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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교회사 에세이47-59: 전례의 기원과 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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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에세이 (47) 전례의 기원과 발전 (1)
지난 호까지는 로마 교황의 수위권의 역사를 간략하게 보았습니다. 로마의 주교가 자신의 주장을 전 교회에 성공적으로 실현시키지는 못했지만, 서방 교회에서는 부분적으로 그것을 이뤄냈고 특히 중세에는 교황들이 종교적, 영성적 부문은 물론, 정치적 부문에서도 막대한 영향력을 갖는 존재가 됩니다. 이런 변화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분은 레오 교황이었고, 레오 교황 이래로 교황은 고관의 옷을 입은 통치자로서 자신의 교회적 임무를 만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은 교회가 더 이상 ‘친교적’ 구조와 ‘시노드적’ 조직의 교회에 머물지 않고 군주적 교회로 변해감을 의미하고, 교황은 이제 교회 조직의 명실상부한 대표가 됨을 의미했습니다.
이런 용어들은 숨겨진 구원의 사건이 전례적 표징 아래 비밀스럽게 현실화 된다는 사실과 상징의 현존과 구원의 효력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공히 드러내줍니다. 교회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상징과 구원의 효과를 구별하게 되고 12세기에 이르러서야 오늘날의 칠성사가 확정되게 됩니다.
4세기경이면, 주된 교회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로마, 콘스탄티노폴리, 예루살렘, 밀라노 등에서 서로 다른 다양한 전례적 모델들이 발견되었고, 6-7세기경이 되면 이런 풍부하고 다양하며 창조적이고 활력 넘치던 전례적 삶에 어떤 지도적인 동기들이 개입하면서 통제 혹은 통일화가 시도됩니다.
전례의 주제들은 주로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기념이었고, 극적인 형식으로 이뤄진 신비 거행을 통한 구원적 현존의 체험이라는 이상과 지상적 영역에서 거행된 예식을 통한 천상적 예식에의 참여라는 불타는 열망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전례는 외형적인 모습에서 이방인들의 그것과 확연하게 구별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성전도 없이 ‘가정 교회’를 이루었고, 성찬례를 위한 탁자들도 어떤 특정한 모양과 제단의 기능을 갖지 않았고, 3세기가 되어서야 전례적 영역에서 첫 번째 이미지들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초기 그리스도교는 참된 종교가 아니라는 비난에 직면했고,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전례를 거행하는 주례자를 이방 종교처럼 ‘제사장’이라고 부르지도 않았었습니다. 그러기에 초기 1-2세기 동안 그리스도교 전례는 완전히 다른 예식으로 동시대인들에게 각인되었지만, 그런 구별은 교회가 주변 상황에 적응해 나가면서 점점 희미해지게 됩니다.
지금부터 살펴보게 될 초기 그리스도교의 전례는 우리가 지금 생각하고 규정하는 의미의 성사적 개념을 아직 갖고 있지 않았다는 점을 먼저 말해 두어야 합니다. 성사에 대한 정확한 신학적 개념도, 또 다른 예절들과 상징적 행위들로부터 구분하는 개념도 없었습니다. 다만 세례와 성체 성사는 아주 중심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었습니다. 용어의 사용에 있어서는 구원의 중심이 되는 사건들을 가리키기 위하여 그리스 교회는 mysterion이란 용어를 라틴 교회는 sacramentum을 사용하였습니다.
이런 용어들은 숨겨진 구원의 사건이 전례적 표징 아래 비밀스럽게 현실화 된다는 사실과 상징의 현존과 구원의 효력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공히 드러내줍니다. 교회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상징과 구원의 효과를 구별하게 되고 12세기에 이르러서야 오늘날의 칠성사가 확정되게 됩니다. [2016년 4월 10일 부활 제3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48) 전례의 기원과 발전 (2)
세례 : 세례 성사는 그리스도교를 시작하기 위한 예식으로 아주 초기부터 형성되었고, 그것은 물에 잠기는 예식 혹은 물을 뿌리는 예식을 통해 거행되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존재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잘 드러내주는 것으로, 성경도 이를 증언하고 있습니다(로마 6,3-5). 세례식은 그리스도교가 아직 유대교의 태내에 있을 때부터 거행되었고, 이는 회개와 내적 정화의 상징으로 물에 잠김을 통해서 수행되었습니다. 초기 공동체는 새롭게 회개한 자들의 시작의 예절로 이것을 거행하였는데, 특이한 점은 그 이름을 익숙하지 않았던, 그리스적 개념인 Baptisma(물에 잠기다)를 사용하였다는 것입니다. 아마 그것은 그리스도교 세례를 그와 비슷한 다른 것들로부터 구별하려는 의도라고 생각됩니다.
