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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성 베네딕도회의 한국 선교와 문화 활동 종합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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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5-18 ㅣ No.692

[특집 2009년도 심포지엄] 성 베네딕도회의 한국 선교와 문화 활동


종합토론

 

 

사회자 

김구인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토론자 

권오만 교수|서울시립대학교 

김복희 수녀|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김영철 편집장|분도출판사 

김영태 교수|영남대학교 

박문정 수녀|인보성체수도회 

오윤교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이성근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이유재 교수|독일 본 대학교 

장정란 교수|가톨릭대학교 

정선이 교수|서울여자간호대학 

 

 

김구인 : 안녕하십니까? 종합토론 사회를 맡은 김구인 신부입니다. 지금까지 빨리 달려와서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천천히 가봅시다. 여러 연구자들께서 수도원의 역사를 이렇게 정리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이사장님 이하 연구자, 직원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종합토론을 시작하겠습니다. 종합토론을 하기에 앞서 참석하신 분들에게 발표에 대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몇 가지 질문이 올라와 있는데요, 먼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질문은 원산에서는 “성 베네딕도 선교 수도원”이라고 하고 왜관에서는 “성 베네딕도 수도원”이라고 했는데, 그 차이가 무엇인지, 왜 ‘선교’라는 단어를 뺐는지에 대한 질문입니다. 그러면 어느 분이 대답하실 수 있으십니까? 인영균 신부님이 말씀해 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인영균 : 이것은 제 몫이 아니고. 선지훈 신부님의 몫인 것 같습니다. 선 신부님께 마이크를 옮기겠습니다. 저는 전례 담당입니다. 

 

김구인 : 선지훈 신부님이 대답하실 수 있으시다니까 선 신부님이 대답해 주십시오. 

 

선지훈 : 베네딕도 연합회라는 것은 여러 베네딕도회를 같은 지향점을 가지고 지역에 함께 있는 여러 수도원을 한 묶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틸리아 연합회는 같은 지향을 가진 여러 수도원이 한 연합회를 형성하고 있고, 이러한 연합회가 21개가 있다가 현재는 20개가 있습니다. 오틸리아 연합회는 1884년에 보이론 수도원 출신인 안드레아스 암라인 신부님의 이상에 의해 창립되었습니다. 암라인 신부님의 이상은 중세 때 베네딕도 수도자들이 한 도시에 가서 수도원을 짓고 수도원을 중심으로 해서 학교와 농장을 만들어 한 도시를 이루는 중세의 모델, 중세에 여러 곳을 방문하면서 전교하는 베네딕도 선교사들의 모델,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선교의 정신을 가진 베네딕도회를 창립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수도원의 단체 이름을 “베네딕도 선교 공동체”라는 한 단체로 출발했습니다. 암라인 신부님이 총장 사임 후 보이론 수도원의 아빠스가 와서 조금 덜 베네딕회적인 베네딕도 선교회를 정식으로 베네딕도회답게 만드는 작업을 하셨습니다. 그 시기에는 어떻게 불렀는가 하면 “베네딕도회 선교사”라 불렀습니다. 후기에 가면 처음에는 “베네딕도회 선교사”라고 하다가, 나중에는 “선교 베네딕도회”라고 바뀝니다. 독일어 문법상 뒤에 나오는 단어가 종(從)을 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합회 사람들이 어느 시점인지 정확하지 않지만 자의식이 바뀌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연합회의 발전을 그렇게 발전했다 해더라도 우리 연합회의 특성상 포교라는 단어를 쉽게 포기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논문을 쓸 때 요즘은 “선교 베네딕도회”를 고집해서 우리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 쓰고 있습니다. 갑작스럽게 제가 답변을 맡아서 이해가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으로 답변을 마치겠습니다. 

 

김구인 : 고맙습니다. 좀 더 길게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만 관례로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제가 조금 보충해 드리면 연합회(congregation)라는 말은 수도회라 하는데, 우리는 그것을 특별히 연합회라는 용어로 씁니다. 우리만 쓰는 용어입니다. 예전에는 그것을 ‘수족’이라 번역했는데, 수족이 아니라 그냥 ‘연합회’, ‘회’라 쓰고 있습니다. 

 

오윤교 : 사회자님, 제가 잠깐 보충 발언해도 될까요. 명칭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냥 없앤 것이 아니라, 우리 연합회의 가장 중요한 의결기구인 총회, 제 기억으로는 1966년의 제10차 총회에서 “외방 선교를 위한 베네딕도회 오틸리아 연합회”라는 공식 명칭에서 “외방 선교를 위한”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사실 우리 성 베네딕도회 오틸리아 연합회가 역사 안에 살아오면서 베네딕도회적 측면과 선교적인 측면, 즉 “안으로는 수도승, 밖으로는 사도”라는 측면에 대해서 실질적으로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공식 명칭에서 ‘선교’란 수식어를 없앤 것은 우리가 과연 어떤 사람인가를 시간이 흐르면서 자각하게 된 결과입니다. 이 수식어를 명칭에서 없앤 것은 우리의 선교적인 삶의 요소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안과 밖, 즉 수도승적인 요소와 선교적인 요소가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이지만, 그것은 우리가 오늘 연중 제23주간 토요일 복음인 루카 복음 6, 45에서 보듯이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는다는 말씀대로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본질적인 것은 베네딕도회원으로서 선교하는 것이라는 것을 재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즉 베네딕도회적 요소와 선교적인 요소라는 두 개의 측면은 서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지만 구별할 수는 있는데, 보다 더 우선적인 것은 베네딕도회 수도승이라는 것이고, 이 두 측면의 조화와 일치가 성 베네딕도회 오틸리아 연합회원인 우리의 신분(Identification)을 구성하지만 베네딕도회 수도승이라는 우리의 정체성(Identity)이 우선되어야 함을 깨달은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선후가 뒤바뀔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명칭 문제에 대해서는 지버(Godfrey Sieber) 아빠스가 쓴 우리 연합회의 역사서인 The Benedictine Congregation of St. Ottilien의 총회에 대한 부분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김구인 : 고맙습니다. 충분한 답변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더 의문이 되시면 개인적으로 더 보충해 드리겠습니다.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마르 교수나 이유재 교수께 질문합니다. “불교의 승려가 사회적으로 높은 위상을 차지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수도생에 대한 사회적 인정도 높지 않았다”고 이유재 교수의 자료집 183쪽에 이런 말이 들어 있는데, 제가 보기에는 불교 이외에도 유교, 고유 종교, 화랑도 등에서도 수도, 수행, 수양에 대해 높이 평가해 온 전통이 있습니다. 독신 수도 생활의 전통도 오래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베네딕도회가 먼저 진출했던 아프리카보다 한국에서 훨씬 더 빨리 베네딕도 수도 생활이 한국과 한국인들에게 인정을 받았고, 초창기부터 한국인 수도자들이 나왔다고 봅니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 마르 교수님이나 이유재 교수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그러면 마르 교수님이 대답해 주십시오. 이유재 교수님이 통역을 맡아 주십시오. 

