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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식민지 조선에서 분도회의 지식 생산과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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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5-16 ㅣ No.688

[특집 2009년도 심포지엄] 성 베네딕도회의 한국 선교와 문화 활동


식민지 조선에서 분도회의 지식 생산과 교육

 

 

1. 문제 제기(선교사 · 지식 · 교육) 

2. 노동 교육 · 실업 교육(숭공학교 · 수사 교육) 

3. 신학 교육(덕원 신학교)
4. 보통 교육 · 사범 교육(숭신학교 · 해성학교) 

5. 여성 교육(수녀원)
6. 결론(분도회 교육과 식민지 근대성)



1. 문제 제기(선교사 · 지식 · 교육)


100년 전 분도회에서 한국에 진출한 첫 번째 목적은 가톨릭 사범학교를 운영하여 가톨릭 선생을 육성하는 데 있었다. 하지만 분도회의 교육 선교의 범위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고, 실업 교육 · 보통 교육 · 여성 교육 · 유치원 교육, 그리고 신학 교육까지 활동범위를 넓혀 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아이러니컬하게도 사범 교육이 가장 적은 의미를 차지하게 되지만 말이다. 


식민지시기 가톨릭 교육은 아직까지 학문적으로 많이 연구된 분야는 아니다. 개신교의 미션 스쿨이 한국 근대 형성에 기여한 공로는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반면, 이에 상응하는 가톨릭의 활동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사실을 증명해야 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일반적으로 식민지시기의 가톨릭 선교를 근대성과 연관 짓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편, 가톨릭 선교의 근대성을 증명한다는 것은 또한 역으로 근대화 논리의 함정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을 동반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식민지시기 가톨릭 교육 선교를 근대 교육 제도의 도입, 신학문의 수용, 문맹 퇴치, 국민 계몽 또는 하층민의 ‘지적 향상’과 ‘생활 향상’이라고만 결론짓는 것이야말로 근대화 논리의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교육 선교가 지식의 축적, 생활환경의 직선적 발전에만 기여한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식민지시기 가톨릭 교육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해야 할 것인가? 무엇보다도, 선교사들의 지식 생산과 교육은 동서양의 지식 전이와 (식민지)권력이라는 틀 안에서 비판적으로 고찰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교육과 지식의 양면성도 밝힐 수 있어야 한다.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에서 설파한 대로, 식민지에서 지식과 권력의 관계는 더 이상 순결한 것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지식과 권력/지배의 얽힌 관계는 푸코의 영향을 받아 탈식민 연구에서는 식민 지식으로 일컬어지는데, 무엇보다 식민 지배사의 사회 · 문화사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즉, 식민 지배가 지식 생산의 기술과 그 결과의 매개 작동, 말하자면 교육과 얼마나 얽혀 있는지를 밝힌다. 그렇기 때문에 최근 탈식민 연구에서는 지식을 순수한 진리의 탐구로 보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일환으로 보는 시각이 강하다. 이러한 시각에서는 지식이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고 종속자들을 규율했을 뿐 아니라 통치와 착취에 도움이 되는 도구였다는 것이 강조된다. 또한, 식민 지식은 탈식민시기에도 여전히 그 영향력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더 비판적 성찰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식민지 조선에서의 선교 교육을 서양 식민지에서의 교육 또는 선교의 문명화 사명과 기계적으로 동일화시키는 것은 위험하다. 왜냐하면 서양 기독교 선교는 일본 식민지에서 지적 전통과 지역 문화, 또한 가치의 차이를 근거로 하나의 대안 세계를 형성하고, 식민 지식에서 빗겨 가거나 또는 식민 권력에 틈을 낼 수 있는 여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논문의 문제 제기는 바로 분도회의 경우가 이런 가능성을 보여 주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필자는 여러 교육 분야에서의 분도회의 교육 활동이 식민지 근대성 형성에 어떻게 기여했는지를 밝히고자 한다.


