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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사목] 북한생활 체험기: 박정일 주교(마산교구 원로사목자, 전 마산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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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7-13 ㅣ No.939

[북한생활 체험기 1] 당신 손에 제 운명이 달렸으니 제 원수들과 박해자들의 손에서 저를 구원하소서(시편 31,16)

 

 

1944년 12월 평양 숭인상업학교 5학년 졸업할 때.

 

 

1945년 8월 15일 성모 몽소 승천 대축일(현재는 성모 승천 대축일) 우리 5명(당시 덕원신학교 신학생이었던 석원석 마르코와 이경호 안셀모,* 유치원 교사였던 임 가타리나, 그리고 나 - 그때 나는 초등학교 교사이며 신학교 지망생이었다. - 와 동갑내기 사촌 누이동생 - 현재 한국순교복자수녀회 박 요셉 수녀)은 이른 새벽에 숙천읍을 떠나 영유본당을 향하였다. 당시 숙천본당에는 본당신부님이 안 계셨다.

 

1940년 12월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후, 1941년에 당시 숙천본당 주임이었던 메리놀회 신부님이 미국으로 강제추방당하고 본당신부가 계시지 않게 되자 숙천본당은 폐지되었으므로, 숙천읍에서 약 30리 거리 되는 영유본당에 속하게 되었다. 당시 영유본당 주임은 홍도근 세례자 요한 신부님이셨다.** 홍 신부님은 나와 백민관 테오도로 신부(평양 숭인상업학교에서 동기동창이었으며, 현재 서울대교구 원로사목자)가 사제성소를 받는 데 큰 도움을 주신 분이시다.

 

 

일본의 패망과 소련군의 진주

 

한여름 더위에 공심재(당시에는 성체를 영하기 위해 밤중부터 물도 마시지 않았다.)를 지키며 땀을 흘리면서 30리 길을 걷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두 신학생, 특히 그중 한 분인 석 마르코 신학생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으며 피곤을 잊고 걸었던 기억이 새롭다.

 

미사 후 12시에 우리는 본당신부님의 권유로 신부님 방에 모여 라디오로 일본 천황이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일본이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한다.”는 성명 발표를 들었다. 자리에 모였던 우리는 모두 전쟁이 끝나고 한국이 일제에서 해방되었다는 소식에 손뼉을 치며 기뻐하였던 기억이 생생하다. 숙천읍에서 20리나 떨어져 있는 벽촌에 살면서 라디오도 듣지 못하고 있던 나에게는 그야말로 꿈같은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그 기쁜 소식을 안고 우리는 또 30리 길을 걸어 고향으로 향하였다. 중도에 철도 연변을 지나면서 일본군 패잔병들이 가득 탄 기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일본이 패망하고 한국이 해방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하였다.

 

집에 도달한 것은 이른 저녁이었다. 그런데 동리 입구에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할아버지께서 동리 사람들을 모아놓고 태극기를 설명하고 계셨던 것이다. 할아버지께서는 3·1운동 당시 고향 사람들을 이끌고 만세운동에 참가하여 수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신 경력이 있으시다. 출옥 후에도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태극기를 장롱 깊이 고이 간직하고 계셨다. 할아버지의 깊은 애국심을 새삼 느끼게 하는 장면이었다. 그런 할아버지가 존경스러웠다. 나는 초등학교 입학 전 1년 동안 서당 훈장이셨던 할아버지로부터 천자문을 배우기도 했다.

 

종전이 되자 38선이 생기고 북한에 소련군이 진주하였다. 소련군이 처음에 진주하고 김일성을 앞세워 공산정권을 수립하였을 당초에, 그들이 표방한 슬로건은 자유 민주주의와 자유였다. 종교는 물론이고 모든 인민의 자유를 존중하는 정책을 선전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공산주의가 신앙에 대하여 이렇게 관대한 것인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할 정도였다. 그 당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는 데 아무런 불편이나 제재를 느끼지 못했었다.

 

 

“목자인 사제가 떠나서야 되겠는가!”

 

그러나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면서 차차 공산주의의 본색 마각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지주들의 토지를 무상 몰수하는 토지개혁을 비롯하여 부자들을 숙청(북한에서 반대자를 제거한다는 뜻으로 쓰이는 말)하는 등 점차로 공산혁명을 본격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공산당을 조직하여 그 사상 선전에 열을 올리고 특히 청년들에게 공산주의 사상교육을 강화함으로써 공산체제가 확립되기에 이르렀다.

 

북한 공산정권이 본격적인 종교 탄압을 시작한 것은 1949년부터였다고 생각된다. 1949년 5월 북한의 유일한 신학교였던 덕원신학교(독일에서 진출한 성 베네딕도 수도회가 운영. 나는 1948년 9월에 별과에 입학하였다.)를 강제로 폐쇄하고 신학생들을 모두 귀가시켰으며, 독일 선교사 신부님들과 수녀님들을 투옥시켰다. 그뿐 아니라 마침내 평양교구장 홍용호 프란치스코 주교님을 납치한 것도 같은 시기였다. 다음 해에 평양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를 폐쇄하고 수녀님들을 모두 귀가시켰으며, 주일 집회도 금하였다. 주교님을 납치하고 나서 그 후 도시부터 차례로 몇몇 신부님을 납치하였고 6·25 직전에는 평양교구 모든 신부님들을 한 분도 남김없이 납치하였다.***

 

38선이 생긴 후 많은 북한 신자들이 종교자유를 찾아 남한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신부님들 중에는 한 분도 월남한 분이 안 계셨다. 왜냐하면 홍용호 주교님의 뜻이 “신자들이 몇 사람이라도 남아있는데 목자인 사제가 떠나서야 되겠는가!”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참으로 훌륭한 평양교구 선배 신부님들의 모범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 석원석 마르코와 이경호 안셀모 두 신학생은 사제가 되어 본당 주임신부로 계시다가 6.25 직전에 피랍되었다.

** 홍도근 신부님을 비롯한 다른 모든 평양교구 신부님들도 6.25 직전에 피랍되었으며, 지금 우리는 이 모든 신부님들이 ‘근현대 신앙의 증인’(일제와 6·25사변 때의 순교자들을 이르는 말)으로서 시복되실 날을 기다리고 있다.

*** 이른 시일 안에 시복의 영광이 주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이다.

 

덕원수도원과 신학교(앞쪽), 필자는 1948년 9월에 덕원신학교 별과에 입학하였다.

 

 

재미있는 일화 하나

 

1945년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하였을 때의 일이다. 어떤 소련 병사들이 손목시계를 5개 또는 그 이상 팔목에 끼고 다니며 자랑스러워하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목격하였다. 그 시대만 해도 손목시계가 귀할 때였으니 소련의 미개한 농촌 병사들에게 있었음직한 일이었으리라!

