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 (화)
(홍)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한국ㅣ세계 교회사

[세계] 교회사 에세이3: 유다교 안에 둥지를 튼 교회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5-25 ㅣ No.695

교회사 에세이 (3) 유다교 안에 둥지를 튼 교회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유다교는 그들 안에 많은 분파들이 있었습니다(바리새이, 사두가이, 에세네 등).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등장이 그들에게 놀라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그들의 성전 예식이나 율법을 실천하고 있었기에, 그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은 관용할 수 있는 ‘새로운 분파’였으며 본질적으로 새로운 종교라는 인식을 갖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작은 그룹은 자신들의 유일한 스승인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들의 그룹에 들어오도록 허락하는 셰례식을 실천하고 있었고, 집에 따로 모여 공동체의 구성원들만이 참례할 수 있는 성찬례를 거행하였습니다. 이 젊은 교회는 스스로를 새로운 이스라엘이라고 여겼고, 그들 안에서 이스라엘은 역사의 목적지와 시대의 마지막 완성에 이르렀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믿음은 동족들에게 거부당하고, 이방인들 사이에서는 반대로 빠른 전파를 가져옵니다. 이것은 이 그룹에게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로 향하는 보편주의를 심어주는 계기가 됩니다.

그 안을 살펴보면 이 작은 공동체는 실제 구별되는 더 작은 그룹들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먼저 지역적으로 이스라엘과 그 외의 지역으로 구분되었고, 아람어를 쓰는 유다인들과 그리스어를 쓰는 디아스포라 출신의 유다인들로 구분되었습니다. 이들은 같은 히브리인들의 역사를 거치지 않았으므로 유다교와 맺는 관계에서 큰 차이를 보이게 됩니다. 특히 성전과 율법에 대하여 디아스포라의 유다인들은 모국의 유다인들과 꼭 같은 중요성을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교회 공동체는, 사도행전을 보면 서로를 ‘히브리인들’과 ‘그리스인’으로 호칭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분명 전례적으로, 언어의 문제로 구별되었지만 애덕의 실천은 공동으로 하고 있는 하나의 공동체였습니다.

이런 다른 실천이 큰 문제를 야기시키는데 그 사건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스테파노의 순교 이야기’입니다. 스테파노가 속한 공동체는 ‘그리스계 공동체’로서 이들은, 성전과 율법에 관한 모든 것은 예수님을 통해 극복되었다고 믿었기에 유다인들로부터 이단자로 간주되어 축출되기에 이릅니다. 그들에게는 히브리 종교의 율법적 특징을 지키는 것보다 예수님을 닮고 그 말씀을 따르는 것이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게 됩니다.

반면에 히브리 공동체는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히브리 종교적 실천의 준수 안에서 예수님께 대한 신앙을 간직하고자 합니다. 오히려 바오로 사도의 역할을 경시하고 그를 마치 율법의 파괴자요 민족의 반역자로 생각하는 경향마저 갖게 됩니다. 교회는 심각한 분열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런 분열적 상황에 으뜸 제자인 베드로 사도가 중재에 나서게 됩니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예루살렘의 사도들의 공의회’입니다(48-49년경). 이 공의회에는 다양한 초기 그리스도 공동체의 대표들이 참여하였고 기본적인 합의에 이르게 됩니다.

즉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이들은 유다의 전통에서 자유롭고, 히브리인들은 율법과의 관계 안에 남아 있기로 합의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초기 교회는 다른 길을 통해 복음을 선포하기로 선택하게 됩니다. 이후 그리스계 그리스도교인들은 그리스도교의 핵심세력으로 성장합니다.

한편 히브리계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점점 쇠퇴의 길을 걷지만 그리스도교 안에 유다교적 색채를, 특히 기도와 전례 부분에 강하게 그 자취를 남기게 됩니다.

[2015년 4월 12일 부활 제2주일(하느님의 자비 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계명 본당 주임)]



1,638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