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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조선인 신자들의 은인 베드로 모레혼 신부를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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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3-07 ㅣ No.1554

[특별기고] 조선인 신자들의 은인 베드로 모레혼 신부를 아시나요? (1)

 

 

일본 교회사에 기록된 조선인 가톨릭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고 박해와 탄압 속에서도 영적 지도 신부로서 많은 도움을 베풀었던 베드로 모레혼 신부의 행적과 약력을 정리하여 연재합니다. 모레혼 신부는 일본뿐 아니라 마카오와 필리핀, 멕시코와 유럽, 태국과 캄보디아 등지를 오가며 선교 활동을 하였고, 틈틈이 일본의 순교 기록을 수집·정리하여 『일본 순교록』을 출간하기도 하였습니다. 연재 끝에 필자가 제시하게 될, 모레혼 신부와 연관된 조선인 신자들에 관해 우리가 찾고 풀어야 할 과제에 대해서도 관심 가져주시길 바랍니다. - 편집자 주

 

 

1600년 전후 일본의 서양 선교사

 

1549년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이후 1600년대 전반까지 일본에서 활동한 서양 선교사는 120명을 넘는다. 이들 선교사들은 대항해시대 죽음을 무릅쓰고 멀고 먼 험한 바다를 건너 일본에 왔다. 서양 선교사는 스페인어로 아버지를 의미하는 파드레(Padre)인데, 일본어로는 바테렌(バテレン)이라 하였고, 한자로는 반천연(伴天連)이라고 표기했다. 한자 의미를 음미해 보면, 하늘과 소통하는 동반자, 또는 하느님과 연락하는 반려자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참으로 절묘한 한자 표기가 아닐 수 없다.

 

일본 교회사 연구에서 흔히 그리스도교 및 신자를 지칭하는 포르투갈어 Christao를 기리시탄(キリシタン)이라고 발음하고, 이에 따라 관례적으로 한국어 번역물에서도 대부분 기리시탄이라는 용어를 그대로 관용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는 일본어 가나에서 ‘으’ 표기와 발음이 불가능해서 생긴 현상이기 때문에, 필자는 한국어로 발음할 수 있는 ‘그리스탄’으로 표기한다.

 

 

베드로 모레혼 신부와 조선인 신자

 

1600년대 초 일본교회 역사에는 임진왜란 이후 전쟁포로로 잡혀 와 가톨릭 신자가 된 조선인 신자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예를 들면,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3~1616)의 배교 명령에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킨, 엔도 슈사쿠(遠藤周作)의 단편소설1) 주인공 오타 줄리아(Ota Julia, ?~1612)는 1596년 우토(宇土, 현 구마모토[熊本])에서 모레혼(Pedro Morejon S.J., 1562~1639)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조선의 승려로 끌려와 교토(京都) 혼코쿠지(本圀寺)의 법화종 승려가 된 복자 카이요(Caio, 1572?~1624)는 1610년 시키(志岐, 현 구마모토)에서 모레혼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고, 1614년 금교령으로 마닐라로 추방된 후 일본에 재입국해서 선교 활동을 돕다가 순교하였다.

 

나가사키(長崎)와 마카오를 오가며 1612년부터 중국 대륙에 들어가 북경에서 7년간 체재하면서 중국과 조선 선교를 도모한 복자 빈센트 가운(1580?~1626) 또한, 1592년 시키에서 모레혼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교토에 설립된 여자 수도회 베아타스(Beatas)회2) 소속으로 조선 최초의 수녀가 된 박 마리아(?~1636)는, 1603년 말부터 교토지구의 장상으로 베아타스회를 지도한 모레혼 신부의 영적 지도를 받았다. 1614년 필리핀으로 추방된 후에도 모레혼 신부의 지도는 계속된다.

 

박해와 탄압으로 일본에 들어오지 못하고 마카오, 필리핀 및 동남아시아, 특히 캄보디아에서 선교 활동을 한 모레혼 신부가 1625년 캄보디아에서 활동할 시기, 엔도 슈사쿠 『침묵』의 주인공이 된 배교한 페레이라 신부의 회심을 위해 일본에 잠입해서 순교한 토마스(?~1643) 또한 모레혼 신부와 인연이 깊다. 모두 우리가 찾고 밝혀야 할 조선인 신자들의 기록이다.

 

 

모레혼 신부와 『일본 순교록』

 

이처럼 초기 일본교회 역사에서 조선인 신자에게 세례를 주고, 그들의 영적 지도 신부로서 일본은 물론 마카오와 필리핀, 멕시코와 유럽, 태국과 캄보디아 등지를 오가며 선교 활동을 한 베드로 모레혼 신부는 한국교회가 기억하고 존경해야 할 인물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한국의 성직자도 연구자도 일반 신자도 그의 행적과 약력에 관해 잘 모른다.

