안 할테야. 이제부터 담을 쌓고 사는 거야.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다 손자고 내가 너희들 할아버지고 오늘부터 안 믿으면 담을 쌓는거야. 어떻게 할꺼야?” 하며 천주교 신앙을 강조하였다. 그리고는 《敎理問答》을 한 권씩 나눠주며 한 달 이내에 모두 암송하여 자신의 면전에서 시험을 보도록 하였다.60) 이런 방식으로 안중근 가문은 세대를 이어가며 독실한 천주교 신자들을 탄생시켰다.

 

안중근 가문의 신앙생활은 참으로 독실한 것이었다. 안중근과 같은 시기에 세례를 받은 안명근은 황해도 안악에서 독립자금 모금활동을 벌이다가 일제에게 체포되어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아 15년을 복역하고 출옥하였다. 그는 옥중에서 심문을 당할 때나 일본 기념절에 遙拜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혹독한 고문을 당했는데, 이때 그는 오로지 천주의 말씀을 떠올리며 죽음의 공포를 이겨냈다고 한다. 나중에 만주로 망명한 다음에, 그는 자손들에게 자신에게 천주교 신앙이 없었더라면 벌써 죽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61)

 

안태훈의 인도로 천주교를 수용한 안중근 가문은 점차 천주교를 내면으로 받아들이는 신앙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다. 천주교를 접한 후에 그들은 세례를 받기 위해 교리문답서를 읽고 베껴 쓰는 과정에서, 그리고 주일마다 공소에 참여하여 예배를 드리는 과정에서 점차 참다운 신자로 변모해 가고 있었다. 이에 대해 안중근은 “경문을 강습도 받고 도리를 토론도 하기를 여러 달을 지나 信德이 차츰 굳어지고 독실히 믿어 의심치 않고 천주 예수 그리스도를 숭배하며 날이 가고 달이 가고 몇 해가 지났다”는 신앙고백을 하였다.62) 이는 교리 강습과 토론을 통해 천주교가 안중근의 내면에서 체화되어 가고 있었음을 토로한 것이었다.

 

천주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이면서 안중근은 천주교를 인격도야와 사회개혁의 원동력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신천군 일대에서 전교 활동을 할 때에 “지금 세계 문명국 박사 · 학사 · 신사들 중에 천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이 없다. …우리 동포 형제자매들은 크게 깨우쳐 천주교를 믿어 지난날의 과오를 깨닫고 참회하여 현세를 도덕의 시대로 만들어 함께 태평을 누리다가 내세에 천당에 올라가 무궁한 복락을 누리자”고 역설하였다.63) 이처럼 천주교를 통해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열쇠로 삼자는 것은 천주교를 사회발전과 국가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자고 하는 천주교 입국론에 다름 아니었다. 물론 이러한 천주교 입국론은 천주교롤 독실하게 신봉하는 안중근 · 안명근을 비롯한 안중근 가문의 젊은이들에게 공통된 사유양태였다고 판단된다.

 

천주교를 사회발전과 국가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으려는 안중근 가문에게 있어 천주교는 긍정과 부정의 이중적 영향을 동시에 미쳤다. 먼저 전자로는 그들이 천주교 신앙을 통해 점차 상무적 무반기질을 순화하고 현세적 공리성과 세속성을 벗어던지고 종교적 경건성과 순수성을 지닌 애국집단으로 변신했을 뿐더러, 천주교를 재래한 프랑스 신부들을 통해 서양의 근대 사상과 문물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다음 후자로는 경술국치 직후까지 그들이 프랑스 신부들에게 의지 · 결탁하여 가문의 세력을 유지 · 확대하는 동안 그들은 제국주의와 프랑스 선교사들의 선교우선주의적, 정치불간섭주의인 성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니게 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64)

 

천주교 수용에 내재한 이율배반적인 양면성은 당시 서양 종교를 신봉했던 모든 한국인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러나 다른 가문과 달리 안중근 가문이 제국주의의 침략논리와 일제의 對韓식민통치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거나 묵인했던 프랑스 신부들과 밀착하여 생활했기 때문에 이러한 점이 더욱 강하게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안중근 가문으로서는 프랑스 선교사들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분명히 깨닫는 한편, 천주교 신앙과 근대적 민족주의 사상을 합일시켜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안게 되었던 것이다.65)

 

천주교 신앙과 항일민족운동의 합일과정에서 민족운동에 반대하는 프랑스 선교사들과 여기에 찬동하는 안중근 가문의 청년들과의 갈등은 필연적인 현상이었다. 이는 누구보다도 서양선교사들과 친밀했던 안중근의 경우에 극명하게 드러난다. 대한제국기에 안중근은 빌렘 신부와 함께 서울로 올라가 뮈텔 주교에게 천주교 대학의 설립을 제안했으나 거절을 당했다. 이때 그는 분노를 참지 못하여 “교의 진리는 믿을지언정 외국인의 심정은 믿을 것이 못된다. …내가 만일 프랑스말을 배우다가는 프랑스 종놈을 면치 못한다”고 말하고 프랑스말 학습을 중단하였다.66) 이를테면 안중근은 프랑스 선교사들이 천주교의 전교확대와 제국주의의 세력판도에만 관심을 가질 뿐 한국의 독립자강문제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이 없음을 깨닫고 비로소 민족문제에 눈을 뜨게 되었다.

 

독실한 천주교 신도로서 교회와 국가를 운명공동체로 파악한 안중근은 을사늑약 전후에 민족운동에 투신하고자 하였다. 이에 대해 한국인의 민족운동에 방관자적 태도를 유지하던 빌렘 신부는 “네가 만일 여기서 정치적 소요를 일으키려 한다면 네가 떠나든지 내가 떠나든지 하자”며 한사코 반대하였다.67) 그러나 안중근은 “국가 앞에서는 종교도 없다”고 말하며 사상적 후원자인 빌렘 신부의 반대를 무시하였다. 당시 천주교단의 선교정책에 따라 정치불간섭주의를 강조하는 빌렘 신부와 종교와 민족운동의 합일을 외치는 안중근 간에 벌어진 논쟁은 나중에 여순 감옥의 안중근을 찾아간 빌렘 신부의 발언 속에 잘 나타난다.