2. 노동 교육 · 실업 교육(숭공학교 · 수사 교육) 


노동 교육은 근대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그리고 식민지 통치에서 특수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임금노동의 관철과 함께 규율화된 노동태도가 근대사회의 질서와 지배를 보장하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양 근대사회의 형성 과정에서 노동을 회피하는 청소년에게 강제적으로 노동 교육을 체계적으로 시키는 소위 ‘노동감호소’나 후에는 ‘노동수용소’가 건립될 정도였다. 이런 ‘노동감호소’는 시나 국가가 주도적으로 책임을 지기 전에는 거의 교회의 활동영역에 속했다. 이러한 ‘내적 선교’는 일찍부터 ‘해외 선교’와 맞물려 있었고, 노동 교육의 담론은 다만 사회질서의 문제만이 아니라 식민담론과 겹치는 것이었다. 분도회에서 노동을 강조하는 것은 베네딕도회의 규칙에 그 근원을 두고 있으며,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기도하고 일하라”는 구호로 대표되는 그 원칙은 구체적 인간노동, 즉 수공업적 노동을 통해 신을 경배하고 신에게 기도하는 것인 만큼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수도원 질서의 전통에서 출발한 분도회의 노동 교육에 대한 집착도 식민지 상황에서는 세속적 근대사회에서 요구하는 노동규율과 별반 차이를 보이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한국에 진출한 분도회 역시 일찍이 한국인들의 노동태도와 노동활동에 관심을 가지고 주의 깊게 관찰하였다. 그 결과 분도회에서는, 한국 사람들은 노동을 회피하고 부정적으로 여기며, 노동의 가치를 인식하지 못하고, 노동에 아직 익숙하지 않다는 동시대 개신교 선교사들의 담론과는 달리 한국인들의 노동활동을 높게 평가하였다. 한국을 두 번 방문한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한국인들이 기술적으로 높은 수준을 요구하는 벼농사를 짓는 것에 크게 감탄하였고, 옹기 제작과 짚신 삼기와 베짜기 등의 수공업을 상세히 소개하면서 그 뛰어난 능력을 언급하였다. 그는 다만 한국인들이 더 철저한 교육을 받아야 하는 분야는 상업과 영업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의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이 1910년 수공업학교를 가장 먼저 설립한 것은 이것이 분도회의 전통에서 나온 사업기획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전반적으로 이 사업이 수공업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가톨릭 중산층 형성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수도원의 시각에서 중요했던 것은 수공업학교를 통해 한국인 수사를 양육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숭공학교는 노동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에게 노동 교육을 시키는 것이 그 목적이 아니라, 실업과 직업교육을 통해 사회적 이동을 가능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분도회 선교사들은 숭공학교를 수공업만 주로 가르치는 실업학교라기보다는 사업과 영업도 가르치는 영업학교(Gewerbeschule)로 보고 있었다. 그들의 최종적 목적은 독일 도제제도의 방식에 따라 견습공과 숙련공을 거쳐 장인을 배출하는 것이었다. 학과는 선교사로 온 수사들의 직업에 따라 다양하고 폭넓게 구성되었다(대목공부, 소목공부, 정밀 금속부, 제차부, 재단부 등). 수업내용은 작업장에서의 전공실습과 종교, 한문, 일본어, 수학, 작문, 제도, 이론이었다. 이론과 실습의 비율은 2 : 8이었다. 졸업반은 1주일에 2시간 상업부기(kaufmannische Buchfuhrung) 과목을 이수하였다. 자연과학과 역사와 같은 인문, 사회과학은 수업의 대상이 아니었다. 기숙사 제도를 겸한 이 3년제 교육 과정은 실습 졸업시험으로 끝나고, 원하는 이는 2년 동안 숙련공으로서 수도원에서 일을 할 수 있었다. 이 교육 시간을 영업학교라고 명칭한 것이었다. 숙련공의 임금 중 절반은 나중에 독립할 때 출발 자금으로 쓸 수 있도록 수도원 측에서 적금하고 숙련공이 장인시험을 , 통과하여 영업을 시작하게 되면 본인에게 지불되었다.

노르베르트 베버가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그는 수공업학교를 보고 매우 만족스러워 했다. 많은 사람들이 염려했던 것과는 달리 한국의 젊은이들은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노동에 열심으로 적응해 나가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구와 도구들이 모두 낯설고, 작업대가 새로움에도 불구하고 신속히 필요한 손놀림(Handgriff)을 배운다고 평가하였다. 사실 한국 학생들에게 새로운 것은 작업장의 제반 시설과 도구만은 아니었다. 질서와 노동방식에 있어서도 선생인 수사들의 인식과 한국 학생들의 인식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수사들은 그들이 배운 대로 ‘매우 체계적으로 독일식’으로 일을 하고 가르쳤다. 학생마다 각자 자기의 도구함을 정리하고 책임지는 것부터 시작하여 언어가 통하지 않는 선생의 뜻을 헤아리고, 한국어에는 없는 도구들의 명칭을 기억하는 것까지 학생들의 어려움은 보통 견습생의 어려움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큰 것이었다. 더 나아가 학생들에게는 자신이 작업하고 생산하는 물품 자체도 낯선 것이었다. 수공업학교에서 학생들이 자신의 생산물을 찍은 사진을 보면, 대부분 학생과 생산물이 서로 소외된 관계인 양 보인다. 학생들은 경직된 모습으로 서 있어서 그들이 생산물에 대한 자부심을 가진다기보다는 생산자와 상품의 관계 자체가 낯설게 느껴진다.

