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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초대교회 사람들: 여종 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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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6-01-11 ㅣ No.1971

[초대교회 사람들] 여종 영애

 

 

‘한국 교회와 우리 문화 톺아보기’를 올해의 주제로 삼은 서울주보의 새로운 코너 ‘초대교회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순교자나 성인뿐만 아니라, 초대 한국 교회와 함께했던 다양한 신앙인들의 모습을 조명하는 코너입니다. K톨릭의 토대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느껴보세요!

 

초기 교회사 관련 기록에서 지워져 희미해진 이름들과 만날 때가 있습니다. 《사학징의》에 보이는 정약종의 여종 영애(永愛)가 그렇습니다. 그녀는 전라도 정읍에서 고아로 상경한 아이였습니다. 1787년에 도저동 오대진(吳大晋)의 집에 종으로 자매(自賣)하였고, 얼마 뒤 선혜청 서리 조신행(趙愼行)의 여종이 되었습니다. 1795년 그녀의 주인은 정약종으로 다시 바뀝니다. 고작 8년 사이에 주인이 세 번 바뀐 셈입니다.

 

오대진과 조신행은 모두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으니, 이처럼 천주교 신자 사이에 반복적으로 전매 행위가 이루어진 것이 눈길을 끕니다. 정약종은 조신행에게 10냥을 주고 영애를 사들였고, 몇 년 뒤인 1800년 8월에 영애는 7냥을 내고 속량되어 노비의 신분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10냥을 주고 산 여종을 7냥에 속량해준다? 정약종은 상당히 밑지는 장사를 한 셈입니다. 그마저도 실제로는 받지도 않았을겠지요. 왜 이런 수상한 전매가 문서까지 꾸며진 상태로 천주교 신자들 사이에서 반복되었을까요? 무언가 그녀의 신분을 물타기 하려는 노력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영애의 자취는 기록에서 사라져버려 뒷일은 알 수가 없습니다. 고아 출신이었던 어린 그녀는 분명히 천주교 조직 내에서 수행했던 모종의 역할이 있었겠지요. 1800년 당시 정약종은 명도회 회장이었으니, 당시 영애를 양민으로 풀어준 것은 교회 조직에서 그녀를 자신의 울타리 밖에다 두는 것이 더 낫겠다는 판단이 있었다는 의미일 겝니다. 아마도 그녀는 교회의 각 구역을 연결하는 중간 거점의 역할을 맡았으리란 짐작입니다. 비선 조직의 연결책 같은 역할 말입니다.

 

그녀 말고도 강완숙의 여종 소명은 충남 보령에서 올라와 한신애의 여종이 되었다가 뒤에 강완숙에게 보내져 대단한 활약을 했지요. 백정이었던 황일광 시몬이 홍주에서 경상도로 내려갔다가, 다시 정약종의 이웃에 이사간 뒤 함께 상경해 교회의 각종 심부름과 연결 역할을 하다가 검거되어 순교한 것과도 비슷합니다. 이들의 비천한 신분은 그만큼 남의 눈길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 해 주었을 겁니다.

 

여종 영애와 소명, 백정 황일광 등은 기댈 데 없는 천한 신분이었지만,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 존중을 받아 맡겨진 직분을 다했습니다. 천대 받던 고아와 백정에게 큰 일이 맡겨지고, 천주를 위해 모종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얼마나 신이 났을까요? 명도회의 6회 가운데는 부위과(扶危科)가 있었습니다. 죽어가는 어린아이나 임종을 앞둔 사람을 도와주는 일을 맡았습니다. 교회가 가장 열악한 상황에 놓인 사회적 약자에게 건넨 도움의 손길이 당시 사회에 교회의 존재를 깊이 각인하는 징표가 되었던 셈입니다.

 

초대교회는 이러한 민초들의 뿔 뿌리 신앙으로 이 땅위에 뿌리내렸습니다. 지도자급 양반들이 연이어 배교를 선언하고 각자도생의 길을 찾아 신앙을 떠날 때에도 이들은 흔들림 없이 교회에 헌신했고 순명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2026년 1월 11일(가해) 주님 세례 축일 서울주보 5면,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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