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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종법(宗法)으로 본 윤지충 복상(服喪)의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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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4-04 ㅣ No.1560

[연구 노트] 종법(宗法)으로 본 윤지충 복상(服喪)의 성격

 

 

유교(儒敎) 의례(儀禮)에서 종법이란?

 

현대 한국 사회에서 전통이라 하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조선 시대 유교를 떠올린다. 조선 시대에 일반화된 유교의 동전(東傳)은 지금으로부터 아주 먼 시기부터 살펴야 할 만큼 오래되었다.

 

유교에서는 대체로 『대학(大學)』의 조목에서 확인할 수 있듯 한 사회 속에서 개개인의 수행과 그에 바탕을 둔 삶을 중시한다.1) 여기서 개개인의 수행과 그에 따른 삶은 유교 경전을 통한 지식 습득과 유교 의례의 실천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습득하고 실천하는 유학자는 집안에서의 화목과 국가에 대한 충성의 기반은 자기 자신에게 있다고 여겼다.2)

 

특히 유교 의례 실천은 자기 수양을 넘어서 집안과 친족을 결속하게 하는 매개였다.

 

이 유교 의례는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사례(四禮)로, 핵심은 상주(喪主)와 종족들이 죽은 사람을 전송하는 상례(喪禮)와 죽은 사람을 기리는 제례(祭禮)다.

 

두 가지가 핵심인 까닭은 그 안에 종법이라는 사회 구조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종법은 적장자(嫡長子)인 종자(宗子)를 중심으로 구현되는 집안 질서다. 그래서 종법은 유교에서 지향하는 사회의 기본 구조이면서, 이것이 내재된 유교 상례와 제례를 유교 의례의 핵심이라 하는 것이다.3)

 

부모가 돌아가시면 적장자는 그들을 위해 27개월 동안 삼년상(三年喪)4)을 치르고, 삼년상을 마친 후 기일(忌日)마다 제사를 지내며 그들을 기린다. 적장자 중심의 집안 질서는 적장자가 상례와 제례를 행하는 과정에서 드러난다. 예를 들어 상례는 상복(喪服), 신주(神主)에서, 제례는 신주를 매개로 돌아가신 사람에게 제사 지내는 기제(忌祭)에서 확인된다. 상복은 적장자인 상주를 중심으로 친족의 혈연이 멀고 가까움에 따라 다섯 가지(참최[斬衰], 자최[齊衰], 대공[大功], 소공[小功], 시마[緦麻])로 구분된다.5)

 

신주는 사람이 죽은 지 3개월째에 상주가 장례를 지내기 전에 만드는 것으로, 장례 이후부터 탈상까지의 절차(우제[虞祭], 부제[祔祭], 졸곡[卒哭], 대상[大祥] 등)를 치를 때 쓰는 기물이다. 적장자는 신주에 조상의 영혼이 깃든다고 여겨, 그와 친족들이 이를 대상으로 제사를 지낸다.

 

종법이 내재된 유교 상례와 제례를 조선 시대 양반들은 중시하였는데, 이는 유교 의례의 실천이 유학자이자 양반으로서 정체성과 결속력을 확인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라는 그들의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6) 그리하여 조선 후기, 구체적으로 17세기 이후에는 양반들도 유교 상례와 제례, 종법을 학문적으로 또는 실생활 적으로 연구하고 실천하여 양반 사회에 일반화되기 시작하였다.7)

 

 

윤지충 복상(服喪)과 종법의 결여(缺如)

 

종법을 기반으로 형성된 조선의 양반 사회는 18세기 후반에 커다란 변화를 경험하는데, 이것이 진산사건(珍山事件)이다. 진산사건은 우리가 익히 아는 것처럼 1791년(정조 15)에 진산 지역 양반인 윤지충(尹持忠, 바오로, 1759~1791)과 권상연(權尙然, 야고보, 1751~1791)이 모친상을 치르지 않고 조상의 신주를 태워버린 일이다. 이 사건은 당시 조선 조정과 양반에는 큰일이었다. 이들은 이 사건을 기존 질서를 위협하는 일로 인지하여 그 질서를 유지하고자 강경하게 대응하였다.8) 그 이유는 종법의 결여 때문이다.