한국의 수공업을 높게 평가함에도 불구하고 수공업학교에서 한국 수공업을 가르치지 않은 것은 수도원 작업장의 핵심 관계자가 교회였고, 수도원 작업장의 주 업무가 교회와 선교사가 필요한 물품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것은 교회 자체가 그만큼 복장, 장식 및 예식 도구를 사용하는 데 있어서 한국의 전통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한편, 수공업학교는 경제적 측면에서도 이익을 남기는 사업이었다. 사우어 주교가 계산했듯이, 당시 중국과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에는 약 2,000명의 가톨릭 선교사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교회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들은 주로 유럽에서 직수입되는 실정이었다. 만약 서울에서 그 물품들을 직접 생산한다면, 분도회 작업장에게는 큰 시장이 이미 확보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사우어는 필요에 따라 더 많은 작업장을 지을 계획을 하고 있었다.

1913년 사범학교가 폐교되자 숭공학교의 의미는 더 커졌다. 학생 수도 처음 30명에서 150명까지 늘었고, 사범학교 건물도 사용할 수 있었다. 게다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에는 수공업학교가 분도회의 유일한 선교 사업이 되었다. 1920년 카니시우스 퀴겔겐 신부가 양봉에 대한 입문서를 한국어로 출판하자, 분도회에서는 모든 수공업 직종에 대한 이런 입문서를 써서 수공업 입문시리즈를 만들 생각까지 하였다. 유감스럽게도 이 프로젝트는 오늘까지 실현되지 않았다.

이렇게 수공업학교의 의미는 커져 갔고, 수도원에게도 한국 수사 교육을 위해 꼭 필요한 제도였다. 하지만 1920년 원산교구를 새로운 선교지역으로 지정받은 분도회는 새로운 선교 사업의 기획을 구상해야만 하였다. 그 결과, 유감스럽게도 1923년 수공업학교는 문을 닫게 되고, 대신 한인 신부 양성을 위한 신학교가 문을 열게 된다. 연대기적으로 볼 때는, 1929년에 덕원에서 수사 교육을 위한 수공업교육이 다시 부활한 것처럼 보인다. 다만, 이는 공식적이고 일반적인 수공업학교는 아니었고, 수도원 내부의 교육 제도로서 제한적인 성격을 띤 점이 다를 뿐이었다. 분도회의 수공업 교육 전통은 해방 후 남한 왜관 수도원에서도 변함없이 이어져 내려오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독일의 수공업 · 실업 교육이 1960년대 서독의 남한에 대한 기술 원조의 일환으로 한국에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인천과 부산에 지어진 한독기술학교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또한 1960 · 1970년대 서독에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도 공식적으로는 동일하게 기술 원조의 틀 내에서 실업 교육을 받으러 간 것으로 공표되었다. 


결론적으로 볼 때, 한국 기독교 선교에서 수공업과 실업 교육은 분도회만의 독특한 특징으로 볼 수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교육은 개신교에서는 찾기 어려운 선교 사업이었고, 다른 가톨릭 선교회에서도 한국에서 실현하지 않았던 분야였다. 총독부에서는 실업 교육을 중요시하고 수공업 교육을 육성했던 만큼, 분도회의 수공업학교를 높게 평가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비록 양자의 전통과 목적은 달랐지만 식민지 조선의 교육 정책에서는 일정 부분 만나는 지점이 있었다. 특히, 직접적 생계유지를 위해 불필요할 뿐 아니라, 오히려 사회주의적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여긴 인문학 분야를 배제하고, 구체적이고 생산적인 노동에 집중한 점에서는 양자가 큰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3. 신학 교육(덕원 신학교)

1920년 원산교구를 선교 지역으로 이양받자 분도회는 즉시 한국인을 위한 신학 교육을 준비하고 시작하였다. 이 결정은 비교적 단호하고 신속하게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수도원 이전, 새로운 선교방법 개발 및 지역과 주민의 성격 파악 등 해결해야 할 도전이 막대한 시점이라서 이러한 신속한 결정은 더욱 눈에 띈다. 하지만 신학교 설립에 대한 결정 과정은 아직까지 일차 자료를 바탕으로 명확하게 해명되지는 않은 것 같다.

