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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한국 교회의 인물상: 한국 나환자의 아버지, 서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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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3-07 ㅣ No.1553

[한국 교회의 인물상 · 123] 한국 나환자의 아버지, 서 요셉 신부 (1)

 

 

머리말

 

메리놀 외방전교회(이하 메리놀회)는 1911년 아시아 선교를 위해 창설된 미국 천주교 외방선교회이다. 메리놀회는 1918년 로마 교황청 포교성성으로부터 중국 광둥성(廣東省)과 광시성(廣西省)의 포교권을 위임받고 아시아 선교를 시작하였다. 1922년에는 한국의 평안도 지역을 위임받아 이듬해 한국에 진출하고, 1927년 평양 지목구를 설정하였다. 1932년에는 만주 푸순(撫順), 1935년 일본 교토(京都) 지역을 맡으면서 활동 범위를 넓혀갔다. 메리놀회는 위임받은 선교지에서 현지인 사제와 수녀 양성 등을 통해 아시아 천주교회의 자립에 공헌하였다. 또한, 보육원 · 양로원 · 병원 등을 설립하여 선교지의 사회복지 발전에도 이바지하였다.

 

하지만 메리놀회는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등 일본 제국주의의 대륙 침략 과정에서 종교탄압을 겪었다. 그리고 1941년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한국, 일본, 만주에서 활동해 온 메리놀회 선교사들은 미국의 간첩이라는 혐의를 뒤집어쓰고 1943년 추방당하였다. 이어서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됨에 따라서 중국 공산당도 간첩죄를 적용하여 중국 광둥성, 광시성에서 활동하던 메리놀 선교사들을 쫓아내었다. 메리놀회는 중국과 북한의 공산화, 한국전쟁으로 담당 선교지로 복귀하지 못하고 남한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한국전쟁 후 복구 사업에 힘썼다. 그리고 인권운동, 도서 지역 사회사업 등에 노력하였다. 하지만 이번 호에서 알아볼 메리놀회가 한센인1) 구호사업에 미친 영향에 관하여는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주지하듯이 일제시기 한국천주교회는 학교 설립을 통한 교육 사업뿐만 아니라 보육원 · 양로원 · 시약소 등을 설립하여 다양한 사회사업을 전개해 나갔다. 하지만 한센인 구호사업은 미흡하였다. 한국천주교회는 해방 이후에서야 일제시기의 미진함을 극복하고 한센인 구호사업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었다. 일제시기 한센인 구호사업에 주목하지 못했던 한국천주교회가 어떻게 해방 후 한센인 구호사업에서 성과를 거둘 수 있었을까. 메리놀회가 1930년대 중국 광둥성에서 시작한 한센인 구호사업에서 그 실마리를 풀 수 있다. 이 경험이 해방 후 한국천주교회의 한센인 구호사업의 성공적 안착으로 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중국과 한국에서 활동하며 한센인 구호사업에 헌신한 메리놀회 선교사 서 요셉(Joseph A. Sweeney, 徐耀燮, 1895~1966) 신부에 주목하고자 한다. 서 요셉 신부의 활동을 통해 메리놀회의 한센인 구호사업이 해방 후 한국천주교회의 한센인 구호사업의 정착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겠다.

 

 

서 요셉 신부의 평양 지목구 사목 활동

 

서 요셉 신부는 1895년 9월 4일 미국 코네티컷주 뉴브리튼(New Britain)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5년 9월 메리놀회에 입회하여 1920년 2월 8일 메리놀 신학교를 졸업하고 사제 서품을 받았다.2) 신학생 시절 서 요셉은 문학작품에 심취해 있었고, 야구, 미식축구 등 스포츠에도 관심이 많았다. 친화력 역시 남달라서 다른 신학생들은 피하기 바빴던 원로 신부들과도 잘 어울렸다. 그리고 신학, 문학, 스포츠 등 다양한 주제로 토론하기를 좋아하였다. 1918년에는 스페인독감이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여, 동료들과 함께 메리놀 본부 간호사로 임명되어 한 명의 인명피해도 없이 독감을 퇴치하는 데 힘을 보탰다.

