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7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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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의신학ㅣ교부학

[교회] 어떤,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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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4-03-22 ㅣ No.804

[어떤, 교회] 어떤, 교회

 

 

이제부터 저는 교회론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그렇다고 학문적인 진술이 있는 그런 글은 아닙니다. 저에겐 그럴 자격도, 흥미도 없습니다. 그저 세상 안에서 교회가 어떤 모습인지, 교회는 무엇이고 누구인지 자유롭게 이야기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세상에 대한 교회에 있어서 그동안 교회는 두 가지의 관점으로 논의를 해왔습니다. 하나는 교회가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곧 세상 자체에 대한(about) 의미를 다루었고 다른 하나는 세상을 대상으로 하여 세상에 대하여(toward) 교회는 어떻게 자신을 이해하고 있는가를 다루었죠. 이 둘이 구분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가 스스로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는 교회의 관점도 달라지기 때문이죠. 결국 세상 안에서, 세상과 함께 살아온 교회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며 답을 찾아가고 있지만 늘 변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교회는 정확한 답을 찾아본 적이 없지요. 그래서 ‘항상 쇄신하는 교회’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한 번도 정확히 답을 내려보지 못한 질문에 저라고 무슨 답을 내릴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제가 좋아하는 작가 중에 ‘히라노 게이치로’라는 작가가 있습니다. 작가가 『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출판하고 강연을 엽니다. 거기서 작가는 사람들이 늘 책의 제목과 같이 ‘나란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자주 던지지만 이내 당황하게 된다고 짚습니다. 이게 똑같은 사람이 맞는가 라고 할 정도로 나에게 다양한 모습이 있기 때문이죠. 그럴 때 우리는 혼란에 빠지며 묻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도대체 어떤 게 진짜 나인지 말이죠. 여기서 히라노 작가는 이렇게 반문합니다. ‘진짜 나’가 누구인지 꼭 물어야 하는가. ‘진짜 나’라는 표현 자체가 올바른 것인가. 그러고는 이런 설명을 제시합니다. 우리 각자에게는 본래 여러 개의 모습이 있다. 더이상 쪼개질 수 없다는 의미에서 individual, 즉 개인이라고 불리지만 사실 우리는 여러 개의 나로 쪼개질 수 있는 존재, dividual, 분인(分人)일 수 있다고 말입니다.

 

제 안에도 여러 분인이 있습니다. 본당에서 사제 직무를 수행하는 나, 내성적이지만 때로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광대가 되는 나, 좋아하는 책과 영화를 보며 생각에 잠기는 나, 가끔은 찌질한 감정에 잠기는 나…. 작가는 그런 분인들 사이에서 어떤 것이 진짜 나인지를 질문하며 괴로워하기보다는 어떤 나를 나로 긍정하며 사는 것이 좋은지를 생각해 보는 편이 낫지 않을까 말합니다. 나 자신을 전부 사랑할 수는 없더라도 그중 몇 개의 나를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하면서요. 매력적인 논리이지만 이것으로 모든 게 다 해결될 수 있지는 않겠죠.

 

내가 사랑할 만한 나 자신이 되도록 해 주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소중히 하며 살아가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자고 마음먹지 않아도 우리는 그렇게 하면서 살고 있을지도 모르죠. 저 역시 마찬가지고요. 저도 저의 여러 분인 중에서 몇 가지 분인은 꽤 좋아합니다. 그래서 살아올 수 있었고 살아가고 있는 거겠죠.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내가 싫어하는 나의 분인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죠. 죽어도 긍정할 수 없는 나의 분인이 있습니다. 내가 사랑할 수 없는 그런 내가 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고 그런 나를 견디는 일이 정말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누군가가 내 주변에 있다는 건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누군가는 내가 나를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그 순간 존재하는 나의 분인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의 모습은 나에게 상처를 줍니다. 외면하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을 겁니다. 내가 싫어하는 나 때문에 나만 상처를 받는 게 아니라 다른 누군가도 상처받을 수 있으니까요. 여기에다가 내가 사랑할 수 없는 나로 살아가는 시간이 더 많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도 여러 분인이 있습니다.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모인 사제들의 활동도 교회이고, 교회가 자리한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모인 교우들의 모임도 교회입니다. 성 소수자를 법으로 단죄하고 있는 것도 교회지만 본당 안에 숨죽여 미사에 참례하고 있는 성 소수자도 교회입니다. 본당의 궂은일이나 주방 일은 대부분 여성들이 하지만 본당 여러 단체의 대표는 대부분 남성들이 맡고 있는 것도 교회입니다. 신앙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신학적인 여지를 주지 않는 것도 교회이고, 신앙의 가치가 이 시대에 어떻게 다가갈 수 있을지 열려 있게 하는 것도 교회이죠. 우리는 이런 교회 안에서 ‘교회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이 질문에 아주 명쾌한 답은 없습니다. 저는 가끔 우리가 하나의 질문을 더 오래 붙들고 있지 않고 너무 빨리 답을 찾으려는 것에서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중요한 건 정확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겠죠. 질문이 정확할수록 답도 정확해지면 좋겠지만 어쩌면 질문이 정확할수록 답은 오히려 더 나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손쉬운 답이 나오지 않도록 정확히 질문을 던지는 것, 그것이 신학의 역할 중 하나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교회를 사랑하고 있고, 어떤 교회에서 살아가고 있을까요.

 

[월간빛, 2024년 1월호, 박태훈 마르티노 신부(성김대건성당 보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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