당시 신학교 존재의 필요성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선교사들은 문화와 언어에 익숙하지 않은 선교사들보다 현지인들이 성직자로서 선교에 더 많은 성과를 이룰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개신교와 비교했을 때 분도회 신학 교육은 높은 수준을 고집하였다. 개신교에서는 우중한 민중과 거리감이 생긴다는 것을 우려해서 의식적으로 한국 신학생들에게 높은 수준의 교육을 시키는 것을 꺼려 했다. 이는 동시에 낮은 수준의 한국 신학이 자리 잡는 데 나름의 역할을 했다. 게다가, 현지에서 배출된 목사의 수가 매우 많았는데, 이는 개신교회 토착화의 과정에 나름의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에 반해 분도회에서는 철저히 대학 수준의 신학 교육을 시켰다. 이는 무엇보다, 후에 가톨릭 신부들이 지적 열등의식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특히, 외국(일본 · 미국)에서 유학한 무신론자들이라든지(여기서는 우선적으로 사회주의자를 의미한다), 개신교 신자로서 가톨릭교회를 공격하는 것에 방어할 수 있는 지적 기반을 마련하려고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선교사들은 이런 높은 질적 요구와 기준이 학생과 선생의 비율에도 반영된다고 선전하였다. 1930년대까지 약 40명의 학생을 위해 총 7명의 선생이 확보되었던 것이다. 사실은 선교사들의 언어적 한계 때문에 두 명의 일본 선생과 한 명의 한국 선생을 고용해야 했다. 


하지만 이런 ‘높은 수준의 교육’ 정책은 오랜 교육 기간과, 민중과 떨어진 생활을 요구했기 때문에 그 기간 동안 학생들에게는 민중과 소외된 태도가 형성될 위험이 존재하기도 하였다. 교육 체제를 보면 보통학교를 졸업한 남자가 입학하여, 소신학교(중고등학교에 준함 : 총 8년, 1935년부터 7년) 과정을 마치고 대신학교를 거쳐야 했다. 대신학교는 철학과 2년, 신학과 4년으로 대학 수준에서 총 6년이었다. 그러니까 분도회 신학교는 독일의 콜레기움같이 신학을 공부할 학생들에게만 따로 중고등교육 과정을 만들었던 것이다. 일반 중고등학교와 차이는 교과 과정을 보면 명확하게 나타난다. 독일어, 교리, 무엇보다 라틴어가 추가되었다. 대신 수업량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영어 수업은 빠졌다. 베버의 영화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신학교를 소개하는 것을 보면, 학생들이 라틴어에서 한문으로 번역하는 장면이 있다. 이는 분도회에서 고전 · 한문 교육에 그만큼 많은 비중을 둔다는 점을 강조하는 장면이다. 하지만 소신 · 대신학교 전체 학과 과정에서 한국어 교육은 없었다. 고전 · 한문교육이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독일의 신학 교육 체제를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정치적 내용으로는 비민족적이고 반공적인 성격이 두드러졌다. 반면에, ‘세계적 가톨릭교회’의 위상과 ‘가톨릭교회의 세계 선교’의 공동체를 강조했지만, 이것이 과연 민족의 의미를 완전히 대체할 수 있었는지는 의심스럽다. 선교사들의 보고서에서 신학생들의 뜨거운 민족적 열정을 가라앉히는 데는 인내가 필요하다고 언급되기 때문이다. 


신학생들의 어려움은 학업과 민족 문제만은 아니었다. 그들이 가장 어려워했던 것은 격리된 기숙사 생활과 철저한 일상생활의 규율이었다. 또한, 학생들은 서양적 분위기의 생활환경에도 적응하기 힘들어했다. 침대 생활, 높은 건축물 등이 젊은 학생들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도전으로 다가오기도 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독일 선교사들의 문화적 우월성이 큰 어려움을 유발하였다. 1937년경 독일 나치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독일 신학교 과정에 있는 학생들이 덕원에서 공부하게 되었을 때, 격이 같은 학생들 사이에도 독일인과 한국인 사이의 위계는 확연하였다. 그래서 한 한국 신부는 새로 온 독일 신학생들에게 “신앙 안에서 우리는 당신들을 독일인으로도 아니고, 유럽인으로도 아니고, 외국인으로도 아니고 오직 형제로 대할 것인데, 이는 우리가 모두 한 조상의 후손이기 때문이다”라고 충고할 정도였다. 사실 1960년대까지 수도원 내에서 한국인들은 완전히 통합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선교사들은 한국 신학생들을 활동적이고, 용기 있고, 순종적이고, 우정이 있고, 종교적 관심이 강하다고 칭찬하였지만, 중도에 신학교를 그만두는 비율은 40%에 달하였다. 이런 수치는 독일의 소신 · 대신학교의 경우와 비교했을 때 특히 더 높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독일인들이 운영되는 신학교를 다닌다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문화적 의미가 추가적으로 부여되었다. 더구나 불교의 승려가 사회적으로 높은 위상을 차지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수도생에 대한 사회적 인정도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고 선교사들은 인식하였다. 


