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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신앙과 정치: 정의, 하느님이 누구이신지를 묻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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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2-28 ㅣ No.1290

[신앙과 정치] 정의, 하느님이 누구이신지를 묻는 것



분노와 허무, 그리고 감동 없는 연민

나치 시대를 살았던 개신교 신학자 칼 바르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한 손에는 성경, 한 손에는 신문’을 들라고 했다. 하느님의 거룩한 말씀의 맥락을 세상과 역사 안에서 찾으라는 말이겠다.

새해 조간신문(경향신문과 한겨레)이 왔다. 약속이나 한 듯 ‘청년’이 기획의 큰 자리를 차지했다. ‘헬조선’(희망이 없는 지옥 같은 한국)의 붕괴를 원하는 청년들과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 ‘흙수저 계급’ 청년들의 ‘탈조선’이 1면부터 채워졌다. 그날 저녁, 5부 요인 초청 신년 인사회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10년 뒤 우리나라가 무엇으로 먹고 살지, 우리 청년들이 어떤 일자리를 잡고 살아가야 할지를 생각할 때마다 두려운 마음이 들곤 한다.”고 했다는 뉴스를 보았다.

당장 하루를 살기에도 팍팍한 시민들의 두려움과 10년 뒤를 고민하는 대통령의 고상한 두려움은 차원이 다르다. 그녀의 고백은 타성에 젖은 ‘감동 없는 연민’이다. 이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을 빌리면 “사정을 알면서도 시선과 생각과 행동을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시키는 사람의 태도”이다(2016년 제49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 이하 담화). 그래서 내가 어느 편에 서 있는지가 중요하다. 차원이 다르면 보는 시간과 공간도 달라질 뿐만 아니라 마음도 달라진다. 꼭 그렇다.

파이를 키우면 나눌 것도 많아진다며 재벌을 키웠지만, 부자들은 처음부터 함께 나눌 마음이 없었다. 오죽하면 재벌은 서민들의 골목상권마저 잠식하고, 20대 신입사원에게도 그는 전혀 희망하지 않는 희망퇴직을 권유할까?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옆 사람을 무너뜨려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팔꿈치 사회’의 무자비함 속에 내던져진 청년들, 폐지를 주우려고 어두운 골목길을 헤매는 노인들의 고단한 삶은 서로 크게 다르지 않다. 사회 안전망은 무너졌고 곳곳에 위험요소가 드러나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노인과 청년 자살률 1위는 결코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다.


불평등, 정의의 부재

어디서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었을까? 불평등의 심화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가난한 사람들의 우선권을 소생시킨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해 밀라노 엑스포 메시지에서 “모든 악의 뿌리는 부의 불평등”에 있고, “오늘날 노인들이 길거리에서 얼어 죽는 것은 강자들이 약자들의 위에 서는 경쟁의 법칙에 따른 결과”라고 일갈하였다. 또 자본이 인간을 지배하는 신자유주의가 극복되지 않는 한, 부의 불평등 구조는 해결될 수 없다고 했다. 2016년 어디한 곳, 한숨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이 없다.

경찰의 물대포에 맞은 백남기 임마누엘 농민이 사경을 헤매고, 민중을 총궐기 시켜 서울을 혼란에 빠뜨렸다면서 조계사로 피신한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을 체포하려고 수천 명의 경찰이 배치되었을 그때쯤 보았던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가 있다.

고려 말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탐관오리 길태미는 백성의 분노에 굴하지 않고 비웃듯 이렇게 말한다. “세상이 생겨난 이래 약자는 강자한테 짓밟히는 거야. 천 년 전에도 천 년 후에도 약자는 강자에게 빼앗기는 거라고. 세상의 유일한 진리는 강자는 약자를 병탄한다! 강자는 약자를 인탄한다! 이것만이 변하지 않는 진리야!” 비록 드라마지만 가진 자의 오만함을 거침없이 강변하는 길태미가 섬뜩한 것은, 가진 것이 별로 없는 서민들의 지옥 같은 삶이 오늘도 여전하기 때문이다.

가진 자는 더 갖게 되고 없는 자는 더욱더 빼앗기게 되는 이 폭력적 구조는 근본적으로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대로 “사회경제 제도가 그 뿌리부터 불의하기 때문”(「복음의 기쁨」, 59항)이다. 하지만 교황에게는 하느님께서는 무관심하시지 않을 것이라는 “근원적인 확신”(담화)이 있다. 하느님의 신의는 정의와 무관하지 않다. 하느님께서는 오만한 강자들에 의해 주변부로 밀려난 약자들의 고통과 불의한 처지를 그대로 두지 않으신다. 하느님의 본질적 속성이 정의이기 때문이다.

