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8일 (토)
(백)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교의신학ㅣ교부학

[구원]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와 십자가 죽음 그리고 인간의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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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01-08 ㅣ No.189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와 십자가 죽음 그리고 인간의 구원


- 라이문트 슈바거(Raymund Schwager)1)의 이론을 중심으로 -

 

손희송(가톨릭대학교 교의신학 교수 · 신부)

 

들어가는 말

1. 전통적 구원론과 그에 대한 비판

2. 새로운 방향의 구원론

3. 두 방향의 구원론

4. 구원 드라마 안에서의 예수

  4.1. 제1막: 가까이 다가온 하느님의 다스림

  4.2. 제2막: 하느님의 다스림의 거부와 심판의 말씀

  4.3. 제3막: 십자가 - 속죄의 죽음

  4.4. 제4막: 예수 부활 - 하느님의 판결

  4.5. 제5막: 성령 강림과 새로운 공동체의 형성

5. 맺는말

 

 

들어가는 말

 

올해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에 미국과 호주에서 개봉된 영화 한 편이 주목을 받았다. 바로 호주 출신의 영화배우 멜 깁슨(Mel Gilbon)이 감독한 "그리스도의 수난"(The Passion of the Christ)이라는 영화로서, 우리나라에서도 성주간 직전에 개봉되어서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관람하였다.

 

이 영화는 예수가 겟세마니 동산에서 체포되어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 12시간의 과정을 비교적 상세한 고증을 거쳐서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는데, 특히 예수를 매질하는 장면과 십자가에 못 박는 장면은 너무 생생하여 참혹하다는 평을 듣기도 하였다. 광기가 번득이는 형리들의 무자비한 채찍질로 온몸이 피범벅과 만신창이가 되어 무거운 십자가를 힘겹게 지고 가서 골고타에서 처참하게 죽어 가는 예수의 모습을 보면서 이 죽음의 의미에 대해 새롭게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2) 예수는 왜 이렇게 처참한 죽음을 당해야 했는가? 예수는 죄인들의 죄를 너그럽게 용서하는 무한한 자비의 하느님을 선포하였는데, 바로 그 하느님이 인간의 죄에 대한 대가로 아들 예수의 참혹한 십자가 죽음을 원하였단 말인가? 당신의 아들이 그렇게까지 고통스럽게 죽도록 내버려 둔 하느님이 과연 자비로운 분인가?3)

 

 

1. 전통적 구원론과 그에 대한 비판

 

그리스도교는 전통적으로 바오로 서간과 히브리서에 근거를 두고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인간이 범한 죄를 속죄하는 대속의 죽음이라고 믿고 가르쳐 왔다. 이런 믿음은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되었는데, 중세 이후 그리스도교의 구원 이해에 사실상 규범적 모델이 되었던 것은 켄터베리의 안셀모(Anselm of Canterbury, 1033-1109)의 이른바 ‘보속론’(補贖論)이다. 안셀모는 그의 저서 "왜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는가"4)에서 11, 12세기 법철학이 번영하던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 걸맞게 하느님 육화의 필요성, 특히 신인(神人)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왜 반드시 필요했는지를 이성적으로 증명하려고 시도하였다. 그의 사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5)

 

하느님께 항거하는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정의의 질서가 무한히 파괴되고 하느님은 무한히 모독되었다. 이런 주장의 이면에는 모독을 당하는 대상에 따라 그 모독의 비중도 달라진다는 생각이 작용하고 있다. 거지를 모욕할 경우와 한 나라의 왕을 모욕할 경우에 그 결과가 다를 수밖에 없다. 하느님은 무한자이기 때문에 인류가 그에게 가한 모욕도 무한한 무게를 갖는다. 이렇게 침해된 정의는 회복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질서의 신이고 정의의 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이 하느님께 가한 모독의 정도에 상응하려면 무한한 보상이 요구된다. 그러나 이런 보속을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유한자인 인간이 주는 것은 유한한 것뿐이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안셀모는 육화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인간이 할 수 없는 보상을 하느님 스스로 인간이 되시어 행하신다는 것이다. 즉 이미 저질러진 일을 내적으로 극복할 수 없는 단순한 사면으로서가 아니라, 무한자 자신이 인간이 되어 모독을 범한 종족에 자신이 속하면서도 또한 보통 인간에게는 가능하지 않는 무한한 보속의 능력을 지닌 인간으로서, 요구된 속죄를 행한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보면 그리스도는 인간이 하느님을 대상으로 저지른 무한한 모독을 기워 갚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무너진 질서를 다시 바로잡아야 했다.

 

안셀모의 ‘보속론’은 법적인 사고 구조에 기반을 두고서 “죄와 속죄, 일과 보답, 손해와 손해 배상 등의 물적인 등가성(等價性)”으로 구성된 것으로서, 의심의 여지없이 그 당시에 “매혹적인 구원론”이었다.6) 그래서 그의 구원론은 서방 그리스도교의 구원론 이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교리 교육에서도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 이론은 지난 수십 년 이래로 강하게 비판을 받아 왔다.7)

 

20세기 초반의 개신교 신학자 아돌프 폰 하르낙(Adolf von Harnack)은 안셀모의 구원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혹평을 하였다. “안셀모의 좋은 의도와 몇 가지 올바른 인식에도 불구하고 그 이전에는 누구도 이렇게 불량한 이론을 교회의 이론으로 제시하지는 않았다.”8) 요셉 라칭거(Joseph Ratzinger)도 안셀모의 보속 이론이 “그 철칙(鐵則) 같은 논리성으로 신상(神像)을 무시무시하게 비출 수 있다”9)고 하면서, 그릇된 하느님상을 심어 줄 위험이 크다는 것을 지적한다. “어떤 신심 서적들을 보면 십자가에 대한 그리스도 신앙이 가차 없는 정의 때문에 한 인간의 희생, 그것도 자기 아들의 희생을 요구하는 신상을 그려 주고 있다. 사랑의 복음을 믿을 수 없게 하는 그런 정의에 우리는 소스라쳐 얼굴을 돌리게 된다.”10)

 

