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일)
(백) 부활 제5주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브레 신부의 묘지는 어디일까?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3-08 ㅣ No.1556

[기고] 브레 신부의 묘지는 어디일까?

 

 

11월은 모든 죽은 이들을 기억하는 위령성월이다. 매년 묘지에 가서 연도를 바치고 묘지를 둘러보면, 한때 우리와 함께했던 죽은 자들의 집을 거니는 느낌이 든다. 그러다 죽은 사람이나 산 사람이나 이웃이 있고 친구가 있구나 하는 생각도 한다. 용산 성직자 묘지와 대구 성직자 묘지를 방문하면 일반 묘지를 방문할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을 받는다. 교회사에 자주 등장하는 익숙한 이름 탓에 마치 잘 아는 분들 같다. 한 줄 정리처럼 간단하게 요약된 그들의 삶이 새겨진 묘지명(墓誌銘)을 읽다 보면 오히려 정겨움과 애틋함이 솟구친다.

 

장황하게 묘지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연구소로 온 ‘전화 문의들’ 탓이다. 브레 신부가 선종한 이후 서울 용산 성직자 묘지에 묻혔다고 하는데 묘지를 관리하는 용산 성당에 문의하니 브레 신부님의 묘는 없다고 한다. 답답해서 용산 성직자 묘지를 직접 가서 아무리 찾아도 브레 신부는 없고, 이런저런 다른 자료를 찾아봤으나 알 수가 없어 전화했다며 신부님 묘지의 행방을 알려달라는 내용이다. 용산 성직자 묘지에 없다면 브레 신부의 무덤은 어디에 있을까?

 

 

브레 신부, 한국 이름 백류사(白類斯)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인 루이 에우제브 아르망 브레(Louis Eusébe Armand Bret, 白類斯, 알로이시오, 1858~1908) 신부는 1858년 12월 17일 프랑스 코트도르(Côte-d’Or) 디종(Dijon)에서 태어나 소신학교와 대신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1879년 9월 12일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성인 시몽 마리 앙트완 쥐스트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Simon-Marie-Antoine-Just Ranfer de Bretenières, 白, 유스토, 1838~1866) 신부와 같은 디종 교구 출신이며 한국 성씨도 같다. 브레 신부는 1882년 3월 4일 사제 서품을 받고, 수품 직후 곧바로 말레이시아 페낭 신학교에 파견되었다. 이후 조선의 선교사로 파견되기까지 약 12년 동안 신학교에서 수사학과 교회사를 강의하였다. 1894년 페낭을 떠나 4월 21일 조선에 도착하였고, 드게트(Victor Marie Deguette, 崔東鎭, 빅토르, 1848~1889) 신부가 1887년 초에 설립한 원산 본당의 제4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2)

 

브레 신부는 전임 샤르즈뵈프(Joseph Marie Étienne Chargeboeuf, 宋德望, 스테파노, 1867~1920) 신부가 봐둔 성당 부지를 매입하였으나 예산이 부족하여 성당은 짓지 못하고, 이듬해 7월에 겨우 사제관을 지었다. 일명 ‘브레 신부의 발포사건’으로 불리는 교안(敎案)이 발생하자 약 1년 반 동안 용산 신학교 교수로 전임되었으나, 1897년 5월 다시 원산 본당 제6대 주임으로 돌아와 신자들은 물론 지역 주민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기 위해 힘썼다. 브레 신부는 1897년 김영렬(金英烈) 사도 요한이 간도에서 데려온 ‘12명’에게 세례를 줌으로써 간도 선교의 씨를 뿌렸으며, 죽을 때까지 간도 지역의 전교를 위해 노력하였다. 브레 신부는 중국 영토이면서 조선과 러시아 사이에 위치한 팔지(八池)와 훈춘 주변 지역에 있던 육도포(六道泡)도 방문하였다. 1906년에는 훈춘에 사는 일곱 가구를 예비 신자 명단에 올리고 또 다른 60가구의 세례도 준비시켰다.3)

