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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한국천주교회의 성체거동 역사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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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8-16 ㅣ No.1235

한국천주교회의 성체거동 역사에 관한 연구*

 

 

국문 초록

 

본고는 한국천주교회의 성체거동에 관한 과거와 현재의 의미를 통사적으로 평가하는 연구이다. 본 연구는 이를 통하여 한국천주교회의 미래를 조망하고자 한다.

 

성체거동은 성체신심의 표현이므로, 본 연구는 우선 성체신심을 한국천주교회가 언제 어떻게 수용하며 발전시켰는지를 교회 측 사료들에서 확인했다. 논고는 이 자료들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검증했다. 성체신심을 다루고 있는 전통 교리서들의 출판과 그 전개 및 보급을 점검하는 것이 그 하나고, 성체신심을 성체거동의 양식으로 어떻게 한국천주교회가 그 영성으로 현장화했는지가 그 둘이다. 하여 교회가 신자들에게 성체신심을 어떻게 가르쳤는지, 그리고 그렇게 전해진 교리 속 성체신심이 어떻게 신자들에게 수용되며 이어졌는지 밝힌 후, 최종적으로 성체거동에 관한 교회의 대표적 성체거동 행사들을 사례별로 압축하며 그 특징들을 약술했다.

 

한국 가톨릭교회의 미래는 전승되어 온 신앙 성장의 동력들을 어떻게 소진하지 않고 발전적으로 계승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본고는 성체거동과 그에 관련된 신심 활동은 한국천주교회가 이어받은 고귀한 영적 자산이며, 따라서 이는 미래 교회의 성장 동력임에 틀림없음을 거듭 확인하고자 한다.

 

 

1. 서론

 

“받아 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 받아 마셔라, 이것은 내 피다.”라는 예수의 말씀에1) 기원을 두는 성체성사의 제정과 성체에 대한 관심은 교회의 시작부터 함께했고,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성체신심은 중요한 신앙의 요소가 되었다. 로마의 박해를 거쳐, 313년에 신앙의 자유를 맞이한 교회는 거룩한 전례 행위를 수행할 장소로 성당을 신축했고, 정규적인 미사가 봉헌되면서 성체 공경에 대한 신심은 확장되었다. 하지만 교회는 중세로 이어지면서까지 전례 용어로 라틴어만을 사용했다. 신자들은 어려운 개념의 언어보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성체신심을 선호하게 되었고, 성체현시와 성체강복, 성체거동 등 ‘미사 밖 성체신심’ 활동들이 적극적으로 전개되었다.

 

성체신심 중 11세기 말부터, 해마다 주님 부활 대축일을 사흘 앞둔 시점인 ‘성목요일’에 성체를 현양(顯揚) 감실로 모시는 예식에서 발전된 성체거동은 특히 신자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았다. 13세기 말에는 독일과 프랑스 지역 교회들은 해마다 전례력으로 성체축일이 되면 성체거동을 실행했고, 거동에 관한 절차와 방식 또한 다양한 형태로 변화되었다. 15세기 무렵부터 성체거동은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공식적인 전례 행위로 공인되었고, 이는 성체신심 확산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2) 성체거동은 ‘성체 신비에 대한 경배를 공식적으로 선포한다’는 의미에서 장엄한 행렬로 표현되었고, 성당 밖 시가지까지 이동하는 동선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 후 제2차 바티칸 공의회3)와 1965년에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반포된 회칙 「신앙의 신비」4)에서는 성체신심과 그와 관련된 모든 행사들이 전례 정신과 조화를 이루면서 실행되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었다.5) 그리고 교회는 전례 때 모국어 사용을 허용한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신자들에게 매일 미사와 영성체 할 것을 권고하였다.6) 그 결과 ‘미사 밖 성체신심’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지만, 성체거동의 경우는 세계성체대회로 발전하기도 했다. 이처럼 성체거동은 중세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신자들에게 성체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데 각별한 역할을 했고, 성체성사의 위의(威儀)를 높이는 데 큰 비중을 차지해 왔다.

 

이러한 내용을 토대로 논고는 한국천주교회에서 성체와 성체신심에 대한 이해와 관심, 그리고 성체거동에 관해 통사적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성체신심과 성체거동에 대한 교회사적 연구는 최경선의 논문이 있다.7) 최경선은 논문에서 ‘조선 후기에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성체신심과 관련하여 신앙의 자유와 미사, 성체강복과 성체거동, 신심 단체로 성체회의 수용 등을 간략하게 언급했다. 그런 다음 최경선은 한국천주교회에서 대부분의 신심이 교회의 지도층이 주관하는 행사 위주의 소극적 성격을 지닌다고 보았다. 그 이유로 첫째, 박해 이후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된 교회는 정부와 마찰을 피하고자 했고, 둘째, 일제강점 하에서 선교사들이 정교분리의 원칙을 고수했기 때문이라고 일갈하였다.

 

이러한 주장과는 다른 입장에서 논자는 한국천주교회에서 성체거동의 시작과 그 흐름의 양상(樣相)을 사료에 근거하여 고찰해 보고자 한다. 그 내용으로 본고는 첫째, 한국천주교회에서 발간된 교리서와 『경향잡지』의 논설과 사설 등을 통해 성체와 성체신심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살펴볼 것이다. 둘째, 1784년 이후 박해 시기, 개항과 근대를 거치면서 성체와 성체신심에 관한 신자들의 관심을 주목해 볼 것이다. 셋째, 성체거동의 시작과 흐름, 확산 과정을 파악한 후 성체거동이 한국천주교회에 미친 영향을 확인해 보고자 한다.

 

논고의 연구 범위는 천주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던 때부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영향으로 성체거동이 축소되던 시기로 1970년대까지이며, 그 이후 성체거동의 변천 과정은 추후의 연구 과제로 남겨두고자 한다. 연구의 주된 자료는 『경향잡지』, 『뮈텔 주교 일기』, 『드망즈 주교 일기』 등이다. 『경향잡지』에서는 과거 성체거동과 관련한 행사의 내용을 살필 수 있으며, 『뮈텔 주교 일기』에서는 성체거동에 대한 교구장 뮈텔의 관심과 성체거동을 했던 때와 장소,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드망즈 주교 일기』도 1911년 이후 대구대목구장을 역임했던 드망즈 주교의 성체거동에 관한 관심을 볼 수 있는 자료가 된다.

 

 

2. 성체와 성체신심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평신도의 자발적 학문 탐구로 인해 형성된 한국천주교회는 그 시작부터 미사 집전자인 사제의 부재로 인해 성체성사가 불가능했다. 그 후 선교사제와 조선인 사제가 사목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계속되는 박해의 영향 속에서 미사는 비밀리에 집전되었고, 신자들은 제한적으로 성체성사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한 이유로 성체와 성체성사에 대한 신자들의 체험에는 한계가 있었지만, 신자들은 당시에 보급된 교리서의 영향으로 성체의 중요성과 그와 관련된 교회의 가르침을 이론적으로는 인지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대표적인 교리서로는 『성교요리문답(聖敎要理問答)』이 있었다. 천주교의 근본 교리를 문답식으로 풀이한 이 교리서는 ‘사본요리(四本要理)’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聖洗’, ‘告解’, ‘聖體’, ‘堅振’의 네 가지 교리를 총 154조목으로 나누어 풀이하였다.8) 그 조목 중에 ‘성체’ 교리는 총 24개의 문답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체’ 교리의 전반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첫 번째 조목은 ‘성체는 무엇인가’라고 질문한 다음, ‘성체’는 ‘천주교에서 가장 중요한 성사’이며, ‘참 하느님이며 참 사람이신 예수’의 ‘天主性과 靈魂과 肉身’이 ‘麵酒形像’, 즉 ‘성체’ 안에 감추어져 있다고 언명했다.9) 그런 다음 성체성사는 ‘하느님의 사랑과 도움’의 근원 하느님 자체를 내어주는 성사임을 강조하였다.10)

 

그다음 조목에는 ‘성체성사’가 ‘예수에 의해 수난 전날, 최후의 만찬 때에 제정된 것’임을 설명하면서,11) 성체성사를 집전하는 권한은 사제에게 있으며, 미사 때에 성체성사가 이루어진다는 사실과 성체성사의 궁극적인 재료는 ‘예수의 몸과 피’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였다.12) 이어서 교리서는 미사를 통해서 준비된 ‘빵과 포도주’가 예수의 몸과 피로 변화됨과 동시에, 성체는 ‘면형(麵形)’으로 나누어지면서도 각각의 ‘면형’ 속에는 예수의 몸 전체가 온전히 깃들어 있고, 그 순간 천상에서도 예수가 있다는 사실을 설명해 놓았다.13) 또한 교리서는 예수가 성체성사를 제정한 이유를 성체가 인간의 영혼을 기르는 양식이기에, 궁극적으로는 하느님과 영원히 결합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하였다.14) 그런 다음 교리서는 성체를 받아 모시는 신자의 의무와 규정,15) 영성체(領聖體)를 하게 되면 신자들이 얻게 되는 영적인 유익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16) 그리고 성체를 받아 모시는 준비 과정(空腹齋 준수)과 예비 절차(領聖體 전 회개의 마음과 고해성사)에 대해서도 설명한 후,17) 영성체 후에 신자들의 마음가짐과 태도에 대해서도 서술하였다.18) 정리해 보면, 교리서는 성체의 중요성과 성직자에 의해 거행되는 미사와 성체성사 제정의 역사적 배경과 의미를 설명한 후 성체성사의 신비와 영성체에 대한 규정 등 천주교 신자들이 알아야 할 기본적인 성체 교리 내용을 이해시켜 주었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은 이 교리서를 통해 성체성사의 중요성을 받아들였고, 성체의 가치를 깨달을 수 있었다.

