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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자 수도회의 사회복지 활동7: 청소년을 향한 애정의 손길, 살레시오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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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5-11-06 ㅣ No.1917

[여자 수도회의 사회복지 활동 · 7] 청소년을 향한 애정의 손길, 살레시오수녀회

 

 

1. 수도회의 창립과 한국 진출

 

흔히 살레시오수녀회로 알려진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 수도회(Istituto Figlie di Maria Ausiliatrice, 이하 수도회)는 이탈리아에서 성 요한 보스코와 성 마리아 마자렐로가 공동으로 창립한 수도회였다. 돈 보스코로 잘 알려진 요한 보스코 성인의 청소년 교육에 대한 소명과 영성을 바탕으로 한 수도회는 1872년 8월 5일에 창립자 마리아 마자렐로를 비롯한 11인의 서원으로 시작했다.

 

수도회가 한국에 처음 발을 내디딘 것은 1957년 4월의 일이었다. 당시 한국에는 1954년부터 살레시오 남자 수도회가 광주지목구장 서리 현 해롤드(Henry Harold) 신부의 요청으로 들어와서 살레시오 중학교를 건립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현 신부는 여학생의 교육 또한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1956년에 살레시오 여자 수도회 일본 관구에 수도자들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1) 이에 따라 관구장 데레사 메를로(Teresa Merlot) 수녀가 현장 답사차 방한하고 귀국하는 길에 서울에서 노기남 주교를 만나게 되었다. 이때 노기남 주교가 데레사 수녀에게 한국에 진출하게 되면 도림동 본당에 분원을 꾸릴 것을 권유했다.

 

이러한 연유로 1957년 한국을 찾은 최초의 수도자들은 우선 도림동 분원에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한국에서 활동을 시작한 최초의 수도자는 이탈리아인인 가르멜라 솔라리 (Carmela Solari), 안칠라 그릿티(Ancilla Gritti), 마리아 브로카르도(Maria Broccardo), 한국인 박차순 바르바라, 필리핀인 미겔라 산티아고(Miguela Santiago) 이렇게 5인이었다. 도림동에 수녀원 분원이 설치되는 시기와 맞물려 1958년부터는 살레시오 남자 수도회에서 도림동 본당을 위임받아 서울 영등포 일대를 관할하게 되었다.

 

본디 요한 보스코 성인이 처음 살레시오 수도회를 창립했던 지역은 이탈리아 북부의 토리노였다. 19세기 중반 토리노는 당시 샤르데냐 왕국(이탈리아 왕국의 전신)의 수도로 산업화의 시기를 맞아 이제 막 공업도시로 변모하는 중이었다. 많은 청년들이 일자리를 찾아 고향을 떠나 토리노로 몰려들었고, 곧 사회문제가 발생했다. 근대 도시의 산업화는 곧 도시 빈민의 증가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요한 보스코 성인은 이 중에서도 특히 정해진 거처가 없이 부랑하는 소년들에 대한 애정과 관심으로 이들을 위한 청소년 교육 사업을 시작했고, 이것이 살레시오 수도회의 처음 시작이었다.

 

수도회가 한국에 처음 진출하던 상황도 이와 비슷했다. 영등포는 일제강점기부터 형성된 공장지대라 도림동 본당 신자 중에 인근 공장 노동자들의 비율이 높았다. 1950년대 후반은 한국전쟁이 끝나고 전후 재건의 시기로 영등포 일대에 공장이 늘어나기 시작하던 시점이었고, 일자리를 찾아 시골에서 서울로 몰려드는 이촌 향도가 한창이었다. 특히 공장 노동자들은 집과 가족을 두고 홀로 떠나온 청년, 청소년의 비중이 높았고, 이들을 위한 사목의 필요성이 대두했다. 즉 당시 도림동 본당은 서울의 공장지대를 대상으로 한 특수 사목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수도회가 진출하기 전부터 도림동 본당의 주보성인으로 요한 보스코 성인이 모셔져 있었다. 그만큼 수도회를 위해 준비된 현장이었던 것이다.

