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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신앙과 정치: 그리스도인의 신학 행동하는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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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1-16 ㅣ No.1282

[신앙과 정치] 그리스도인의 신학 행동하는 진리



“행동하라!” - 바오로 6세 교황의 권고

1971년 5월 14일, 「새로운 사태」(노동헌장) 반포 80주년을 맞이하여 바오로 6세 교황은 회칙 「팔십주년」을 발표한다. 회칙의 마지막 제4장에서, 세상의 변화를 감지한 바오로 6세 교황은 “그리스도인 신앙이 사회혁신을 위해 요구하는 필요한 행동을 취해야 하겠다.”(51항)며, ‘행동하라!’고 요청한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세상을 향해 교황청의 답답한 창문을 활짝 열었고, 유럽의 진보적 신학과 해방신학의 등장을 목격했다. 하지만 바티칸에서 교황이 노동의 문제를 다루면서 이렇게 변혁을 위한 사회적 실천을 ‘선동’했다는 사실은 지금도 놀랍다.

바오로 6세 교황의 다른 문헌 「현대의 복음 선교」(1975년) 또한 앞에서 말한 실천의 강조와 맥을 같이한다. 이에 따르면 복음은 관념의 문제일 수 없다! 복음은 현실의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선포되어야 하며, 일그러진 사회를 바로 세우는데 복음을 적용하라고 촉구한다.

이는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지닌 사회적 내용을 확인하고 받아들이라는 요청이다. 또한 그리스도교 복음의 신빙성을 확인하는 길은 관념이 아닌 행동에 있음을 명확히 한 것이다. 물론 바오로 6세 교황의 이러한 견해는 당시 유럽과 남미에서 부흥하고 있던 정치신학이나 해방신학과 같은 진보적 성향의 신학에 힘을 실어주었다.


새로운 정치신학 - 나의 시대란 무엇이며 어떻게 살 것인가

유럽 신학계에 자극을 주었던 ‘정치신학’이라는 용어는 1965년에 처음으로 공개된 뒤, 가톨릭 신학자 요한 밥티스트 메츠와 개신교 신학자 유르겐 몰트만을 중심으로 꾸준히 논의되었다.

정치신학이 정치와 종교 또는 정치와 신앙의 관계와 상호영향에 대한 성찰이라 한다면, 정치신학이라는 용어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폐막되던 해부터 회자된 것만은 아니다. 이미 기원전 1세기 로마의 바로(Varro)가 정치신학의 내용으로 ‘시민신학(theologia civilis)’이라는 말을 썼다. 여기서 시민신학이란 로마 시민들과 사제들의 종교에 관련된 것으로 황제 숭배와 연결되었다.

다시 말해 로마제국과 궁정의 안위와 이익을 위한 정치적 목적을 지닌 정치신학을 의미했다.

정치신학은 세상의 통치자, 곧 현실적 지배자의 보위, 권력의 지속과 관계된 학문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파시즘과 히틀러 집권의 정당성을 옹호했던 가톨릭 법학자 칼 슈미트의 「정치신학」도 있다. 이렇게 정치적 불의를 정당화하는 어용신학도 정치신학이라 할 수 있다.

메츠의 신학은 이러한 어용 정치신학들과 구분하여 ‘새로운 정치신학’이라 불린다. 메츠는 신학의 구실을 정통 교의의 해석이 아니라 비판과 교정에서 보면서, 신학의 초점을 사회적, 공적, 정치적 영역으로 이동시킨다.

이로써 신앙의 사유화를 거부하고 현대인이 놓인 종말론적 지평에서 그리스도교가 지닌 희망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희망과 책임은 자신의 시대에서 복음의 메시지를 새롭게 해석하는 것이다.

새롭게 이해된 복음의 역사적 힘은 공생활을 막 시작하신 예수님에게서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서 두루마리에 적힌 이사야서의 복음을 읽어 내려갔을 때, 회당에 있던 지식인들은 놀랍고도 두려워하였다고 복음서는 전한다(루카 4,16-30 참조).

사회적, 종교적 기득권을 충분히 가졌던 그들은 이미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며 ‘행동’했던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고, 예수님께서 읽은 메시지가 그들에게 ‘걸림돌’이 될 것을 충분히 알았다.

같은 복음이라 할지라도 어느 시대에 누가 그것을 읽는지에 따라 그 기쁜 소식의 질은 달라진다. 이러한 의미에서 정치신학은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신앙의 본질을 적절히 설명해 내는 해석학이자, 신앙의 실천을 통해 진리를 드러나게 하는 신학이다.