 

마르 박사(통역 : 이유재) : 매우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질문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동아시아에서 수도자의 전통이 있었다는 것이 베네딕도회가 진출하는 데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입니다. 제가 판단하기에는 동아시아의 수도 생활의 전통이 분도회에 확연히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입니다. 이미 1911년의 독일 선교지 《미시온스블래터》에 퀴겔겐 신부님께서 불교 사찰을 방문하여 쓴 보고서가 있습니다. 퀴겔겐 신부님께서도 불교 승려에 대해 존경심을 가지고 대했고, 사찰과 승려들의 사진을 찍고 《미시온스블래터》에 기고했습니다. 하지만 불교 승려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베네딕도회에서 수양,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노동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불교 측에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불교 측에서도 다른 방향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초기에 불교 측에서는 그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던 새로운 현상이었고, 이것이 바로 베네딕도회 수도원이 한국의 수도 생활에 새로운 측면을 보여 준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현지에서 있었던 전통을 고려하지 않고는 이런 현상을 이해하기 힘들 것입니다. 특히 수녀원을 보면 이런 현상을 확연히 볼 수 있습니다. 첫 수녀원이 지어지기도 전에 젊은 여자애들이 와서 수녀가 되고 싶다고 간청하였습니다. 수녀들이 먼저 수녀원을 짓고 보자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프리카에 대해 추가 설명하겠습니다. 한국에서는 1909년 이미 서울에 수도원이 건립되었습니다. 그러나 아프리카에서는 1920년대 말기까지 수도원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교 중심지로서 베네딕도회가 활동했지만 수도원이 없어 수도생들을 양성하지 못하였습니다. 한국에서는 일찍이 수도원이 있었기 때문에 수도생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봅니다. 

 

김구인 : 고맙습니다. 지금 우리가 성 오틸리엔 연합회 베네딕도회가 한국에 온 지 100년이 된 것을 기념해서 심포지엄을 하고 있는데, 사실 개인적으로는 10개의 주제를 하루에 하나씩 열흘을 해야 할 것을 하루 반 만에 매듭짓는 것입니다. 조금 여유를 드리고 싶지만 이것도 한정이 있기 때문에 제가 발표자들에게 제안하겠습니다. 발표하시는 분들과 토론하시는 분들은 짧게는 2분, 길게는 3분만 드립니다. 발표순으로 하겠습니다. 

 

말씀을 듣기 전에, 100년이 지났다는 것은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처음 수도원에 왔을 때 서울 백동에 입회하여 수도 생활을 하시다가 덕원으로 가셨다가 피난 와서 이곳 왜관에 계시던 분이 살아계셨습니다. 김 플라치도 수사님인데, 돌아가셨습니다. 또 빈첸시오 방 수사님. 그분들입니다. 부산에 살고 계신 노 아우스딩 신부님은 덕원에서 살다가 오신 분이고, 여기 오시지 않은 분이 계신데, 황 다미아노 신부님은 신학생이셨습니다. 여기 산증인이 계신데, 이 미카엘 수사님입니다. 1936년에 수도원에 들어가셨습니다. 여기 김 빌리보 수사님도 계십니다. 덕원이나 연길이 꿈 얘기가 아닙니다. 알빈 신부님, 주성도 신부님도 우리와 같이 다 살았습니다. 그 얘기를 다 하는 겁니다. 우리가 꿈꾸고 있지 않다는 거, 잘 아셨지요? 

 

그러면 먼저 마르 박사님, 하시고 싶은 말씀 하십시오. 2분 드립니다. 

 

마르(통역 : 이유재) : 심포지엄 책자 337쪽에 사진이 몇 장 실렸습니다. 근대 건축에 관한 발제문에 대해 언급하겠습니다. 여기에 미셸 수사님과 필립 수사님은 덕원에서 계셨던 분입니다. 특히 필립 수사님은 마지막으로 북한을 떠나시고 생존하신 분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337쪽에 나오는 덕원 수도원을 보시면, 이 수도원이 그대로 지금 유지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덕원 신학교 건물과 신학교 앞의 연못, 수공업 작업장과 수도원 건물과 성당까지 현재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최근 북한에서 찍은 사진을 보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성당은 337쪽 위에 오른쪽에 보시면 지붕 쪽의 원형태가 있는데, 거기까지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337쪽 위에 왼쪽 사진에 신학교 왼쪽에 인쇄소가 있었고, 오른쪽에 농업을 위한 집이 있었는데, 그 집들도 그대로 있습니다. 공산정권이 수도원과 신학교를 모두 파괴했다고 우리는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고 그대로 지금 보존되고 있고, 다만 주변과 그 사이에 새로운 건물들이 건축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올해 3월에 인터넷에 사진이 하나 공개되었는데, 거기에서는 신학교 뒷마당에서 들어가는 입구에 김정일이 서서 농업학교를 어떻게 운영해야 되는지를 지도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 사진을 자세히 보면 창문과 문과 건물에 딸려 있는 것이 옛날과 완전히 동일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필립 수사님은 오늘날 돌아가시면 전혀 낯설지 않게 움직일 수 있으실 겁니다. 

 

김구인 : 예, 감사합니다. 지금 제가 진행상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발표자만 쭉 가시면 너무 한쪽으로 심심하잖아요. 그래서 밸런스를 맞추고 발표자가 2~3분 말씀하시고, 그런 다음 상대가 되는 토론자께서 2~3분 말씀하시는 순으로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특별하게 이유재 박사님, 마이크를 들으셨으니까 통역만 하시지 말고 바로 지식 생산과 교육에 대한 말씀을 하셨잖아요? 그에 대해 꼭 한말씀을 해주십시오. 

 

이유재 : 저는 해방 전까지 식민지시기 분도회의 활동을 총체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거기에 대해서 4가지를 적었었는데, 첫째는 분도 선교회와 근대성의 관계가 어떤지 하는 것을 짚어 보고 싶고, 두 번째, 수도원뿐 아니라 본당과 공소 등 가톨릭 신앙공동체를 한국 시민사회의 단초로 볼 필요가 있다는 점입니다. 돈 베이커는 19세기 천주교 신앙공동체를 시민사회의 단초로 보기는 했지만, 식민지시기에는 선교사들의 지배적 역할 때문에 이런 천주교의 성격이 억압받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식민지시기에도 천주교회 및 신앙공동체들이 자립적 운영과 복지 및 사회활동으로 시민사회 형성에 기여하는 바가 있습니다. 따라서 식민지시기 한국인들의 신앙생활에 초점을 맞추어서, 그 성격을 규정짓는 작업이 더욱 더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세 번째, 분도회와 정치의 관계가 보다 더 명확히 연구되어야 합니다. 전체적으로 분도회와 식민지배자와의 관계에서는 매우 친일적 상을 그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분도회에서는 특히 사회주의자들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고, 무장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도둑놈들이라고 경계했습니다. 부분적으로는 분도회가 그들의 희생자가 된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의 고유한 전통을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기도 하기 때문에 선교와 정치의 관계를 더 자세히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네 번째는 세계교회로서의 가톨릭교회가 제국과 민족국가라는 당시대의 정치적 상상공동체를 넘어 진정한 정치적 대안을 마련할 수 있었는지는 열려 있는 토론 지점입니다. 특히 식민종속자의 입장에서 19∼20세기를 지배한 제국과 민족국가를 뛰어넘을 수 있는 정치적 상상력을 종교가 제공해 줄 수 있었다면 그것은 무엇이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무엇보다 세계화되는 오늘날 제국과 민족국가 둘 다 정치적 공동체로서 비판받고 있는 시점에 종교가 억압적 제국과 폐쇄적 민족국가를 넘어 어떤 정치적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역사상 그런 단초들이 제공되고 있는지 (무엇보다 선교와 선교지에서) 묻는 것은 중요합니다. 분도회의 선교에서도 이런 점들이 부분적으로 내비치기는 하지만, 단정적 결론을 내리기에는 보다 더 풍부한 연구가 요구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구인 : 감사합니다. 두 번째 주제 수도 생활과 선교 활동을 발표하신 선지훈 신부님이 말씀해 주십시오. 