교회사 에세이 (49) 전례의 기원과 발전 (3)
초기 그리스도교의 세례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세례식은 초기 그리스도교가 각별한 애정과 관심으로 준비하고 거행하던 아주 근본적이고 중요한 전례였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인이 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삶으로 나아가는 길이므로 그에 걸맞는 삶을 살아야 하고, 그런 삶을 위한 준비와 결단이 선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전제하에 초기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려는 이에게 특별한 준비의 과정, 교리 교육 과정을 진행하였습니다.
3세기가 되면 교리 교육의 어떤 형식이 눈에 띄게 됩니다. 특별한 것은 엄격한 그리스도교의 규범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특성을 갖는, 정해진 기간에 대한 의무와 그 기간 동안의 후보자에 대한 평가 그리고 구마식이었습니다. 코스탄티노 황제의 시대로부터, 즉 4세기쯤이면 새로운 조건이 형성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교를 향한 대중들의 집단적인 관심과 개종이 이뤄지면서 교리 교육 형식에 있어서 변화를 가져옵니다. 이런 집단적 개종의 경향에 따라 교회는 더 각별히 신자로 ‘받아들임’에 대해 걱정과 염려를 갖게 됩니다. 눈에 띄는 실천적인 변화는 많은 사람들이 ‘예비자’가 되어 오지만, 자주 많은 사람이 세례에 이르지 못하고 오랜 기간을 ‘예비자’로 남아있거나 혹은 ‘일생 내내’ 그렇게 남아있는 경우도 생기게 됩니다. 그러면서 교리 교육은 지난 시절처럼 엄격하게 적용되지 못하고, 사람들은 그리스도교적 도덕이 요청하는 의무들을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하였기에 교리 교육은 더 이상 세례의 준비기간으로의 기능하지 못하는 점이 눈에 띠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런 시류에 따라 특별한 예식이 강조되는데, 그것은 바로 파스카에 앞서 거행되던 ‘단식의 기간’이었습니다. 이제 교리 교육자들(예비자)들이 세상의 무리로부터 세례를 통해 떨어져 나옴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과정으로 그 중요성이 커지게 됩니다. 교리 교육자는 이 기간 동안에 자신을 교회 앞에 ‘드러내고’ 교회는 대부와 주교의 입을 통해 그가 교회에 새로운 일원으로 등록됨을 완성하게 됩니다.
교리 교육자는 이제 주교 앞에 나옴으로 그리스도교적 삶의 낮은 단계의 상태를 끝맺게 됩니다. 이런 ‘받아들임’의 예절로 세례 받기를 원하는 예비자들은 과정을 끝내고, 새로운 삶으로 떠나게 됩니다. 즉 그들은 새로운 삶으로 ‘불리어진’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그리스 혹은 라틴어로 조명된 이(illuminati), 뽑힌 이, 갈망하는 이로 불리게 됩니다.
세례를 위한 파스카 기간의 준비는 뉘우침과 구마 그리고 가르침의 실천으로 구성됩니다. 그것은 2주간에 걸친 ‘집중과정’으로 그들은 교의와 영성과 그리스도교의 직접적인 삶의 품행에로 인도됩니다, 가르침의 교의적 내용을 보면 성경 전반에 대한 것을 가르쳤고, 신앙과 전례의 상징들에 대한 고백과 설명이 뒤따랐습니다. 상징의 내용과 기록들은 단식의 과정이 끝날 때에 가서야 세례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성대하게 전해집니다. 마치 믿음과 회개의 내적인 ‘성전’처럼 거행되었습니다. 이 시기가 끝날 때까지 그들은 아직 공적으로 교회에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전 기간 동안 특히 그 절정에 이르는 세례의 날까지 이런 예절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교 교회 안에 받아들여짐은 3개의 국면으로 진행됩니다. 즉 교리 교육과 조명 그리고 세례의 단계입니다. 그 단계 때에 파스카 주간의 세례와 세례의 신비 그리고 이어서 성체 성사의 신비에 대한 교육이 이뤄집니다. 4세기 예루살렘의 치릴로(Ciriillo)의 강론에 따르면 당시의 서방 그리스도교의 세례식은 세 부분으로 이뤄졌습니다. 즉 세례적인 물에 잠김과 함께 거행되는 손의 얹음(안수), 이마에 기름 바름과 세례의 성체 성사였습니다. [2016년 4월 24일 부활 제5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50) 전례의 기원과 발전 (4)
초세기 세례식의 발전 과정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세례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파스카 준비 기간에 이뤄지는 단식의 과정과 그 과정에 이뤄지는 교육이 중요하게 인식되었고, 세례의 형식들이 갖춰져 가고 있었습니다. 특히 세 가지의 형식, 물에 잠김과, 안수와 기름 바름, 그리고 세례의 성체성사가 그 핵심을 이뤄가고 있었습니다.
