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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교회사 에세이47-59: 전례의 기원과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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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4-12 ㅣ No.748

교회사 에세이 (47) 전례의 기원과 발전 (1)

 

 

지난 호까지는 로마 교황의 수위권의 역사를 간략하게 보았습니다. 로마의 주교가 자신의 주장을 전 교회에 성공적으로 실현시키지는 못했지만, 서방 교회에서는 부분적으로 그것을 이뤄냈고 특히 중세에는 교황들이 종교적, 영성적 부문은 물론, 정치적 부문에서도 막대한 영향력을 갖는 존재가 됩니다. 이런 변화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분은 레오 교황이었고, 레오 교황 이래로 교황은 고관의 옷을 입은 통치자로서 자신의 교회적 임무를 만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은 교회가 더 이상 ‘친교적’ 구조와 ‘시노드적’ 조직의 교회에 머물지 않고 군주적 교회로 변해감을 의미하고, 교황은 이제 교회 조직의 명실상부한 대표가 됨을 의미했습니다.

 

이런 용어들은 숨겨진 구원의 사건이 전례적 표징 아래 비밀스럽게 현실화 된다는 사실과 상징의 현존과 구원의 효력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공히 드러내줍니다. 교회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상징과 구원의 효과를 구별하게 되고 12세기에 이르러서야 오늘날의 칠성사가 확정되게 됩니다.

 

4세기경이면, 주된 교회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로마, 콘스탄티노폴리, 예루살렘, 밀라노 등에서 서로 다른 다양한 전례적 모델들이 발견되었고, 6-7세기경이 되면 이런 풍부하고 다양하며 창조적이고 활력 넘치던 전례적 삶에 어떤 지도적인 동기들이 개입하면서 통제 혹은 통일화가 시도됩니다.

 

전례의 주제들은 주로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기념이었고, 극적인 형식으로 이뤄진 신비 거행을 통한 구원적 현존의 체험이라는 이상과 지상적 영역에서 거행된 예식을 통한 천상적 예식에의 참여라는 불타는 열망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전례는 외형적인 모습에서 이방인들의 그것과 확연하게 구별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성전도 없이 ‘가정 교회’를 이루었고, 성찬례를 위한 탁자들도 어떤 특정한 모양과 제단의 기능을 갖지 않았고, 3세기가 되어서야 전례적 영역에서 첫 번째 이미지들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초기 그리스도교는 참된 종교가 아니라는 비난에 직면했고,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전례를 거행하는 주례자를 이방 종교처럼 ‘제사장’이라고 부르지도 않았었습니다. 그러기에 초기 1-2세기 동안 그리스도교 전례는 완전히 다른 예식으로 동시대인들에게 각인되었지만, 그런 구별은 교회가 주변 상황에 적응해 나가면서 점점 희미해지게 됩니다.

 

지금부터 살펴보게 될 초기 그리스도교의 전례는 우리가 지금 생각하고 규정하는 의미의 성사적 개념을 아직 갖고 있지 않았다는 점을 먼저 말해 두어야 합니다. 성사에 대한 정확한 신학적 개념도, 또 다른 예절들과 상징적 행위들로부터 구분하는 개념도 없었습니다. 다만 세례와 성체 성사는 아주 중심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었습니다. 용어의 사용에 있어서는 구원의 중심이 되는 사건들을 가리키기 위하여 그리스 교회는 mysterion이란 용어를 라틴 교회는 sacramentum을 사용하였습니다.

 

이런 용어들은 숨겨진 구원의 사건이 전례적 표징 아래 비밀스럽게 현실화 된다는 사실과 상징의 현존과 구원의 효력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공히 드러내줍니다. 교회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상징과 구원의 효과를 구별하게 되고 12세기에 이르러서야 오늘날의 칠성사가 확정되게 됩니다. [2016년 4월 10일 부활 제3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48) 전례의 기원과 발전 (2)

 

 

세례 : 세례 성사는 그리스도교를 시작하기 위한 예식으로 아주 초기부터 형성되었고, 그것은 물에 잠기는 예식 혹은 물을 뿌리는 예식을 통해 거행되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존재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잘 드러내주는 것으로, 성경도 이를 증언하고 있습니다(로마 6,3-5). 세례식은 그리스도교가 아직 유대교의 태내에 있을 때부터 거행되었고, 이는 회개와 내적 정화의 상징으로 물에 잠김을 통해서 수행되었습니다. 초기 공동체는 새롭게 회개한 자들의 시작의 예절로 이것을 거행하였는데, 특이한 점은 그 이름을 익숙하지 않았던, 그리스적 개념인 Baptisma(물에 잠기다)를 사용하였다는 것입니다. 아마 그것은 그리스도교 세례를 그와 비슷한 다른 것들로부터 구별하려는 의도라고 생각됩니다.

이제 예절의 역사를 조금 살펴 볼텐데요, 3세기 초가 되면 세례의 본질적인 요소에서의 발전이 눈에 띄게 됩니다. 히뽈리토는(약 215년경) 로마 교회의 전례적 실천을 전해주는데, 세례 거행이 지역마다 약간씩 다르긴 하지만 모든 공동체가 세례식을 본보기적이고 근원적인 예식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도 보여줍니다.

고대 교회 공동체는 가능한 세례를 빠르게 거행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오히려 세례를 원하는 이들에게 교회는 결정적인 조건들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교회가 요구하는 특별한 준비의 기간을 채워야 했습니다. 진실되게 세례를 받기를 원하는 이들은 일정의 절차를 따라야 했고, 이들을 예비자, 교리 교육자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유보된 용어로 세례의 ‘앞선 과정’이었습니다. 그리스도교로 개종을 원하는 이들은 먼저 교회의 삶과 교리에 대해 교육 받아야 했습니다. 이런 교육은 특별한 교사들에 의해서 시작되었고, 성직자들에 의해서 계속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이런 교리 교육 제도는 서방 교회에서는 약 2세기 말에 출현하고, 동방 교회에서는 약간 늦게 보여집니다. 예비자는 그리스도인의 의무와 연관되어 교육, 관리되었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윤리와 교회 훈련의 통제 아래 있었고, 어떤 면에서는 이미 공동체의 삶, 혹은 말씀 전례의 어떤 순간에 있어서는 이미 그리스도교인처럼 간주되었습니다. 이 기간이 그들에게 ‘시험의 기간’이고 ‘관찰’의 시간이었습니다.