‘정의와 자비’는 하느님에게서 같은 뿌리를 가진다(‘한일 위안부 합의문에 대한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의 입장’ 참조). 불평등을 비롯한 우리 시대의 모든 문제는 정의의 부재에 있다. 그래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오랜 물음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정의는 편파적이다

지금으로부터 2천 5백 년 전, 플라톤의 「국가(Politeia)」에서 가진 자 ‘길태미의 진리론’은 반박된다.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돌려주는 것이 정의(올바름)”라는 폴레마코스의 말에 트라시마코스는 “정의란 더 강한 자에게 주어지는 편익”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정의는 누군가의 편익이 된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마치 복음이 가난한 자를 우선하듯이, 그 ‘편익’이 강자의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의사나 항해사의 의술과 조타술은 그 기술을 가진 자의 것이 아니라 혜택을 받을 사람을 위한 것이다. 통치자의 치술(治術)도 마찬가지로 피지배자를 위한 것이다. 참된 통치자는 본성상 자신이 아닌 다스림을 받는 이의 편익을 생각한다. 또한 소크라테스는 이 대목에서 “정치적 무관심의 대가는 자기보다 못한 사람의 통치를 받는다.”며 우리 시대에도 쉽게 넘길 수 없는 충고를 한다(「국가」, I권 참조). 정의는 그렇게 약자의 편에서 우선한다. 「미국민중사」를 쓴 하워드 진은 “가난한 이들의 외침이 항상 정의롭지는 않지만,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정의가 무엇인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다.


결국 무엇이 정의일까? 가난과 불평등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고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되었다면 그것을 회복하는 것, 곧 인간의 하느님 모상성을 회복하는 것이 정의가 아닐까! 프란치스코 교황은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풀이하면서 “이 세상의 고통 앞에서 걸음을 멈추는 법을 배우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라고 한다.

경쟁이 내면화된 팔꿈치 사회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길을 멈추지 않는다. 나 이외 것에는 무관심일 뿐이다. 그리스도인의 신앙도 어느덧 이웃의 고통 앞에서 핑곗거리를 찾는 바리사이와 같이 되어버렸다. 국가 지도자들에게 ‘직업과 땅과 집’이 없는 이들을 생각하라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호소는 구체적이다. “직업이 없으면 자존감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고 희망을 사라지게 한다면서, 특별히 고용불안에 시달리며 위태로운 노동조건에 놓인 노동자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가져달라고 요청한다(담화).


무관심은 죄악, 정의를 실현하라

초월적 하느님을 알 수 있는 주요 속성이 정의라면, 정의의 실현은 신앙의 문제이다. 그것은 또한 세상에서 하느님의 흔적을 찾는 신학적 작업이기도 하다. 그런데 정의는 구체적으로 정치의 영역에서 실현된다.

정치는 독재군주의 통치가 아니다. 민주주의 이전의 지배자는 자신을 우상화하고 신성화했다. 하지만 권력이 나뉜 민주주의 사회에서 지배자의 신비화 주술은 통하지 않는다. 정치는 대화와 소통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에서 정치가 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정치와 통치를 혼동하기 때문이 아닐까.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돌아온 프리모레비는 정치에서 소통이 단절된 독재적 통치의 단면을 고발한다. 그는 히틀러 치하에서 “진실은 위에서 명령한 한 가지밖에 없다.”면서,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모르는 사람은 질문하지 않으며, 질문한 사람에게 대답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었다.”고 말한다. “이런 식으로 해서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무지를 획득하고 방어했고 입과 눈과 귀를 다문 채 자신들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환상을 만들어갔다. 그렇게 해서 자신은 자기 집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의 공범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이것이 인간인가」, 돌베개, 2012년, 271. 276쪽).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환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플라톤이 스승 소크라테스의 무고한 죽음을 평생에 걸쳐 밝혀냈듯이, 그리스도인 또한 스승 예수의 십자가 죽음의 이유를 이 세상에 설명해야 한다. 그것이 선교이다. 세상에 대해 눈과 귀와 입을 다문 채 하느님 말씀을 선포할 수는 없지 않은가. 세계화된 무관심의 죄악성을 고발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뜻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 오민환 바오로 - 가톨릭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뮌스터대학교에서 기초신학을 공부하였다. 현재 기쁨과희망 사목연구원 연구실장으로 있으며, 신앙의 희망을 이성적으로 설명하면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사회적 책무에 대한 작업을 지속해서 진행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6년 2월호, 오민환 바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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