한스 케쓸러(Hans Kessler)는 좀더 체계적으로 접근한다. 그는 1969년 자신의 박사 학위 논문 "예수 죽음의 신학적 의미"11)에서 안셀모의 구원론이 지닌 취약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1) 하느님의 사랑이 아니라 정의가 구원 사건의 중심을 차지한다. 2) 무한히 자비로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즉 사랑으로 인해서 자신의 아들을 죄인들에게 파견하고 넘겨줌으로써 몸소 능동적으로 구원 사건에 참여한 하느님(참조: 루가 15,11-32; 요한 3,17-18; 로마 5,1-11; 2고린 5,18-19) 대신에 자신의 명예를 우선적으로 생각하여서 손상된 정의의 질서를 복구하기 위해 자신의 외아들의 처참한 죽음을 요구하는 군주와 같은 하느님이 등장한다. 3) 예수의 활동은 단지 그의 죽음을 위한 서곡에 불과하고,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인 것으로 간주된다. 4) 인간은 물론 예수도 정의의 질서를 회복하는 사건에서 객체에 불과하다. 신앙은 이 사건을 긍정하고, 여기에 성사적으로 참여하는 것으로 축소된다. 5) 사실상 예수는 죽기 위해서 세상에 온 것으로서, 그의 도래와 행동은 사회와 세상의 변혁을 위해 아무런 자극을 주지 못한다.12)

 

물론 안셀모의 보속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목소리도 여전히 있다. 예를 들어 기베르트 그레사케(Gibert Greshake)는 이렇게 말한다. “안셀모의 구원론은 서구의 자유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단계이다. 스콜라 신학적인 표현에 쉽게 소스라쳐 놀라지 않고 과거의 언어를 들을 줄 안다면, 안셀모의 구원론의 근본 노선은 인간이 자신을 스스로 자유롭게 하는 해방(Emanzipation)에 대한 질문으로 규정된 근대적 구원 이해의 최초 형태이다. 그러나 안셀모의 취지는 지속되지 못했다. 그의 보속론에서는 계약에 충실하신 하느님 이해에서 출발하여 하느님의 자비와 정의가 서로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었지만, 스코투스주의와 유명론에서는 하느님 자비와 정의가 불행하게 분리되기 시작하였다.”13) 안셀모의 보속론이 잘못된 신상을 심어 줄 수 있음을 지적한 라칭거도 그 이론에 “매우 중요한 성서학적, 인간적 통찰”이 담겨 있다는 것, “성서가 <위하여>라는 낱말로 표현하는 그 진리가 주제가 되어 일관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14)

 

하지만 이런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안셀모의 보속론이 더 이상 예전과 같은 그리스도의 구원 이해에서 규범적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의 변화 속에서 새로운 방향의 구원론이 등장하게 되었는데, 여기에서 역사?비판적 성서주석학의 연구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2. 새로운 방향의 구원론

 

안셀모의 보속론에 대한 비판과 함께 다른 한편에서는 좀더 예수의 삶과 활동에 초점을 둔 구원론이 등장하게 된다. 케쓸러는 신약성서에 나타난 예수의 죽음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분석한 결과, 예수 죽음의 의미에 대한 물음은 예수 자신과 그의 활동이 지니는 의미에 대한 물음이라는 큰 맥락 안에 위치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따라서 그의 견해에 의하면 구원론은 “예수의 활동?죽음의 운명의 일치 관계에서 출발해야 한다. 오직 예수의 활동을 배경으로 할 때만 그의 십자가 죽음이 올바른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예수의 활동은 그의 죽음 이후에는 이 죽음 없이는 더 이상 이해되지 않고 오직 그 죽음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15)

 

예수의 삶과 활동에 초점을 두는 구원론은 “지난 30년 동안의 신학에서 점점 더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게 된 기본 가설, 즉 하느님의 구원 행동은 하느님 나라?소식의 선포와 실천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데에서 출발한다.”16) 케쓸러에 따르면 예수는 가까이 다가온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면서 자신의 전 존재와 활동을 통해서 조건 없이 자애로운 하느님을 현존케 하는 데에 전념하였고, 사람들은 예수를 하느님 사랑의 “지상적 현존 형태”17)로, 다시 말해서 예수를 통해서 해방하고, 격려하며, 일으켜 세우고, 치유하는 하느님을 체험하게 되었다.18) 그리고 “하느님을 이렇게 체험하고 그 결과로서 살아갈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이었다.”19) 위르겐 베르빅(J?urgen Werbick)도 같은 견해를 지닌다.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와 실천을 받아들였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구원하고 해방하는 하느님 체험”이 선사된다.20)

 

하지만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와 실천은 저항과 반발을 불러일으킨다. 예수는 “여기저기서 자기 행동과 능력, 자기 보장, 자력 의화 안에 갇혀 있다고 할 수 있는 태도”를 지닌 이들을 만났는데, “이들은 자신들이 율법 안에서 요구하시는 하느님에 의해서 정당화된다고 보았다. 예수는 이들의 하느님과 이런 태도를 문제시하였고, 이들은 예수와 그가 선포한 하느님을 의문시하였다.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두 부류 사이의 분쟁은 예수에게 폭력적인 십자가 죽음을 안겨 주었다.”21) 한없이 자비로운 하느님을 선포하였던 예수는 율법주의자들의 반대와 도전을 받아 결국 십자가에 죽게 된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그의 행동의 귀결인 셈이다. 예수의 죽음은 “우연이 아니라[…]책임자들의 과오가 내포된―역사적 필연이었다.[…]예수의 포학한 최후는 예수의 선포와 처신의 논리적 귀결이었다. 예수의 수난은 예수의 공격에 대한 율법 · 권리 · 도덕 수호자들의 반격이었다.”22)

 

그러나 예수는 죽음에 이르러서도 자신이 선포한 자비의 하느님께 충실하였고 죄인들을 위한 중개를 끝까지 견지하였다. 그러므로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하느님께 대한 그의 신뢰와 개방 그리고 인간을 위한 그의 삶의 극단적 증거”로서, “비로소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 예수의 활동은 궁극적인 명백성과[…]지속적인 구속력을 얻는다.[…]이렇게 예수는 비로소 끝까지 견지한 신뢰와 사랑 안에서 하느님은 신뢰할 수 있고 자비로운 분이라고 구속력 있게 설명한 것이다.”23)

