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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부활 제5주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한국 교회의 인물상: 한국의 마더 테레사, 문애현 요안나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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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3-08 ㅣ No.1557

[한국 교회의 인물상 · 125] 한국의 마더 테레사, 문애현 요안나 수녀 (1)

 

 

머리말

 

2021년 12월 14일 충청북도 증평군청 별관 증평기록관에서는 ‘증평 천주교 메리놀병원’(이하 증평 메리놀병원)의 역사가 담긴 특별 기획전 “증평, 기록의 정원” 개막식이 열렸다. 여기에는 증평 메리놀병원 초대 간호사로 활동하였던 메리놀 수녀회의 문애현(Jean Maloney, 1930~ ) 수녀가 참석하여 소회(所懷)를 밝혔다. “당시 많은 수녀가 병원에서 일하고 환자를 돌보았습니다. 저는 일을 많이 하지 못해 부끄럽습니다”, “수녀와 직원들이 아픈 사람들을 치료했습니다. 증평을 잊을 수 없지요. 이렇게 발전해 기쁩니다.”1)

 

한편 2022년 6월 26일 오전 10시 30분 청주교구 증평 본당에서는 증평 메리놀병원 시약소 부활 기념 미사를 봉헌하였다. 이날 행사는 이길두(李佶頭) 요셉 주임 신부의 은경축(사제 서품 25주년) 감사 미사와 함께 증평 메리놀병원 현판식과 메리놀 외방전교회(이하 메리놀회) 함제도(咸制度, Gerard E. Hammond, 1933~ )2) 신부에게 감사패를 전달하는 시간으로 진행되었다.

 

이길두 신부는 “메리놀병원이 의료 행위로 그리스도교적 사랑을 실천했다면 새롭게 부활한 시약소 건물에서도 이러한 뜻을 이어받아 그리스도교의 가치를 지역 안에서 실현하는 활동들을 진행할 것”이라며, “단순한 건물의 부활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적 가치가 지역 안에서 부활한다는 점에서 이번 시약소 부활은 큰 의미가 있다.”고 전하였다.3)

 

증평 메리놀병원은 1956년 9월 설립 후 1990년까지 3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충북을 비롯한 전국의 아픈 환자들을 치료하며 사회사업 정신을 실천하였다. 이번 호와 다음 호까지 부산 메리놀병원, 증평 메리놀병원에서 활동했을 뿐만 아니라 부산 · 인천 · 서울 등에서 의료 사목, 노동운동, 여성인권운동을 펼친 문애현 수녀의 생애를 통해 메리놀 수녀회가 해방 후 한국 사회에 기여한 업적을 확인하고자 한다.

 

 

메리놀 수녀회 입회와 한국 파견

 

문애현 수녀는 1930년 1월 16일 미국 뉴욕주의 중소 도시 시러큐스(Syracuse)에서 아버지 마이클 멜로니(Michael Maloney)와 어머니 엘리자베스 멜로니(Elizabeth D. Maloney) 사이에서 쌍둥이로 태어났다.4) 그녀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었지만, 어머니가 재혼하여 새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으면서 자랄 수 있었다. 현재 문 수녀의 쌍둥이 동생 조안(Joan)은 결혼하여 6남매를 낳고 고향 시러큐스에서 살고 있다.5)

 

문애현은 1947년 뉴욕주 시러큐스에 있는 대성당고등학교(Cathedral High School)를 졸업하고,6) 1950년 시러큐스에 있는 성 요셉 간호학교(St. Joseph’s School of Nursing)에서 간호학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리고 그해 9월 6일 뉴욕 메리놀 수녀회(Maryknoll Sisters)7)에 입회하였다. 그녀의 입회 계기는 간호학교 졸업반 때 뉴욕에 있는 병원에서 실습 생활 중 만난 메리놀 수녀회 수녀의 영향이 컸다. 문애현은 메리놀 수녀의 영향으로 메리놀 수녀회 본원이 있는 뉴욕주 오시닝(Ossining)에 가서 성모님의 언덕(Mary’s Knoll)이라는 뜻의 ‘메리놀’에 발길을 올리던 그 순간 이미 그녀는 성모님께 온전히 자신을 바친 것으로 생각하였다고 한다.8)

 

문 수녀는 1953년 3월 7일 첫 서원 직후 한국으로 파견되었다. 같은 해 10월 1일 부산에 도착한 그녀는 오전에는 한국어를 공부하고,9) 오후에는 부산 메리놀병원 소아과 외래 진료소에서 간호사로 일하면서 아이들을 치료하며 어머니들에게 건강 교육을 하였다. 한국전쟁 직후였던 당시 부산은 병든 피난민들로 인산인해였다. 또한 한국전쟁의 참화로 많은 한국인이 식량 부족으로 굶주렸으며, 결핵 등 전염병에 시달렸다. 부산 메리놀병원은 그들에게 보금자리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20명의 수녀와 100여 명의 직원들이 하루 2천 명이 넘게 밀려드는 환자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당시 부산에는 메리놀병원, 독일적십자병원, 분도병원, 일신병원 등이 있었으나 환자들을 치료하는 데 턱없이 모자랐다.