 

회고하면 3년 전 너는 일시의 분격심에 물리어 “국가를 위해 크게 하는 바 있지 않으면 안된다” 하여 출국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하려고 할 제 나는 너의 사람됨을 잘 알고 금일이 있을 것을 두려워하였기로 그 悲望을 懇諭하기를 “내가 만약 참으로 국사에 盡悴하려면 모름지기 교육에 종사하고 곁들여 선량한 敎徒 착실한 국민이 되게 하라”고 하는 동시, “네가 일시의 憤激에 의해 輕擧하여 國事에 분주하는 따위는 다만 너 一身을 망칠 뿐 아니라 나가서는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所以”를 간절히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종래 나에 대해서는 절대로 유순하던 네가 “국가 앞에서는 종교도 없다” 하여 나의 敎旨에 배반한 당시의 광경은 지금도 아직 눈앞에 彷佛함을 너는 기억하느냐 않느냐. 오호라. 너로서 만약 당시 나의 말을 들었더라면 금일 이와 같은 累?의 戒는 받지 않았을 것이다.68)

 

안중근은 순국 직전에 안정근 · 안공근 및 빌렘 신부에게 전한 <최후의 유언>에서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라는 죽어서도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나타냈다. 또 “敎子는 그 一日을 앞서 聖壇에 오르니 敎友의 힘에 의해 한국독립의 吉報를 가져다주기를 기다릴 뿐이다”라며 천주교 신자들의 독립운동 참여를 적극 촉구하였다.69) 나아가 그는 “성서에도 사람을 죽임을 죄악이라고 한다. 그러나 남의 나라를 탈취하고 사람의 생명을 빼앗고자 하는 자가 있는데도 袖手傍觀하는 것은 죄악이므로 나는 그 죄악을 제거한 것뿐이다”라며 ‘살인하지 말라’는 천주교의 계명조차도 민족문제 앞에서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보였다.70) 이러한 태도는 안중근 의거의 역사적 정당성을 당연시한 안중근의 사촌 안명근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그는 빌렘 신부를 여순으로 보내 안중근에게 영성체식을 집행하게 하자는 자신의 주장을 뮈텔 주교가 여러 가지 이유를 내세우며 받아들이지 않자 불만을 표시하고 무례한 태도를 보이기까지 하였다.71)

 

천주교단의 입장과 달리 민족운동을 중시하는 안중근의 현실참여의식은 안중근 가문의 젊은 천주교 신자들에게 직접적 영향을 미쳤음에 틀림없다. 안중근 가문의 인사들은 안중근이 민족운동에 가담했다가 서거하고, 안명근이 독립자금 모금활동을 벌이다가 투옥된 것을 지켜보면서 교리상 갈등이 없이 천주교 신자로서 민족운동에 가담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1919년 10월 15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발표한 <천주교 동포에게>라는 성명서에는 천주교 신앙과 민족운동을 융합시킨 바탕 위에서 국내에 살고 있는 천주교도들의 독립운동을 적극 권하는 기독교민족주의 논리가 담겨 있는데,72) 이 문건은 서거 직전 안중근으로부터 사상적 세례를 받은 동생 안정근의 노력에 의해 발표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73)

 

 

6. 안창호 · 김구를 통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참여

 

1910년대 이후 만주와 중러 국경지대에 흩어져 살던 안중근 가문의 청장년 인사들이 1919년 4월 이후 상해로 진출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가담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의 임시정부 활동은 1930년을 기준으로 전기와 후기로 구분되는데, 대체로 전기에는 안창호와, 후기에는 김구와 밀착해 있었다. 전기에는 안창호가 주도한 유일당운동 내지 독립단체 통합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활동한 반면, 후기에는 김구가 주도한 임시정부의 특무공작과 김구의 사조직 운영과 관리를 주도하였다. 따라서 1919년 4월 이후 안중근 가문은 임시정부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독립운동을 벌여 나갔다.

 

안중근 가문의 임시정부 활동을 주도한 이들은 根字 돌림의 안정근 · 안공근 · 안경근, 生字 돌림의 안봉생 · 안춘생 · 안의생 · 안락생 · 안원생 · 안우생 · 안락생 등이다. 이들 중에서 1919년 이후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에 깊숙이 간여한 根字 돌림 인사들의 활약이 두드러진 편이다. 다만 활동 면에서 양자 간에 비중차가 생긴 것은 根字 돌림의 인사들이 1920년대를 전후하여 중년기를 맞았던 반면, 대부분 1905년 이후에 태어난 生字 돌림의 인사들이 1910~1920년대의 성장 · 수학기를 거쳐 1930년대 이후에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면 안중근 가문은 언제 어떻게 안창호 · 김구와 인연을 맺게 되었는가? 임시정부 요인으로 성장한 양인과 안중근 가문의 관계는 어떻게 진전되었는가? 안중근 가문이 안창호 · 김구와 관계를 갖기 시작한 것은 1907년 7월 안중근이 해외 망명을 떠나기 이전이었다. 안중근 가문은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에서 동학운동에 패하여 일신을 안태훈에게 의탁한 김구와 처음 인연을 맺었고, 1906년 황해도 개항장 진남포에서 안창호가 애국연설을 하는 것을 안중근이 보면서 인연을 맺었다. 이러한 인연은 일제시기를 거쳐 해방 직후까지 끈끈하게 이어졌다. 따라서 안중근 가문의 민족운동사에서 안창호와 김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먼저, 안중근 가문과 안창호의 관계를 알아보겠다. 안중근 가문과 안창호의 인연은 1907년 봄부터 시작되었다. 1907년 봄 평양에서 국채보상운동과 식산활동을 벌이고 있던 안중근은 부친의 친구이자 서우학회의 핵심 간부인 김진사(金達河)의 특별 권유에 따라 해외 망명을 결심하고 얼마 후에 일체의 사업을 접고 가족과 작별하고 서울로 올라갔다.74) 그는 김달하의 집에 몇 달간 유숙하면서 金宗漢 · 閔衡植 · 金世基의 子 某 · 李鍾乾 · 柳宗模(충북 黃澗) · 安昌浩 · 李東輝 · 姜泳璣(함남 利原, 서북학회지회장) 등 서북학회계 계몽인사들 및 고관출신들과 친교를 맺고 지사로 자임하였다. 그는 姜泳璣 · 金東億 · 민형식 · 李鍾乾 등으로부터 북간도행 여비를 받았으며, 김달하의 아들 김동억과 함께 북간도로 갔다.75) 이를 보면 서북학회 세력은 해서 · 평안지역의 유력한 행동파 민족운동가 안중근을 특별히 발탁하여 해외로 보냈던 것이다.