 

예수의 죽음은 그의 하느님 나라 선포와 실천을 의문에 처하게 했지만, 부활을 통해서 극적인 반전이 이루어진다. 즉 예수 부활은 그가 옳았다는 것을, 하느님은 예수의 반대자가 아니라 예수를, 그의 선포?처신?운명을 긍정하고 받아들였다는 것을 드러낸다.24) 예수 부활은 하느님 나라의 선포와 실천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난 사건이며, 예수 “추종의 호소”로서, “최종적 신빙성을 띤 의인”인 그를 믿고, 그의 복음에 몸 바치며 그의 십자가를 삶의 기준으로 삼으라는 부르심이다.25)

 

케쓸러, 베르빅, 큉이 제시한 구원론은 분명 예수가 마치 죽기 위해서 온 것처럼 오해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죽음 자체에만 의미를 두는 전통적인 구원론과 구별된다. 이들은 예수의 삶과 활동에로 초점을 두면서,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 소식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가운데, 구원과 해방을 선사하는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고 본다. 또한 이들은 예수의 수난과 십자가 죽음도 그의 삶과 활동과의 밀접한 연관 속에서 고찰한다. 즉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그의 하느님 나라 “선포와 처신의 논리적 귀결”로서, 예수는 이 죽음을 “하느님께 대한 그의 신뢰와 개방 그리고 인간을 위한 그의 삶의 극단적 증거”로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방향의 구원론이 과연 바오로 서간과 히브리서의 증언, 즉 예수의 죽음은 인간 구원을 위한 대속의 죽음이라는 증언을 올바로 반영하고 있느냐에 대해서 비판의 목소리가 많다. 예를 들어서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살(Hans Urs von Barlthasar)은 큉의 십자가 이해가,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범죄로 말미암아 죽음에 넘겨지셨다”(로마 4,25)는 바오로 신학에 비추어 볼 때, 불충분하다고 평가한다.26) 또한 케쓸러의 견해도 그리스도교의 구원론을 축소시킨다는 비판을 강력하게 받았다.27) 여기서 전통적인 구원론과 이를 비판하면서 등장한 새로운 구원론 사이에 상당한 긴장이 자리한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3. 두 방향의 구원론

 

하인츠 쉬르만(Heinz Schurmann)은 앞에서 간단히 살펴본 전통적인 구원론과 새로운 경향의 구원론 사이의 긴장이 이미 신약성서 내에서 발견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이미 신약성서에서 첫눈에 봐도 질적으로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상이한 두 가지 구원론을 발견하게 된다. 그 하나는 (우리의 언어로 옮긴다면)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 신자는 예수가 십자가상에서 아버지께 순종하여 자신을 바침으로써,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나를 위해 (그리고 인류 전체를 위해) 대속의 죽음을 당했다는 것을 믿고 확신하는 사람이다. 이런 부활 이후의 ‘십자가 중심의 구원론’이 말하는 바를 객관적으로 표현하자면: 예수의 대속의 죽음만이 우리 죄인을 구제한다; 주관적으로 표현하자면: 예수의 대속의 죽음을 사랑과 희망 안에서 믿는 것만이 우리 죄인들을 구제한다. […]정확하고 비판적으로 연구하는 오늘날의 성서주석학계의 광범위한 영역에서는 상당히 확신 있게 이렇게 주장한다: 예수는 부활 이전에 이런 구원론을 공개적으로 내세우지 않았고, 분명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 자신은 다른 방식의 구원론, 즉 ‘종말론적 구원론’을 선포하였는데, 마르코는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습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마르 1,15ㄴ)……그러면 예수는 교회가 - 바오로와 마르코 이래로, 그리고 바오로와 마르코 이전부터 - 선포해 왔고 지금도 선포하는 것과는 다른 구원론을 선포하였다는 것인가?”28)

 

이어서 쉬르만은 오늘날 적지 않은 이들이 부활 이전의 구원론, 즉 하느님 나라의 선포에 중점을 둔 구원론과 부활 이후의 구원론, 즉 십자가에서의 대속의 죽음에 초점을 둔 구원론이 단지 서로 다를 뿐만 아니라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고 주장한다.29) 대표적으로 페터 피들러(Peter Fiedler)는 두 가지 구원론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에 따르면, 예수가 하느님 나라 소식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죄의 용서를 받고 구원된다고 선포하다가 태도를 바꾸어 자신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선포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라는 것이다. 그는 예수가 자신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 이미 구약성경에도 증언되어 나오는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죄 의지(赦罪意志)를 선포했던 자신의 입장을―말하자면―취소하고, 이제부터는 하느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성사시켜 그로써 속죄를 이루기로 작정하신 것을 과연 이해할 수 있었을지 의문을 제기한다.30) 이렇게 피들러는 예수의 하느님 나라 소식과 구원을 중개하는 죽음의 기대와의 조화 가능성에 의문을 표시하면서, 대속의 죽음에 대한 신약성서의 진술은 부활 이후의 교회의 해석일 뿐이라고 주장한다.31)

 

이와 관련해서 안톤 푁틀레(Anton Vogtle)32)는 좀더 조심스럽게 판단한다. 그는 한편으로는 부활 이후에 이르게 된 예수 죽음의 의미가 “계시적 성격”33)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가 다가온 자신의 죽음을 대속적인 구원의 죽음으로 이해했다는 것은 거의 개연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예수가 처음부터 속죄의 죽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하느님 나라 메시지를 신빙성 있게 선포할 수 없었고, 만일 그랬다면 그의 선포는 단지 가식적인 행동에 불과하기 때문이다.34) 또한 푁틀레는, 예수가 처음부터 자신은 구원을 위해서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확신을 지닌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활동 도중 상황을 직시하고 반성을 깊이 하는 동안에 비로소 이러한 확신에 이르렀다는 주장”35)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견해를 지닌다. “왜냐하면 예수가 이스라엘에게 죄를 기꺼이 용서하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구원 의지(意志)를 받아들이라고 선포하였을 때는 이렇게 제공된 죄 사면의 양식이 어떤 제2 · 제3의 사면 양식에 의해서 능가되리라든가 수정되리라는 전망 안에서 선포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36) 푁틀레에 따르면, 죽음을 근거로 한 용서란 생각은 하느님 나라의 소식을 근거로 한 용서란 생각과 비교할 때 “본질적으로 새로운, 그리고 다른 양상을 띠는 ‘죄의 용서’임에는 틀림이 없다.”37)