 

선지훈 : 노르베르트 베버 아빠스님께서는 “베네딕도회적으로 하지 않으려면 아무것도 하지 마라”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테오도르 브레허 주교 아빠스님도 그런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연길 지역에서 굉장한 노력을 하셨다고 봐야 합니다. 핵심은 오늘날 우리가 왜관에서 어떻게 베네딕도회적인 활동과 수도 활동을 이어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결국 우리가 . 과거를 답습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베네딕도회적인 삶을 실천한 선배들을 모범으로 삼으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베버 아빠스님께서는 “우리는 ‘기도하고 일하는’ 수도 생활을 하고자 이곳에 왔다”라고 얘기하셨습니다. 

 

김구인 : 예, 고맙습니다. 장정란 교수님께서 말씀해 주셔야 하는데, 주제 발표도 있으시고 토론도 있으시고 해서 두 가지를 합쳐서 말씀해 주십시오. 

 

장정란 : 저는 제 주제인 아홉 번째 주제일 때 제 얘기를 하고 지금은 이유재 교수님께 한 가지 질문을 드리면 안 될까요. 

 

김구인 : 예 좋습니다. 

 

장정란 : 아까 어느 질문자께서 베네딕도회가 수도생을 경시했다는 것이 사실인가를 물었고, 또 이유재 교수님께서 주제 발표하실 때도 그와 같은 논조여서 마음에 걸렸었어요. 또 지금도 베네딕도회에서 문화적 우월성으로 상당히 억압적인 것, 자의적인 것을 선교 과정에서 한국인에게 강요했다고 하는데, 저는 그것은 아니었다고 봅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서는 사소한 예 같지만 제가 베네딕도회에 대한 논문을 쓰면서 크게 감동한 적이 있습니다. 다른 수도회와 비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지만 장충신 신부님이 파리 외방전교회의 용산 신학교를 다니시던 시절의 만화를 그리고 밑에 내용을 쓰신 책을 보면,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님들은 신학교에서 신학생들과 따로 식사를 하셨습니다. 그분들은 고기, 야채, 쌀밥과 빵을 드셨습니다. 그런데 신학생들에게 그렇게 주지 않았습니다. 어린 학생들은 그 음식들이 너무 먹고 싶어 창밖에서 그 안을 들여다보며 “나도 얼른 신부가 되어서 고기를 먹어야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제가 감동한 베네딕도회 신학교, 즉 백동 신학교 사진이 있습니다. 신학생들이 모두 함께 식사를 하는데, 거기에 베네딕도회 서양 신부들이 똑같은 식판과 메뉴를 가지고 들고 계셨어요. 또한 그 시대의 연대기라던가, 선교하던 신부님들이 쓰신 기록을 보면 사실 교육적으로 봤을 때 차별을 두어야 할 신학생들을 그렇게 평등하게, 동등하게 대하는 것에 대해 굉장히 감동했습니다. 이 같은 베네딕도회 신부들이 과연 한국 사람들을 문화적 우월감으로 차별하고 억압했을까 하는 점은 의심스럽고 동의하기 힘듭니다. 저는 이유재 교수님께서 어떤 전거를 가지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질문하고 싶습니다. 

 

김구인 : 예, 이유재 교수님 간단하게 대답해 주십시오. 

 

이유재 : 네, 질문 감사합니다. 제가 발표를 하면서 각을 좀 세운 측면이 없지 않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수도원의 규율이 억압적인 것으로 느껴졌고, 그것을 적응해 나가는 것이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젊은 학생들이 그것을 적응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어하는지가 선교지에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둘째는 우리가 건축에 대해서도 들었지만 건축물이나 생활양식이 매우 서양적이고 독일식이었습니다. 우리 같으면 저렇게 아름다운 건물에 살았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희망하는데, 그때 신학생들의 편지를 보면 자신이 살던 초가집을 그리워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근대가 주는, 표방하는 선진적이거나 문명적인 것이 그 시대를 살았던 한국인들에게는 꼭 그렇게 다가오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학생들이 우선은 수도회에서 정해진 규율에 적응해 나가고 동시에 근대적인 것에 적응해 나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독일 신부들도 그런 것에 대해 계속 성찰을 하긴 합니다. 그렇지만 그분들이 이것을 다 받아들이고 옮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분적으로는 그분들이 하는 것이 옳고 젊은 학생들을 그 쪽으로 키워나가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그렇게 쉽게 일치하지 않습니다. 한국 음식을 먹겠다고 하는 것도 수도원에서는 굉장히 늦게 관철됩니다. 수녀원을 보면 아예 한국 수녀들이 빵과 쨈으로 된 아침 끼니를 안 먹고 일을 하다가 점심 때는 허기가 져서 일을 더 이상 못하는 것을 많이 발견합니다. 연대기를 보면 언젠가 다행히 빵을 굽는 오븐이 망가져서 한국 수녀들에게 한국식 음식을 제공하는 것이 보입니다. 저는 그런 사례를 들었던 것뿐입니다. 

 

김구인 : 고맙습니다. 시간이 제한되었기 때문에 질문이 있더라도 다음 기회에 개인적으로 해 주시길 바랍니다. 다음은 전례서의 간행에 대해 말씀하신 인영균 신부님, 짧게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인영균 : 예,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우리 베네딕도회에서 100년 동안 발간한 전례서를 중심으로 해서 베네딕도 회원들이 어떻게 한국 교회의 전례 쇄신에 기여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봤지만, 제가 30분의 짧은 시간 동안에 여러분에게 이것을 전달하려고 하니까 아주 중요한 부분을 한 가지 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김복희 수녀님이 질문하신 교황청의 허락이 있었느냐, 없었느냐 하는 것과 굉장히 연관이 되는 겁니다. 이제 20일에 우리 성당 밑에 규모가 작지만 100주년 기념 전시관이 개장합니다. 그곳에 보면 여러 역사 사진, 즉 서울부터 시작해서 오늘의 왜관까지 중요한 사진들을 전시하는데, 그 사진 중에서 연길 수도원에서, 그러니까 1940년 7월 14일에 있었던 사건에 대한 사진이 있습니다. 그 사진에 보면 연길 수도원의 백 테오도르 주교 아빠스님께서 연길의 모든 신자들, 연길교구의 사제들과 함께 공동체 미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주교님이 미사를 드리는 방향을 보면 신자들을 향해 있어요. 그러니까 제대가 1940년대에 이미 사제와 신자 사이에 놓여 있다는 겁니다. 즉 신자들을 향해서 미사를 거행했다는 겁니다. 비록 그 미사 때 라틴어로 미사를 드렸습니다만, 주교님이 신자들과 대화의 형식으로 미사를 거행하였다는 사실이 그 사진에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때 벌써 교황청에서 연길교구에 허락을 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개혁적인 미사를 드릴 수 있었는가? 그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무엇을 알 수 있느냐? 20세기 초부터 일어난 전례운동의 중심 역할을 한 사람들이 바로 베네딕도회원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전례운동을 할 때 다 교황청의 허락을 받았느냐? 그건 아니고, 김복희 수녀님이 어제 지적하셨듯이 교황청에서 제재를 가했습니다. 그러한 전례운동의 결실이 〈전례 헌장〉을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한참 후에야 말입니다. 그런데 연길교구에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지금 우리가 하는 미사와 거의 흡사한 미사를 이미 거행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지금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거의 사라졌지만 이러한 전례에서 한 가지 생각한 것은 어떤 것을 쇄신하려면 선각자들이 먼저 시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김구인 : 그러면 지금 김복희 수녀님께서 말씀해 주십시오. 