 

 

덕원신학교와 베네딕도 수도원 폐쇄

 

나는 1948년 9월에 덕원신학교 별과에 입학하였다. 신학교의 정상적인 과정으로는 소신학교 5년을 졸업한 후, 라틴과 2년을 마치고 철학 2년과 신학 4년을 마치고 사제가 된다. 그런데 나는 소신학교를 다니지 않고 일반 중학교를 졸업했기 때문에 라틴어를 배우지 못하였다. 그래서 별과생으로 입학하여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당시 북한에서는 9월이 새 학년 시작이었다. 새 학년 시작 피정을 당시 평양교구장 홍용호 프란치스코 주교님께서 맡아주셨는데 30분 강론을 1분도 틀리지 않게 정확하게 시작하고 마치시는데 놀랐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겨울방학을 지내고 봄학기를 한 달 반쯤 지난 어떤 날 우리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공산정권에 의한 신학교 폐쇄! 1949년 5월 7일 아침 나는 평상시와 같이 기상종과 함께 세면실로 내려갔다. 당시에는 신학생들이 공동침실과 공동세면실을 사용하였다. 그런데 그날따라 부제와 상급생들이 세면실에 보이지 않아서 분위기가 이상한 것을 감지하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밤중에 경찰들이(보위부원들이) 베네딕도 수도원(우리 신학교와 약 500미터 거리에 있었다.)에 난입하여 독일인 신상원(사우어) 보니파시오 아빠스님를 비롯하여 수도원장, 부원장, 신학교 교수 및 독일인 수사들을 몽땅 납치하여 갔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 신학교도 경찰들에 의해 포위되어 있었다.

 

부제와 상급생들은 밤중에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세면실 내의 분위가 이상하였던 것이다. 참으로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다. 창밖을 내다보니 경찰들이 두세 명씩 신학교 주변을 지키며 배회하고 있지 않는가! 공포감이 엄습하여 왔다. 그리고 ‘올 것이 왔구나.’ 하는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다. 소련의 공산혁명이 일어났을 때 종교가 무서운 탄압을 받았다는 것쯤은 역사 시간에 배워서 알고 있었으니….

 

그 일이 있은 후 5일 동안 교내생활은 미사와 수업만 없었을 뿐, 기도와 식사 등 이전과 같이 이루어졌다. 우리는 침실에 감금되어 운동장에도 나가지 못하고 화장실에 가는 것만 허용되었다. 상급생들은 어린 학생들이 밤에 혼자서 화장실에 가기가 무서우면 친구를 깨워 함께 가라고 친절하게 타일러주기도 하였다.

 

그동안 부제님들과 상급생들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보려고 백방으로 연락을 시도하는 수고를 하였지만 별 성과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교내에 있는 성물(성작, 성광 등)을 주방 근무 자매들을 통하여(그들은 자가에서 출퇴근 하였다.) 몰래 밖으로 내보내는 수고를 하였다(당시 차부제였던 윤공희 대주교님의 증언). 하급생인 우리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다만 상급생들의 지시를 따를 뿐이었다.

 

5월 13일 금요일 갑자기 “학교가 폐쇄되었으니 모두 귀가하라.”는 명이 내렸다. 그리고 짐은 싸되 성물(묵주, 성상, 성경 등)을 가지고 가면 안 된다고 하였다. 우리는 지시대로 짐을 싸고 캄캄한 밤에 수도원 성당 앞마당에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를 바치고 뿔뿔이 헤어져 동네 교우들 집에서 자는 둥 마는 둥하고 14일 토요일 아침 9시에 덕원 역에서 평양행 기차를 탔다. 불과 반년 전에 희망을 안고 기쁜 마음으로 덕원을 향했던 그때와는 사뭇 다른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불안하고 무거운 마음의 지루한 여행길이었다. 저녁때쯤 평양에 도착하였다.

 

 

홍용호 주교의 납치와 월남

 

그런데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또 하나의 청천벽력 같은 불길한 소식이었다. 홍용호 주교님께서 쥐도 새도 모르게 납치되었다는 것이다. 홍 주교님께서는 5월 8일 덕원신학교와 수도원의 폐쇄사건 및 사우어 아빠스님의 납치사건을 접하시고 북한 내무부 장관에게 항의서한을 보내고 면담을 요청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 상황으로 미루어 홍 주교님의 납치는 이미 계획되어 있던 것이 아닌가 짐작해 본다.

 

홍 주교님께서는 5월 14일, 그러니까 덕원신학교와 수도원 사건이 일어난 지 꼭 1주일 후, 수행원 없이 서포(평양에서 약 20리 되는 곳)에 있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원’에 종신서원자들 면담을 하러 가셨다. 그런데 일을 마치고 귀가하시는 도중에 납치되신 것이다. 교구에서는 주교님의 신변을 염려하여 두 소년(김운삼, 송운철)과 개 한 마리를 보내 주교님을 대동케 하였다. 그런데 귀가 도중에 주교님뿐 아니라 두 소년도 함께 납치된 것이다. 그 납치 상황은 어떤 채소장사가 증언한 것이다.

 

평양에 도착한 우리 신학생들은 그날 밤을 서평양 기림리에 있는 주교관에서 지냈다. 주교님께서 납치되신 후 부주교(오늘의 총대리)였던 김필현 루도비코 신부님께서 교구 책임을 맡고 계셨다. 비통한 마음으로 우리를 맞으신 신부님께서는 여러 가지 지시의 말씀을 해주셨다. 그런 가운데서도 “이제 신학교가 폐쇄되고 학업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으니 가능하면 월남하여 공부를 계속하도록 하라.”는 말씀이 나의 심금을 울렸다.

 

나는 다음 날 평양에서 50킬로미터 떨어진 북쪽 촌 고향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온 나의 심정은 참으로 암담했다. 신학교 폐쇄 등 깊은 사정을 아실 리 없는 부모님과 형제들은 아무 말씀 없이 나를 맞아주었다. 내가 살던 동리가 기차역에서도 8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벽촌이라 밖의 소식, 특히 귀가한 동료들의 소식, 동료들의 월남 소식 등을 알 길이 없어 안타까운 마음으로 집안일을 도우며 무료하게 두세 달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사제의 꿈은 잠시도 놓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신학교 폐쇄 후 제일 처음으로 월남을 시도한 것이 지학순 다니엘(당시 상급반 신학생, 초대 원주교구장 주교)이었다. 그는 귀가 후 즉시 5월 말경과 9월에 두 차례 월남을 시도하였으나 두 번 다 실패하였다. 당시는 38선에서 월남하다 붙들리는 사람을 4~5일이나 1주일간 구류하였다가 석방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 후 1950년 1월에 지 다니엘 신학생은 윤공희 당시 차부제와 함께 좋은 안내자를 만나 월남에 성공하였다.

 

나는 집에서 부모님과 월남에 대하여 의논하거나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부모님의 완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신학교에 입학하였기 때문에 월남하여 다시 신학교에 가겠다는 말은 입 밖에도 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위로를 받고 나의 의논 상대가 되어 준 것은 사촌누이 동생 데레사(현재 한국순교복자수녀회 박 요셉 수녀)뿐이었다.

