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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가톨릭신문으로 보는 한국교회 100년 (26) 지학순 주교 구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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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가톨릭신문으로 보는 한국교회 100년] (26) 지학순 주교 구속 서슬 퍼런 독재의 칼날도, 정의 향한 교회의 열망 막지 못했다
가톨릭시보, 70년대의 전망
가톨릭시보는 1970년 1월 1일자 지령 700호에 맞춰 ‘70년대 한국교회를 전망한다’는 제목의 지상 좌담을 2개 면에 걸쳐 실었습니다. 이 좌담은 교회 안팎의 시급한 과제를 두루 짚으면서, 한국교회와 한국 사회가 맞게 될 새로운 10년을 전망했습니다. 55년 전의 좌담임에도 참석자들은 교회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놀라운 혜안을 보여주었습니다.
교회 운영과 관련해 한 참석자는 “공의회의 진정한 대화 정신을 교회 운영에서 살려야 한다”며 “주교와 신부 간, 신부와 신자 간의 격의 없는 대화와 협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참석자는 “교회가 이제까지 신자를 통치한다는 관념을 갖고 있다”며 “교회를 민주화·현대화해 교회 기구 안에 평신도를 참여시켜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논의는 오늘 보편교회가 강조하는 ‘시노달리타스 교회’를 향한 여정을 미리 보는 듯한 대목입니다. 경청과 식별을 통한 성령 안에서의 대화, 그리고 여성을 포함한 평신도에 대한 존중의 필요성을 이미 오래전부터 감지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사회 참여의 시대적 요청
그런데 이 좌담에서 우리는 더욱 놀라운 전망을 발견합니다. ‘사회 참여’와 관련된 논의에서 참석자들은 교회가 사회악을 방관하는 것은 곧 교회의 사명 자체를 포기하는 일이라는 인식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한 참석자는 강화 심도직물 사건에서 교회가 보여준 태도와 메시지 발표를 높이 평가하면서, 단순히 메시지 발표에 그치지 말고 보다 적극적인 사회 참여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전망은, 한국 사회와 교회가 이후 어떤 시대적 상황을 겪게 될지를 예견함과 동시에, 한국교회가 그 시대적 요청에 어떻게 응답해야 할지를 보여준 선구적 제안이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1970년대 한국교회는 적극적인 사회 참여와 더불어, 시대의 아픔과 시련을 민족과 함께 겪으며 성장하고 발전하게 됩니다. 그 시련의 여정은 곧 한국 천주교회 사상 초유의 사건이었던 원주교구장 지학순(다니엘) 주교의 구속으로 본격화됩니다.
지학순 주교 구속
“원주 지학순 주교 징역 15년 선고 -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가 12일 내란 선동 및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피의사건 선고 공판에서 비상보통군법회의 제3심판부로부터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았다. 보도된 판결문 내용을 요약하면 ‘피고인 등은 유신체제에 불만을 품고 유신체제를 부정, 학생들의 현실 참여를 명분으로 한 학원 소요를 이용해 현 정부의 타도를 획책해 오던 자들로서 민청학련에 주도된 국가변란기도 사건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고도 당연히 할 일을 다 한 양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고 돼 있다.”(가톨릭시보 1974년 8월 18일자 1면)
한국 민주화 운동의 결정적 전환점은 1974년 7월 6일, 해외 일정을 마치고 귀국하던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가 김포공항에서 연행·구금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지 주교의 체포 정황은 당시 가톨릭시보에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고, 신속한 후속 보도도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당시 정부는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호와 2호를, 1월 14일에는 긴급조치 3호를, 4월 3일에는 민청학련 관련 활동을 전면 금지하는 긴급조치 4호를 잇따라 선포해 정국을 강하게 조였습니다. 긴급조치 9호는 이듬해인 1975년 5월 13일의 조치였습니다. 이어 5월 29일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기업공개와 건전한 기업 풍토의 조성을 위한 특별지시’가 내려졌습니다. 숨 가쁘게 이어지는 정국 속에서 교회의 사회 참여는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는 듯하다가, 지 주교 사건이 터져 나온 것입니다.
원주교구 부정부패 추방운동
지 주교가 이끌던 원주교구에서는 1971년 10월 5일부터 사흘 동안 부정부패 추방 운동이 벌어졌습니다. 직접적인 계기는 원주교구와 5·16장학회가 공동 투자해 설립한 원주문화방송국 내부가 부정·부패로 얼룩져 있음이 확인된 것이었습니다. 교구장인 지 주교가 직접 “부정부패를 근절하고 사회정의를 이룩하자”고 앞장서 시위와 농성을 주도했기에 파문은 더욱 컸습니다.
원주에서의 움직임은 전국으로 번져 각지에서 부정부패 규탄 시위가 이어졌고, 가톨릭시보는 10월 17일자 사설에서 이렇게 논평했습니다.
“…일제의 식민 통치하에서 안중근(토마스) 의사를 제외하고는 가톨릭 신자로서는 항일투쟁과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런 교회가 이제 공공연하게 데모를 강행했다는 것은 우리 교회 안에 변화가 일어났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가톨릭시보 1971년 10월 17일자 사설)
이 논평이 말해주듯, 한국교회는 이후 불의한 현실에 대해 훨씬 더 명확한 입장을 내기 시작했고, 불의한 정치와 독재정권에 대한 투쟁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됩니다.
“불의는 우리의 공동 책임”
1974년 7월 21일자 가톨릭시보 1면 중앙에는 ‘불의는 우리의 공동 책임’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전국의 주교들과 수도회 장상들은 10일 오후 6시 명동대성당에서 ‘사회정의와 평화를 위한 미사’를 공동 집전했다. 전국 각지에서 급거 상경한 신부, 수도자, 평신도 등 지도급 인사 1500여 명이 참석한 이날 미사에서는 법 절차 없이 박해받는 이들과 사회 정의를 외치다가 고통받는 모든 이들을 위해 엄숙히 기도했다.”
바로 그 아래에는 ‘지 주교 귀국, 성모병원서 가료 중’이라는 제목으로, 지 주교가 7월 6일 오후 4시43분 CPA 항공편으로 김포공항에 도착해 성모병원에 입원 중이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 옆에는 사고 형식으로 “부득이한 사정으로 지난 7월 14일자 신문은 발행하지 못했습니다”라는 안내가 붙어 있습니다. 지 주교가 7월 6일 귀국했는데 7월 14일자는 휴간했고, 10일에는 전국에서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들이 급거 상경해 미사와 기도회를 열었습니다.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지 주교의 신변에 매우 긴박한 사정이 전개되고 있었음을 알아챌 수밖에 없었습니다.
박해시대를 제외하면 한국교회사에서 처음으로 벌어진, 고위 성직자에 대한 ‘용공’ 혐의와 체포 그리고 중형 선고는, 이후 한국 민주화 과정에서 천주교회와 정권 사이에 놓일 첨예한 긴장과 갈등의 성격을 예고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서 시대의 요청에 응답해 사제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결성, 이후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의 중요한 고비마다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가톨릭신문, 2025년 11월 9일, 박영호 기자] 0 7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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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구속됐던 지학순 주교가 1974년 7월 23일 김수환 추기경(가운데), 윤공희 대주교(김 추기경 왼쪽)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양심선언’을 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가톨릭시보 1974년 8월 18일자 1면에는 ‘원주 지학순 주교 징역 15년 선고’라는 제목의 기사가 게재됐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