 

한편 대한제국 정부는 1902년 북간도에 시찰관(視察官) 이범윤(李範允)을 파견하여 간도 지역 상황을 보고받았으며, 1903년에는 간도 백성들의 청원대로 이범윤을 간도 관리로 주재시킴으로써 간도에 사는 조선 사람들이 대한제국의 백성으로서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4) 브레 신부는 정부의 이러한 움직임과 간도에 새 교우촌이 형성되고 신자 수가 점차 늘어나는 것을 감안하여 북만(北滿, 길림)교구에서 관할하고 있던 간도 지역의 재치권(裁治權)을 조선 대목구가 가질 수 있도록 하자고 뮈텔(G.C.M. Mutel, 閔德孝, 아우구스티노, 1854~1933) 주교에게 제안하였다. 두 교구 장상들의 논의를 통해 마침내 조선 대목구는 간도 지역에 선교사를 파견하여 사목할 수 있는 재치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5) 1907년 9월 3일에 이 요청이 허락됨에 따라 브레 신부는 원산 본당을 떠나 11월부터 용정에 머물면서 본당 설립을 준비하였다.

 

1908년 간도에서 사목하던 브레 신부는 병 치료 차 원산으로 돌아왔다. 그는 다시는 원산을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 몹시 아파 오랫동안 편지를 쓰지 못했다며 자신이 그동안 겪은 병의 경과를 뮈텔 주교에게 알렸다.6) 당시 부주교인 두세(C. Doucet, 丁加彌, 가밀로, 1853~1917) 신부는 브레 신부에게 홍콩의 나자렛 요양소에 가서 쉴 것을 제안하였다. 브레 신부는 두세 신부에게 “감사하지만 라리보(A. Larribeau, 元亨根, 아드리아노, 1883~1974) 신부가 최선을 다해 보살펴 주고 있습니다. 신부가 하나뿐인 지역에서 선교사의 거처가 요양소가 될 수는 없고 지금 계절은 원산도 홍콩 못지않습니다.”라는 답신을 보냈다.7) 하지만 두세 신부는 같은 달 30일에 브레 신부의 편지를 다시 받았다. 그 편지에서 신부는 자신의 병명을 정확하게 알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8)

 

갑자기 의사는 “당신처럼 특별한 소명이 있는 성직자에게 의사들이 당신의 상태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좀 더 솔직히 말씀드리지 않은 것이 정말 이상하군요.” 하고 말했습니다.

 

“뭐라고요? 의사 선생님.”

“당신은 늑막염의 후유증으로 간경변에 걸린 것 같다는 말입니다.”

 

그가 떠나고 나서야 저는 잊은 기억을 새롭게 하고자 의학 사전을 찾아보았습니다. 이 전문적인 용어에 관해 신부님도 나보다 더 아시는 것이 없을 것으로 생각되어 사전에서 발견한 것을 알려 드립니다. 즉 “간경변은 불치병으로, 12개월 이상 견디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브레 신부는 이 편지의 끝을 “더 이상 저의 성무 활동을 기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엾은 간도 교우들은 그들에게 새로운 목자들이 오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라는 말로 맺었다. 라리보 신부도 홍콩으로 가서 치료하라고 설득하였으나 브레 신부는 죽음을 예감하고 임지에서 죽기로 마음을 먹었다. 1908년 9월 말부터 임종의 긴 고통이 시작되었다. 마지막 순간에 그는 뮈텔 주교로부터 온 기쁜 소식을 들었다.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와서 학교를 맡게 된다는 소식과 주교가 브레 신부의 고통을 하느님 일을 위해 바치겠다는 내용이었다. 브레 신부는 라리보 신부의 사죄경을 들으며 1908년 10월 25일 자정에 영원의 세계로 들어섰다.9)

 

선종한 브레 신부가 원산의 묘지에 묻혔다는 사실은 1995년에 간행된 『함경도 선교사 서한집』에 분명하게 실려 있다. 하지만 1970년에 임충신 신부가 번역한 브레 신부의 여행기 『원산에서 북간도까지』에는 용산 성직자 묘지에 묻혔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한국가톨릭대사전』(6권, 1998)에도 용산 성직자 묘지로 되어 있다. 따라서 브레 신부의 용산 성직자 묘지 매장설은 자료의 오류에서 비롯된 듯하다.

