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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부활 제6주간 월요일 진리의 영이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평협ㅣ사목회

평신도의 사회 참여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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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21 ㅣ No.21

평신도의 사회 참여 영성

 

 

그리스도교 영성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이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마태 22,37-39)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서 시작한다. 이 두 가지는 그리스도교 영성생활의 수직적, 수평적 두 가지 차원을 모두 포함한다. 수직적 차원은 우리가 하느님께 바치는 흠숭과 덕행을 통하여 그분과 일치를 이루는 것이고, 수평적 차원은 같은 시대, 같은 세계 안에 살아가는 형제자매들에게 우리가 보여주는 사회적인 관심과 배려이다. 그리스도인의 영성생활은 이 두 차원을 자신의 생활에서 밀접하게 결합시키는 생활이다. 현세질서의 전문가들인 신자들에게는 이 두 가지 차원 가운데서도 특히 수평적 차원이 중요하다.

 

그리스도교 영성의 수평적 차원의 전형은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을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기꺼이 내어주심으로써 하느님께 영광을 바치신 모습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그러나 이 수평적 차원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인간 형제자매들을 보살피는 것으로 드러나지 않을 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수평적인 차원을 통해서만 우리는 초월적인 하느님께 예배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통하여 하느님과 깊게 교제할 때, 이 지구상에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과의 연대와 일치로 나아가게 된다.

 

하느님 사랑의 수직적 차원은 인간들 사이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사랑인 수평적 차원을 통하여 실현되는 것이므로 형제자매들에 대한 사랑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진정성과 영성의 깊이를 시험하는 척도가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영성생활의 수평적 차원은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구조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리스도교 영성의 수평적 차원을 고려할 때 우리는 동료 인간들이 살아가는 사회구조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이 세상이 바다라면 우리 인간은 그 안에서 살아가는 물고기에 비유할 수 있다. 물고기에게 물은 선택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니라 필수적인 조건이다. 이것은 사회는 인간에게 필연적이자 필수적인 조건임을 가리킨다. 그래서 이웃 사랑이라는 그리스도교 영성의 수평적 차원은 물고기가 물을 필연적으로 요구하듯이 인간 생활의 환경을 구성하고 결정하는 사회구조를 반드시 필요로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영성과 사회구조가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되는 이유이다.

 

우리의 경험에서 보듯이 인류역사에서 인간은 일치보다는 반목과 대결, 지배와 폭력, 불의의 구조를 만들어왔다. 결국 이 지구상의 절반에 가까운 인구가 절대적인 빈곤선 이하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세계 인구의 사분의 일을 차지하는 잘사는 나라들이 못사는 나라들의 자원까지 낭비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이러한 불평등의 구조화와 영속화는 그리스도교 영성의 수평적 차원인 인간 사랑이 사회구조를 통하지 않고서는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 그래서 우리 시대의 이웃 사랑의 영성은 사회구조를 고려하고 이 사회구조의 복음적 변화를 목표로 삼는 새로운 영성 곧 사회(참여)영성이 된다. 그리고 이 영성은 현세질서의 전문가인 신자들에게 필수적인 덕목이 된다.

 

그 동안 우리는 전통적 성속이원론에 따라 사회구조는 죄에 빠져있기 때문에 속되고 악한 것이라고 보아왔다. 삶 자체를 영위하는 공간임에도, 이 공간을 속되고 악한 것이라고 보아왔다. 그래서 세상은 언제나 피해야 할 대상이지, 성화되어야 할 공간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렇게 낡은 이원론을 따르면 교회만이 거룩한 영역이고, 교회에 더 깊게 참여하는 사람만이 거룩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속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런 이원론에서 인간 상호간의 차원을 간과하는 개인주의적이고 신비적인 영성이 자라게 되고, 이러한 영성의 확산으로 말미암아 교회는 하느님의 구원을 중재하는 표지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구원을 가로막는 반대표지가 된다. 역사상 여러 번 존재하였던 교회의 과오들이 다 이런 사고방식에서 비롯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다행히도 우리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기점으로 그리스도교 영성의 구조적 차원을 심오하게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바뀐 인식을 토대로 현대를 살아가는 신자들은 사회구조들도 하느님의 창조를 반영할 뿐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도 드러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인간의 존엄성을 향상시키는 사회구조들도 하느님의 선하심을 중재하고 드러내는 방식으로 보게 되었다. 이것은 사회구조들도 그리스도의 은총에 참여하는 수단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바오로 6세 교황은 이렇게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의 구원행위에 참여하는 것을 인본주의라고 표현한 바 있다. 교황은 회칙 “민족들의 발전”에서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은 완전한 인본주의이다. 그리고 전인적인 인간과 모든 인간의 충분히 성숙한 발전이 아니라면 무엇인가?”라고 하면서, 인간복지를 위해 일하는 것과 하느님과의 영적인 생활에 개방하는 것을 인본주의에 포함시켰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인본주의는 그리스도교 영성의 수평적 차원을 가리키는 다른 말이 된다.

 

우리가 사회영성을 갖는다는 것과 그리스도교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가 때로 영적이고, 물질적인 도움으로 적절한 때에 다른 이들과 효과적으로 함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가 이것을 오늘날에도 실현하려면 여러 사회구조들을 이용해야 한다. 프랑스 신학자 셰뉘(Chenu) 신부는 우리가 이 지구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이웃들과 가까이 사는 지리적인 우연 때문에 함께 살게 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필연적인 계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필연성을 깊이 의식하는 것이 우리 인간 상호간 연대의 근거가 된다. 그래서 나의 성장은 물질적으로뿐 아니라 심지어 영적으로도 사회구조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필연적으로 사회에 살아가는 다른 형제자매들을 통하여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 신자들은 이처럼 현세질서를 성화시키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현세질서의 성화는 가정에서부터 시작하여 자신이 속한 학교, 직장, 국가, 이 세계에까지 이른다. 그리고 이 성화 임무는 이 사회의 무력한 이웃들과 함께하는 연대성의 원리와 모든 것에 앞서 인간이 가장 존엄하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인간 존엄성의 원리를 실천하는 데서 시작된다.

 

우리는 요즘 우리 세상이 테러와 전쟁으로 얼룩져 가는 것을 보고 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수많은 이들이 죄없이 고통당하는 것을 보고 있다. 지구상 인구의 15억이 굶주리고 있다는 고통스러운 사실도 우리에게는 곤혹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고통스러운 현실 안에서 울부짖으시는 하느님을 보게 된다. 이때 하느님의 울부짖음에 우리의 눈을 열고, 귀를 여는 것이 영성생활의 시작이다.

 

* 박문수 프란치스코 - 신학박사,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위원장, 각종 저술 강의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으며 10월에 제5회 가톨릭 학술상 연구상을 받았다.

 

[경향잡지, 2001년 11월호, 박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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