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17일 (일)
(녹) 연중 제2주일 그들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분과 함께 묵었다.

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프란치스칸 영성19: 프란치스코의 가난, 하느님의 선을 인식하기 위한 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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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11-29 ㅣ No.1499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19) 프란치스코의 가난, 하느님의 선을 인식하기 위한 수단

 

 

- 프란치스코는 삶의 가장 작은 것에서부터 모든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제공되는 참된 선물임을 인식해 하느님의 선을 인식하기 위한 수단으로 스스로 가난을 선택했다. 사진은 클라라 성녀가 생전에 입었던 누더기 수도복으로 가난을 하느님의 참 선물로 받아들인 프란치스칸 영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② 복음적 삶과 하느님 선을 알아보기 위한 가난

 

프란치스코가 처음에 자그만 산 다미아노 성당을 수리하며 그 성당의 주임 사제로부터 영적 지도를 받을 때, 그 사제는 열정적으로 성당을 수리하며 고되게 살아가는 프란치스코를 보며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비싸고 맛난 음식은 아니지만 정성스러운 음식을 차려주곤 하였다.

 

이렇게 지내던 어느 날 프란치스코는 문득 깨달은 것이 바로 이렇게 살다가는 다시 또 자기 주도적이고 세상의 것에 의탁하는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그 사제에게 정중히 음식 제공을 거절하고는 마을로 나가 집집을 돌아다니며 음식을 구걸하여 스스로 끼니를 해결하기 시작했다. 비록 형편없고 맛없는 구걸 음식이었지만, 그는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자비에 의지하는 것임을 인식하였고, 이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의 섭리에 의탁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런 삶을 통해 프란치스코는 우리 삶의 가장 자그만 것에서부터 모든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제공되는 참된 선물임을 인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프란치스코가 선택했던 가난은 스스로 극기하여 자신의 공로를 쌓으려는 의도가 아닌 하느님의 선을 인식하기 위한 수단이었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그는 이런 구걸과 애긍을 청하는 삶을 살기 시작하면서 더욱더 하느님 선을 깨닫게 되었고, 다른 이들에게 형제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를 통해 깨닫게 되었다. 그는 자신을 충족시켜주는 다른 더 나은 것을 찾아 나서는 데 온통 에너지를 쏟는 대부분의 우리 모습과 달리 지금 여기에 주어진 선물과 선을 보고 감사하는 데 에너지를 쏟고자 하였던 복음의 사람이었다.

 

10여 년 전 부처님 오신 날 특집으로 어느 방송사가 법정 스님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법정 스님은 생전에 성 프란치스코에 대한 특별한 존경과 애정을 가졌던 분이다. 그 방송이 나오던 때는 법정 스님이 강원도 한 산골에 있는 폐가를 빌려 손수 그 집을 수리하여 살던 때였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여러 가지로 많이 불편한 곳에서 살던 스님은 그날 방송에서 사람들이 가끔 “왜 이런 데서 삽니까?”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이렇게 대답하곤 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있는 것으로 만족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그것도 ‘있는 것으로 만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있는 것으로 만족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라는 말씀이 필자의 마음에 더욱 크게 와 닿았다. 법정 스님이 이 말은 겸손하게 당신도 아직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암시한 말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이런 불만족스러운 마음을 지니고 살아가기에 우리에게 법정 스님의 이 말씀이 아직도 우리 삶의 정수를 찌르는 화두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 주어진 선과 선물을 인식하며 살아갈 필요가 있고, 그렇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이 선물에 대해 먼저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필요가 있다. 이럴 때 우리에게 서로 간의 나눔이 가능해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프란치스코가 추구한 가난이다. 여기에는 물질적인 나눔보다는 인격의 나눔이 존재하기 시작한다. 프란치스코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라”는 복음 말씀을 철저하게 실천하고자 했는데, 모든 것을 버렸을 때 그에게 남아 있었던 것이 바로 가장 근본적이고도 가장 소중한 자신의 인격이었다. 그렇기에 그로 하여금 가난한 이들과 그에게 남아 있던 인격의 나눔을 가능하게 있던 것이 바로 이 ‘가난’이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프란치스코의 가난은 ‘선물 인식’이고 이 받은 선물을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감사의 행위’이다. 우리에게 부족함과 불편함을 받아들일 기꺼움이 자꾸만 더 결핍되어 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이 순간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선과 선물을 보고 받아들이고 감사하며 살아갈 마음의 여유가 부족해서 그런 것은 아닌지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누구라도 부족함과 불편함을 선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부족함과 불편함 그 한가운데서 풍족함과 편안함을 찾아가는 것이 인격을 완성해가는 길이라는 것을 인류 역사는 증명해주고 있다.

 

심리학자와 사회학자들은 인간이 성장해가면서 ‘충동-억제’와 ‘만족-지연’이라는 것을 자기 삶의 한 부분으로 삼는 법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부족함’과 ‘불편함’을 받아들이는 삶을 배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주어진 좋은 것, 감사할 일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채워지지 않는 불만족을 채우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하게 될 것이고, 또한 쉽게 채워지지 않는 불만족으로 인해 가중되는 불만족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인내심 없는 사회’, ‘분노하는 사회’를 조장하는 가장 큰 요인일지 모른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11월 29일,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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