 

그는 사제 서품을 받은 후 4월 7일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로 선교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이듬해인 1921년 6월 11일 중국 선교사로 정식 임명되어 중국으로 파견되었다. 서 요셉 신부는 중국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3년 후인 1924년 9월 4일 평양 지목구 설정 준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한국으로 전임되었다.3) 10월 19일 조셉 캐시디(Joseph H. Cassidy, 姜), 패트릭 더피(Patrick J. Duffy, 都) 신부, 메리놀회 수녀 6명과 함께 한국에 도착하였다. 그는 지목구 및 본당 신설 준비를 하면서 언어와 풍습 등을 공부하였다.4)

 

1926년 서 요셉 신부는 비현 본당의 주임 신부로 부임하였다. 비현은 본래 의주 본당, 신의주 본당의 공소였는데, 그의 부임을 계기로 본당으로 승격하였다. 그는 우선 성당 부지를 확보하고 기초 작업에 힘썼다.5) 그리고 선교를 위한 공소 방문도 게을리하지 않았다.6) 또한, 그는 한센인 요양소를 설치하여 한센인 구호에 힘썼다. 그의 한센인 구호사업의 첫걸음이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1927년 6월 27일 다시 푸순으로 선교지를 이동하였다.7) 서 신부는 4년여의 만주 선교를 마치고 1931년 6월 3일 광둥성 한센인 구호사업의 책임자로 임명을 받고, 1932년 12월 20일 장먼(江門)에 부임하여 본격적으로 한센인 구호사업에 착수하였다.8) 1930년대 메리놀회가 왜 한센인 구호사업에 주목하고, 서 요셉 신부를 담당 신부로 임명하였을까.

 

 

서 요셉 신부의 중국 광둥성 한센인 구호 활동

 

메리놀회는 1918년 중국 선교를 위해 광둥성에 첫발을 내딛자마자 한센병이 이 지역의 주요 질병임을 빠르게 인식하였다. 당시 중국에는 2백만 명의 한센인 중 0.1%인 2천 명만이 의료기관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들은 대중에게 사회적 골칫거리였고, 중국 정부에 의해 죽임을 당하기도 하며 비인격적 치료를 받고 있었다.9) 치료조차 받지 못하는 한센인들은 지역민들의 한센병 감염에 대한 공포로 그들의 터전을 잃고 아무도 살지 않는 공동묘지와 늪지대 등으로 추방당하기 일쑤였다.10) 특히 광둥성은 중국에서 한센인이 가장 많은 지역이었다. 그래서 메리놀회는 한센인 구호에 관심을 쏟고 1932년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메리놀회가 한센인 구호사업을 준비할 당시 광둥성 광저우(廣州) 근처 실롱(石龙镇)에는 성 요셉 한센인 수용소(St. Joseph’s Leper Asylum)가 있었다. 이곳에서는 벨기에 출신 마시니(Marsigny) 신부를 포함한 2명의 파리 외방전교회(M.E.P.) 신부, ‘무염시태 수녀회(Missionary Sisters of the Immaculate Conception)’ 소속 3명의 캐나다 수녀 그리고 한 명의 현지인 수녀가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센인 700여 명을 돌보았다.11) 서 요셉 신부를 비롯한 메리놀회 선교사들은 성 요셉 한센인 수용소에 방문하여 많은 시간을 이들과 보내며, 한센인 구호의 필요성을 확인하였다.12)

 

