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31일 (금)
(녹)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끌어내지 않겠느냐?

가톨릭 교리

가톨릭 신학: 나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이사 4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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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5-10-29 ㅣ No.6303

[가톨릭 신학] 나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이사 41,10)

 

 

맹자는 ‘생어우환 사어안락’(生於憂患 死於安樂)이라 했습니다. 번역하면 ‘우환에 살고, 안락에 죽는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어려움과 근심이 많을 때 분발하고 노력하고, 편안함과 즐거움 속에서는 오히려 나태해져 죽음에 이릅니다. 어려움이 사람을 성장시키고, 안락함은 사람을 퇴보시킨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 말은 늘 고통 속에 살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삶 안에서 절실함을 발견해야 하고, 그 절실함 안에서 또한 초연하고 당당하게 살길 바라는 말입니다.

 

인간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 고통을 느끼고, 원하는 것을 얻으면 다른 무언가를 갈구합니다. 동시에 욕망의 부재 역시 고통을 안겨줍니다. 아무것도 원하는 것이 없을 때 권태가 시작되고, 권태는 결국 존재의 공허함을 마주하게 합니다. 권태가 일상이 되면 삶이 무의미해지고 결국 절망에 이르게 됩니다. 또한 인간 존재의 목적이 그저 행복이 되면, 그때부터 더 많은 불행과 고통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삶의 목표는 자기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향하라는 것입니다.

 

윤리적인 삶은 결핍의 고통과 권태의 허무함에서 자유롭게 해 주는데, 윤리적 삶의 가장 적극적 형태가 신앙입니다. 신앙이란 하느님과 맺는 관계입니다.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유지하면, 인간은 똑바로 서는 것이 가능합니다. 유다가 저지른 가장 큰 죄는 스승 예수님을 배반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것은 베드로를 포함한 모든 제자입니다. 유다의 가장 큰 죄는 절망입니다. 즉 죄에 대한 판단을 본인이 했고, 본인 스스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라 단죄했습니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고, 오직 신앙만이 인간을 절망에서 구할 수 있습니다. 힘들고 어렵다고 ‘절망’(絶望, 희망을 끊어버리다)하지 마십시오. 절망은 유다가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 즉 ‘경외’는 하느님을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인정하고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경외하는 마음이 있을 때 신앙이 시작되고, 신앙이 우리에게 힘이 됩니다. 그리고 침묵은 하느님 경외의 첫 단계이자 지혜에 이르는 첫 단계입니다. 침묵은 듣는 것입니다. 신앙은 눈을 감아야 보이고, 귀를 닫아야 들립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6,20)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분과 함께한다면 이 세상 어떤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책임지실 것입니다. 그분을 알아보고 함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미사입니다. 즉 그분의 말씀을 머리와 마음에 새겨듣고, 그분의 몸을 우리 안에 정성스럽게 모시는 것입니다. 미사는 예수님을 만나고 체험하며, 그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배우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2025년 10월 26일(다해) 연중 제30주일 서울주보 5면, 조한규 베네딕토 신부(가톨릭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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