히뽈리토가 전해주는 3세기의 세례를 살펴보면, 세례식은 주교가 두 명의 사제와 세 명의 부제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세례를 위한 특별한 어떤 전례적 장소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세례 전날 밤 세례 받을 후보자들은 모여 기도하고 마지막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주교는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구마를 거행하고, 그들에게 세례의 날인을 하였습니다. 기도를 바치고 세례식에 사용할 기름을 축성하고, 세례를 받을 사람들은 ‘마귀를 끊어버린다’고 외칩니다. 이제 세례 받을 사람들은 옷을 벗고 몸에 구마의 기름을 발랐고, 옷을 벗은 채로 세례당으로 인도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이때 삼중의 질문이 주어지는데, “전능하신 아버지 하느님을 믿는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가?”, “거룩한 성령과 거룩한 교회 그리고 육신의 부활을 믿는가?”였고, 이에 그들은 세 번 “믿습니다.”로 고백하였습니다. 이 후에 한 명씩 물에 잠기게 되고 이제 성대하게 세례 받은 이가 되는 것입니다.
원초적 세례의 형식과 관련된 사료들에는 현행처럼 “나는 .......에게 세례를 줍니다.”가 언급되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세례적 잠김의 행위로, 그것은 정화를 의미하고, 죄의 용서를 상징했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묻혔음을,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할 것을 즉 새로운 삶으로 태어남을 상징했습니다.
세례식은 주교를 통해 성령의 전달을 의미하는 ‘손을 얹음’(안수)와 이마에 기름을 바름으로 끝이 나고 주교는 준비된 장소에서 나머지 신자 공동체와 함께 계속해서 세례의 성체성사를 거행하였습니다. 이 성체성사의 거행은 세례성사의 한 부분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그 예절을 위한 음료는 세례 받는 자신들이 준비하여 가져왔고, 여기에는 빵과 포도주 그리고 우유, 꿀과 물 등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는 것들이 봉헌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들에겐 조금 낯설은 것들도 있었습니다. 성찬의 상징인 빵과 포도주, 그리고 우유와 꿀은 약속된 땅에서의 구원을 충만을 상징했고, 물은 반면에 내적인 정화를 가져옴을 상징했다고 히뽈리토는 세례를 묘사하고 있었습니다.
세례 예식의 근본적인 요소들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매번 다른 예절들로 풍부해져갔습니다. 특히 로마와 스페인, 아프리카와 밀라노, 예루살렘과 안티오키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몇몇의 예절들은 극적인 형식을 취하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 마귀를 끊어버리거나 옷을 벗는 행위들은 ‘낡은 인간’을 벗어던짐을 의미하였습니다. 또한 물이 세례의 힘을 의미했기에 세례의 물을 특별하게 축성하는 예식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런 예식들은 상징적 실재와 성사를 증거해 줍니다. 다시 말하면 감각할 수 있는 예절과 그것들에 대한 신중한 고려와 그것들 안에서 일하시는 신적인 힘의 효과와 현존에 대한 강한 ‘실재적’ 개념을 의미했습니다.