 

김복희 : 네, 저는 지금 어느 한 분께 드리는 것보다는 왜관 수도원 공동체에게 질문 겸 요구를 하고 싶습니다. 100년 동안 우리가 이번 심포지엄을 통해서 깨달았지만 100년 수도원 역사에서 전례서를 번역하고 간행하면서 전례의 의미에 맞는 전례를 거행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적어도 100년 동안 왜관 공동체는 이제 전례에 관한 한 예식서를 번역하고 간행하는 것은 수도자 몫이 아닙니다. 한국교회 전체의 예식서를 간행하는 것은 교회 전체가 할 일입니다. 그렇다면 100년 동안 선배가 쭉 담당하면서 한국 교회를 주도해왔던 이 분야를 이제는 포기할 수밖에 없는데 앞으로 100년 동안 전례에 관한 한 어떤 분야에서 베네딕도 수도원 공동체는 한국 교회를 주도하고 특히 전례 쇄신에 많은 운동을 계획하고 계신지 질문드리고 싶습니다. 

 

김구인 : 이 문제를 대답하기 위해서는 회의를 해야 합니다. 이것을 과제로 남기도록 합시다. 고맙습니다. 문화 연구를 발표하신 한국교회사연구소의 조현범 선생님, 한 말씀 해주십시오. 

 

조현범 : 사실 저는 분도회 연구에 관해서는 초심자입니다. 이번에 처음 글을 써 봤습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그리고 특히 논평해 주신 오윤교 신부님한테 많이 배웠습니다. 그래서 저한테 주어진 3분을 오윤교 신부님께 드려서 좀 더 많이 배웠으면 싶습니다. 논평문에는 나와 있는데, 말씀을 못 하신 부분이 있습니다. 제가 잘못 본 부분을 지적해 주셨습니다. 가령 뮌스터학파의 개종 모델과 루뱅학파의 부식 모델에 대해 잘못 본 부분을 지적해 주셨기 때문에, 이것에 대해 상세히 설명을 해주시면 우리에게 좀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베버 아빠스와 아프리카 선교사들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고 그러는데, 아프리카 선교사들의 주장이 무엇이었는지가 궁금합니다. 

 

김구인 : 답변 부탁드립니다. 

 

오윤교 : 저한테 공을 넘기셨는데, 뮌스터학파의 개종 모델과 루뱅학파의 부식 모델에 대한 보충 설명은 창설자 암라인 신부로부터 베버 총아빠스 이래의 선교 개념의 차이와도 연관되어 있기에, 선교학과 관련된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심포지엄 논평문을 참조하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하고, 두 번째 질문을 통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베버 총아빠스 재임(1902-1931) 초기에 이르기까지 아프리카의 상황이 절박했기 때문에 우리 오틸리엔 연합회의 정체성, 즉 수도원을 건설하고 베네딕도회적 수도승 생활을 하면서 선교 활동을 한다는 이상을 구현하지 못하고 먼저 본당을 설립해야 한다는 상황 논리에 밀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1888년 아프리카에서의 선교 활동이 시작된 지 20여 년이 지난 후인 1909년에 이루어졌던 한국에서의 선교는 그 전에 있었던 1906년의 제2차 총회의 결과에 의해서 새롭게 우리가 이제는 선교 생활을 수도 생활과 결합해 수도원을 중심으로, 즉 베네딕도회적 생활을 하는 그 자체가 선교적이기 때문에 수도원을 건설해 수도원이 있는 곳에서부터 모든 활동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연합회의 선교정신을 바로잡은 총회의 규정이 구현된 첫 번째 결과였습니다. 이런 총회의 결정은 물론 베버 총아빠스가 동아프리카를 시찰한 후, 그곳에서의 선교 실태를 파악한 후에 가지셨던 생각이기도 합니다. 

 

아프리카 선교사들은 수도승 선교사라는 이중 소명에 대한 신원 의식의 부족으로 개별 본당을 세우는 것으로 선교 활동 방향이 기울었었습니다. 그러나 수도원도 없이, 심지어 베네딕도회 정신이 선교에 방해가 된다고까지 생각했던 아프리카 선교사들은 오틸리아 연합회의 창설 정신에서 벗어난 선교 활동을 지적한 베버 총아빠스를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총회는 “수도원이 모든 활동의 중심지”라고 규정했고, 이렇게 결과적으로 총회의 동의를 얻었지만, 물론 총회 중에는 아프리카 여건상 한 세기 후에나 수도원이 중심이 된 선교가 이루어질 것이란 의견을 피력했던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토마스 주교와의 갈등도 있었습니다. 물론 그 후에도 이런 갈등은 계속 있었지만, 총회 결과에 의해 한국에서는 아프리카와 달리 수도원을 중심으로 수도 생활하는 가운데 선교활동을 펼쳐나기로 했던 것입니다. 

 

