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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목] 영화 칼럼: 셰이프 오브 워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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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8-30 ㅣ No.1224

[영화 칼럼] 셰이프 오브 워터(2017년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

 

 

‘틀’을 깨면 사랑도 넓어진다

 

인간은 ‘틀 짓기’를 좋아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 ‘이러이러하다’, ‘이러해야 한다’라고 규정하고는 그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하고, 벗어난 것들은 비난하거나 무시하거나 부숴버립니다. 그것이 편안하고, 안전하며, 세상의 질서를 지켜준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의와 상식, 보편적 가치라고 정해놓은 틀에는 거짓과 편견, 무지와 오만, 폭력과 이기심이 숨어있습니다.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은 이질적이고 별난 사랑 이야기로 그것을 꼬집습니다. 이 영화에 대해 우리가 ‘이질적’, ‘별난’이라고 표현하는 말 자체가 이미 스스로 틀에 갇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틀’은 이렇게 생각하도록 만듭니다.

 

‘1962년 남미의 지저분한 강에서 잡혀 미국 항공우주센터 비밀 실험실로 온, 몸 전체가 두껍고 큰 비늘로 감싸인 괴생명체(더그 존스 분)는 아무리 인간과 비슷하게 생겼다 해도 인간이 아니다. 한낱 괴물(짐승)이고 자산(물건)일 뿐이다.’

 

그를 해부해 우주 연구에 이용하려는 장군과 보안 책임자인 스트릭랜드(마이클 섀넌 분)는 이렇게 말하지요.

 

“우린 하느님의 모습을 본 따 만들어졌어. 우리 하느님이 저렇게 생겼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우리 하느님은 인간과 똑같이 생겼다”고. 하느님의 모습은 누구도 알 수 없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니 양서류 괴물과 실험실의 청소부 엘라이자(샐리 호킨스 분)의 사랑. 그것도 단순한 감정 교류를 넘어 육체적 사랑에 감정이입이나 동화되기가 쉽지 않겠지요. 아무리 영화가 비현실적 판타지의 세계를 자유롭게 오가는 것을 허락하고 상상력의 자유를 준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은 색(빨강)과 물방울의 환상과 상징으로 그 사랑을 고집합니다. 언어장애를 가졌으면서도 뮤지컬 배우가 꿈인 엘라이자는 몸짓(수화)과 계란, 음악과 춤으로 괴생명체와 교감하고, 사랑의 감정을 만들어가고, 그의 생명을 지켜주려 합니다. 동료인 젤다와 가난하고 한물간 늙은 화가 자일스가 실험실에서 그를 탈출시켜 바다로 보내주려는 그녀를 돕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영화는 ‘오직 우리만 별 다섯 개를 달았다’고 하는 인간 우월주의, “신은 당신(흑인, 여성)보다 내(백인, 남성) 모습에 더 가깝게 생기셨지”라는 인종차별과 성차별을 비판합니다. 인간의 언어가 가장 뛰어난 소통의 수단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시간은 과거로부터 흐르는 강물과 같고, 사랑이란 그 물과 같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물은 형태를 규정하지 않습니다. 생명이 있는 곳에는 늘 존재하며, 어떤 그릇이냐에 따라 그 모양을 달리합니다. 사랑 역시 영화의 마지막에 나오는 시(詩)의 한 구절처럼 ‘그대의 모양 무언지 알 수 없지만, 어디서나 나를 감싸 흐른다’는 것이지요. 주님의 사랑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이 영화도 별난 이야기로 인간의 그릇, 나의 그릇에 담긴 사랑만이 아닌 세상 모든 모양의 사랑을 축복하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2020년 8월 30일 연중 제22주일 서울주보 4면, 이대현 요나(국민대 겸임교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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