 

모레혼 신부의 일대기를 추적 정리하다 보면, 그가 활동한 시간과 공간에서 전술한 조선인 신자와의 점과 선이 연결되는 많은 접점을 찾아볼 수 있다. 모레혼 신부는 금교령으로 필리핀 추방 후 복자 다카야마 우콘(高山右近)의 마지막 임종을 지키고 장례 미사를 집전했고, 1623년 에도(江戸) 대순교의 복자 하라 몬도(原主水)에게도 세례를 주었다. 1636년에는 마카오에서 배교한 페레이라(Cristóvão Ferreira, 1580~1650) 신부의 예수회 제명 문서에 최종 서명한 것도 모레혼 신부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 모레혼 신부는 오랜 기간에 걸쳐 일본의 순교 기록을 수집하고 정리해서 『일본 순교록』이라는 일본교회 순교 역사에 관한 귀중한 기록을 남겼다. 우리는 그가 남긴 일본교회 순교 역사 기록을 통해 조선인 신자에 관한 사실(史實)을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후 유키 료고(結城良悟), 가타오카 야키치(片岡弥吉), 고노이 다카시(五野井隆史) 등 교회사를 연구하는 사제와 학자들에게 귀중한 사료를 제공했다. 『일본 순교록』 초판은 일본의 박해와 탄압을 알리는 소명으로 유럽으로 가던 모레혼 신부가 1616년 멕시코에 체재하면서 집필 · 출간했는데, 일본어판은 1974년에 번역 · 출간되었다. 그리스탄 문화 연구 시리즈 10, 사쿠마 타다시(佐久間正, 1910~1992) 번역이 그것이다. 사쿠마 선생은 스페인어학, 동서교류사학을 전공한 연구자로 나가사키대학 교수를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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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리아라고 부르는 여자(ユリアとよぶ女)」.

 

2) 베아타스 수도회(미야코의 비구니)는 나이토(内藤) 줄리아 등 6명의 회원으로 시작된 활동 수도회로, 특히 모레혼 신부의 지도로 3서원을 하고 삭발을 했으며, 검은 수도복을 입고 공동생활을 하였다.

 

[교회와 역사, 2022년 8월호, 글 이세훈 토마스 아퀴나스(한국교회사연구소 특임연구원)]

 

 

[특별기고] 조선인 신자들의 은인 베드로 모레혼 신부를 아시나요? (2)

 

 

사제 되기 전의 베드로 모레혼

 

모레혼은 1562년 스페인 메디나 델 캄포(Medina del Campo)에서 태어나, 1577년 15살에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1583년 유럽에 도착한 일본의 덴쇼(天正) 소년 사절단을 계기로 유럽에서 대대적으로 불타올랐던 일본에 매료되어, 신학생이었던 모레혼도 일본 선교를 지원했고, 소망대로 그는 일본으로 귀국하는 사절단과 함께 동양으로 파견되었다.

 

1586년 4월 소년 사절단이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을 출발해서 귀국길에 올랐을 때, 그 함선에는 31명이나 되는 예수회 대선교단이 동행해서 인도로 향했다. 함선의 승선자 명부에는 이루만(イルマン)1) 모레혼의 기록이 있는데, 여기에 ‘일본행’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그 후 그는 4년에 걸친 긴 여정을 통해 사절단이나 다른 동반 수도자들과 교류하면서, 일본어와 일본 문화에 대한 기초를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일행은 1587년 5월 무사히 인도 고아(Goa)에 도착했고, 모레혼은 고아에서 1년 정도 체재하면서 학업을 계속하고, 드디어 사제로 서품되었다.

 

 

사제가 된 모레혼 신부의 일본 입국과 시키(志岐)에서의 활동

 

 

사제가 된 모레혼은 1588년 재차 일본 순찰사로 임명된 알렉산드로 발리냐노(A. Valignano, 范禮安, 1538~1606) 신부와 함께 일본으로 향하는 여행을 계속한다. 하지만 일행이 마카오에 도착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의해 강행된 바테렌 추방령이라는 흉보를 접하게 된다. 그 결과 순찰사 발리냐노는 인도 부왕(副王)의 사절 자격으로 히데요시와의 알현이 허가되었고, 발리냐노를 필두로 그를 수행하는 사절 및 동반하는 선교사 일행은 1590년 7월 21일 나가사키(長崎)에 상륙하였다.

 

모레혼 신부는 이미 상당 수준의 일본어를 깨우친 듯하다. 1592년 11월의 예수회 명부에 의하면, 모레혼 신부는 아마쿠사 시키(天草志岐)의 장상(長上)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그는 그곳의 유일한 사제였으며, 그는 스페인 바르톨로메오 수도사, 성화 화가[絵画師]로 알려진 이탈리아 출신 조반니 니콜라오(G. Nicolao, 1560~1623) 수도사, 츠치모치(土持) · 오오타비(大多尾) · 만쇼 요한 등 일본인 수도사들과 함께 시키 지역에서 포교 활동을 수행하였다. 당시 모레혼에 관한 기술에는, “일본어를 잘 이해하고 일본말로 설교할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1593년 준관구장 베드로 고메스(Pedro Gómez, 1535~1600) 신부가 『천구론(天球論)』, 『영혼론』, 『가톨릭 교리 요강』이라는 3권으로 된 교과서를 저술하고, 그것을 교재로 아마쿠사 콜레지오(Colegio)에서 강의를 시작했을 때, 모레혼 신부는 교사로 임명되었다. 준관구장 고메스 자신이 집필한 1593년과 1594년 예수회 연보에는 이 강의 담당자가 모레혼이었다고 명기되어 있다(1594년 3월 15일, 나가사키 발신).