이런 갈등은 아직까지 수도승 생활과 선교 활동의 조화 측면에 있어서 왜관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활동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 예컨대 우리가 미술가로서 살거나, 선교사로 살기 전에 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베네딕도회원으로서의 삶이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도자-미술가가 되어야지 미술가-수도자가 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참수도승이 될 때, 참선교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번 백 주년 전체를 통괄하는 “모든 일에 하느님께 영광!”이란 주제에 있어서도, 이 “모든 일”은 수도 생활 자체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르고 하느님께 영광 드리는 것에 있듯이, 그런 모든 활동을 꿰는 것은 오늘날 베네딕도회원으로서 지역 교회 안에서 어떻게 하느님과 이웃을 섬길 수 있는가 하는 것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저에게 주어진 시간을 활용하기 위해 제 논평문에서 언급한 보편적 패러다임에 덧붙여, 발제문에서 조현범 박사님께서 특수한 패러다임이라고 하셨던 것은 우리가 타자와 만날 때 이루어질 수 있는 좋은 면에 대해 지적해 주신 것입니다. 이런 특수 패러다임은 서로가 하나의 객체가 아니라 주체로서 만나는 삶에 있어서 가치를 지닐 수 있는 부분에 대해 밝혀주신 것입니다. 이것과 관련해서 한 말씀드리면 지금 성 베네딕도회 한국 백 주년은 100년에 걸쳐, 민족적으로 말하면, 독일 민족과 한국 민족이 함께 살아온 역사입니다. 그것은 100년을 합류해 오면서 오늘까지 성숙한 관계를 구축해 온 역사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백년 역사는 외국인 선교사들과 방인 수도승들이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전체 오틸리아 연합회에 제시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측면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주제의 명칭과 관련해 한마디 말하고 싶습니다. “한국 ‘진출’ 100주년 기념”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 문제에 대해 조금 이야기 드리고 싶습니다. “한국 ‘진출’”이라고 말하면, 중심은 한국 ‘밖’인 ‘독일’에 있고, 밖에서 한국으로 ‘진출’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국 쪽에서 뮈텔 주교가 초청했음을 중심으로 말하면, ‘진입’이라고 해야 합니까? 1909년부터 베네딕도회 생활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그때부터 한국에서의 삶이 시작되고 합류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서울 수도원부터 시작된 한국에서의 오틸리아 연합회의 4개의 아빠스좌 수도원들의 역사는 ‘한국’에서의 베네딕도회 생활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진출이란 말은 이분법적인 논리로 한국 ‘안’에서 이루어진 역사를 지칭하기에는 부적당하기에 진출이란 말을 중립적인 용어로 바꿀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김구인 : 감사합니다. 시간 관계상 이제 성가집에 대해 재미있게 발표해 주신 최호영 신부님이 말씀해 주시고 그 다음 박문정 수녀님은 준비해 주십시오. 

 

최호영 : 100년 동안 베네딕도회에서 발행한 성가집에 대해서는 이미 논문을 통해서 충분히 그 종류와 가치, 위대함을 말씀드렸고, 저는 이 자리에서 간단히 베네딕도회에 바라는 점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제가 유럽에 나가면, 특히 독일에 가면 수도원들을 방문합니다. 올해도 보이론 수도원과 오틸리아 수도원을 방문하였는데, 하루이틀씩 머물면서 특히 다른 것을 하지 않고 그들의 미사와 성무일도만을 참가하고 와도 피정을 넘어서 마치 한 학기 강의를 들은 것과 같은 풍만함을 느끼게 됩니다. 예를 들어 보이론 수도원에서는 매일 그레고리오 성가로 미사를 드립니다. 이것은 거의 불가능하죠. 그레고리오 성가로 미사를 드린다는 것은 입당송, 화답송, 봉헌송, 알렐루야, 모든 것을 매일 다르게 노래한다는 얘기죠. 저도 개인적으로 서울교구에 살면서 이런 그레고리오 성가를 추구하지만 서울교구에서도 그레고리오 성가를 하는 데가 한 곳도 없습니다. 이런 차이도 있고, 또 성무일도를 보이론 수도원에서 하는데 수사님들이 몇 분 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아주 간단한 오르간 반주를 하는데, 그 오르간 반주가 마치 어떤 현대음악을 듣는 것처럼 음도 한 음에서 세 음밖에 나지 않는데, 기가 막힌 조화 속에서 음이 떨어지지 않고 성무일도를 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서 저희들도 성무일도에 관한 많은 부족함을 느끼고 배웠으면 좋겠다, 같이 했으면 좋겠다 하는 것들이 있는데, 이것을 배울 수 있는 곳은 바로 베네딕도 수도원만 가능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에 있는 베네딕도 수도원에서도 많은 분들이 찾아와서 미사를 드리면서 같이 성무일도를 하면서 흠뻑 젖고 기쁨을 나누고 할 수 있는 그런 음악적인, 꼭 음악을 통한 기도의 전례의 장소가 되는 것이 가장 좋은 몫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는데 가끔 저도 성무일도를 참석해 보면 좀 분심 들 때가 많잖아요. 시소놀이를 많이 하죠? 선창하시는 분들과 수사님들이 음이 맞은 것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계속 올라갔다 내려갔다 시소놀이를 하는데, 이러한 부분들도 조금씩 마무리가 되고 같이 잘 맞는다면 훨씬 아름다운 전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계속적으로 다른 유럽의 수도원들처럼 베네딕도회에서는 이런 그레고리오 성가 혹은 성무일도에 관한 CD도 나온다면 많은 신자들에게 좋은 선교의 기회가 될 것 같고, 더불어 이러한 작업을 위한 전문 음악가가 아니더라도 전례를 위한 여기에 맞는 소박한 음악가 양성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상입니다. 

 

김구인 : 고맙습니다. 수도원에 많이 오십시오. 다음으로 박문정 수녀님 말씀해 주십시오. 

 

박문정 : 1박 2일의 심포지엄에 참여하면서 베네딕도 수도회가 다양한 선교 분야에서 활동하셨구나 하는 점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앞에서 최호영 신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교회음악을 전공한 입장에서 본다면 베네딕도 수도회가 전례 부분에서 수행하는 중요한 역할과, 동시에 수도회가 갖고 있는 음악적인 보화는 과히 세계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그레고리오 성가에 있어서만큼은 독보적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 내에서 베네딕도회의 교회음악 분야에서의 활동은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그런 이유에서 한 가지 부탁을 드린다면, 수도회가 갖고 있는 특별한 보화를 나누는, 즉 수도회 문화를 꽃피울 수 있는 장(場)을 마련해 주셨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울에 있는 분도회관에서도 가능할 것이고, 여기 왜관 수도원에서도 그런 열린 공간과 시도는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음악은 어느 면에서는 기능적인 부분이라 수도자들이 만들기에 조금 부족하다면 여러 음악가들을 초청해서 수도회 음악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주신다거나, 부족한 대로 수도자로서 나눌 수 있는 기도와 소박한 나눔을 통해서 함께 영성을 공유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주셨으면 합니다. 수도회가 과거 100년의 역사 안에서 조용히 문을 닫고 산 듯했지만 얼마나 열린 사목을 펼쳤는지는 이미 잘 보았습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다양한 시도를 벌써 시작하고 계신데, 며칠 후 수도회 진출 100주년 기념 음악회와 전시회 등 다양한 문화행사를 준비하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미리 축하드립니다. 이런 시도들을 통해 아름다운 수도회 문화를 나눌 수 있는, 그래서 수도회가 담이 높은 닫힌 수도회가 아니라 열린 수도회로 성장하시길 바랍니다. 

 

김구인 : 고맙습니다. 다음으로 지식 생산과 교육의 토론자이신 정선이 교수님 차례입니다. 