 

하지만 쉬르만은 예수가 선포한 ‘종말론적 구원론’과 부활 이후 교회의 ‘십자가 중심의 구원론’을 대립적으로 보는 것을 거부한다. 사실 부활 이전의 예수의 설교를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부활 이후 교회의 복음 선포를 통해서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두 가지 구원론을 대립적으로 본다는 것은 큰 무리라고 하겠다.38)

 

라이문트 슈바거는 이런 문제를 분명하게 의식하고서 두 가지 구원론의 조화를 시도한다. 그는 현대의 많은 성서학자들이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와 관련해서 ‘종말론적 구원론’에 대해 말하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고 여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이런 방식의 구원론에서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단지 모범으로만 제시될 뿐이고, 따라서 전래된 구원론과 성서의 메시지를 축소한다는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고 주장한다.39) 그래서 슈바거는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를 온전히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전통적인 ‘십자가 중심의 구원론’을 결코 축소하지 않는 길을 모색하는데, 방법적으로는 예수의 전 생애를 하나의 드라마(Drama)로 보면서 5단계, 즉 5막(幕, Akt)으로 구분해서 고찰한다.40)

 

 

4. 구원 드라마 안에서의 예수

 

4.1. 제1막: 가까이 다가온 하느님의 다스림

 

슈바거는 역사?비판적 성서주석학의 연구 결과에 의거해서 예수의 말씀과 행동의 중심은 가까이 다가온 하느님의 다스림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 “예수의 메시지 전체, 그의 하느님 선포, 율법 해석, 회개의 촉구는 가까이 다가온 하느님의 다스림이라는 큰 틀 안에 위치하였는데, 하느님의 다스림을 통해서 하느님의 일반적인 본질이 아니라 그의 새롭고, 예견할 수 없는 행동이 고지(告知)되었다.”41)

 

슈바거에 따르면 예수와 함께 시작된 하느님의 “새롭고, 예견할 수 없는 행동”이란 하느님이 죄인을 새로운 방식으로 대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의 새로운 행동이 지닌 고유한 특성은 그 자신의 행동에서 분명하게 밝혀진다. 그는 죄인들, 세리들과 창녀들에게 다가가는데, 그의 처신은 ‘보아라,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벗이로구나’(마태 11,19)라는 비난을 받을 정도로 독특하였다.”42) 예수는 자신의 이런 독특한 행동, 특히 죄인들과 함께한 식사 공동체를 비난하는 이들에 대해 여러 가지 비유들을(예를 들어서 루가 15,1-32) 통해 대답한다. 여기서 예수가 ‘압바, 아버지’라고 부른43) 하느님은 당신의 원수인 죄인들을 선행(先行)하는 사랑으로 만나고, 루가 복음 19장 1-10절이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처럼, 그들이 회개하기도 전에 먼저 구원을 제시하는 분이라는 것이 드러난다.44) 헬무트 메르클라인(Helmut Merklein)이 지적한 대로, “인간이 하느님 앞에 어떻게 서 있든, 회개의 준비가 되어 있든, 되어 있지 않든 간에 하느님은 우선 전제나 조건 없이 용서하신다”45)는 것이다.

 

한마디로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의 새로운 행동에는 “용서가 시간적으로, 논리적으로 회개를 선행한다.”46) 이는 구원과 회개의 순서가 바뀌게 된 것을 의미하는데, 여기서 당시 유다인들의 하느님 이해와의 차별성이 드러난다. “유다인의 생각에는 회개가 첫 번째의 것이며, 죄인들에게 은총의 희망을 허락하는 전제라면, 이제는 은총에서 회개가 나온다. 풍성한 주님의 식탁에 앉은 이들은 가난한 자, 불구자, 눈먼 자, 절름발이들이지 이미 절반 정도 나은 사람들이 아니다. 예수와 함께 식탁에 앉은 세리와 죄인들은―집으로 돌아온 탕자의 경우처럼― 사전에 이들이 개선된 상태에 있는지에 대해 질문을 받지 않는다.”47)

 

하지만 슈바거는 비록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의 용서와 구원을 얻기 위해 전제 조건은 없지만, 뒤따르는 조건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예수는 처음부터 하느님의 다스림에 대한 선포에 회개하라는 권유를 연결 지었다.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다가 왔습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마르 1,15). 가까이 다가온 하느님의 다스림의 선포는 곧바로 회개의 요구로 이어진다.”48) 그래서 슈바거에 따르면, “하느님은 우선 ‘전제나 조건 없이’ 용서하신다는 메르클라인의 진술”에 좀더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서 “예수는 선행하는 조건을 내세우지 않지만, 뒤따르는 조건을 요구한다”는 말이 첨가되어야 한다.49) 이 뒤따르는 조건이란 바로 회개로서, 이는 일차적으로 이러저러한 계명의 준수가 아니라 두 가지 근본적으로 다른 행동들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인데,50) 내용적으로는 무조건적으로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닮은 행동을 하는 것이다. “이 회개의 기본적 형태는 하느님 나라 선포에서 나타난 하느님, 예수의 아버지에게로 온전히 돌아서는 것”51) “하느님의 새로운 척도”를 받아들여 이웃을 향한 자신의 행동 척도로 삼는 것52)으로서, 이런 점은 ‘산상수훈’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여기에는 폭력적인 보복의 법칙에서 떠나고, 악에 똑같은 악으로 대항하지 말라는 요구, 더 나아가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요구(마태 5,38-47)가 포함되어 있는데, 예수는 이런 비폭력과 원수 사랑을 바로 아버지 하느님에 근거해서 요구한다.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여러분도 완전해야 합니다”(마태 5,48).