 

개항기에는 천주교와 관련된 다양한 교회 서적들이 인쇄되어 보급되었다. 그중에 성체와 관련된 내용이 기술된 교리서로 『성교요리(聖敎要理)』가 있다. 천주교 교리를 문답식으로 해설하고 있는 이 교리서는 원래 한문본이며, 한글 번역자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한글 필사본에 ‘1876년 5월 13일자 블랑(J. Blanc, 白圭三, 1844~1890) 신부의 서명’이 적혀 있고, 블랑 신부의 조선 입국이 1876년 5월 5월인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 교리서는 그 이전에 번역·필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9) 『성교요리』는 총 425조목의 문답으로 되어 있는데, 그중 성체성사와 관련된 내용은 350~382조목 33개의 문답이 있다. 33개의 문답 중에 성체성사에 대한 기본적인 교리는 350~370조목이고, ‘영성체에 대한 규정’은 371~382조목이다.20) 대부분의 질문과 교리 내용은 『성교요리문답』과 동일하지만, 답변은 그것보다 더 간략하면서도 이해하기 쉽게 이루어져 있다. 『성교요리문답』에는 ‘성체’에 대한 첫 번째 문답이 신학적인 내용을 폭넓게 담고 있었다면, 『성교요리』는 예비 신자들이 알기 쉽고, 이해하기 쉽도록 간결한 문체로 답변 내용을 기술하였다. 즉, 성체성사 부분의 첫 번째 조목은 ‘성체가 무엇인가’라고 질문한 후, 답변으로 ‘예수의 살아 있는 육신과 살아 있는 피’라고 간략하게 말하고 있다.21) 정리해 보면, 『성교요리』는 예비신자들이 성체와 성체성사 등 중요한 교리에 대해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저술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교리서는 인쇄로 간행되지는 못한 채, 필사로만 전해졌다.

 

비슷한 시기에 성체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교리서로 『셩교백문답(聖敎百問答)』이 있다. 이 책의 서두에는 ‘천주 존재에 대한 첫 번째 문답’에서 ‘천지 만물의 참된 주님에 대한 백 번째 문답’을 담고 있는 교리서임을 밝히고 있다. 천주교의 4대 교리(天主存在, 降生救贖, 三位一體, 賞善罰惡)와 칠성사 중 ‘성세·고해·성체’ 부분만 설명하고 있으며, 그중에서 92번째부터 98번째 문답까지가 ‘성체’와 관련된 내용이었다.22) 특히, 교리서는 ‘성체는 무엇인가’23)에 대한 원론적인 가르침에서부터, 예수가 성체성사를 제정한 이유24)와 미사 때 성체성사가 이루어진다는 사실25)을 언급해 놓았다. 이어서 ‘면형’ 안에 예수의 몸이 있고, 그 이유에 대해서 ‘해를 가리는 구름’과 ‘임금의 얼굴을 가리는 주름’ 등을 비유적으로 가르치고 있다.26)

 

또한 교리서는 ‘면형’으로 나누어지면서도 각각의 조각 안에 온전히 존재하는 예수의 몸에 대한 신비를 설명하고,27) ‘거울에 비치는 태양 빛’의 비유로 그 내용을 정리해 놓았다.28) 마지막으로 ‘성체’를 받아 모시는 사람들은 선행에 힘쓸 것을 강조하는 한편, 이를 ‘임금이 개인 집에 방문한다면 가져야 하는 마음 자세’의 비유로 설명하였다.29) 정리해 보면, 『셩교백문답』은 성체와 성체성사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저술된 교리서임을 알 수 있었다. 특징적으로 교리서는 성체의 신비를 여러 가지 비유를 통해 설명함으로써 신자들이 성체성사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자 노력했다.

 

이 시기에 나온 또 다른 교리서 중에는 ‘나이가 많고 우몽(愚蒙)한 사람들이 천주교에 입교하기 위하여 마땅히 지켜야 할 4가지 규구(規矩)’와 명백히 외워야 할 7가지 경문(經文)을 아주 간략하게 적어 놓은 것으로 『진교절요(眞敎切要)』가 있다.30) 이 책은 다른 교리 내용들과 함께 칠성사 중 4가지 성사만 12개의 문항으로 엮으면서, 그중에 4문답부터 7문답까지를 성체성사에 대해 다루고 있다. 또한 4~6문답은 성체성사에 대한 간략한 내용을 설명하고 있으며,31) 7문답에는 ‘성체성사’에 대한 영적인 유익으로 ‘지옥을 면하고 천당에 가도록 이끌어준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고 있다.32) 이를 통해 이 교리서는 나이 많은 이들을 위해 저술된 교리서답게, 기본적인 교리 설명에 이어 성체성사를 ‘천당 가는 데 도와주는 성사’로 정의한다.

 

다음으로 조선대목구 제8대 교구장인 뮈텔(G. Mutel, 閔德孝, 1854~1933) 주교가 『진교절요』와 『성교요리문답』에서 부족한 교리 내용을 보충하기 위해 1925년에 새로운 교리서 편찬을 목적으로 간행한 문답식 교리서인 『천주교요리』가 있다.33) 이 교리서는 천주교의 전반적인 교리 내용을 온전히 담고 있으며, 그중에 ‘第三卷 第二章 七聖事’34) 편에 성체성사와 관련하여 ‘第六十四節 聖體’, ‘第六十五節 사미聖祭’, ‘第六十六節 領聖體’, ‘第六十七節 聖體를 뫼셔둠’이라는 부제를 달아놓았다. 세부적으로 보면, 성체성사와 미사, 영성체와 관련한 내용뿐 아니라, 처음으로 ‘미사 밖 성체공경’에 관하여 서술했다. 특히, ‘第六十七節 聖體를 뫼셔둠’에는 5개의 문답이 있는데,35) 그중에 4번째 문답은 성체신심과 관련된 내용으로 ‘미사 밖 성체 공경 예절’인 ‘聖體奉安, 聖體降福, 聖體朝拜, 聖體擧動’에 대해서 설명하였으며,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問 聖體恭敬 밧겻 禮節이 몃가지뇨

答 네 가지니 나흔 奉安이오 둘흔 降福이오 세흔 공번되히 朝拜이오 네흔 擧動이니라.…聖體擧動은 聖體瞻禮와 밋 그 八日 동안 어 날이든지 만니 擧動 때에는 聖體가 鐸德의 손에 밧들녀 길거리와 洞里 이에 擧動시기를 마치 나라 님금이 모든 百姓의게 公卿을 밧기 爲야 自己百姓 중에 擧動 치 니라. 아직지는 朝鮮에 여러 本堂에셔 이러 聖體擧動을 지 못나 病者의게 聖體를 뫼시고 갈 때에는 각금 聖體擧動을 니 敎友村에셔 聖體를 뫼시고 가게 되거든 만 대로 공번되히 뿐 아니라 여러 敎友–擁衛고 朝拜 中에 華麗게  것이오 길이 멀거나 外人 가온대 뫼시고 가게 되거든 죵용히 뫼실지나 敎友들은 힘대로 恭敬을 다야 젹어도 敎友 나히 聖體를 뫼시고 가ㅣ 라갈 것이오 聖體가 病者의 집 갓가히 니르시거든 敎友들이 맛당이 마조 迎接지니 이때에는 神父를 迎接이 아니라 聖體를 迎接이니 神父나 服事나 그 外 다른 이를 도모지 人事지 말며 아모 니아기도 지 말것이오 오직 聖體ㅣ 朝拜며 病者의 집지 뫼실지니라. 聖體를 奉安거나 降福거나 朝拜거나 擧動 흔 恭敬 밧겻 禮節이 잇거든 熱心敎友된 者–闕치 말고 그런 禮節에 參禮야 온젼 과 온젼 靈神과 온젼 힘으로 聖體를 欽崇고 恭敬지니라36)

 

위의 내용은 ‘성체를 공경하는 외적인 예절’이 몇 가지가 되는지에 대한 질문과 답변으로 ‘성체봉안, 성체강복, 성체조배, 성체거동’ 등 네 가지 성체신심을 언급하였다. 특히, ‘성체거동’ 부분에 대해 성체축일(오늘날의 성체 성혈 대축일) 후 8일 내에 실행할 수 있다는 것과 그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또 다른 성체거동의 형태로 ‘사제가 병자가 모실 성체를 가지고 이동할 때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그 내용으로 교우촌의 경우에는 성체의 이동이 외적으로도 성대하고 엄숙하게 할 것을 장려하고 있다.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사제와 몇몇 신자들이 성체에 대한 공경의 마음을 가지며 함께 이동할 것을 권고하면서 성체를 모신 사제가 병자의 집에 도착했을 때 신자들이 해야 할 지침까지 서술하고 있다. 이어 교리서는 ‘미사 밖 성체 공경’에 대해 신자들은 ‘흠숭(欽崇)’과 ‘공경(恭敬)’의 마음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권유한다. 정리해 보면, 교리서 『천주교요리』는 성체성사와 관련하여 매우 방대한 내용을 가르쳐주고 있으며, ‘미사 밖 성체 공경’ 가운데서 특히 성체신심 행사에는 경건하게 참여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 교리서의 영향으로 신자들은 성체축일과 특히 성체거동의 중요성을 깨달을 수 있었다.