 

간도망명 이전 안중근은 서우학회 인사들과 교유하면서 안창호와 긴밀한 사이가 되었다. 안중근은 1879년생, 안창호는 1878년생으로 양인은 비슷한 연배였다. 안중근은 1907년 5월 서북학생친목회가 서울 동문 밖 삼선평에서 운동회를 개최할 때에 연사로 초청된 안창호와 친교를 나누었고,76) 아울러 이때쯤에 서우학회 제8회 회원으로 가입했으며,77) 북간도로 떠나기 전에 안창호와 수차례 ‘排日演說’을 하였다고 한다.78) 그리고 1907년 여름에 안창호가 南浦紳商會社의 초청으로 진남포에서 2차례 연설회를 열었을 때에 안중근은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큰 감화를 받고79) 안창호를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오찬을 대접하기도 하였다.80) 안중근은 자기보다 5살 아래로 각별히 친하게 지내는 고모부 郭林大를 찾아가 자신이 만나본 인물 중에 안창호만한 이가 없다며 찾아가 만나보라는 권고를 하기도 하였다.81)

 

안중근 의거 후 안창호는 연해주로 망명한 안중근 일족의 생활근거지 마련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때 안중근 일족의 대표자인 안정근은 여섯 살 연상의 안창호를 ‘형님’이라고 부르며 받들어 모셨다. 안창호는 1910년 8월 말부터 1911년 3월까지 연해주와 중러 접경지대를 무대로 독립근거지 개척사업을 비롯한 다양한 사업을 모색했다. 그는 1911년 2월 7일 안정근을 데리고 육로로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 밀산현 봉밀산으로 이동하여 그곳 일대를 둘러보았다.82) 또한 1911년 4월에 안중근의 가족을 데리고 동청철도의 동부선상에 있는 목릉으로 가서 팔통면에 정착하도록 도와주었다.83) 이처럼 안창호는 안중근 일족이 중러 국경지대에서 정착하는 데 있어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

 

안창호는 안정근 · 안공근 형제가 러시아령 니콜리스크 일대에서 농장을 개척하여 벼농사를 최초로 성공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안정근 형제는 1910년대 중반부터 식산흥업을 통해 대규모 자금을 마련하여 항구적인 독립운동 근거지를 개척하려 했는데, 이는 안창호의 의도와 부합하는 것이었다. 안창호는 연해주 소왕령에서 벼농사를 대규모로 확장하기 위해 안정근에게 1만불을 보냈으나 러시아 볼셰비키혁명으로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안창호는 나중에 이 자금을 임시정부를 보존하는 비자금으로 사용하였다.84)

 

1919년 3·1 운동 이후 안정근은 안창호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상해로 진출하였다. 그는 1919년 7월 1일에 상해임정의 외곽단체로 설립되어 안창호의 영향력 하에 있던 대한적십자사 사검에 임명되었다.85) 이후 1919년 가을 어느 시점에 상해에 당도하여 상해임정의 지도자인 안창호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가며 활동하였다. 그는 자신의 흥사단 가입문제와 같은 사적인 문제는 물론, 이동휘 · 여운형의 동향, 대한적십자회 운영문제 등을 보고하고, 안공근의 러시아 파견문제, 북간도특파원 파견문제와 수행업무 등의 현안을 가지고 상의하였다.86) 심지어 안창호가 국내 상황을 시찰하기 위해 귀국하겠다는 의사를 보이자 안정근은 “형님이 상해에 在치 아니하면 자기도 임시정부에 傾向할 마음이 없다”며 전폭적인 지지의사를 나타냈다. 이처럼 안정근의 상해 활동은 안창호와 긴밀한 연관 하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1921년 11월부터 1924년 2월 북경 이주 후까지 안정근은 많은 단체에 간여하였다. 그는 임시의정원 시사책진회 · 대한적십자회 · 한중호조사 · 신한청년당 · 상해 교민단 등의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그런데 이때 안정근의 주요 활동은 안창호와 긴밀한 관계를 맺은 상태에서 추진되었다. 다시 말해 2차례에 걸친 안정근의 상해 활동은 전기(1919. 가을~1920. 5)나 후기(1921. 가을~1924)를 막론하고 형님으로 극진히 모신 안창호를 측근에서 보좌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또한 안정근은 북경 이주 후에 안창호가 열성을 갖고 추진하던 이상촌 건설운동에도 참여하였다. 당시 안창호는 海甸農場을 개척하여 운영했는데, 안정근은 안창호와 같이 생활하며 안창호의 실력양성론에 입각한 독립운동을 보좌하였다. 그러나 1925년에 뇌병이 발병하여 산동성 위해위로 이주하면서 안정근은 안창호와 연대활동을 접게 되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안정근의 정치노선과 독립노선은 크게 보아 안창호와 동일한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87)

 

안창호를 형님으로 모셨던 안정근은 안중근 가문 인사들의 상해임정 참여 물꼬를 텄다. 그가 연해주를 떠나 상해로 진출함에 따라 그의 동생들과 조카들이 상해로 건너와 임시정부에 관계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안정근의 동생 안공근은 1920년 1월 안창호 · 안정근의 주선으로 한형권 · 여운형 등과 함께 모스크바특사에 선정되었다. 당시 임시정부는 러시아와의 우호를 강화하고 원조자금을 얻어내기 위해 특사를 파견하였다.88) 또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활동 중이던 안경근은 러시아혁명으로 연해주가 소란해지자 1922년 상해로 이동하여 임시정부 경무국장 김구를 적극 보좌하며 활동하였다.89) 그리고 生字 항렬의 다수 인사들이 안정근 · 안공근 · 안경근을 따라 상해로 진출하였다. 이처럼 안정근은 안중근 가문의 인사들이 해방 전까지 임시정부에 가담하여 활동하게 하는 디딤돌 역할을 하였다.

 

다음, 안중근 가문과 김구의 관계를 알아보겠다. 안중근 가문과 김구는 동학농민운동 직후에 처음 인연을 맺었다. 일찍이 김구는 동학농민운동에 실패한 후 1895년 2월부터 5월까지 3개월간 안중근 가문의 근거지인 청계동에서 식객 노릇을 하였다. 이때 그는 안중근 가문의 門長인 안태훈의 각별한 보호를 받으며 안중근 가문의 청소년 및 아동들을 접하였다. 그에 의하면, 17세의 안중근은 사냥에 열중하고 있었고, 각기 12세, 7세인 안정근 · 안공근은 “빨간 두루마기를 입고 머리를 땋아 늘어트린” 소년들이었다.90) 청년 김구와 안중근 가문의 청소년들은 서로 친하지는 않았지만, 이들이 청계동에서 함께 생활한 경험과 기억은 일제시기에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벌일 때에 귀중한 자산이 되었다.