 

 

오랜 기간 활동한 교토와 오사카에서의 행적

 

한편 당시 교토와 오사카(大阪) 지구에서는 오르간티노(Gnecchi‐Soldo Organtino, 1533~1609) 신부가 활발하게 포교 활동을 하였다. 후시미성(伏見城)을 축조하기 위해 전국에서 많은 무사와 일꾼들이 교토와 오사카로 동원되었기 때문에, 교토의 선교사들은 대단히 바쁜 일상을 보냈다. 그런 와중에 1587년 폐쇄되었던 오사카 교회가 재설립되어, 1명의 신부와 1명의 수도사. 그리고 2명의 전도사[同宿]가 주재하게 된다.

 

처음에는 세스페데스(Gregorio de Céspedes, 1551~1611) 신부가 주임이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대신해서 모레혼 신부가 오사카로 부임하게 되었다. 수도사는 26 순교 성인의 한 사람인 바오로 미키(三木, 1564~1597), 다른 2명의 전도사는 야고보 기사이(喜斎)와 요한 소탄(고토[五島]의 요한)이었다. 그런데 1596년 10월 산 펠리페(San Felipe)호의 침몰 사건과 이로 인해 야기되는 그리스탄 탄압이 심해지면서 오사카 교회에 있던 3명의 일본인이 체포되었고, 이들은 1597년 2월 5일 나가사키 니시자카(長崎西坂)에서 다른 23명과 함께 처형되었다. 이들이 바로 26 순교 성인에 포함된 3명의 예수회 회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598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후, 교토와 오사카 지구의 포교가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1600년 세키가하라(関ケ原) 전쟁 이후, 오르간티노 신부도 모레혼 신부도 세 차례에 걸쳐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회견하고, 교토·오사카·나가사키 3곳의 교회를 정식으로 인정받았다. 이렇게 해서 모레혼은 계속해서 오사카 교회의 책임자로 활동했다. 1601년 모레혼 신부는 예수회 수도자로서 최종 서원(제4서원)을 마침으로써, 예수회 일본 관구의 중요한 인물 중 한 사람이 되었다. 1603년 10월의 예수회 명부에 의하면, 모레혼은 오사카의 장상으로, 또한 가미(上) 지구의 장상 고문으로, “일본어를 능숙하게 습득하고 있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모레혼 신부와 함께 안젤리스의 지롤라모(Girolamo de Angelis, 1568~1623)2) 신부와 분고(豊後)의 일본인 수도사 바르톨로메오가 함께 있었다.

 

1603년 말, 오랜 기간 교토와 오사카 지구를 지켜온 오르간티노 신부가 건강을 해쳐 나가사키로 전임되었을 때, 모레혼은 그의 후계자로 임명되어 교토의 교회로 옮겨, 그곳의 수도원 원장 및 혼슈(本州) 전역의 장상이 되었다. 그로부터 교토에 체재한 9년 동안, 그는 여러 지역을 오가며 일본 선교를 위해 힘썼다.

 

예를 들면, 1606년에는 루이스 세르케이라(Luis Cerqueira, 1552~1614)3) 주교가 교토를 방문하여 후시미성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알현했을 때, 통역을 수행한 후앙 로드리게스(João Tçuzu Rodrigues, 陸若漢, 1559~1633)4) 신부 이외에 모레혼 신부도 주교 일행과 함께 행동하였다. 이듬해인 1607년에는 예수회 준관구장 프란치스코 파시오(F. Pasio, 1552~1612) 신부가 순푸성(駿府城, 지금의 시즈오카[靜岡])에서 이에야스를, 그리고 에도(江戸)에서 도쿠가와 히데타다(德川秀忠, 1579~1632)5) 쇼군을 만나기 위해 간토(關東)에 갔을 때 모레혼은 교토에서부터 동행하였다.

 

1613년 2월의 예수회 명부에 모레혼 신부는 아직 교토의 장상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뒷날 배교자로서 유명해진 크리스토반 페레이라(Cristóvão Ferreira, 1580~1650) 신부가 감사(監事)로 일하면서 장상의 고문으로 있었다. 그러나 그해 12월 가브리엘 데 마토스(Gabriel de Matos, 1572~1634) 신부가 모레혼을 대신해서 장상이 되면서, 모레혼 신부는 오사카 교회로 다시 돌아왔는데, 곧이어 1614년 2월 25일 막부의 그리스탄 금교령과 선교사 추방령이 강행된 것이다.