 

 

브레 신부의 묘지 사진을 발견하다

 

지난 2021년부터 본 연구소는 상트 오틸리엔 소장 유리건판 등 한국 관련 사진의 조사 촬영 및 해제 작업을 진행해 왔다.10) 사진을 살펴보던 중 브레 신부가 묻혀 있는 묘지 사진을 확인하였다. 사진이 흔들려 묘지에 서 있는 선교사가 누구인지 파악할 수는 없으나 베네딕도회 수도복을 입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묘지가 있는 언덕에서는 멀리 산도 보이고 집들도 보인다. 사진을 자세히 살펴보면 벽돌로 쌓아 올린 담장 안에는 세 기의 묘가 일정한 간격으로 자리하고 있다. 묘지 입구에는 담장과 마찬가지로 벽돌로 쌓은 두 개의 사각기둥이 서 있으며 양쪽으로 여는 큰문이 달려 있다. 묘지를 감싼 담장은 벽돌을 쌓아 올렸는데 마지막 부분에 십자가 형태가 일정하게 나타나도록 ‘장식 쌓기’를 하였으며, 그 위로 3개의 단을 모양 있게 덧쌓아 마무리하였다. 오틸리엔 아카이브 유물카드에는 “Friedhof von Wonsan” 즉 “원산의 묘지”라고 적혀 있다. 사진 촬영자는 1925년 원산을 방문한 베버(Norbert Weber, 노르베르토, 1870~1956) 총아빠스일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의 해제를 작성하던 중 브레 신부 외에 투르니에11) 신부, 데예12) 신부도 그곳에 묻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원산 성직자 묘지에 대한 기록을 찾아서 정리해 보았다. 관련 기록은 원산 본당 제10대 주임으로 부임한 프와요(Gaston Poyaud, 表光東, 베다스토, 1877~1960) 신부가 남긴 편지로 자세히 확인할 수 있었다. 충실한 프와요 신부는 묘지의 상태, 묘지의 크기, 담의 높이, 묘비 설치 문제 등등 관련 내용을 자세히 적어 뮈텔 주교에게 보냈다.13)

 

1) 원산에 도착하자마자, 저는 세 신부의 무덤을 보러 갔습니다. 사실, 무덤의 위치는 브레 신부와 데예 신부가 원했던 장소가 아니고 또 그중 두 개는 외교인의 무덤입니다. 그러나 신부들의 무덤 셋을 브레 신부와 교우들이 원하는 장소로 옮기는 것은 너무 어려워 보였습니다. 저는 그 문제에 관해 교우들과 합의한 후, 가장 좋은 방법은 무덤들을 그대로 놔두고 다만 땅만을 북돋아 주고 가능하다면 외교인들의 무덤 셋을 신부들의 무덤에서 너무 가깝지 않은 곳으로 옮기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지막 문제는 다음 날 바로 결정되어 브레 신부가 간도에서 데려온 12세 소년의 무덤을 옮겼습니다. 이 무덤은 브레 신부와 투르니에 신부의 무덤 가운데 나란히 묻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브레 신부는 가운데에, 데예 신부는 그의 오른쪽에, 투르니에 신부는 그 왼쪽에 묻혀 있습니다. 투르니에 신부의 무덤은 다른 두 무덤에 비해 너무 높고 또 조그마한 계곡 가에 있었고, 데예 신부의 무덤은 반대로 아주 낮아서 비 때문에 이미 많이 상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무엇보다도 먼저 해야 할 일은 땅을 정리하고 무덤들 사이의 공간을 같게 하고 둘레에 버팀벽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드디어 오늘, 6일간의 작업 끝에 수직으로, 곳에 따라서는 3미터가 되는 계곡 위의 꽤 넓은 원형의 터를 만들게 되었습니다.…14)