또한, 메리놀회 한센인 구호사업은 광둥성 지역 개신교의 구호 활동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광둥성 양장(陽江) 북쪽 지역 공동묘지에는 한센인 마을(leper village)13)이 있었다. 장로교에서 운영하는 양장병원의 답손(W.H. Dobson) 의사가 일주일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이 마을을 방문하여 50명의 한센인을 치료하고, 이들에게 더 나은 주거 공간 마련을 위해 노력하였다. 루오딩(羅定)에는 또 다른 미국 장로교 목사이자 의사인 딕슨(Ellsworth Dickson)이 루오딩 외곽에 한센인 수용소를 세워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한센병을 치료하고 있었다.14)

 

메리놀회 선교사들은 중국에서 광둥성에 가장 많은 한센인이 있고 이들의 구호가 열악한 실정이라는 점을 메리놀 본부에 꾸준히 보고하였다. 거듭된 보고에 메리놀회 총장 월시(James A. Walsh, 1867~1936) 주교는 광둥성에 한센인 구호를 위해 요양소(colony)15)를 설립하기로 하였다. 월시 주교는 한센인 구호사업 계획을 세우며, 광둥성 지역 본당마다 한센인들의 상태를 조사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리고 1932년 말, 서 요셉 신부를 한센병 치료 시설 견학과 한센병 치료법 학습을 위해 세계적으로 유명한 한센인 요양소로 ‘연구 투어(study tour)’를 보냈다.16) 서 요셉 신부는 1년여 간 미국 루이지애나(Louisiana)주와 하와이섬의 한센인 수용소뿐만 아니라 필리핀 쿨리온(Culion)섬에 있는 세계에서 제일 큰 한센인 요양소를 방문하였다.17)

 

1933년 10월 메리놀회는 아직 인력과 예산이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광둥성 한센인 구호사업을 시작하였다. 서 요셉 신부가 1년여의 ‘연구 투어’를 마치고 돌아와 한센인 구호 활동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코너스(Francis J. Connors, 1900~1939)18) 신부가 그를 보좌하였다. 두 신부는 광둥성에 거주하는 ‘부랑 나환자’들을 조사하며 한센병 연구에 매진하였다. 메리놀회는 타이산(台山) 근처 폐허가 된 도교 사원 내 오두막에 무리 지어 사는 20명의 ‘부랑 나환자’의 구호를 시작으로 첫 활동을 개시하였다. 메리놀회 최초의 평신도 선교사인 블라버(Harry P. Blaber) 의사가 타이산 성심병원(Sacred Heart Hospital)에 근무하며 이전부터 이들을 매주 치료하고 그들에게 신뢰를 얻고 있었다.19)

 

미국 메리놀 본부에서는 본격적인 한센인 구호사업이 착수되자 본부 차원에서 한센인 구호 예산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고 메리놀회의 선교 잡지 The Field Afar에 정기적인 한센인 구호 활동 기사를 연재하며 미국 천주교 신자들의 후원금 모금에 동참을 독려하였다. 또한, 서 요셉 신부 역시 ‘연구 투어’로 미국 방문 중 기금 마련을 위해 힘썼다. 기금 마련과 함께 인력 면에서도 메리놀회 수사이자 간호사인 브렌넉(Gregory Brennock, 1900~1950)20) 수사가 충원되었다. 타이산 인접 지역 본당들에서는 음식, 약물 등 기타 필요 물품들을 지원하기도 하였다.21) 이를 계기로 메리놀회는 한센인 구호 활동을 타이산에 이어 다른 지역으로 확장을 준비할 수 있었다.

 

브렌넉 수사가 블라버 박사와 함께 타이산 지역 한센인의 구호를 전담하고, 서 요셉 신부와 코너스 신부는 신후이(新會)로 이동하여 구호 활동을 시작하였다. 두 신부는 공동묘지 근처 낡은 집에서 비참한 삶을 사는 48명의 한센인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낡은 집과 가구들을 정리하고, 거동이 가능한 한센인들과 함께 임시로 오두막집을 지어 생활하였다. 이후 메리놀 본부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벽돌과 시멘트로 요양소를 지었다. 두 신부는 날마다 16시간씩 한센인들을 간호하였다. 타이산 성심병원의 블라버와 바가라위스(Arpemio A. Bagalawis)22) 두 의사는 교대로 그들의 휴일을 반납하고 신후이에 와서 치료를 도왔다.23) 메리놀회는 양장 지역으로도 구호 활동을 확장하여 1934년 10월경 메리놀회는 타이산, 신후이 그리고 양장 지역에서 총 218명의 한센인을 구호하고 있었다.24)