 

1910년 11월 안중근의 사촌동생 안명근은 만주에 독립군기지 건설을 위한 독립자금 모금활동을 벌일 때에 해서지방의 명사로 인정받고 있던 김구의 동참을 구하였다. 그는 안악 양산학교로 김구를 찾아가 독립자금을 약속하고도 납부하지 않는 안악읍의 부호를 총기로 위협하여 다른 지방에도 영향을 미칠 생각이니 도와 달라는 의사를 피력했다. 이에 김구는 장래에 일제와 대규모 전쟁을 하려면 인재양성이 없이는 성공할 수 없으니 분함을 참고 다수 청년들을 북쪽으로 데려가 군사훈련을 시키는 것이 당장 시급한 일이라고 하였다.91) 하여튼 안명근이 3살 연상의 김구를 특별히 여러 번 찾아가 도움을 요청한 것을 보면, 안중근 가문의 인사들이 김구를 그만큼 가깝게 생각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안중근 가문과 김구와의 관계는 안중근의 막내 동생 안공근이 김구와 연대하여 활동하면서부터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안공근은 1925년 안정근이 뇌병으로 농장개척을 포기하고 위해위로 이주하여 요양생활에 들어간 다음 상해 지역에서 안중근 가문을 대표하는 인사로 부상하였다. 그는 1925년 11월 임시정부 대통령 박은식의 서거 직전 전 민족적 통일을 강조한 박은식의 유언을 대필한 것을 계기로 독립운동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26년 6월 “철저한 독립운동자의 조직적 단결의 실현”을 위해 최창식 · 이유필 등과 함께 독립운동촉성회를 조직하고 그 회장에 선출되었다.92) 이어 1930년 1월 안공근은 지방적 · 파벌적 대립을 청산하고 대동단결하여 임시정부를 옹호 · 유지하자는 취지에서 이동녕 · 안창호 · 조소앙 · 김구 등 27인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창당하면서 김구와 활동을 함께 하게 되었다.93)

 

안공근과 김구가 본격적인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1931년 김구가 한인애국단을 조직하고 단장에 올랐을 때이다. 한인애국단은 임시정부가 침체에 빠진 독립운동의 활성화를 위해 “군사공작을 못한다면 테러공작이라도 하는 것이 절대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조직한 의열투쟁단체였다. 이러한 한인애국단은 일제 요인과 시설에 대한 파괴를 주요 임무로 삼고 있었다.94) 김구는 한인애국단의 실질적 운영을 안공근에게 맡겼고, 안공근은 한인애국단을 이끌면서 윤봉길 의거와 이봉창 의거라는 한국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날 위업을 엮어냈다. 이로써 김구의 위망이 중국에서 높아질수록 안공근의 위상도 높아갔다.

 

1932년 4월 윤봉길 의거 이후 안공근은 김구의 오른팔 역할을 하면서 1930년대 김구가 벌인 모든 사업에 깊이 관여하였다. 예컨대, 중국정부와 임시정부의 외교교섭, 중국정부가 김구에게 전달한 독립자금 관리와 사용, 한인애국단의 운영과 관리, 한국특무대독립군 같은 특무교육기관의 실질적인 운영, 친일파 玉觀彬 처단작업, 김구의 사조직 학생훈련소 운영 등등을 통해 김구와 밀착하여 활동하였다.95) 물론 이때 根字 돌림의 안경근, 生字 돌림의 안우생 · 안원생 · 안춘생 등 안중근 가문의 중년과 청년들이 안중근과 안공근의 후광을 등에 업고 대거 김구의 휘하로 들어가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로써 안공근은 안중근 가문의 젊은이들이 김구 휘하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게 하는 데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

 

1920년대 이후 안중근 가문의 유력인사인 안정근은 안창호를 받들었던 반면, 안정근의 아우 안공근은 처음에는 안창호를 지지하다가 나중에는 김구의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안창호가 안중근 가문의 임시정부 참여의 계기를 부여했다면, 김구는 안중근 가문의 다수의 젊은이들을 임시정부에 참여시켰다. 이는 1930년대 이후 안창호의 피체, 안정근의 투병, 안중근 가문 生字 돌림 인사들의 청년기 진입, 중국 국민당정부의 임시정부 지원 등의 여러 요인이 맞물려 나타난 결과였다.

 

안중근 가문이 안창호와 김구와 연대하여 독립운동을 벌인 것은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 양인과의 연대활동은 안중근 가문의 독립운동을 전 민족적인 차원으로 승화시켜 더욱 자랑스럽고 영광스럽게 역사로 만들어준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해방 후 김구세력과 안창호세력이 이승만세력과의 정치적 패권다툼에서 패배를 당하자 안중근 가문의 운명은 이승만정권 · 박정희정권 하에서 소외를 당할 수밖에 없는 힘겨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안창호와 김구는 안중근 가문에 영광과 시련을 동시에 안겨준 인사들이었다.

 

 

7. 안중근 가문 내 여성 독립운동가의 역할

 

한국독립운동사상 음지에서 활동한 여성들의 역할은 남성들의 그것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았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안중근 가문에도 여타 유수한 독립운동 가문들과 마찬가지로 직접 독립운동에 종사했거나 혹은 이면에서 남정네들의 독립운동을 묵묵히 도운 많은 부녀들이 있었다. 이들은 안중근 가문의 남성들이 지향한 민족과 국가의 독립 달성이라는 대의명분의 실현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삶과 행복을 희생하는 삶을 살아갔던 것이다.

 

안중근 가문의 여성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족적을 남긴 사람은 안태훈 진사의 부인이자 안중근의 모친인 조씨부인(조 마리아 : 趙姓女)이다. 조 마리아는 안중근 의거 이후 안중근 가문의 독립운동을 실질적으로 이끌어 나간 정신적 지주와 같은 인물이다. 그녀의 집안은 고조부 조완옥이 무과 급제 후 훈련원 주부를, 증조부조기원이통덕랑을, 큰오빠조규증이행수군절도사를지낸무반 가문이었다. 따라서 그녀는 무반 가문의 후예로서 향리가문에서 무반 가문으로 승격한 안중근 가문으로 시집을 왔던 것이다.96)

 

