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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자 수도회의 사회복지 활동6: 오늘도 인보(隣保)의 삶을 통해 그 뜻을 세상에 알리는 인보 성체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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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5-07-14 ㅣ No.1879

[여자 수도회의 사회복지 활동 · 6] 오늘도 인보(隣保)의 삶을 통해 그 뜻을 세상에 알리는 인보 성체 수도회

 

 

인보 성체 수도회를 창립한 윤을수 신부

 

인보 성체 수도회는 1956년 설립된 방인 수도회다. 한인 사제에 의해 창설된 한국적 수도회로 방유룡(方有龍, 안드레아) 신부의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 선종완(宣鐘完, 라우렌시오) 신부의 성모 영보 수녀회와 더불어 역사가 오래된 대표적인 수도회이기도 하다. 어느 수도회든지 창립자의 정신을 기리고 이를 따르고자 노력하는 것은 매한가지이지만, 한국교회,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 윤을수(尹乙洙, 라우렌시오) 신부가 이룬 일들이 적지 않기에, 인보 성체 수도회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윤을수 신부에 대해 함께 알아야 한다.

 

윤을수 신부는 1907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다. 아주 어렸을 때 온 가족이 교우촌으로 이주해 신앙을 지키며 자랐으며 열세 살 때 예수성심신학교(소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1932년에 사제품을 받은 윤을수 신부는 뛰어난 프랑스어 실력을 갖추어 사제로서 사목하는 가운데서도 1936년에 『라선사전』을 발간했으며, 『경향잡지』 등에 꾸준히 글을 쓰기도 했다. 1937년에는 프랑스 소르본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으며, 1939년에 학위를 딴 뒤에는 귀국하지 않고 유럽 각지를 다니며 학술 활동을 지속했다. 이때 작업한 『준주성범』 번역본이 1942년에 출간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본격화하던 1941년부터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이승만과 교류하는 등 조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해방 이후 1948년에 귀국한 윤을수 신부는 성신대학 학장으로 교편을 잡았고, 경향신문사 상임고문으로 임명되어 신문사의 발전을 위해 힘쓰기도 했다. 그러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군종 사제로 복무하면서 새로운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윤을수 신부는 전쟁 기간에 무수히 많은 전쟁고아를 마주했고, 이들을 돕기 위한 방안을 고민하게 되면서 학자 신부에서 사회사업 활동가 신부로 방향의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골롬바사와 한국인보회의 설립

 

윤을수 신부는 1950년에 ‘한국인보회(Caritas Coreana)’를 설립했고, 1951년 3월에는 소사 벌 응절리 지역을 거점으로 하여 ‘골롬바사’라는 기관을 세워 전쟁고아 보호 활동에 착수했다. 8월에는 서울 부암동에 골롬바 어린이집(고아원)을 개소했는데, 이것이 본격적인 양육 사업의 시작이었다. 부암동 골롬바 어린이집에서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들이 일손을 거들었다. 얼마 뒤 소사 지역에서도 어린이집 운영을 시작했고, 1953년 초부터는 청평(가평군 청평면)의 친애원도 관할하게 되었다. 1954년부터는 청평 본당에 부임하게 되어 지역민들을 위한 지역사회개발 사업을 수행하기도 했다. 친애원에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들이 파견되어 어린이 돌봄을 전담하기는 했지만, 보호 아동이 늘어남에 따라 인력 수급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결국 1956년에 전후 구호사업을 위한 전문적인 인력 양성 교육기관으로 구산후생학교를 설립했다. 이 학교의 수료자 가운데 청원자가 나오게 되면서 구산후생학교의 설립일인 1956년 11월 19일을 인보 성체 수도회의 창립일로 간주한다.

 

한편 한국인보회는 윤을수 신부가 1950년에 설립한 이후 전쟁 중에, 그리고 전후 복구 시기 한국의 열악한 상황에서도 인보의 정신을 실천하고자 노력했다. ‘인보(隣保)의 정신’이란 모든 인간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행복을 공유하는 것이다. 즉 도움이 필요한, 어려움에 빠진 이들(요구호자)을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하면서 그들이 정신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의미한다. 인보회는 1954년에는 국제 카리타스에 가입 단체로 등록되기도 했고, 윤을수 신부의 골롬바사나 청평 본당, 성 라자로 마을 등을 통해 구체적인 실천으로까지 이어졌으나, 함께 활동할 이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결국 활동의 동력이 부족해 1961년 이후로는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1950년대 천주교 사회복지 활동을 사실상 총괄하던 가톨릭구제회 한국지부장 캐롤(George Carroll) 몬시뇰이 남긴 서신에 따르면 이름은 한국인보회였으나, 전체를 아우르지 못하고 서울대교구에서만 활동하는 한계가 있었다고 한다.1) 윤을수 신부는 ‘Caritas’를 ‘인보’로 번역해서 ‘인보회’라고 했지만, 1974년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서 한국 카리타스를 다시 만들었을 때는 ‘인성’으로 번역하여 ‘인성회’가 되었다.

