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일 (금)
(홍)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한국ㅣ세계 교회사

[세계]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65: 아우크스부르크 제국의회 - 가톨릭과 루터교 화해 시도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1-08 ㅣ No.256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65) 아우크스부르크 제국의회 - 가톨릭과 루터교 화해 시도

 

 

-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대립이 이어지자 황제 카알 5세는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제국의회를 열었으나 대립은 계속됐다.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협정으로 루터교는 공식적으로 인정됐고 독일의 분열은 고정됐다. 사진은 아우크스부르크 시에 있는 성 울리히와 아프라 성당.

 

 

1530년 황제 카알 5세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화해를 위해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제국의회를 소집한다. 신앙의 대립은 평화적인 담판에서 토의되고 개혁이 협의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루터는 이미 파문을 당해 제국의 법익을 박탈당했기 때문에 의회에 참석할 수가 없었고 코부르크(Coburg) 성에서 프로테스탄트들과 빈번하게 서신을 교환하면서 배후에서 협상을 조정했다.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프로테스탄트측에서는 루터의 동료이자 친구인 필립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 1497~1560)이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을 제출했고 그것이 1530년 6월 25일 의회에서 낭독됐다.

 

종교 개혁가 중 인문주의자였던 멜란히톤은 타협의 자세를 견지하던 인물이었고 자신이 작성한 새 교리를 실제로 가톨릭과 거의 차이가 없는 것으로 인식했다. 그래서 그는 신앙 고백 끝에 이렇게 덧붙였다.

 

『이 신조는 가톨릭 교리의 전체 안에 존재한다. 보는 바와 같이 저자가 아는 한 거기에는 성서나 가톨릭 또는 로마 교회에 위반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에게 논쟁의 대상은 신앙이 아니라 일부 예식에서의 몇 가지 개혁 요구였던 것이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 가톨릭측에서는 라이프치히 토론회에서 루터와 논쟁을 벌였던 에크(Johann Eck, 1486~1543)를 중심으로 한 신학자들이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에 대한 반론」을 제출했다.

 

멜란히톤은 그에 대한 대응으로 다시 「변호(Apologia)」를 저술했으며 멜란히톤의 이 두 가지 저술은 즉시 루터교의 권위 있는 신앙 고백서로 공식적인 상징이 됐다.

 

양측은 담판에서 서로 양보하려는 자세를 갖고 있었고 황제 역시 긍정적인 결과를 예상했다. 마침내 5개 조항만이 논점으로 남았는데 그것은 평신도의 양형 영성체, 사제의 결혼, 수도자의 서원,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이 약탈한 교회 재산의 반환, 그리고 미사의 희생적 성격에 대한 문제였다.

 

멜란히톤은 평신도의 양형 영성체와 사제의 결혼 문제에 대해 가톨릭이 양보한다면 재일치를 방해할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루터는 멜란히톤의 양보를 신랄하게 비난하고 모든 토론을 근본적으로 거부했다. 멜란히톤은 갈피를 못잡았고 담판은 좌절됐다.

 

마침내 1530년 9월 23일 의회는 종교 담판이 끝났음을 결의, 선언하고 프로테스탄트에게는 1531년 4월 15일까지 미결된 문제에 대해 가톨릭 교리에 동의하도록 요구했다.

 

1531년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은 비밀리에 작센 남부의 슈말칼덴(Schmalkalden)에서 동맹을 체결하고 세력을 키워나갔다.

 

황제는 때마침 터키군의 발칸 침입에 직면해 의회의 결의를 관철할 수 있는 시간과 여력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이들 제후들의 원조를 얻기 위해 그들과 신앙 문제에 있어서 공의회까지 휴전할 것을 협정했다.

 

 

레겐스부르크 제국의회

 

하지만 공의회 개최가 계속 미뤄짐에 따라 다시 신학자와 평신도 사이의 종교 토론을 통해 독일의 분열을 종식시키자는 것이 합의됐다. 그에 따라 요한 에크, 멜란히톤 등 타협적 성향의 인물들이 토론회에 나서 하게나우와, 보름스 등에서 예비회담을 가진 뒤 1541년 4월 5일 레겐스부르크 제국의회에서 담판을 벌이게 된다.

 

그러나 성사와 교회에 관한 교리에서 양측의 노력은 또 다시 무위로 돌아갔다. 루터는 물론 칼빈도 이 담판을 맹렬히 비난했고 레겐스부르크 조약은 결국 양측의 비위를 다 거슬렀다.

 

카알 5세는 이제 더 이상 협상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고 생각했으며 1543년부터 무력으로 일치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546년 벌어진 슈말칼덴 전쟁은 프로테스탄트 제후측의 패배로 끝이 났고 황제는 이러한 군사적 승리와 함께 주요 적대자들과도 이별하게 됐다. 즉 1546년 2월 18일 마르틴 루터가 세상을 떠난데 이어 1547년 1월 28일에는 영국 왕 헨리 8세, 그리고 1547년 3월31일에는 프랑스 왕 프랑소아 1세가 사망했다.

 

 

교황과 대립하는 황제

 

황제는 이제 교황과 대립하게 됐다. 그는 독일의 종교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고자 결심하고 1547년 아우크스부르크 무장 제국의회에 자신의 해결책을 제시했다. 여기서 이듬해, 5월 30일자로 완성된 아우크스부르크 잠정 규정이 공의회에서 최종적인 결정이 나기까지 통용되기로 했다.

 

하지만 개신교에게 평신도의 양형 영성체와 사제 결혼을 양보하는 한편, 교리면에서는 가톨릭적인 이 규정은 프로테스탄트나 가톨릭 모두로부터 반발을 가져왔다. 여기에 영주들의 혁명이 일어나 황제는 몰락했고 독일 종교 문제의 조정을 자신의 동생에게 맡겼으며 1552년 파싸우 휴전조약이 체결됐다.

 

결국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는 1555년 9월 25일 아우크스부르크 협정을 체결하게 되는데 여기서 독일의 가톨릭과 루터파는 동등한 권리를 갖고 공존하며 영주들은 자기 영지의 종교를 자유로이 결정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분열은 고정됐다. 1517년 95개조 발표로 시작된 분란은 일단 끝났고 루터파는 종교적 자유를 얻게 됐다.

 

하지만 분쟁의 불씨는 계속 남아있었고 종교 전쟁의 시대가 시작됐다. 마침내 30년 전쟁(1618~1648)이 일어났고 이 전쟁은 독일을 외국 군대의 싸움터로 만들어 마침내 독일을 황폐화시켰다.

 

루터교는 협정 체결 이후 빠른 속도로 전파됐는데 1560년경부터 1570년까지 독일의 3분의 2가 프로테스탄트로 넘어갔다. 이후 폴란드, 헝가리, 보헤미아, 오스트리아에도 전파됐고 스칸디나비아 지방들은 완전히 루터교로 넘어갔다.

 

[가톨릭신문, 2002년 11월 3일, 박영호 기자]



1,455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