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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박해시기 한국교회와 성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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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8-09 ㅣ No.1223

[성모 승천 대축일 특집] 박해시기 한국교회와 성모


자발적으로 키워온 성모 신심으로 고통 이겨내

 

 

- 복자 김연이(율리아나)가 폐궁인 양제궁에서 궁녀들과 함께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다. 탁희성 화백 작품.

 

 

성모 신심은 천주교회 안에서 오랜 역사와 중요한 위치를 지닌 대표적인 신심이다. 한국교회 역사 안에서도 성모 공경은 1784년 교회가 창설된 직후부터 활발했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을 맞아 박해시기 한국교회와 성모 마리아의 연관성을 찾아본다.

 


서적을 통해 성모 신심 고취

 

한국교회 창설기 기록에 따르면 초기 신자들은 묵주기도를 하면서 성모 마리아를 찬미하거나 전구를 청했던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중국에서 전래한 교리서, 기도서, 묵상서와 같은 서학서나 한글 역본 서적들 영향이라 할 수 있다.

 

당시 교회 안에서 널리 읽힌 마테오 리치 신부의 「천주실의」는 ‘예수는 동정녀를 어머니로 택하여 교감 없이 잉태돼 강생하였다’고 설명했다. 이외 복자 최창현(요한) 편찬으로 추정되는 한글본 「성경직해광익」은 성모 마리아를 구체적으로 이해시켰다. 복자 정약종(아우구스티노)도 「주교요지」를 통해 쉽게 성모 영보를 이해하도록 했다.

 

- 「성경직해」 표지.

 

 

직접적인 성모 공경 방법으로는 묵주를 이용한 묵주신공, 성모 마리아의 생애나 모범을 묵상하는 방법이 있었다. 신유박해 때 형조에 압수 소각된 염주(묵주)와 성모 걸개화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를 볼 때 초창기 한국교회 신자들은 서적들을 통해 성모 마리아의 속성과 갖가지 성모 호칭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고, 묵주나 묵상서 등으로 성모 마리아의 생애를 묵상하며 성모 신심을 갖춰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천주교 교리의 가르침 아래서 자발적으로 성모 신심을 함양하는 모습이었다.

 

초기 신자들 중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은 성모 신심과 관련한 기록에서 가장 먼저 드러나는 인물이다. 1791년 신해박해 때 경기 감영에서 권일신의 집을 수색한 결과 「매괴경」이 발견된 것으로 나온다.

 

1798년 순교한 복자 이도기(바오로)는 그때 성모 신심 연마에 노력한 대표적인 신자로 꼽힌다. 그는 고문을 받는 가운데에서도 ‘하느님과 마리아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감내하기에 어려울 게 하나도 없습니다’라며 자주 성모 마리아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1799년 순교한 복자 방 프란치스코와 원시보(야고보), 1802년 순교한 복자 김사집(프란치스코)의 기록에서도 성모 신심이 드러난다.

 

1801년 순교한 복자 홍낙민(루카)과 김광옥(안드레아)은 묵주기도를 통해 성모 신심을 고양한 사례다. 홍낙민은 매일 묵주기도를 했고 김광옥도 순교 직전까지 묵주기도를 그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복자 김종한(안드레아)은 서한에서 ‘성교회의 머리는 천주님이요, 목은 동정 성모마리아이시며, 우리들은 모두 지체가 되는 것’이라고 쓰는 등 성모 마리아께 의탁하는 모습을 보였다. 복자 이시임(안나)과 최성열(바르바라)의 행적에서도 성모 마리아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표양이 드러난다.

 

이런 교회 서적을 읽고 교리를 실천하는 중에 이뤄진 성모 공경의 자발성은 보편적인 성모 신심으로 이어지게 됐다.

 

성모 마리아의 정결을 이해하고 성모 공경을 중시하게 되며 복자 윤점혜(아가타), 동정부부 복자 이순이(루갈다)와 같이 동정을 지키는 이들이 생겼다. 복자 주문모 신부는 명도회 주보를 성모 마리아로 정했고 명도회원 복자 이경언(바오로)은 회의 주보인 성모 마리아의 은총을 생각하고 그 보호에 의지하여 순교의 길을 택했다.

 

강화도 병인박해 순교자 묘에서 출토된 성모상.

 

 

성모 신심 강조한 프랑스 선교사들

 

양업교회사연구소 차기진(루카) 소장은 박해기 성모신심을 크게 두 시기로 구분한다. 교회 창설 이후 자발적인 성모 신심이 보편화되어가는 시기와 1836년 초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하면서 성모 신심 단체의 도입과 확대가 신자들 신심 함양에 영향을 주는 시기로 구분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 선교사들은 1836년 1월 모방 신부의 조선 입국에 이어 샤스탕 신부, 앵베르 주교 등이 차례로 입국해 1839년 기해박해 때까지 활동했다.

 

앵베르 주교는 1838년 12월 1일 ‘성모 마리아’를 조선교구 주보로 선정한 뒤 교황청에 허락을 요청했고,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1841년 8월 22일 ‘성모무염시잉모태’(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를 ‘성 요셉’과 함께 조선교구 주보로 승인했다.

 

차 소장은 「박해기 한국천주교회 순교자들의 성모 신심」 연구에서 “성모 마리아를 주보로 선정한 사실은 이후 신자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이 사실은 프랑스 선교사들의 가르침과 함께 자발적인 성모 신심이 더욱 활성화되는데 기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병인박해기에 와서는 묵주기도를 통한 자발적인 성모 공경이 더욱 보편화됐고, 성모 신심은 순교자들에게 내세에 대한 희망을 주었다. 병인순교록 등을 참고할 때 많은 순교자가 옥중에서 묵주기도를 바치거나 순교할 때 성모 마리아를 외친 내용이 보인다. 이를 통해 일반 신자들 사이에 스며져 있던 성모 신심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선교사들의 가르침과 함께 이들이 새로 도입한 성모 신심 단체, 신자들에게 보급된 한글 기도서들도 성모 공경과 신심을 북돋우는 데 영향을 미쳤다.

 

 

김대건 성인과 최양업 신부의 서한에서도 확인 돼

 

서한과 기록에 드러난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성모 영성도 되새겨 볼 만하다.

 

남아있는 25통의 김대건 신부 서한을 살펴볼 때, 김 신부는 편지에서 총 9번에 걸쳐 성모 마리아께 특별히 의탁하는 면모를 보인다.

 

“예로부터 동정 성모의 보호하심에 달아 드는 자는 누구도 버림을 받지 않는다고 확신하면서 서문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저는 우리들의 유일한(천주님 다음으로) 희망이신 성모님의 상본을 보이며, ‘겁내지 말라. 우리를 도우시는 성모님이 여기 계신다’라며 말로 할 수 있는 데까지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였습니다” 등 구절에서 성모 마리아에 대한 확신과 의지를 찾을 수 있다.

 

최양업 신부는 일찍이 성모성심회에 가입하려 한 적이 있으며 신자들에게도 성모 신심을 함양하도록 가르쳤다. 스승 신부에게 성모 상본을 많이 보내달라고 자주 청했던 최 신부는 신자들에게 묵주를 만드는 도구나 자료들도 많이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신자들에게 성모 공경에 힘쓰도록 하고, 또 자주 묵주기도를 바치도록 가르치려는 목적이었을 것이다.

 

[가톨릭신문, 2020년 8월 9일, 이주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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