새로운 정치신학은 「사목헌장」 1항에서 제시된 “특히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의 그것”을 신학적 언어로 재구성하여, 신학의 본원적 입장인 비판적, 해방적 성격을 복권한다.


시대의 징표 - 지금 여기의 사실을 보자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실을 외면하거나 보지 못하면 현실을 왜곡하거나 부정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리사이나 율법학자와 같은 사회 지도층에게서 보셨던 그 모습이다. 이렇게 상황을 일그러뜨려 본다면 시대의 징표가 무엇인지 도무지 풀어낼 길이 없다(루카 12,54-56 참조).

한국사회는 세월호 참사, 메르스 사태,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을 통해 통치자의 정치적 무능은 물론 불의한 이들의 득세를 거의 매일같이 목격하고 있다. 마치 장기집권의 종합계획이 짜진 듯 아무런 성찰 없는 발언들이 청와대와 여의도에서 쏟아지고 있다. 시민을 미숙한 대중으로 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프랑스의 사회심리학자 구스타브 르봉은 「군중심리학」에서, 통치자가 전혀 논리에 맞지 않는 말이라도 확신을 하고 반복해서 계속 말하면 마침내 그 엉터리 같은 말도 사실처럼 전염되어 널리 퍼진다고 했다. 그는 누가 의문을 제기하더라도 절대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계속 밀고 나가면 마침내 독재자의 웅변은 거짓에서 사실로 되고, 또한 여론까지 형성된다고 한다.

대중은 이제 비판능력이 마비되고, 자신의 지도자를 놀라움과 존경심을 갖고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언제나 사실을 조작할 수 있고, 어리석은 대중을 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위정자는 자신을 신비의 영역으로 옮겨 놓는다.

생존이 화두인 생활의 영역과 신비의 영역은 서로 소통이 되지 않는 영역이다. 현 대통령의 ‘유체이탈’ 화법이 가능한 이유이다. 작자를 전혀 알 길 없는 역사 교과서의 국정화 강제시행 관련 발언을 들을 때마다 19세기 계몽과 야만의 시대를 지켜보았던 르봉의 분석이 탁월하다고 느끼게 된다.

히틀러의 입으로 행세하면서 온갖 선전선동에 능했던 괴벨스는 나치 집권 이후 역사 교과서를 수정하면서, 자유 · 평등 · 박애의 “1789년 혁명은 이제 역사에서 없다.”고 했다. 하지만 1789년 혁명은 살아 있었고 그들은 몰락했다.

역사는 승리자의 것이기는 하나, 진실을 영원히 은폐할 수는 없다. 감춘 것은 자루 속 송곳처럼 언젠가 삐져나오기 마련이다. 영원할 것 같은 권력도 역시 유한한 ‘지상의 것’이다.


더러운 정치, 그러나 거부하지는 말자

하지만 우리는 악마적 지배는 유한해도 그 흔적과 고통의 기억은 오래도록 인간을 괴롭힌다는 것을 역사를 통해 알고 있다. 그래서 다시 정치이다.

우리 사회에서 정치가 어느덧 혐오의 대상이 되어 버렸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간파했듯이 인간은 소소한 일상에서부터 결코 정치와 떨어질 수 없는 정치적 인간(homo politicus)이다. 특히 정치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는 정치 과잉의 한국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신앙인은, ‘교회의 정치 참여는 어디까지인가?’라는 진부한 물음을 던지며 ‘정치’ 앞에서 망설인다. 하지만 누군가 권력을 잡은 이 사회는 내가 정치 참여를 거부하든 인정하든 간에 수시로 나와 관련한 정치적 결정들을 진행한다.

아무리 그리스도인의 정치 참여에 선을 그으면서 침묵하고 행동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미 그 자체로 현재 상황을 승인하는 정치적 결과를 만든다.

무관심도 정치적 행위이다. 현실의 정치 앞에서는 누구도 숨을 수 없다. 그렇다면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 없는 그리스도인, 양들의 냄새를 풍기는 사제, 거리로 나가 손에 흙을 묻히며 상처 받고 더러워진 교회를 요청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메시지는 그리스도교 ‘복음의 기쁨’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말해준다.

그리스도인의 정치 참여는 성직자와 수도자를 포함한 예수님의 모든 제자들의 의무임을 다시금 확인하며, 앞으로 신앙과 정치의 관계를 살펴볼 생각이다.

* 오민환 바오로 - 가톨릭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뮌스터대학교에서 기초신학을 공부하였다. 현재 기쁨과희망 사목연구원 연구실장으로 있으며, 신앙의 희망을 이성적으로 설명하면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사회적 책무에 대한 작업을 지속해서 진행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6년 1월호, 오민환 바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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