세례를 갈망하고 청하는 자는 먼저 자신을 드러내야 했습니다. 그들은 교회로부터 자신의 회개와 개종의 동기들에 대해 질문을 받았고, 세례를 지원하고 청하게 된 자신들의 생각을 표현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미래의 세례자는 개인적 삶의 조건들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보고해야 했습니다. 예를 들면 노예나 혹은 자유인, 기혼자, 혹은 독신 등 개인 신상에 관한 것, 이 외에도 그의 직업 또한 중요하게 보고되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이미 예비자들의 몇몇 활동, 직업을 도덕적·문화적 이유에서 교회의 믿음과 병존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지금 우리에게는 낯설게 느껴질 수 있지만 검투사, 병사, 배우, 그리고 조각가와 이방 종교의 교사 등 입니다. 이들은 이런 활동을 떠나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예비자로, 미래의 세례자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예비자는 교육자로 받아들여짐과 동시에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도덕적 의무들과 요청에 연결되어, 즉시 세례 받은 사람처럼 살기 시작해야 했습니다. 초기 교회는 이런 그리스도교로 받아들여짐을 아주 신중하고 엄격하게 규정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예비자는 교리 교육 과정에 들어가게 되고, 그의 진실한 회개의 원의를 교회 앞에서 책임질 증거자, 후견자와 함께 이 과정을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초기 공동체는 부적합한 사람이 세례를 받는 것이나 혹은 반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금지할 필요에서 이런 규정들을 만들어 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2016년 4월 17일 부활 제4주일(성소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49) 전례의 기원과 발전 (3)

 

 

초기 그리스도교의 세례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세례식은 초기 그리스도교가 각별한 애정과 관심으로 준비하고 거행하던 아주 근본적이고 중요한 전례였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인이 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삶으로 나아가는 길이므로 그에 걸맞는 삶을 살아야 하고, 그런 삶을 위한 준비와 결단이 선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전제하에 초기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려는 이에게 특별한 준비의 과정, 교리 교육 과정을 진행하였습니다.

 

3세기가 되면 교리 교육의 어떤 형식이 눈에 띄게 됩니다. 특별한 것은 엄격한 그리스도교의 규범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특성을 갖는, 정해진 기간에 대한 의무와 그 기간 동안의 후보자에 대한 평가 그리고 구마식이었습니다. 코스탄티노 황제의 시대로부터, 즉 4세기쯤이면 새로운 조건이 형성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교를 향한 대중들의 집단적인 관심과 개종이 이뤄지면서 교리 교육 형식에 있어서 변화를 가져옵니다. 이런 집단적 개종의 경향에 따라 교회는 더 각별히 신자로 ‘받아들임’에 대해 걱정과 염려를 갖게 됩니다. 눈에 띄는 실천적인 변화는 많은 사람들이 ‘예비자’가 되어 오지만, 자주 많은 사람이 세례에 이르지 못하고 오랜 기간을 ‘예비자’로 남아있거나 혹은 ‘일생 내내’ 그렇게 남아있는 경우도 생기게 됩니다. 그러면서 교리 교육은 지난 시절처럼 엄격하게 적용되지 못하고, 사람들은 그리스도교적 도덕이 요청하는 의무들을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하였기에 교리 교육은 더 이상 세례의 준비기간으로의 기능하지 못하는 점이 눈에 띠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런 시류에 따라 특별한 예식이 강조되는데, 그것은 바로 파스카에 앞서 거행되던 ‘단식의 기간’이었습니다. 이제 교리 교육자들(예비자)들이 세상의 무리로부터 세례를 통해 떨어져 나옴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과정으로 그 중요성이 커지게 됩니다. 교리 교육자는 이 기간 동안에 자신을 교회 앞에 ‘드러내고’ 교회는 대부와 주교의 입을 통해 그가 교회에 새로운 일원으로 등록됨을 완성하게 됩니다.

 

교리 교육자는 이제 주교 앞에 나옴으로 그리스도교적 삶의 낮은 단계의 상태를 끝맺게 됩니다. 이런 ‘받아들임’의 예절로 세례 받기를 원하는 예비자들은 과정을 끝내고, 새로운 삶으로 떠나게 됩니다. 즉 그들은 새로운 삶으로 ‘불리어진’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그리스 혹은 라틴어로 조명된 이(illuminati), 뽑힌 이, 갈망하는 이로 불리게 됩니다.

 

세례를 위한 파스카 기간의 준비는 뉘우침과 구마 그리고 가르침의 실천으로 구성됩니다. 그것은 2주간에 걸친 ‘집중과정’으로 그들은 교의와 영성과 그리스도교의 직접적인 삶의 품행에로 인도됩니다, 가르침의 교의적 내용을 보면 성경 전반에 대한 것을 가르쳤고, 신앙과 전례의 상징들에 대한 고백과 설명이 뒤따랐습니다. 상징의 내용과 기록들은 단식의 과정이 끝날 때에 가서야 세례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성대하게 전해집니다. 마치 믿음과 회개의 내적인 ‘성전’처럼 거행되었습니다. 이 시기가 끝날 때까지 그들은 아직 공적으로 교회에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전 기간 동안 특히 그 절정에 이르는 세례의 날까지 이런 예절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교 교회 안에 받아들여짐은 3개의 국면으로 진행됩니다. 즉 교리 교육과 조명 그리고 세례의 단계입니다. 그 단계 때에 파스카 주간의 세례와 세례의 신비 그리고 이어서 성체 성사의 신비에 대한 교육이 이뤄집니다. 4세기 예루살렘의 치릴로(Ciriillo)의 강론에 따르면 당시의 서방 그리스도교의 세례식은 세 부분으로 이뤄졌습니다. 즉 세례적인 물에 잠김과 함께 거행되는 손의 얹음(안수), 이마에 기름 바름과 세례의 성체 성사였습니다. [2016년 4월 24일 부활 제5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50) 전례의 기원과 발전 (4)

 

 

초세기 세례식의 발전 과정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세례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파스카 준비 기간에 이뤄지는 단식의 과정과 그 과정에 이뤄지는 교육이 중요하게 인식되었고, 세례의 형식들이 갖춰져 가고 있었습니다. 특히 세 가지의 형식, 물에 잠김과, 안수와 기름 바름, 그리고 세례의 성체성사가 그 핵심을 이뤄가고 있었습니다.