 

 

2. 수도회의 초기 사업과 어려움

 

도림동 본당에서 수도자들은 우선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한국인 박차순 수녀는 바로 교인들의 교리교육에 나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도회는 현 해롤드 신부의 초기 요청에 따른 광주 지역에서의 교육 활동도 병행하게 되었다. 1958년 2월에 ‘사레지오 수녀학원’ 학교법인 인가를 받고 4월에 개교한 살레시오 여자중학교의 초대 교장은 안칠라 그릿티 수녀가 맡았고, 이 밖에도 밀타 몬딘(mirta Mondin), 안토니에따 판톨리(Antoinetta Pantoli) 수녀가 광주 지역에서 함께했다. 광주의 교육 사업은 날로 확장되어 1961년에는 여자고등학교를, 1963년에는 초등학교를 잇달아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도림동 본당 사목도 지속되었다. 상술한 바와 같이 살레시오 수도회에 위탁하게 되면서 1958년 7월부터 살레시오회의 요셉 수아레즈(Joseph Suarez, 서요셉) 신부가 주임으로 부임했다. 서요셉 신부는 공장 노동자들을 위한 본당이라는 특성을 살려 1960년부터 가톨릭노동청년회의 지부를 만들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영등포 일대의 공장은 경공업 위주 특히 섬유 산업 공장이 많았다. 이들 공장에 가노청이 조직되면서 본당의 활동도 함께 활성화되었다. 1964년에는 샛별유치원을 개원했고, 지역민들을 위한 무료 진료소 사업도 시작했다.

 

한편 서울에서도 여학교 사업을 시작했다. 1962년부터 추진하여 도림동 본당 인근 신길동에 부지를 마련하고 1964년에는 교실 9개 규모의 건축도 완료했다. 그렇지만 이 무렵에는 성소자가 많아져서 이들을 위한 공간이 필요해짐에 따라 목표를 바꾸어 성소자들이 지원기, 청원기 동안 교육을 받는 지원소로 사용하게 되었다.2) 지원소 원장은 안칠라 그릿티 수녀가 서울로 돌아와서 맡았고, 이에 따라 광주 지역의 총책임은 밀타 몬딘 수녀에게 돌아갔다.

 

1960년대 수도회는 광주에서의 교육 사업, 방인 성소자의 훈련, 그리고 본당에서의 다양한 소임을 충실히 감당했다. 그러던 중에 도림동 분원에서의 활동은 1967년으로 마무리하게 되었다. 당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명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수도자들의 활동과 본당의 상황이 서로 맞지 않아서 다소간의 갈등이 있었고, 결국은 끝내 갈라서게 되었다고 한다.

 

 

3. 새로운 사업의 모색

 

1960년대 후반의 활동은 주로 광주의 교육 사업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렇지만 신길동을 중심으로 한 서울 지역에서도 계속 활동할 필요가 있었다. 지원소가 위치한 곳이자 동시에 영등포 지역에 도움이 필요한 어린이·청소년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와 더불어 1969년에는 수도회 총원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결정 사항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논의하는 특별 총회가 개최되면서 수도회의 생활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지역 사회를 위한 노력은 1971년 마자렐로 센터의 건립으로 이어졌다. 처음 계획은 당시의 대표적인 여성 직업 청소년이던 버스 안내원들이 안심하고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는 것이었다. 건축비의 일부는 수도회에서 부담했고, 일부는 독일 미제레오르(MISEREOR)의 지원을 받았다. 그렇지만 버스회사에서 자체적으로 기숙사를 갖추게 되면서 공장 여성 노동자들의 기숙사로 변경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학업을 하지 못하고 일찍이 생활전선에 뛰어든 10대 중반, 후반의 어린 여공들이 많았는데, 그중 다수는 일자리를 찾기 위해 고향의 가족들과 떨어져 홀로 상경한 이들이었다. 문제는 이 시기에 서울의 주거 사정이 아주 열악했다는 데 있다. 1950년대부터 이어진 이촌향도로 인해 서울의 인구는 급증했으나 이들을 위한 충분한 주거가 제공되지 않아 살 곳이 없는 이들이 천변이나 산지에 무허가 판자촌을 이루어 살던 때였다.