 

10여 년 뒤 한국천주교회는 1931년에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을 맞아 지금까지 나온 교리서의 내용을 개혁하고, 전국적으로 통일된 새 교리서 출간을 결정하여 1934년에 『천주교요리문답』37)을 간행했다. 이 교리서의 구조는 ‘3편 16장 320조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교리서의 앞부분에는 “이 문답을 다 배워 익힐 것이나, 괄호 있는 것은 불가불 다 외어야 함”이라는 ‘주의’ 부분이 있다. 이를 통해 교리서는 ‘이해할 부분’과 중요한 내용에 대해서는 ‘무조건 외워야 할 것’으로 구분해 놓았음을 알 수 있다. 내용을 보면 ‘제三편 성총을 얻는 방편’의 ‘제三장 성사’에서 칠성사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38) 특히 ‘제四절 ‘성체’ 부분은 ‘280번에서 301번’까지 22개의 문답으로 구성되어 있고, 성체성사에 관한 보편적인 교리 내용을 저술해 놓았다. 또한 22개의 문답 중에 13개의 내용, 즉 ‘성체와 성체성사’, ‘성체성사의 제정’, ‘미사와 성변화’, ‘영성체와 준비 과정’ 등 성체성사와 관련해서는 ‘정의를 내린 부분’과 ‘반드시 실천해야 할 사항’에 대한 조항들은 외워야 할 것으로 규정해 놓았다. 정리해 보면, 이 교리서는 지금까지 발간된 교리서 내용을 규합하여 이해 부분과 암기 부분을 나누어 정리한 후에 새롭게 발간된 공식적인 교리서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교리서는 성체성사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으며, 많은 내용을 철저히 암기하도록 가르쳤음을 살펴볼 수 있다.

 

이상으로 박해 시기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천주교 신자들에게 널리 보급되었던 교리서를 중심으로 성체와 성체성사, 미사, 성체신심 등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교리서는 천주교의 가르침 중에 성체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었으며, 성체성사와 그 신비에 대해서 신자들이 올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자세히 설명해 놓았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성체성사와 관련한 구체적인 내용은 성체성사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세례받은 후에도 자주 미사에 참례하지 못한 신자들에게는 성체공경에 대한 이해를 도와주었으며, 그 결과 성체신심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어서 논자는 『경향잡지』의 ‘논설’이나 ‘사설’ 등을 주목하였다. 개항 이후 종교에 대한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한국천주교회에서는 여러 간행물을 출간했는데, 그중에 『경향잡지』는 교회 안팎의 결정 사항이나 소식, 가톨릭 교리 내용을 신자들에게 전달해 주는 주된 기능을 하였다. 그래서 많은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었던 이 잡지는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돕기 위해 교리 교육적 측면에서 다양한 기사들을 게재하였다. 이에 논자는 잡지에서 성체와 성체신심에 대한 내용과 특히 성체거동에 관련하여 다음의 몇 가지 중요한 기사 내용을 주목해 보고자 한다.

 

첫 번째로 잡지의 1930년 4월호 ‘사설’에는 「성체께 대한 정성」이라는 기사가 있다. 그 내용에는 “부활을 준비하는 신자들은 반드시 영성체할 것”을 언급하면서, 성체성사는 모든 성사 중 “지극히 높고, 큰 성사요, 信德道理 중에 지극히 오묘한 도리”라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신자들이 영성체할 때의 마음 자세로 ‘大罪를 없이하는 것’과 ‘空心齋 지킬 것’을 요구했다. 또한 본당에서 생활하는 신자는 성체조배를 자주 할 것과 성체가 모셔져 있는 본당을 지날 때면 그 본당에서 간단하게라도 성체조배할 것을 권고했다. 특히, 성체강복이나 성체거동이 있을 때면 당연히 참석하여 ‘예수의 강복(降福)’을 받으라고 권면했다. 이어서 사설의 후반에는 ‘세계성체대회’를 언급하면서, 당시 ‘제30차 세계성체대회’는 아프리카 대륙의 튀니지에 있는 ‘카르타고’에서 개최한다는 사실도 알렸다.39) 이상으로 사설은 성체께 대한 교회의 기본적인 가르침에 추가하여, ‘미사 밖 성체 공경’ 예식에 대해 적극적인 참여를 권장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 다음 세계성체대회를 소개함으로써 성체신심의 중요성을 환기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둘째, 『경향잡지』의 1930년 6월호에도 「성체께 대한 정성」이라는 주제의 ‘사설’이 한 번 더 실렸다. 내용으로는 교황 우르바노 4세가 성체축일을 반포한 사실과 ‘수난 전날 예수와 제자들이 거행한 최후의 만찬’ 모습을 비교하며 보여주었다. 이어서 “성체는 기묘함이 무궁하여, 우리 마음을 즐겁게 하는 무한한 성물이요 보배”라고 강조한 후, 성체께 대한 찬미와 영성체할 때의 마음가짐을 설명하였다. 또한 미사의 거룩함과 영성체를 통한 기쁨을 언급한 다음 성체 교리를 구체적으로 기술하는 한편, “성체를 받아 모시는 사람은 하느님을 닮아가는 것”임을 부각시켰다. 그리고 성체조배의 의의(意義)를 논설하면서, 성체 안에서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해나갈 것을 당부하였다.40) 이상으로 사설은 성체축일의 역사적 배경과 성체성사 제정, ‘성체’의 중요성, 미사의 은총, 영성체를 통한 기쁨과 마음가짐 등을 설명하면서 성체신심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었다. 따라서 사설은 성체조배를 권면하면서, 신자들이 성체성사의 은총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려는 의도로 작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경향잡지』의 1924년 6월호 ‘논단’으로 「성체첨례의 내력」이라는 기사가 있다.41) 이 논단에는 성체축일의 배경으로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행했던 최후의 만찬이 성체성사의 기원임을 언급하고, 이 축일에 사제가 ‘흰색 영대’를 사용하는 이유는 성체성사를 통한 기쁨을 드러내기 때문임을 설명하였다. 이어서 ‘성녀 율리아나의 환시 체험’과 ‘교황 우르바노 4세 때 성체축일 제정’에 대해 설명하고, 1263년 이탈리아의 오르비에토(Orvieto) 근처에 있는 ‘볼세나(Bolsena)의 성녀 크리스티나’ 무덤 위에 세워진 성당에서 일어난 성체의 기적을 자세히 기술하였다. 또한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성체 찬미가’ 기도문이 어떻게 작성되었고, 인준받았는지를 해설했다. 이러한 내용의 기사는 잡지의 1927년 6월호 ‘사설’인 「성체첨례」에도 또 한 번 더 강조되었다. 특히 성체축일과 관련하여 성녀 율리아나의 환시 내용과 1246년에 리에주의 교구장이 ‘그리스도의 성체를 공경하는 축일’을 지내도록 선언한 사실, 교황 우르바노 4세가 성체축일을 제정한 것까지 상세히 부연하였다.42) 이상으로 ‘논단’과 ‘사설’은 성체축일의 기원과 제정, 변천 과정, 성체 기적 등을 인용한 후 ‘성체 찬미가’의 제작 배경을 신자들에게 알려주고자 노력하였다. 이것은 결국 신자들이 성체축일의 중요성을 인식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넷째, 『경향잡지』의 1924년 6월호 ‘논설’인 「성체거동의 내력」이라는 기사가 있다. 이 논설은 ‘성체거동의 역사’와 특히 11세기에 시작된 성체거동과 성체거동의 다양한 방식, 그에 대한 변천사를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13세기에 성체신심이 강화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예수의 인성을 부정하는 ‘알비파(Albigenses) 이단’에 맞서기 위함임을 논증하면서, ‘성체 안에 참 하느님이시며 참 인간인 예수가 현존’한다는 성체 교리를 확립시킨 사실을 병기하였다. 그러면서 성체거동이 유럽의 각 나라별로 확산되는 과정과 성체 안에 계신 주님 현존의 중요한 예식으로 자리 잡아 나가는 과정을 상세히 기술하였다. 또한 성체거동의 방식으로 ‘성광’ 사용, 제대를 화려하게 꾸미는 것, 성체거동 때 어린아이들이 꽃을 뿌리는 것 등에 대해서도 그 배경을 설명하였다. 그런 다음 “성체거동을 통해 믿음 생활을 철저히 하고, 예수를 흠숭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간직한다면 교회가 허락하는 모든 은사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43) 이상으로 논설은 성체거동이 시작된 배경과 성체거동의 변천 과정을 언급하면서, 성체거동의 목적은 이단에 맞서 ‘참 하느님이시며, 참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성체 교리를 강화할 목적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논설은 유럽 교회에서 행해지는 성체거동의 다양한 방식들과 그것이 점차 개별 교회 안에서 고유한 신앙의 전통으로 정착되는 과정을 설명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논설은 성체거동을 통해 받게 되는 신앙의 은총을 강조하면서, 궁극적으로 신자들이 성체거동에 관심을 갖도록 도와주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경향잡지』의 기사 중에 ‘논설’과 ‘사설’을 중심으로 성체신심과 성체거동에 관련된 해설, 기록, 그리고 권면 등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한국천주교회는 잡지를 통해 성체의 중요성과 함께 성체성사와 미사, 그리고 영성체에 대한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을 알리고자 노력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어서 잡지는 성체조배에 대한 적극적인 동참과 함께, 성체첨례와 성체거동 그리고 세계성체대회 등의 역사적 유래와 변천 과정을 상세히 설명함으로써 성체거동이 교회의 전통적인 성체신심 중의 하나임을 강조하고 있었다. 또한 잡지는 유럽에서 거행하는 성체거동에 대해서 준비 과정과 진행 방식에 관해 소개함으로써 한국천주교회에서 성체거동을 준비하는 과정과 성체거동을 진행하는 방식에도 정보를 제공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3. 성체와 성체신심에 대한 신자들의 관심

 

초창기 한국천주교회는 ‘성직 제도’에 대한 오해와 사제의 부재로 인해 성체성사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는 북경교구에 미사 거행을 위한 사제 파견을 요청했고, 이에 중국인 사제인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1752~1801) 신부가 조선에 파견됨으로써 지엽적으로나마 성체성사가 거행될 수 있었다. 하지만 박해 상황으로 인해 주문모 신부는 상시적인 미사거행을 할 수 없었고, 성체성사를 받고자 하는 신자들의 열망을 채우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1801년의 천주교 박해로 주문모 신부가 순교한 이후, 1834년에 중국인 선교사 여항덕(余恒德, 파치피코, 1795~1854)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기 전까지 교회는 33년 동안 사제의 공백으로 인해 성체성사가 거행되지 못하였다.

