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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가톨릭신문으로 보는 한국교회 100년 (25) 1974년 한국교회 신자 수 100만 돌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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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가톨릭신문으로 보는 한국교회 100년] (25) 1974년 한국교회 신자 수 100만 돌파 교회가 치켜든 정의의 횃불, 민중의 발길은 성당으로 향했다
“한국 가톨릭 총 신자 1백만 돌파, 전체 인구의 3.1%인 101만 2209명 - 1974년 12월 31일 현재, 한국 가톨릭 총 신자 수는 드디어 1백만을 돌파한 101만 2209명으로 밝혀졌다. 최근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CCK)가 집계, 발표한 ‘74년도 한국 천주교회 교세 통계표’에 의하면 남자가 42만 719명, 여자가 56만 4655명, 교적 미정리자 5003명, 군인 영세자 2130명으로 73년에 비해 5만 8410명의 신자가 늘어 지난 한 해 동안 6.12%의 신자 증가율을 보였으며 신자 수는 전체 인구의 3.1%로 불어났다.”(가톨릭시보 1975년 6월 1일자 1면)
신자 100만 명 돌파
한국교회 신자 수가 1974년 12월 31일 기준 100만 명을 돌파했습니다. 한 해 동안 5만 8410명이 늘어 연간 6.12%의 증가율을 기록하며, 마침내 100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신자 수가 10만 명을 넘어선 때가 44년 전인 1930년 말이었음을 감안하면 매우 뜻깊은 이정표입니다. 한국교회가 본격적인 성장 국면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주는 순간이었습니다.
1973년의 신자 증가율은 18.7%였으나, 1974년에는 6.12%에 그쳐 의문을 낳았습니다. 얼핏 성장세가 급락한 듯 보이지만, 이는 1973년 집계에서 ‘행방불명자’가 전체 신자 수에 가산되어 증가율이 비정상적으로 높게 잡혔기 때문입니다. 1974년부터는 이러한 가산 없이 통상적인 증가만 반영되면서 증가율이 낮아 보인 것입니다. 6.12%는 정상적인 기준으로도 상당히 높은 증가율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100만부터 600만까지
신자 수 100만 명 돌파는 이후 교세의 급격한 팽창을 알린 신호탄이었습니다. 10만 명에서 100만 명이 되기까지 44년이 걸렸지만, 100만 명이 두 배가 되는 데에는 불과 11년(1985년 말)이 걸렸습니다. 이어 200만 명이 300만 명으로 늘어난 시점은 1992년 말이었고, 8년 뒤인 2000년 말에는 400만 명을 돌파했습니다. 2008년 말에는 500만 명을 넘어섰으며, 최근 집계인 2024년 말 현재 신자 수는 약 599만 명으로 600만 명에 육박합니다.
신자 수 100만 명 돌파에 크게 기여한 요인으로는 1950년대부터 이어진 높은 증가율을 들 수 있습니다. 전후 산업화·도시화가 가속하는 가운데,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자국어 전례 정착과 평신도 사도직 강화가 확산됐습니다. 교구 확장과 본당 신설이 빠르게 이루어졌고, 교리·예비신자 교육도 체계화됐습니다.
1980년대, 사회적 갈망과 종교적 응답
한국교회의 급속한 양적 성장은 1980년대에 특히 두드러졌습니다. 이 시기 신자 증가율은 연평균 7.54%라는 높은 수치를 기록해, 전후 1950년대의 폭발적 성장에 필적했습니다. 분단 체제가 고착된 가운데 산업화·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되고, 억압적 통치 속에 인간 소외와 인권 침해가 빈발하자 종교가 제공하는 위안과 연대에 대한 사회적 갈망이 커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천주교회의 성장은 다른 종교와 비교해도 이례적이었습니다. 배경에는 한국교회가 시대의 징표를 올바로 식별하고, 복음적·민족적 소명에 충실히 응답한 점에 있습니다. 당시 한국교회는 사람들의 고통에 귀 기울이고 예언자적 사명을 실천해 시대의 양심으로 기능했습니다. 민주화와 정의 구현을 위한 헌신을 통해 인간 존엄을 수호하려는 노력이 이어졌고, 그 모습이 널리 알려지며 많은 이가 신앙 공동체로 합류했습니다.
1989년 서울 세계성체대회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두 차례 방한 등 대규모 행사는 교회의 대사회적 인지도를 크게 높였습니다. 그 결과 신자들은 신앙적 자부심과 긍지를 새롭게 확인했고, 이는 곧 교세 확장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이후 이러한 우호적 이미지는 점차 약화됐습니다. 사회 전반의 탈종교화 경향이 확산됐고, 교회 전반의 중산층화와 미사 참례율 저하 등 신앙의 활력이 떨어지는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청년층의 이탈로 교회의 고령화도 심화되고 있습니다.
시대적 아픔과 함께하는 교회
한국교회의 역사를 돌아보면 신자 수의 증감은 그 시대 교회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하느님 백성의 정체성을 얼마나 충실히 살아냈는지를 드러냅니다. 신자 수가 크게 늘던 시기의 교회는 거의 예외 없이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며 하느님의 정의를 드러내고자 노력했습니다. 혹독한 박해 속에서도 신자가 늘어난 것은 힘없고 고통받는 사람들과 교회가 함께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교회가 고통스러운 민중의 현실과 동떨어져 있었던 시기에는 신자 증가율이 떨어졌습니다. 우리는 그런 모습을 일제강점기 교회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일제의 억압으로 고통받는 민족의 현실을 외면한 교회를 당시 사람들은 어쩌면 일제의 부역자로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전후 굶주린 이들을 먹이고, 독재 정권의 장기 집권에 맞서 싸운 1950년대와 1960년대 초반에는 신자 증가율이 크게 높아졌습니다. 독재 정권에 맞서 민주화 투쟁에 나서고, 핍박받는 노동자를 옹호하며 사회정의에 투신한 1970~1980년대 교회에는 정의와 평화를 바라는 이들이 넘쳐났습니다.
1970년대 초반, 한국 교회는 독재 정권과의 투쟁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합니다. 1968년 강화도 ‘심도직물’ 사건을 시작으로 고조된 긴장과 갈등은, 한국교회가 신자 수 100만 명을 돌파한 1974년, 지학순 주교 구속 사건을 거치며 본격화됐습니다.
[가톨릭신문, 2025년 11월 2일, 박영호 기자] 0 2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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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톨릭시보 1975년 6월 1일자 1면에는 ‘한국 가톨릭 총 신자 1백만 돌파’라는 제목의 기사가 게재됐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교회가 세상의 고통에 함께하던 때에는 신자 증가율이 증가했다. 1987년 2월 명동성당에서 열린 故 박종철군 추도미사 후 진행된 침묵시위. 가톨릭신문 자료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