 

2) 신부들의 무덤으로 말하면 현황은 다음과 같습니다. 교우 무덤 하나가 포함된 다섯 개의 무덤은 별문제 없이 이장했는데, 6엔 40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최근에 원산의 한 일본인 집에서 훌륭한 돌들을 마침내 발견했습니다. 묘비 3개 - 라프라드(Laprade) 씨 무덤의 묘비석과 같은 종류 - 를 총 108엔에 매매 계약을 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여기에 운반비는 포함되지 않았는데 운반비는 인상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묘비 값이 결정되었으니 저는 150엔을 초과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그 액수가 초과되더라도 주교님은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세 신부의 후임자인 저도 노력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도면과 정확한 총액을 곧 제출하겠습니다.

 

추신 : 세 신부 각자의 묘비에 새겨질 한문과 라틴어 비문에 대한 지시를 가능한 한 빨리 보내 주십시오.15)

 

3) 세 개의 묘비석은 재단되었고, 10여 일 후에는 형상을 갖추게 될 것입니다. … 비문을 새기는 일은, 그 방면의 일을 할 수 있는 면허증을 제시할 수 있는 중국인이나 일본인을 구했을 때, 그런 일을 시킬 생각입니다.16)

 

4) 마침내 신부들의 묘비 3개가 10일 전에 완전히 세워졌습니다. 지난달 내린 비로 무덤 위쪽의 구릉이 약간 무너졌지만 봄에 조금만 수리하면 될 것입니다. 다음번 편지에는 이번 일에 쓰인 금액의 상세한 내용과 함께 무덤의 스케치나 사진을 보내드리겠습니다.17)

 

5) 성모 탄생일(9월 8일)에 화강암 십자가가 묘지에 설치되었습니다. 총액은 50엔을 넘지 않았는데 정확히 47.60엔입니다.18)

 

6) 주교님도 아시다시피 묘지는 약 1미터 70센티 높이의 단단한 벽돌담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 면적은 36.12평입니다.19)

 

이 묘지는 1949년까지 베네딕도회 신부들이 돌보았다.20) 원산 수녀원의 수녀들도 마찬가지였다.21) 그들은 선교지에서의 죽음이 마치 자신들의 미래인 양 브레 신부, 투르니에 신부, 데예 신부의 무덤을 살폈다. 수녀들이 작성한 「연례 보고서」에는 세 명의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들의 묘지로 가는 길과 묘지 모습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소나무가 듬성듬성 있는 숲을 따라가다 잘 손질된 정원을 지나가면 경계를 이루는 작은 시냇물 골짜기를 따라 길이 이어졌다. 시냇물 양편에는 커다란 밤나무 숲이 있었다. 시냇물 왼편으로 수녀원 채소밭과 파스칼 팡가우어 수사가 미리 사과나무와 복숭아나무를 잔뜩 심어놓은 과수원이 있었다.…우리 과수원 끝자락에는 붉은색 담이 둘러싸인 하트 모양의 자리가 있었다. 1920년까지 이 지역에서 사목한 파리 외방전교회 프랑스 신부들 묘지였다. 이곳에는 묘가 세 기 있었는데, 가운데 묘에 루이 에우제브 아르망 브레 신부가 잠들어 있었다. 브레 신부는 30년 넘게 원산에 살면서, 러일전쟁 때를 제외하고는 해마다 만주 전역의 신자들을 방문하기 위해 여러 달 동안 힘들게 말을 타고 북한 지역을 두루 돌아다녔다. 그 양쪽에는 그의 후임자였던 젊은 신부 둘이 잠들어 있었다. 이들은 모두 티푸스에 걸려 1910년 쓸쓸히 죽음을 맞이했다(프랑수아 투르니에 신부는 1910년 1월 5일, 알베르 데예 신부는 2월 1일 사망했다).22)