 

1831년에 조선교구가 설립된 후, 조선에서 사목하던 여항덕 신부는 2년 만에 본국으로 돌아갔고, 조선의 선교를 책임 맡은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1836년부터 입국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박해와 산간으로 숨어 들어간 교우들, 성무를 집행할 사제의 부족으로 제한적인 미사만 거행되었고, 신자들은 성체성사를 충분히 받을 수 없었다. 1866년 대박해로 조선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선교사 중에 9명은 죽음을 맞이했고, 3명의 선교사들은 조선을 탈출함으로써 조선은 10여 년 동안 성직자가 없는 교회가 되었다.

 

그런데 이 당시 살아남은 신자들은 언제 체포될지 모르는 두려움 속에 지내면서도, 과거 성체성사를 받았을 때의 기억과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주일을 지키는 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했던 것이다.44) 예를 들어, 1884년에 열린 ‘1839·1846년 시복 재판’에서 증인으로 참석한 김 프란치스코는 조선에 선교사가 없던 때에도 성체성사를 받기 위하여 중국에 간 적도 있었다.45) 그리고 「1894년도 선교사 보고서」에는 퀴를리에(L. Curlier, 南一良, 1863~1935) 신부의 선교활동에 관한 다음의 진술이 있다.

 

“본인은 또 해마다 꽤 많은 냉담 교우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는 위안도 받았습니다. 올해에도 교우 33명이 대부분 1866년의 대박해 때 떠났던 교회의 품 안으로 돌아왔습니다. 비록 두려움이나 다른 일로 인해서 30년 동안이나 성사를 받지 못하게 되었지만, 모두가 삼종경이나 천주경을 외는 것 같은 어느 정도의 계율을 지켜 왔었습니다.”46)

 

이 보고서에서 퀴를리에 신부는 교회를 떠난 신자들이 해마다 돌아오고 있음을 언급하면서, 박해와 사제가 없는 10년 동안 신자들은 성사 생활은 하지 못했지만, 신앙생활의 의무는 지켰다고 기술하였다. 이러한 사례들은 1866년 이후 10년 동안 조선에는 사제들이 없어 신자들은 미사참례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성체성사에 대한 열망을 간직하며 신앙 의무는 꾸준히 지키며 살았음을 말해주고 있다.

 

1873년에 대원군이 하야(下野)하고, 고종이 친정(親政)을 하면서 조선은 개항이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당시 만주 지역의 교우촌인 차쿠(芝罘)에 머물러 있던 선교사들은 1876년부터 조선에 재입국했다. 1876년 5월 10일 밤, 블랑(J. Blanc, 白圭三, 1844~1890) 신부와 드게트(V. Deguette, 崔東鎭, 1848~1889) 신부를 시작으로,47) 1877년 9월 20일에는 제6대 대목구장 리델(F. Ridel, 李福明, 1830~1884) 주교가 두세(C. Doucet, 丁加彌, 1853~1917) 신부, 로베르(P. Robert, 金保祿, 1853~1922) 신부와 함께 조선에 들어왔고, 1880년 11월에는 뮈텔과 리우빌(A. Liouvill, 柳達榮, 1855~1893)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였다. 조선에 재입국한 선교사들은 교회가 처한 상황을 목격한 후,48) 교회 재건의 방향을 모색하였다. 선교사들은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숨어 지낸 신자들을 찾아다녔고, 마침내 서로는 만날 수 있었다. 이때의 상황은 다음의 보고서에서 살펴볼 수 있다.

 

a. “그들은 모든 위험에도 불구하고 정처 없이 헤매는 동안 지친 노고의 대가로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신부들의 위로만을 받고 싶어 하였으며, 신부의 발아래 꿇어앉아 자신들의 죄를 고백함으로써 주께 용서를 청하고, 모든 위험에 대비하여 모든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는 ‘빵’, 즉 생명의 양식만을 받고 싶어 했다.”49)

 

b. “공소마다 자식을 등에 업은 아버지와 어머니들, 지팡이에 의지한 노인들, 양반집 규수나 부인들에 이르기까지 수십 리 길을 외교인들의 눈을 피해 심야에 어둠 속을 뚫고 도착해 오는 것을 보며 본인은 눈물을 금치 못했습니다. 모두가 한결같이 지쳐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교우들의 얼굴에 빛나던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50)

 

a는 「1878년 선교사 보고서」로서 조선에 재입국한 선교사들과 박해 동안 숨어 지내면서 신앙을 지키던 신자들이 극적으로 만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이 사료를 통하여 신자들은 선교사에게 영적인 위로를 청하면서, 동시에 ‘생명의 양식’, 즉 성체성사 받기를 간절히 염원했다는 사실을 살펴볼 수 있다. b는 「1887년 선교사 보고서」로, 공소에서 생활하던 신자들이 특정 지역에서 미사가 봉헌된다는 소식을 듣자, 성체성사를 받기 위해 사제가 있는 그곳을 찾아가는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보고서는 환경적으로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 속에 살던 신자들이 성사 생활을 영위하러 가는 모습을 감동적으로 묘사하였다. 이 서술을 살펴보면 당시 신자들은 성체성사 받는 것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개항 후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조선은 외국과 교류를 맺었고, 1886년 6월 4일에는 조불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그 결과 묵시적으로나마 조선 천주교회는 신앙에 대한 자유로운 분위기가 감지되었다. 그리고 1888년에 프랑스 공사의 조선 입국은 교회의 선교 정책과 선교사들의 활동을 지원하는 계기가 되었다.51) 이것은 1889년에 조선 천주교회는 19명의 선교사와 10명의 순회 전교회장이 활동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52) 1895년 1월 11일(양력) 조선 정부는 사면령(赦免令)을 내렸고, 1866년 박해 때 죽은 남종삼(南鍾三, 요한, 1817~1866)과 홍봉주(洪鳳周, 토마스, 1814~1866)가 신원(伸冤)되었다.53) 그리고 1895년 8월 28일에는 뮈텔 주교와 고종의 면담이 이루어지면서, 조선에서 천주교 신앙에 대한 자유가 공식적으로 확립되었다.54) 이처럼 종교에 대한 자유를 얻어내었고, 성체성사에 대한 신자들의 열망은 성당 건축으로 이어졌고, 이것은 교회 재건의 바탕이며 동시에 신자들의 자유로운 성사 생활에 중요한 상징적인 의미가 되었다.55)

 

사실, 조선에 재입국한 선교사들이 우선 관심을 가졌던 것 중 하나가 성사를 집행할 장소를 마련하는 것이었다.56) 그래서 선교사들은 땅과 건물을 사들이기 시작했고,57) 그곳을 신심 행사와 성무 집행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사용하였다.58) 이러한 선교사들의 노력에 신자들은 가난한 형편에도 불구하고 장소 매입을 위한 모금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59) 심지어 신자 중에는 성당 마련을 위해서 건축 자재들을 준비하는 열성도 보였다.60) 그 결과, 1898년 5월 29일 제8대 조대목구장 뮈텔에 의해 종현(현 명동) 성당이 축성되었다.61) 그 후, 전국으로 성당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사제가 상주하는 곳이 늘어나면서 미사가 정기적으로 봉헌되는 곳도 많아졌다.62) 성체성사가 충족되고, 미사 참례자 숫자가 증가하면서 제대와 감실 앞에서 기도하는 신자들도 생겨났다.63) 그래서 성체신심과 관련하여 성체조배, 성체현시에 참석하는 신자들도 늘어났다. 그와 함께 성체강복과 성체거동이 시작되었고, 그 예식에 참석하는 신자들이 증가하면서 성체신심은 확산되어 나갔다.64)

 

이상으로 논고는 100여 년 동안의 박해와 개항, 그리고 종교 자유에 대한 분위기 속에서 성체와 성체신심에 대한 신자들의 관심이 어떻게 개진되어 나갔는지를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그 결과 첫째, 박해 시기 동안에도 천주교 신자들은 성체성사에 대한 갈망을 간직하면서,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신자로서의 의무를 실행하며 살았음을 알 수 있었다. 둘째, 개항과 더불어 재입국한 선교사들과 신자들은 다시 만날 수 있었고, 이때 신자들은 선교사들에게 성체성사 받기를 간절히 원했음을 확인하였다. 이를 통해 신자들은 성체성사의 중요성과 그 가치를 변함없이 인식하고 있었음을 살펴볼 수 있었다. 셋째, 종교의 자유와 성체성사에 대한 신자들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성당 건축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성체신심이 확산되는데 기틀을 마련했고, 그 과정에서 성체거동이 본격적으로 실시될 수 있었음을 추론할 수 있었다.