 

예수의 이런 철저한 회개의 요구는 예수의 본질적 사명, 즉 종말의 하느님 백성의 소집과 밀접한 연관 관계에 있다. 요아킴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가 밝혀 낸 바53)대로 예수는 하느님 다스림의 선포와 행동, 특히 식사 공동체를 통해서 새로운 하느님 백성의 형성을 목표로 삼았고, 바로 이것을 위해 각자의 회개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새로운 이스라엘은 익명의 집단이 아니라 각자의 회개를 포함한다. 예수는 처음부터 회개의 촉구를 하느님 다스림에 대한 선포와 결부시켰다.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습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마르 1,15).”54)

 

슈바거에 따르면, 회개는 예수의 하느님 다스림의 선포가 지향하는 종말의 하느님 백성의 형성에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다. “인간들이 산상수훈에서 요구하는 바대로 행동한다면, 새로운 백성은 실제로 존재하게 된다.”55) 이런 배경에서 슈바거는 하느님의 다스림이 단지 일방적인 용서와 무조건적 구원의 제안으로 끝나지 않고 인간의 응답과 회개의 요구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느님의 다스림은 하나의 사건이었는데, 일차적으로는 하느님의 죄인에 대한 새로운 사랑에 기반을 둔 사건이지만, 그러나 이차적으로는 청중들의 준비도 포함된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었다.”56)

 

그러나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는 불충분하게 수용되었고,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층으로부터는 반대를 받았으며, 마침내는 전체적으로 거부되었다. 슈바거는 예수가 자신의 선포에 대한 거부의 상황을 분명히 인식하였고, 이에 대해 응답을 했다고 주장하는데, 바로 이것이 예수의 구원 드라마의 제2막을 이룬다.

 

4.2. 제2막: 하느님의 다스림의 거부와 심판의 말씀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가 하느님의 다스림 선포를 통해 제시한 하느님의 무조건적 구원 의지를 받아들여 회개해야 했지만, 결국 거절하였다. 슈바거는 폴락(A. Polag)의 연구에 근거해서 이 거절로 인해 새로운 상황이 형성되었다고 주장한다. 폴락은 마태오와 루가 복음에 공통으로 전해지는 ‘예수 어록’(Q-문헌)을 세밀하게 분석한 결과, 예수의 말씀이 두 가지 상황에 상응해서 두 부류의 말씀으로 구분된다는 것을 밝혀 낸다. “어록 자료에서는 말하는 이의 상황과 관련해서 두 가지 진술 분야로 구분된다. 한편은 약속과 기대 속에서 구원의 메시지가 공개적으로 선포되는 상황이다. 다른 편은 메시지 수신인 대다수가 메시지를 거부하였고, 따라서 말하는 이는 거부의 상황에 놓이게 된다.”57)

 

슈바거는 바로 이 거부의 상황에 대해서 예수가 심판의 말씀으로 응답했다고 주장한다.58) 하지만 그는 이 말씀이 제안이 거부됨으로 말미암아 받은 모욕으로 인한 감정적 대응이라는 개인적 차원으로, 또는 예수의 “중대한 성격 결함”을 드러낸 것59)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심판의 말씀은 가까이 다가온 하느님의 다스림을 통한 하느님의 무조건적 용서의 “제안을 거부한 것에 대한 귀결을 보여 주는 것”이며, 청중들의 부정적인 “결단의 신학적 결론”을 분명하게 드러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60)

 

예수가 선포한 조건 없이 용서하는 하느님을 받아들여 그분의 행동 양식을 따르면 구원된 삶이 가능하고, 새로운 하느님 백성이 형성될 것이다. 그러나 받아들이지 않으면, 인간은 보상과 보복의 원칙이 지배하는 기존의 옛 질서에 머물러 비구원의 상황 속에 자기 스스로를 가두어 두는 결과를 초래하는데, 이를 밝혀 주는 것이 심판의 말씀이다. 달리 말하면, 예수가 선포한 심판은 인간이 자기 스스로를 심판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르코 복음 4장 24절에서 “예수는 인간 스스로 척도를 세우고 그에 따라 자신이 계측(計測)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심판받음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외부의 재판 기관을 통해 벌이 임의로 확정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스스로 사용하고 정한 척도, 어떻게 그리고 무엇이 그에게 주어지느냐는 것이다.”61) 이런 점은 마태 복음 18장 23~35절의 무자비한 종의 비유에서 명확히 드러난다.62)

 

이 비유에서 왕은 자신에게 엄청난 빚을 진 종에게 채무를 탕감해 주는데, 채무 탕감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지 않고, 단지 그 종이 자신이 입은 은혜에 상응하게 새로운 방식으로 동료 종들을 대하기를 기대했을 뿐이다. 하지만 왕의 기대와는 달리 빚을 탕감받은 종은 자신의 동료와의 관계에서 자신이 체험한 새로운 규범이 아니라 보상과 보복을 요구하는 옛 규범을 고집하였고, 결국 그는 다시 왕에게 불려 와 이런 말을 들어야 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겨야 할 줄 몰랐더냐?”(마태 18,33) 그리고 이미 탕감받은 빚을 다시 다 갚아야 했다. 왕으로부터 무조건적 용서라는 선물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옛 생활 규범인 보상과 보복에 머물렀던 종은 바로 자신이 버리지 못한 보상과 보복의 원칙에 따라 심판을 받았고, 이런 의미에서 하느님의 다스림을 거부하는 것은 자신이 정한 척도에 따라 스스로를 심판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슈바거는 하느님의 다스림은 죄인에 대한 하느님의 최종적, 무조건적 구원 제시로서, 이를 거부하는 것은 인간 스스로 선택한 비구원의 상황, 즉 지옥의 상황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이 하느님의 무조건적 용서의 수용과 회개를 거부하고 “보상과 보복의 규범에 얽매여 있다면, 이미 받은 것을 다시 잃어버리고, 보복과 보상의 심판 과정에 넘겨져 마지막 한 푼까지 다 갚아야 한다. 모두는 빚을 진 사람이기 때문에 누구도 이 심판 과정을 이겨 내지 못한다. 보복의 요구는 점점 더 커지고, 이런 과정이 확장 · 고조되면 그 종착점은 오직 지옥이라는 말로 불릴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무자비한 종은 ‘형리’(마태 18,34)에게 넘겨지고, 달란트의 비유에서 세 번째 종은 ‘바깥 어둠 속’(마태 25,30)으로 쫓겨난다.”63)