 

답답한 나날을 보내면서, 여러모로 수소문한 끝에, 다행히 평양 사는 어떤 분한테서 안전하게 월남을 주선한다는 교우 한 분을 소개받게 되었다. 답답하던 차에 기쁜 마음으로 그분을 찾아가 좋은 소개를 받고 그날 밤을 그분 댁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이게 또 무슨 벼락인가! 하필이면 그날 밤에 보안서원이 불심검문을 나온 것이다. 북한에서는 여관이나 호텔뿐 아니라 다른 가정집에서 숙박을 하더라도 숙박계를 내야 한다. 자고 있는 나를 깨우며 누구냐고 묻는 것이다.

 

다행히 집 주인이 기지를 발휘하여 “먼 데 사는 나의 조카 되는 사람인데 밤늦게 집에 와서 미처 신고를 못했다.”며 백배사죄하여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참으로 아차 하는 순간이었다. 안도하는 마음으로 밤을 지새우고 다음 날 아침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나는 듯이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월남 계획을 짜기 시작하였다. [평신도, 2016년 여름(계간 52호), 박정일 주교(마산교구 원로사목자, 전 마산교구장)]

 

 

[북한생활 체험기 2] 당신 손에 제 운명이 달렸으니 제 원수들과 박해자들의 손에서 저를 구원하소서(시편 31,16)

 

 

1954년 10월 로마 유학 시절의 박정일 주교.

 

 

나의 월남을 도와줄 안내자를 소개받고 부푼 가슴을 안은 채 집으로 돌아온 나는, 월남을 언제, 어떻게 결행할 것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계획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특별히 좋은 계획이나 방법이 생각나지는 않았다. 부모님과 의논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신학교에 들어가는 것을 강경하게 반대하셨던 부모님께 월남하여 다시 신학교에 가겠다는 말은 감히 입 밖에도 낼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평양에서 백 리나 멀리 떨어져 있는 벽촌에 있던 나에게는 상급생 부제님이나 다른 신학생들과 연락을 하거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전연 없는 상태였으니 참으로 고립무원의 신세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니 항상 나의 성소 문제에 대하여 같이 이야기하며 힘이 되어준 만만한 누이동생만이 나의 의논상대가 될 수밖에 없었다.

 

둘이서 치밀하게 짠 계획은 이러하였다. 해주까지 가는 차표는 여자인 누이동생이 사기로 하였다. 왜냐하면 청년 남자인 내가 해주 가는 기차표를 사는 것은 월남의 의심을 받을 위험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누이동생의 사진을 한 장 가지고 가기로 하였다. 혹시 도중에 불심검문을 받게 되면 해주에 이 약혼녀를 만나러 간다는 등 둘러대기 위해서였다.

 

 

월남 시도와 실패, 투옥

 

드디어 결행의 날이 다가왔다. 1950년 2월 26일으로 기억한다. 부모님에게는 어디 좀 다녀온다는 말씀만 드리고 집을 떠났다. 기차역에서는 누이동생만이 나를 배웅하였다. 서평양역이었다. 그때 떠나는 나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던 동생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그러나 눈물을 흘린 것 같지는 않다.

 

해주까지의 주행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다만 여러 가지 상념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인가 빨리 해주에 도착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해주까지의 여행은 순조로웠다. 불심검문도 없었고, 제일 걱정되었던 해주역 출구도 무사히 통과하였다. 역을 빠져나오는 순간, 반은 월남을 성공한 기분이었다. 곧바로 소개받은 교우 집을 찾아갔다. 그날 저녁에는 나를 월남시켜 줄 안내자를 만나지는 않았다. 단지 다음날 해질녘에(몰래 38선을 넘는 것이니 당연히 저녁 시간을 택한 것이다.) 어디서 만나기로 했다는 말만 듣고 잠자리에 들었다. 신심이 피곤했던 탓인지 숙면하였다.

 

숭인상업학교 교사: 박정일 주교가 1941년에 입학하여 1944년 12월에 졸업하였다.

 

 

다음날 약속시간이 되어 안내자를 만나 38선을 향해 해주시 주변까지 말없이 걸었다. 나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드디어 남한에 간다, 신학교에 간다…….’ 미지의 세계를 향해 가고 있는 기분이었다. 약 30분쯤이나 걸었을까, 안내자가 “여기에 볼일이 있으니 잠깐 들렀다 가자.” 하며 어떤 큰 집 앞으로 다가가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 이 시간에 무슨……. 빨리 갑시다.” 하며 독촉하였으나 그는 이미 어떤 집 앞으로 다가가 문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가.

 

그런데 내가 영문을 모르고 한걸음 문간에 발을 내딛는 순간, 문이 닫히고 5~6명의 젊은 보위부원(북한 경찰관)들이 내 주위에 모여드는 것이었다. 안내자가 나를 남한이 아닌 경찰서로 안내한 것이었다. 눈앞이 캄캄하고 이럴 수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가며 한없이 깊은 구렁텅이에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그 당시 38선 주변에는 월남자들을 등쳐먹는 사기꾼 안내자가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긴 했지만 나에게 그 일이 닥칠 줄이야…….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경찰들은 나를 무릎을 꿇게 하고 “나쁜 자식!’, ‘남한의 스파이 녀석! 무슨 비밀을 가지고 남한에 가려고 하느냐?” 등 갖은 욕설을 다 퍼부으며 발로 차고 구타하기 시작하였다. 시랑이들 무리에 둘러싸인 순진하고 무력한 양의 모습인 나 자신이 연상되었다. 그들은 한참 동안 그러다가 “자 이제 그만하고 내일 보자.” 하며 나를 좁은 유치장 감방에 넣었다. 나는 “이제 그만하고 내일 보자!” 하는 그들의 말이 얼마나 반가웠던지 모른다. 이제 잡혔으니 신문을 받게 될 때에 무엇을 어떻게 답해야 할까 곰곰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보위부원들은 나를 구타하고 욕을 퍼부었지만 나의 신분과 월남의 동기 및 경위 등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오늘 밤은 자지 않고 밤새 내일 있을 신문에 대비하여 준비를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자리에 누웠다. 그런데 갑자기 “야, 일어나!” 하는 고함소리에 놀라 눈을 뜨니 이미 훤히 밝은 아침이었다.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밤새 아무 생각도 못하고 자버렸으니…….

 

 

구타와 신문, 그리고 석방

 

그들은 나를 해주 시내에 있는 ‘38 정치보위부’ 감방에 감금하였다. 당시 월남하다 잡힌 사람들만을 취급하는 유치장이었다. 우선 무서운 곳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수감자들은 교도관들이 다니는 복도를 등지고 벽을 향하여 계속 침묵 속에 앉아있어야 했다. 그리고 가끔씩 불려나가 신문과 취조를 받았다.

 

감방에서 주는 음식은 그야말로 음식이라고 할 수 없는 정도의 것이어서 처음에는 먹을 수가 없었다. 찬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쌀알이 두 세알밖에 보이지 않는 뜨물 같은 불결한 것이었다.

