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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세계] 교황님의 주케토(Zucchetto) - 선종하신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을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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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3-08 ㅣ No.1558

[특별기고] 교황님의 주케토(Zucchetto)


- 선종하신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을 기억하며 -

 

 

2022년 12월 31일 한국 시간 오후 5시 34분(로마 시간 오전 9시 34분)에 베네딕토 16세(Benedict XVI, 재위 2005~2013) 교황님이 선종하셨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선종하신 후, 2005년 4월 19일에 콘클라베가 열린 지 이틀 만에, 그리고 총 네 번째 투표에서 제265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1) 당시 매스컴에서는 역대 콘클라베 중에서도 매우 빠른 결정이었다고 보도하였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은 신앙과 교의의 수호자이자 전례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찼던 교황으로 유명하였고, 그 덕에 “철갑 추기경”, “요한 바오로 3세”, “하느님의 충복”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교황님이 선종하신 바로 그날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는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교황 레오 13세와 비오 9세의 전례화와 흰색 수단 조각이 들어 있는 편지, 그리고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이 쓰셨던 주케토(Zucchetto) 전시의 개막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흰색 수단 자락을 날리며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손을 잡고 카스텔 간돌포(Castel Gandolfo) 정원에서 춤추시던 영화 「두 교황(The Pope)」 속 교황님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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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어로 ‘주케토’는 ‘작은 조롱박’이라는 뜻으로 교황, 추기경, 주교 그리고 아빠스가 착용하는 작은 반구형 모자이다. 주케토는 머리 가운데 부분의 머리카락을 둥글고 짧게 깎는 삭발식을 한 성직자의 건강을 위해 사용한 것에서 유래하였다. 삼각형 모양의 조각 여덟 개를 이어서 만들며, 꼭짓점이 모아지는 중심에 짧은 끈을 달아 손잡이처럼 살짝 잡아 쓰고 벗을 때 편리하게 하였다. 주케토의 색깔은 교황은 흰색, 추기경은 주홍색, 주교는 자주색이다. 주케토 바깥쪽은 고위 성직자의 전례복에 사용되는 물결무늬(moire) 실크로 만들었으며, 안쪽은 부드러운 흰색 스웨이드(suede)를 사용하여 착용감을 좋게 하였다.

 

주케토를 제작한 곳은 로마 키아라(Chiara) 거리에 있는 양복점 ‘감마렐리(Gammarelli)’이다. 조반니 안토니오 감마렐리(Giovanni Antonio Gammarelli)가 1798년에 설립하였으며, 오늘날까지 숙련된 장인들이 교황과 성직자들의 전례복, 성직자복 등을 만들고 있다. 비오 11세, 비오 12세, 성 요한 23세, 복자 바오로 6세, 요한 바오로 1세, 성 요한 바오로 2세 등 교황복 공식 업체로서 여러 교황의 옷을 제작하였다. 물론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주요 고객이다. 선종하신 베네딕토 16세 교황님도 이 양복점에서 옷을 맞추어 입으셨다. 교황으로 선출된 후 성 베드로 대성전 발코니에서 신자들에게 첫 강복 “우르비 엣 오르비(Urbi et Orbi)”를 하기에 앞서 신임 교황은 3평방미터의 ‘눈물의 방’으로 들어가 감마렐리에서 제작해 온 세 벌의 수단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여 입고 그 위에 교황복을 입었다. 교황복이 맞지 않아 좀 곤란했었다는 이야기는 후일담으로 회자되곤 하였다.

 

주케토를 담아둔 흰색 보관함에는 “이 주케토는 명예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 착용하셨습니다.”라는 게오르그 겐스바인(Georg Gänswein) 대주교의 서명과 메모가 들어 있다. 서명한 날짜는 ‘2018년 3월 21일’이었다. 게오르그 겐스바인 대주교는 2005년 4월 19일부터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개인 비서로 활동하였고, 2012년 12월 7일에는 우르브스 살비아의 대주교이자 교황청 궁내원장(Prefecture of the Papal Household)으로 임명되어 명예 교황 베네딕토 16세를 보좌하였다. 2007년 이탈리아의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 도나텔라 프란체스카 베르사체(Donatella Francesca Versace)가 남성복 ‘클러지맨 룩(clergyman look)’을 디자인할 때 겐스바인 대주교에게서 영감을 받았다고 언급하여 유명세를 타기도 하였다. 겐스바인 대주교는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마지막 선종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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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럽이 사랑한 백 앤 슈즈(BAG & SHOES)”