 

 

4. 한국천주교회의 성체거동 역사

 

한국천주교회의 성체거동은 1900년도부터 신학교나 본당별로 성체축일, 혹은 성체축일 후 주일에 실시되었다. 최초의 성체거동은 1903년 6월 11일 목요일, 서울 용산의 예수성심신학교에서 성체축일 미사 후에 있었다.65) 그 후 예수성심신학교에서는 해마다 성체축일에 성체거동을 실시하였다. 1912년 성체축일은 예수성심신학교에서,66) 성체축일 후 주일에는 백동(현 혜화동)의 베네딕도 수도회에서 성체거동이 있었다.67) 1913년 성체축일은 예수성심신학교에서,68) 성체축일 후 주일에는 서울 종현 성당에서도 성체거동이 있었다. 그 후 해마다 성체축일 후 주일에는 종현 성당에서 성체거동이 있었고, 예수성심신학교 신학생들도 꾸준히 참석했다.69) 1914년 성체축일에는 음성의 장호원(현 감곡) 성당에서도 성체거동을 실시하였다.70) 1915년 성체축일에는 베네딕도 수도회와 장호원 성당에서, 성체축일 후 주일에는 종현 성당뿐 아니라 대구대목구의 성유스티노신학교에서도 성체거동이 있었다.71) 대구대목구의 성체거동은 1917년부터 계산 성당에서 실시했다.72)

 

1924년에는 성체축일에 베네딕도 수도회와 장호원 성당에서, 성체축일 후 주일에는 종현 성당, 계산 성당에 이어 원산교구의 원산 성당, 전북 김제의 수류 성당, 북간도의 조양하(朝陽河) 성당에서도 성체거동이 있었다.73) 1927년 성체축일에는 안성 성당,74) 1931년 성체축일에는 안성 성당뿐 아니라 안성의 미리내 성당, 대전의 논산 성당에서도 성체거동을 실시하였다.75) 1932년 성체축일에는 강원도 지역의 풍수원 성당,76) 1934년 성체축일에는 황해도 장연 성당과 성체축일 후 주일에는 전북 지역의 전주 성당에서도 성체거동이 있었다.77) 1935년 성체축일에는 황해도 안악 성당, 아산의 공세리 성당, 서울의 혜화동 성당에서도 성체거동을 실시했다.78) 1936년 성체축일 후 주일에는 간도의 대립자(大拉子) 성당,79) 1937년 성체축일 후 주일에는 나주의 계량 성당,80) 1943년 성체축일에는 함남의 덕원 수도원에서도 성체거동을 실시했다.81) 이를 통해 1935년을 전후로 하여 성체거동은 전국적으로 거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82)

 

1945년에 해방을 맞은 후, 자료상으로는 1949년 성체축일 후 주일에 용산에서 혜화동으로 이전한 성신신학대학의 구내에서 성체거동이 있었다.83) 그 후 한국전쟁으로 성체거동이 중단되었다가 1953년부터 성체축일에 풍수원 성당, 성체축일 후 주일에 명동 대성당, 성체축일 후 7부 축일에는 장호원 성당에서 성체거동을 재개했다.84) 1955년에는 성체축일 후 주일에 충남의 합덕 성당, 경북의 낙산 성당, 전남의 목포 산정동 성당85)에서, 1956년에는 성체축일 후 주일에 경북의 성주 성당, 목포에서는 산정동 성당과 경동 성당이 연합하여 성체거동을 실시하였다.86) 그 후 한국천주교회에서는 성체축일이 있던 6월 전후의 날씨가 더위와 장미로 인해 성체거동을 행하기가 어려운 상황이 종종 발생했던 관계로, 사목적 배려 차원에서 1957년부터는 성체거동을 ‘그리스도왕 축일’에 실시하기로 했다.87) 그래서 그해 10월 27일 주일, ‘그리스도왕 축일’부터 목포의 산정동 성당과 경동 성당이 연합하여 성체거동을 실시했고, 그 밖의 많은 성당에서도 ‘그리스도왕 축일’ 때 성체거동을 하였다.88) 그러나 풍수원 성당89)과 장호원 성당90)은 현재(2019년 기준)에 이르기까지 성체축일에 성체거동을 고수하고 있다. 또한 1964년 성체축일에는 인보성체수녀회가 성체거동을 했고,91) 1965년에는 인천교구에서도 성체축일 후 주일에 박문여자중·고등학교에서 성체거동을 실시했다.92) 1966년에는 성체첨례 후 주일에 청주의 내덕동 성당과 수동 성당에서도 각각 성체거동을 했고,93) 수동 성당의 경우 1967년과 1969년에는 ‘그리스도왕 축일’에 성체거동을 실시하였다.94)

 

성체거동의 특성으로 신자들과 함께 야외에서 실시하는 행사였기에, 날씨의 영향을 받았다.95) 그래서 성체거동을 실시하는 날 우천으로 인해 취소되면, 성당 내에서 성체현시와 성체조배를 하고, 주례자의 성체강복으로 행사가 마무리된 적도 있었다.96) 어떤 경우에는 성체축일 목요일에서 성체축일 후 주일로 날짜를 연기한 후 성체거동을 한 곳도 있었다.97) 또 다른 경우에는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가, 날이 개면 행렬이 지나가는 길을 다진 후에 성체거동 행사를 실시한 곳도 있었다.98) 성체거동의 집전은 교구장99)이나 교구장 대리,100) 베네딕도 수도원의 경우 수도원장101)이 맡았다. 또한 1920년 11월 1일에 서울대목구 보좌 주교로 임명된 드브레(E. Devred, 兪世俊, 1877~1926)는 1921년 5월 1일 주교 성성식을 가진 후, 이내 곧 5월 26일 목요일, 성체축일에 베네딕도 수도회에서 성체거동을 집전했다.102) 그 후 드브레 주교는 1922년 성체축일에 장호원 성당에서도 성체거동을 집전하였다.103) 그리고 풍수원 성당에서는 조선인 성직자로서 최초로 주임 사제였던 정규하(鄭圭夏, 아우구스티노, 1863~1943) 신부가 성체거동을 집전했다.104)

 

성체거동을 할 때면 준비할 것들이 많았다. 보통의 경우, 행사장 주변에는 세 개의 녹색 아치문을 만들거나, 오색 조화(造花)로 화려하게 치장했고, 여러 나라의 깃발을 달기도 했다.105) 그리고 성체축일 미사가 거행되는 성당이나 성당 내부가 협소한 경우 임시로 만든 ‘야외 제대’,106) 성체거동을 할 때 성체강복이 이루어지는 ‘야외 제대’에도 여러 나라의 국기들과 ‘성화 상본(聖畫像本)’, ‘교황과 주교의 인장(印章)’ 등을 설치한 적도 있었다.107) 성체거동 중 두 번의 성체강복을 위해서 ‘야외 제대’를 두 군데로 나누어 설치한 곳도 있었다.108) 장호원 성당의 경우 ‘야외 제대’를 성당 근처의 낮은 산 정상에 마련해 놓기도 했다.109) ‘야외 제대’를 산 정상에 마련해 놓은 것은 일반 사람들이 성체거동 행렬을 멀리서도 잘 볼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실제로, 성체거동 행렬이 산 위로 올라가는 장면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절제된 행렬의 웅장함에 감탄했다고 한다.110)

 

성체거동은 성체축일 미사 후111)에 연이어 시작되었다. 성체거동의 주례자는 성체를 ‘성합’이나 ‘성광’에 모시고 준비된 행렬 대형으로 가면, 맨 앞에 이동식 십자가를 잡은 사람과 그 뒤로 양옆에 초와 향, 향로를 잡은 사람이 섰다. 일산(日傘)을 잡은 네 사람이 있는 곳으로 성체를 모신 주례자가 가면, 그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행렬은 시작되었다. 행렬 중에 어린이들은 성체가 지나가는 길 위에 꽃을 뿌렸고,112) 참석한 교우들은 성가를 부르거나, 시편을 읽었으며113) 묵주 기도를 바치기도 하였다.114) 수류 본당의 경우 성체거동이 끝나자 감사의 뜻으로 성가를 불렀으며,115) 간도의 조양하 성당에서는 교황과 교회를 위해 만세 삼창을 하였다.116) 성체거동 행렬은 미리 준비된 야외 제대에 도착하면 성체 강복식이 거행되었다. 주례자는 성체가 모셔진 성합이나 성광을 야외 제대 위에 모신 후에 분향을 드렸고, 교우들은 성체 성가를 노래했다. 이어서 침묵 중에 성체조배를 한 후, 주례자는 참석자들을 위하여 성체강복을 했다. 그 후 성체거동은 본 행사장으로 돌아왔고, 제대 위에 성체를 현시해 놓으면, 교우들은 성체 앞에서 기도했다. 정한 시간이 되면 집전자가 성체강복을 한 후, 성체를 감실에 모시면 행사는 마무리되었다.117) 성체거동의 시간은 행렬에 참석한 신자들의 숫자에 따라 달랐지만 평균 1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되었다.118) 한국전쟁 이후 도심 지역에 위치한 성당이나 기관에서는 성체거동 할 때 인근의 시가지까지 행렬하였다.119) 그러나 1960년 초반부터는 참석한 신자들이 성체 공경에 마음을 집중하도록 시가지 행렬은 하지 않았고,120) 행렬 대형에 참석하는 교우들의 범위도 축소되었다.121) 그래서 성체거동에 성직자와 복사들만 행렬에 참석했고, 나머지 교우들은 행사장에서 서 있다가, 행렬이 지나가면 성체께 대한 경배의 행위로 무릎을 꿇는 형식을 취했다.122) 1966년 ‘그리스도왕 축일’ 때에 서울 혜화동 성신신학대학에서 개최된 성체거동에는 성체를 모신 집전자 옆으로 6명의 평신도가 나란히 서서 행렬을 한 적도 있었다.123)