 

처음에 내가 감방에 들어가니까 옆에 앉았던 사람이 무어라고 귓속말을 거는 것이었다.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점심때에 밥이 먹기 싫거든 나를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러라고 했는데 점심때가 되어 내가 밥을 먹지 않고 그냥 놓았더니 훔치듯이 가져다가 후루룩 먹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2~3일이 지나고 나니 그 밥이 그리 맛있을 수가 없었다. 일주일이 지나니 얼굴은 창백해지고 체중도 많이 줄었다.

 

그러던 며칠 후 나는 불려나가 첫 신문을 받게 되었다. 출생에서부터 해주에 와서 감방에 들어오기까지를 소상히 묻는 것이었다. 나는 묻는데 대하여 사실대로 솔직히 다 이야기하였다. “평남 평원군 동송면 청룡리에서 태어났고, 무슨 학교, 무슨 학교를 다녔고,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사제가 되기 위하여 1948년 9월에 덕원 가톨릭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런데 1949년 5월에 덕원 신학교가 폐쇄되었기 때문에 북한에서는 사제가 될 수 없어서 사제가 되기 위해 남한으로 가는 길이었다…….”

 

현재의 박정일 주교.

 

 

거기까지는 내가 진술하는 대로 잘 받아 적었다. 그런데 문제는 해주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어디서 잤느냐 하는 것이었다. 나는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밖에서 잤다.”고 강변하였다. 숙박한 교우 집을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이 추운 겨울에 밖에서 잔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하면서(3월 초에 해주는 상당히 춥다.) 얼굴을 발로 차며 솔직히 고백하라고 다그친다. 신문관은 의자에 앉고 나는 바닥에 꿇어앉아 있었다. 그러나 어떤 교우 집에서 잤다는 사실을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이야기하라는 강요를 받으며 “밖에서 잤다.”고 한참동안 실랑이를 하고 나서야, 그는 할 수 없다는 듯이 내가 이야기한 대로 적고 “사실대로 이야기 안 하면 너는 여기서 죽는다!”고 협박하면서 나를 감방으로 돌려보냈다.

 

그런데 4~5일 후에 다른 신문관이 다시 신문을 하는데 전번의 기록을 읽어가며 재확인을 한다. 그러면 그때마다 “밖에서 잤다.”는 대목에서 이야기가 진전이 안 되는데, 나는 그때마다 첫 번대로 고집하였다. 그러면 또 한바탕 쥐어박히고 얻어맞아야 했다. 같은 신문을 세 번 받았다고 기억된다. 마음이 약해졌다. ‘저놈들이 다 알고 있는데 공연히 내가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차라리 사실대로 이야기해 버릴까 하고 마음이 약해지기도 했었다.

 

그런데 4월 말경에 다시 네 번째로 불려나갔다. 그러나 한 번 더 버티자 하는 심정으로 온 힘을 다해 같은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며칠 후에 “박정일!” 하고 부르더니 “집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 고향까지의 버스비도 받았다.

 

5월 3일이었다고 기억한다. 화창한 날씨에 하늘도 맑았다. 2개월 며칠만의 출감이었다. 눈이 부시다. 사람들은 얇은 옷을 입고 다니는데 나는 2월 말에 입었던 옷 그대로, 두꺼운 오버 코트에 털모자……. 그러나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힐긋힐긋 보긴 하지만 별로 이상하게 여기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시대의 해주 사람들은 나와 같은 모습의 사람을 보면 으레 “감방에 갔던 사람이군!” 하고 치부하였던 것이다.

 

 

감방 친구에게 대세를 주다

 

나는 그 길로 해주에 산다는, 나보다 먼저 출감한, 감방 안에서 알게 된 ‘한 대단한 친구’(그런 인상을 받았던…….)를 찾아갔다. 자기의 집이 해주이니 다음에 출감하면 한번 들리라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터라 어렵게 그 친구(!)의 집을 찾아서 그를 만났다. 그런데 뜻밖에, 그는 내가 상상했던 모습이 아니었다. 허름한 집에 혼자 있는데 건강이 매우 안 좋아 죽음이 멀지 않은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몇 마디 위로의 말을 건네고 나서 대세를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느님을 믿겠느냐고 물었더니 순순히 믿겠다고 답을 하였다. 기쁜 마음으로 간단히 4대 교리(세례를 받기 위해 적어도 알아야 하는 4가지 주요 교리, 즉, 천주존재, 삼위일체, 강생구속, 상선벌악)를 설명하고 세례를 주었다.

 

나는 그 길로 버스를 타고 고향 길을 재촉하였다. 해주에서 고향까지는, 옛날의 버스길로는 매우 먼 길이다.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 숙식을 어디서 했는지는 지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중간에 사리원을 지나면서 그곳 본당을 방문한 기억은 뚜렷하다. 당시 본당신부님이 전 안드레아 신부님이셨다는 것을 기억한다. 신부님께서는 나를 친절하게 대해주셨고 점심을 사주셨다. 아마 신학생이 월남하다가 고생했다고 측은한 생각을 하셨을 것이다…….

 

전덕표 신부.

 

 

전덕표 안드레아 신부님은 1946년 27세의 젊은 나이에 보좌신부로 사리원본당에 부임하여 연세 높은 본당신부를 잘 보좌하며 북한의 정치보위부의 감시 하에서 지혜롭게 사목을 하시다가 6.25 발발 후 10월에 정치보위부에 끌려가 혹독한 전기고문을 받고 살해되어 순교의 길을 걸으신 훌륭한 사제이시다. 현재 전 신부님은 ‘근 · 현대 신앙의 증인’으로서 “하느님의 종 홍용호 주교와 동료 80위” 시복 대상자 명단에 올라 계신다. 이른 시일 안에 시복의 영예를 누리시게 되기를 기원해 마지않는다.

 

 

“부모님, 죄송합니다!”

 

부모님께서는 집에 도착한 나를 아무 말씀 없이 맞아주셨다. 꾸지람도 야단도 안 하셨다. 나도 해주 유치장에서 있었던 일을 소상히 말씀드리지 않았다. 본래 우리 가족은, 지금도 그렇지만, 보통 필요한 이야기나 하 고 집안에서 오손도손 이야기를 잘 안 하는 편이다.

 

후에, 동생들에게서 들은 이야기지만, 내가 해주에서 체포되었을 때 집에서는 난리가 났던 모양이다. 경찰에서 조사가 나오고 아버님이 경찰 에 불려가고 등……. 그때에 부모님이 얼마나 큰 심적 고통을 겪으셨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죄송한 마음을 금할 길 없다. 사제가 된다고 신학교에 입학할 때부터 이번 일이 있기까지 부모님께 너무나 많은 고통을 안겨드렸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김충무 신부: 본래 만주의 연길 교구 사제로 피난하여 평양교구 에서 사목하다가 6·25 때 12월 에 피난하였다.

 

 

박정일 주교가 피난길에 해주에 도착하여 38선을 넘으려고 할 때 우연히 만났다. 국군이 피난민들을 북으로 돌려보낼 때 함께 38선을 넘을 수 있었다.