 

① 신해년 가을 호남 진산군의 사학인(邪學人)인 윤지충(정약용의 외종)의 어머니가 죽자 상장(喪葬)의 예를 사용하지 않고 단지 두건[孝巾]만 착용하고 상복[衰絰]을 입지 않았고 또 조문도 받질 않았다. ② 그리고 그 무리인 권상연(윤지충의 외제)은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없애버려 소문들이 어지럽게 퍼졌다. … ③ 진사 성영우 등도 태학에 통문을 보내 이를 바로잡게 하였는데 모두 윤지충과 권상연만 비난하였다.9)

 

위 『벽위편』에서 ①~③을 살펴보면, 우선 ② 권상연은 윤지충의 외제(外弟)로 윤지충과 함께 천주교를 믿었고, 윤지충이 어머니의 상례를 치르지 않자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없앴다. 아울러 그는 부모를 일찍이 잃어 상례와 제례를 치르지 않았으므로 부모의 신주를 태워 그 재를 무덤 앞에 묻었다.10)

 

한편 ① 윤지충은 해남 윤씨로 윤경(尹憬)과 안동 권씨(安東 權氏)의 적장자다. 어머니가 죽자 윤지충은 모친상을 치르는 과정에서 두건만 착용하고 상복을 입지 않으며 조문도 받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적장자는 부모가 돌아가시면 삼년상을 치르면서 3년 동안 자최복[齊衰三年服]을 입고 조문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윤지충은 적장자이면서도 유교 상례의 규정에 맞는 모친상을 치르지 않았다.

 

『정조실록』에서는 윤지충의 사례가 위와 약간 다르다. 윤지충은 비록 어머니의 장례를 그녀가 돌아가신 지 4개월째에 지내긴 했으나 장례 전후 절차를 유교 상례 규정에 따라 진행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친족들과 친구들의 조문도 막지 않았다. 다만 그에게 문제가 된 점은 어머니의 신주를 가묘에 들이지 않고 태워서 마당에 묻었다는 것이다.11)

 

두 기록을 검토하면 윤지충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유교 상례 규정을 일부분 준수하여 모친상을 치렀지만, 천주교를 믿어 유교 상례 가운데 신주를 바탕으로 하는 절차들을 진행하지 않았다.

 

유교 상례 규정에 따르면 적장자인 상주는 장례 이후 반곡(反哭), 우제(虞祭), 부제(祔祭), 소상(小祥), 대상(大祥), 담제(禫祭)에 신주를 사용한다. 이는 장례를 치러서 시신을 매장하였기 때문에 신주로 시신을 대신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유교 상례에서는 장례를 기점으로 죽은 사람을 산 사람처럼 대우하는 것은 죽은 사람처럼 대우하는 것으로, 그에게 바치는 전(奠)은 제(祭)로 바뀐다. 그리고 적장자가 슬픔에 시도 때도 없이 하는 곡[無時哭]은 아침저녁에만 하는 곡[有時哭]으로, 흉례(凶禮)는 길제(吉祭)로 전환된다.12)

 

이러한 유교 상례의 특징을 고려하면, 신주를 중심으로 하는 장례 이후 절차들을 하지 않은 윤지충은 유교 상례 규정에 따라 모친상을 치렀다고 보기 어렵고, 그의 복상에서는 신주를 중심으로 구현되는 종법이 결여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가 어머니를 산사람처럼 대우하며 장례까지의 절차를 행하였지만, 나머지 반곡 · 우제 · 부제 · 소상 · 대상 · 담제는 길제이므로 지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천주교를 믿은 윤지충의 복상은 조상숭배를 이단으로 보는 천주교의 입장을 따랐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양반들은 윤지충을 유교 상례에 내재된 적장자가 조상을 숭배하는[敬宗] 과정을 통해 친족과 주변인을 결집하는[收族]13) 종법의 기능을 실천하지 않은 양반으로 보았다. 이에 ③ 이들은 다른 양반들에게 통문을 돌려 윤지충 등을 비난하고, 조정에 이 사건을 보고하여 천주교인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였다. 나아가 천주교인들을 ‘사학인(邪學人)’이자, ‘아비도 임금도 없는 놈[無父無君]’이라고 여론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유교 상례와 제례의 실천으로 여타 계층과의 차별성을 드러내고 자신들의 결속력을 다진14) 조선의 양반들에게 윤지충 복상은 자칫 양반 사회 구조를 흔들 수 있는 사건이라 인식될 만하였다. 이는 권상연과 윤지충의 친족들이 그들을 손가락질하며 욕하였다는 점에서도 엿볼 수 있다.15)

 

이처럼 양반인 윤지충의 복상에서 종법이 결여된 일은 단순히 개인의 조상숭배라는 유교의 종법이 지닌 종교적인 측면만의 문제가 아니라 적장자 중심의 질서 또는 양반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였다. 이에 당시 양반뿐 아니라 조정에서도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천주교에 대한 강경책을 마련하여 19세기를 맞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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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大學』, “物格而后知至 知至而后意誠 意誠而后心正 心正而后身修 身修而后家齊 家齊而后國治 國治而后天下平 自天子以至於庶人 壹是皆以修身爲本”.