 

금교령[禁制]의 조치에 따라 오사카와 교토 지구의 신부들이 나가사키로 이동하고, 모레혼도 함께 갔다. 이윽고 11월 초, 포르투갈인들을 중심으로 하는 대다수의 수도자와 전도사는 마카오로, 스페인인을 비롯하여 다카야마 우콘(高山右近), 나이토 조안(内藤如安)6) 등의 일행과 교토의 여자 수도회 수녀 15명은 마닐라로 추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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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제가 되기 전, 수사 신분의 예수회 회원.

 

2) 1596년 사제 서품을 받고 최초로 홋카이도(北海道)를 방문한 유럽인 사제로, 에도(江戶)에서 화형으로 순교하였다. 1867년 7월 7일 복자품에 올랐다.

 

3) 포르투갈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이자 일본 제5대 주교. 1593년 11월 티베리아스(Tiberias)의 명의 주교로 서품을 받고, 1598년 2월 18일 후나이(府内, 현 규슈 오이타시)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1604년에는 『일본어 개설서』를 펴냈다.

 

4) 일본과 중국에서 활동한 포르투갈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5)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3남으로, 에도 막부(幕府)의 제2대 쇼군(將軍)이었다.

 

6) 여안(如安)은 ‘요한’을 음차한 것으로, 요한을 포르투갈어로 읽으면 ‘조안(João)’이다.

 

[교회와 역사, 2022년 9월호, 글 이세훈 토마스 아퀴나스(한국교회사연구소 특임연구원)]

 

 

[특별기고] 조선인 신자들의 은인 베드로 모레혼 신부를 아시나요? (3)

 

 

금교령으로 인한 일본 추방 이후 모레혼 신부의 행적

 

일본을 떠나기 앞서서 나가사키에 모인 예수회 회원은 10월 14일부터 25일까지 관구 회의를 열었다. 관구 상황을 점검하여 이를 보고하고 필요한 조치를 요청하기 위해서였는데, 프로쿠라토르(Procurator)1)를 로마에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가브리엘 데 마토스(G. de Matos, 1572~1634) 신부를 선출하였다. 그리고 관구 회의 규정에 의거하여, 정식 대표가 어떤 이유로 그 임무를 수행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서 다른 한 사람의 보궐(Substitutus)을 뽑았다. 이 사람이 다름 아닌 모레혼 신부였다. 일본 관구의 긴급 상황을 고려하여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을 대표로 로마에 파견하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마토스 신부는 포르투갈 사람들과 함께 마카오로 건너가 그곳에서 인도와 포르투갈을 경유해서 로마로 향하였다. 모레혼 신부는 스페인 사람들과 함께 마닐라로 가서 그곳에서 멕시코, 스페인을 거쳐 로마에 가게 된 것이다.

 

마닐라로 향하는 함선은 1614년 11월 8일 나가사키를 출항하였다. 여기에는 예수회 사제와 수도사 23명, 다른 탁발 선교회의 스페인 선교사 17명, 전도사 15명이 타고 있었다. 다카야마 우콘과 나이토 조안과 그들의 가족 및 교토의 수도회 수녀 15명, 그 외 여러 사람이 승선하여 총 350명에 달했다. 신앙으로 인해 박해받은 그들은 마닐라에 도착해서 총독과 그곳 주민에게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건강이 악화된 다카야마 우콘은 1615년 2월 3일 밤 선종했다. 오랫동안 친구로서 또한 영적 지도자로서 모레혼 신부는 마지막까지 우콘의 임종을 지켰고, 마닐라 시민의 요청을 받아 우콘의 간략한 전기를 써서 기록으로 남겼다.

 

모레혼은 마닐라 체재 중에도 일본교회의 박해와 순교에 관한 정보를 입수하기에 열중했다. 예를 들면, 1615년 3월 아빌라 히론(B. de Ávila Girón, ?~1619)2)이 집필한 『일본왕국기(日本王國記)』를 마닐라로 출발하기 직전에 입수해서, 서둘러 여러 사람에게 분담하여 필사시켰을 뿐만 아니라, 항해 중에 이 사본에 400군데 이상에 달하는 주석을 행간이나 난외에 기입하였다. 현재 예수회 본부에 남아 있는 이 사본에는 오사카와 교토 지구에 관한 모레혼의 실제 경험에 입각한 정정 내지는 주석이 추가되어 있고, 교회사 연구자들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사료가 되었다.