 

한국교회사연구소가 유물 감수와 자료 제공, 소장품 설명 등의 작업에 참여한 흥미로운 전시가 지난 2022년 12월 31일(토)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개막하였다. 이랜드 뮤지엄과 세종문화회관이 공동으로 주최한 전시로, 전시 제목은 “셀럽이 사랑한 백 앤 슈즈(BAG & SHOES)”이다. 빅토리아 시대부터 최근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세계 유명 인사가 직접 착용했던 옷, 신발, 구두를 전시하는데 모두 이랜드 뮤지엄 소장품이다. 마이클 잭슨의 대표적인 댄스 문워크(moonwalk)를 처음 출 때 신었던 검정색 구두부터 「보헤미안 랩소디」를 부른 그룹 퀸(Queen)의 전설 프레디 머큐리가 입었던 재킷과 구두도 볼 수 있다. 전시는 총 4막으로 구성되었는데 전시의 처음을 시작하는 “세계의 리더들”에 교황 레오 13세의 진홍색 구두, 교황 비오 9세의 붉은색 구두와 수단 조각이 들어 있는 편지,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주케토가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김수환 추기경님의 사진과 친필 사인이 있는 『공동번역 성경』(1986), 가죽으로 만든 책갈피, 장미꽃이 새겨진 나무 묵주, 새해(1999년) 연하장 등 의미 있는 추기경님의 유품도 함께 볼 수 있다.

 

 

 

 

그분의 이름, 베네딕토

 

새로운 교황님이 선출될 때마다 교황님이 어떤 이름을 택하는지에 대한 관심과 해석 또한 분분하다. 선종하신 교황님은 자신의 이름을 ‘베네딕토’로 정한 이유를 2005년 4월 25일 일반 알현 중에 밝히셨다. “첫 번째 이유는 베네딕토 15세 교황님은 혼란의 시기였던 제1차 세계대전 때 대담한 용기로 전쟁으로 인한 더 이상의 비극을 막고 그로 인한 불행한 결말들을 줄이려고 노력하신 분입니다. 저도 그분을 본받아 사람들 사이의 화해와 조화를 위해 봉사하고자 이 이름을 택했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서방 수도원의 아버지이며 유럽의 수호성인인 누르시아의 베네딕토 성인의 정신을 이어가기 위함입니다. 성인은 자신의 규칙서에 ‘그리스도의 사랑 이외에 어떤 것도 좋아하지 말라’고 권고했습니다. 저는 베네딕토 성인에게 우리가 우리 삶의 중심에 그리스도를 확고히 모시고 살아가도록 도와달라고 청합니다.”라고 하였다.2)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취임 미사는 2005년 4월 24일 오전 10시(한국 시간 오후 5시)에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봉헌되었다. 미사 강론에서 교황님은 자신의 의지와 생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역사의 이 시점에서 교회를 이끄시도록 온 교회와 더불어 주님의 말씀과 뜻을 경청하고, 주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친교를 강조하였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 삶 안에 모시면 우리는 삶을 자유롭고 아름답고 위대하게 하는 그 무엇 가운데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아닙니다! 오직 이 친교 안에서만 생명의 문이 활짝 열립니다. 오직 이 친교 안에서만 인간 실존의 위대한 잠재력이 진정으로 드러납니다. 오직 이 친교 안에서만 아름다움과 자유를 체험하게 됩니다. …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해 문을 넓게 여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참된 생명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교황님이 남긴 회칙, 교서, 권고 그리고 저서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교황에 선출된 그해에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Deus caritas est, 2005. 12. 25)」라는 회칙을 발표하였다. 책으로 출판된 이 회칙은 이탈리아에서만 300만부가 넘게 팔렸다. 교황님은 이 회칙에서 ‘교회의 삶의 원칙인 사랑의 중요성과 가치를 재인식시킴으로써 삼천년 기를 향해 나아갈 교회의 미래지향적 방향 설정을 제시’하였다. 교황님은 2007년에 두 번째 회칙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Spe Salvi)」를 발표하였다. 이 회칙에서는 ‘신앙은 희망이며 우리는 기도 안에서, 우리의 삶과 고통 안에서 희망을 배우고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하며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참모습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2년 후인 2009년 교황님은 세 번째 회칙 「진리 안의 사랑(Caritas in Veritate)」을 발표하였는데 ‘바로 그리스도가 진리이시며 그분의 뜻과 계획 안에서 형제자매를 사랑해야 함을 강조하고, 자본주의화 확산과 이로 인한 문제에 대한 사회교리적 주장을 재확인’하였다.

