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1월 1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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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프란치스칸 영성10: 하느님을 섬기며 의탁하라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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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9-22 ㅣ No.1476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10) 하느님을 섬기며 의탁하라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다

 

 

프란치스코가 처음으로 계시를 받은 것은 회개 이전이다. 그가 두 번째로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스폴레토 계곡에서 야영하던 중 꿈속에서 하느님께 의탁하는 삶으로의 전환을 촉구하는 주님의 목소리를 들었다.

 

 

술탄과 만남 - 예언자적 행위

 

프란치스코의 예언자적 행위는 말씀,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증거하는 행위다. 프란치스코는 무엇이든지 하느님의 선하신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선이 드러나는 상황에 대해서는 절대 “아니오”라는 말을 하기를 거부한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둘째 서간 1장 19절에서 말하는 바오로의 태도와 같은 것이다: “실바누스와 티모테오와 내가 여러분에게 선포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이랬다저랬다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에게는 언제나 진실(예!)이 있을 따름입니다.”

 

그의 예언자자적 행위는 하느님을 선하신 분으로서, 예수님을 당신을 통해 세상이 창조된 그런 분으로서 체험한 것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분의 가난으로 죄에 물든 세상을 구원하시는 분이시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알리는 프란치스코의 방법인 것이다.

 

이런 점을 숙고해본다면 프란치스코가 말하는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일이라고 생각할 때’라는 말을 우리는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른다. 프란치스코는 이 권고를 통해 우리가 어떤 점에서든 우위를 점한 상황에서가 아니라 자신이 자신을 낮추시어 우리와 같은 모습을 취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된 상황에서만,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선언하는 우리의 행위가 참되게 이루어지며, 그때 비로소 우리의 공로가 아닌 하느님의 선이 드러나게 되고,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상대방과 참된 인격적 관계, 형제적 관계로 들어서게 된다는 점을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여기에 바로 프란치스코의 예언자적 행위의 본질이 들어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것이 예언자셨던 예수님이 행하셨던 바이다. 물론 프란치스코가 이런 권고를 한 이후 그간의 역사 안에서 우리 프란치스칸들이 이런 프란치스코의 권고에 충실하기도 했지만, 배반의 삶을 살았던 때도 있었다는 점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5. 육화의 영성과 하느님의 겸손 - 프란치스코의 ‘작음’의 영성 1

 

앞서 살펴본 비트리의 야고보의 편지에 ‘미천한 형제들’(lesser brothers)과 ‘미천한 자매’(lesser sisters)들이라는 표현이 있었는데, 이는 현재의 우리 수도회 명칭(Ordo Fratrum Minorum-작은 형제들의 수도회-작은형제회)의 기원이 되는 말이다.

 

성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위치를 힘이 있는 귀족이나 양반 계급에 두고자 하지 않았고, 오히려 하층민의 신분을 취하기를 바랐다. 사실 우리 수도회 이름을 더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더 작은 형제들의 수도회’라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등장하는 ‘미노르’(minor)라는 단어는 ‘더 작은, 더 미천한, 더 낮은’으로 번역되는 비교급이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의 전기에 의하면 앞서 간략하게 언급했듯이 하느님께서 프란치스코에게 세 번 구체적인 계시를 해주신다. 첫 번째는 스폴레토 계곡에서의 목소리를 통한 계시, 두 번째는 자신의 유언 첫머리에서 직접 언급하는 어느 나환우와 만남을 통한 계시, 세 번째는 산 다미아노 십자가 앞에서의 계시가 그것이다.

 

프란치스코가 처음으로 계시를 받은 것은 회개 이전인데, 그것은 그가 두 번째로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스폴레토 계곡에서 야영하던 중 꿈속에서 목소리가 해준 계시였다. 이런 내용은 「세 동료의 전기」, 「익명의 페루지아 전기」, 「보나벤투라에 의한 대전기」가 모두 비슷하게 전하고 있는데, 다음 이야기는 「세 동료의 전기」에 나오는 이야기다.

 

그 꿈에서 한 목소리가 그를 화려한 궁의 무기 창고로 데려가 그 창고의 화려하고 웅장한 무기들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묻는다. “누가 너를 더 훌륭하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겠느냐? 주인이겠느냐? 아니면 종이겠느냐?” 그가 답했다. “주인(Dominus)입니다.” 그쪽에서 다시 물어왔다. “그러하다면 어찌하여 너는 종을 위하여 주인을 버리고, 머슴을 위하여 제후를 버리느냐?” 이에 프란치스코가 물었다. “주님(Domine), 제가 무엇을 하기를 바라십니까” “너의 고향으로 돌아가거라. 거기에서 네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듣게 될 것이다. 네가 본 환시를 다르게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프란치스코가 들은 이 계시는 모든 것이 주님께 달려 있고, 프란치스코 본인은 주님의 종으로서 모든 것의 주도권을 쥐고 계신 주님께 의탁하는 삶으로의 전환을 촉구하는 주님의 목소리였다.

 

이 계시와 더불어 프란치스코가 이렇게 낮은 위치를 택하고자 했던 더욱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하느님의 육화와 성체성사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인한 ‘자기-내어줌’의 신비를 계속해서 보았기 때문이다. 사랑은 자기 쪽을 향하지 않고 상대방을 향하고 자기-내어줌의 경향을 지닌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겸손, 하느님의 가난, 하느님의 작음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것을 ‘자기-비움’(kenosis)이라고도 한다.

 

이 관점에서 프란치스코가 스폴레토 계곡에서 받은 계시를 설명해본다면, 주인을 섬기라는 하느님의 촉구는 자부적이고 자모적인 사랑에 의탁하라는 촉구하시며, 약하고 평범한 모든 곳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얼굴을 찾으라는 간청이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느님은 섬김을 받는 군주로서의 모습보다는 자녀를 보살피는 어머니로서의 모습을 지닌 분이시다. 이 계시에서 프란치스코에게 당신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은 군주로서의 주님이 아닌 사랑 가득한 부모로서 자녀를 위험에서 보호하고자 하시는 주님이신 것이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9월 20일,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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