조 마리아는 투철한 독립정신의 소유자였다. 일찍이 안중근이 돈의학교 교장직을 버리고 민족운동에 투신하려 하자 그녀는 “집안일은 생각지 말고 최후까지 남아다웁게 싸우라”고 하였고,97) 1907년 5월 진남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는 수십 원에 상당하는 금붙이를 국채보상의연금으로 내놓았다.98) 또한 안중근 의거 후 변호사 선임문제로 평양에 가서 평양천주교당에 머물고 있을 때에 일본헌병대가 힐문하자 아들의 애국성과 진실성을 강조하며 자신도 아들을 따라 죽겠다고 호언하여 일본인들로부터 칭탄을 받았고,99) 안정근 · 안공근을 통해 옥중의 장남에게 “사형언도를 받는다면 깨끗이 죽어서 명문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도록 빨리 천국의 신 곁으로 가도록 하라”는 비장한 당부를 전하였다.100) 이로 인해 조 마리아는 안중근 가문 내에서 ‘女中君子’라는 평을 들었으며 안중근을 비롯한 자손들의 민족운동 투신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10년대에 안중근 가문이 중러 국경지대를 전전하며 생활할 때에 조 마리아는 남성들을 능가하는 담대한 기상을 보여 주었다. 무정부주의자 정화암은 “만주에서 이사를 가는데 마차에다 이삿짐을 잔뜩 싣고 가는데 마적들이 나타났어요. 총을 마구 쏘면서. 그러니까 같이 가던 청년들 수십 명이 전부 땅에 엎드려서 꼼짝 못해요. 이때 안중근의 어머님이 척 내려오더니 ‘이놈들아, 독립운동한다는 놈들이 이렇게 엎드리기만 하기야? 이렇게 엎드려 있다간 다 죽어’라고 大喝一聲했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벌벌 떠는 마부를 제치고 스스로 말고삐를 확 쥐더니 죽는 한이 있어도 가고 보자고 소리를 질렀다죠. ‘에야’ 소리 지르며 마차를 몰아 결국 무사했다는 것 아닙니까? 보통 여자가 아니었습니다”라고 회고하였다.101) 이는 안중근 가문이 망명 후에 온갖 고난을 겪을 때에 조 마리아가 굳건한 의지와 담대한 기상으로 가문을 이끌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중러 국경지대에서 조 마리아는 안정근 · 안공근의 활동을 격려하는 한편 자신이 직접 독립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임시정부가 펴낸 신문에 의하면, “(조 마리아는) 해외에 來한 후로 거의 寧日이 업시 東은 海蔘威로, 西는 바이칼에 至하기까지 奔走하여 동포의 警省에 종사하였다”고 하였다. 이는 조 마리아가 만주-노령 각지를 돌며 동포들의 민족의식 각성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음을 보여 준다.102) 조 마리아는 신화적 인물로 부상한 안중근의 모친이라는 배경 외에도 그녀 자신이 나이를 잊고 몸소 보여 준 독립활동을 통해 안중근 가문은 물론 한국독립운동계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다.

 

안중근 의거 직전 러시아로 망명한 안중근의 부인 김 베로니카(1878~1946)는 1920년대 초반에 상해로 이주하였다. 망명 생활 중에 김씨 부인은 시어머니를 모시고 가족을 건사하느라 온갖 신고를 맛보았지만, 그럼에도 시어머니 조 마리아를 본받아 안중근의 미망인이라는 막중하고도 힘겨운 자리를 굳건히 지켜냈다. 따라서 그녀가 안중근을 숭배하는 많은 독립운동가들에게 독립의지를 가다듬게 하는 숨은 역할을 수행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안정근의 부인 李貞瑞는 1910년 중반 가족이 러시아에 있을 때, 그리고 1925년 남편이 발병하여 위해위에 머물고 있을 때, 수차 일경의 삼엄한 감시를 피해 국내로 잠입하여 만석지기의 부호인 모친 왕재덕에게서 막대한 생활자금과 독립자금을 받아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울러 그녀는 남편이 한국에서 유망한 청년들을 비밀리에 모집하여 중국군관학교에 입교시킬 때에 수차 한국을 왕래하며 그 연락사무를 맡아 보았다.103) 나중에 그녀의 딸 안미생은 김구의 큰아들 金仁의 아내로서 시아버지와 남편의 독립활동을 성심으로 도왔고, 해방 후에는 김구의 비서직을 맡아 건국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안중근의 여식 安姓女도 할머니 조 마리아의 기상을 이어받아 독립운동을 착실히 벌였다. 그녀의 며느리 오항선의 회고담에 의하면, “시어머니는 일제의 감시가 워낙 심한 탓에 전면에 나서기 힘들어 몰래 독립운동을 했다” “시어머니와 함께 독립군들이 입다 헤진 군복을 깁고 있으면 난데없이 일본군들이 나타나 집안을 휘젓고 다니며 비밀문서와 숨겨 놓은 총기를 찾기 위해 가택수색을 했어. 잠시도 편히 놔두질 않았지” “日警들의 탄압을 피해 집을 옮겨 다니는 등 고생이란 고생은 다했지” “이사를 밥 먹듯이 했어” “한번은 시어머니가 일본놈들에게 잡혀 9일 동안 감금돼 있다가 구사일생으로 탈출했다”고 하였다.104) 이처럼 일제로부터 온갖 고난을 당하면서도 굴하지 않고 비밀리에 독립운동에 종사한 것은 안중근 가문의 모든 여성들에게 해당되는 일상적인 일이었다고 판단된다.

 

 

8. 맺음말

 

한말부터 일제시기까지 안중근 가문은 일제침략의 정도와 수순에 맞추어 자신들의 독립운동 방략을 단계적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즉, 을사늑약 후 안중근 가문은 학교운영 · 국채보상운동 · 학회활동 등 애국계몽운동에 종사하였고, 1907년 이후 일제의 한국강점이 가시화되자 의병운동과 의열투쟁 쪽으로 투쟁노선을 바꾸었으며, 경술국치 후에는 국외로 망명하여 독립군양성 및 독립기지 건설운동을 펼쳤다. 그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후에는 임시정부 요원으로서 북만주 · 상해 등지에서 독립단체 통합운동 내지 유일당운동을 벌였고, 1930년대 이후에는 일제에 직접 타격을 가할 수 있는 특무공작과 결사활동에 치중하였다. 한마디로 안중근 가문은 한국독립운동사를 대변할 정도로 다채로운 활동을 펼쳤는데, 그러한 활동들은 시기상 · 형태상 · 성격상의 단계적인 변화 · 발전 과정을 밟았던 것이다.

 

안중근 가문의 독립운동은 천주교 신자들이 집단적 ·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한 매우 드문 사례에 속한다. 일제시기에 프랑스 선교사들과 조선천주교단은 정교분리정책 및 정치불간섭주의에 따라 신도들의 현실참여를 적극 만류하고 저지하였다. 이에 따라 국내의 소수 천주교 신자들이 개인 자격으로 독립운동을 벌이거나 간도 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이 독립단체를 조직하여 무력항쟁을 벌인 사례들을 제외하면, 대체로 천주교 신자들의 독립운동 참여는 여타 종교 신자들의 그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약한 편이었다. 이런 실정에서 안중근 가문이 천주교 신앙을 바탕으로 대거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은 한국 근대 기독교 민족운동사상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이에 안중근 가문의 독립운동에 나타난 특징을 몇 가지로 나누어 간략히 설명하면 아래와 같다.