 

하지만 타이산, 양장, 신후이 요양소는 어디까지나 임시 요양소의 역할이었다. 메리놀회는 1936년 중국 정부로부터 하이먼(海門)의 300에이커의 땅을 기증받고, 1937년 여름 항구적인 한센인 요양소를 지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태풍 피해로 이듬해 1938년에서야 완공할 수 있었다. 앨버트 스타우블리(Albert Staubli, 1895~1967) 수사가 설계하고 거동이 자유롭고 집을 지을 수 있는 한센인들과 함께 지었다. 서 요셉 신부는 하이먼 요양소의 이름을 ‘천국의 문(Gate of Heaven, 天門)’으로 지었다. 그리고 곧 300여 명의 한센인이 타이산, 신후이 등에서 ‘천국의 문’으로 옮겨왔다.25)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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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센병은 조선시대에 대풍창(大風瘡), 나창(癩瘡) 등으로 불렸다. 일제시기에는 일본식 용어인 나병(癩病)으로 대체되었다. 민간에서는 문둥병으로 불렸다. 나병이나 문둥병은 오랫동안 한센인에 대한 낙인과 차별적 용어로 사용되었다. 이후 미국의 한센인 인권운동가였던 스텐리 스타인(Stanley Stein)이 한센병균을 처음 발견한 한센(Gerhard Henrik Armauer Hansen, 1841~1912)의 이름을 따 한센병(Hansen’s disease)으로 부르자고 주장하여 전 세계적으로 확산하였다. 한국에서는 1990년대 본격적으로 한센병, 한센인을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2000년 8월 1일 개정된 「전염병예방법」에서 한센병을 일컫는 공식적인 법률 용어로 자리 잡았다.

 

2) 메리놀 미션 아카이브 서 요셉 신부 약전 ; 메리놀 문서 No. 94 R18 F1, 16. 서 요셉 신부 이력서.

 

3) 메리놀 문서 No. 94 R18 F1, 4-5. Recollection of Father Joe Sweeney.

 

4) 평양교구사 편찬위원회 편, 『천주교 평양교구사』, 분도출판사, 1981, 491쪽.

 

5) 평양교구사 편찬위원회 편, 위의 책, 491쪽.

 

6)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문화위원회, “Father Joseph Sweeney–from Korea”, The Field Afar-Articles on Korea - 1, pp. 258-259.

 

7) 평양 지목구에서 서 요셉 신부의 한센인 요양소의 설치와 그의 선교 활동, 일제에 의해 탄압으로 선교지를 이동했다는 신문 기사는 여타 자료와 교차 검토가 필요하다(『경향신문』 1966년 11월 28일 자〈癩患者의 아버지〉 「스위니 神父 別世」).

 

8) 메리놀 문서 No. 94 R18 F1, 16. 서 요셉 신부 이력서.

 

9) 메리놀 문서No. 94R18 F1, 10. 1932년12월12일 자,메리놀회가 남중국에서 한센병 보호시설을 준비한다는 보고서.

 

10) Wiest Jean-Paul, Maryknoll In China, Hutchinson, 1988, p. 162.