 

이렇게 볼 때 심판의 말씀은 결코 하느님 나라 소식을 통한 구원 약속의 취소가 아니라, 오히려 이를 떠나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히는 데에 그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이런 경고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결국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를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았다. 주인의 아들까지도 죽이는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마르 12,1-12)에서 드러나듯이 하느님 나라 소식은 거부당했고, 그 선포자인 예수는 배척을 받게 되었다. 따라서 하느님의 새로운 행동, 즉 하느님의 무조건적 용서와 구원의 제시를 통해 백성을 모으려 했던 예수의 사명은 실패로 끝날 위험에 처하였다. 이는 예수가 예루살렘을 탄식하면서 한 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예루살렘, 예루살렘, 예언자들을 죽이고 보냄 받은 사람들을 돌로 치는 것아! 암탉이 병아리들을 날개 아래 모으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식을 모으려 했던가! 그러나 당신네는 끝내 마다했소”(마태 23,37).64)

 

하느님 나라 메시지의 거절에 대한 당연한 귀결은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의 마지막 구절이 암시하듯이(마르 12,9) 이스라엘 백성에게 대한 심판이다.65) 이로써 최종적 구원 전달자로서의 예수에 대해서 심각한 질문이 제기된다. 슈바거는 루돌프 페쉬(Rudolf Pesch)의 견해를 빌려 이렇게 묻는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무조건적 구원 의지를 선포한 마지막 사자(使者)를 거부함으로써 배척되지 않는가? 종말론적 구원 전달자가 이렇게 역사적?실제적으로는 비구원의 전달자가 되는 것인가?”66) 또한 예수가 선포한 자비의 하느님에 대한 질문도 피할 수 없다. “진노한 하느님이 인간들을 단죄하는 것과 혹은 ‘자비로운’ 하느님이 자신의 피조물이 거의 필연적으로 스스로를 단죄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과 과연 무슨 차이가 있는가? 그 결과는 말할 것도 없이 같다.”67) 그러나 실제로 일어난 것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심판을 선포한 예수 자신이 심판을 받아 십자가에서 죽은 사건이었다. 이것이 예수 드라마의 제3막을 이룬다.

 

4.3. 제3막: 십자가 - 속죄의 죽음

 

슈바거의 주장에 따르면, 예수는 자신이 선포한 하느님의 다스림이 거부된 상황에서 “스스로에게 명시적으로 물음을 던져야 했는데, 그 물음은 다가오는 하느님의 다스림과 함께 절대적이라고 선포한 구원이 어떻게 하면 이를 받아들였어야만 하는 이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실현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68) 그리고 예수는 자신의 적대 세력 앞에서 구태의연한 “복수의 메커니즘에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악이 배가(倍加)되는 것에 대해, 다가오는 죽음을 아무런 저항도 없이 수용할 자세를 갖출 정도까지 자신의 사랑을 고양(高揚)시키는 것으로 대답하였다.”69)

 

그러면 이 죽음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슈바거는 쉬르만, 페쉬, 팟취(H. Patsch) 등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예수가 자신의 죽음을 죄인의 구원을 위한 속죄의 죽음으로 이해했다고 받아들인다.70) 하지만 슈바거는 이 속죄의 죽음이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와 상충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예수는 심판의 설교를 통해서 하느님의 선하심이 어느 시점에서 끝나고 그 반대의 것으로 바뀌었음을 가르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새로운 삶의 규범으로서 오직 무한한 용서를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는 하느님의 다스림(Gottesherrschaft)에 자신을 개방하지 않으면 모든 이는 보복의 다스림(Vergeltungsherrschaft)이란 법칙 아래 머물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이런 심판의 이해에서는 속죄란 신적인 보상 질서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71) 구체적으로, 예수의 속죄 행동은 “하늘의 아버지께 용서를 얻기 위한 보상의 실천이 아니라, 하느님의 다스림을 받아들여야 했으나 이를 거부한 이들을 대신해서 한 행동이었다.”72) 이런 점은 예수가 자신의 수난과 죽음을 당하면서 보인 행동에서 잘 드러난다.

 

예수는 가까이 다가온 하느님의 다스림을 선포하면서 하느님을 비폭력과 원수 사랑의 하느님으로 이해하고, 인간은 하느님의 이런 완전성을 닮아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그는 자신의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는 반대자들의 공격에 대해 이 요구를 스스로 실천하였다.73) 베드로가 칼을 빼들고 예수가 체포되는 것을 막으려 하자 예수는 이를 저지한다. “칼을 도로 꽂으시오. 칼을 잡는 자는 칼로 망하는 법입니다”(마태 26,52). 또한 십자가에서 자신을 못 박아 죽이는 원수들을 위해 기도한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스스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옵니다”(루가 23,34). 이렇게 볼 때 예수는 하느님의 다스림을 받아들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부한 이들을 대신해서 홀로 하느님의 다스림을 실현한 것이다.

 

더 나아가서 예수는 죄인들이 겪어야 할 자기 심판의 운명을 대신한다. 심판에 대한 예수의 말씀 중에서 하느님의 다스림을 거부한 무자비한 종은 “형리”(마태 18,34)에게 넘겨지고, 달란트의 비유에서 세 번째 종은 “바깥 어둠 속”(마태 25,30)으로 쫓겨난다. 그런데 예수 자신이 형리에게 넘겨지기 전에 겟세마니 동산에서 “떨고 번민”하고 그의 영혼이 “근심에 싸여 죽을 지경”에 이르며(마르 14,33~34), 십자가 위에서는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마르 15,34)라고 외친 데서 드러나듯이 예수는 하느님의 부재(不在)라는 어둠, 지옥의 체험을 겪어야 했다.