 

 

필리핀, 멕시코, 유럽, 그리고 다시 아시아로

 

모레혼 신부는 1615년 6월 마닐라를 출발하여 1616년 1월 1일 멕시코 아카풀코(Acapulco)에 도착한다. 그해 한 해를 멕시코에서 보내면서, 그곳에서 일본의 박해에 관한 기록인 『일본 순교록』 초판을 발행하였다. 유럽 마드리드에 도착한 것은 이듬해인 1617년 1월 말로, 그는 그곳에서 다시 로마로 향한다. 때마침 인도를 경유해서 도항한 마토스 신부도 1617년 5월 로마에 도착하여 일본 관구 대표의 임무를 무사히 수행했다. 그것으로 마토스의 보궐로서 유럽에 파견된 모레혼의 임무도 끝나는 것이지만, 두 사람 모두 유럽에 체재하는 동안, 일본 포교의 실상을 알리고 새로운 물자와 원조를 구하기 위해서 활동했다. 그들이 로마에 갖고 간 1614년도 예수회 연보의 이탈리아어판은 마토스 신부의 이름으로 로마에서 출판되었지만, 같은 해 같은 인쇄소에서 모레혼의 이름으로 재판이 발간되었다.

 

로마에서의 소임을 마친 다음, 모레혼은 스페인으로 돌아와 스페인과 포르투갈 양국에서 일본의 예수회 관구를 위해 일했다. 그 사이 예수회 연보와 그 외 다른 소식이 유럽에 전해졌기 때문에, 그는 1615년부터 1619년에 걸쳐 「일본 및 지나(支那, 중국)」의 박해서 속편을 집필하여, 1621년에 리스본에서 『속(續) 일본 순교록』을 발간하였다. 하지만 모레혼의 마음은 언제나 일본에 있었고 그는 가능한 한 빨리, 그리고 만약 가능하다면 직접 일본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1621년 인도로 향해 출항했다가 실패하고 리스본으로 다시 돌아왔지만, 1년을 다시 기다려 드디어 1622년 3월 18일 다른 3명의 예수회 수도사와 함께 리스본을 떠나 고아로 갔다. 일본으로 가기 위함이다.

 

그런데 고아에 전해진 마카오 소식에 따라 박해로 인해 일본 도항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일단 시암(Siam, 현 태국)으로 가서 그곳에서 일본으로 잠입하는 것을 도모하기로 하였다. 왜냐하면 시암의 왕도인 아유타야(Ayutthaya)에는 상당 규모로 번성한 일본인 마을(日本人町)이 있었고, 일본의 허가받은 무역선(御朱印船)과, 시암이나 중국의 상선이 드나들면서 매년 일본으로 도항하는 배편이 많음을 알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당시 야마다 나가마사(山田長政)3) 휘하에 있는 그리스탄 무사들 중에는 모레혼이 직접 아는 사람도 상당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원조를 부탁하면 일본에 잠입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모레혼은 1624년 4월에서 5월 사이 고아를 출발해서, 당시 시암의 지배하에 있던 리고르(Ligor, 말레이반도 중앙)까지 진출하였다.

 

 

모레혼 신부의 시암(태국)과 캄보디아에서의 행적

 

그런데 마침 그해 스페인 및 포르투갈과 시암 사이의 교역이 단절되는 큰 사건이 발생했다. 1624년 마카오에서 마닐라로 항해 중인 스페인 선박이 태풍으로 시암 해안에 피난해 있을 때, 메남(Menam)강4) 하구에서 네덜란드 선박과 대치하게 되었는데, 스페인 선박이 네덜란드 선박을 나포해서 적재화물 대부분을 약탈한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시암 왕국은 곧바로 수척의 함선을 파견해서 스페인 선박을 공격하였다. 그 결과, 에르난데스 실바(Hernández Silva) 선장은 전사하고, 50만 두카토(ducato)5)가 넘는 적재화물이 몰수되었으며, 30명의 스페인 선원이 시암의 포로로 잡혔다. 그가 메남강 하구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러한 연유로 시암과 스페인의 관계가 악화하면서 모레혼은 시암으로 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모레혼은 시암과 라오스로의 행로를 단념하고, 캄보디아를 향하게 된다.

 

당시 캄보디아에도 일본인 마을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새로운 쇼군 이에미쓰(家光, 1604~1651)6)가 취임하고, 1623년 12월에 있었던 에도(江戸) 대순교와 그 후 계속해서 일본 각지에서 일어난 박해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캄보디아에서의 활동을 마무리하고 마닐라로 돌아온 모레혼은 10년 만에 나이토 조안과 교토에서 추방된 수녀들과 재회하였다.

 


마카오와 필리핀 및 동남아시아에서의 행적

 

이어서 모레혼은 마카오로 향해 1625년 9월 1일 마카오에 도착했다. 관구 대표로서 소임을 다 마치고 순찰사와도 면밀한 협의를 끝낸 다음, 그는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하였다. 먼저 그해 12월 모레혼은 안토니오 카르딤(Antonio Francisco Cardim, 1596~1659) 신부와 일본인 수도사 로만 니시(西)와 함께 시암으로 가기 위해 마카오를 출발했는데, 일단 마닐라로 향하였다. 그곳에서 준비를 마치고 모레혼 일행은 1626년 1월 말~2월 초 사이에 시암으로 출발했다. 3월 시암에 도착한 모레혼은 일본 지인들의 원조에 힘입어 시암 왕국의 환대를 받고 협상을 통해 나포된 스페인 선원 포로의 석방과 몰수된 화물의 반환에도 성공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목적은 시암과 라오스의 선교에 있었기 때문에, 시암 국왕의 허가를 받아 카르딤 신부와 로만 니시 수도사를 아유타야에 남겨두고, 모레혼은 그해 8월 마닐라로 돌아왔다.

