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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원죄(原罪)의 형정(刑政)?: 사얼(邪孽) 이신규의 삶을 통해 본 조선후기 사옥(邪獄)의 위법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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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죄(原罪)의 형정(刑政)? - 사얼(邪孽) 이신규의 삶을 통해 본 조선후기 사옥(邪獄)의 위법성 - 1. 머리말 2. 조선후기 사옥(邪獄)과 사얼(邪孽)의 처지 3. 헌종~철종 대 이신규의 활동과 이승훈의 신원 4. 덕산사건(1868) 이후 이신규의 번옥(反獄) 5. 맺음말 국문 초록
본 논문은 조선 후기 사옥(邪獄)의 특수성으로 인해 등장한 사얼(邪孽)의 존재를 조망함으로써 조선후기 천주교 신자의 형정에 나타난 법적·사회적 맥락을 고찰한다. ‘사얼’은 사적(邪賊)의 여얼(餘孽)이라는 뜻으로, 조선후기에 사학죄인으로 단죄된 이들의 후손을 일컫는다. 조선후기 사옥에서 법적으로 연좌(緣坐)를 규정한 「모반대역(謀反大逆)」이나 「모반(謀叛)」과 같은 역률(逆律)이 조율된 일부 천주교 신자를 제외한 나머지 대다수의 신자들에게는 「조요서요언(造妖書妖言)」 이하의 형률이 조율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조선왕조의 형정 원칙상 사얼들은 연좌 대상은 물론 죄인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얼들은 신유사옥(1801) 이후 지속적인 사회·경제적 차별을 받았으며, 이를 통해 우리는 조선 천주교회에 대한 당대의 시선을 엿볼 수 있다. 본 논문은 이러한 사얼의 대표적 사례로 이승훈의 3남 이신규에게 주목하였다. 그는 한때 천주교 신자로 활동했으나 기해사옥(1839) 혹은 병오사옥(1846)을 기점으로 조선 천주교회와 결별하였고, 이후 철종 대에는 의술을 계기로 철종의 눈에 들어 아버지 이승훈의 신원과 자신의 허통이라는 목적을 이루어 냈다. 그는 유능한 의원으로서 왕실의 의약(議藥)으로 활약하였고, 대왕대비의 병환을 고친 공로로 장릉참봉에 제수되었다. 또한 그는 격쟁(擊錚)을 통해 아버지 이승훈의 신원을 이끌어 냈다. 하지만 철종 대에 이루어진 이승훈의 신원과 이신규의 허통은 조선왕조의 천주교에 대한 인식이 변화된 결과는 아니었고, 당대의 특정한 맥락에서 이루어진 제한적인 조치에 불과했다. 결국 이신규는 병인양요(1866)와 무진년(1868)에 발생한 덕산사건(오페르트 굴총미수사건)으로 인해 조선왕조의 천주교에 대한 적개심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다시금 ‘사얼’로 소환되어 형장에 서게 되었다. 조선왕조는 이신규가 무려 ‘30년 전에 천주교 신자였다’는 점을 근거로 그의 처형을 이끌어냈고, 이신규를 비롯한 사얼들이 처형된 뒤 이승훈의 신원 또한 취소됨으로써 사얼 이신규는 결국 죄인 이승훈의 아들이자 그 자신 또한 사학죄인으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이상에서 고찰한 조선후기 사얼의 처지와 이신규의 사례는, 조선후기 천주교 신자의 형정이 개인의 신앙 여부와 관계없이 조선왕조의 천주교와 조선 천주교회에 대한 인식에 의해 자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곧 사얼에 대한 형정이 조선왕조가 조선 천주교회를 형정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스스로 마련하였던 사옥의 원칙에서조차 벗어난 범위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조선왕조 형정의 위법성(違法性) 내지 비법성(非法性)을 보여주는 사례가 된다.
[교회사 연구 제66집, 2025년 6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남호현(공군사관학교 역사·철학과 부교수)] 파일첨부 0 6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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