 

히뽈리토가 전해주는 3세기의 세례를 살펴보면, 세례식은 주교가 두 명의 사제와 세 명의 부제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세례를 위한 특별한 어떤 전례적 장소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세례 전날 밤 세례 받을 후보자들은 모여 기도하고 마지막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주교는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구마를 거행하고, 그들에게 세례의 날인을 하였습니다. 기도를 바치고 세례식에 사용할 기름을 축성하고, 세례를 받을 사람들은 ‘마귀를 끊어버린다’고 외칩니다. 이제 세례 받을 사람들은 옷을 벗고 몸에 구마의 기름을 발랐고, 옷을 벗은 채로 세례당으로 인도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이때 삼중의 질문이 주어지는데, “전능하신 아버지 하느님을 믿는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가?”, “거룩한 성령과 거룩한 교회 그리고 육신의 부활을 믿는가?”였고, 이에 그들은 세 번 “믿습니다.”로 고백하였습니다. 이 후에 한 명씩 물에 잠기게 되고 이제 성대하게 세례 받은 이가 되는 것입니다.

 

원초적 세례의 형식과 관련된 사료들에는 현행처럼 “나는 .......에게 세례를 줍니다.”가 언급되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세례적 잠김의 행위로, 그것은 정화를 의미하고, 죄의 용서를 상징했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묻혔음을,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할 것을 즉 새로운 삶으로 태어남을 상징했습니다.

 

세례식은 주교를 통해 성령의 전달을 의미하는 ‘손을 얹음’(안수)와 이마에 기름을 바름으로 끝이 나고 주교는 준비된 장소에서 나머지 신자 공동체와 함께 계속해서 세례의 성체성사를 거행하였습니다. 이 성체성사의 거행은 세례성사의 한 부분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그 예절을 위한 음료는 세례 받는 자신들이 준비하여 가져왔고, 여기에는 빵과 포도주 그리고 우유, 꿀과 물 등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는 것들이 봉헌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들에겐 조금 낯설은 것들도 있었습니다. 성찬의 상징인 빵과 포도주, 그리고 우유와 꿀은 약속된 땅에서의 구원을 충만을 상징했고, 물은 반면에 내적인 정화를 가져옴을 상징했다고 히뽈리토는 세례를 묘사하고 있었습니다.

 

세례 예식의 근본적인 요소들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매번 다른 예절들로 풍부해져갔습니다. 특히 로마와 스페인, 아프리카와 밀라노, 예루살렘과 안티오키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몇몇의 예절들은 극적인 형식을 취하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 마귀를 끊어버리거나 옷을 벗는 행위들은 ‘낡은 인간’을 벗어던짐을 의미하였습니다. 또한 물이 세례의 힘을 의미했기에 세례의 물을 특별하게 축성하는 예식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런 예식들은 상징적 실재와 성사를 증거해 줍니다. 다시 말하면 감각할 수 있는 예절과 그것들에 대한 신중한 고려와 그것들 안에서 일하시는 신적인 힘의 효과와 현존에 대한 강한 ‘실재적’ 개념을 의미했습니다.

 

또 세례에는 특별한 예절적 관습들이 있었는데, 세례 받을 사람들이 흰 옷을 입음이 그것으로 이것은 세례의 힘에 의해 순수하게 됨을 상징하기 위해 흰 옷을 입었습니다. 반면에 세례를 따라오는 성령의 전달예절은 점점 더 독립적인 것이 되어갔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세례식에서 떨어져 나가게 되어 신비의 한 부분인 ‘견진’의 형식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2016년 5월 1일 부활 제6주일(생명 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51) 전례의 기원과 발전 (5)

 

 

이제 세례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그 삶을 살아가기 위한 가장 원초적이고 필수적인 성사로 자리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교인의 수가 늘어가면서 새로운 문제가 대두하게 되는데 그것이 어린이들, 유아들의 세례였습니다. 2세기가 될 때까지 교회는 어른들의 세례의 규칙들을 마련했습니다(비록 아기들의 세례를 제외시키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유아들의 세례에 대해서는 신학적인 이유들 때문에 부정적이었던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4세기까지 아직 모든 그리스도인 부모들이 자신들의 자녀들에게 세례를 받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약 5,6세기가 되어서야 유아 세례가 보편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더욱 특별한 경우가 ‘죽어가는 이’의 세례였습니다. 문제는 ‘세례교육’이 시작될 시간적 여유가 없었고, 공적 세례의 기간을 기다릴 수 없는 경우이지만 사람들은 모든 경우에 있어서 세례 받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세례란 것이 그리스도교에로 들어감과 허락만을 의미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세례는 ‘죄의 용서’와 ‘구원의 선물’을 의미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위협에서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이제 필요한 경우가 되면 세례식이 짧고 간단하게 실천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신자 개인이 그런 상황이 되면 세례를 거행하도록 권한지어졌습니다. 만일 세례 받은 이가 바로 죽게 되면 그것의 유효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지만, 반면 병이 낫게 되면 혼란이 발생했습니다. 세례자가 불충분한 방법으로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죠, 즉 물에 잠기는 세례를 받지 않고 병상에서, 옷을 입은 채로 간단한 물의 뿌림의 세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병자의 세례로 불렀습니다. 이런 것은 규칙의 예외로 두게 되었습니다.

또 다른 경우가 소위 말하는 ‘피의 세례’입니다. 예비자가 아직 세례를 받지 못한 채로 신앙 때문에 순교를 하면 그들에게 구원과 운명에 대한 불확실성과 두려움이 동시에 생기는데, 세례의 형식을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교부들과 주교들은 그들은 순교자로 ‘피로써 세례’를 받았다고 확언해 줍니다. 즉 그들은 신앙을 이미 고백한 것이고, 그것 자체가 이미 죄를 지웠기에, 그런 순교 안에서, 그리스도께 대한 충실의 약속은 죽음의 봉인을 받았고, 위험에 놓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교자는 정상적인 세례와 같은 의미를 가졌다고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고대 교회에서 세례는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었기에, 세례의 상징적 해석과 신학이 강력하고 다양하게 발전되었습니다. 주교들과 신학자들을 통해 성서적 해석에서 많은 세례 신학이 발전하였습니다. 세례의 신학에서 어떤 분명한 생각이 자리하는데, 그것은 세례로 마귀들이 쫓겨나고 동시에 세례자는 하느님의 소유가 또는 성령의 소유가 된다는 ‘교환의 개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소유와 교환은 ‘날인’ ‘도장찍힘’으로 드러나는데, 그것은 세례자에 새겨진, 마치 주인 밑의 병사처럼 하느님의 소유가 된 ‘날인’으로 이해했습니다. 세례는 이외에도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감을 의미했고, 이것은 사탄을 거부하고 새로운 삶의 양식을 위한 내적인 회개를 의미했고, 그러므로 세례는 모든 죄의 동시적이고 전적인 용서를 의미했습니다. 이런 생각 안에서 세례는 삶에서 어떤 반복이 필요치 않은 것이었습니다. 세례는 두드러진 유일한 사건이었습니다.