덕원 신학교는 1935년 총독부로부터 공식 인가를 받았고, 1940년대 서울과 대구의 가톨릭 신학교가 폐교된 이후에는 1942년부터 1946년까지 통합 신학교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이는 한국 내 모든 가톨릭 신학생이 이 기간에는 덕원에서 교육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독일 신학생도 덕원으로 ‘전학’할 정도였으니, 이때 덕원 수도원의 정치적 의미는 매우 중요했다고 할 수 있겠다.

덕원 신학교의 졸업생은 총 약 40명인 것으로 추론된다. 첫 졸업자가 신학교 건립 15년 만에 졸업한 것을 봤을 때 그렇게 적은 숫자는 아니다. 하지만 신학교의 목적이 사제 양육에 있었지, 덕원 수도원 수도생 양성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학생들이 졸업 후 출신 교구로 돌아갔기 때문에, 40여 명 중 덕원 수도원에 수도생으로 남은 사람은 극소수에 속한다. 이미 신부 서품을 받은 사람들은 해방 후 북한과 만주에서 상당 부분 사망하고, 나머지 대부분은 해방 후 월남했다.


4. 보통 교육 · 사범 교육(숭신학교 · 해성학교) 


보통 교육은 선교의 가장 중요한 도구로 간주되었다. 교육을 통해, 특히 학생을 통해 새로운 개종자를 얻고, 그가 집에서 부모를 개종하며, 부모는 친지를 개종한다는 생각이 근본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학교는 개종한 아이와 아직 개종하지 않은 아이를 동시에 담을 수 있는 장소이고, 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의 새로운 직업을 통해 사회적으로는 가톨릭 중산층을 생산해내는 용광로라는 인식이 선교사들 사이에서는 보편적으로 퍼져 있었다. 이런 시각의 근저에는 가톨릭 학교에서의 교육이 가톨릭 신자를 생산해낼 수 있다는 것과, 선교가 선교사를 통하는 것보다 현지인의 자체적인 선교 활동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 깔려 있다. 그렇다면 과연 학교가 선교사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선교 역할을 충분히 했던가?

가톨릭적 학교 교육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가톨릭 신자 선생이 필요했다. 숭신학교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11년에 세워진 학교이다. 그리고 이 목적 때문에 독일 상트 오틸리엔 분도회가 한국에 진출했던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숭신사범학교는 2년의 과정 후 1913년 1회 졸업을 배출하고 폐교되었다. 지금까지 일반적 연구에서는 그 주된 원인을 외국인이 운영하는 사범학교를 인정하지 않은 식민 행정에서 찾고 총독부에 그 책임을 묻는다. 하지만 폐교의 과정은 일차 자료로 아직 명확하게 검증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사실 식민 행정의 명령 없이도 사범학교는 계속 운영되기 어려운 근본적인 난관에 처해 있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프랑스 선교사들은 사범학교 졸업생들을 기존의 가톨릭 학교에 모두 고용할 능력이 없었다. 또한 대부분의 선생들이 월급을 제대로 지급받지 못했다. 그리고 식민 행정의 사립학교 정책으로 인해 가톨릭 학교의 수는 전체적으로 줄어들었고, 인가받은 학교의 수도 소수에 불과하였다. 독일 선교사 입장에서는 이런 조건하에서 선생을 양육한다는 것은 무책임하다고 판단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2회 신입생의 수는 겨우 한 손으로 꼽을 정도로 적었다. 이는 1회 신입생 수가 23명에 달했던 데 비해서 대폭 줄어든 수치였다. 따라서 사범학교를 계속 유지한다는 것은 여러 측면에서 어려웠던 것이다. 사우어 원장은 사범학교 계획이 무산되자 공인받은 4년제 중학교를 건립하려고 했는데, 이 기획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무산되었다. 이렇게 가톨릭 사범학교가 사라지면서 가톨릭 선생의 양육은 기대하기 어려웠고, 사실 가톨릭 선생을 고용한다는 것은 우연에 맡겨질 정도로 힘들었다.