 

정선이 : 제가 처음에 질문하려고 계획했던 것 말고 아까 이유재 선생님께 질문 나온 부분으로 바꿔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전에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한국의 근대교육 형성에서 기독교계 선교 학교가 펼친 교육 사업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는지에 대해 그동안 높은 평가가 이루어져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신교가 아닌 가톨릭교회가 펼쳤던 교육 사업에 대해서는 한국교육사에서 깊게 그리고 많이 연구되지 못한 부분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 이유를 이유재 교수님이 논문에서 근대성 문제라 써 주시기도 했지만 그런 문제도 있습니다. 교육사 연구자들 중에 독일어나 프랑스어의 1차 사료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적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개신교 쪽은 주로 미국, 호주, 캐나다, 영국의 선교사들이었고 1차 사료가 영어이기 때문에 연구가 더 많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이유도 있다고 봅니다. 저도 독일어나 불어로 된 1차 사료를 읽기 어렵기에 가톨릭 쪽으로는 연구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유재 교수님의 연구가 더 귀중한 연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아까 ‘진출’이라는 표현을 바꿔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저는 사실 그대로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선교사들이 한국에 와서 한국인들과 교육사업이나 의료사업을 펼쳐 나갈 때 이들 이민족과 한국 민족 간의 관계가 상당히 중요합니다. 어떻게 관계를 형성하는가. 제가 가톨릭 쪽은 잘 모르겠지만 개신교 쪽으로 보면 이것이 상당히 큰 문제가 됩니다. 아까 이유재 교수님이 말씀하셨지만 오리엔탈리즘적인 것, 문명적인 우월감 때문에 외국 선교사들의 생활 방식이라든지, 가치관, 규율이라던지 이런 것들이 억압적으로 작용하여 한국인들에게는 굉장한 차별감으로 경험됩니다. 예를 들어 YMCA 총무를 지냈고 당시 한국의 남감리교계의 대부라고 불렸던 윤치호는 60여 년간 쓴 영어 일기를 남겼는데요. 이것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동시에 개인의 내면을 잘 보여 주는 중요한 사료입니다. 그것을 보면 외국 선교사들과의 인간관계에서 오는 갈등, 외국 선교사들이 한국인들에게 주는 모멸감에 대한 분노, 수치심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거물급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는 윤치호조차 차별적 대우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러한 점이 나중에 윤치호가 자발적인 친일파의 길로 가는 하나의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같은 황인종으로서 서양인종에 대항하겠다고 나갑니다. 이처럼 개신교 선교사들과 한국인들의 관계는 내면적으로 상당히 갈등관계에 놓이는 부분이 있습니다. 제가 가톨릭에서는 어떻게 되는지 잘 모르겠는데, 아까 오윤교 신부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다른 이민족끼리 만났을 때는 그것이 개인적인 품성, 인격 등에서 오는 차별의 문제가 아니고, 그 당시의 시대적인, 제국주의 시대에서 서양인 선교사들이 다른 지역으로 소위 ‘진출’하면서 오는 시대적인 현상으로 읽어야 된다고 봅니다. 이쪽으로도 더 깊은 연구가 나왔으면 좋겠고, 이유재 교수님의 연구가 그런 시발점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김구인 : 예, 감사합니다. 다음은 도서 간행에 대해 말씀해 주신 김수태 교수님, 말씀해 주십시오. 

 

김수태 : 감사합니다. 토론문을 읽고 받은 첫 느낌은 난감한 것이었습니다. 칭찬은 잠깐, 그보다는 훨씬 많은 주문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선지훈 신부님으로부터 책의 영향사를 써주면 좋겠다, 특히 전체적인 흐름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면 좋겠다는 주문을 받았지만, 저에게 부여된 이 주제를 어떻게 써야 하는가에 대해 정말 많이 고민했습니다. 

 

처음에 받은 제목은 분도회의 도서간행과 보급으로, 시기적으로는 일제 강점기까지를 포함하고, 또 도서 간행만이 아니라 보급까지를 요구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능력의 한계로 보급의 문제는 고민하다가 떼어버리고, 일제시기도 제외했습니다. 일제시기의 경우 이번 발표에서 여러 주제가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런 방법으로 우선은 접근해 보고, 기회가 닿는다면 또 하나씩 다루어 보자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김영철 편집장님은 크게 세 가지 주문을 했습니다. 역저자, 기획자에 대한 인터뷰, 정말 중요하다고 여겨 선정한 책에 대한 치밀한 분석, 그리고 영향 가운데에서도 일선 사목자와 신학자, 신학생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한 부분 등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주문이고, 그리고 매우 좋은 주문으로 생각합니다. 

 

사실 이 부분들에 대해 저도 많이 고민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씀드려서 오늘 이 발표문에서 그것을 모두 담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한 주제, 한 주제가 모두 어려운 부분으로, 많은 고민과 함께 앞으로 하나씩 본격적으로 다루어야 할 주제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꺼번에 이런 내용들까지를 요구하니, 토론문을 받고 나서도 지금까지 계속해서 힘이 들었던 것입니다. 물론 지적하신 부분들은 조금 더 자세히 읽어 보면 조금은 느낄 수 있도록 저 나름대로 배려했는데 잘 전달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기획자에 대한 인터뷰도 나름대로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책에 대해서는 분석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비중을 드러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어떤 책의 내용 분석 등은 그 한 권만 하더라도 논문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쓰는 사람의 고민보다는 비평자로서의 자유로움을 너무 많이 보여 준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보다는 언급하였듯이, 제가 무게를 두고 선정한 관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런 부분에 대한 의견을 이야기해 주면 더욱 좋았을 것입니다. 세 번째로 요구한 사항에 대해서 한마디를 더 첨부하고 싶습니다. 무슨 무슨 책이 사목과 연구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는 쉽게 확인될 수 있고, 그 작업은 그리 어렵지 않다 말씀하셨는데, 정말 그럴까 하고 지금도 의문을 품고 있습니다. 우선 학술논저, 특히 학위논문 인용 빈도수를 파악해 보면 된다고 이야기하는데,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어쨌든 서문에서 밝혀두었듯이, 앞으로 또 기회가 닿는다면 오늘의 검토를 바탕으로 요구하신 부분까지 공부를 계속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결론에서 밝힌 몇 가지 바람에 대한 부분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하고 싶군요. 분도출판사에서 밝힌 우리 신학, 한국 신학의 개념은 확실히 구체화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학의 대중화 부분에 대해서 전문화된 영역과 기반이 없는데, 무엇을 어떻게 대중화할 것인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은 의견을 달리합니다. 한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전달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조금은 고민을 해달라는 것입니다. 분량만 많다고, 어렵다고 전문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글은 쉽게, 내용은 수준 높게 하는 것이 출판사의 목표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게 두꺼울 필요도 없는 것 같고요. 

 

시대의 염원이 특정한 한 점에 수렴되던 시대가 아니다, 다양성과 다변화의 시대가 도래했기에 한 출판사가 만인의 만 가지 지적 욕구를 다 충족시킬 수는 없다는 말에 대해서도 곰곰이 생각중입니다. 제가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현대가 다양성과 다변화의 시대라고 하더라도, 우선순위가 있을 것이며, 그것이 어떻게 다른 것과 유기적인 연관성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고민이 필요하다는 의미로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출판사의 성공과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 제가 이야기했는데, 이제는 분도출판사가 유행에 좀 덜 민감했으면 싶습니다. 특히 안셀름 그륀 신부님에 대한 책들이 왜 그렇게 많이 중복적으로 나와야 되는지 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도 읽고 많은 감명을 받은 책들도 있지만, 그렇게 할 때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에 대해서 출판사가 고민을 더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2년 전에 오고, 이번에 또 오시는데 ‘왜’라는 물음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책이 좋은 책이냐, 저의 개인적인 책읽기를 따라 이야기한다면, 학부 때 제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데 고민했던 책으로 《그리스도 신앙, 어제와 오늘》, 그 이후 바오로 6세를 위한 피정 강론인 《그리스도라 부르는 예수》, 《하늘은 네 안에서부터》, 최근에는 《20세기 중국 가톨릭 교회사》, 《수도생활의 재발견》 등을 들고 싶군요. 제가 좋아하니까 좋은 책이 된 것 같군요. 