또 세례에는 특별한 예절적 관습들이 있었는데, 세례 받을 사람들이 흰 옷을 입음이 그것으로 이것은 세례의 힘에 의해 순수하게 됨을 상징하기 위해 흰 옷을 입었습니다. 반면에 세례를 따라오는 성령의 전달예절은 점점 더 독립적인 것이 되어갔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세례식에서 떨어져 나가게 되어 신비의 한 부분인 ‘견진’의 형식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2016년 5월 1일 부활 제6주일(생명 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51) 전례의 기원과 발전 (5)
이제 세례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그 삶을 살아가기 위한 가장 원초적이고 필수적인 성사로 자리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교인의 수가 늘어가면서 새로운 문제가 대두하게 되는데 그것이 어린이들, 유아들의 세례였습니다. 2세기가 될 때까지 교회는 어른들의 세례의 규칙들을 마련했습니다(비록 아기들의 세례를 제외시키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유아들의 세례에 대해서는 신학적인 이유들 때문에 부정적이었던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4세기까지 아직 모든 그리스도인 부모들이 자신들의 자녀들에게 세례를 받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약 5,6세기가 되어서야 유아 세례가 보편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교회사 에세이 (52) 전례의 기원과 발전 (6)
성체성사 : 성체성사는 고대 교회에서 전례의 가장 중요한 순간을 이루었습니다. 성체성사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 나누신 ‘역사적 식탁’과 직접적인 연관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초기 교회의 사료들을 보면 이것들은 ‘주님의 만찬’(1코린 11,20) 혹은 ‘빵의 나눔’(사도 2,42) 이라고 말해집니다. 이 성체성사는 그 형식에 있어서 가장 오래된 ‘식사’의 특성과 외관의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파스카에 대한 성서적 언급들은 ‘식탁’에 모인 사도들을 보여주는데, 그들은 틀림없이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당신 수난 이전에 가르치셨던 것처럼 그들이 그분과 식사를 함께 할 때 그들 가운데 계심을 확신했습니다.
교회사 에세이 (53) 전례의 기원과 발전 (7)
주일에 거행된 성체성사에 대한 신뢰할만한 묘사는 약 16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것은 교부 유스티노(Giustino)의 호교론(Apologia I, 67항이고, 66-67항에는 세례적 성체성사 거행도 말하고 있다)입니다. 이것에 따르면 성체성사에 앞서 하느님 말씀의 전례가 자리했고, 이 말씀의 전례는 구약과 신약성경에 대한 낭독이 연속되었고, 주례자로부터 선포되는 설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어서 공동체 전체의 기도가 그리고 예물의 봉헌(빵과 포도주)이 따랐고, 마지막에 주례자에 의해 낭송된 성찬 감사의 기도가 따랐으며 형식은 매우 자유로웠습니다. 아직 책들과 형식 등 전례적인 규정들이 존재하지는 않았지만, 예절에 대한 요약본이나 해설이 존재했던 것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이 예절의 중심은 감사에 있었고, 영성체는 또 다른 근본적인 순간을 이뤘습니다.
215년경 히뽈리또(Ippolito)의 ‘교회 법규’는 처음으로 광범위하게 고대 교회의 성찬 기도의 완성된 형식을 보여줍니다. 대부분의 성찬 기도는 단순했지만 분명했고, 3세기 초가 되면 오늘날처럼 공동체와의 대화 형식이 도입됩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마음을 드높이...... 하느님께 감사합시다......). 기도에서 더욱 중요하고 특별한 요소들은 예수님의 오심과 삶, 수난과 죽음에 대한 감사의 기도이며, 기도 다음에 성찬 제정의 말씀이 뒤따랐습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기억(anamnesis)과 빵과 잔의 봉헌 그리고 봉헌된 성찬 예물에 대한 성령 청원이 이어졌습니다. 성령이 주례자들을 충만하게 하고, 봉헌물들을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결론처럼 찬양(dossologia)이 오게 되고, 이 성찬 기도의 양식은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습니다.
고대 교회는 다양한 요소와 이미지들을 활용하여 성체 성사의 신학적 의미를 발전시켰습니다. 성체성사의 풍요로움을 위해서 시작부터 교의를 구체화하기보다 실천의 여백을 중요시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모든 지역에 공통되고 동일한 효과를 지닌 어떤 개념도 갖지 않았습니다. 다양한 교부들의 견해들에서 우리가 유추해 낼 수 있는 것은 빵과 포도주의 성체성사적 요소들이 그들 각자의 관점에 따라 구별되는 다양한 개념들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언어 구사에서 빵이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구체적인 표현과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시면 영혼이 하느님으로 채워진다는 것 등이 발견됩니다. 예루살렘의 주교 치릴로(Cirillo)에 따르면 성령께서 성찬의 요소(재료)들을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시킨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오(Ambrogio di Milano, +386)는 전례에서 선포된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하여 축성된 빵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된다고 확언합니다. 이 실재론적 신학에서 실재와 전례적 상징의 관계가 아주 단순한 방식으로 고찰되고 있습니다.