 

11) 프랑스는 1844년 황포조약(黃埔條約)을 통해 천주교 선교에 대한 보호를 조항에 삽입한 첫 번째 천주교 국가의 지위를 얻었고, 이후 천진조약(天津條約)을 체결함으로써 국적과 관계없이 모든 천주교 선교사들에게 내지에 들어갈 수 있는 여권을 발급해 주는 유일한 천주교 국가의 지위를 획득했으며, 북경조약(北京條約)은 프랑스로 하여금 중국 내 모든 국가의 천주교 선교사의 보호와 중국 천주교도에 대한 보호까지 국제법으로 인정하여 주었다(최병욱, 「프랑스의 선교 보호권과 중국의 천주교 정책」, 『중국 근현대 천주교사 연구』, 경인문화사, 2020, 64~65쪽). 파리 외방전교회가 이른 시기 한센인 구호를 할 수 있었던 배경 역시 중국 내 프랑스의 선교 보호권의 획득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12) 메리놀 문서 No. 94 R18 F1, 10. 1932년 12월 12일 자, 메리놀회가 남중국에서 한센인 보호시설을 준비한다는 보고서(Maryknoll is planning to start a leper asylum in South China).

 

13) 한센인 마을은 일반적으로 자연스럽게 환자들이 모여서 만든 마을을 의미한다. 이곳에는 의료 전문가가 있는 클리닉(clinic)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김재형, 「한센인의 격리제도와 낙인 · 차별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9, 62~63쪽).

 

14) Wiest Jean-Paul, op. cit., p. 162.

 

15) 요양소(colony)는 고립된 지역에 병원을 중심으로 환자들의 생활공간이 있는 곳을 의미하였다. ‘colony’는 지역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병원의 규모에서도 차이가 있다. 지역과 시기에 따라 환자들이 더욱 자유롭게 거주하기도 하고 엄격한 규율에 맞춰 생활하기도 하였다(김재형, 위의 논문, 62쪽).

 

16) Wiest Jean-Paul, op. cit., p. 162.

 

17) 서 요셉 신부는 쿨리온 요양소와 협의하여 한센병 치료에 사용되는 대풍자유(Ethyl Esters of Hydnocarpus Oil)를 매달 공급받기로 하였다(메리놀 문서 No. 94 R18 F1, 10. 1933년 7월 24일 자, 서 요셉 신부의 한센병 연구 투어에 관한 보고서).

 

18) 코너스 신부는 메리놀회에 입회하여 1927년 6월 19일 사제 서품을 받고 중국 장먼 대목구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실롱의 성 요셉 한센인 수용소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1933년, 메리놀회가 한센인 구호사업을 시작하였을 때, 스스로 자원하여 서 요셉 신부를 돕는 한센인 구호 보좌 신부로 임명되었다(메리놀 미션 아카이브 코너스 신부 약전).

 

19) 메리놀 문서 No. 94 R18 F1, 19. 1934년 3월 7일 자, 헨리(Henry) 수사에게 보낸 서한 ; 메리놀 미션 아카이브 블라버 박사 약전.

 

20) 브렌넉 수사는 1929년 메리놀회에 입회하여, 중국 선교 준비를 위해 성 빈센트 병원(St. Vincent’s Hospital)에 들어가 간호 훈련을 받았다. 1932년 공부를 마친 후 타이산 성심병원으로 파견되었다(메리놀 미션 아카이브 브렌넉 수사 약전).

 

21) 상양(上洋) 근처 지공(織篢) 본당 조지 바우어(George H. Bauer, 1896~1973) 주임 신부는 약 30명의 한센인에게 식료품과 약품 등 생필품을 제공하였다(Wiest Jean-Paul, op. cit., p. 163).

 

22) 바가라위스 박사는 1933년 필리핀 성 토마스 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서 요셉 신부의 초청으로 중국 광둥성에서 한센인 진료를 했으며, 1952년 중국에서 추방당한 후 필리핀에서 ‘나이동 진료반’ 반장으로 활동하다가 다시 서 요셉 신부의 초청으로 1956년 한국에 와서 1965년까지 활동하였다(한국천주교 주교회의문화위원회, “THIRTY YEARS A LAY MISSIONER”, The Field Afar-Articles on Korea- 6, p. 245).

 

23) 메리놀 문서 No. 94 R18 F1, 19. 1934년 3월 7일 자, 헨리 수사에게 보낸 서한.

