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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순교영성: 요망한 그림과 사악한 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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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영성] 요망한 그림과 사악한 책
《사학징의》에 실린 〈요화사서소화기(妖畫邪書燒火記)〉는 천주교 신자들에게서 압수해 와 불태운 교리서와 성물 목록입니다. 이 중 교리서 책자 외에 눈길을 끄는 것은 낱장 또는 두루마리 묶음 형태의 필사본들입니다. 한글본 서학서를 비롯해, 작은 크기의 종이에 베껴 쓴 수백 장의 필사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윤현의 안국동 집 구들장 아래에서는 무려 84종의 교리서가 한꺼번에 튀어나와 관헌들을 경악시켰습니다. 이 목록은 당시 조선 교회의 교리 지식 수준을 웅변합니다. 이밖에 3백여 장의 작은 종이 쪽과 3백 장이 넘는 한글 필사 및 두루마리 외에 31 조각의 종이가 더 나왔습니다. 세 폭의 비단 보자기와 작은 광목 보자기에는 숫자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종이가 가득 들어 있었지요. 첨례표 3장과 220여 장의 필사도 나왔고, 개중에는 책으로 묶으려고 베껴 썼다가 미처 제본하지 못한 종이, 주보성인 명단을 인쇄한 것도 수십 장 나왔습니다.
무교동 인근 군기시(軍器寺) 앞 과부 김희인의 집에는 김흥년, 이흥임, 이어린아기, 김경애 등의 과부와 동정녀가 함께 생활하며 교리책을 필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집에서 교리서 16권과 교리서를 베껴 쓴 456장 및 134건의 한글 필사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기 때문입니다. 주기도문이나 십계명처럼 신자들이 꼭 외워야 할 기도문이나, 미사 전례와 관련된 내용이 들어 있었겠지요. 요망한 그림이라고 불린 성화 족자도 3개나 나왔고, 성모 마리아 그림까지 있었습니다. 십자패를 단 묵주가 6개, 거기에다 자줏빛 휘장까지 나온 것을 보면 이곳에서 미사도 드렸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압수품 목록은 당시 초기 교회 신자들의 신앙적 관심사와 교리 지식 수준, 미사 전례 등을 알게 해주는 드롭 박스 같은 것입니다. 교리서 외에 《성녀 간디다》, 《성녀 데레사》, 《성녀 아가다》, 《성 안드레아》, 《성부 마리아》와 같은 성인전은 당시 우리나라 교인들이 특별히 사랑했던 성인 성녀들에 대한 취향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수백 장의 종이들에서 우리는 당시 교회 본부가 각처의 신자들에게 교리를 보급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십계명을 외우고 예수 마리아를 외우면 천당에 갈 수 있다는 가르침만으로는 전교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 한 장의 종이쪽은 그가 천주교 신자임을 입증하는 증명으로 목숨과 맞바꾸는 물건이 되었습니다. 구들장 밑에 숨기고, 천장 위에 감추고, 베개 속에 넣고, 땅속에 묻었어도 포교들은 용케 찾아냈습니다.
압수된 종이쪽에 적힌 기도문, 하도 들고 외워 나달나달해진 낡은 종잇장들은 그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요? 그들이 목숨과 바꿔 끝내 지키려 했던 진리는 무엇이었을까요?
[2025년 10월 5일(다해) 연중 제27주일 서울주보 7면,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0 8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