 

영등포 공장지대의 경우 대규모 공장에서는 자체 기숙사를 제공하기도 했으나, 그보다 작은 공장을 다니는 이들은 출퇴근이 가능한 주변의 주택가에서 자취를 해야 했다. 그렇지만 아직 노동집약적 경공업 비중이 높던 시기에 경영진들은 사업의 경쟁력을 가격에서 확보하려고 했고, 이에 따라 노동자의 임금 수준은 아주 형편없는 것이었다. 또한 이들의 다수는 임금의 일부 혹은 대부분을 고향의 가족들을 돕기 위해 사용해야 했다. 결국 여공들에게 남은 선택지란 많지 않았다. 흔히 벌집으로 불리곤 했던, 2평짜리 쪽방이 가장 흔했고 그나마도 매달 내는 방세가 부담스러워 서너 명이 함께 살곤 했다. 따라서 이들이 편하게 머물 수 있는 생활 공간은 필수적이고 중요한 문제였다.

 

센터는 기숙 공간일 뿐만 아니라 교육과 훈련, 그리고 친교의 공간이기도 했다. 수도회에서는 센터를 이용해서 근로 청소년들을 위한 일종의 야학을 운영했다. 초등학교만 겨우 마친 수준의 청소년들이 많다는 점을 감안해서 중학교 학업 수준의 학교가 운영되었는데, 기숙생 외에도 가노청 회원들도 포함되었다. 교육 외에도 희망자들을 대상으로 한 교리교육이나 취미 교양 강좌 등 다양한 그룹 활동을 수행하기도 했다. 마자렐로 센터의 운영은 상당히 성공적이어서 1976년에는 건물을 120명 규모로 증축하기도 했다.

 

1979년에는 마산에 자유무역지역이라는 산업공단이 조성됨에 따라 그 지역의 여성 노동자들을 위한 아욱실리움 센터3를 설립해서 운영하게 되었다. 아욱실리움 센터의 건축은 네덜란드 세베모(CEBEMO)의 후원으로 이루어졌다. 아욱실리움 센터는 기숙사인 동시에 교육과 훈련을 위한 기관으로 활용되었다. 센터를 중심으로 하여 마산의 가노청 지부도 만들어졌다. 세베모의 요청에 따라 양재, 수예 등의 기술 교육도 가능했으나 지원자가 많지 않아 오래 운영되지는 못했고, 1980년대에는 교리교사 교육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4. 수도회의 확장

 

수도회의 활동이 늘어나고 인원도 많아짐에 따라 1972년부터는 수련원을 설치하여 한국에서 직접 회원을 양성할 수 있게 되었다. 얼마 뒤인 1975년에는 일본 관구에서 독립하여 로마본부 직속의 위임구(준관구)가 되었고, 준관구장에는 가타리나 무울(Catherine Moore) 수녀가 임명되었다. 1977년에는 수련소를 광주 지산동수녀원으로 옮겼다. 마침내 1985년에는 정식으로 한국 관구가 설치되었다. 당시 규모는 수녀원 8개에 서원자 77명, 수련자 17명, 청원자 15명, 지원자 25명에 달했다. 초대 관구장은 임호현 데레지나 수녀가 맡았다.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는 수도회의 소임에도 변화가 발생했다. 수도회가 한국에 처음 진출하던 때부터 국가 주도적 경제 성장 정책이 추진되던 시기를 거쳐 1980년대에는 한국의 사회경제적 상황이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1950년대 한국은 아직 한국전쟁으로 인한 상흔이 도저했고, 자립이 어렵던 원조경제 시기였다. 초창기 수도회의 운영 또한 가톨릭구제회 등 외원단체의 도움을 받아야 했으며, 심지어 미군 부대 빨래를 해주며 생필품을 지원받기도 했다. 본당을 중심으로 하는 사업이나 유치원의 운영, 센터의 설립도 역시 외국의 지원에 의존했다. 그렇지만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경제적인 부분에서 외국의 원조를 받던 시기는 지나갔다. 이제 한국인들의 손으로 한국 사정에 맞는 사업을 꾸려 나가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다른 측면의 변화도 있었다. 여전히 노동 현장의 어려움들이 산재해 있었지만, 그와 별개로 학생들의 상급 학교 진학률이 높아지면서 노동 청소년의 인구는 크게 줄어들었다. 따라서 청소년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해졌다. 1982년부터 수도회의 임원지 수녀가 광주교구청 성소국에 파견된 것을 계기로 각 지역 성소국, 교육국, 청소년국 등의 사목 활동에 진출하게 되었다. 살레시오 남자 수도회에서 운영하던 신월동의 살레시오 교육회관에도 1980년부터 박윤숙 수녀가 파견되었다.

