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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가톨릭신문으로 보는 한국교회 100년 (33) 5·18 광주 민주화운동 (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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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가톨릭신문으로 보는 한국교회 100년] (33) 5·18 광주 민주화운동 (하) 시민의 눈 가리고 입 막은 정권, 교회 언론조차 불의에 동조했다
1980년 5월, 광주는 민족의 십자가였습니다. 국민을 지키라고 쥐여준 총칼로 군인들이 선량한 시민을 학살하던 그때, 인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으며 순교자의 피 위에 세워진 한국교회는 그 참담한 시간을 과연 어떻게 통과하고 있었을까요?
강요된 침묵, 거대한 감옥
당시 대한민국은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철저히 통제된 거대한 감옥이었습니다. 군화와 총검에 의한 공포 정치는 극에 달했고, 유언비어 유포죄로 즉결 심판을 받거나 서울 남산 중앙정보부나 보안사령부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 이후 신군부는 모든 언론을 사전 검열했습니다. 이 때문에 광주의 진상을 알기란 불가능에 가까웠고, 알더라도 침묵해야 했습니다. 언론은 광주의 참상을 불순분자와 간첩이 선동한 폭동으로 왜곡했고, 시민군을 ‘폭도’로 규정하는 기사만 내보냈습니다. 김대중 등 유력 정치인과 민주화 인사들은 이미 예비검속으로 구속되거나 수배 중이었기에, 폭압적 정치를 비판할 지도자들은 물리적으로 제거된 상태였습니다.
진실을 향한 광주대교구의 필사적 노력
이 암흑기 속에서 한국교회, 특히 광주대교구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진실을 알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였습니다. 2014년, 당시 광주대교구장 김희중(히지노) 대주교는 ‘5·18 광주민중항쟁 34주년 기념 학술발표회’ 기조강연에서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광주민중항쟁의 과정에서 부분적으로 참여했지만 지도적인 역할을 하지는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사제들이 평화적 수습을 위해 노력했지만 체계적인 역할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 다만 사실 왜곡에 대한 진실 규명에 관하여 교회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목소리를 내었습니다.”
당시 고립된 광주 시민들에게 가장 절실했던 것은 구호 물품보다 ‘진실의 전파’였습니다. 비록 천주교회가 학살 자체를 막지는 못했지만, 묻혀버릴 뻔한 신군부의 만행을 세상에 드러내는 데는 결정적으로 기여했습니다.
학살의 목격자 그리고 기록자
광주대교구장 윤공희(빅토리노) 대주교를 비롯한 사제와 수녀들은 학살 현장의 목격자였습니다. 남동성당 등은 시민군의 피난처가 되었고, 사제들은 수습위원으로 활동하며 시민들과 함께했습니다. 이들은 삼엄한 감시 속에서도 외신기자들과 협력해 학살의 증거를 해외로 반출했습니다.
윤공희 대주교는 도청 최후 진압을 앞둔 5월 24일, 긴박한 상황에서 사목교서를 발표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처럼 광주도 승리할 것”이라는 희망을 전했습니다. 이어 광주대교구 사제단은 6월 10일경, 최초의 5·18 진상 보고서로 평가받는 <광주사태의 진상>을 발표했습니다.
대검 사용, 무차별 구타, 조준 사격 등 공수부대의 잔인한 만행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이 문건은 비밀리에 복사되어 전국 성당과 대학가, 해외로 퍼져나갔습니다. 이는 ‘광주는 폭동이 아니라 학살’이라는 진실을 알리는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모두가 함께 울지는 못했다
서울에서는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이 지키고 있던 명동성당이 최후의 보루였습니다. 이곳에서 봉헌된 시국미사는 광주의 진실이 육성으로 터져 나오는 통로가 됐습니다. 성당을 중심으로 독일 제1공영방송(ARD)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가 촬영한 일명 ‘광주 비디오’가 상영되면서 대학생과 시민들은 ‘폭동’이 아닌 ‘학살’의 진실을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정의구현사제단 역시 전두환 정권의 회개와 퇴진을 요구하며 최전방에서 싸웠습니다.
하지만 모든 교회가 광주와 함께 울지는 못했습니다. 주교회의는 5월 23일 상임위원회를 열고 신자들에게 보내는 <서한문>을 발표했는데, 그 내용은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주교단은 “정부, 군, 민간인 모두 자신의 입장만을 절대시해선 안 된다”며, “누구의 책임을 따지기에 앞서 이성을 되찾고 형제의 입장에서 이해하자”고 호소했습니다.
이러한 양비론적 태도는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신군부의 일방적 폭력이라는 사건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윤공희 대주교와, 목숨을 걸고 광주를 탈출해 진상을 알린 김성용(프란치스코) 신부 등은 불의에 대해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교회의 모습에 깊은 고립감과 괴로움을 느껴야 했습니다. 광주 사제단이 7월 17일, 침묵하는 주교들에게 개별 서한을 보내 공식적 입장 표명을 촉구했던 것은 이러한 안타까움의 발로였습니다.
가톨릭신문의 침묵과 왜곡 그리고 동조
광주의 비극이 이어지는 동안 가톨릭신문의 지면에서 유혈사태의 진실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6월 1일자 1면에 관련 소식이 실렸지만, 주교회의의 원론적인 담화문과 구호 활동 등 단편적인 소식뿐이었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사태를 바라보는 시각이었습니다. 6월 8일자 사설은 이번 사태가 “견해 차이나 오해로 인해 대화 대신 대결을 택한 탓”이라며, 책임 규명조차 무의미하다고 썼습니다.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아 겪었던 시련은 우리 한국 백성의 것이기도 하다”며 광주의 비극을 하느님이 주신 시련인 양 묘사했습니다. 이는 광주 시민들의 저항을 비이성적 대결로 치부하고, 신군부의 책임을 희석시키는 보도였습니다.
예언자 직무를 유기한 부끄러운 역사
물론 서슬 퍼런 군사정권의 검열 속에서 사실 보도가 어려웠음은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의 절대적 진리를 선포하고 예언자적 직무의 수행을 자신의 본질로 여기는 교회 언론으로서 가톨릭신문의 당시 처신은 명백하게 비복음적이었습니다. 나아가, 단순한 침묵을 넘어 정권에 대한 ‘동조’로 나아갔다는 점에서 비판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는 과정에서 가톨릭신문은 노골적인 친정부 성향을 보였습니다. 1980년 9월 7일자 사설이 대표적입니다. 신문은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을 두고 ‘새 시대의 지도자’를 맞아 국민이 희망에 부풀어 있다며 장황하게 찬양했습니다. 광주의 5월에 대한 정의로운 판단은 완전히 삭제됐고, 민주화의 꿈을 짓밟은 정권에 종교적 언어로 면죄부를 준 셈입니다.
후대의 역사는 이 시기를 가톨릭신문이 교회 언론으로서 예언자의 직무를 유기하고 권력의 시녀가 되었던, 가장 부끄러운 시기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가톨릭신문은 교회 내의 진보적 지식인과 대학생들에게 외면받기 시작했고, 유일한 교회 언론이었던 가톨릭신문을 대체할 대안매체가 거론되기 시작했습니다.
[가톨릭신문, 2026년 1월 11일, 박영호 기자] 0 2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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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2020년 5월 17일 광주 임동주교좌성당에서 교구장 김희중 대주교 주례로 5·18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가톨릭신문 1980년 6월 8일자 4면 사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