 

“많이 힘들었습니다. (병원에) 오는 모든 사람을 돌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을 돌려보내야 했고, 그들이 다음 날 아침에 돌아오지 않았을 때 그들이 우리의 부족함 때문에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몹시 괴로웠습니다.”10)

 

문애현 수녀는 오전 8시부터 오후 9시까지 종일 일했는데도 환자를 다 볼 수 없었다. 입원실도 턱없이 모자라 환자들이 대기하다가 돌아가기 일쑤였다. 환자 100명 중 5명만 가려서 병원에 입원을 시킬 수 있었는데, 그 책임을 그녀가 맡았다. 그래서 그녀는 내일 오라고 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고, 다음 날 그 사람이 오지 않으면 혹시 죽었나 싶어 궁금하고 가슴이 아팠다고 회고한다.

 

 

‘증평 천주교 메리놀병원’

 

한국전쟁 이후 전쟁 복구 및 의료사업 지원에 주력한 메리놀회는 1953년 충북 지역 포교권을 위임받아 사목 활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메리놀회 한국지부장이자 훗날 청주대목구 초대 대목구장이 되는 파디(James V. Pardy, 巴智, 1898~1958) 신부가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의료 선교를 펼치던 메리놀 수녀회에 충청북도 의료 선교를 요청하여 1956년 9월 괴산군 증평읍에 증평 메리놀병원이 개원할 수 있었다.11)

 

 

 

문애현 수녀는 부산 메리놀병원에서 3년을 보낸 후 1956년 11월 Mary Augusta Hock(책임 수녀), Marie Angelica Corazon(원장 수녀)과 함께 간호사 수녀로서 증평에 파견되었다.12) 이들은 증평 메리놀병원에 필요한 의약품을 챙겨 부산역을 떠나 증평행 기차에 올랐다. 이들은 병원 건물이 지어지는 동안 옆 건물에서 먼저 진료를 보기 시작하였다. 매일 이들은 꼬박 8시간씩 환자들을 돌보았다.

 

그리고 1957년 2월, 드디어 증평 메리놀병원이 개원하였다. 내과, 산부인과, 소아과만 개원했음에도, 5일장이 서는 ‘장날’이 돌아오면 병원 앞에는 기다란 대기 줄이 생겼다. 그해 5월부터는 거리가 멀어 병원에 방문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자동차를 몰아 여러 지역(괴산, 진천, 음성, 주덕, 미원, 오송, 오창, 청주 등)을 방문하여 순회 진료도 시작하였다.13) 기록에 따르면, 증평 메리놀병원에 찾아온 환자 수는 1958년 33,657명, 1959년 34,881명, 1960년 36,078명이었다.14)

 

증평 메리놀병원에서 20년 넘게 근무하였던 정기선(81세)은 “진료를 위해 방문했던 사람들이 새벽부터 줄을 서서 병원 앞부터 증평 지서까지 500m나 됐었다.”며, “리어카를 타고 오는 사람, 길바닥에 누운 사람 등 진료를 봐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하루에 진료 볼 수 있는 인력이 한정적이었기 때문에 중증 환자 여부를 따져 번호표를 받은 사람들만 진료를 보고 갔다.”고 한다.15)

 

증평 메리놀병원에서는 전염병 등의 예방 접종과 건강 교육의 중요성을 홍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문애현 수녀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엔 영양 부족으로 빈혈, 결핵, 소화 불량, 뇌막염, 장티푸스, 피부병 등을 앓는 여러 환자가 있었다. 가난했던 시절이라 소화제도 없었다.”고 전하였다. 이어 “리어카를 타고 온 아저씨가 빈혈이 심해 쓰러졌을 때 잘못되는 줄 알고 너무 놀랐다.”고 회고하였다. 그녀는 “어린이 예방 접종은 물론 어머니들에게 보건 교육도 하였다. 치료하기 전 예방에도 신경을 썼다.”고 하였다.16)

 

의료 시설이 열악했던 당시 증평 지역 주민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의 환자까지 책임지던 증평 메리놀병원은 이후 1976년 증평 수녀의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리고 1990년 폐원하였다. 이후 병원 건물이 있던 자리는 주차장으로 변하였고, 소외되고 병에 시달리던 사람들과 함께하였던 증평 메리놀병원은 증평 지역 사람들의 기억 속에만 남았다. 하지만 약을 지었던 시약소 건물이 현재까지 증평 성당 한 켠에 남아 있었고, 증평 본당 주임 이길두 신부와 신자들이 시약소 재건을 위해 힘을 모아서 32년 만에 지역민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2022년 6월 26일 오전 10시 30분 증평 본당에서는 증평 메리놀병원 시약소 부활 기념 미사를 봉헌할 수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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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터뷰] 요안나 수녀의 감회, 60년 전 증평메리놀병원 산증인」, 『뉴시스』 2021년 12월 14일 자.