또한 세례에서 죄 이전의 인간의 원래적 조건을 되돌리는, 죄를 극복한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과의 닮음이라 생각하였는데, 세례에서 하느님의 거룩한 영이 통교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세례 받은 이는 구원의 공동체에, 교회에 속하게 된 것입니다. 고대 후기의 사람들은 이처럼 세례를 통해 삶의 새로운 목적지를 찾았던 것입니다. 그 시작으로의 세례는 새로운 목적지로의 ‘회개’이었고, 세례는 그 의미와 효과를 느끼게 하는 기능을 갖고 있었으며, 그것은 당시의 일상과 삶의 행위들로 구성되었던 것입니다. 목욕, 정화, 기름바름, 옷의 바꿈, 몸의 동작, 즉 그런 행위에는 신앙과 삶의 어떤 좋고 선한 합의가, 이해가 있었던 것입니다. [2016년 5월 8일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52) 전례의 기원과 발전 (6)

 

 

성체성사 : 성체성사는 고대 교회에서 전례의 가장 중요한 순간을 이루었습니다. 성체성사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 나누신 ‘역사적 식탁’과 직접적인 연관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초기 교회의 사료들을 보면 이것들은 ‘주님의 만찬’(1코린 11,20) 혹은 ‘빵의 나눔’(사도 2,42) 이라고 말해집니다. 이 성체성사는 그 형식에 있어서 가장 오래된 ‘식사’의 특성과 외관의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파스카에 대한 성서적 언급들은 ‘식탁’에 모인 사도들을 보여주는데, 그들은 틀림없이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당신 수난 이전에 가르치셨던 것처럼 그들이 그분과 식사를 함께 할 때 그들 가운데 계심을 확신했습니다.

성체성사는 주로 저녁에 거행되면서(사도 20,7) 주님의 만찬과 참되고 진실한 식사로 연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간단하고 상징적인 식사만은 아니었습니다.(1코린 11,20) 성찬례의 요소를 보면 식사의 흔적, 구성이 발견됩니다. 식사 전 성찬례의 빵을 잡고, 잔을 들고 축복하고 나눴고 식사 후에 ‘예식’이 따랐습니다(1코린 11,25). 이런 예식은 잘 알고 있듯이 히브리적 예절에 상응합니다. 식사와 성찬례는 순차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보입니다. 식사엔 ‘아가페’(사랑의 나눔)란 이름이 주어졌고, 주로 주님의 날, 부활의 날에 이뤄졌습니다.

그렇지만 이처럼 성체성사와 빵의 나눔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습니다. 1세기에 이미 성체성사는 ‘아가페’에서 분리되어 저녁에서 아침으로 옮겨지게 되고, 아침에 거행되어 오던 ‘하느님 말씀의 전례’와 합하여 집니다. 이 근본적인 구조는 오늘날까지 남게 됩니다. 아침에 전례를 거행했던 이유는 상징적인 의미(그리스도는 솟아오르는 태양을 의미)와 실천적 의미(하루 일과를 앞서 거행함)가 동시에 있었습니다. 이런 변화는 예절의 형식에도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데요, 함께 앉아서 먹지 않게 되면서 탁자들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오직 주교나 사제들이 상징적 빵과 성찬의 잔을 위한 ‘탁자’를 갖게 되었고, 결정적인 요소는 이제 ‘감사의 기도’였습니다. 또 더 이상 탁자 주위를 둘러앉지 않았습니다. 이제 하느님 앞에 서 있게 되었고, 예물에 대한 기도를 함께 외우게 되었습니다. 식사의 형식은 보존하였지만 더 이상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습니다. 주교의 ‘탁자’는 마치 ‘주님의 식탁’ 혹은 거룩한 식탁으로 여기게 되었고 예절의 중심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식탁 주위에 둘러서게 되었습니다. 계속해서 성체성사가 거룩한 희생으로 이해되었을 때 그것은 ‘제단’이 되기에 이릅니다. 개별 장소(가정 성당)에서 거행되는 예절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교회적 예절로 자리하고 더욱 넓고 공적인 장소를 필요로 하게 됩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성체성사는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기억)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념(기억)은 소위 말하는 ‘성체성사 설립의 말씀’의 인용에 집중되었습니다. 빵과 포도주, 즉 예물이 하느님 앞에 봉헌되었고, 그것들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축성되어졌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 자체가 마치 희생제사로(너희를 위하여 흘릴 피고, 너희를 위한 희생이기에) 이해되었기 때문입니다.

성체성사는 이 외에 마지막 시대에 나눌 ‘기쁨의 식사’의 선취였습니다. 이 외에도 현존하는 주님과의 통교의 저녁식사요, 믿는 이들 간의 일치의 저녁식사였습니다. 2세기 초가 되면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Ignatio di Antiochia)에 의하면 성체성사는 죽음을 거스르는 해독제요 불멸의 약이라는 새로운 강조점이 발견됩니다. 이것은 이미 참되고 고유한 성사적 실재론이 보여지는 것입니다. [2016년 5월 15일 성령 강림 대축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53) 전례의 기원과 발전 (7)

 

 

주일에 거행된 성체성사에 대한 신뢰할만한 묘사는 약 16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것은 교부 유스티노(Giustino)의 호교론(Apologia I, 67항이고, 66-67항에는 세례적 성체성사 거행도 말하고 있다)입니다. 이것에 따르면 성체성사에 앞서 하느님 말씀의 전례가 자리했고, 이 말씀의 전례는 구약과 신약성경에 대한 낭독이 연속되었고, 주례자로부터 선포되는 설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어서 공동체 전체의 기도가 그리고 예물의 봉헌(빵과 포도주)이 따랐고, 마지막에 주례자에 의해 낭송된 성찬 감사의 기도가 따랐으며 형식은 매우 자유로웠습니다. 아직 책들과 형식 등 전례적인 규정들이 존재하지는 않았지만, 예절에 대한 요약본이나 해설이 존재했던 것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이 예절의 중심은 감사에 있었고, 영성체는 또 다른 근본적인 순간을 이뤘습니다.

 

215년경 히뽈리또(Ippolito)의 ‘교회 법규’는 처음으로 광범위하게 고대 교회의 성찬 기도의 완성된 형식을 보여줍니다. 대부분의 성찬 기도는 단순했지만 분명했고, 3세기 초가 되면 오늘날처럼 공동체와의 대화 형식이 도입됩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마음을 드높이...... 하느님께 감사합시다......). 기도에서 더욱 중요하고 특별한 요소들은 예수님의 오심과 삶, 수난과 죽음에 대한 감사의 기도이며, 기도 다음에 성찬 제정의 말씀이 뒤따랐습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기억(anamnesis)과 빵과 잔의 봉헌 그리고 봉헌된 성찬 예물에 대한 성령 청원이 이어졌습니다. 성령이 주례자들을 충만하게 하고, 봉헌물들을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결론처럼 찬양(dossologia)이 오게 되고, 이 성찬 기도의 양식은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습니다.