 

 

마카오 콜레지오 원장 재직 시의 종교 용어 논쟁

 

마닐라에서 총독과 교섭을 마친 다음, 1626년 가을 모레혼은 다시 마카오로 돌아왔고, 이듬해 10월에는 마카오의 콜레지오 원장으로 임명되었다. 1631년 8월까지 이 직무를 수행했는데, 특기할 사항은 모레혼 신부가 마카오 콜레지오 원장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당시 큰 문제가 된 종교 용어 논쟁에 휩쓸린 것이다. 즉,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 1552~1601)가 신(神)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중국의 ‘상제(上帝)’ 또는 ‘천주(天主)’라는 용어를 채용하고, 또 그의 저서 『천주실의(天主實義)』에서 중국의 종교 용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선교사들 간에 극심한 논쟁이 벌어졌다. 그것이 나중에는 이른바 ‘의례 논쟁(儀禮論爭)’으로까지 확산된 것이다.

 

대체로 일본에서 온 선교사는 그리스도교 용어로서 어디까지나 포르투갈어나 라틴어를 원어대로 사용할 것을 주장한 반면에, 리치의 전통을 이어받은 롱고바르도(Nicolò Longobardo, 龍華民, 1559~1654) 신부 등은 중국어 용어로 사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양쪽 모두 여러 차례 자기 입장을 주장하는 각서를 작성해서 로마로 보냈는데, 결국 만족할 만한 해결 답을 얻지 못하였다. 순찰사 안드레 팔메이로(André Palmeiro, 安德烈 혹은 班安德, 1569~1635)는 양쪽의 각서를 모레혼 신부에게 전달하여 그에게도 의견을 구했다. 지금도 로마 포교성성(현재의 인류복음화성)에는 모레혼 신부의 의견서(Sententia)가 남아 있다. 하지만 논쟁은 쉽게 끝나지 않았고, 결국 이 문제는 이후 수 세기에 걸쳐 동아시아 가톨릭 선교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고, 때로는 권력자에 의한 가톨릭 박해와 탄압의 구실이 되었다.

 


모레혼 신부 말년의 일본과의 인연

 

1630년 4월 모레혼 신부는 마닐라에 파견되었는데, 마닐라 체재 중 시암에서 마닐라에 와서 일본으로 도항을 준비하고 있었던 베드로 기베(岐部, 1587~1639)7)와 만났다. 그의 모험적인 일본 잠입 계획에 감동한 모레혼 신부는 금전적 · 물질적으로 필요한 여러 원조와 배려를 베풀었을 뿐만 아니라, 일행의 출발에 대해서도 세심한 기록을 남겼다. 모레혼은 같은 해 11월 마카오로 돌아왔다. 1625년 유럽에서 마카오로 돌아왔던 모레혼 신부는, 다시금 일본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콜레지오 원장, 영적 지도 사제 등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일본의 순교자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으며 중요한 순교 기록을 집필해서 남겼다.

 

모레혼 신부에게 가장 슬픈 사실은 페레이라(Cristóvão Ferreira, 1580~1650) 신부의 배교에 관한 소식이었다. 모레혼 신부가 교토의 장상으로 있을 때, 페레이라는 약 1년간 그의 밑에서 일을 했다. 또한 페레이라는 관구장 비서로서 일본교회의 실상을 마카오로 알렸고, 매년 순교자에 관한 보고서를 현지에서 수집하기도 하였다. 그러한 페레이라가 1633년 아나즈리(穴吊)8) 고문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배교한 것은, 마카오의 예수회 회원들에게 대단한 충격이었다. 1636년 11월 페레이라의 배교를 확인한 다음, 순찰사 마누엘 디아스(Manuel Dias, 1574~1659)의 허가로 마카오 콜레지오에서 특별 회의가 열렸고, 페레이라는 정식으로 예수회에서 제명되었다. 노령의 모레혼 신부는 떨리는 손으로 그 제명 선언문에 최종 서명하였다. 마카오 콜레지오 원장직에서 물러난 것은 1631년이었지만, 모레혼 신부는 콜레지오의 영적 지도 사제로서 소임을 계속하다가 1639년 12월 11일 마카오에서 선종하였다.