 

24) 서한에 따르면, 서 요셉 신부는 한센인 구호 활동이 어렵고 힘들지만, 한센인들에게 세례성사를 베풀며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다(메리놀 문서 No. 94 R18 F1, 18. 1934년 12월 15일 자, 맥도널[McDonnell] 신부에게 보낸 서한).

 

25) 메리놀 문서 No. 94 R18 F1, 38. The Reader’s Digest-Connecticut Yankee at Heaven’s Gate.

 

[교회와 역사, 2022년 8월호, 글 이민석 대건 안드레아(한국교회사연구소 선임연구원)]

 

 

[한국 교회의 인물상 · 124] 한국 나환자의 아버지, 서 요셉 신부 (2)

 

 

‘천국의 문’의 시련과 서 요셉 신부의 추방

 

하이먼(海門) 요양소가 완공된 1938년은 중일전쟁(1937~1945)이 발발하여 중국과 일본이 연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던 때였다. 그래서 하이먼으로 옮기기 전 신후이(新會)에서의 마지막 1년은 일본군의 폭격으로 한센인 구호 활동보다는 숨어 지내기 바빴다. 반면 하이먼은 비교적 전쟁의 위험에서 안전하였다. 1941년까지도 일본군이 광둥성의 장먼(江門)과 신후이까지 입성하였지만, 하이먼은 비교적 전쟁의 피해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1941년 4월에는 홍콩 정부의 요청으로, 광저우(廣州) 일대의 한센인 196명을 전쟁의 참화(慘禍)에서 보호하기 위해 ‘천국의 문(Gate of Heaven, 天門)’으로 받아들였다. 보고서에 따르면, 1941년 4월 시점에 ‘천국의 문’은 450명의 한센인을 보호하는 상황이 되었다.1)

 

하이먼 요양소는 중일전쟁 기간 한센인 구호뿐만 아니라 중국군과 게릴라 부대의 부상병 치료까지 떠맡게 되었다. 요양소는 부상병을 치료할 수 있는 외래 진료소를 예배당 옆에 마련하고, 일부 부상병의 입원 치료를 위해 간이 병동도 지어야 하였다. 결국 ‘천국의 문’은 야전 병원이 되었고, 난민들도 전쟁을 피해 ‘천국의 문’으로 흘러들어왔다. 전쟁이 거듭되며 ‘천국의 문’의 한센인들의 사망률이 증가하였다. 1944년 6월, 한센인의 수는 81명까지 줄어들었다. 전쟁 막바지인 1945년에 이르자 일본군이 ‘천국의 문’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천국의 문’은 수많은 한센인을 잃었고, 건물 18동 가운데 2동이 전소되는 피해를 보았다. 중일전쟁 이후 1945년 10월 ‘천국의 문’에 복귀하였을 때는 450명의 한센인 중 15명만이 생존하였다.2)

 

중일전쟁에 이어 곧 제2차 국공내전(1946~1949)이 발발하여 ‘천국의 문’은 국민당, 공산당 양쪽 진영 모두의 야전 병원으로 사용되었다. 외래 진료소에서는 한 달에 많게는 5천 명의 부상병을 치료하였다. 중국 공산당은 국공내전에 승리하고 1950년 ‘천국의 문’을 찾았다. 그들은 메리놀회가 광둥성(廣東省)에서 한센인 구호 활동을 계속하도록 허용하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1951년 5월 ‘천국의 문’의 운영 전반을 중국인에게 맡기고, 서 요셉 신부를 ‘의료 보조원’의 역할로 강등시키면서 압력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서 신부는 1953년 다른 메리놀회 선교사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간첩 혐의와 함께 한센인 학대 의혹을 받고 구금되었다가 추방당하였다.3)

 