 

이어서 성체거동 참석자를 살펴보면, 1903년 예수성심신학교에서 성체거동을 실시할 때에는 신학생들이 주축이 되었고, 교우들 몇 사람만 행사에 동참했다.124) 그러나 해를 거듭할수록 성체거동에는 성직자와 신학생, 수도자뿐 아니라 본당의 청년 단체125)나 가톨릭 계통의 학교 학생들,126) 그리고 수백 명을 넘어 수천 명, 수만 명에 이르는 교우들이 참석하였다.127) 간도의 조양하 성당의 경우 전체 교우 1만 명 중에 4~5천 명이 성체거동에 참석한 적도 있었다.128) 해방 이후 1949년 서울에서 성체거동이 있을 때는 1만 8천 명가량의 신자들이 참석했다.129) 한국전쟁으로 성체거동이 중단된 후, 3년 뒤 1953년 서울에서 성체거동이 실시되었을 때에는 6천 명의 교우들이 참석하였다.130) 특히 한국전쟁 이후에 재개된 성체거동이었지만, 전쟁 이전보다 많은 사람이 모였다고 한다.131) 또한 한국전쟁 이후 남한에는 미군이 주둔했는데, 그들 중 천주교 신자들을 중심으로 한·미 공동으로 성체거동을 개최한 적도 있었다.132) 1958년과 1959년에 서울 혜화동 성신신학대학에서도 성체거동을 실시했는데 3만 명의 교우들이 참석했다. 광주대목구의 경우에도 1958년에 산정동 · 경동 · 북교동 3개 성당이 연합하여 목포역 광장에서 성체거동을 했는데, 2만 명의 신자들이 참석하였다.133) 성체거동을 실시할 때면 교구장과 담당 사제, 그리고 신자 협의회가 함께 논의한 적도 있었고,134) 성당의 경우 주최 측의 신자들이 합심하여 행사를 이끌었다.135) 성체거동 행렬에는 교우들뿐 아니라 일반 주민들의 참석을 권유함으로써136) 그들도 직접 성체거동 행렬에 동참하도록 도모하면서, 천주교를 알리고 선교의 모범이 되었다는 평가도 받았다.137) 행렬 중에 교우들이 보여준 질서 정연한 모습은 일반인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이것은 지역 사회에서 천주교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138) 성체거동 때 천주교 신자들이 보여준 모범으로 인해 관할 기관이나 공공 단체에서도 행사가 잘 진행되도록 협력하였다.139)

 

성체거동에 대한 신자들의 관심은 주최하는 교구나 성당에서는 성체축일에 다른 행사와 병행하여 성체거동을 실시한 적도 있었다. 1934년 성체축일에 장연 성당에서 황해도 감목대리 김명제(金命濟, 베드로, 1873~1960) 신부와 성체축일 후 주일에 전주 성당에서 전라도 지역 감목대리 김양홍(金洋洪, 스테파노, 1874~1945) 신부의 ‘환갑 축하식’을 성체거동 후에 거행하였다.140) 1937년 성체축일 후 주일에는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가 ‘전라남도 지역의 사목구를 위임받은 기념’으로 나주 계량 성당에서 성체거동을 실시했고,141) 그다음 해에도 계량 성당에서는 ‘견진성사’와 병행하여 성체거동을 실시한 후 운동회도 하였다.142) 또한 1956년 성체첨례 후 주일에 충남의 논산 성당에서는 성체축일에 하던 성체거동을 인근 지역의 군 훈련소 장병들의 참석을 위해 날짜를 변경했고, 오후에는 배구대회도 하였다.143) 1958년 그리스도왕 축일에는 ‘목포 지역 천주교 전래 60주년 기념행사’와 함께 성체거동을 실시하였다.144) 또한 성체거동은 성체축일이나 그리스도왕 축일과는 상관이 없는 전례 행사 때에 실시된 적이 있었다. 1957년 9월 29일 주일에 제주도 한림 성당에서는 복자 축일에 성체거동을 포함하여 외부적인 행사를 성대하게 거행했다.145) 1958년 9월 28일 주일에는 부산대목구에서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군인 신자들과 공동으로 ‘교구 설정’ 기념과 신임 교황 사절의 환영식을 병행하여 복자 축일을 지낼 때, 성체거동으로 행사를 마무리했다.146) 1962년 9월 30일 주일 서울에서도 복자 축일에 혜화동 성신중·고등학교 운동장에서 성체거동을 실시하였다.147) 전주대목구에서는 1959년 10월 4일 주일 교황대사의 교구 순시에 맞추어 성체거동을 한 적도 있었다. 이날 성체거동 행렬은 전주 중앙 성당에서 전동 성당까지였고, 특히 ‘순교지 풍남문’을 지나면서 참석한 교우들이 그곳에서 순교한 이들을 묵상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148)

 

이상으로 한국천주교회에서 성체거동 시작과 준비 과정, 당시 상황과 그 확산 과정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다음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 1903년부터 시작된 성체거동은 해마다 성체축일에 치러졌던 성체신심 행사였다. 특히, 성체거동은 일제강점으로 인적·경제적 수탈이 절정이던 1935년을 전후로 해서는 전국적으로 실시되었다. 성체거동의 시작과 확산에는 프랑스 선교사들과 한국인 성직자들의 영향도 컸지만,149) 행사를 준비하고 진행하는 과정에서 신자들도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었다.

 

둘째, 성체거동은 주로 ‘성체성사가 제정된 성목요일을 기념하는 뜻’에서 ‘성체축일 목요일’에 혹은 성체성사의 의미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참석을 독려하는 차원에서 ‘성체축일 후 주일’에 거행했다. 1957년 이후에는 날씨 관계로 ‘그리스도왕 축일’로 날짜를 이동하여 성체거동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특정 본당에서는 성체성사의 본질적인 의미를 되새기는 뜻에서 ‘성체축일 목요일’만을 고수하는 경우도 있었다. 성체거동은 날씨의 영향을 받는 행사였기에 행사 당일에 비가 오면, 행사 진행을 위해 다각도의 방법을 모색한 적도 있었다. 이를 통해 한국천주교회에서는 성체거동을 중요한 행사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살펴볼 수 있었다.

 

셋째, 성체거동은 주로 교구장이나 교구장 대리, 혹은 수도원장이 집전했다. 따라서 성체거동이 이루어지는 공간은 교구민이나 수도회 형제들과 친교의 장이 되었고, 성체거동에 대한 주변의 관심을 상승시키는 효과를 주었다. 또한 성체거동에 신자들의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성체거동 때에 다른 행사를 병행하거나, 성체신심과 관련이 없는 전례 행사 때에 성체거동을 실시한 경우도 있었다. 성체거동 행렬은 1950년 후반까지 시가지까지 이어질 정도로 외적인 규모가 큰 행사였지만, 1960년대 이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영향으로 규모가 축소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체거동을 신앙의 전통으로 생각하는 몇몇 성당들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성체거동을 실시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넷째, 성체거동은 참석한 모든 이들이 성체를 중심으로 경건하고 엄숙한 마음으로 행렬에 동참했고, 지역 주민이나 일반인에게도 자발적인 참여를 권유했으며, 공공 기관에서도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그리고 성체거동은 사제직을 준비하는 신학생들의 노력도 큰 몫을 담당했다. 신학생들은 성체거동 때에 행사 준비와 진행을 맡았고, 사제가 된 후에는 신자들에게 성체신심과 성체거동에 대한 관심을 갖도록 이끌었다. 또한 가톨릭 계열의 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도 성체거동 행렬에 적극적으로 참석했다. 성체거동에 대한 이들의 체험은 천주교 신앙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며 성장하는 데 긴요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5. 결론

 

한국천주교회에서는 미사 집전과 성체성사를 거행하게 될 신학생들의 양성을 위해 신학교에서 처음으로 성체거동을 실시했고, 이는 점차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해마다 수많은 성당이 성체축일을 맞이하여 성체거동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성체거동의 장엄하고 엄숙한 행렬은 신자들에게는 신앙에 대한 자부심을 주었고, 일반인들에게는 천주교 신앙을 알리면서 선교에도 유익을 주었다. 이를 통해 성체거동은 개항 이후 근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교회 재건에 일조하였다.