 

고대 교회는 다양한 요소와 이미지들을 활용하여 성체 성사의 신학적 의미를 발전시켰습니다. 성체성사의 풍요로움을 위해서 시작부터 교의를 구체화하기보다 실천의 여백을 중요시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모든 지역에 공통되고 동일한 효과를 지닌 어떤 개념도 갖지 않았습니다. 다양한 교부들의 견해들에서 우리가 유추해 낼 수 있는 것은 빵과 포도주의 성체성사적 요소들이 그들 각자의 관점에 따라 구별되는 다양한 개념들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언어 구사에서 빵이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구체적인 표현과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시면 영혼이 하느님으로 채워진다는 것 등이 발견됩니다. 예루살렘의 주교 치릴로(Cirillo)에 따르면 성령께서 성찬의 요소(재료)들을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시킨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오(Ambrogio di Milano, +386)는 전례에서 선포된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하여 축성된 빵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된다고 확언합니다. 이 실재론적 신학에서 실재와 전례적 상징의 관계가 아주 단순한 방식으로 고찰되고 있습니다.

 

전례의 요소들과 예절의 상징주의가 또 다른 방법으로 이해되는데, 예를 들면 플라톤주의의 영향으로 가시적인 이 세상의 뒤편에, 재료적 요소들(빵과 포도주)의 매개를 통해 통교되는, 영적인 세상이 존재한다는 해석입니다. 그러므로 재료가 되는 요소들은 더욱 심오한 현실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그것이 곧 현실은 아니었습니다. 이런 해석적 모델의 기초들에서 우리는 성체성사에 대해 두드러진 두 개의 시선을 보게 됩니다. 성사적 실재주의(realismo)는 영적 혹은 상징적 개념에 대한 기초를 놓았고 긴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은 하나의 전통이 되었으며, 성체성사는 예절과 흠숭이란 형식 안에서 훨씬 더 개념화되고 실천되어갔습니다. 그리고 점점 더 빵의 나눔(만찬)의 공동체적 거행이라는 원래적 의미는 줄어들고, 더 흠숭의 행위로, 거룩한 예절의 성취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2016년 5월 22일 삼위일체 대축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54) 전례의 기원과 발전 (8)

 

 

지난 호에 이어서 성체성사의 신학적인 발전을 간단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성찬 거행의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성체성사를 가리키기 위해 초기 그리스도교 안에서 사용된 표현들은 ‘빵의 나눔’과 ‘주님의 만찬’이었습니다. 3세기에는 봉헌, 제사, 등의 용어가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용어인 미사는 6세기부터 시작하여 성체성사의 항구한 거행이란 이름이 됩니다. 미사(Missa, dismissio)는 모임 후의 작별, 혹은 귀가를 가리킵니다. 전례에서 예절 거행의 마침 부분을 명시하던 것이 계속된 발전을 통해 원래적 의미를 잃어갔고, 미사는 성체성사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변화하였습니다.

주일의 역사를 보면,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히브리 축제날인 토요일(sabato)이 아니라 일요일에 성체 성사를 거행하였습니다. 그 시대는 행성에 따라 주간을 계산하였고, 그 날은 바로 태양신에 의해 거룩해진 날로 측정된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오직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이었기에 성체성사를 거행했던 것입니다.

성체성사는 주로 주일 저녁에 거행되었고, 훗날에 가서 아침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주일 거행이 부활의 날로 기념되었던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방의 명칭인 ‘태양의 날’은 그리스도인들이 새롭게 선택한 ‘주님의 날’이란(디다케 14,1) 표현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또 다른 명칭은 ‘여덟째 날’(마르 16,2)로 그리스도인들에게 한 주간은 주님의 날과 함께 시작됨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태양의 날’이란 별칭은 그리스도교적인 옷을 입게 되는데 그리스도를 태양으로, 창조의 첫 날이 빛의 탄생으로 시작되듯 그렇게 생각하였고, 그런 영향은 독일어와 앵글로색슨의 언어에 보존되어 문자적으로 ‘태양의 날’로 기억됩니다.(sunday, giornodel sole) 그리고 321년이 되면 로마제국 전체가 그 날을 주간적인 휴일로 지정합니다. 이것은 종교 문화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게 되는데, 이제 이 날은 노동에서 예외적인 날로 그리스도교적인 기념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주일’이란 주제는 성찬례 거행에의 ‘출석’과 ‘의무’의 문제를 제기합니다. 공동체는 가능한 한 이 의무를 완벽하게 이행하기를 바랐습니다. 열성의 부족으로 인한 이런 천상적인 봉사에의 불참은 1세기 이르면 이미 비판받고 있습니다. 4세기가 되면 이 문제에 관한 일련의 교회적 규정들이 나오게 됩니다.

기원으로부터 보면 성찬례의 전례적 거행은 주일에만 이뤄졌습니다. 디다케와 유스티노도 주일을 성찬례의 날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날에, 주간에 오는 축일들에, 대축제(부활)의 연장으로 성찬례가 거행되었던 것입니다. 이 외에 개별 교회들은 자신들의 순교자들에게 봉헌된 특별한 축제일에 이런 거행을 갖게 되었고, 4세기가 되면 이런 성찬례의 거행은 점차 확대되기에 이릅니다. 예를 들면 부활절 주간의 수요일과 금요일로 확대되었습니다. 하지만 4세기까지 고대 교회에서는 ‘성찬례의 매일 거행’이란 관행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4세기 말경이 되면 많은 교부들과 시노들에서 이런 경향과 실천이 발견됩니다.