 

안중근 가문의 독립운동은 상무적 가풍에 영향을 받았다. 안중근 가문은 조선후기에 해주 지역에서 향리직을 세습하다가 무과로 진출하여 다수의 무과급제자를 배출했다. 그러다가 안인수대에 이르러 넉넉한 재부를 바탕으로 자식들에게 문과 교육을 시켰다. 이에 따라 안중근 가문의 상무적 가풍은 문필을 중시하는 쪽으로 점차 변해 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이 누대를 거쳐 무과 급제에 필요한 병서와 무술을 다년간 학습했던 경험은 정신자세와 생활방식에 그대로 녹아들어 있었다. 따라서 상무적 가풍은 민족수난기에 안중근 가문의 적극적인 현실참여와 독립운동 가담양상을 밝혀 주는 하나의 단서가 된다고 판단된다.

 

안중근 가문의 시발점인 안인수는 해주 지역에서 미곡도매상을 경영하여 수백 석의 토지재산을 확보하였다. 이로써 그는 황해도에서 중상위급 지주로서 중앙정부로부터 진해현감이란 관직을 받았을 정도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안인수의 재산은 그의 6형제에게 그대로 이어져 을사늑약 이후 안중근 가문이 민족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칠 때에 밑거름이 되었다. 안중근 가문 인사들은 대체로 생활대책 마련에 적극적이었으며, 그 외에 안정근은 만석지기 장모의 도움을 크게 받고 있었고, 1930년대에 안공근은 중국정부의 지원금을 관리 · 사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1910년대 이후 안중근 가문은 다른 독립운동가들에 비해 비교적 넉넉한 상태에서 독립운동에 가담하였고, 열렬한 교육열에 바탕으로 자손들에게 근대교육을 시켜 새로운 시대에 동참할 인재들을 계속 길러냈다.

 

안중근 가문은 안인수 사후 가문을 이끌고 있던 안태훈의 인도로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안중근 가문은 일단 천주교를 받아들인 후에는 점차 천주교를 내면으로 받아들이는 신앙단계로 나아갔다. 세례를 받기 위해 교리문답서를 읽고 베껴 쓰는 과정에서, 주일마다 공소에 참여하여 예배를 드리는 과정에서 그들은 점차 참다운 신도로 변모해 갔다. 이러한 체화과정을 거친 후에 안중근 가문의 인사들은 천주교를 인격도야와 사회변화의 원동력으로 삼아야 한다는 천주교 입국론을 정립하기에 이르렀고, 또한 천주교의 교리나 천주교단의 현실불참여 방침과 달리 “국가 앞에는 종교도 없다”며 천주교와 민족운동을 합일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로써 안중근 가문은 천주교 민족주의에 기반한 독립운동 집단으로 거듭나 십여 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한국독립운동의 名家가 되었다.

 

안중근 가문은 일제시기 유력한 독립운동가인 안창호 · 김구와의 인연을 바탕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거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안중근 가문은 안중근 의거 이전에 이미 안창호 · 김구와 일정한 관계를 맺었는데, 이는 안중근 가문이 고국을 떠나 중러 국경지대에서 활동하다가 임시정부 성립 이후에 상해로 진출하여 활동할 때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안정근이 임시정부 간도특파원으로서 간도 지역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에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여 청산리전투의 기반을 닦았으며, 안공근이 김구의 최측근으로서 한인애국단을 비롯한 독립단체들을 관리 · 운영하면서 이봉창 의거 · 윤봉길 의거와 같은 의열투쟁을 만들어 냈다.

 

안중근 가문은 안중근 의거와 안명근 의거를 이룩하며 유력한 독립운동 가문으로 성장했다가 해방 후 친미정권에 가담하지 못하고 사라져가는 명멸 과정을 거쳤는데, 이때 안창호 · 김구는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해방 후에 안창호의 실력양성론을 계승한 흥사단세력과 반미자주노선에 따라 남북협상에 참여하며 민족통일노선을 견지했던 김구세력은 이승만정권으로부터 정치적 소외를 당하였다. 이에 따라 중국대륙에서 안창호 · 김구를 도와 독립운동을 벌였던 안중근 가문은 그들에게 부여된 사명을 마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따라서 안중근 가문과 안창호 · 김구의 연대는 그들에게 독립운동의 명가라는 영광과 새로운 시대에 진입하지 못하고 밀려나야만 하는 시련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 이 연구는 2009년 한국교회사연구소의 학술연구비 지원을 받아 수행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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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중근에 대한 종합적 연구로는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편, 《안중근과 그 시대》 · 《안중근 연구의 기초》, 경인문화사, 2009 ; 신운용, 《안중근과 한국근대사》, 채륜, 2009. 이 외에 안중근에 관한 문헌 · 자료 소개, 연구논문 · 연보에 대해서는, 원재연, <안중근 연보>, 《교회사연구》 9, 한국교회사연구소, 1994 ; 윤병석, <안중근의사 전기의 종합적 검토>, 《한국근현대사연구》 9, 한국근현대사학회, 1998 ; 조광, <안중근 연구의 현황과 과제>, 《한국근현대사연구》 12, 2000 ; 조광, <안중근연구 100년 : 현황과 과제>, 《안중근연구의 성과와 과제》, 채륜, 2010. 또 안중근 관련 사진과 유묵에 대해서는, 《대한국인 안중근 : 사진과 유묵》, 안중근의사기념관, 2001.

 

2) 송우혜, <독립운동가 안정근의 생애>, 《水邨朴永錫敎授華甲紀念 한국민족운동사논총》, 탐구당, 1992 ; 한시준, <안공근의 생애와 독립운동>, 《교회사연구》 15, 2000 ; 오영섭, <안공근의 항일독립운동>,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 1, 경인문화사, 2007 ; 오영섭, <개화기 안태훈(1862~1905)의 생애와 활동>, 《한국근현대사연구》 40, 2007 ; 오영섭, <일제시기 안정근의 항일독립운동>, 《남북문화예술연구》 2, 2008 ; 이동언, <안명근의 생애와 독립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1, 2008.

 

3) 오영섭, <안중근가문의 독립운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 30, 2002 ; 도진순, <안중근 가문의 百世遺芳과 忘却地帶>, 안중근하얼빈학회 학술발표논문, 2009 ; 조광, <안중근의거 이후 그 가문의 동향>, 《안중근 연구의 성과와 과제》, 채륜, 2010.

 

4) 오영섭, <개화기 안태훈의 생애와 활동>, 221~222쪽.

5) 오영섭, <안중근가문의 독립운동>, 22쪽.

6) 김구 저,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돌베개, 1997, 56쪽.

 

7) 안인수는 안중근이 태어났을 때 배와 가슴에 7개의 흑점이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을 받고 태어났다고 하여 자를 아명을 應七이라고 지어주었다.

