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일)
(백) 부활 제5주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전교의 달에 이 땅의 초기 교회사를 떠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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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3-07 ㅣ No.1555

[돌아보고 헤아리고] 전교의 달에 이 땅의 초기 교회사를 떠올립니다

 

 

1. 우리나라 두 번째 사제 가경자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1821~1861) 신부님이 활동하던 때는 박해 시기였습니다. 대대적이고 공식적인 박해는 없었다고 하지만, 교우들은 드러내놓고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신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주변 외인들에게서는 물론 믿지 않는 가족이나 친지들로부터도 핍박당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래서 교우들은 박해를 피해 산속으로 숨어 화전을 가꾸며 교우촌을 이루어 살았습니다.

 

게다가 세간에는 온갖 흉흉한 이야기가 나돌았습니다. “비신자들 사이에 돌아다니는 이야기들은 신자들의 체포, 투옥, 형벌, 사형 등 처참한 이야기뿐입니다. 또는 (부유하였던) 신자들의 집안이 몰락하여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산다는 것, 사람이 살 수 없는 산속이나 산골짜기에 숨어서 비참하고 치욕적인 생활을 한다는 것, 모든 공적인 사회생활에서 격리되고 백성으로서의 제사와 가정생활을 포기하고 산다는 것, 부모와 형제와 친척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잊힌 채 산다는 것 등등입니다”(최양업 신부의 여덟 번째 편지, 1851년 10월 15일 절골).

 

사정이 이러하였기에 당시에는 비신자들에게 직접 교리를 가르침으로써 전교하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더욱이 사제에게서 직접 천주교 교리를 듣는 일은 불가능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최양업 신부님이 활동하던 1850년대에 연평균 500명 가까운 성인들이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습니다. 평균적으로 해마다 신자 수의 3.6%가량이 새 영세자였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기승을 부리기 직전인 2019년 말 전체 신자 대비 새 신자 비율이 1.4% 정도인 것에 비해 2.5배나 높은 비율입니다.

 

그렇다면 이 박해 시기에 전교는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을까요? 다시 최양업 신부님의 편지를 살펴봅니다. “비신자들은 천주교의 진리에 관하여 떠도는 소문을 듣거나, 또는 신자가 당한 어떤 환난 등의 사건을 통하여 마음속으로 감동을 받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스스로 신자들을 찾아가서 교리를 가르쳐 주고 신자들 사회에 받아들여 달라고 청하는 것이 보통입니다”(최양업 신부의 여덟 번째 편지).

 

2.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중국에서 발간된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들을 통해서였습니다. 주로 예수회 선교사들이 펴낸 한역서학서들은 크게 천주교에 관한 서적과 천문, 역법, 지리 등 서양의 과학 기술에 관한 서적들로 나눌 수 있습니다. 당시 조선의 학자들은 과학 기술 서적들에 관해서는 대체로 수용하는 분위기였습니다만, 천주교 서적에 관해서는 오히려 거부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천주교의 윤리와 선교사들의 생활 태도에는 긍정적이었습니다만, 천주 강생이나 천당 지옥에 관한 가르침에는 대단히 부정적이었습니다.

 

조선 유학자들의 이런 생각은 천주교 교리에 대한 깊은 성찰과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시원과 종말에 관한 관심보다는 세상과 인간 존재 자체를 그대로 긍정하고 어떻게 사는 것이 천륜과 인륜에 따라 사는 것인가 하는 데 더 관심을 쏟는 유교의 사상적 기반에서 볼 때 지극히 당연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8세기 후반에 주류 사회에서 배척을 받은 남인 계열의 학자들 사이에서 그것도 비교적 소수만이 천주교 교리를 깊이 궁리하고 신앙적 차원으로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이런 시대적 사조와 무관치 않다고 할 것입니다.

 

비록 소수로 시작했기는 하지만, 우리의 신앙 선조들은 자신들이 받아들인 천주교가 참 진리의 종교임을 이론으로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실천적 삶으로써 용맹하게 드러냈습니다. 반상(班常)의 구별, 빈부의 구별 없이 형제적 사랑을 실천했으며, 가진 것을 모두 내어놓고 비천한 삶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주변의 만류와 조롱, 핍박에도 조금도 굴하지 않았고, 마침내는 목숨까지 기꺼이 내어놓았습니다. 이런 삶은 크고 작은 박해가 이어지는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면면히 이어져 왔습니다.

 

3. 새로운 천년기를 살아가는 오늘 우리는 신앙 선조들이 겪었던 것처럼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의 가톨릭 신앙을 고백하고 실천한다고 해서 모욕이나 핍박을 받는 일도 없습니다. 대신에 우리는 또 다른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종교에 대한 무관심이라는 위험입니다. 진화론적 세계관이 지배하는 21세기 우주 시대에 강생 구속이라든가 사말(四末) 교리 같은 천주교의 주요 교리들이 허황한 가르침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천주교를 처음 접한 조선의 학자들이 보인 부정적인 반응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을까요? 박해 시기 교우촌의 삶으로 돌아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 시기 교우촌 신자들의 삶을 그대로 본받자는 것이 아니라 그 정신을 본받자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4-16).

 

[교회와 역사, 2022년 10월호, 글 이창훈 알폰소(서울 평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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