 

김구인 : 감사합니다. 지금 분도출판사 김영철 편집장님 말씀해 주십시오. 

 

김영철 : 목록집은 절박한 필요성이 대두될 경우, 적절한 시기에 출간을 고려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선교에 관한 책이라면 우선, 곧 출간될 《분도 통사》 자체가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의 자료집과 역사책의 구실을 해낼 것이라 여겨집니다. 

 

김구인 : 예, 감사합니다. 다음에 시간이 있으면 또 드리겠습니다. 어떤 분들은 아마 《가톨릭少年》에 대해 처음 들으셨을 것 같습니다. 아주 귀중한 자료를 발표해 주신 최기영 교수님 말씀해 주십시오. 

 

최기영 : 예. 《가톨릭少年》은 앞으로 분도출판사에서 영인본을 내실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그렇게 되면 국문학계나 아동문학계의 좋은 자료로, 또 분도회의 문서 선교 자료로 이용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그것보다 100년사 말이 나왔는데, 마르 박사님의 책이 곧 출간된다고 하더군요. 지금 김수태 선생이 목록집 이야기를 하였는데, 100년사에 그것이 들어가지 않는 모양입니다. 목록집 없이 100년사가 나오는 것으로 알아들었는데, 그렇게 해서는 안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지금 마르 박사가 쓰는 100년사는 주로 독일자료를 가지고 쓴 것이니까, 독일 분들이 활동하던 시기는 그렇게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자료도 있을 것이고, 다른 자료들도 나올 테니까 한국에서도 별도의 100년사를 써야 합니다. 그렇게 쉽게 100년사가 끝난다고 생각하면, 지난 100년도 제대로 정리 안 되고, 앞으로 올 100년을 어떻게 정리하시겠어요. 저는 지금부터 사료집을 준비해서 출간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관련된 문건들을 모으고 현재 있는 것을 번역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00년사가 아니라 150년사를 준비하는 작업으로, 문서를 모으고 번역을 하고 자료집을 내야 할 것입니다. 물론 분도회에서는 생활 자체가 수도이겠지만, 그것을 기록하고 정리하는 작업 또한 중요한 일입니다. 문서고를 만들고 문서를 모아야지요. 수도회가 한국에 진출한지 100년이나 되었고, 또 여기 왜관에 정착한 지도 50년이 넘었는데, 여전히 똑같다면 무엇 때문에 100년 행사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이번 기회가 문서고도 만드는 그런 기회로 삼아서 여기서 직접 역사를 쓰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자료가 많은 독일에서 전문가에게 맡겨 역사를 정리하는 것도 물론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미 60년사도 그렇게 독일 분들이 노력해서 간행되었는데, 100년사도 역시 그렇게 나온다는 것 아닙니까. 40년이 지났는데도 독일 분들에게 100년사를 맡긴다면, 결국 한국 분도회는 40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만큼 자신의 삶에 대한 기록에 관심이 없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 저는 이번 기회에 아빠스께서 앞장서서 문서고를 만드시고, 역사편찬 기구를 설치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빠스께서 그렇게 하시리라 믿습니다. 건물만 크고 성당만 좋게 세워서 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같이 역사하는 사람은 그러한 작업이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하니까, 다른 분들과는 다를 수 있겠습니다. 아무튼 그러한 일을 이번 기회에 좀 더 공식화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구인 : 예, 고맙습니다. 교수님. 토론자로 나오신 권오만 교수님, 말씀해 주십시오. 

 

권오만 : 아까 잠깐 말씀을 드렸는데요, 《가톨릭少年》에 대해 느꼈던 갈증을 조금 말씀드리겠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가톨릭少年》이 영인본으로 이 책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쥐어지게 되면, 어린이 문학이나 또는 일반 문학이나 또는 종교에 관계된 것도 그러하겠지만, 상당히 다른 양상이 나타날 것이라는 기대를 가져도 좋지 않겠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저 개인으로 말하면 저는 윤동주 시를 공부하면서 윤동주가 동시를 여러 편을 낸 《가톨릭少年》을 보기를 굉장히 소망했습니다. 그러나 영구할 수 없었거든요. 이게 참 절망스러웠습니다. 《가톨릭少年》이 앞으로 영인본으로 출간되면 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구할 수 있게 되어 대단히 좋겠다, 결과가 기대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김구인 : 감사합니다. 장정란 교수님, 아까 말씀하셨기 때문에 시간이 있으면 따로 드리겠고, 토론자로 나오신 이성근 신부님, 말씀해 주십시오. 

 

이성근 : 저희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에서 현재 추진하고 있는 시복 · 시성 운동은 2007년 5월 10일 저희 수도원 이형우(시몬 베드로) 아빠스님께서 그 추진 교령을 반포하신 이래, 독일과 한국에서 함께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만약 장정란 교수님의 논문이 3년 전에 완성되었다면 이 시복 시성이 벌써 끝났었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교령 반포부터 지금까지 저희 수도원에서는 자료를 모아 약전을 작성하고, 필요한 문서들과 청원서를 작성하였고 이를 이탈리어로 번역해서 현재는 시복시성 예비심사를 청할 준비가 거의 끝난 상태입니다. 다만 한 가지 남아 있는 문제는 과연 어느 법원에서 이 예비심사를 담당해 줄 수 있을까 하는 것이고, 이와 관련해서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서 20세기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 · 시성에 대해 어떤 결정을 내릴지 주시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비록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저희 수도원 입장에서는 이번 100주년을 맞이하여 시복시성 운동이 가시적 성과를 거두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습니다. 

 

장정란 교수님께서 잘 정리해 주셨지만 이 시복시성의 대상자에는 인종적으로 독일인과 한국인, 신분적으로 남녀 수도자, 성직자 그리고 평신도인 헌신자까지도 다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저희 수도원뿐 아니라 오틸리아 연합회와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원 측에서도 매우 의미 있는 사업이며, 그만큼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한국의 20세기 순교자들의 시복시성이 통합되어 단일화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만, 그래도 저희 베네딕도회 수도원과 연관된 분들의 시복시성 운동이 독립적으로 진행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으며, 다른 분들의 기도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김구인 : 예 고맙습니다. 아무래도 연관해서 듣는 것이 좋겠습니다. 장정란 교수님, 시복시성에 대한 말씀해 주십시오. 

 

장정란 : 저는 역사는 ‘기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여기 산 역사이신 원로 사제님들께 간청드리고 싶습니다. 회고록을 남겨주시면 안될까요? 회고록을 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압니다. 그러나 회고록에 버금가는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요즘 사학계에서는 구술사에 큰 비중을 두고 권장하며 그것을 1차 사료로도 많이 채택합니다. 그러니까 시간이 좀 있으신 젊은 사제, 수사님들께서 어떤 주제를 공동으로 정하고 원로 사제들을 괴롭히면서 아주 단편적으로 기억나시는 것들, ‘덕원에서 이랬다’, ‘우리가 신학생 때는 이랬다’ 하는 이야기를 졸라 녹음하고 기록으로 남기면 역사의 훌륭한 기초 자료가 될 것입니다. 그런 방법으로라도 개인 회고록을 남겨주시면 제일 감사하겠고, 또한 통사적 구술사를 베네딕도 수도회 차원에서 기록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단편적인 기억들도 아주 귀한 사료가 될 것입니다. 우선 시복시성 대상자 36위에 대한 기억과 기록이면 더욱 좋을 것 같습니다. 