1953년 미국으로 돌아간 서 요셉 신부는 본국에서도 한센병 연구와 한센인 구호사업에 열중하였다. 그는 프랑스 리옹(Lyon) 연구소에서 프랑스인 수녀 수잔(Marie Suzanne)이 발견한 한센균(Mycobacterium Marianum)을 이용하여 한센병의 치료 주사제인 마리아눔 안티젠(Marianum antigen)과 예방 주사약 마리아눔 백신(Marianum Vaccine)을 개발하자, 이 약을 대량 생산할 공장을 세우기 위해 모금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이후 생산한 약은 한센인들에게 무상으로 공급하였다.4) 그는 이듬해 1954년 한센병 연구사업과 저개발국 한센인 구호사업 지원에 공헌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제적으로 권위가 있는 다미안 듀튼(Damien Dutton) 상을 받았다.

 

 

천주교 구라회 창설과 ‘나이동(癩移動) 진료반’ 활동

 

서 요셉 신부는 1927년 푸순(撫順)으로 떠난 후, 60세가 되던 해인 1955년 10월 22일 18년 만에 한국 한센인 구호를 위해 다시 한국을 찾았다.5) 메리놀회 선교사로서 평양교구장 서리이자 미국 주교회의 가톨릭 복지협의회(National Catholic Welfare Conference)6) 산하 미국 가톨릭 구제회(Catholic Relief Service) 한국 지부장 캐롤(George M. Carroll, 安, 1906~1981)7) 몬시뇰의 요청이었다.8) 캐롤 몬시뇰은 서 요셉 신부가 중국 광둥성 한센인 구호 활동 경험을 살려 한국 한센인 구호사업에 헌신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초청한 것이었다.

 

동양의 조그마한 나라 한국의 나환자들은 세계 어느 나라의 나환자들보다도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제 얕은 지식과 부족한 능력이 그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한국에 가서 그들과 함께 살기로 하겠나이다.9)

 

한국의 열악한 한센인의 구호를 위해 한국을 찾은 서 요셉 신부는 내한 직후 잠시 캐롤 몬시뇰의 서울 장충동 사저에 머물다가 1955년 11월 중순 성 라자로 마을로 거처를 옮겼다.10) 이후 서 신부는 ‘성 라자로 마을’에 거주하며 이곳을 한센인 구호사업의 본거지로 삼았다. 그는 이듬해 1956년 1월 한센인 구호를 위해 천주교 구라회(天主敎救癩會, Catholic Leprosy Service)를 창설하면서 본격적으로 한센인 구호사업을 재개하였다. 1956년 4월 그는 로마에서 개최된 세계 한센병 연구자 회의에 참석하고, 귀국 직후 전국의 재가(在家) 한센인들을 대상으로 한 순회 진료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11)

 

서 요셉 신부는 먼저 재가 한센인 구호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중국에서처럼, 메리놀회 본부, 미국 자선 단체, 미국 가톨릭 구제회 등에 기금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그는 ‘나이동 진료반(Mobile Clinics)’을 창설하여 전국 각지에 흩어진 재가 한센인들을 찾아가 치료하고자 하였다. 천주교 구라회 ‘나이동 진료반’은 창설 초기 명동 성당 아래 구(舊) 계성국민학교 건물 1층에 진료실을 겸한 실험실을 설치하여 운영하다가 주교관 테니스장 아래에 임시 건물을 짓고 이전하였다. 당시 ‘나이동 진료반’은 ‘가톨릭 나병 봉사회’란 이름으로 활동하였다.12)

 

천주교 구라회는 중국 광둥성에서 서 요셉 신부와 함께 한센인 구호 활동을 펼쳤으며, 중국에서 추방된 후에는 필리핀에서 ‘나이동 진료반’ 운영에 경험이 많은 바가라위스(A.A. Bagalawis) 박사를 초청하여 운영을 맡겼다. 그리고 한국인 의사 황영희, 이일선, 오순석, 정순애 등을 이동 진료반장으로 영입하였다. ‘나이동 진료반’은 바가라위스를 포함하여 의사 5명, 간호사 4명, 간호보조원 3명, 임상병리기사 2명, 운전기사 3명, 한센병 관리 요원 13명, 비서 1명 등 총 30여 명에 이르렀다. 연간 소요경비는 인건비, 의약품비 등 총 1천여 만 원이었다.

