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4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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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리

저 여인은 누구실까?: 상지의 옥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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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5-12-03 ㅣ No.6482

[“저 여인은 누구실까?”] “상지의 옥좌”

 

 

신학교에 입학한 지 벌써 38년이 되어갑니다. 1학년 철학 시간이 생각납니다. 수업 시작 전 교수 신부님은 성호를 그으며 “상지의 옥좌여!” 하고 성모님을 부르셨고, 신학생들은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하고 응답했습니다. 어린 마음에 여러 의문이 들었습니다. 철학은 인간의 이성을 정교하게 사용하는 학문인데, 왜 기도로 강의를 시작할까? 철학은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이니 기도를 하더라도 진리 자체이신 예수님께 기도해야 하지 않을까? 왜 하필 성모님께 기도할까? 이런 의문은 오랫동안 제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때 저는 인간의 능력으로 탐색하고 수용할 수 있는 것만 진리라고 여겼습니다. 신앙 진리 역시 이성의 법칙에 위배되면 진리가 아니라 그저 신화나 비유라고 생각했고, 열심하고 성실하기만 하면 자신의 힘으로 진리를 찾아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당시 신학자들 가운데 이성의 법칙으로 하느님의 진리를 분석하고 해석하려는 이들이 있었고, 아직 미숙한 신학생들은 그것이 멋진 일인 줄 알고 환호했습니다. 하느님의 신비와 구원 진리를 이성의 그물망으로 감싸 버리려는 ‘이성주의’ 신학이 만연했던 겁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신앙으로 수용하지 않고 이성의 대상으로 삼기만 하면, 하느님께서 이루신 구원 사건의 의미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점을 소홀히 여긴 시절이었습니다.

 

 

‘이성주의’ 신학으로는 하느님 구원 사건의 의미 알아보지 못해

 

이성주의 신학은 구원의 세 가지 핵심 진리를 훼손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동정 마리아에게서 잉태되고 나신 강생 신비입니다. 자연 세계에서 인간 생명체는 남자와 여자의 생식 세포가 결합하면서 탄생합니다. 자연법칙입니다. 세상을 돌보시는 하느님의 손길은 자연법칙 안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물리학적이고 생물학적인 자연법칙을 연구하고 존중하는 것은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는 중요한 방식입니다. 그런데 이 자연법칙을 하느님 위에 두고, 하느님의 구원 사건을 자연법칙에 무조건 종속시키면, 강생 사건을 이해하는 길이 막혀 버립니다. 모든 인간 생명체가 남자와 여자의 생물학적 결합으로 탄생하니, 예수님 역시 생물학적 법칙에 따라 남자와 여자의 결합으로 탄생했다고 주장하면, 하느님의 자유와 권능을 처음부터 제한하는 것이 됩니다. 

 

반세기 전 적지 않은 신학자들은 예수님의 추종자들이 그분을 신격화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동정녀에게서 잉태되어 나셨다는 신화를 만들어 냈다고 주장했습니다. 세상의 어머니들이 남편과 관계를 맺으며 자녀를 출산하고, 또 부부 관계와 자녀 출산이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예수님의 출생을 신비화 시켜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탄생이 성령으로 인하여 이루어졌는지, 남자의 개입이 있었는지 따지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했습니다. 인류의 스승이신 예수님의 가르침과 모범만이 중요할 뿐, 그 외의 것은 무지한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겉치장이라고 했습니다. 그럴듯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때는 이런 말들이 왜 그리 멋지게 들렸는지, 돌이켜보면 쓴웃음이 납니다. 

 

하느님의 자유를 세상 법칙 안에 가두어 인간 이성의 능력으로 하느님의 신비를 해체시키면, 하느님께서 이루신 새로움은 사라지고, 예수 그리스도는 위대한 분이시다, 이것 말고는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됩니다. 예수님의 동정 잉태와 탄생은 세상을 새롭게 하신 하느님 사랑의 사건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그 사랑을 바라보는 사랑의 눈으로 알아볼 수 있습니다. 신앙의 빛으로 인간의 이성이 비추어질 때,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바라보며 말할 수 있는 겁니다. 

 

둘째, 이성주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다만 인간적인 사건으로 설명했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먼저 떠나보낸 이들이 그 사람을 도무지 잊지 못하여 늘 기억하는 것과 같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떠올리며, “당신은 우리 마음 안에 영원히 살아계십니다.” 하고 고백하는 것이 부활 신앙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부활은 인간 편에서 예수님을 기념하고 추념하는 일밖에 되지 않습니다.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세상의 죄를 없애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주님의 사랑을 소홀히 한 채, 쉽게 납득되는 방식만 찾아 구원 사건을 생각하면 주님의 신비를 훼손하는 일이 됩니다.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신앙은 죽은 것입니다. 부활의 은총으로 새롭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그리스도교 신학을 다시 풍요롭게 할 것입니다.

 

셋째, 이성주의 신학은 성체성사의 신비를 성찰하는 데 태만했습니다.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는 대신, 성체성사를 사람들의 집회 수단으로 격하시켰습니다. 성체성사는 그리스도인 생활의 기반이며 정점입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교회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은총으로 살아가고 신앙인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성장합니다. 신앙의 눈은 감아버리고 육신의 눈으로만 성체를 바라보면 성체성사의 신비를 알아볼 수 없습니다. 성체성사는 하느님의 생명을 전해 줍니다. 성체성사로 살아가는 이는 이 세상에서부터 영원한 생명을 살아가는 복된 사람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진리를 찾는 모든 이를 동반하셔

 

생각해 봅시다. 오랜 기간 열심히 공부한 후, 예수님께서 동정 마리아에게서 잉태되고 나셨다고 고백하는 것은 신앙생활에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말하거나, 주님의 부활은 다만 사람들의 연민과 사랑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라고 하거나, 성체성사는 사람들이 모이는 행사라고만 한다면, 과연 그런 공부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상지의 옥좌’이신 성모님은 천상 지혜이신 하느님의 아드님을 신앙으로 온전히 받아들인 분입니다. 당신 아드님으로 오신 하느님 아드님께 시선을 맞추며 사랑으로 응답하였고, 구원의 신비를 이해하기 위해 곰곰이 생각하며, 희망으로 주님 곁에 오롯이 머무른 분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진리를 찾는 모든 이를 동반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사랑으로 새로워질 때 인간의 이성 역시 하느님의 진리를 알아보고 깨우치는 힘을 얻습니다. 성모님의 마음으로, 성모님의 눈으로, 성모님의 정신으로 하느님을 맞이한다면, 천상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신비를 이성의 빛으로도 밝혀볼 수 있게 됩니다.

 

어렸던 그 시절, 상지의 옥좌이신 성모님께 기도하도록 이끌어주신 교수 신부님께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드립니다. “상지의 옥좌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성모님의 군단, 2025년 11월호, 노우재 미카엘 신부(부산교구 도시빈민사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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