 

한 장의 사진이 시간을 잡아두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브레 신부의 묘지 가는 길을 마음속으로 그려본다. “저성첨례 날(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저녁, 원산 본당 신자들은 흰옷을 입고 죽은 사람들을 위한 통상 기도인 연도(煉禱)를 큰 소리로 바치면서 달빛이 환하게 비치는 높은 언덕으로 올라갔다. 담으로 둘러싸인 묘지에는 브레 신부와 다른 두 신부들이 부활을 기다리며 영면하고 있었고 또 더 높은 산비탈에는 푸른 바다를 굽어보면서 수백 명의 교우들과 외교인들의 묘지가 있었다. 거기서 우리는 촛불을 밝히고 「리베라」(Libera, 구원하소서)를 노래하고는 다시 성당으로 돌아왔다.”23)

 

브레 신부는 조선에 선교사로 오고 싶다는 요청을 뮈텔 주교에게 먼저 했다. 주교는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허락하면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정식 발령 전에 뮈텔 주교로부터 조선 선교사로 파견되었다는 소식을 받았을 때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주교에게 감사의 편지를 썼다. 그는 왜 한국에 오고 싶어 했을까? 자신의 병이 불치병이며 12개월밖에 살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의 심정은 어땠을까?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알 수 없지만 한국은, 간도는 그를 기억할 것이다. 정전협정 70주년이 되는 2023년이 코앞이다. 사과나무, 복숭아나무가 잔뜩 심어진 과수원 끝자락에 있다는 브레 신부의 묘지를 찾아가 촛불을 밝히고 「리베라」를 노래할 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소망하고 또 소망한다.

 

………………………………………………………………………………………

 

2) 1880년대 초부터 드게트, 쿠데르, 프와넬, 르 메르 신부 등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황해도 · 평안도 · 함경도 등지에서 비밀리에 전교 활동을 하였다.선교의 자유 이후 바로 본당이 설립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3) 요한네스 마르, 왜관수도원 엮음, 『분도통사』, 분도출판사, 2009, 342쪽.

 

4) 「咸北間島視察 李範允氏 報告全文이 如左니」, 『황성신문』 1902년 9월 5일 자 2면 ; 「北間島視察 李範允氏 報告書에」, 『황성신문』 1903년 8월 19일 자 2면.

 

5) 북만(길림)교구 라루이예(Pierre-Marie-François Lalouyer, M.E.P., 1850~1923) 주교는 자신의 교구에서 선교사를 보낼 수 있을 때까지라는 단서를 달았다.

 

6) “1907년 12월 4일부터 1908년 2월 2일까지는 장티푸스, 3월 4일부터 19일까지는 단순한 기관지염, 4월 13일부터 5월 14일까지는 늑막염, 5월 2일부터 7일까지는 각혈, 의사는 이것을 유혈 기관지염이라고 말했습니다”(「뮈텔 문서 1908-43」 1908년 6월 14일 자).

 

7) 「뮈텔 문서 1908-52」 1908년 8월 3일 자.

 

8) 「뮈텔 문서 1908-56」 1908년 8월 30일 자.

 

9) 브레 신부의 선종 날짜에 대해 뮈텔 주교는 일기에 “그가 지난 10월 25일에 사망했음을 늦게서야 알았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번역자인 최석우 신부는 1908년 파리 외방전교회 연보에는 10월 24일로 기록되어 있다고 역자 주에서 밝히고 있다(『뮈텔 주교 일기』 4, 332쪽). 2004년에 간행된 전교회원 명단(1659~2004)과 파리 외방전교회 홈페이지에는 25일로 되어 있다.