전례의 요소들과 예절의 상징주의가 또 다른 방법으로 이해되는데, 예를 들면 플라톤주의의 영향으로 가시적인 이 세상의 뒤편에, 재료적 요소들(빵과 포도주)의 매개를 통해 통교되는, 영적인 세상이 존재한다는 해석입니다. 그러므로 재료가 되는 요소들은 더욱 심오한 현실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그것이 곧 현실은 아니었습니다. 이런 해석적 모델의 기초들에서 우리는 성체성사에 대해 두드러진 두 개의 시선을 보게 됩니다. 성사적 실재주의(realismo)는 영적 혹은 상징적 개념에 대한 기초를 놓았고 긴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은 하나의 전통이 되었으며, 성체성사는 예절과 흠숭이란 형식 안에서 훨씬 더 개념화되고 실천되어갔습니다. 그리고 점점 더 빵의 나눔(만찬)의 공동체적 거행이라는 원래적 의미는 줄어들고, 더 흠숭의 행위로, 거룩한 예절의 성취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2016년 5월 22일 삼위일체 대축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54) 전례의 기원과 발전 (8)
지난 호에 이어서 성체성사의 신학적인 발전을 간단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성찬 거행의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교회사 에세이 (55) 전례의 기원과 발전 (9)
고해성사(La penitenza) : 오늘부터 살펴보게 될 것은 입문성사 가운데 하나인 ‘고해성사’에 관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완성된 틀에서 고해성사에 참여하고 그 은총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지만, 살펴보게 될 주제는 고대 교회 당시에는 신학적인, 그리고 실천적인 부분에서 엄청난 문제를 일으켰던 난해한 주제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고대 교회는 다음의 문제들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교회사 에세이 (56) 전례의 기원과 발전 (10)
지난 호에서 초세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죄인들의 구원에 관해 질문하고 답 해나가는 과정에서 문제의 핵심이 결국 ‘죄인의 용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로 귀결됨을 살펴보았습니다. 공동체는 성덕과 용서 둘 다 필요함을 느끼고 실천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런 상황과 인식 아래서 이뤄진 실천들은 2세기의 교회와 다음 세대의 교회에게도 여전히 유효하게 이어졌습니다. 먼저 용서의 전제 조건은 신뢰할 만한 뉘우침과 능동적이고 온전한 보속이었습니다. 죄도 용서도 모두 초기 교회의 삶의 한 부분이었지만, 특히 용서를 위한 일정 기간 동안, 또 목적에 적합하게 제정된 실천이 존재하지는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뉘우침의 전례가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런 뉘우침을 위한 전례는 2세기에 가서야 등장하게 됩니다. 140년 경 로마에서 한 평신도가 회개를 주제로 한 글을 썼습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헤르마의 목자(Pastore di Erma)로, 내용은 세상의 종말에 대한 위협과, 구원과 용서의 가능성에 대한 시간적 한계를 설정하고, 회개를 위한 유일하고 결정적인 마지막 시대를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글은 이 외에도 죄의 엄중함에 따라 죄악들과 죄인들을 다양한 그룹으로 구별지었습니다. 이런 구별들은 이어지는 회개의 실천에서 소홀히 할 수 없는 어떤 역할을 갖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회개의 규정화의 초기의 시도들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죄인의 용서가 아주 난감한 상황에 처해짐을 알게 됩니다. 몇몇의 특정한 죄들은 용서의 가능성이 없는 무거운 죄들로 남았고, 그것들에는 우상숭배(배교), 살인과 간음과 간통 등이 있었습니다. 이런 죄악들에 ‘떨어진’ 경우는 하느님의 심판에 남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죄는 공동체로부터 자동적으로 제외됨을, 반면에 용서는 교회 안으로 되돌아옴을 의미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회개의 첫 번째 형식들은 기도와 단식, 그리고 자선이었습니다. 3세기부터 회개의 규율은 동방과 서방에서 다른 방법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서방의 경우는 테르툴리아노(Tertulliano)가 회개에 대한 그의 저서(De paenitentia)에서, 이미 서방에서 발전된 회개의 전례를 추적해 볼 수 있는 충분한 정보를 제공해 줍니다. 