 

 

맺음말을 대신하여 우리가 찾고 풀어야 할 과제

 

주지하는 바와 같이 천주교회사도 역사 연구인 이상 객관적 사실(史實)과 고증에 입각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조선의 천주교회사가 자생적인 교회 발전을 강조한 나머지 고립된 존재로 남는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큰 틀 속에서 그리고 유럽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유럽은 물론이고, 중국 · 필리핀 · 인도 · 멕시코 · 동남아시아 등지에 남아 있을 조선인 신자들의 사료 발굴이 절실하다

 

왜냐하면 대항해시대 동아시아 예수회의 본부 역할을 했던 마카오의 성 바오로 천주당이 1835년 화재로 소실되면서, 당시 신학교인 콜레지오와 수도원이 모두 불타 사라지고, 엄청난 유물과 사료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분명 조선인 신자와 조선 교회에 관한 적지 않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일본의 경우도 가톨릭에 대한 금교(禁教)와 박해를 기록한 에도 막부의 관변 자료가 비록 파사(破邪)적 입장을 견지하는 사료이지만, 1663년 3월에 발생한 칸분 나가사키(寛文長崎) 대화재로 나가사키 치안 감독청(長崎奉行所)을 포함한 나가사키 전체 도시의 80%가 소실되면서 대부분의 관변 사료마저도 잿더미로 사라졌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맺음말을 대신하여 몇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를 가설(假說)로 정리해 본다. 사료적 고증이 불충분하지만 앞으로 입증되어야 할 가설로서, 우리가 더욱 관심을 두고 찾고 풀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먼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총애를 받았으나 배교 명령을 거부하다가 유배된 오타(御たあ, 御는 일본어의 존칭) 줄리아는, 오늘날 유배되었던 섬에 무덤이 전해지고 추모제도 매년 열리고 있지만, 사실은 선교사들의 서간 등 기록에 의하면 유배된 오시마(大島), 코즈시마(神津島) 섬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이에야스가 1616년 죽은 후에 섬에서 풀려나와 말년에는 나가사키와 오사카로 돌아와 선교 활동을 돕다가 여생을 마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의미에서 줄리아가 언제 선종했는지 그 시기는 명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흥미로운 점은, 임진왜란 당시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 1553~1625)의 포로로 하기(萩, 현재의 야마구치현)에 끌려온 무라다 야스마사(村田安政, 조선 이름 김운낙)는 줄리아의 거듭된 간청으로 노예 신분에서 풀려나 모리 집안의 가신이 되었는데, 그는 그녀와 함께 포로로 끌려온 남동생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따라서 오타 줄리아의 성은 김씨(金氏)일 가능성이 크고, 줄리아는 동생의 보호 아래 기구하고 파란만장한 삶을 마쳤을 수 있다.

 

조선 무장의 자제로 알려진 빈센트 가운(1580?~1626)의 세례명 빈첸시오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1600)의 가신으로 임진왜란에 출정하여 가운을 보호하고 돌봐 준 사카이(堺)의 상인 출신 히비야 효우에몽(日比屋兵右衛門, 1554~?)의 세례명에서 비롯된 것이다. 12세에 포로로 잡혀 왔는데, 조선의 양반 자제라면 천자문은 물론 사서삼경을 습득하고, 서양 선교사들이 배우기 힘든 한자와 일본어에 능통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아마도 선교사들의 눈에는 신동으로 보였을 것이고, 그래서 선교사들은 그를 관심 있게 보고 키웠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의 이름 한자 표기는 加運, 加(嘉, 賀)兵衛 등 다양하다. 조선의 출신 지명이 가온(佳恩)이라는 주장도 있다. 다만 성은 권(權), 또는 강(姜)으로 추정된다.9) 그렇다면 조선시대 가문 중에서 가장 족보가 잘 정비된 안동 권씨를 비롯하여 강씨 가문의 임진왜란 전후 시기 족보를 찾아보면, 필시 12세 전후 사망한 것으로 기록된 소년 빈센트 가운의 신상을 확인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가운과 관련해서는 무엇보다도 그가 예수회의 방침에 따라 1612년부터 1618년까지 중국에 파견되어 서양 선교사를 도우면서 조선 선교를 도모했고, 일단 나가사키로 돌아왔다가 1619~1620년 사이에 다시 마카오에 파견되었다가 나가사키로 돌아왔다는 사실이다. 필자는 그가 중국에 체류하면서 조선 선교를 도모한 1610년대에 중국에 온 조선의 사신들과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홍길동전』을 쓴 허균(許筠, 1569~1618)이 그러하다. 조선 최초의 천주교 신자로 지목받는(유몽인, 안정복, 박지원 등의 증언) 허균은, 1614년 춘추사로, 1616년 동지사로 중국 북경을 다녀갔다. 애석하게도 가운의 중국 파견과 현지 활동 등에 관해 남아 있는 기록은 확인할 수 없지만, 허균과의 접점은 충분한 개연성이 있다. 또 논란은 있지만, 그가 조선으로 갖고 들어온 기도문과 방대한 서적과 서양 문물은 가운을 통해 예수회 신부가 관여했을 가능성이 있다. 마테오 리치 신부가 1610년 선종한 후, 그의 뒤를 이어 북경에서 활동한 스페인 출신의 판토하(Diego de Pantoja, 龐迪我, 1571~1618) 신부, 이탈리아 출신의 우르시스(Sabbatino de Ursis, 熊三抜, 1575~1620) 신부가 그러하다. 앞으로 사료 발굴과 연구를 통해 입증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마지막으로 일본에 온 서양 선교사의 도주쿠(同宿, 전도사)로 활동한 토마스는, 400년 전 조선인 최초의 캄보디아 선교사로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임진왜란 후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를 따라 조선에 귀국할 수 있었음에도, 필시 1614년 선교사들과 함께 마카오나 필리핀으로 추방되어, 이후 선교사들과 동행하여 동남아시아 특히 캄보디아에서 예수회 신부 안토니오 루비노(Antonio Rubino, 1578~1643) 신부, 일본인 사제 유스트 가자리야(飾屋, 1567~1629)와 니시 로망(西, 1569~1640) 등과 함께 활동했을 가능성이 크다. 1620년대 마카오, 마닐라 이외에도 동남아시아 각지의 주요 도시(아유타야, 바타비아, 라오스와 캄보디아, 아라칸 등지)에는 1천 명에서 수백 명 단위의 일본인 마을(日本町)이 존재하였고, 예수회 선교사들이 활동했다. 특히 캄보디아는 예수회에 의한 일본 재선교의 거점이었는데, 전술한 바와 같이 1625년에 모레혼 신부도 직접 캄보디아 일본인 마을에서 사목 활동을 하면서 일본 재입국을 도모했지만 성사되지 못하였다. 토마스가 현지에서 모레혼 신부를 보좌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토마스는 배교한 예수회 페레이라 신부의 회심을 위해 루비노 신부를 단장으로 한 동료 7명과 함께, 마닐라를 거쳐 중국인으로 변장하고 일본 가고시마(鹿兒島)에 상륙했다. 하지만 곧바로 체포되어 1643년 아나즈리형(穴吊刑)으로 순교하였다. 일본교회와 협력해서 아시아와 유럽에 남아 있을 수 있는 토마스에 관한 사료 발굴과 고증을 통해 시복 운동을 전개하면 좋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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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관구 대표로, 초기 선교 시기에는 회계 책임자가 겸임하였다.

