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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무관심의 벽을 넘어: 사랑의 걸림돌, 무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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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10-20 ㅣ No.1270

[경향 돋보기 - 무관심의 벽을 넘어] 사랑의 걸림돌, 무관심



언제부턴지 우리 사회에는 ‘쿨(cool)하다’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대략 어떤 상황에서 지지부진하지 않은 과감한 모습을 보이는 이에게 성격이 ‘쿨하다’고 말합니다. 애매모호한 상황에서 어쩌지 못할 때, 누군가가 나서서 딱 잘라 정리해 줄 때 우리는 그의 성격에 매료됩니다.

하지만 이런 긍정적인 면과 함께, 주위에 아랑곳하지 않는 이기적 성향의 소유자에게도 ‘쿨하다’는 표현이 사용되는 걸 보면 굳이 그렇게 되려고 애쓸 이유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다 문득 만약에 주님께서 그러하신 분이시라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갈 것인지 의문스러웠습니다. 예컨대 날마다 다짐을 하고도, 돌아서면 안면을 바꾸는 무수한 인간들을 봐주고 또 봐주고 끝까지 기다리시는 우리 주님은 아무리 따져봐도 그러한 성격은 아니신 것 같으니까요.


무관심은 이기심의 다른 얼굴

인간은 서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회적 동물입니다. 사회는 유기적 조직체이며 인간은 사회를 떠나서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고통받는 이들을 무심하거나 냉정하게 지나치는 도덕적 불감증은 사회의 병폐입니다. 이웃에 대한 무관심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관계의 숨통을 막고 차단시키는 암적 악습이라는 얘깁니다.

인간은 서로 관계를 맺고 지내는 탓에 사랑도 미움도 가지게 됩니다. 이렇듯 아무리 악한 일을 저지른 인물이라도 그의 마음 어딘가에는 사랑의 속성이 숨어있기 마련입니다. 누구나 사랑을 베풀기도 하고 한편 매정하게 돌아서 기도합니다. 그런 까닭에 누구나 사랑을 실천했을 때 차오르는 기쁨의 맛을 압니다. 또한 잘못을 저질렀을 때 느낄 수 있는 가책의 무게도 피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기준과 관점을 자기 입장에만 유리하도록 재단하는 사람을 죄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이웃에 대한 무관심에 대하여 부자와 거지 라자로의 비유를 들어 경고하십니다(루카 16,19-31 참조).

그런 의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도덕적 빈곤은 인간을 악과 죄의 노예로 만들어 결국 인생에 큰 문제를 일으킵니다. 경제적 파멸에 이르게 하고 영적 빈곤에 빠지게 합니다”(2014년 사순시기 담화).

‘복음이야말로 영적 빈곤을 해결해 나가는 참된 길’임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지 못합니다. 상대의 잘못에 입을 삐죽이기 일쑤입니다. 나아가 뒤에서 흉보며 무시하는 말과 행동으로 상대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줍니다.

잘못한 사람에게 충고가 아닌 지적하는 것을 마치 뒤끝 없는 깔끔한 행위로 착각하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시원시원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뭐든 속에 담아두지 않아.’, ‘싫은 건 싫다고 말하는 성격이야.’, ‘뒤끝은 없어.’

‘정말이세요? 진심이세요? 가슴에 손을 얹고 주님께 맹세할 수 있나요?’라고 묻고 싶네요. 물론 깊이 고심해서 충고를 해도 상대가 그냥 흘려듣는 민망한 경우를 당한 결과일 수 있습니다. 오히려 반발하고 대들어서 곤란한 경우를 겪은 탓도 있을 겁니다.

이러저러한 마음의 상처만 남아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꼴을 피하려는 자구책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뒤에서 수군대고 흉보는 일만 열심히 하다니요? ‘좋은 얼굴로’ 모른 척하면서 속에는 분을 쌓아올리며 지내다니요? 나아가 그런 자신을 아량이 넓은 것처럼 착각까지 하다니요?