성찬례 거행에서 영성체에의 참석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아주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영성체는 2세기경부터 그 증거가 발견됩니다. 사람들은 성찬의 빵을 각 가정으로 가져갔습니다(참석하지 못한 자에게는 부제가 그것을 가져갔다). 마치 하루의 첫 번째 음식처럼 그것을 아침에 먹는 것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관습이었습니다. 그러나 4세기가 되면 이런 실천이 그리스도교 안에서 사라지고, 사제들만이 하는 것으로 독특하게 변화합니다. [2016년 5월 29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청소년 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55) 전례의 기원과 발전 (9)

 

 

고해성사(La penitenza) : 오늘부터 살펴보게 될 것은 입문성사 가운데 하나인 ‘고해성사’에 관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완성된 틀에서 고해성사에 참여하고 그 은총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지만, 살펴보게 될 주제는 고대 교회 당시에는 신학적인, 그리고 실천적인 부분에서 엄청난 문제를 일으켰던 난해한 주제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고대 교회는 다음의 문제들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문제들이란, 죄인들과 공동체와의 관계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그리고 세례 이후에 중죄를 지은 죄인들이 하느님 앞에서 구원의 가능성이 있을까? 하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거룩한 삶, 즉 성덕의 요청은 초기 교회에서는 굉장히 강력하고 중요했습니다. 그들에게 거룩한 이들(즉 세례 받은 이들)은 죄를 범하지 않는 이들을 의미했습니다. 죄인들의 용서를 생각할 때면, 그들에게 그것은 마치 허락될 수 없는 은사의 느낌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3세기 박해라는 위급한 상황에서, 많은 이들이 죄에 떨어졌고 또한 그들 가운데 Lapsi(랍시)라 불리던, 배교했다 교회에 되받아들여진 사람들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세례 받은 죄인의 구원의 문제는 그러므로 시급히 결정할 필요가 있던 문제였습니다.

그런 것들에는 배교자들의 경우와 살인자들, 간통한 자들 등이 있었고, 이런 이들에게 여전히 구원의 가능성이 존재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중죄를 범하고 교회로부터 갈라졌던 사람들을 교회에 다시 받아들여질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대표자들은 사목적인 관점에서 중요한 이 부분에서 의견들이 대조적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이 문제들에 대해서 임시방편적인 결정들을 적용했습니다. 두 가지 점이 특별히 중요했는데, 그것은 성덕에 대한 측량할 수 없는 의무감과 동시에 용서의 가능성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회개와 세례(죄인들의 용서를 포함하는)는 사람의 삶에 있어서 ‘절대적 국면 전환’을 대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들은 삶의 방향을 죄에서 돌이켜,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 안에서 성덕을 받게 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라는 새로운 상황은 다른 죄들과는 전혀 병립할 수 없는 통로를 열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초기 그리스도교의 실천은 공동체로부터 죄인을 분리시켰습니다(1코린 5,1-5). 그렇게 한 이유는 일차적으로 교회의 거룩함을 보존하기 위한 의도였고, 이외에도 회개와 뉘우침의 진실함을 위한 의도였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이런 성덕 요청의 엄격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설교 안에서 두드러지는 죄인들을 버려두는 것을 허락하지 않던 예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은총을 통한 죄인들의 용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 앞의 친구들을 용서하고, 심지어는 원수들까지 용서하도록 준비된 사람들이기를 요청했습니다(예/마태 6,12).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은 용서할 준비가 되어있으란 요구로 교회에 이해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의무들은 성덕에 대한 엄격한 요구를 지킴과 또한 죄에 대한 은사에 있어서도 준비되어 있어야 함을 의미했습니다. 삶의 실천 가운데 훗날 그것은 죄들 중에서 “죽음에 이르는 죄’와 ‘좀 더 가벼운 죄’들에 대한 구별이 더해지게 됩니다(1요한 5,16-17). [2016년 6월 5일 연중 제10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56) 전례의 기원과 발전 (10)

 

 

지난 호에서 초세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죄인들의 구원에 관해 질문하고 답 해나가는 과정에서 문제의 핵심이 결국 ‘죄인의 용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로 귀결됨을 살펴보았습니다. 공동체는 성덕과 용서 둘 다 필요함을 느끼고 실천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런 상황과 인식 아래서 이뤄진 실천들은 2세기의 교회와 다음 세대의 교회에게도 여전히 유효하게 이어졌습니다.


먼저 용서의 전제 조건은 신뢰할 만한 뉘우침과 능동적이고 온전한 보속이었습니다. 죄도 용서도 모두 초기 교회의 삶의 한 부분이었지만, 특히 용서를 위한 일정 기간 동안, 또 목적에 적합하게 제정된 실천이 존재하지는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뉘우침의 전례가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런 뉘우침을 위한 전례는 2세기에 가서야 등장하게 됩니다. 140년 경 로마에서 한 평신도가 회개를 주제로 한 글을 썼습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헤르마의 목자(Pastore di Erma)로, 내용은 세상의 종말에 대한 위협과, 구원과 용서의 가능성에 대한 시간적 한계를 설정하고, 회개를 위한 유일하고 결정적인 마지막 시대를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글은 이 외에도 죄의 엄중함에 따라 죄악들과 죄인들을 다양한 그룹으로 구별지었습니다. 이런 구별들은 이어지는 회개의 실천에서 소홀히 할 수 없는 어떤 역할을 갖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회개의 규정화의 초기의 시도들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죄인의 용서가 아주 난감한 상황에 처해짐을 알게 됩니다. 몇몇의 특정한 죄들은 용서의 가능성이 없는 무거운 죄들로 남았고, 그것들에는 우상숭배(배교), 살인과 간음과 간통 등이 있었습니다. 이런 죄악들에 ‘떨어진’ 경우는 하느님의 심판에 남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죄는 공동체로부터 자동적으로 제외됨을, 반면에 용서는 교회 안으로 되돌아옴을 의미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회개의 첫 번째 형식들은 기도와 단식, 그리고 자선이었습니다. 3세기부터 회개의 규율은 동방과 서방에서 다른 방법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서방의 경우는 테르툴리아노(Tertulliano)가 회개에 대한 그의 저서(De paenitentia)에서, 이미 서방에서 발전된 회개의 전례를 추적해 볼 수 있는 충분한 정보를 제공해 줍니다. 전례의 기초에는 죄인, 즉 상복(단식과 기도를 실천하면서)을 입은 죄인이 있고, 그가 공동체 앞에서 자기 죄들에 대한 공적인 고백을 하고, 자신이 공동체 대열에 되받아들여지고, 또한 공동체가 그를 위해 중재해 주기를 청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죄의 결과로 그는 성찬례에서 제외되었고(공동체로부터의 축출), 공동체에 되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다른 회개자들과 함께 일정 기간, 즉 몇 주간 혹은 몇 년의 회개 기간을 단식과 기도를 행하며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런 의무들로부터 자유롭게 되면 한번의 재일치 예식이 거행됩니다. 초기 시대, 약 3세기부터는 공동체에 의해서 이 받아들여지는 예식이 거행되어졌고, 이후의 시대에는 주교가 손을 얹음을 통해서 이뤄지게 됩니다. 테르툴리아노는 이런 과정을 ‘두 번째의 회개’, 또는 ‘마지막 희망’이라고 불렀습니다(첫 번째의 회개는 세례로 간주하였던 것입니다). 테르툴리아노는 세례 이후의 죄의 용서에 대한 어려움을 강조하였고, 마지막에 가서는 본질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고 여기면서 엄격한 이단, 소위 말해 몬타니스타(montanista)로 넘어가게 됩니다. 이때부터 그는 교회의 회개의 실천을 ‘불법적 나태’라고 비난하고, 공동체와 주교가 죄를 용서해주는 권한에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합니다. [2016년 6월 12일 연중 제11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57) 전례의 기원과 발전 (11)