그 결과, 분도회의 해성보통학교들에서도 선생들 중에 가톨릭 신자가 과반수가 넘는 곳은 드물었고, 대부분 1/3 정도의 소수에 불과하였다. 교장은 본당 신부였지만 선교사들은 교사직을 맡지 않았다. 다만 여선교사들이 음악이나 가사 과목을 맡는 경우가 있었다. 선생들이 대부분 가톨릭 신자들이 아니었다면, 그럼 교과와 수업에서라도 일반 보통학교와 다르게 선교 활동을 할 여지가 있었던가? 사실 이것도 부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교과와 수업도 공인된 보통학교로서 다른 세속 학교와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종교 수업조차도 교과에 통합시킬 수 없어, 학업이 끝나고 오후에 따로 자발적으로 오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수업을 하든지, 아니면 후에 1930년대에 그랬듯이 일요일 점심에 성당에서 수업을 해야만 했다.

학생 수에서도 가톨릭 신자 학생은 항상 1/7 정도로 비가톨릭 학생에 비해 소수에 속했다. 그 비율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높아지기는 하지만 이는 결코 학생들이 학교에서 가톨릭교를 받아들여서 신자가 되었기 때문은 아니다. 학창 시절에 가톨릭교를 접하게 되어 졸업하기 전에 세례 받는 학생들은 극히 드물었다. 이는 교리반의 예비 시간이 최소한 3~4년이나 걸렸기 때문이다. 세례를 받는 학생들은 주로 신자들의 딸과 아들이었다. 가톨릭 부모를 두지 않은 여학생은 가톨릭 신자와 결혼하기 전에는 세례 받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러니 학생을 개종시켜 가족과 친지까지 개종시킨다는 이상은 실제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이와 반대로 부모가 아이들을 개종시키는 방향이 현실적이었다.

이렇게 보통 교육제가 직접적인 선교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은 선교 보고서에 계속해서 학교의 선교적 의미를 부각시키고 이 분야를 더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해성학교 졸업 앨범을 분석해 보면, 조회부터 운동회까지 근대 규율의 특성들을 알아볼 수 있다. 또한 근대적 건축물과 학교 내 위계질서도 앨범의 사진 순차로 잘 나타난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베버의 〈조용한 아침의 나라〉 영화에서 원산 해성학교의 운동회가 촬영되었는데, 이는 학교 자체가 신앙 공동체는 아니지만 지역 공동체를 형성하고 고착하는 데 역할을 하는 것을 읽을 수 있다. 학교가 이런 근대적 이미지와 나름의 지역 공동체 형성에 기여한 바는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인들은 교회가 사회 구성원으로서 공적 업무를 하기를 바랐고, 교회가 그 필요와 요구를 들어줌으로써 사회적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을 가톨릭 신자든 아니든 인정했고, 그로 인해 가톨릭교회의 위상이 올라갔던 것이다. 그러니까 학교는 선교의 도구가 아니고, 교회 자체가 사회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는 하나의 사업 분야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좁은 의미의 선교 목적을 벗어나서, 공적인 영역에서 일반적인 사회의 필요에 따라 헌신하고 투자하는 사업을 벌여야 했다. 이런 부분이 바로 근대 사회에서 교회가 사회에서 통합적 역할을 하는 방식이기도 하였다. 선교사들은 끝내 학교가 선교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고 확신했지만 말이다. 선교사들의 의도와 한국인들의 이해는 서로 엇갈렸지만, 이러한 오해 안에서도 결과적으로는 양쪽 모두가 나름대로 만족할 수 있었다.