 

성체거동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한국 사회가 겪었던 고통의 시간 속에서도 꾸준히 실시되었고, 수많은 신자들이 성체를 중심으로 모여 기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어려움을 극복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은 교회가 신앙 안에서 신심을 통해 세상과 소통해 왔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또한 성체거동은 연례행사였지만, 신자 개인에게는 신앙의 가치와 영적인 만족감을 지속적으로 채워줄 수 있었고, 본당 공동체는 화합을 위한 중요한 행사로, 교구 차원에서는 교구민의 일치를 이루는 행사로 발전해 나갔다. 비록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성체거동은 행사 규모나 실시하는 성당들이 축소되었지만, 오늘날까지 성체거동을 신앙의 전통으로 고수하는 성당이 있을 정도로 한국천주교회에서 신자들의 호응과 관심이 컸던 성체신심이었다.

 

그러므로 성체거동을 비롯하여, 교회사 안에서 특정 신심에 대한 형성과 진행 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는 새로운 관점에서 교회의 모습을 바라보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었다. 특히, 오늘날 한국천주교회가 영성적으로 나아갈 방향을 찾아야 할 이 시점에서 신심에 대한 다양한 연구는 신앙 성장의 매개 요인을 다시금 찾아내는 작업이 될 것이며, 앞으로 한국천주교회의 미래의 방향을 모색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 이 논문은 2019년 천주교 원주교구 문화영성연구소의 심포지엄 연구 과제로 수행된 연구 결과이다.

 

 

참고 문헌


1. 교회 문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8(개정판).

교황 요한 바오로 6세, 『신앙의 신비(Mysterium Fidei, 1965)』,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8(개정판).

교황청 예부성성, 「성체 신비 공경에 관한 예부성성 훈령」, 1967.

 

2. 교리서

 

『성교요리문답』

『성교요리』

『성교백문답』

『진교절요』

『천주교요리』

『천주교요리문답』

 

3. 교구 · 본당 · 기관사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150년사(1855~2005)』,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2007.

『감곡(매괴의 성모) 본당 100년사』, 감곡 본당, 2000.

『명동본당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7.

『서울敎區年報』 Ⅰ,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서울대교구사』, 분도출판사, 2011.

『원주교구 30년사』, 천주교 원주교구, 1996.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서한집』, 대전교구사 자료 1, 한국교회사연구소, 천주교 대전교구, 1994.

 

4. 재판록

 

『기해 ·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1·2, 천주교 수원교구, 2012.

 

5. 일기

 

『드망즈 주교 일기(1911~1937)』, 가톨릭신문사, 1987.

『뮈텔 주교 일기』 1~8, 한국교회사연구소, 2009.

 

6. 단행본

 

강석진, 『순교, 생명을 대변하는 증거』, 도서출판 흐름, 2018.

장동하, 『한국 근대사와 천주교회』, 가톨릭출판사, 2006.

_____, 『개항기 한국 사회와 천주교』, 가톨릭출판사, 2005.

장 콩비, 노성기·이종혁 역, 『세계교회사여행』 2(근대·현대 편), 가톨릭출판사, 2012.

 

7. 논문

 

김희중, 「세계성체대회의 생성 배경 및 의의」, 『사목』 129호(1989년 10월),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유봉준, 「성체신심에 대한 역사적 고찰」, 『사목』 129호(1989년 10월),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이완희, 「성체신심에 대한 전례사적 고찰과 현대적 조망」, 『사목』 257호(2000년 6월),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장동하, 「개항기 교회의 재건운동과 복음화」, 『인간연구』 4, 가톨릭대학교 인간학연구소, 2003.

_____, 「개항기 교회의 선교 정책과 전통 사회의 충돌」, 『한국 천주교회사의 성찰과 전망』,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0.

최경선, 「한국 가톨릭 신심 유형과 그 역사·문화적 배경 : 개항기-일제강점기를 중심으로」, 『한국 근·현대 100년 속의 가톨릭교회』 상, 가톨릭출판사, 2003.

 

8. 잡지

 

『경향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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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태 26,27-28 ; 유봉준, 「성체신심에 대한 역사적 고찰」, 『사목』 129호(1989년 10월),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34쪽.

 

2) 장 콩비, 노성기·이종혁 역, 『세계교회사여행』 2(근대·현대 편), 가톨릭출판사, 2012, 142~143쪽 ; “주일 미사 참례가 점점 의무화되었지만 신자들은 라틴어로 거행되는 미사의 의미를 몰랐기 때문에, 미사 중에 개인 기도나 묵주 기도 등을 바쳤다.…한편, 영성체를 통해서 성체신심이 형성되기보다는, 오히려 성체조배와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같은 날 거행되던 성체 행렬 등을 통해서 성체신심이 더 많이 형성되었다.”

 

3)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 13항,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8(개정판).

 

4) 교황 바오로 6세, 『신앙의 신비(Mysterium Fidei, 1965)』 56항,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8(개정판).

 

5) 이완희, 「성체신심에 대한 전례사적 고찰과 현대적 조망」, 『사목』 257호(2000년 6월), 35~36쪽.

 

6) 교황청 예부성성(현 경신성사성), 「성체 신비 공경에 관한 예부성성 훈령」 37항, 1967.

 

7) 최경선, 「한국 가톨릭 신심 유형과 그 역사·문화적 배경 : 개항기-일제강점기를 중심으로」, 『한국 근·현대 100년 속의 가톨릭교회』 상, 가톨릭출판사, 2003, 129~150쪽.

 

8) 안홍균, 「해제」, 『성교요리문답·진교절요·성교요리·성교백문답』, 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 자료 제15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85, 5~6쪽.

 

9) 『聖敎要理問答』, 「聖體」, 三十七 : “問. 聖體 무어시뇨. 答. 聖敎中 至極히 놉고 至極히 큰 聖事ㅣ니 실노  天主시오  사이신 吾主 예수의 天主性과 靈魂과 肉身과 보ㅣ로온 긔 麵酒(면은 밀노떡이오 쥬 포도로  술이라 말)形像 안희 초여 계시니라.”

 

10) 『聖敎要理問答』, 「聖體」, 三十八.

11) 『聖敎要理問答』, 「聖體」, 三十九.

12) 『聖敎要理問答』, 「聖體」, 三十九~四十.

 

13) 『聖敎要理問答』, 「聖體」, 四十~四十二 : “問. 聖體 일우매 오히려 麵酒의 體 잇냐 업냐”, “問. 聖體 호랴 호지 못랴”, “問. 麵形 속에나 酒形 속에나 各各 다 예수의 全體냐”, “問. 예수-祭臺上에 계시면 하에 계시지 아니하랴.”

 

14) 『聖敎要理問答』, 「聖體」, 四十二.

15) 『聖敎要理問答』, 「聖體」, 四十二~四十三.

16) 『聖敎要理問答』, 「聖體」, 四十三~四十四.

17) 『聖敎要理問答』, 「聖體」, 四十四~四十六.

 

18) 『聖敎要理問答』, 「聖體」, 四十六~四十八 : “問. 聖體를 領 때에 맛당이 엇더케 뇨”, “問. 聖體를 領 後에 또 맛당이 엇더케 뇨”, “問. 領聖體 날 남은 때에 맛당이 무어고.”

 

19) 안홍균, 「해제」, 앞의 책, 7~8쪽.

20) 『성교요리』 六十三~六十八.

21) 『성교요리』 六十三.

22) 안홍균, 「해제」, 앞의 책, 8쪽.

23) 『셩교백문답』 二十五~二十六.

24) 『셩교백문답』 二十六.

25) 『셩교백문답』 二十六.

26) 『셩교백문답』 二十六.

27) 『셩교백문답』 二十六~二十七.

28) 『셩교백문답』 二十七.

 

29) 『셩교백문답』 二十七 : “문. 쥬-임의 우리의게 림심을 슬희여아니시고 또 셩톄 령을 명셧시니 몬져 무 례 ㅣ면 가히 령고. 답. 몬져 맛당이 죄 풀어 을 조찰케고 션공을 더지니 비컨대 나라 님금이 내 집에 림시면 엇지 감히 털끗만치나 경만이 영졉리오.”

 

30) 안홍균, 「해제」, 앞의 책, 7쪽.

31) 『진교절요』 十.

 

32) 『진교절요』 十 : “7문답. 문. 셩톄 령면 무 리익이 잇뇨 답. 셩톄 잘 령면 예수와 가지로 합야 나히 되니 셩톄 육정을 누고 령혼을 기고 셩춍을 더야 디옥을 면고 텬당으로 닷게 니라.”

 

33) 안홍균, 「해제」, 앞의 책, 8~10쪽.

34) 『천주교요리』 三편, 八十七~三百三十八.

35) 『천주교요리』 三편, 二百五十八~二百六十七.

36) 『천주교요리』 三편, 二百六十二~二百六十五.

37) 『천주교요리문답』, 1934, 84~91쪽 참조.

38) 안홍균, 「해제」, 앞의 책, 10~11쪽.

39) 「성체께 대한 정성」, 『경향잡지』 683호(1930년 4월 15일), 145~149쪽.

40) 「성체께 대한 정성」, 『경향잡지』 688호(1930년 6월 30일), 265~268쪽.

41) 「성체첨례의 내력」, 『경향잡지』 543호(1924년 6월 15일), 249~252쪽.

42) 「성체첨례」, 『경향잡지』 616호(1927년 6월 30일), 265~268쪽.

43) 「성체거동의 내력」, 『경향잡지』 544호(1924년 6월 30일), 265~266쪽.

44) 『기해·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1, 천주교 수원교구, 2012, 241쪽.

45) 『기해·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2, 수원교회사연구소, 2012, 375쪽.

46) 「1894년도 보고서」, 『서울敎區年報』 Ⅰ, 153쪽.