 

 

테르툴리아노의 ‘고해성사에 대하여’(De penitenza)를 통해서 서방의 고해성사 예식의 발전을 조금 살펴보았습니다. 이런 발전에서 이견들이 발견되기 시작했습니다. 테르툴리아노 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교회의 실천에 이견을 드러내는데, 무엇보다도 용서에 관한 당혹감을 표현하였습니다. 특히 죽음에 처해질 죄들에 대한 경우였습니다. 217년 로마에서는 갈리스도(Callisto) 주교와 히뽈리토(Ippolito) 간의 논쟁으로 분열이 생기게 됩니다. 히뽈리토는 엄격주의를 옹호하면서 로마 공동체의 공식적 회개의 실천을 너무 관대하다고 비판합니다. 251년 다시 로마에서 이 두 경향 간의 더욱 날카로운 충돌이 재현됩니다. 이 서로 다른 경향들을 대표하여 이번에는 사제 노바씨아노(Novaziano)와 주교 코르넬리오(Cornelio)간에 배교자(lapsi)들을 교회와의 일치에로 되받아 들이는 방법과 가능성에 대한 반대로 논쟁이 벌어집니다. 이 충돌로 노바씨아노의 엄격주의 교회가 건설되는데, 그들은 자신들을 의미적으로 ‘순결한 이들’(katharoi, ipuri)이라 불렀고, 원칙적으로 죄인들의 축출을 고집하였습니다. 분열은 한 세기를 지속하였습니다. 항상 ‘실천들’을 바로잡으려는 새로운 시도들이 있었으나, 결국에는 아무런 성과를 내지는 못하였습니다.

회개의 규율과 제도는 실상 되돌릴 수 없는 방법으로 더 큰 자유성과 은사를 향하여 계속해서 진화하였습니다. 이런 발전의 원천적 동기는, 각 시대의 교회에는 새롭게 받아들여지기를 청하는 뉘우치는 죄인들과 그들의 구원을 바라는 마음으로 이런 받아들임을 거절할 수 없는 주교들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압박은 회개의 실천을 더 엄격하게가 아니라 더욱 온유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카르타고의 주교 치프리아노(Cipriano +258)는 회개 규율의 교회적인 관리를 결정적인 방법으로 강화하는데 공헌하였습니다. 그는 북 아프리카의 교회에 속해있었고, 두 반대자들 사이에 끼어 있었습니다. 한편에는 배교자들이 회개를 하여 교회와 재일치를 하는 모든 가능성을 배제시키는 엄격주의자들이었고, 다른 편에는 소위 말하는 ‘고백자들’(confessori)로서, 그들은 반대로 그들이 박해를 입은 공로의 기초아래, 배교자들의 나쁜 시도를 벌충하게 하고, 그들을 교회에 다시 받아들일 권한을 주장하는 이들이었습니다. 치프리아노는 주교이며 아프리카의 교황으로서 이 두 개의 입장을 부정하였습니다.

엄격주의자들을 대항하여서는, 배교자들이 거부되는 것은 비인간적이며, 오히려 이들은 치유 받아야 할 병자들로 다루어야 한다고 반대합니다. 관대한 고백자들에게는 배교자들이 중죄의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무거운 의무를 주지 않고 다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들이 그들의 죄에 상응하는 행동들을 거친 후에 ‘거의 죽은’ 그들의 상태에서 구원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치프리아노는 온건주의를 부정합니다. 그는 교회로부터 명령된, 즉 죄인들의 공적인 고백과 참되고 죄에 상응한 회개와 유일한 권위자인 주교의 손을 얹음을 통해 일치에로 이끄는 엄격한 회개 과정의 필요성을 열정적으로 지지하였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치프리아노는 결정적으로 두 개를 하나로 하였습니다. 즉 하느님의 편에서의 죄인들의 용서와 주교로부터 인도되는 회개의 규율을 하나로 하였던 것입니다. 용서는 규율과 결속되고 그러므로 규율은 용서에 있어서 그 효용성을 갖게 된 것입니다. 고해성사와 교회 입장에서의 집행은 이제 교회의 권한과 능력에 포함되게 되었으며, 이제 그것은 주교에게 속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2016년 6월 19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남북통일 기원 미사)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58) 전례의 기원과 발전 (12)

 

 

오늘도 계속해서 서방 교회에서의 고해성사의 발전 과정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좀 긴 시간 고해성사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 같습니다. 다음호에서는 동방 교회의 발전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서방에서는 일찍부터 주교들이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고해성사를 집행하는 이들로 간주되었습니다. 3세기경부터 속죄의 과정은 그것의 근본적인 요소들에 있어서 비교적 하나로 통일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속죄의 개별 단계들은 죄가 개인들의 거룩함에 선을 그은 순간부터, 나아가 공동체의 거룩함을 침해하는 순간으로부터, 교회의 전례 안에 통합된 공적행위가 되었습니다. 고해성사는 공동체로부터 죄인이 갈라지면서 시작되었고, 회개자들이 규율에 그를 위치 짓는다는 의미에서 공동체에서 축출의 속죄를 의미했으며, 오직 긴 시간의 엄격한 속죄적 행위의 긴 과정만이 그를 교회의 품 안으로 되돌릴 수 있었습니다.

공동체로부터의 추방은 가시적인 형식과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데요, 속죄자에게는 전례의 어떤 부분 혹은 전례 전체에 참여가 허락되지 않는 결과였습니다. 그들은 이제 세례자라고 고려되지 않았던 것이고, 사실 모든 것에서 제외된 것입니다. 그들은 뒤에, 즉 성당의 입구 가까운 곳에 머물러야 했고, 영성체를 할 수가 없었으며, 예물을 봉헌하러 나올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전례에 수동적으로 머물러야 했고, 이런 의미에서 공동체와 ‘관계없는 자’로 여겨진 것입니다. 그들은 나아가서, 모든 전례적 거행에 의무적으로 출석해야 했고, 실제로 자신의 속죄의 전 기간 동안 일종의 도움처럼 주교로부터 특별한 축복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속죄 기간의 마지막에 죄의 용서를 의미하고, 공동체 안에서 죄인들의 용서와 은총의 통교를 의미하는 재일치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죽음의 죄에 상응한 죄를 범한 이들’의 경우에 있어서 용서는 오직 한 번만 베풀어졌습니다.