 

월남에 실패하고 해주 ‘38 정치 보위부’에서 2개월 동안의 유치장 생활에서 풀려나 피곤한 몸으로 고향 집으로 돌아간 것이 1950년 5월 10일 경이었다. 얼마 동안은 막막하여 아무 생각도 계획도 없이 피곤한 몸을 추스르며 무료한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부모님이나 가족들이 나의 실패나 잘못(!)을 꾸지람하지도 않고 잘 돌보아 주었으므로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는 항상 ‘과연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사제의 길을 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떠나지 않았다.

 

세월은 빨리 흘렀다. 6월이 다 가던 어느 날, 6·25 발발 이틀 후, 장에 가셨다 돌아오신 할아버지께서 “남조선과 전쟁이 일어났단다.” 하시며 기뻐하시는 것이었다.

 

이제 남조선에서 북한으로 쳐들어올 터이니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공산치하에서 시달림을 받지 않게 될 것이라고 기뻐하셨다. 사실, 8·15 해방 이후 북한 신자들은 공산정권의 감시를 받아가며 움츠리고 살아왔다. 우리 집은 숙천읍(평안 남·북도 경계에서 약 40킬로미터 남쪽에 있는 경부선 역)에서 동쪽으로 8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산골이라 라디오도 없이 바깥소식에 매우 어두웠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며칠 후 다시 장에 갔다 오신 할아버지께서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남쪽으로 계속 남진하고 있대.” 하시고는 “이 공산당 놈들 또 거짓말을 하고 있다!” 하시며 분개하셨다. 사실 북한에 소련군이 진주하고 북한 공 산정권이 수립되면서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많이 속아왔다. 그들이 줄곧 종교자유, 모든 인민의 평등, 평화를 부르짖었지만 실지는 그와 반대였기 때문이다.

 

6·25가 발발한 후 1주일이 지나고 10일이 지나면서 인민군이 계속 남진한다는 소문을 들으면서 참담한 심정이었다. 생각하고 믿었던 바와는 전연 다른 방향으로 정세가 흘러가고 있으니…….

 

또한, 라디오도 없고 신문도 없는 벽촌이라 전세가 어떻게 되어가는지 알 길이 전연 없어서 답답함을 금할 길이 없었다. 다만 유엔군과 국군이 북진하고 있다는 소식을 풍문으로만 듣고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은 38선 전역에 걸쳐 남침을 시작하였다. 이에 유엔은 ‘안전보장이사회’를 긴급 소집하여 북한의 공격을 ‘침략행위’로 규정하고, 동년 7월 7일 한국에 유엔연합군 파견을 결정하였다. 유엔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서울을 수복(9월 28일)하고 10월 19일에는 평양을 점령하고 계속 북진하였다. 그런데 그때에 중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하여 대공세를 취하며 남하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가끔 미군 군용기가 상공을 날아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고, 멀리서 들려오는 평양을 폭격하는 폭음소리를 들으면서 전세를 짐작할 뿐이었다. ‘이제야 공산정권이 끝나고 새로운 미지의 세상이 시작되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부푼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한 가지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였다. 북으로 도주하는 북한 정권이 모든 청년들을, 적령과 상관없이 무조건 강제로, 군인으로 징집하기 시작한 것이다.

 

피난 기차: 박정일 주교도 영등포에서 대구까지 2일간 이와 같은 기차를 탔었다.

 

 

징집을 당해 끌려가다 탈출하다

 

경찰들이 불시에 마을을 습격하여 청년들을 체포하여 입대시키곤 하였다. 그때에 나는 체포를 피하기 위해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고향에서 약 8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외조모 댁에 가서 쉬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경찰들이 불시에 마을에 들이닥쳤다. 갑자기 숨을 곳이 없어서 나와 친구 한 사람이 가까운 사과 움에 들어갔다가 붙들리고 말았다. 그날 밤 우리 둘은 경찰서 유치장에서 묵고 숙천으로 끌려갔다. 그런데 도중에, 내가 잡힌 것을 어떻게 아셨는지, 아버지께서 끌려가는 우리를 찾아오셔서 귓속말로 “지금 유엔연합군과 국군이 북진하고 있단다.” 하고 귀띔해 주셨다. 나는 그 말씀을 마음에 담고 길을 걸었다. 그때가 유엔연합군과 국군이 서울을 수복하고 북진할 때였다.

 

다음날 우리는 영유(숙천에서 약 10 킬로 남쪽)에 있는 어떤 폐광 속에서 형식적인 신체검사를 받고(당시 징병검사를 할 수 있는 마땅한 장소가 없었던 모양이다.) 우리는 모두 북쪽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약 13~14명 정도였다고 기억한다. 한 명의 경찰이 총을 메고 우리를 압송하였다. 하루 종일 행진하는 동안 만감이 교차하였다. 죽음의 행진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께서 귀띔해 주신 말씀을 명심하며 끝까지 끌려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다행스럽게 저녁때쯤 되어 내 고향에서 멀지 않은 국도를 지나가게 되었다. ‘내가 이곳 지리를 잘 알고 있으니 여기에서 도망하지 않으면 앞으로는 도망하기가 어렵겠다.’는 생각으로 도망할 마음을 굳혔다. 그런데 마침 저녁때쯤 되었을 때에 한 우물가를 지나게 되었다. 하루 종일 걸어서 모두 피곤한 터라 “여기서 물 좀 마시고 갑시다!” 하고 우물가에 모여서 물을 마시며 웅성거리는 동안에 어렵지 않게 혼자서 도망할 수가 있었다. 나는 거기에서 약 4킬로미터 되는 곳에 이모님 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기회가 좋았다.

 

이모님 댁에 도착하니 이모님은 깜짝 놀라시며 “지금 동리 청년들이 모두 잡으러 다니는 경찰을 피하여 높은 뒷산에 올라가 숨어있으니 너도 거기 같이 가있어라.” 하시는 것이었다. 다음날 새벽 나는 동리 청년 한 사람의 인도로 산으로 올라가 동리 청년들과 함께 피신 생활을 시작하였다. 1주간을 거기에서 지냈다.

 

밤에는 밭가에 파놓은 작은 구덩이(참호) 속에서 자고, 낮에는 높은 산에 올라가 경찰이 잡으러 오는가 망보는 것이 일과였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우리는 보기 드문 전쟁의 장관을 목격하였다.