5. 여성 교육(수녀원)

분도회에서 여성 선교는 개신교에서 여성 선교에서 쓰였던 ‘여성을 위한 여성으로부터의’ 선교와 유사한 것 같다. 사우어 주교가 1925년 투칭 분도회 수녀원을 한국에 부른 주원인도 여기에 있었다. 비록 언어와 관습은 다르지만 여성 선교사들이 여성과 여성의 관계로 마음을 열고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면 ‘진정한 여성’으로 교육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부부유별로 인해 공간적 구분이 지어졌던 한국에서는 남성 선교사가 출입할 수 없는 곳까지 여성 선교사들이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니까 여성 선교사의 활동 공간은 얼핏 보기에 남성 선교사의 활동 공간보다 더 넓어 보였다. 하지만 투칭 수녀회가 한국에 진출할 때 사우어 주교와 맺은 계약을 보면 직접 선교는 언급되지 않았다. 그들의 주 업무는 여성 교육과 학교 교육에 참가하는 것이고 약국이나 병원을 운영하며 필요에 따라 본당 신부들의 빨래를 담당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수녀회는 수도회보다 더 명확하게 간접 선교에 제한되어 있었다. 교육 사업의 관점에서 보면, 수녀회는 공인을 받지 않은 유치원과 빈민 교육과 여성 교육에 초점을 맞춘 것 같다. 해성학교에서 수녀들과 여자 선교사들이 선생으로 활동을 하기도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수도회와의 계약 관계에서 이루어졌고, 그 대가를 일 년치씩 지불받기도 했다.

분도회에서 여성 교육을 중요시한 것에는 보통 교육에서 학생들을 중요시 여긴 것과 유사한 논리가 바탕에 깔려 있었다. 즉, 젊은 여자아이를 가톨릭교로 인도할 수 있다면 그를 통해 미래 가족 또한 신앙으로 인도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리고 가족을 얻으면 나라를 가톨릭교로 구원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분도회가 선교에 성공하는 만큼 여성에게도 전체적으로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다. 이런 논리에는 여성이 가정의 중심이고 가정이 나라의 핵이라는 사고가 전제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보통학교 학생에서 보았듯이 선교사들의 전제와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선교사들의 여성 교육은 무엇보다 기독교 부부 교육과 기독교 가족 교육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여성이 주부 · 엄마 · 부인으로서 가정생활을 책임지는 데 필요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구체적으로 가사 노동과 육아법에 필요한 내용이 많이 교육되었다. 물론 이와 더불어 교리 교육도 병행되기는 하였지만 말이다. 


그러다 얼마 되지 않아 여성 선교사들은 1930년대 여성 교육의 전제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은 가톨릭 여성을 결혼시킨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그 가족이 가톨릭 가족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여성 선교사들이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가톨릭 남자와 결혼할 것이 확실하지 않은 여자아이들에게는 세례를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비가톨릭 남자와 결혼했을 때 여자의 신앙생활도 보장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톨릭 남자와 결혼할 확률이 높은 여자아이는 전적으로 가톨릭 부모를 가진 여자다. 고로 부모가 세례를 받지 않았으면 여자는 세례를 받기가 힘들었다. 이런 정책은 일방적으로 여자를 차별하는 것이었다. 남자아이는 부모가 세례를 받지 않아도 세례를 받을 수 있었고, 결혼 상대가 가톨릭 신자가 아니어도 결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여성 선교사들은 서양식 부르주아 가족 이상을 표명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연애 결혼과 자발적 선택으로 인한 결혼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이유는 연애 결혼을 하기에는 한국 사람들에게 문화적 · 도덕적 조건이 갖추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독일과 같이 부부로서 양성이 ‘정신적 공동체’를 이루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것이다. 따라서 선교사들은 가톨릭 신자 사이에서 중매 결혼을 존중하고 권장하였는데, 밖으로는 분도회가 한국의 고유한 전통과 관습을 존중한다고 정당화하였다. 이는 한편으로는 혼례 미사에서 개인의 자유의사를 묻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가부장적 체제 내에서 중매 결혼하는 신부 사이에 확연한 모순이 있었지만, 이는 가톨릭 가족의 형성을 위해서는 감안했던 것이다. 셋째, 결론적으로 ‘여성을 위한 여성으로부터의’ 선교 방법은 한계에 도달하였다고 보고, 그 해결책으로 여성 선교사들도 남자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남자아이와 남성을 잘 교육시켜야 결국 장기간 교육시킨 여성에게서 희망했던 성과를 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남녀 학생들은 어린 나이에 벌써 미래의 ‘결혼 대상자’로 취급되었고, 그렇게 교육을 받았다. 결론적으로 여성 선교사들은 가부장적 구조를 인정하는 것을 넘어 그 전통을 교회 안으로 연장시켰으며 여성 차별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6. 결론(분도회 교육과 식민지 근대성)

