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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목] 영화 속 인간과 세상: 비긴 어게인 - 다시 시작하는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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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1-14 ㅣ No.785

이대현의 영화 속 ‘인간과 세상’(1) 비긴 어게인 - 다시 시작하는 노래


희망, 삶의 이유



드라마, 멜로/로맨스, 2014. 8. 13, 104분, 미국, 15세 관람가, 감독 존 카니

희망이 있어 우리는 삽니다. 희망이야말로 삶의 동기입니다. 그 무게나 크기는 상관없습니다. 어떤 것이 됐든 희망, 그 자체가 중요합니다.

만약 우리에게도 아무런 희망이 없다면, 아마 십중팔구는 ‘비긴 어게인’의 댄(마크 러팔로)과 같을 것입니다. 과거에 그래미상을 두 번이나 받았지만, 지금은 자신이 만든 음반회사에서 퇴출된 패배자, 무일푼에 가정에서도 쫓겨난 알코올 중독자에다 노숙자에 가까운 생활을 하는 중년 남자.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댄은 삶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달리는 지하철에 뛰어들 결심을 합니다.

그의 절망은 어디서 왔을까요? 동업자로 음반회사를 독자치한 댄의 친구 사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게 변했어. 사람도 거기에 맞춰야 해. 그런데 넌 변하지 않았어.” 한마디로 음악성보다는 개성 없는 10대 댄스가수들의 화려한 비주얼이 먹히는 세상에 댄이 적응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변화의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사회 부적응자라는 것이지요.

정말 그런 걸까요. 영화 ‘비긴 어게인’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음악 그 자체의 소중함을 지키려는 그에게 하느님은 우연과 운명을 통해 기회를 줍니다. 다시 일어설 기회를 말입니다. 열차가 20분 연착되는 바람에 찾아간 술집, 그곳에 친구의 즉흥 제안으로 마지못해 기타를 들고 노래하는 여인 그레타(키이나 나이틀리)와의 만남. 이렇게 둘은 그레타가 부른 노래 제목처럼 ‘되돌릴 수 없는 걸음(A Step You Can′t Take Back)’을 시작합니다. 누군가 ‘운명은 시간’이라고 했습니다.

‘비긴 어게인’은 음악영화입니다. 음악영화가 음악회나 연주실황과 다른 이유는 음악을 통해 인생을 이야기하고, 주인공들의 인생이 음악 속에 녹아들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든, 어떤 음악을 선택하든 음악영화가 하나같이 음악공연이나 실황보다 울림이 큰 이유입니다. 음악회라면 초라하고 엉성하다고 느낄 음악에도 우리는 기꺼이 감동하고 박수를 보냅니다. 그 감동과 박수야말로 훌륭한 연주나 노래보다는 주인공들의 인생을 향한 것입니다.

‘비긴 어게인’도 예외가 아닙니다. 댄과 그레타는 음악을 통해 다시 일어서고, 음악이 그들의 인생이 됩니다. 무명에 가까운 싱어송라이터인 그레타는 음악으로 변심한 남자친구를 잃은 아픔과 상처를 달래며 스스로 일어서려고 하고, 댄은 그녀의 노래에서 자신이 변하기를 거부한 ‘음악’의 가치와 의미를 발견합니다. 두 사람이 그레타의 노래 ‘Lost Stars’의 가사처럼 ‘의미를 찾아가는 길 잃은 별들’이 되는 것은 운명입니다.

물론 운명이라고 단번에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들도 다른 사람들처럼 다시 시작하기 위해 그만큼의 고통과 갈등과 아픔을 겪습니다. 이별의 상처로 음악도, 무대도 거부하는 그레타, 음반을 내려면 데모테이프부터 만들어서 오라고 하는 음반회사, 돈도 함께 연주하고 노래하고 녹음할 사람(뮤지션)들도 없는 현실이 그들을 힘들게 합니다. 이때 영화는 그들에게 변화와 ‘발상의 전환’이란 용기를 부여합니다. 댄과 그레타는 친구, 딸, 옛 동료, 심지어 동네꼬마들까지 연주와 노래에 합류시키고 도시 전체를 무대로 삼아 거리에서, 공원에서, 호수에서, 지하철에서, 빌딩 옥상에서 음악을 녹음합니다. 음반 ‘온 더 로드’는 그렇게 완성됩니다. 둘 사이에 음악에 대한 열정과 공감, 그리고 상대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어폰으로 자신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함께 들으면서, 음반 제작과정을 통해 그들은 깨닫습니다. 음악을 듣는 것은 눈이 아니라 귀, 아니 가슴이라는 사실을. 어떤 음악을 듣는지 알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확인합니다. “평범함도 어느 순간 갑자기 아름답게 빛나는 진주처럼 변하게 만들고, 지극히 따분한 순간도 의미를 갖게 하는 것이 음악”이라는 사실입니다.

영화는 그것을 용기를 내지 못하던 댄의 딸이 아버지의 새로운 도전을 이해하면서 전자기타 연주로 녹음에 참가하고, 아내와도 음악을 함께 들으며 화해하고, 그레타의 남자친구가 음악의 진정성을 이해하고 돌아오는 것으로 증명합니다. 물론 기존의 판매방식을 거부한 그들의 음악도 트위터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듣게 되고요. 이렇게 그들의 ‘비긴 어게인’은 멋진 ‘해피 엔딩’이 됩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들의 노래 ‘Lost Stars’의 가사처럼 ‘어쩌면 다른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또다시 실패하고, 좌절로 끝나고, 길 잃은 별들이 되는. 그것이 현실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시 시작하면 성공을 보장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렇다고 모든 희망을 접고 멈춰 버려야 할까요. 상처 없는 영혼은 없습니다. 실패 없는 인생은 아름다운 인생이 아닙니다. 실패를 두려워해서도 안 됩니다. 실패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그것을 딛고 다시 시작할 용기입니다. 용기는 희망과 믿음에서 시작합니다.

‘비긴 어게인’은 이전의 수많은 영화음악이 그랬던 것처럼 음악이란 ‘감동’을 무기로 다시 한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너무나 무책임하고, 상투적입니다. 말이 쉽지 처절한 실패를 맛본 사람에게 누구도 함부로 “다시 시작하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남의 상처나 고통을 누가 함부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결국 고통도, 희망도, 믿음도, 용기도, 도전도, 실패도 각자의 몫입니다. 신조차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할지 모릅니다.

지하철에서 만난 한 성직자는 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해답을 찾지 못했을 때, 하느님을 발견했습니다. 하느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은 아니지만, 필요할 때는 함께 계십니다.”라고. 그러나 그레타는 자신의 노래로 “하느님에겐 기도하지마. 답변은 없을 테니까.” 하고 말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우리가 좌절에 빠져 희망을 잃고 있을 때, 하느님은 과연 뭐라고 말할까요. 그레타의 노래처럼 묵묵부답일까요. 아니면 “일어나 다시 시작하십시오(Begin Again).”라고 할까요. 아마 후자일 것입니다. 당신께서 그렇게 하셨고, 또한 그것이 우리의 삶의 이유이기도 하니까요.

[평신도, 2014년 겨울호(VOL.46), 이대현 요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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