 

김구인 : 예, 고맙습니다. 제가 수도원에 살면서 보니까 독일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보다 훨씬 기록을 많이 해요. 그래서 우리들이 정신을 좀 차려야 할 것 같습니다. 통감합니다. 건축에 대해 발표하신 김정신 교수님, 말씀해 주십시오. 

 

김정신 : 신앙이 풍요롭고 종교가 강할 때 종교문화의 꽃인 건축과 예술도 훌륭한 것을 남기게 됩니다. 삼국시대 이후 근세까지 우리나라의 문화는 불교 문화를 중심으로 발전되어 왔고, 많은 문화유산들이 불교와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그런데 20세기 종교 건축문화유산을 지난 1년 동안 조사해 보았더니 불교 건축은 20세기에 지정할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단청 정도는 과거 사찰에서 내려오던 장인조직이 태고종을 중심으로 이어지고 있지만 근대의 시대성과 문화를 반영한 불교건축물은 찾지가 쉽지 않았습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20세기의 근대 문화재 중 종교 문화유산으로서는 가톨릭이 여러 종파 중에서 50%를 차지할 정도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번에 교회 문화유산 지침이 주교회의에서 인준이 되어 곧 교구에 내려가게 됩니다. 저도 지침 작성에 참여한 사람으로서 한 가지 분도회에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서울교구에는 교구 안에 건축사 사무소가 있고 수원교구에는 건설 본부가 마련되어 있고 또 여러 교구에서는 신부님들이 건축을 공부하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활동의 성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현대의 종교 예술이나 건축은 교회 내에서만이 아니라 교회 안팎에 개방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예술을 창조하는데 수도회가 적극 나서야 한다고 굳이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알빈 신부님 같은 분이 나오기를 기대할 수도 없고 현재 한국 건축계의 상황에서는 그럴 필요도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꼭 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지난 5년 동안 명동 성당을 비롯한 문화재 성당건물의 보수를 보면 보수기법과 전문기술이 전수 · 축적되지 못하고 항상 우리는 처음에서부터 계속 반복해서 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교회의 전통적인 건축 기법, 기술을 보존하고 지켜나가는 것은 경제성이나 상업성이 없기 때문에 일반 업체는 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저는 분도회가 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지금도 성작이나 성미술을 보수하려면 여러 군데를 거치다가 결국 분도회로 오게 된다고 들었습니다. 또 스테인드글라스 보수도 마찬가지구요. 좋은 문짝이나 가구를 만들려면 분도 가구공예소를 찾습니다. 새로운 건물을 위한 것보다는 20세기의 근대 문화재 유산의 많은 부분을 우리 가톨릭이 갖게 되는데 이것을 지키고 보존하는 것은 제 생각으로는 왜관 분도 수도회의 장인들밖에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분야의 전문성을 갖는 공방이 계속되어지고 또 건축에도 전통이 지켜진다면 100주년을 맞이하는 지금 가톨릭교회뿐만 아니라 20세기 근대 문화재를 지키고 보존하는 데 절실히 요청되는 사항이기도 합니다. 그런 말씀을 드리는 것으로 정리하겠습니다. 

 

김구인 : 예, 감사합니다. 토론자로 나오신 김영태 교수님 말씀해 주십시오. 

 

김영태 : 우리의 근대 건축 형성에 끼친 분도회의 역할이 굉장히 컸다고 생각하면서 그동안 이 땅에 일구어 놓은 건축적 업적들을 높이 평가합니다. 한국에 서구건축이 이입되면서 건축된 명동 성당이라든지, 대구 계산동 성당 등은 근대 이전의 과도기 양식주의 건축입니다만 분도회에서 한국에 진출하여 수행한 선교 수도 사업 건축은 정신적으로나 기술적으로 근대의 시대 배경이 바탕이 된 완전한 근대 건축입니다. 즉 합리적 기능주의 건축이라는 것입니다. 근대의 신 재료인 철, 유리, 시멘트를 건축재료로 적극 사용했고 건축구조도 철근 콘크리트 구조와 시멘트 벽돌을 사용한 현대적 건축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이 한국 근대 건축사에 중요하게 평가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이 심포지엄을 통해서 성직 수도자이며 건축가인 알빈 신부님의 업적과 한국 근대건축의 형성에 끼친 공적을 깊이 상기하고자 합니다. 이 땅에 그가 남긴 작품들은 우리의 건축유산으로 귀중하게 보존 활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심포지엄이 진행되고 있는 이 장소는 알빈 신부님의 대표작일 수 있는 1975년에 완공된 성당이 있던 터였습니다. 신축으로 멸실되어 흔적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안타까운 마음 그지없습니다. 분도회가 일구어 놓은 그동안의 역사와 정체성을 허물지 말고 보존하고 활용하여 가꾸어 나가는 분도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근년에 와서 현대화 내지 개발의 명분으로 이 땅에 고귀한 문화유산들이 허물어져 소멸되어 가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분도회 한국 진출 10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리고 그동안의 노고에 사의를 표하며, 앞으로의 100년을 바라보며 더욱 큰 발전과 성숙 있으시길 바랍니다. 

 

김구인 : 예. 교수님, 고맙습니다. 아직 우리가 짓고 있는 중입니다. 다 되고 나서 감탄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정리하게 앞서 질문 하나가 들어왔습니다. 마르 박사님께서 알빈 신부님에 대해 조금 말씀을 보태 주시겠다고 하시고, 연길교구장이셨던 브레허 주교 아빠스님에 대해 설명을 해 주셨으면 좋겠다는 질문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마르 박사님께 부탁드리겠습니다. 

 

마르(통역 : 이유재) : 어제 시간이 주어지지 않아서 제 발표문에 있는 연길교구와 분도회의 선교에 대해 발표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브레허 주교님의 활동과 그의 성격과 신앙심과 이해심에 대해 충분히 이야기하지 못한 게 아쉽습니다. 지금은 알빈 슈미트 신부님에 대해 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보기에 덕원과 연길 수도원의 제일 큰 차이점을 우리는 알빈 신부님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알빈 신부님은 연길에서야 완전히 새로운 전례에 맞는 성당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덕원에서는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김구인 : 예, 감사합니다. 주제를 발표하시기 위해 논문을 쓰시고 프린트하고 이 책으로 묶고 발표하신 분들께서 정식으로 논문을 책으로 만들 때 교정을 하시고 좀 더 내용을 덧붙일 것 같습니다. 불만이 있으시더라도 시간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다른 기회를 만들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고, 지금 여기 모든 형제들과 심포지엄에 참석하신 분들이 함께 인사도 나누고 큰 박수를 드리도록 하십시다. 정말 수고하셨고 감사드립니다.

 

[교회사 연구 제33집, 2009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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