 

2) 『家禮』, 「序」.

 

3) 종법의 중요성은 『근사록』이라는 책에서도 확인된다. 이에 따르면, 천하의 인심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종족을 거두고 풍속을 바로잡아 사람들에게 근본을 잊지 않게 해야 한다. 이 때문에 계보를 밝히고 종족을 거두며 종자법을 세우는 것이다(『近思錄』 卷9, 「制度」, “管攝天下人心 收宗族 厚風俗 使人不忘本 須是明譜系 收世族 立宗子法”).

 

4) 왜 3년을 치르는지에 대한 설은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 자식은 태어나 3년이 지나서야 부모의 품을 벗어날 수 있다는 말에 근거하여 부모가 돌아가시면 자식은 다시 그들에게 삼년상을 지낸다(『論語注疏』 卷17, 「陽貨」, “子曰 予之不仁也 子生三年 然後免於父母之懷”). 둘째, 본래 삼년상은 1년(13개월)으로 그치는 상이지만, 자식이 부모의 은혜를 더 높이고자 1년(13개월)을 더 하여 3년(27개월) 동안 삼년상을 한다(『禮記正義』 卷58, 「三年問」, “然則何以三年也 【鄭注】 言法此變易 可以期 何以乃三年為 曰 加隆焉爾也 焉使倍之 故再期也 【鄭注】 言於父母加隆其恩 使倍期也”).

참고로 『예기정의』는 『예기』라는 유교 경전에 대하여 중국 후한(後漢) 시기 정현(鄭玄, 127~200)이 주(注)를, 당(唐)의 공영달(孔潁達, 574~648)이 소(疏)를 붙인 책이다. 【鄭注】는 정현의 주를 말한다.

 

5) 김용천 · 장동우, 『중국 고대 상복의 제도와 이념』, 동과서, 2007 참조.

 

6) 이중환(李重煥, 1690~1752)은 사대부라는 이름이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므로 그 이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의례를 잘 실천해야 한다고 하면서 이것이 여타 계층과 다른 점이라고 주장하였다(『擇里志』, 「四民總論」, “天下之至美好者 士大夫之名也 然其所以不失士大夫之名者 以其守古聖人之法也 毋論其爲士爲農爲工賈 當一修士大夫之行而此非禮不能”).

 

7) 역사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17세기에 양반들이 사회 질서 재편의 수단 가운데 하나로 유교 의례와 종법을 활용하였다고 본다. 아울러 18~19세기에 이르면 양반 사회 내에서도 유교 의례에서 지향하는 적장자 위주의 혈연 구조(종법)가 정착되고, 양반들은 이를 통해 여타 계층과 다른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확립하였다고 한다.

 

8) 조광, 『朝鮮後期 天主敎史 硏究』,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8 참조.

 

9) 『闢衛編』 卷2, 「辛亥珍山之變」.

 

10) 『正祖實錄』 卷33, 正祖 15年 11月 7日 2번째 기사.

 

11) 『正祖實錄』 卷33, 正祖 15年 11月 7日 2번째 기사.

 

12) 김용천, 「旣葬 ‘受服’의 규정과 예학적 논쟁―『儀禮』 「喪服」편의 해석을 중심으로」, 『泰東古典硏究』 42, 2019 참조.

 

13) 종법의 기능은 조상을 존중하기 때문에 종자를 공경하고 종자를 공경하기 때문에 친족들을 규합하는 것이다(『禮記正義』 卷34, 「大傳」, “尊祖故敬宗 敬宗故收族”).

 

14) 친족들을 규합하는 뜻은 상례 때 서로 상복을 입어주거나 제례 때 서로 도와주는 것이다(『二程遺書』 卷17, “收族之義止爲相與爲服 祭祀相及”).

 

15) 꼴로드 샤흘르 달레 저, 김미선 역, 『성해의 목소리』, 흐름, 2021 참조.

 

[교회와 역사, 2023년 3월호, 김진우(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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