속죄의 기간의 길이는 주교나 혹은 지역에 따른 규정에 따라 달랐지만, 이런 발전을 통해서 개별 속죄자들의 모든 속죄적 기간들은 하나로 통합되기에 이릅니다. 5세기에는, 세례의 준비 기간으로서의 의미를 지녔던 파스카에 앞선 단식의 기간을 참된 속죄의 기간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이 기간은 월요일에 시작되어 단식의 첫 주일까지 계속되었습니다. 7세기에서부터는 재의 수요일에서 시작되기에 이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재를 얹는 관례가 속죄의 옷을 입음과 함께 속죄 예절의 한 부분이 됩니다.

이런 공적인 속죄의 과정은 자연스럽게 중대한 죄들에 물든 이들에게 부과되었지만 주교들은 ‘일상적 죄들’을 과소평가할 위험을 경계하는 역할도 또한 수행해야 했습니다. 모든 죄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치명적으로 분리되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죄인이고 고해성사는 그리스도인에게 일생동안 계속되는 의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속죄의 실천은 사목적 ‘부족함’을 채워갔고, 그로인해서 이런 공적인 속죄의 방법 외에 6세기가 되면 다른 형식인 개인적인 속죄의 형식이 생겨납니다. 죄들의 고백과 용서가 이제 공적 예절과 공동체적 전례 행사의 밖으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소위 말해 ‘개별 고백’, ’사적 고백’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초창기에는 이 개별 고백이 사제의 거처에서 이뤄졌고, 11세기경부터 교회의 내부에서 이뤄지게 되고, 중세 시대에 가서야 오늘날 우리 방식의 고해성사가 이뤄지게 됩니다. [2016년 6월 26일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59) 전례의 기원과 발전 (13)

 

 

오늘은 동방에서의 고해성사의 발전과정을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동방 교회에서도 고해성사는 직무와 연결지어졌고, 하느님의 용서가 교회적 용서의 행위로 연결되기에 이릅니다. 400년경까지 동방에서는 주교들에 의해 고해성사의 지도가 맡겨진 특별한 사제가 있었습니다. 동방의 특징이라면 고해성사가 서방처럼 제도적으로 고려되지 않고, 완덕을 향해 가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영적이고 내적인 여정의 순간으로 이해했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고해성사는 죄의 그물에 얽힌 이들을 풀어주기 위한 영적인 인도로 여겼습니다. 이런 고해성사 이해에 영향을 끼친 인물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와 오리게네스를 들 수 있습니다. 이들에 따르면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잘 준비됨을 전제로 주교는 죄인들의 용서에 관한 권한을 가졌고, 이들을 통해 고해성사는 삶을 새롭게 하고, 영혼을 씻고, 사람을 개선하는 교육과정으로써 하느님에게로 나아감을 자극하는 것이었습니다. 회개에로 이르는 길과 방법은 세례와 공동체 앞에서의 공적인 죄의 고백, 그리고 자선과 사랑, 순교에의 열성이었습니다.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고해성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모두가 죄인이란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동방은 주교들의 법적인 권한보다 영적 · 교육적 측면을 강조하였습니다.

동방에서 속죄의 개념은 수도생활에 영향을 받습니다. 수도자들의 엄격함에 영향 받아, 죄를 인간의 실패로 영혼을 탄식의 상태로 이끄는 ‘치명적인 죄’로 보았습니다. 경험 많은 수도자들은 이런 사람들을 속죄의 삶으로, 완덕으로, 영적인 영역에서의 새로운 삶을 실천하는 이들로 이끌어 주었습니다. 더 자주 양심을 성찰하고, 일상적인 고백과 중재, 그리고 사제에 의한 죄의 용서에로 인도하였습니다. 수도자의 삶은 지혜와 완덕에로의 길처럼 교회 백성 두루에게 매력적으로 비춰졌고, 실천되어야만 하는 삶으로 여겨졌습니다.

속죄의 기간은 죄와 허물에 상응하여 정해졌는데, 3·4세기경이면 대략 4개의 단계로 속죄의 과정이 고정되었고, 이 과정은 순차적이었으로 각 단계마다 특별한 이름이 붙혀졌습니다. 첫째 단계는 ‘읍소하는 이들’의 단계로, 속죄자들은 성당의 입구까지만 갈 수 있었습니다. 전례에 참여하기 위해 모여드는 교우들에게 자신들을 공동체로부터 갈라놓는 죄들을 고백했고, 울면서 그들의 중재를 청하는 단계입니다. 둘째 단계는 ‘듣는 이들’로 불리는 단계로 성당의 뒷부분에 있어야 했는데, 그곳은 세례 받지 않은 예비자들이 있는 곳으로, 이들도 죄를 지으면서 세례 이전으로 후퇴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셋째 단계는 ‘무릎 꿇은 이들’의 단계로, 속죄자들은 교회의 앞부분에 자리하여 전례의 몇 부분에 참여하게 됩니다. 하지만 속죄의 표시로 그들은 항상 무릎을 꿇고 있어야 했습니다. 구원 받은 자들이 일어서는 것과 대조적인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넷째 단계는 ‘서 있는 자들’의 단계로 이 마지막 과정에서 속죄자들은 전례의 모든 부분에 참여합니다. 하지만 아직 영성체와 예물 봉헌에는 예외를 두었습니다. 이렇게 전례적 예절은 공동체로부터 죄인들의 거리둠에 강조를 두고 점진적으로 그들을 되받아들이는 단계로 이뤄졌고, 이 단계들의 끝에 속죄자에게 영성체가 허락되었습니다.

이런 각 단계의 기간은 3·4세기의 주교들의 편지들에서 발견되는데, 예를 들면 살인의 경우는 20년, 간통의 경우 15년, 절도 등은 1~2년을 경과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위중한 배교의 행위는 일생을 ‘읍소하는 이’의 단계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하지만 코스탄티노 황제 이후 교회의 상황이 변하여 교회에서의 축출은 제국에서의 축출도 의미하는 결과를 내게 되면서, 점차 사적인 고백으로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교회와 사회가 더 이상 구별되지 않는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도 엄격주의자들의 저항이 없지는 않았지만, 하느님의 자비를 닮으려는 노력과 사목적 · 신학적 이유로 죄의 용서를 더욱 넓게 이해하게 됩니다. [2016년 7월 3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경축 이동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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