 

8) 안중근, <안응칠역사>, 《안중근의사자서전》, 안중근의사숭모회, 1979, 22쪽.

9) 윤경로 옮김, 김구 저, 《105인 사건 공판 참관기》,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1, 162~163쪽 ;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217쪽.

10) 《순흥안씨참판공파족보》 5, 1998, 3913~4025쪽.

11) 宋相燾, <安敬根>, 《騎驪隨筆》, 국사편찬위원회, 1971, 159쪽.

12) 朴殷植, <安重根>, 윤병석 편, 《안중근전기전집》, 국가보훈처, 1999, 311쪽.

13) 박태균, <민족운동에 몸 바친 비운의 안중근 일가>, 《월간 말》, 1992. 11, 81쪽.

14)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7, 국사편찬위원회, 1968, 204~205, 277~284쪽.

15) <安義士의 遺族>, 《독립신문》 1920년 1월 31일.

16) 《순흥안씨참판공파족보》 5, 3913~4030쪽 ; 오효진, <영원한 광복군 安椿生>, 《월간조선》 1986년 8월호.

17) 박태균, <민족운동에 몸 바친 비운의 안중근 일가>, 《월간 말》 1992년 11월호, 80~85쪽.

18) 오영섭, <개화기 안태훈의 생애와 활동>, 222~226쪽.

19) 《순흥안씨참판공파족보》 5, 1998, 3913~4025쪽.

 

20) 안중근의 둘째 큰아버지 안태현은 ‘初試’에 급제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아마 안태훈처럼 문과 진출을 위해 사마시의 초시를 보았던 것으로 보인다.

 

21) 김구 저,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58쪽.

22) 안중근, <안응칠역사>, 36쪽.

23) 김구 저,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57쪽.

24) 안중근, 앞의 책, 22~23쪽.

25) 안중근, 위의 책, 27~28, 59쪽.

26)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7, 173~174, 293쪽.

27) 안중근, 앞의 책, 17쪽.

 

28) <안중근의사의 고향 청계동①>, 《조선일보》 1979년 9월 2일자. 로베르트 신부는 안중근 가문의 청계동 이주 원인으로서 기왕에 알려진 안태훈과 갑신개화파의 관련문제를 제쳐두고 경제적 요인만을 언급하였다. 그에 의하면, 서해안에 청어가 줄어들어 청어잡이가 점점 하락세를 나타냈기 때문에 안중근 가문이 이전의 권세를 누리지 못하고 해주를 떠나 청계동으로 이주하게 되었다고 한다.

 

29) 안학식 편저, 《의사안중근전기》, 해동문화사, 1963, 15쪽.

30)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6, 224쪽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7, 275쪽.

31) 안중근, <안응칠역사>, 20~21쪽 ; 김구 저,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59쪽.

 

32) 안태훈의 사촌형 安泰國, 숙부 安仁弼, 인필의 아들 태원 · 태완 등의 생활은 빈곤하였다. 이로 미루어 안인수의 후손들은 넉넉했던 반면, 안인수 형제들의 후손들은 형편이 좋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한국독립운동사자료》 7, 174~175쪽).

 

33) 안학식 편저, 《의사안중근전기》, 해동문화사, 1963, 39~40쪽 ; 안중근, <안응칠역사>, 56~67쪽.

34) 오영섭, <개화기 안태훈의 생애와 활동>, 248~258쪽.

35) 안중근, <안응칠역사>, 110~112쪽.

 

36) 안중근, <안응칠역사>, 110~112쪽. “부친의 재산으로 수천 석의 수입이 있는 전답이 있었으나 점차 없어져 지금은 수백 석의 수입이 있을 뿐이다”는 안중근의 주장은 과장된 것이다(<공판시말서>, 《한국독립운동사자료》 6).

 

37) <참고인심문조서>, 《한국독립운동사자료》 6, 223쪽.

 

38) 안중근의 장백부 安泰鎭은 일찍이 부호였으나 1909년경에 빈곤해졌다고 한다. 그는 장남으로서 祭田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극도의 생활곤란은 겪지 않았을 것이나 넉넉한 편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한국독립운동사자료》 7, 174쪽).

 

39) <安義士의 遺族>, 《독립신문》 1920년 1월 31일.

 

40) 이은숙, 《가슴에 품은 뜻 하늘에 사무쳐》, 인물연구소, 1981, 제2~3장 ; 허은 구술, 《아직도 내 귀에 서간도 바람소리가》, 정우사, 1995, 제1장.

 

41) 오영섭, <일제시기 안정근의 항일독립운동>, 76~77쪽. 1918년경에 안정근은 니콜리스크에서 제화판매상을 하였고, 안공근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다. 《朝鮮人의部 : 재만주의부(6)》, <要注意 鮮人의 行動에 關한 件>(1918. 4. 6).

 

42) <西比利亞의 稻農>, 《독립신문》 1920년 1월 17일.

43) 송우혜, <독립운동가 안정근의 생애>, 753쪽.

44) 한시준, <안공근의 생애와 독립운동>, 128~129쪽.

45) 안천, 《일월오악도》 2, 교육과학사, 1999, 260쪽.

46) 이전, 《안중근혈투기》, 연천중학기성회, 1949, 18쪽.

47) 《公文編案 要約》 1, 서울대학교 규장각, 1999, 322, 325쪽.

48) 장석흥, <19세기말 안중근 서한의 자료적 성격>, 156쪽.

49) 안중근, <안응칠역사>, 35쪽 ; 김구 저,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67쪽.

50) 이전, 《안중근혈투기》, 27~28쪽.

 

51) 《뮈텔 주교 일기》 2, 한국교회사연구소, 1993, 234쪽 ; 차기진, <안중근의 천주교 신앙과 그 영향>, 《교회사연구》 16, 2001, 11~15쪽.

 

52) <안중근의사의 고향 청계동①>, 《조선일보》 1979년 9월 2일.

 

53) 원재연, <안중근 연보>, 《교회사연구》 9, 1994, 137~138쪽 ; 윤선자, <‘한일병합’ 전후 황해도 천주교회와 빌렘 신부>, 《한국근현대사연구》 4, 1996, 114쪽.

 

54) 한국교회사연구소, 《황해도 천주교회사》, 196쪽.

55)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1897년도 보고서>, 《서울 교구 연보》 I, 명동천주교회, 1984, 209쪽.

56) 뮈텔 주교에 의하면, 안태진은 천주교의 진리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조상 제사 문제 때문에 교우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57) <안중근의사의 고향 청계동①>, 《조선일보》 1979년 9월 2일.