 

예수는 이렇게 하느님의 다스림을 받아들여야 했으나 거절한 이들의 처지에서 행동하였고, 그들이 겪어야 할 심판의 운명을 몸소 겪었다. 슈바거에 따르면, 하느님의 무조건적 구원 의지의 선포자인 예수는 자신의 선포에 대한 거부의 결과도 짊어짐으로써 완고한 인간에게 다시 한번 구원 가능성을 열어 주려고 하였다. 예수는 죄인들에게 자신을 맡김으로써 “자신이 그들의 어둠의 세계(죽음의 공포, 하느님의 부재) 안으로 들어가도록 내버려 두는데, 이는 어둠의 세계를 그 내부로부터 다시 한번 아버지를 향해 개방하기 위함이다.”74)

 

슈바거는 예수가 하느님의 부재라는 어둠을 겪었다고 해서 아버지 하느님이 예수의 반대자 편에서 그를 직접적으로 내친 것은 아니라고 본다. 하느님은 당신의 절대적 구원 의지가 거부된 상황에서 다시 한번 죄인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기 위해서 예수에게 그런 길을 허락하신 것일 뿐이다. “분명 이 깊은 밤은 아버지가 이를 허락하였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자비의 아버지인 하느님이 전제 군주로 돌변하여 예수에게 직접 타격을 가했다는 결론을 도출해서는 안 된다. 이 시간에도 (그의 반대자들의 행동이 아니라) 예수의 체험과 그의 행동이 하느님을 드러낸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하느님은 이전의 여러 비유에서보다 더 은밀하게 자신을 표명하지만, 그분은 여전히 예수가 전적으로 신뢰하는 압바(abba)로 머물렀다.”75) 그러므로 아버지는 죄인의 손을 빌려 아들을 심판하고 벌하기 위해서 그를 넘겨준 것이 아니다. “심판은 아버지로부터가 아니라 인간들로부터 왔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은 단지 아들이 죄인들을 끝까지 뒤쫓아 가서 그들의 버림받은 처지를 나누고, 그럼으로써 그들이 완고함의 세계에서, 하느님과의 멀어짐에서 벗어나 다시 한번 회개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과 관련된다.”76)

 

예수는 자신의 죽음에 구원의 의미를 부여했다고 해서 이전에 선포한 하느님의 다스림 소식을 수정하거나 취소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하느님의 다스림의 핵심 내용, 즉 비폭력과 원수 사랑의 하느님을 마지막까지 계시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 죄인들이 받았어야 할 단죄의 고통을 당하고, 자신을 못 박는 원수들을 위해 기도를 바쳤다. 즉 예수는 이들과 일치하여77) 하느님께 간청하고 그들과 하나 되어 죽을 정도로 그들이 당해야 할 곤경을 자신의 것으로 삼음으로써, 이들에게 다시 한번 구원의 길을 열어 주고자 하였다.

 

4.4. 제4막: 예수 부활 - 하느님의 판결

 

부활 사건은 예수의 반대자들이 아니라 예수가 옳았다는 것을 드러내는 하느님의 판결이다. 하지만 슈바거는 부활 사건이 단지 예수가 옳고 그의 반대자들이 죄인임을 드러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궁극적으로는 죄인들을 위한 사건임을 강조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판결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적대자들을 위해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바친 아들을 위한 결정이다. 그러므로 이 판결은 좀더 깊이 본다면, 죄인들을 위한 결정이다.”78)

 

예수는 하느님의 다스림을 거부하여 자기 심판의 운명에 놓였던 죄인들을 대신해서 행동하였고, 하느님은 이들에게 다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었다. 하느님은 위기의 순간에 나약함과 두려움으로 인해 하느님의 다스림의 선포자를 저버린 제자들에게 “여러분에게 평화”(루가 24, 36; 요한 20,19.26 참조)라는 메시지와 함께 부활한 예수를 돌려보냈다. 이는 “단지 예수의 메시지에 대한 추인만이 아니라 새로운 요소, 즉 진정한 용서의 제안을 거부하고 아들을 배척한 이들에 대한 용서를 포함한다. 부활의 평화의 메시지를 통해서 하느님 나라 메시지에서 선포되었던 용서의 준비가 배가(倍加)되었고, 처음에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은 이들을 위한 용서가 이루어졌다.”79)

 

슈바거는 부활 사건을 통한 하느님의 행동을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마르 12,1-12)와 비교한다.80) 이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은 자신의 종들에게 위해를 가하고 그들을 죽이기까지 하는 소작인들을 참아 주면서 마지막에는 자신의 아들까지도 위험에 처하게 할 정도로 관대한 인물로 묘사되지만, 결국 주인의 관대함은 소작인들이 아들을 죽이는 것과 함께 끝이 난다. 그러나 부활 사건을 통해 아버지 하느님은 완고하게 아들을 반대하고 죽였던 이들에게 다시 한번 구원을 제시함으로써 비유에 나타난 포도원 주인과는 달리 행동하였다. 즉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해서 예수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면서 드러낸 하느님의 자비가 인간의 완고함 앞에서도 취소되지 않고 오히려 배가(倍加)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4.5. 제5막: 성령 강림과 새로운 공동체의 형성

 

슈바거는 성령 강림을 예수 부활 이후의 시간과 구분되는 사건으로 보면서, 성령 강림 사건에 독자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부활 이후의 발현의 시간은 아직 불안과 두려움의 시간”이었고, 이런 요소들은 사실상 모든 부활 사화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마르코 복음에 따르면 예수의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은 “벌벌 떨며 넋을 잃었고”, 두려워하였다(마르 16,8). 마태 복음은 갈릴래아의 산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본 열한 제자들 중에서 몇몇이 “의심을 품었다”(마태 28,17)고 전한다. 루가 복음에 의하면 예루살렘에서 열한 제자들은 부활한 예수의 발현을 보면서 “무서워 떨며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했다(루가 24,37). 요한 복음에서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 문을 잠그고 있었다(요한 20, 19.26).81)