 

2) 1933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아일랜드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메리놀 신학대학을 졸업 후 뉴욕 메리놀회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1960년 첫 선교지로 한국에 온 뒤 청주교구 북문로 · 수동 · 괴산 본당에서 주임으로 일하고 청주교구 총대리로 오랫동안 활동하였다. 1989년 6월 29일 메리놀회 한국지부장에 임명된 뒤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 사업, 특히 결핵 환자 지원 사업에 힘쓰고 있다(함제도 신부의 생애에 관해서는 함제도 구술, 이향규 · 고민정 · 김혜인 기록 · 정리, 『선교사의 여행―남북한을 사랑한 메리놀회 함제도 신부 이야기』,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2020 참조).

 

3) 「청주교구 증평본당, ‘증평 메리놀병원 시약소’ 지역 사랑방으로 재건」, 『가톨릭신문』 2022년 7월 3일 자, 5면.

 

4) 메리놀 수녀회 아카이브(https://www.maryknollsisters.org/sisters/sister-jean-maloney/).

 

5) 권은정, 「사람들 속에서 살다 - 메리놀수녀회 문애현 요안나 수녀」, 『가톨릭평론』 창간호, 우리신학연구소, 2016, 107쪽.

 

6) 문애현 수녀의 집안은 할아버지 때 아일랜드에서 건너온 전통적인 가톨릭 집안이었다. 어머니 엘리자베스는 쌍둥이 딸들을 가톨릭 학교에 보내 가톨릭 신앙 교육에 신경을 썼다(권은정, 위의 책, 107쪽).

 

7) 1912년 1월 6일 로저스(Mary Joseph Rogers, 1882~1955) 수녀가 설립한 미국 최초의 여성 수도회이다. 보스턴 공립학교 교사였던 로저스 수녀는 외방 선교에 관심이 있던 여성들을 모아 메리놀회에서 간행하는 잡지 The Field Afar의 편집 일을 도왔는데, 이들 중 수도 생활을 희망하는 여성들이 생겨나면서 수도 단체를 설립하였다. 1920년 2월 14일에 로마 교황청의 인준을 받았다. 초창기 수녀회 명칭은 ‘성 도미니코 외방선교 수녀회(Foreign Mission Sisters of St. Dominic)’였는데 1954년에 메리놀 수녀회로 개칭하였다.

메리놀 수녀회 역시 메리놀 외방전교회와 같이 아시아 선교를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그리하여 1921년 홍콩에 처음으로 회원을 파견하였고, 1924년에는 한국에도 수녀들이 진출하였다. 평양 지목구에서 사회사업, 의료사업, 교육사업 등에 종사하던 메리놀 수녀회는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로 영유(永柔) 수녀원에 감금되었다. 그리고 1942년 6월 1일 메리놀회 선교사들과 함께 미국으로 강제 추방되었다. 이후 메리놀 수녀회는 1949년 12월 한국에 재진출하여 한국전쟁으로 일본에 잠시 피난하였다가 1951년 부산에서 본격적으로 의료 선교를 시작하였다(『한국가톨릭대사전』 4, 한국교회사연구소, 2589~2593쪽).

 

8) 권은정, 위의 책, 108쪽.

 

9) “먼저 필요한 말을 배웠지요. ‘궁둥이 내미세요. 주사 맞습니다. 변소는 층계 아래쪽에 있습니다. 내일모레 다시 오세요, 아기가 많이 아파요?’”(권은정, 위의 책, 110쪽).

 

10) Catholic American Eyes in Korea Maryknoll Priests Working in Korea(https://catholicamericaneyesinkorea.blogspot.com/2010/01/sister-jean-maloney-maryknoller-at-80.html).

 

11) 원래 병원 설립 장소로 처음에는 충북 음성이 논의되었으나 1955년 증평으로 바뀌었다(증평기록관 아카이브, 「증평 메리놀병원 업무활동보고(1956)」). 당시 충북 음성에 병원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은 증평읍장과 신자 손승모가 증평에 병원을 유치하고자 청주 대목구를 방문하고 사비를 들여 증평 성당에 땅을 기부하였다(「충북의 미래유산을 찾아서 - Ⅹ. 추억 뒤안길 ‘증평 천주교 메리놀병원’」, 『중부매일』 2021년 9월 9일 자).

 

12) Rev. Robert Martin Lilly, M.M., 『MISSION IN THE SOUTH』, 오늘의 말씀, 2002, 259쪽.

 

13) Rev. Robert Martin Lilly, M.M., 위의 책, 260쪽.

 

14) 증평기록관 아카이브.

 

15) 「충북의 미래유산을 찾아서 - Ⅹ. 추억 뒤안길 ‘증평 천주교 메리놀병원’」, 『중부매일』 2021년 9월 9일 자.

 

16) 「[인터뷰] 요안나 수녀의 감회, 60년 전 증평메리놀병원 산증인」, 『뉴시스』 2021년 12월 14일 자.

 

[교회와 역사, 2023년 2월호, 글 이민석 대건 안드레아(한국교회사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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