 

 

구산후생학교의 설립과 운영

 

구산후생학교가 처음 시작할 때는 50여 명이 등록하였다. 여기에는 사회복지에 관심이 있는 이들, 그리고 윤을수 신부의 인보 영성에 공감하는 예비 수도자들이 섞여 있었다. 학교 창립 이듬해 3월에는 학생들을 사회반과 수도반으로 분리했는데, 24명이 수도반이 되었다. 이 24명이 수도회의 씨앗이 된 것이다. 그러나 반을 나누었다고는 해도 수료 후의 진로가 달랐을 뿐, 2년 과정의 훈련은 모두 함께 받았다.

 

학교 교과 과정은 교리신학, 윤리신학, 교회사, 전례, 영성신학 등의 종교과목, 사회개론, 사회복지, 아동복지, 법률의 사회과목, 라틴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음악의 교양과목, 그리고 실습으로 구성되었다.

 

구산후생학교는 기숙사제로 운영되었으며, 새벽에 기상하면 아침 기도와 미사로 하루를 시작했다. 오전 8시부터 학과 공부, 점심 먹고 오후에는 농사일이나 빨래 등 노동 시간이 이어졌으며, 저녁에는 다시 어학 등의 특별 과목 강습이 있었다. 주말에는 특별 실습으로 여러 현장을 다녔는데, 도움이 필요한 도시 빈민들이나 넝마주이2)를 찾아가기도 하고, 수녀가 없는 본당이나 공소에 나가 교리교사 역할을 하기도 했다. 또 시립영아원에서 영아를 돌보기도 했다.

 

구산후생학교는 처음 학교를 시작할 때 별도의 등록금을 받지 않는 대신, 사회반의 경우 수료 후에 2년간은 골롬바사가 운영하는 현장에서 봉사하도록 했다. 사회반은 2년 과정을 마치고 여러 현장으로 파견되었다. 한편 수도반 24명은 1958년 6월 5일 서울대교구장 노기남 대주교로부터 인가를 받아 첫 서원식을 했고, 1960년 10월에는 교황청 포교성성의 인가를 받았다. 수도회의 이름은 ‘인보회’에서 ‘인보’, ‘성체 성혈’의 정신을 기리는 의미로 ‘성체’를 붙여 ‘인보 성체회’라 했고, 창립 이후로 매년 서원식도 성체 성혈 대축일에 맞춰서 치러졌다. 학교는 1964년까지 유지되다가 윤을수 신부가 사회사업에 손을 떼면서 폐교되었다.

 

구산후생학교는 국내에 사회복지 전문가를 육성할 수 있는 곳이 극히 드물던 시기에3) 윤을수 신부가 교육기관 설립의 필요성을 빠르게 알아차리고 시작했던,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기관이었다. 오래 지속되지 못했기에 안타깝게도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 갔지만, 인보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활동은 수도회를 통해 이어질 수 있었다.

 

 

수도회의 초기 활동

 

인보 성체 수도회는 모든 것이 처음인 신생 수도회였기에 창립자 윤을수 신부의 지도에 크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수도회에서 외적으로 눈길을 끄는 지점은 청원자들의 머리를 파마하게 했다는 것, 한복 치마저고리의 형태를 한 수도복을 입은 것이었다. 파마머리는 이제 더 이상 낯설지 않을 만큼 보급되었으나 1950년대는 먹고살기도 어렵던 시절이라 주로 도시를 중심으로 외모를 가꿀 수 있는 일부 계층의 유행이었다. 그러나 윤을수 신부는 파마가 여성들의 머리 손질 시간을 줄일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이라고 보았고 모든 청원자에게 파마머리를 권했다. 수도복의 경우, 처음에는 별도로 마련하지 않고 평상복을 입기도 했으나 회원들이 거듭 요청하자 만든 것이 아주 단출한 한복 형태였다. 수도복이 생긴 뒤에도 활동을 위해 파견된 현장에서 위화감을 조성하지 않기 위해 상황에 따라서는 평상복을 입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수도회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정신, 즉 사회복지적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또한 수도회 내에서의 호칭도 나이에 상관없이 서로 ‘언니’라고 부르며 모두 동등 한 관계라는 점을 강조한 것도 특징적이다.