 

2) 나가사키의 스페인 무역상.

 

3) 일본인 용병대를 이끌고 시암과 동남아시아의 일본인 마을에서 활약한 두령.

 

4) 타이의 중부를 흐르는 ‘메남 짜오프라야(Menam Chao Phraya)강’을 말한다.

 

5) 유럽에서 사용된, 무게 약 3.5g에 순도 98%의 금화.

 

6)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의 제3대 쇼군.

 

7) 사제가 되기 위해 인도 고아에서 걸어서 예루살렘을 거쳐 로마로 가서 1620년 사제 서품을 받은 일본인 방인 신부.

 

8) 일명 ‘구멍 매달기’ 고문으로,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과 이를 영화화한 마틴 스콜세지의 「사일런스(Silence)」에 나온다. 양쪽 귓바퀴에 구멍을 뚫어 피가 한 방울씩 흐르게 한 다음 거적으로 몸을 꽁꽁 묶어 오물이 들어 있는 구덩이에 거꾸로 매달았다.

 

9) 『한국가톨릭대사전』 제2권, 933~934쪽에는 「권 빈첸시오 가베에」라는 항목으로 실려 있다.

 

[참고 문헌]

 

• 베드로 모레혼, 사쿠마 타다시(佐久間正) 역,『일본 순교록』, 그리스탄문화연구소, 1974.

• 레온 파제스, 요시다 코고로(吉田小五郞) 역,『日本切支丹宗門史』상·중·하, 이와나미(岩波)서점, 1940.

• 다마키 유즈루(玉木譲)『아마쿠사 가와치우라 , (天草河内浦) 그리스탄史』, 신인물왕래사, 2013.

• 가타오카 야키치(片岡弥吉)『일본 그리스탄 순교사』, , 도모(智)서방, 2010.

• 유우키 료고(結城了悟)『하비에르로부터 시작된 일본교회의 역사』, , 여자 바오로회, 2008.

• 에비사와 아리미치(海老沢有道)『일본 그리스탄사』, , 하나와(塙)서방, 1966.

• 고노이 타카시(五野井隆史)『일본 그리스도교 역사』, , 요시카와고분칸(吉川弘文館), 1990.

• 루이즈 메디나(Ruiz de Medina)『머나먼 고려 , (遥かなる高麗)』곤도출판사, 1986.

• 기타노 노리오(北野典夫)『아마쿠사 그리스탄史』, , 요시(葦)서방, 1987.

• 나가모리 미츠노부(長森美信) 논문,『천리대학 학보』제71권 2호, 2020년 2월.

• 필자의 네이버 카페“일본문화 천주교회 나가사키 조선인” : (https://café.naver.com/nagasakidiary).

 

[교회와 역사, 2022년 10월호, 글 이세훈 토마스 아퀴나스(한국교회사연구소 특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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