전례의 기초에는 죄인, 즉 상복(단식과 기도를 실천하면서)을 입은 죄인이 있고, 그가 공동체 앞에서 자기 죄들에 대한 공적인 고백을 하고, 자신이 공동체 대열에 되받아들여지고, 또한 공동체가 그를 위해 중재해 주기를 청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죄의 결과로 그는 성찬례에서 제외되었고(공동체로부터의 축출), 공동체에 되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다른 회개자들과 함께 일정 기간, 즉 몇 주간 혹은 몇 년의 회개 기간을 단식과 기도를 행하며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런 의무들로부터 자유롭게 되면 한번의 재일치 예식이 거행됩니다. 초기 시대, 약 3세기부터는 공동체에 의해서 이 받아들여지는 예식이 거행되어졌고, 이후의 시대에는 주교가 손을 얹음을 통해서 이뤄지게 됩니다. 테르툴리아노는 이런 과정을 ‘두 번째의 회개’, 또는 ‘마지막 희망’이라고 불렀습니다(첫 번째의 회개는 세례로 간주하였던 것입니다). 테르툴리아노는 세례 이후의 죄의 용서에 대한 어려움을 강조하였고, 마지막에 가서는 본질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고 여기면서 엄격한 이단, 소위 말해 몬타니스타(montanista)로 넘어가게 됩니다. 이때부터 그는 교회의 회개의 실천을 ‘불법적 나태’라고 비난하고, 공동체와 주교가 죄를 용서해주는 권한에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합니다. [2016년 6월 12일 연중 제11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57) 전례의 기원과 발전 (11)
테르툴리아노의 ‘고해성사에 대하여’(De penitenza)를 통해서 서방의 고해성사 예식의 발전을 조금 살펴보았습니다. 이런 발전에서 이견들이 발견되기 시작했습니다. 테르툴리아노 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교회의 실천에 이견을 드러내는데, 무엇보다도 용서에 관한 당혹감을 표현하였습니다. 특히 죽음에 처해질 죄들에 대한 경우였습니다. 217년 로마에서는 갈리스도(Callisto) 주교와 히뽈리토(Ippolito) 간의 논쟁으로 분열이 생기게 됩니다. 히뽈리토는 엄격주의를 옹호하면서 로마 공동체의 공식적 회개의 실천을 너무 관대하다고 비판합니다. 251년 다시 로마에서 이 두 경향 간의 더욱 날카로운 충돌이 재현됩니다. 이 서로 다른 경향들을 대표하여 이번에는 사제 노바씨아노(Novaziano)와 주교 코르넬리오(Cornelio)간에 배교자(lapsi)들을 교회와의 일치에로 되받아 들이는 방법과 가능성에 대한 반대로 논쟁이 벌어집니다. 이 충돌로 노바씨아노의 엄격주의 교회가 건설되는데, 그들은 자신들을 의미적으로 ‘순결한 이들’(katharoi, ipuri)이라 불렀고, 원칙적으로 죄인들의 축출을 고집하였습니다. 분열은 한 세기를 지속하였습니다. 항상 ‘실천들’을 바로잡으려는 새로운 시도들이 있었으나, 결국에는 아무런 성과를 내지는 못하였습니다.
교회사 에세이 (58) 전례의 기원과 발전 (12)
오늘도 계속해서 서방 교회에서의 고해성사의 발전 과정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좀 긴 시간 고해성사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 같습니다. 다음호에서는 동방 교회의 발전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교회사 에세이 (59) 전례의 기원과 발전 (13)
오늘은 동방에서의 고해성사의 발전과정을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동방 교회에서도 고해성사는 직무와 연결지어졌고, 하느님의 용서가 교회적 용서의 행위로 연결되기에 이릅니다. 400년경까지 동방에서는 주교들에 의해 고해성사의 지도가 맡겨진 특별한 사제가 있었습니다. 동방의 특징이라면 고해성사가 서방처럼 제도적으로 고려되지 않고, 완덕을 향해 가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영적이고 내적인 여정의 순간으로 이해했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고해성사는 죄의 그물에 얽힌 이들을 풀어주기 위한 영적인 인도로 여겼습니다. 이런 고해성사 이해에 영향을 끼친 인물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와 오리게네스를 들 수 있습니다. 이들에 따르면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잘 준비됨을 전제로 주교는 죄인들의 용서에 관한 권한을 가졌고, 이들을 통해 고해성사는 삶을 새롭게 하고, 영혼을 씻고, 사람을 개선하는 교육과정으로써 하느님에게로 나아감을 자극하는 것이었습니다. 회개에로 이르는 길과 방법은 세례와 공동체 앞에서의 공적인 죄의 고백, 그리고 자선과 사랑, 순교에의 열성이었습니다.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고해성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모두가 죄인이란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동방은 주교들의 법적인 권한보다 영적 · 교육적 측면을 강조하였습니다. 0 2,991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