 

 

 

초창기 수도회는 윤을수 신부가 운영하던 어린이집(보육시설), 1958년 결핵환자들을 위해 새로 설립한 성골롬바 병원, 한센병 환자(나환자) 시설인 성 라자로 마을 등에서 활동하고, 이들 기관의 자립을 위한 농장 개발, 공장 운영에도 적극적으로 헌신했다. 또한 본당이나 공소에 파견되기도 했는데 1958년 첫해에만도 백령도, 진촌, 선진동, 예산, 인제, 오류동, 강화, 일로 등 전국 각지에 수도회 회원들이 있었다. 심지어 흑산도로 파견되는 이들도 있었다.

 

파견된 이들 중에는 수도회의 특성에 맞게 사회복지 사업을 활발하게 하는 메리놀외방전교회나 골롬반외방선교회 관할 구역으로 가는 경우가 많았다. 본원이 위치한 소사에서 지리적으로 가까운 서해안 도서 지역(메리놀외방전교회의 인천교구)이나 가평 일대 등 경기도 농촌 지역(골롬반외방선교회의 춘천교구)에는 수도회에서 파견된 이들이 가톨릭구제회에서 지원받은 구호 양곡 자루를 이고 지고 주기적으로 오가기도 했다. 도움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마다하지 않고 찾아가는 것이 수도회의 소임이었기 때문이다.

 

 

지역사회개발 사업에 참여하다

 

일반적으로 수도회의 수녀들이 파견되는 현장이 어린이나 청소년, 장애인, 노인 등의 돌봄이나 수도회 운영을 위한 가사 노동에 치우친 것과 달리 인보 성체 수도회는 육체노동 현장에 투입되는 경우도 많았다. 이 역시 윤을수 신부의 영향 때문이었다.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초반까지는 국가적으로 개간과 개척을 통한 농지 확보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전후 복구기에는 말 그대로 끼니를 잇기 어렵던 시기였고, 식량 증산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가톨릭구제회 등 전후 복구를 돕던 원조단체들도 식량이나 물자의 무상 배급에서 차츰 자조와 자립을 목표로 하는 장기적인 계획 단계로 넘어가던 시점이었다. 윤을수 신부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골롬바사가 위치한 소사 벌응절리 야산과 당시 주임으로 있던 청평 본당의 주변 임야 개간을 시작으로 농지 개간 사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지역의 수요에 따라서 우물이나 다리 설치 등의 환경 개선 운동, 농촌 개량 사업도 활발하게 벌였다.

 

1961년에는 가평군 상면 현리의 산자락에 집터를 닦는 작업을 했는데 한센병 환자 중 완치된 이들의 자활과 자립을 위한 마을을 조성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듬해에는 다져진 자리에 나무를 심어 가꾸기도 했다. 이 밖에도 1960년대에 수도회가 파견되어 농지 개간,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거주지 조성, 농장 운영, 식목 등의 사업에 참여한 현장이 소래, 당진, 평택, 용인 등 전국에 다양했다. 한편 소사에서는 빵 공장, 엿 공장, 초콜릿 공장을 운영하고 가축을 기르기도 했는데, 이 일 또한 수도회의 몫이었다.

 

 

소사 본원에서 전주 본원으로

 