 

교황님은 2,872일의 재임 기간에 「믿음의 문」, 「교회의 가장 깊은 본질」, 「교회 일치」, 「교황들」을 비롯하여 자의 교서를 17회 작성하였으며, 교회 생활의 정점인 성체성사에 관한 내용을 담은 「사랑의 성사」 외에 「주님의 말씀」, 「아프리카의 사명」 등 4편의 ‘교황 권고’를 남겼다. 저서 『나자렛 예수』는 신앙인들에게 호응을 받았으며, 20개 언어로 수백만 부가 출판되어 한국을 포함하여 72개국에서 읽히고 있다.

 


팔리움을 벗어놓고 떠난 교황

 

2013년 2월 11일 추기경 회의에서 교황님은 그 자리에 참석한 추기경들은 물론 이후 전 세계가 깜짝 놀랄 만한 중대 발표를 하였다. 2월 28일 오후 8시에 교황 직을 사임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셨다. 그레고리오 12세 교황 이후 598년 만의 일이었다. 교황님은 “하느님 앞에서 양심을 성찰하였습니다. 급변하는 세상에서 또한 신앙생활의 중대한 문제들로 흔들리는 세상에서 베드로의 직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몸과 마음에 힘이 없다는 확신이 들어 ‘온전한 자유’로 교황 직을 사임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생전에 교황 직에서 물러난 경우는 교황으로는 역사상 세 번째였다. 처음은 은수자였던 피에트로 다 모로네(Pietro da Morrone), 즉 교황 첼레스티노 5세(재위 1294. 7. 5~12. 13)였다. 첼레스티노 5세는 니콜라오 4세 교황의 선종 이후 27개월 동안 공석이었던 교황 직에 여든이 넘은 고령의 나이로 선출되었으나 교황 직무의 어려움과 실패를 경험한 후 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던 프랑스 샤를 2세의 영향을 받아 퇴위를 발표하고 다시 ‘피에트로 수도사’로 돌아갔다. 교황 첼레스티노 5세는 1313년에 시성되었다. 두 번째는 교황 그레고리오 12세(재위 1406~1415)였다. 대립 교황들이 난립하던 어지러운 시기에 교황이 된 그레고리오 12세는 혼란을 극복하는 과정 중에 교황 직에서 물러나야만 하였다.3)

 

그리고 세 번째가 베네딕토 16세 교황이다. 하지만 역대 교황 중에 ‘온전한 자유’로 사임한 교황은 처음이었기에 베네딕토 교황의 사임은 더 특별하게 받아들여졌다. 사임을 발표하기 전인 2009년 4월 28일 이탈리아 라퀼라(L’Aquila)에 있는 산타 마리아 대성전(Basilica of Santa Maria di Collemaggio)을 방문한 교황님은 교황 첼레스티노 5세의 유해 앞에서 잠시 머물다가 유해를 덮은 유리관 위에 교황의 권위와 직무를 상징하는 팔리움(Pallium)을 놓고 떠났다. 이 사건은 교황님의 ‘물러남’에 대한 숙고를 반영하는 일화로 언급되는데, 그 팔리움은 현재 산타 마리아 대성전에 전시되어 있다.

 

 

교황 베네딕도 16세와 한국교회사연구소의 인연

 