 

10) 한국교회사연구소는 2021년 국외소재문화재재단과 업무 협약을 맺었으며, 이후 독일 상트 오틸리엔에 소장된 유리건판 등 자료를 현지에서 촬영해 온 후 해제를 작성하여 연구 보고서를 제출한 바 있다. 2022년에는 고도화된 사진을 대상으로 민속, 복식, 건축 등 각 분야 연구자들과 협력하여 심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11) 투르니에(François Joseph Tournier, 프란치스코, l876~1910) 신부의 한국 이름은 두계창(杜啓昌)이다. 프랑스 브장송(Besançon)의 파송퐁(Passonfontaine)에서 태어나 1900년 9월 15일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02년 6월 22일 사제 서품을 받고 그해 9월 서울에 도착하였다. 안성 구포동 본당의 공베르(A. Gombert, 孔安國, 안토니오) 신부에게 한국어를 배우고 1903년 8월 그리자르(A. Grisard, 池安德, 안드레아) 신부 대신 내평(內坪) 본당의 임시 주임으로 사목하다가 건강이 좋지 않아 홍콩에 가서 치료를 마치고 돌아와 1904년 다시 내평 본당 주임을 맡았다. 1909년 5월 원산 본당 제8대 주임으로 부임하였으나 그해 가을 사목 방문 때 폐렴에 걸려 1910년 1월 5일 선종하였다(『한국가톨릭대사전』 11, 2005, 8278쪽 참조).

 

12) 데예(Albert Deshayes, 알베르토, 1871~1910) 신부의 한국 이름은 조유도(曺有道)이다. 1896년 6월 28일 사제 서품을 받고 10월 13일 조선에 입국하였으며, 곧바로 전라남도 목포 지역에서 본당 설립을 준비하였다. 교안에 연루되어 어려움을 겪었으나 1898년 산정동 성당을 지었다. 이후 1909년 성경 번역을 위해 주교관에 올라오기까지 10여 년 동안 전라도 지역에서 사목하였다. 서울에서 일 년 동안 머무르다가 1910년 1월에 선종한 투르니에 신부 후임으로 원산 본당 제9대 주임이 되었으나 한 달여 만에 말라리아에 걸려 2월 1일 선종하였다(『한국가톨릭대사전』 3, 1996, 1720쪽 참조).

 

13) 이 편지들은 『함경도 선교사 서한집』 I(한국교회사연구소 역편, 함경도 천주교회사 자료집 제1집, 1994)에 번역되어 실려 있다. 브레 신부의 묘지에 관한 내용을 확인하고 발췌하여 정리하였다.

 

14) 「뮈텔 문서 1910-91」, 1910년 6월 29일 자.

 

15) 「뮈텔 문서 1910-111」, 1910년 7월 29일 자.

 

16) 「뮈텔 문서 1910-149」, 1910년 9월 12일 자.

 

17) 「뮈텔 문서 1910-234」, 1910년 12월 5일 자.

 

18) 「뮈텔 문서 1911-138」, 1911년 9월 11일 자.

 

19) 「뮈텔 문서 1914-199」, 1914년 10월 1일 자.

 

20) 『분도통사』, 분도출판사, 2009, 126쪽.

 

21) 사우어 아빠스의 요청으로 1925년 11월 21일 원산에 도착한 툿칭의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수녀 네 명은 다음 날 바로 프랑스 선교사들의 무덤을 찾아가 숙연히 고개를 숙여 자신들의 각오를 굳혔다. 이정순 엮음, 『원산 수녀원사』, 왜관분도인쇄소, 1988, 88쪽.

 

22) 『분도통사』, 397쪽.

 

23) 『원산 교구 연대기』, 함경도 천주교회사 자료집 제2집, 함경도 천주교회사 간행사업회, 1991, 408쪽.

 

[교회와 역사, 2022년 11월호, 글 송란희 가밀라(한국교회사연구소)]



205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