단순히 수도회나 사회복지를 위한 기관이라고 하기에는 활동 범위가 넓었을 뿐 아니라 그 활동성도 컸던 윤을수 신부의 방식은 결국 1960년대 중반에 들어 한계에 부딪히고 말았다. 사업의 확장을 위해 원조받았던 자금과 빌려 쓴 돈 등이 문제가 된 것이다. 서울대교구는 윤을수 신부에게 사업에서 손을 떼고 그만 둘 것을 요구했고, 윤을수 신부는 순명하여 모든 것을 내려놓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윤을수 신부와 함께하던 수도회도 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1965년부터 윤을수 신부가 더 이상 수도회를 지도하지 못하게 되면서 수도회는 잠시 공백상태에 빠졌다. 그러다가 당시 전주교구 교구장이던 한공렬(韓珙烈, 베드로) 주교의 결단에 의해 1965년 11월 25일에 수도원 본원이 소사에서 전주로 옮겨가게 되었다. 전주 본원 시대가 열린 것이다. 창립으로부터 10여 년, 수도회 회원들은 윤을수 신부를 아버지로 여기며 의지했다. 그만큼 창립자인 윤을수 신부의 지도력과 영향력이 컸다. 그러다가 갑자기 아버지를 잃게 되면서 회원들은 당황하고 방황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전주교구에서 수도회를 맡기로 하면서 파견 나간 이들은 그대로 현장에 머물렀고, 본원의 식구들은 급히 짐을 싸서 기차를 타고 전주로 향했다. 전주로 옮기면서 이름도 ‘성체 수도회’로 바꾸었고,4) 얼마 지나서는 한복 형태이던 수도복도 다른 수녀원처럼 양장 형태로 바뀌었다. 그러나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간다는 사회복지적 사명은 이들의 마음속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전주로 본원을 옮긴 뒤에 사회복지적 사명을 위해 새롭게 시작한 대표적인 사업으로 1970년 8월부터 시작한 성남의 새싹 어린이집을 들 수 있다. 성남은 당시 광주군 변두리로, 서울의 시가지 정비와 개발 과정에서 밀려난 도시 빈민들이 집단 이주해 있었지만, 아직 도로, 수도, 대중교통 등의 기반 시설은 갖춰지지 않아 매우 열악한 지역이었다. 이 지역의 열악함은 1971년 8월에 발생한 빈민들의 저항 운동인 ‘광주대단지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다. 또한 1970년대 빈민 지역에서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생계에 뛰어들어야 끼니를 굶지 않을 수준이었기에 일하는 엄마들, 일해야 하는 엄마들이 많았다. 따라서 여성들이 안심하고 생계를 위한 활동에 전념할 수 있게 해주는 어린 자녀의 보육 문제는 단순히 교육의 문제가 아닌 생존의 문제였다.

 

 

 

새싹 어린이집을 통해 인보의 정신을 구현하던 수도회 회원들은 1972년부터는 조산소도 운영했다. 그리고 1978년에는 사회복지법인 성체회 설립 인가를 받아 지역사회에 헌신하게 되었다. 한편 서울 수유동에 수련원을 마련하게 되면서, 1974년에는 인근에 성체유치원을, 1975년에는 전주 본원에 성체유치원을 개원했다. 새싹 어린이집의 이름도 동일하게 성체유치원으로 바꾸어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장애인을 위한 사업을 새로 시작했고, 1994년에는 수도회 피정의 집이 있던 용인에 뇌성마비 중증 장애인 시설인 성 요한의 집을 건립하기도 했다.

 

2025년 현재, 인보 성체 수도회는 쪽방촌, 노인 복지 시설, 장애인 복지 시설, 아동 보육, 다문화 아동과 지역 아동을 위한 활동, 노동 인권, 빈민 복지 등을 위해 전국 각지에 열여덟 군데의 기관을 운영하고 있다. 또한 새싹 어린이집으로 시작한 유아교육 사업도 지금은 열 군데 지역으로 늘어났다. 1989년에는 페루의 포마코차스(Pomacochas)에 인보 성체 수도회 회원 두 명이 선교를 목적으로 파견된 이래 해외 활동도 활발하게 하며 지금까지 여덟 개 국가 열여섯 군데 지역에서 사도직 활동을 하고 있다. 이렇게 오늘날에도 성실하게 소임을 다하는 인보 성체 수도회 회원들의 활동을 통해 창립 정신인 성체 성혈을 통해 어려운 이웃과 함께하는 그 마음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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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영순, 『윤을수 신부의 삶과 사랑』, 인보성체수도회, 2011, 165~166쪽에서 재인용.

 

2) 넝마(낡고 해어져서 입지 못하게 된 옷, 이불 등)나 헌 종이, 빈 병 따위를 주워 모으는 사람.

 

3) 구산후생학교가 생기기 전에 국내 사회복지 교육기관으로는 1947년 이화여대에 사회사업학과, 1953년 중앙신학교(현 강남대학교)에 학과가 만들어진 것이 고작이었다. 구산후생학교 설립 이후인 1957년에야 서울대학교에 보건사회부에서 운영하는 중앙사회사업종사자 훈련원이 생겼다. 그리고 1964년이 되어서 성심여자대학교에 최초의 사회복지학과가 생겼으니, 1960년대 초반까지는 천주교계 사회사업가 양성기관으로서는 구산후생학교가 거의 유일했다고 볼 수 있다.

 

4) 수도회의 이름은 1985년 당시 전주교구장 박정일(朴正一, 미카엘) 주교의 승인을 얻어 다시‘인보 성체 수도회’로 개칭하였다. 

 

[교회와 역사, 2025년 5월호, 김가흔(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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