 

갑자기 유엔군 수송기 5~6대가 날아오더니 숙천 앞벌에 낙하산을 투하하는 것이었다. 낙하한 20여 명의 병사가 지상에 내리자 바로 흰 연막을 치고 총을 쏘며 숙천읍으로 진격하는 것이었다. 약 5분 간격으로 같은 낙하산 투하가 이루어지고 그다음에는 대포와 지프차를 투하하였다. 수송기들이 우리가 있는 산보다도 낮게 날고 있었으니 참으로 장관이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어떤 군인의 낙하산 하나가 펴지지 않는 것을 보았는데 다음 날 하산하면서 나무에 걸려 죽어 있는 병사를 목격할 때에 매우 마음이 아팠다. 다음날 나는 숙천에 사시는 외숙모님을 뵙고 고향 집으로 돌아갔다. [평신도, 2016년 가을(계간 53호), 박정일 주교(마산교구 원로사목자, 전 마산교구장)]

 

 

[북한생활 체험기 3] 당신 손에 제 운명이 달렸으니 제 원수들과 박해자들의 손에서 저를 구원하소서(시편 31,16)



고향 집에 도달한 것은 10월 말경이었다고 기억한다. 인민군이 도주하고 공산당이 물러난 고향 마을은 평화로웠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조용한 마을의 분위기와 마음의 평화였다. 그러나 나는 UN군이 점령한 평양의 상황이 어떠한지, 그리고 특히 동료 신학생들과 신학교에 관한 소식이 궁금하여 마냥 무료하게 시골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평양으로 달려갔다. 때는 11월 중순경이었다.

그런데, 평양에서 며칠 동안 머물고 있는데 갑자기 많은 피난민들이 평양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중국 공산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하여 압록강을 건너 남침하므로, 북진하던 UN군은 후퇴하고, 따라서 많은 피난민들도 남하하여 평양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에 이미 대동강 철교와 인도교는 모두 폭파되어 대동강을 건널 수가 없었으므로 피난민들은 대동강 변에서 우왕좌왕 아비규환의 대혼란을 이루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피난민들은 남하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많은 사람이 대동강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 수심이 얕은 곳에서 옷을 벗고 건넜는데 동사한 사람이 많았다고 들었다. 12월 초의 평양 날씨는 매우 춥다.


친필 쪽지를 주신 몬시뇰 캐롤

그런 상황에서 나는 몹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고향에 남겨두고 온 가족들의 안위 때문이었다. 필시 가족들도 피난길에 올랐을 터인데, 수만 명의 피난민이 아비규환을 이루고 있는 이곳에서 알고 있는 집도 없고, 어디서 만나기로 한 약속도 없고….

2~3일을 고민하며 기다리는 가운데, 하루는 관후리성당(낯익은 옛 평양교구 주교좌성당)을 찾아갔다. 거기에서 몬시뇰 캐롤(메리놀 외방선교회 선교사, 한국명 안 주교, 당시 평양교구장 서리)을 만났다. 미 제8군 군종신부로 참전하고 계셨다. 신학생인 나를 반가이 맞아주셨다. 월남을 도와주시기 위해 영문 쪽지 한 장을 주셨다.

“To whom it may concern….” 즉, “이 사람은 그리스도 신자인데 가능하면 편의를 봐 주시면 고맙겠다.”는 내용의 글이 적혀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안 주교님께서는, 군종사제로서 바쁘신 가운데도, 나에게 주신 그런 쪽지를 수십 장 친필로 써서 만나는 평양교구 신자들에게 나누어 주셨다고 한다. 참으로 고마운 분이시다.

당시 수복된 평양에는 윤공희 대주교님(은퇴하신 전 광주대교구장, 당시는 차부제)과 ‘내가 잘 알고 있던’ 군종신부로 파견된 두 분의 평양교구 신부, 그리고 현재 서울대교구 은퇴 사제인 김득권 신부(본래 평양교구)가 있었지만 그때에는 만나지 못하였다.

다음날 나는 ‘이 상황에서 도저히 가족들을 만날 수도 없고 무작정 기다릴 수도 없으니 혼자서라도 월남해야겠다.’는 마음을 굳히고, 대동강 변 연광정(練光亭) 앞에 나갔다. 거기에서 미군 지프들이 운집한 피난민 가운데를 헤치고 대동강 위에 놓여 있는 부교(浮橋)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았다. ‘안 주교님께서 주신 이 쪽지를 가지고 저 지프를 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인파를 헤치고, 한 지프에 다가가 운전병에게 쪽지를 보였더니 잠깐 훑어보고는 그냥 돌려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다음 지프에 시도하였더니 타라고 한다. 지프가 대동강을 건너는 데는 5분도 안 걸렸다. 남쪽 강변(선교리) 모래사장에 도착하여 내리라고 한다. 구사일생이라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뛰어내리면서 ‘감사하다’는 인사도 못한 것 같다. 12월 4일 정오쯤이었다. (12월 4일은 UN군이 평양을 포기한 날로 기록되어 있다.) 나는 지금도 편하게 평양을 탈출한 그 당시를 회고할 때에 ‘그 혼란 속에서라도 좀 더 부모님과 가족들을 기다렸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과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질 때가 가끔 있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우리 가족은 어느 날 저녁식사를 하는 도중에 갑자기 총소리가 나고 중공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에 빈손으로 피난길에 올랐었다. 부모님을 위시하여 두 형님과 형수님들, 3명의 여동생과 조카들까지 합하여 10명의 대식구였다. 어렵게 평양까지 도달하였으나, 강을 건널 수가 없어서 대동강 상류로 올라가 얕은 곳에서 옷을 벗고 건넜다고 한다. 그 후 월남에 성공한 것은 부모님과 여동생 셋뿐이다.)

- 대동강 철교를 아슬아슬하게 건너는 피난민들.


맨발로 남으로 남으로 걷다

지프차에서 내린 나는 날 듯한 기분으로 걷기 시작하였다. 아무 생각도 없었다. 다만 남으로, 남으로…. 빨리 걸었다. 구두가 작아서 맨발로 걸었다. 저녁때에 도착한 곳이 중화(원주교구 초대 교구장이었던 지학순 다니엘 주교님의 고향)라는 작은 읍이었다. 성당을 찾아갔는데 피난민들이 꽉 차 있었다. 피난 때에 천주교 신자들은 어디를 가나 성당에서 숙식을 해결하곤 하였다. 불편한 가운데서도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위로하며 잘 지냈던 것 같다. 다행히 거기에서 잘 알고 지내던 열심한 교우 가족을 만나 함께 걷게 되었다. 두 자매와 어린이 셋, 그리고 나 5명이 함께 걸었는데 꼬마 하나를 업고 걷는 것이 내 몫이었다.