분도회 교육은 일차적으로 선교를 목적으로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선교사들의 지식 생산과 식민 지배의 관계를 봤을 때, 선교사들의 지식 생산과 교육이 일본 식민 지배의 ‘앞잡이’ 역할을 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오히려 분도회는 오래된 자체의 역사와 전통에 뿌리를 둔 자신만의 정체성과 나름의 ‘독일식’ 교육 제도를 고집하였다. 우리는 수공업과 실업 교육에서 이러한 예를 찾을 수 있었다. 이는 신학 교육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굳이 영어가 아니고 독일어를 현대 외국어로 선택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리고 여성 교육에서도 선교사들의 고집은 서양의 부르주아적 가족 이상을 대표하는 데서 관찰되었다. 분도회의 이런 고집은 자신들을 위한 영역을 확보하는 데 도움을 주었지만, 반면 교육 내용, 기숙사 생활, 건축물 및 실내 시설, 그리고 심지어 음식에 이르기까지 이런 고집스러운 태도가 얼마나 철저했는지 한국 학생들의 불편함을 배려할 여지와 여유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선교사들은 그들의 태도를 지적인 ‘우위’와 선생이라는 사회적 위치로 정당화시킬 수 있었다. 한국인 학생들은 전반적으로 배우는 입장이고 이런 문화적 차이도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감수해야 하는 것으로 인지했다. 하지만 분도회는 한국 학생들 나름의 전유 방법에 의해 또는 거절 행위에 의해 독 ‘일식 지배의’ 한계에 도달하기도 하였다. 특히 수녀들의 경우, 그들의 방법에 한계를 느끼면서 모순적이기는 하지만 새로운 전략을 배워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사실 배우는 것은 한국인 학생만이 아니라 선교사도 마찬가지였다. 한국 사람과 문화에 대한 지식이 성공적인 선교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학교의 의의에서 지적했듯이 오해의 창조적 힘을 무시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제도 교육에서는 지식 생산과 교육이 현지인에게 지배 권력을 분배하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는 보통학교에서 상당 부분 현지인 교사들을 고용하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 가톨릭 신자들이 권력 및 활동 영역을 확보하는 양상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제도 교육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이를 위해서는 본당의 회장이나 공소의 회장, 각 교회 교리 선생에서 이런 역할 등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실업 · 보통 교육을 통해 가톨릭 중산층을 생산하려는 시도는 신앙이 최소한의 물질적 기반이 있을 때 더 성장할 수 있다는 확신을 근거로 하기는 했지만, 이 또한 최종적으로는 가톨릭 신자의 수를 높이는 데 기여할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학교 건립, 그리고 여성 교육 및 결혼 정책에서 볼 수 있듯이, 순수한 수적인 증가를 위한 선교를 위해서도, 제도로서의 교회를 사회 속에 위치 지을 필요가 있었고, 교회는 비기독교인들의 욕구를 만족시켜야 하는 입장에 놓여 있었다. 이런 상황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대응이야말로 가톨릭교회가 근대 사회의 요구에 적응하고, 때로는 앞서 나가는 순간들을 잘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분도회의 ‘고집’(알프 뤼트케)과 선교의 목적이 식민 지배에 전적으로 포섭되었다거나 그 일부분이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분도회가 식민 국가에 도전한 것도 아니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비정치적’인 교육은 가톨릭 신자로 하여금 주어진 상황에 수긍하는 태도를 취하는 데 나름대로 기여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 또한 더 나아가 분도회의 비민족적이고 반공적인 교육 정신은 식민 국가를 지탱하는 데 일정 정도 기여하는 성격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식민지 행정부는 분도회의 교육기관에 큰 피해를 주지 않았다. 다른 시각으로 본다면 식민종속자인 한국인들은 근대적 지식을 축적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리고 가톨릭적 교육 정신으로 새로운 가치를 형성한 것뿐 아니라, 그들이 식민 지배를 수용하고 거기에 참여하는 방법을 익혔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듯, 협력도 아니고 저항도 아닌 그 사이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면서 식민 지배에 대한 참여와 자기 이해의 관철 사이에서 오갔던 것, 다시 말해 견제와 접근의 동시성이 식민지 시기 분도회 지식 생산과 교육의 성격이 아니었나 싶다. 이러한 점에서 분도회는 한국의 식민 종속자들에게 식민 지배에 대한 특별한 대안을 제공하지는 않았지만, 그리고 한편으로는 또 하나의 문화 제국주의적 (독일식) 지배 형태를 경험하게 만들기도 하였지만, 개인적 발전의 가능성 그리고 공적인 활동에서 기여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 놓았다고 볼 수 있겠다. 분도회의 식민지 근대성은 바로 이런 양면성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닐까.

[교회사 연구 제33집, 2009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이유재(독일 본 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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