47) 「1878년도 보고서」, 『서울敎區年報』 Ⅰ, 7~8쪽.

48) 「1878년도 보고서」, 『서울敎區年報』 Ⅰ, 9쪽.

49) 「1878년도 보고서」, 『서울敎區年報』 Ⅰ, 8쪽.

50) 「1887년도 보고서」, 『서울敎區年報』 Ⅰ, 57쪽.

 

51) 장동하, 「개항기 교회의 선교 정책과 전통 사회의 충돌」, 『한국 천주교회사의 성찰과 전망』,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0, 95쪽.

 

52) 장동하, 「개항기 교회의 재건운동과 복음화」, 『인간연구』 4, 가톨릭대학교인간학연구소, 2003, 155쪽.

53) 「1895년도 보고서」, 『서울敎區年報』 Ⅰ, 164~165쪽.

 

54) 「1895년도 보고서」, 『서울敎區年報』 Ⅰ, 165쪽 : 조선에서 천주교 신앙의 자유에 대해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1886년이나, 제8대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와 고종이 경복궁에서 만난 1895년, 혹은 교민조약(敎民條約)이 체결된 1899년으로 보는 견해들이 있다. 논자는 1895년에 고종 임금과 천주교 책임자인 뮈텔 주교의 공식적인 만남을 종교의 자유가 확립된 때로 본다.

 

55) 장동하, 『한국 근대사와 천주교회』, 가톨릭출판사, 2006, 200~201쪽.

56) 「1878년도 보고서」, 『서울敎區年報』 Ⅰ, 8쪽.

57) 「1885년도 보고서」, 『서울敎區年報』 Ⅰ, 41쪽.

58) 「1891년도 보고서」, 『서울敎區年報』 Ⅰ, 107쪽.

59) 「1892년도 보고서」, 『서울敎區年報』 Ⅰ, 117쪽.

60) 「1895년도 보고서」, 『서울敎區年報』 Ⅰ, 169쪽.

61) 장동하, 앞의 책, 275쪽.

62) 장동하, 『개항기 한국 사회와 천주교』, 가톨릭출판사, 2005, 102쪽.

 

63) 참고로, 충청도 지역에서 감실이 처음 설치된 해는 1893년이었다(한국교회사연구소·대전교구 홍보국 역편,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서한집』, 대전교구사 자료 1, 천주교 대전교구, 1994, 49쪽).

 

64) 「1923년 보고서」, 『서울敎區年報』 Ⅱ, 190쪽.

65) 『뮈텔 주교 일기』 3, 1903년 6월 11일 목요일.

66) 『뮈텔 주교 일기』 5, 1912년 6월 6일 목요일.

67) 『뮈텔 주교 일기』 5, 1912년 6월 9일 주일.

68) 『뮈텔 주교 일기』 5, 1913년 5월 22일 목요일.

69) 『경향잡지』 279호(1913년 6월 15일), 243~245쪽

70) 『경향잡지』 304호(1914년 6월 30일), 267~271쪽

71) 『경향잡지』 328호(1915년 6월 30일), 266~267쪽.

72) 『드망즈 주교 일기』, 1917년 6월 10일 일요일.

73) 『경향잡지』 545호(1924년 7월 15일), 301~302쪽.

74) 『경향잡지』 616호(1927년 6월 30일), 279쪽.

75) 『경향잡지』 711호(1931년 6월 15일), 249쪽.

76) 『경향잡지』 735호(1932년 6월 15일), 246쪽.

77) 『경향잡지』 783호(1934년 6월 12일), 308~309쪽.

78) 『경향잡지』 808호(1935년 6월 27일), 383~384쪽.

79) 『경향잡지』 832호(1936년 6월 28일), 376쪽.

80) 『경향잡지』 856호(1937년 6월 28일), 349쪽.

81) 『경향잡지』 960호(1943년 7월), 54쪽.

82) 『경향잡지』 971호(1944년 7월), 59쪽.

83) 『경향잡지』 1012호(1949년 7월), 107쪽.

84) 『경향잡지』 1024호(1953년 7월), 14쪽

85) 『경향잡지』 1048호(1955년 7월), 213쪽.

86) 『경향잡지』 1060호(1956년 7월), 259~260쪽.

 

87) 『경향잡지』 1071호(1957년 6월), 2180쪽. 참고로 성체축일은 5월 말에서부터 6월 중에 실시되었는데, 밀 농사를 짓고 살았던 서구 유럽은 이 시기가 추수 후 한가한 때였다. 하지만 벼농사를 짓던 한국은 농촌이 가장 바쁜 모내기 시기였다. 그런 이유로 신자들은 농번기에 성체거동 참여가 쉽지 않았다.

 

88) 『경향잡지』 1077호(1957년 12월), 443~444쪽.

89) 『경향잡지』 1096호(1959년 7월), 253쪽.

90) 『경향잡지』 1060호(1956년 7월), 259~260쪽.

91) 『경향잡지』 1155호(1964년 6월), 16쪽.

92) 『경향잡지』 1168호(1965년 7월), 14쪽.

93) 『경향잡지』 1180호(1966년 7월), 14~15쪽.

94) 『경향잡지』 1197호(1967년 12월), 39쪽.

95) 『경향잡지』 353호(1916년 7월 15일), 292쪽.

96) 『경향잡지』 544호(1924년 6월 30일), 280쪽.

97) 『경향잡지』 353호(1916년 7월 15일), 292쪽.

98) 『경향잡지』 545호(1924년 7월 15일), 301~302쪽.

99) 『뮈텔 주교 일기』 3, 1903년 6월 11일 목요일.

100) 『경향잡지』 1024호(1953년 7월), 14쪽.

101) 『경향잡지』 328호(1915년 6월 30일), 266~267쪽.

102) 『경향잡지』 471호(1921년 6월 15일), 252쪽.

103) 『경향잡지』 496호(1922년 6월 30일), 281쪽.

104) 『경향잡지』 735호(1932년 6월 15일), 246쪽.

105) 『경향잡지』 279호(1913년 6월 15일), 243~245쪽.

106) 『뮈텔 주교 일기』 4, 1909년 6월 10일 목요일.

107) 『경향잡지』 255호(1912년 6월 15일), 244~245쪽.

108) 『경향잡지』 808호(1935년 6월 27일), 383~384쪽.

109) 『경향잡지』 1024호(1953년 7월), 14쪽.

110) 『경향잡지』 1036호(1954년 7월호), 162쪽.

111) 『경향잡지』 328호(1915년 6월 30일), 266~267쪽.

112) 『경향잡지』 255호(1912년 6월 15일), 244~245쪽.

113) 위의 글.

114) 『경향잡지』 832호(1936년 6월 28일), 376쪽.

115) 『경향잡지』 545호(1924년 7월 15일), 301~302쪽.

116) 위의 글.

117) 『뮈텔 주교 일기』 4, 1909년 6월 10일 목요일.

118) 『경향잡지』 255호(1912년 6월 15일), 244~245쪽.

119) 『경향잡지』 1012호(1949년 7월), 107쪽.

120) 『경향잡지』 1112호(1960년 11월), 543~544쪽.

121) 『경향잡지』 1113호(1960년 12월), 603쪽

122) 『경향잡지』 1125(1961년 12월), 684쪽.

123) 『경향잡지』 1185(1966년 12월), 16쪽.

124) 『뮈텔 주교 일기』 4, 1906년 6월 14일 목요일.

125) 『경향잡지』 856호(1937년 6월 28일), 349쪽.

126) 『경향잡지』 279호(1913년 6월 15일), 243~245쪽.

127) 『뮈텔 주교 일기』 4, 1909년 6월 10일 목요일.

128) 『경향잡지』 545호(1924년 7월 15일), 301~302쪽.

129) 『경향잡지』 1012호(1949년 7월), 107쪽.

130) 『경향잡지』 1024호(1953년 7월), 14쪽.

131) 『경향잡지』 1036호(1954년 7월), 162쪽.

132) 『경향잡지』 1076호(1957년 11월), 410쪽.

133) 『경향잡지』 1089호(1958년 12월), 484쪽.

134) 『경향잡지』 1088호(1958년 11월), 440~444쪽.

135) 『경향잡지』 832호(1936년 6월 28일), 376쪽.

136) 『경향잡지』 880호(1938년 6월 28일), 311쪽.

137) 『경향잡지』 856호(1937년 6월 28일), 349쪽.

138) 『경향잡지』 1077호(1957년 12월), 443~444쪽.

139) 『경향잡지』 1024호(1953년 7월), 14쪽.

140) 『경향잡지』 783호(1934년 6월 12일), 308~309쪽.

141) 『경향잡지』 856호(1937년 6월 28일), 349쪽.

142) 『경향잡지』 880호(1938년 6월 28일), 311쪽

143) 『경향잡지』 1060호(1956년 7월), 259~260쪽.

144) 『경향잡지』 1089호(1958년 12월), 484쪽.

145) 『경향잡지』 1076호(1957년 11월), 410쪽.

146) 『경향잡지』 1088호(1958년 11월), 440~444쪽.

147) 『경향잡지』 1136호(1962년 11월), 581쪽.

148) 『경향잡지』 1100호(1959년 11월), 457쪽.

149) 김희중, 「세계성체대회의 생성 배경 및 의의」, 『사목』 129호(1989년 10월), 39~53쪽.

 

[교회사 연구 제56집, 2020년 6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강석진(순교성지 새남터 성당 주임 신부,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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