 

58) <안중근의사의 고향 청계동②>, 《조선일보》 1979년 9월 4일 ; 윤선자, <‘한일병합’ 전후 황해도 천주교회와 빌렘 신부>, 114쪽 ; 차기진, <안중근의 천주교 신앙과 그 영향>, 《교회사연구》 16, 2001, 11~15쪽. 안태훈은 베드로, 안태건은 가밀로, 안중근은 토마스란 세례명을, 안태훈의 모친 고씨부인은 안나, 부인 조씨는 마리아, 누이는 막달레나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59) 《뮈텔 주교 일기》 2, 한국교회사연구소, 1993, 234~235쪽.

60) 《독립유공자증언록》 1, 안춘생편, 8쪽.

61) 위의 책 1, 안춘생편, 11쪽.

62) 안중근, <안응칠역사>, 40쪽.

63) 안중근, 위의 책, 54쪽.

64) 오영섭, <안중근가문의 독립운동>, 29쪽.

65) 오영섭, 위의 글, 29쪽.

66) 안중근, <안응칠역사>, 56~57쪽.

 

67) 빌렘 신부가 로렌 지방의 친구들에게 보낸 서한(1912. 3. 19) ; 윤선자, <‘한일병합’ 전후 황해도 천주교회와 빌렘 신부>, 123쪽에서 재인용.

 

68) <보고서>, 《한국독립운동사자료》 7, 534쪽.

69) <보고서>, 《한국독립운동사자료》 7, 539쪽.

70) <안응칠 심문조서⑩>, 《한국독립운동사자료》 6, 284쪽.

71) 《뮈텔 주교 일기》 4, 한국교회사연구소, 1998, 448~449쪽.

 

72) 金正明 編, 《조선독립운동》 I, 동경 : 原書房, 1967, 189~190쪽. “천주교 동포에게, 제군은 대한민족이 아닌가. 천주는 여러분의 선조를 우리 대한반도에 파견, 이 땅을 세우고 거기에서 자유와 복락을 향유케 하셨다. 제군의 선조도 이 은혜 깊은 한국 땅의 우로 중에서 생장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다수의 동포가 유혈로써 자유를 획득하려고 급급하고 있는 이 때를 당하여 30만에 가까운 천주교 동포는 왜 가만히 소리 없이 있는가. 제군은 자진하여 한족이 아니기를 바고 있는가 아니면 천주의 명을 무시하는 저 민족의 노예가 되고자 하는가. 만일 제군이 참으로 천주의 명을 받들고자 한다면 불의의 압박에 시달리는 자들을 위해 솔선 일어나야 할 것이다. 뿐더러 정의와 자유를 위해 죽는 자는 먼저 신의 도움을 받을 것이다. 다른 민족 간에서도 그렇다면 하물며 우리 동포 민족 간에서이랴. 듣건대 주교의 명이 없기 때문에 일어나지 않는다고, 그러나 주교는 불국인이다. 가령 제군이 불국인이라면 이미 우리의 운동의 필요함을 인정하였을 것이고 또한 주교인 불국인에게 있어서도 그렇게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하등의 도움도 안주고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을 다름이 아니라 외국인인 우리 사업에 간여, 누를 사랑하는 본국에 끼칠까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의 관점에서 주교는 제군의 두목일지라도 민족의 관점에서 보면 제군은 일인에 의해 학살당한 한민족 남녀의 형제자매가 아닌가. 만일 천주교도 동포 가운데 그런 사람이 없다고 한다면 2천만 한민족을 제군을 일인 이상으로 증오해야 할 원구로 간주할 것이다. 그럴 때 제군 자신은 물론 천주교도 전체의 대해 온갖 원한과 압박의 손이 내릴 것이다. 오호, 30만 천주교 동포여, 아직 늦지 않았으니 일어날지어다. 민족의 자유를 획득하고 자유의 국가를 건설하여 거기서 2천만 동포는 소리를 같이하여 신의 영광을 찬송하게 될 것이다.”

 

73) 조광, <일제하 무장독립투쟁과 조선천주교회>, 《교회사연구》 11, 1996, 168~169쪽.

74) 안중근, <안응칠역사>, 111~112쪽.

75) 《한국독립운동사자료》 7, 243~244쪽.

76) 박은식, <안중근전>, 287쪽.

77) <제8회 신입회원 입금수납보고>, 《西友》(1907. 7).

78) 《한국독립운동사자료》 7, 292쪽.

79) <참고인 심문조서>, 《한국독립운동사자료》 6, 225, 230쪽.

80) 안학식, 《의사안중근전기》, 만수사보존회, 1963, 53~54쪽.

81) 곽림대, 《못 잊어 화려강산》, 대성문화사, 1973, 25~26쪽.

82) 이명화, 《도산 안창호의 독립운동과 통일노선》, 경인문화사, 2002, 197~202쪽.

83) 주영한, <安島山全書>, 《주영한문집》 1, 요한기념사업회, 1982, 478쪽 ; 한시준, <안공근의 생애와 독립운동>, 121~122쪽.

84) 곽림대, 《못 잊어 화려강산》, 178~179쪽.

85) 《한국독립운동사자료》 4, 사료편 제4, 210쪽.

86) <일기>, 《도산안창호전집》 4,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2000, 833~900쪽.

87) 오영섭, <일제시기 안정근의 항일독립운동>, 102, 108~110쪽.

88) 오영섭, <일제시기 안공근의 항일독립운동>, 281~282쪽.

89) 오영섭, <안중근가문의 독립운동>, 49쪽.

90) 김구 저,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57쪽.

91) 김구 저,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217쪽.

92) 《한국민족운동사료 : 중국편》, 국회도서관, 1976, 598쪽.

93) 《한국민족운동사료 : 중국편》, 645~646쪽.

94) 김구 저,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326쪽.

95) 오영섭, <일제시기 안공근의 항일독립운동>, 292~297쪽.

96) 《백천조씨대동세보》 권2, 司諫公治派, 1998, 36~38쪽.

97) 안학식, 《의사안중근전기》, 56~57쪽.

98) 《대한매일신보》 1907년 5월 29일.

99) <是母是子>, 《대한매일신보》 1910년 1월 29일 ; 박은식, <안중근>, 298쪽.

100) <당찬 母>, 《만주일일신문》 1910년 2월 13일.

101) 이정식 · 김학준 · 김용호 편, 《혁명가들의 항일회상》, 민음사, 2005.

102) <安義士의 遺族>, 《독립신문》 1920년 1월 30일.

103) <安美生女史와 一問一答>, 《경향잡지》 1946년 4월.

104) 도진순, <安重根家門의 百世遺芳과 忘却地帶>, 안중근하얼빈학회 학술회의논문집, 2009, 197쪽에서 재인용.

 

[교회사 연구 제35집, 2010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오영섭(연세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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