구름 같은 피난민 행렬은 길도 없는 넓은 평야 논밭을 걸어야 했다. 국도는 군인들의 몫이고…. 저녁때가 되면 아무 마을에나 들어가서 빈집을 찾아 들어가 먹고 자곤 하였다. 주민들이 피난을 떠나서 많은 집들이 비어 있었고 남기고 간 음식물도 있었다. 무엇을 어떻게 해서 먹었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

약 1주간을 걸어 38선에 위치하고 있는 해주시 입구에 다다랐다. 거기에서 우리는 참으로 전쟁의 비참한 모습을 목격하였다. UN군 공군의 폭격과 총격으로 군인뿐 아니라 민간인들이 많이 사망하여 도로 위와 주변 논밭에 시체들이 수도 없이 많이 널려 있었다. 그런데 어떤 할머니가 그 시체들 가운데를 다니며 시체를 하나하나 확인하며 둘러보고 있지 않는가. 아마도 자식이나 가족을 찾고 있었을 것이다….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김충무 신부님과 38선을 넘다

해주에 도착한 우리는 해주성당을 찾아 들어갔다. 예측한 대로 피난민들이 초만원이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우리는 38선으로 나갔는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피난민들이 38선을 넘지 못하고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국군들이 월남하는 피난민들이 38선을 넘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국군과 UN군이 북진하고 있으니 월남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발길을 돌려 북으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그때에 우리는 사제복을 한 어떤 신부님(김충무 클레멘스)이 국군과 “사제로서 남한으로 가야 한다.”라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 김 신부님은 본래 연길교구 사제인데 평양 홍용호 주교님의 요청으로 평양교구에서 약 7년간 사목하시다가 나와 같은 시기에 피난길에 오르셨던 것이다. 그 후 신부님은 마산교구 진해 중앙본당(당시는 부산교구) 제5대 주임으로 사목하셨다.

나와 동행하던 자매들이 그 상황을 보고 나에게 “신학생은 신부님께 부탁하여 함께 월남하라.”고 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며칠 동안 어려운 피난길을 함께하였는데 혼자 따로 헤어지는 것이 미안하여 “상황을 좀 두고 보자.”며 거절하였다. 그러나 자매들이 계속 권하기에 “그럼, 말씀이나 드려보지요.” 하고 신부님께 말씀드렸더니 신부님께서 흔쾌히 허락하시어 신부님과 동행하게 되었다. (그 후 나는 월남하여 신학교에 입학하였고 약 2년 후에는 로마로 유학을 떠났기 때문에 자매들의 소식을 전혀 알 길이 없어 매우 아쉽다.)

김 신부님과 우리 일행은(신부님과 신부님 가족, 수녀 지원자 2명, 그리고 나, 모두 5명) 무사히 38선을 넘어 남하를 계속할 수 있었다. 수녀 지원자 2명은 월남하여 두 분 다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회 수녀가 되었는데 지금은 다 천당에 가셨지만, 생전에는 내가 부산을 방문할 때마다 피난 때의 추억을 나누곤 하였다.

이틀을 걸어서 우리는 임진강 하구에 도달하였다. 거기에도 대동강 변보다는 훨씬 적었지만, 많은 피난민들이 모여 있었는데 몇 척의 배가 돈을 받고 피난민들을 건너 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많은 일행이 배를 타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면 얕은 곳이 있어 벗고 건널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신부님께 “혼자서 상류로 가서 옷을 벗고 건너겠다.”라고 말씀드렸다. 신부님께서는 잘 생각했다고 흔쾌히 승낙하셨다. [평신도, 2016년 겨울(계간 54호), 박정일 주교(마산교구 원로사목자, 전 마산교구장)]

 

 

[북한생활 체험기 4] 당신 손에 제 운명이 달렸으니 제 원수들과 박해자들의 손에서 저를 구원하소서(시편 31,16)



나는 혼자서 하루 종일 예성강 강가를 따라 38도선 가까이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저녁때 쯤 되어 피난민들이 강을 건너고 있는 곳까지 도달하였다. 개성읍이 가까운 지점이었다. 38도선이 가까워서인지 멀리서 포성이 들려오기도 하여 무서웠다. 수심이 깊지 않아서 걸어서 건너기에 어렵지 않았지만 12월 중순이라 강물이 매우 찼다. 해가 지고 어두워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나는 피난민들을 따라 개성읍으로 들어가서 성당을 찾았다. 거기에도 으레 많은 피난민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또 나는 혼자서 걷기 시작하였다. 남으로 남으로, 서울로 서울로…. 그런데 얼마나 걸었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어떤 중년 남자가 길가에서 피난민 청년들을 상대로 국군 지원자를 모집하고 있었다. 나는 쉽게 거기에 응했다. 지금 생각하니 그때 나의 생각이 매우 단순했던 것 같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전쟁이 언제 끝날지도 알 수 없고, 내가 신학교에 가서 사제의 길을 걸을 수 있을지도 확실치 않으니, 우선 젊은이로서 나라에 대한 의무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그 중년 남자가 ‘다른 지원자를 데리고 오겠지.’ 생각하면서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그 사람이 다시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한참을 기다리다가 ‘내가 국군을 지원하는 것이야 아무 때나 어디서나 할 수 있다.’ 는 생각으로 다시 혼자서 걷기를 계속하였다. 지금 생각해 보니 혹시 그 사람이 국군을 위장한 북한의 오열이 아니었는지 의심이 난다. 만일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이었다면 오늘의 내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찔하다.


성신대학 신학생이 되어

그런 일이 있은 후, 하루는 많은 피난민들이 줄을 이어 걷고 있는 길가에 앉아서 쉬고 있는 나의 외숙모와 외사촌 동생을 만났다. 이 외딴 곳, 피난길에서 우연히 가족을 만나다니…. 너무나 뜻밖의 일이었다.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위로를 만끽하며 함께 걷게 되었다. 드디어 서울에 도달한 것이 12월 23일 저녁 무렵이었다. 내가 평양을 출발한 지 만 20일 만이었다.

서울에는 작은 외숙부가 살고 계셨다. 외숙부 댁에서 이틀을 지내고 성탄 날 아침 명동성당에 가서 미사에 참례하였다. 그때의 나의 기쁨, 느낌, 마음이 어떠했었는지, 무슨 기도를 했었는지 지금은 아득할 따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근 70년 전 일인데다 너무나 엄청난 사건, 위험 등의 기억이 교차하고 겹쳐서 분별이 안 되었던 탓일까….

미사 후에 성당 마당에서 북한 덕원신학교에서 철학과 학생이었던 베네딕토회 신학생 황춘흥 다미아노를 만났다(그는 이미 고인이 되었다). 나의 첫 물음은 신학교와 신학생들의 소식이었다. 많은 신학생들이 군에 입대하였거나 귀가하여 현재 혜화동 신학교(현 가톨릭 대학교, 당시는 성신대학)에는 신학생 몇 사람이 남아 있을 뿐이라고 알려주었다.

다음 날 나는 곧바로 물어물어 혜화동 신학교를 찾아갔다. 그런데 반갑게도 거기에서 평양교구 신학생 두 사람을 만났다. 하나는 덕원신학교에 같이 있어서 잘 아는 정의채 바오로 몬시뇰(당시는 철학과 학생이었고 사제가 되어 서울 가톨릭 대학교 철학과 교수와 학장을 지내고 지금은 은퇴하여 계신다.)과 김진하 부제였다. 피난길에서 같은 교구 신학생을 만난 기쁨과 어려운 피난길을 함께할 수 있게 되어 느끼는 안도감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김진하 부제가 곧바로 나를 당시 학장이셨던 정규만 마르코 신부님께 데리고 가서 “이북에서 피난 온 평양교구 신학생인데 동행해도 되는가.” 문의하여 허락을 받았다. 이로써 나는 비로소 성신대학 신학생이 되었던 것이다. 매우 기뻤다.