 

하지만 이런 제자들은 성령 강림 이후에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그들은 더 이상 두려움 없이 십자가에 죽었다 부활한 예수를 메시아로 공개적으로 고백하게 된다. 이런 변화는 바로 성령의 작용으로 인한 것이다. 슈바거는 성령의 은사인 이상한 언어가 제자들의 내면에서 저절로 터져 나왔다는 데에 주목하면서, 성령은 인간의 내면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고 주장한다. 성령 체험은 “무엇보다도 개개인의 내면에 이르러서 새로운 확신을 만들어 주어 세상과의 대결을 비로소 가능하게 하였음에 틀림이 없다. 사도들이 확신 있게 행동했다는 것(사도 2,29; 4,13.29.31; 28,31)을 여러 번 강조하는 사도행전은 이 새로운 행동을 지금까지 제자들에 대해 보도되었던 것과 명확하게 구별한다. 성령의 시간은 각자의 내면을 변화시키는 성령 체험에 기인한 용기의 시간으로서 예수의 시간과 분명히 구분된다.”82)

 

이렇게 성령은 인간 각자의 내면 깊은 곳에 도달하는 능력을 지녔고, 이 능력을 통해서 제자들은 비로소 인간에 대한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예수가 지향하였던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성령 강림 후에 형성된 신앙인의 공동체는 여러 가지 구체적인 문제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언어적, 종교적 대립의 극복을 목표로 노력하였던 것이다(참조: 갈라 3,28; 사도 2,46; 4,32). 슈바거는 이런 새로운 공동체의 형성은 바로 예수의 십자가상 헌신에 대한 열매라고 주장한다. “예수가 하느님의 다스림을 선포하면서 시작된 새로운 공동체의 소집은 처음에는 인간들의 저항 때문에 실패했다. 더 나아가서 반대의 소집, 하느님의 사자(使者)에 반대하는 여러 가지 세력들의 규합이 이루어졌는데, 이에 대해 그[예수]는 많은 이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으로 응답하였다. 부활 이후의 새로운 소집 -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한 성령 - 은 이런 헌신에 대한 열매로 이해되어야 한다.”83)

 

 

5. 맺는말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슈바거는 드라마의 모델을 빌려 예수의 생애를 5단계로 구분하면서 구원론을 전개한다. 그는 우선 하느님의 구원 행동은 하느님의 다스림에 대한 예수의 선포와 실천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데에서 출발한다. 즉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죄인을 조건 없이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이런 하느님을 닮은 행동을 할 때 구원 공동체인 새로운 하느님 백성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예수와 그의 선포를 거부하여, 예수가 심판의 말씀을 통해서 밝혀 준 바와 같이 자기 심판의 운명에 놓이게 된다. 이런 부정적인 상황에 직면해서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위해 예수는 십자가의 길을 가게 된다.

 

슈바거는 예수가 자신의 죽음에 속죄의 의미를 부여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가까이 다가온 하느님의 다스림에 기반을 둔 조건 없는 하느님의 용서를 취소하거나 수정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 메시지를 마땅히 받아들여야 했으나 이를 거부함으로써 자기 심판의 위기에 처한 죄인들을 위해서, 십자가 죽음을 받아들인 것이다. 즉 예수는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 홀로, 죄인들을 대신해서 하느님 나라의 핵심적인 메시지인 비폭력과 원수 사랑을 실천하였고, 그들이 마땅히 겪어야 할 자기 심판의 세계(죽음의 공포, 하느님의 부재)에 들어감으로써 죄인들에게 다시 구원의 길을 열어 주려고 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속죄란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손상된 하느님의 정의를 복구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 선포를 통한 하느님의 최종적 구원 제안마저도 저버린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그들을 대신해서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를 실천하고, 그 거부에 대한 결과를 짊어진 것을 의미한다.

 

이런 속죄의 죽음에 대해 아버지 하느님은 예수의 부활과 성령 강림으로 대답하였다. 아버지는 아들을 죽음에서 부활시킴으로써 하느님의 다스림을 거부하였던 이들에게 재차 구원을 제시하였고, 성령의 파견을 통해서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와 함께 시작하였지만 인간의 거부로 말미암아 실패했던 구원 공동체인 하느님 백성의 새로운 소집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슈바거의 구원론은 물론 비판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서 피들러는 조직 신학과 역사?비판적 성서주석학을 드라마적 주석학을 통해 중개하려는 슈바거의 시도는 “역사적 실태를 (더 이상)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이미 주어진 모델 안에 억지로 꿰어 맞추는 것”84)이라고 비판한다. 즉 슈바거가 어떤 전체적인 그림을 미리 갖고서 개개의 성서 구절을 여기에 맞게 해석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슈바거는 역사?비판적인 성서학에서도 사실상 광범위하게 개개의 질문들이 그 배경에 있는 ‘전체적인 그림’(Gesamtbild)에 의해 좌우되고, 이 그림이 예수에 대한 연구를 인도한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자신의 고유한 전체적 그림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밝히고, 이에 대해 비판까지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의도라고 대답한다.85) 사실상 모든 이들이 비록 의식하지는 못하더라도 나름대로의 전체적인 그림을 갖고서 세부 작업을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슈바거의 방법론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저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슈바거의 구원 이해는 현대 신학에서 거부할 수 없는 추세인 역사?비판적 성서학의 결과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에 근거한 ‘종말론적 구원론’에 간과하지 않으면서도, 그리스도교 신학의 전통적인 구원 이해인 ‘십자가 중심의 구원론’을 온전히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충분히 주목받을 가치가 있다.

 

특히 신약성서에서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하는 예수의 심판의 말씀을 애써 간과하거나, 부활 이후의 교회의 해석이라고 하여 의미를 축소시키지 않고 고유한 의미를 부여한 점은 슈바거 이론의 강점이라고 하겠다. 또한 인간의 나약함과 완고함을 극복하는 데 있어서 성령의 독자적인 역할을 인정함으로써 구원론에서 성령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돋보이는 시도라고 평가된다.

 

[신학과 사상 48호 /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홈페이지 신학강좌 자료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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