이야말로 본능에 집착하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영적 허무를 채우려고 애쓰지만 속에는 권태만 가득 쌓이게 됩니다. 상대의 잘못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방관하는 것은 정의로운 행위가 아닙니다. 죄를 지은 사람에 대한 무관심한 행위는 큰 잘못이기 때문입니다. 모른 척하는 게 결코 상책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곤경을 당한 사람을 도울 수 있도록 사랑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았거나, 사랑의 시선을 버렸을 때, 스스로 떳떳하지 못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내 안에 그득한 하느님의 사랑을 베풀거나 나누지 않을 때 영혼이 사랑에 체했다는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루카 12,47)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특별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아도, 특별히 누구를 괴롭히지 않았더라도 이웃의 고통에 무관심한 사랑의 방관자로 지내는 이에게 엄중하게 경고하셨습니다.

우리의 감정을 공략하는 사탄의 먹이를 넙죽 받아먹지 말라는 뜻입니다. 사랑과 이해에 옹색한 감정의 구두쇠가 되어 스스로 매를 벌지 말라는 지엄한 명령입니다. 무관심은 모든 걸 혼자 독차지하려는 놀부 심보라는 겁니다.


무관심, 벗어야 할 악습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살필 사명이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세상의 모든 문제에 마음을 씁니다. 세상의 갖은 아픔에 고통을 느낍니다. 세상의 아픔에 함께 울고, 세상의 고통에 함께 눈물 흘리는 주님의 심성을 지닙니다.

사도행전은 베드로와 요한 사도가 “무엇인가를 얻으리라고 기대하며 그들을 쳐다보는”(3,6) 불구자를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3,5) 일으킨 사실과 앉은뱅이를 치유한 바오로 사도의 기적 사건을 전합니다. 그리고 사도들이 상대를 “유심히”(3,4) 바라보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이웃에 대한 우리네 마음이 사도들처럼 그렇게 어느 한 사람에게 유심히 집중하여 상대의 요구를 충족시켜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열린 마음으로 이웃에게 관심을 쏟아 그리스도인의 선행을 온 세상에 드러내야 합니다.

유심히 바라봄으로써 상대 안에 믿음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기적을 행한 사도들처럼, 세상 모든 이의 마음에 내재된 ‘믿음’을 끌어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세상 만민이 ‘하느님을 찬미’하도록 당신의 종인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집중하여 “하나하나를 악에서 돌아서도록”(사도 3,26) 도와야 한다는 걸 선포하신 것이라 헤아립니다.

온 세계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혼돈에 휩싸여 있습니다. 부익부 빈익빈의 상태는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벽을 높게 쌓아올렸고, 소통의 통로를 차단해 버렸습니다.

모두 탐욕과 이기심의 결과입니다. 내가 아닌 누군가의 변화만을 고집한 결과입니다. 가진 것이 너무 작아서 도무지 나눌 게 없다는 생각은 자신에게 있는 것을 아까워하며 내어놓지 않는 아집의 결과입니다.


무관심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사랑

주님께서는 2012년 세계주교대의원회의(주교 시노드) 제13차 정기총회를 통하여 “믿음으로 두려움을 극복하고 희망으로 좌절을 극복하며 사랑으로 무관심을 극복하라.”고 우리에게 새겨주셨습니다. 주교 시노드는 상대에 대한 내 생각과 판단을 걷어내고 주님께 의탁하며 기도할 것을 거듭 권하고 있습니다.

신앙인의 삶이 다르다는 걸 세상이 느끼게 하는 것이 복음전파의 핵심임을 다시 한번 새겨주신 것입니다. 무관심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원리는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실천하는 선행만이 참된 의미가 있습니다. 사랑만이 무관심이라는 현대인의 고질병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것을 포기하는 사랑만이 삶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선행이 하늘의 ‘채권증서’를 작성한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한 어린이가 내어놓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분이라는 사실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가난한 이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주님께 꾸어드리는 이”(잠언 19,17)라는 사실을 믿는 신앙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을 원하고 건강을 원하지만 우리 모두에게 우선 먼저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만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힘입니다. 가진 것이 많아서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은 오만입니다. 오만이야말로 믿음의 길에 놓인 악의 덫입니다.

