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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약용과 천주교의 관계 재론 (2) 다산의 일기장을 중심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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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과 천주교의 관계 재론 (2) - 『다산의 일기장』을 중심으로 - 1. 머리말 2. 정약용의 서학·서교관 3. 정약용의 주문모 신부 피신설 검토 4. 정약용의 이존창 체포설 검토 5. 정약용의 보유론적 서교 지향 6. 맺음말 국문 초록
이 글은 필자가 정약용과 천주교의 관계에 대해서 두 번째로 다룬 것이다. 지나간 10여 년 동안 필자의 견해와 다른 새로운 연구들이 계속 나왔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새롭게 언급할 필요가 있었다.
첫 번째는 정약용에게 서학과 서교가 서로 분리되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여전히 정약용의 천주교에서 서학과 서교의 단계를 구분하지 않는 연구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그는 서학의 단계에서 서교의 단계로 나아갔던 것이다. 따라서 정약용의 천주교를 서학의 단계와 서교의 단계로 구분해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두 번째는 정약용에게 배교기로 알려지고 있는 시기와 관련된 문제이다. 1795년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일어났을 때 정약용은 배교하였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견해가 나와 있다. 정약용이 주문모 신부에게 체포 소식을 알리는 한편, 그를 피신시켰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약용이 금정역에서 찰방으로 있을 때 직접 이존창을 체포했다는 것이다. 이를 정약용이 천주교에 대한 신앙을 버리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당시 정약용이 천주교를 포기하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정약용이 주문모 신부의 피신에 관여한다든지, 이존창을 직접 체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강진에서의 유배가 풀린 정약용이 이후 다시 천주교로 돌아왔다는 주장 역시 그러하다. 이 역시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정약용의 천주교 신앙이란 여전히 보유론적 단계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상례와 장례에 대한 그의 태도를 통해서 살필 수가 있다. 이러한 상태에 있었던 정약용은 조선의 천주교회가 그를 그대로 받아들여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유교식 조상제사를 거부하는 조선의 천주교회는 이러한 그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 결과 정약용은 평생 천주교와 엇갈리는 만남을 운명처럼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겠다.
[교회사 연구 제66집, 2025년 6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김수태(충남대학교 명예교수)] 파일첨부 0 10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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