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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ㅣ기타

사유하는 커피19: 묵상과 기도, 그리고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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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9-22 ㅣ No.608

[사유하는 커피] (19) 묵상과 기도, 그리고 커피


명상·묵상으로 이끄는 안내자, 커피

 

 

16세기 초 세상을 장악했던 오스만튀르크는 ‘커피가 지혜를 준다’고 믿었다. 수도인 이스탄불에는 커피하우스가 급격하게 늘어났는데, 사람들은 그곳을 ‘지혜의 학교(Schools of the wise)’라고 불렀을 정도다.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떠는 가운데 정보가 활발히 교류됐고, 개개인의 각성은 결국 시대를 변화시키는 힘으로 이어졌다. 프랑스 대혁명 역시 이런 관점에서 카페가 도화선이 됐다고도 말한다.

 

커피에서 지혜를 얻는다는 것이 각성효과를 통한 새로운 지식의 습득만을 의미하는 것일까? 17세기 과학 혁명의 시대를 거치며 지식이 인류를 진실로 이끌어 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과학은 역설적으로 인간이 얼마나 무지한지를 알려주고 있다.

 

혹시, 커피와 지혜의 함수를 푸는 키가 각성효과가 아니라 ‘진정효과’인 것이 아닐까? 커피에는 정신을 바짝 들게 하는 카페인만 들어 있는 게 아니다. 커피에는 기분을 좋게 하는 휘발성 방향족 화합물도 포함돼 있다. 이들 물질이 불안한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는 것이다. 또 카페인 자체가 도파민 등 신경전달물질에 작용해 진정제와 항우울제와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

 

커피는 ‘각성-소통-계몽-혁명’으로 이어지는 길을 내기도 하지만, ‘진정-묵상(Meditation)-관상(Contemplation)-기도’를 잇는 과정을 통해 진실을 만나게 해준다고 믿고 싶다. 명상과 묵상은 ‘생각에 잠긴다’는 의미에서 로마자 표기가 같다. 굳이 구별한다면, 묵상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는 신앙인의 결심이다.

 

커피가 명상이 될 수 있는 것은 ‘멈춤’에 있다. 바쁜 일상에서 한 잔의 커피를 들고 하던 일을 멈춘 순간은 일체의 잡념에서 벗어나기 위해 눈을 감는 것과 같다. 눈을 감음은 생각을 모으기 위한 것이고, 커피를 마주한 것 역시 명상의 문을 열기 위한 것이다. 신앙인은 마음과 정신을 모아 하느님을 찾는 묵상을 좋아한다. 사제의 강론과 복음의 구절을 좇아 하느님의 현존을 더듬어 가는 길은 그 자체가 주님과 친교의 시간이자, 진실에 다가가는 기쁨의 길이다.

 

커피는 묵상처럼 그윽한 향미의 근원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자신을 마주하는 순간을 경험할 수 있다. 자신도 모르게 커피를 찾는 것은 향에 행복한 순간이 기록돼 있어서다. 기억의 심연으로 깊게 가라앉은 시간들. 고단한 삶을 살아가느라 깜빡 잊고 살아가고 있지만, 분명히 존재했던 수많은 시간이 커피의 향에 새겨져 있다. ‘진실이란 나는 누구냐에 대한 대답’이라고 정의할 때, 커피는 자신을 들여다보게 함으로써 그 첫발을 내딛게 해준다.

 

이제, 묵상을 넘어 관상으로 들어갈 단계이다. 컨템플레이션(Contem plation)은 라틴어로 ‘함께 한다’는 쿰(cum)과 ‘성전’을 뜻하는 템플로(templo)에서 유래했다. 단순하게 말하면, 성당에서 수행하는 묵상이다. 성당은 골방이어도 좋다. 고요함이 있어 깊은 묵상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다만 하느님과 일대일로 만날 수 있는 정제된 곳이어야 한다. 커피 역시 아무것이나 우리를 사유로 이끌어 주는 게 아니다. 썩은 것, 묵은 것, 벌레 먹은 것이 뒤범벅된 커피는 마음을 흐트러트리는 소음이다.

 

신앙의 궁극적 지향점이 단지 묵상과 관상이 아니듯 커피를 마시며 향미를 즐기는 데서 멈춰선 안 된다. 관상은 기도로 이어져 하느님을 만나는 희열을 만나야 한다. 커피의 향미 감상은 자신의 본질을 헤아림으로써 인류애로 나아가야 한다. 묵상과 기도와 커피는 애당초 하나였던 것 같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9월 20일, 박영순(바오로, 커피비평가협회장, 단국대 커피학과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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