삶의 수단에 불과한 재물이 삶의 목적이 될 때, 세상의 타락은 불보듯 뻔합니다. 탐욕은 인간의 지위를 스스로 강등시키는 파멸의 행위인 까닭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분명히 경고하였습니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1티모 6,10). 또한 “안전하지 못한 재물에 희망을 두지 말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시어 그것을 누리게 해주시는 하느님께 희망을”(6,17) 둘 것을 권고합니다.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멍텅구리’ 셈법

주님께서 요즘 우리 세대에서 꼭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일지 생각해 봅니다. 어쩌면 길 가는 나그네에게 최고의 정성과 최선을 다하여 대접했던 아브라함처럼 진심으로 이웃을 환대하는 사람의 모습을 가장 그리워하지 않을까요.

주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았을 때, 그토록 환대해 준 아브라함이 너무 고마웠기에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기도 하였습니다.”(히브 13,2)라며 두고두고 자랑을 하고 계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마음을 알면서도 선뜻 행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얼까요?

아마도 나그네를 맞이할 때마다 송아지를 잡아 대접했던 아브라함처럼 한다면 살림이 거덜 날 것입니다. 이러저러한 이유와 핑계를 대며 무조건 주님의 말씀대로 살 수는 없다고 발뺌을 합니다. 문제는 주님께서는 우리의 이런 생각과 타협하지 않으신다는 점입니다.

세상의 경제논리를 거부하고 세상의 손익공식과 확연히 다른 생명의 셈법에 익숙해질 것을 강조하신다는 점입니다. 아브라함처럼 축복을 받기 전에 ‘멍텅구리 셈법’을 먼저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이웃 사랑은 우주적 사랑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리스도인의 행동강령의 첫 번째가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웃이 진리로 나아가도록, 세상의 유혹을 단호히 물리치도록 일깨워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라는 걸 명심해야 합니다.

이 원대한 우주 사랑의 첫걸음이 이웃에 대한 관심과 이웃의 고통을 바로 해결해 주지 못하는 안타까운 연민에서부터 시작된다니, 얼마나 놀라운지요?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마음가짐과 모든 것이 하느님에게서 왔으니 주님의 이름으로 베푸는 복음의 원칙을 절대 잊지 않아야 가능하다니, 얼마나 신비로운지요?


무관심을 극복하도록 도와주는 성령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온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나 한 사람의 변화에 주목하시고 성령을 보내시어 일일이 변화시켜 주십니다. 명심할 것은 성령께서는 그분의 주파수에 정확히 맞춘 영혼의 안테나로만 수신된다는 점입니다.

이웃의 아픔에 무심해질 때 우리 영혼의 주파수가 엉뚱한 채널로 맞춰져 있지 않나 살펴봐야 합니다. 수시로 그분의 뜻을 수신하려면 영혼의 안테나를 세밀히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수신된 주님의 말씀에 자신의 삶을 의탁하며 주님의 것으로 충만하다면 어떤 장애도 뛰어 넘는 사랑의 능력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이끄심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을 미워하지 않도록 돕습니다. 그분께서 끝내 변화시키실 것을 믿으며 서둘러 판단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줍니다. 이렇듯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경제적 가치로 판단하고 있는 세상을 염려하십니다. 그리고 스스로 무언가 해냈다고 판단하는 우리에게 호소하십니다. 말 많고, 흠 많은 인생사에서 모른 척하면서 살펴주도록…. 아는 척하지 않고 묻어주도록…. 티 내지 않고 도와주시는 성령의 손길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가도록 이끄십니다.

세상에 대한 애틋한 하느님의 사랑이 오늘 하루, 지금 이 순간을 선물하고 계십니다. 사탄이 던져준 유혹의 먹이인 무관심에 현혹되지 않으시는 성령께 지혜를 청합시다.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인이 튼튼한 복음의 파수꾼이 되도록 어머니 성모님께서 행복하고 참으로 귀한 진리의 성령께로 이끌어주시기를 청합시다.

* 장재봉 스테파노 - 부산교구 신부. 교구 선교사목국장으로서 복된 삶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성서적이고 윤리적인 자세를 깊이 고민하고 있다. 성경 읽기를 좋아하여 전공인 윤리신학 분야만이 아니라 성경에 관한 책도 냈다. 저서로는 「주머니 속의 윤리」, 「윤리는 아는 것도 많네」, 「소곤소곤 이게 정말 궁금했어요」, 「성경의 숨은 이야기」, 「성경 속 재미있는 이야기」 등이 있다.

[경향잡지, 2015년 10월호, 장재봉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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