교황님은 한국교회사연구소의 설립자이신 최석우(崔奭祐, 안드레아, 1922~2009) 몬시뇰과도 인연이 깊다. 최석우 몬시뇰은 1957년 본(Bonn) 대학 유학 시절 당시 교수 신부였던 교황님께 기초신학을 배웠다. 2006년 연구소에서 간행한 『한국가톨릭대사전』(총 12권)이 완간되었을 때, 염수정 추기경(당시 서울대교구 보좌 주교 겸 총대리)과 최석우 몬시뇰을 비롯한 봉정단 12명이 직접 바티칸을 찾아 교황 베네딕토 16세께 봉정하였다. 『한국가톨릭대사전』은 두 명의 교황님께 봉정되었는데 전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에 이어 두 번째였다.4) 2006년 9월 27일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님은 “한국 교회에서 정말 큰 일을 해냈다.”며 대사전을 축복하고 봉정단의 손을 잡고 격려하였다. 최석우 몬시뇰은 “본 대학에서 기초신학을 배웠다.”고 특별한 사제 간의 인연을 밝히자 교황님이 매우 반가워하셨다고 회상하곤 하였다. 교황님은 1951년 6월 29일에 사제 서품을 받고 1952년 10월부터 프라이징(Freising) 대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1958년에는 프라이징 대신학교 정교수가 되었고, 1959년에 본 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1963년 뮌스터(Münster) 대학 교의신학 교수로 가기 전까지 기초신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최석우 몬시뇰은 1957년 1월 본 대학 대학원 박사 과정에 입학하였으며, 1961년 8월 23일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왔다.

 

서른 초반, 학생들을 가르치며 공부에 몰두하던 열정 넘치던 ‘그 시절의 기억’을 소환해준 ‘동양에서 온 고령의 사제’가 얼마나 반가웠을까? 스승과 제자였던 두 분이 다시 만났을 때 교황님은 곧 여든을 앞두고 있었고, 최석우 몬시뇰은 여든넷이었다.5) 그들의 인연은 다시 이어져 최석우 몬시뇰은 베르나르 르콩트(Bernard Lecomte)가 쓴 『마지막 유럽인 교황 베네딕토 16세(Benoît XVI Le dernier pape européen)』를 2008년에 번역하였다.6)

 

사임 후 교황의 여름 별장 카스텔 간돌포에서 지내던 교황님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선출되신 후 바티칸으로 돌아와 지난해 선종하기까지 ‘교회의 어머니(Mater Ecclesiae)’ 수도원에 머무셨다. 교황님이 선종하자마자 교황청 공보실에서는 교황님의 시신 사진을 공개하였고 전 세계 언론에 보도되었다. 평소 붉은색 구두를 즐겨 신으셨던 교황님은 검정색 구두를 신고 붉은색 제의를 입고 주교관을 쓰고 손에 묵주를 쥔 채 누워계셨다. 주교관 안에 교황님의 ‘주케토’를 쓰셨을까?

 

가톨릭교회의 관례대로 교황님의 선종 이후 베네딕토 16세의 유서가 공개되었다. 교황님은 “주님은 내가 미끄러질 때마다 항상 나를 품어주시고, 당신의 얼굴을 비춰주신다. 돌이켜보면 어둡고 힘겨운 여정조차 모두 나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고, 하느님께서 나를 잘 인도해 주신 것이 그 안에 있었음을 알게 된다.…예수 그리스도는 진정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며, 교회는 모든 부족함에도 진정으로 그의 몸이다.”라고 하신 구절이 마음에 닿는다. 교황님께서는 믿는 이들이 기댈 곳은 주님뿐이라 하셨고 또 교회의 부족함도 말씀하셨다. 완벽하지 않은 그 ‘부족함’에서 오히려 희망을 발견하고 싶다. 믿는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자녀들이 함께 부족함을 채워 나가는 과정에서 교회의 역사는 지속되고 교회의 미래를 희망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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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5년 4월 18일 월요일에 두 차례 투표하고 4월 19일 화요일에 두 차례의 투표를 하였다(페터 제발트 대담 및 정리, 김선태 옮김,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마지막 이야기』, 가톨릭출판사, 2017).

 

2) 손희송, 『우리 시대의 일곱 교황』, 가톨릭출판사, 2016 참조.

 

3) 존 노면 데이비슨 켈리 · 마이클 월시 지음, 변우찬 옮김, 『옥스퍼드 교황 사전』, 분도출판사, 2014.

 

4) 1998년에 『한국가톨릭대사전』 1~5권이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게 봉정되어 교황 도서관에 소장되었다.

 

5) 교황님은 1927년생이고 최석우 몬시뇰은 1922년생이다.

 

6) 베르나르도 르 콩트 지음, 최석우 · 변기찬 옮김, 『마지막 유럽인 교황 베네딕도 16세』, 분도출판사, 2008. 최석우 몬시뇰은 이 책을 번역한 이듬해 선종하였다.

 

[교회와 역사, 2023년 2월호, 글 송란희 가밀라(한국교회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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