대구에서 새해를 맞이하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두 분 신학생과 나) 한강에 놓여 있는 임시 부교(당시에 한강 인도교와 철교는 모두 파괴되어 없었다.)를 건너 영등포역에서 마지막 피난 열차를 탔다. 기차는 이름만 기차이지 기차 형태도 아니었다. 기차 안팎과 위(꼭대기) 할 것 없이 사람과 짐 등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뿐인가. 기차는 가다가 서고 또 기다리고 등…. 하룻밤을 지새우며 12월 28일 오후쯤 대구역에 도착하였다. 그래도 이 막차를 탈 수 있었던 것이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다.

대구대교구 주교관 옆에 안넥사(Annexa=라틴어로 부속 건물이라는 뜻)라는 작은 건물이 있었는데 약 30명의 신학생들이 모여 있었다고 기억한다. 우리를 맞이한 신학생들은 우리가 북한에서 피난 온 학생들이라며 기쁘게 환영해 주었다. 우리는 거기에서 약 20일을 지냈는데, 나는 그 당시의 신학생 총급장이었던 이인하 신학생(대전교구 신부로서 지금은 고인)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분의 부드럽고 친절한 태도가 너무나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인하 신부님은 지금까지도 친절함과 부드러운 성품으로 널리 회자되는 분이시다.

우리 신학생들은 대구에서 1951년 신년을 맞이하였다. 1일 아침 모든 신학생들이 당시 대구교구장이셨던 최덕홍 주교님께 합동으로 세배를 드린 것이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안넥사에서 우리는 특별한 일정 없이 지냈다. 그 나날이 무위의 시간이었지만 나에게는 오랜만에 누리는 평안한 나날이면서 한편으로 만감이 교차하는 상념의 시간이기도 하였다. 여러 가지 추억이 나의 머리를 스쳐가는 시간들이었다.

 

- 제주를 떠나기 바로 전에 찍은 사진. 1952년 8월 14일 로마 우르바노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어렵사리 입학하였던 덕원 신학교가 공산정권에 의해 폐쇄되어 강제로 귀가해야 했던 일, 평양에 도착하여 교구장이신 홍용호 주교님께서 공산정권에 의해 불시에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허탈감, 그리고 교구 신부님, 동료 신학생들과 헤어져서 산골 고향집에 돌아가 사제의 길이 아득히 보이지 않던 고향에서 지낸 무료한 나날들, 1950년 3월에 월남을 감행하다가 해주 38선 정치보위부에서 지낸 2개월간의 절망적인 유치장 생활, 그리고 대구에 도착할 때까지 평양에서 서울까지의 고달팠던 20일간의 피난 길 등이 주마등처럼 스쳐가곤 하였다.

또 다른 한편, 헤어진 부모 형제와 가족들의 안위와 소식을 알 수도 없고 알아볼 길도 없는 것이 답답하고 걱정되어 마음이 아팠다. 또한 나 홀로 이 어려운 시기를 평안하고 안전하게 지내고 있는 것이 죄스러운 마음이었다. 그런 가운데 하루는 월남에 성공한 사촌 여동생 데레사(후에 한국 순교복자회 수녀가 되었음)가 신학생들이 대구 주교관에 모여 있다는 소식을 알고 나를 찾아와서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반가운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그때는 함께 식사를 나누거나 지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여건이 허락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더구나 우리 신학생들은, 언제가 될지 예측하기 어렵지만, 가까운 시일 안에 제주도로 이주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제주 피난 신학교에서 로마로

1월 20일경이었다고 기억되는데 우리는 제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군용 버스로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제주 가는 배를 구하기가 쉽지 않아서 4~5일 동안을 부산 중앙성당과 몇몇 교우 집에 분산되어 숙식을 해결하면서 기다려야 했다. 어렵게 미군 수송선 LST를 타고 부산항을 떠난 것이 며칠 후 저녁 무렵이었다. 그날 밤 많은 학생들이 배멀미로 고생을 했다. 나도 몹시 배멀미를 한 기억이 생생하다. 우리는 다음날 아침 제주도 모슬포 앞바다에서 하선하였다. 그리고 하루 종일 걸어 저녁 무렵에 서귀포읍에 도착하여 서귀포 본당에서 1박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도달한 곳이 우리의 목적지인 서홍리공소였다(당시 서귀포본당 공소, 현재는 한국순교복자 수도회가 운영하는 ‘면형의 집’ 피정 센터가 있다).

- 제주 피난 신학교 때(1951.4.22.).


이렇게 신학생들이 서홍리공소에 자리를 잡음으로 ‘제주 피난 신학교’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안도의 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때 우리 인원은 대신학생 약 10명, 소신학생이 30여 명 합하여 총 50명 정도였다고 기억한다. 신학교 장상으로는 정규만 마르코 학장 신부님과 한공렬 베드로와 오기순 알베르토 교수 신부님 그리고 조창희 베네딕토 경리 담당 신부님 네 분뿐이었다. 우리는 한데 모여서 살았을 뿐 신학생으로서 학업을 할 수 있는 여건은 못 되었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우리는 서홍리 신학교에서 약 1개월 반을 지내고 급히 제주읍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아직 한라산에 많은 공비들이 있었고 가끔 부락을 습격하여 약탈과 사람을 납치하는 일들이 있었는데, 3월 초에 우리가 있는 서홍리 마을이 습격을 당하여 신학생들이 크게 놀랐고 납치를 당할 위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신학교는 더욱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제주읍에 있는 신성여고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서홍리공소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학교 강당과 교실 등에서 숙식하면서 지내다가 약 1개월 후인 5월 중순께 대신학생들은 부산시 영도에 있는 신선동본당에 자리를 옮기고 소신학생들은 경남 밀양읍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별과(라틴과) 학생이었기 때문에 영도 신학교에 머물게 되었다.

부산 영도 신학교에서의 생활은 많이 안정되었었다고 할 수 있다. 일상생활은 여전히 좀 불편하였지만(아침에 일어나면 세숫대야를 들고 산에서 흘러내리는 도랑에 가서 세수와 양치를 해야 했다.) 일부 신학과 철학 강의가 정상적으로 시작되었다. 나는 비로소 철학과 1학년 공부를 시작하였고 다음해인 1952년 8월 14일 로마 우르바노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북한 생활 체험기’를 마치면서

1945년 8월 15일부터의 북한 공산치하에서의 생활과 짧았던 덕원신학교 생활, 위험했던 피난길, 그리고 파란만장했던 제주도의 피난 신학교 생활 등의 추억을 더듬으며, 그 긴 세월 저를 보호하시고 이끌어주신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의 섭리에 한없는 감사의 기도를 바칩니다. 또한 저의 체험기를 읽어 주신 <평신도> 독자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평신도, 2017년 봄(계간 55호), 박정일 주교(마산교구 원로사목자, 전 마산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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