 

1980년대 들어서는 본당 파견도 늘어났다. 수도회는 1967년 도림동 본당에서 철수한 이래로 청소년 교육의 소명과 센터 등을 통한 사회사목적 소임을 감당하는 데 주력해 왔다. 물론 요청이 있는 경우 신설 본당이 자리잡을 수 있도록 교리교육이나 주일학교 운영 등의 역할을 감당하기도 했으나 분원 설치는 고려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중랑구에 묵동 본당이 신설되면서 1980년 수도회로 파견을 요청해 온 것을 계기로 본당 파견을 재개하게 되었다. 이후 구로3동 본당(1983년), 광주 방림동 본당(1983년), 정읍 연지동 본당(1986년)에 수녀들이 파견되어 분원을 이루었다.

 

도움이 필요한 청소년을 위한 사업은 나자렛집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이 시기에는 가정 형편이 어렵거나 편부모 가족, 조손 가족 등 가정에서의 돌봄이 충분하지 못한 불우청소년의 수가 늘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부분 법적 보호자가 있기 때문에 고아원 등의 보육시설로 갈 수는 없으나 실질적인 양육이 제공되지는 않는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었다. 수도회는 이러한 여성 청소년을 돌보는 소규모의 공동체를 서울의 신월동에 처음 만들어서 운영했고, 10대 소녀들은 나자렛집에 머물며 장래를 준비할 수 있었다. 나자렛집은 이후로도 다양한 지역에 설립되었다.

 

 

5. 돈 보스코의 영성 수도회의 비전

 

돈 보스코의 영성은 흔히 예방 교육으로 일컬어진다. 사람의 평생에 있어서 청소년기는 이후의 삶을 준비하는 기간이다. 따라서 어려운 상황에 처한 청소년들에게 적절한 시기에 도움을 주는 일은 그 영혼을 구하는 고귀한 사명이라고 할 수 있다. 돈 보스코의 예방 교육은 이성과 종교와 사랑 세 가지의 원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즉 청소년을 존중하는 이성적 대화를 통한 소통, 하느님과의 관계를 통해 도덕적 가치와 삶의 방향을 설정하는 영성 교육, 그리고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봉사자의 따뜻한 태도 세 가지가 종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실현 방법에 있어서는 아씨스텐자(Assistenza)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되고 있다. 아씨스텐자란 도움이 되는 현존을 뜻한다. 그리고 이는 곧 청소년들을 위해 오랜 기간 사목해 온 수도회 회원들의 노력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1957년에 한국 땅을 처음 디딘 이래로 수도회가 우리 사회를 위해 감당해 왔던 모든 활동은 이러한 돈 보스코의 영성을 실천하고 전파하기 위한 것이었다. 활동의 변화 또한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이를 적용하여 사회에, 그리고 청소년들에게 도움이 되기 위한 다양한 시도의 일환이었다. 지면의 부족으로 다 다루지 못하였지만 2000년대 들어서 수도회는 사회복지법인을 꾸려서 사회적 소명을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으며, 청소년을 위한 교육의 소임 또한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에 도움의 손길이 필요했을 때 일본 관구에서 다섯 수녀가 선교사로 파송되었던 것처럼 1998년에는 연길에, 2005년부터는 몽골에 파견되는 등 한국에서의 다양한 활동에 그치지 않고 이제는 그 발걸음이 전세계로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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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수도회의 활동 범위는 전세계로 확장되어 있었고, 아시아권에서만도 1922년에 인도에 진출한 것을 시작으로 1955년까지 일본, 태국, 홍콩, 마카오, 필리핀에 진출해 있었다. 그중에서도 일본 관구에서 활동하던 수녀들이 한국에 오게 되었던 것은 일제 식민 지배의 영향으로 1950년대까지도 일본어 소통이 가능한 한국인이 적지 않아 초기에 언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2) 이 부지는 지금 수도회 한국 관구 본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3) ‘아욱실리움’은 도움이신 마리아를 뜻하는 라틴어 ‘Maria Auxilium’에서 유래하였다.

 

[교회와 역사, 2025년 8월호, 김가흔(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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