 

천주교 구라회는 전국에 산재한 재가 한센인, 집단부락 한센인들의 관리를 위해서 서울 명동 성당 구내, 충남 강경, 충북 옥천, 경남 밀양, 경북 포항, 경남 고성 등 6곳에 ‘가톨릭 나이동 진료반 센터’13)를 두고, 이들 지역을 기반으로 전국적으로 ‘나이동 진료반’을 운영하였다. ‘나이동 진료반’은 담당 구역을 매월 2회 순회하면서 정기 진료를 하였다.14) 이들 센터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서울에서 출발하여 진료를 마치고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한 번 순회에 27일이 소요되었다. 그리고 초기에는 공동묘지나 다리 밑, 혹은 길가에 한센인들을 모아놓고 진료하다가 후에는 본당과 공소, 집합소 등에서 진료하였다.

 

천주교 구라회 ‘나이동 진료반’은 3개월마다 한 번씩 가톨릭 구제회에서 제공하는 옷, 밀가루 등 구호품을 한센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들은 구호품을 받기 위해 정기 진료에 빠지지 않았다고 한다. 대중의 이목이 두려운 재가 한센인들은 ‘나이동 진료반’의 진료소인 성당 및 공소에 나오지 못하고, 다리 밑이나 공동묘지, 산길 모퉁이에서 진료를 받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나이동 진료반’이 머무는 숙소로 밤에 찾아와서 남몰래 진료를 받기도 하였다. 1965년 한 해 동안 진료받은 인원은 4,540명에 다다랐다. 1956년부터 1966년까지 천주교 구라회에 등록된 한센인들은 3만여 명에 이르렀고, 이들은 정기적으로 치료제를 접종할 수 있었다.15)

 

천주교 구라회가 ‘나이동 진료반’ 설치 이후 정부와 민간 한센인 구호 단체들도 ‘나이동 진료반’을 설치하기 시작하였다. 정부는 1956년 천주교 구라회의 나이동 진료반 창설 이후 이듬해 한미재단(AKF), WHO(세계보건기구), UNICEF(유엔아동기금) 등의 지원으로 ‘나이동 진료반’을 창설하였다. 즉 보건사회부가 한미재단과 공동으로 1957년 경북지역에 ‘나이동 진료반’ 1반을 설치한 데 이어 이듬해 경남지역에 2반을 설치하였다. 1958년에는 원주기독병원, 1960년에는 전주성모병원에서 ‘나이동 진료반’을 창설하였다. 또한, 1966년 대구파티마병원과 대한나협회 경북지부, 1967년 칠곡 가톨릭 피부과의원 등이 정식으로 ‘나이동 진료반’을 설치하여 진료에 나섰다.

 

그리고 정부는 전염병 예방법을 1963년 2월 9일 법률 제1274호로 개정 · 시행하였다. 이 법률 개정안의 주요 골자는 한센인의 강제 수용 치료를 재가 치료로 전환하는 내용이었다. 또한, 같은 해 4월 14일 재가 한센인들의 외래 진료를 위해서 국립의료원 등 21개 국 · 공립병원 및 천주교, 개신교 한센인 구호 단체의 외래 진료소를 각 도에 지정하였다. 그리고 정부는 나관리 사업을 제도적으로 보완한 후 1964년 9월 6일 국공립병원, 민간 나사업 기관, 단체장으로 구성된 나관리 협의회를 소집하여 상호 협력방안을 협의하였다.16) 그래서 천주교, 개신교 및 정부 당국, 국제기구 등과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진행될 수 있었다.

 

 

서 요셉 신부의 선종과 천주교 구라회의 유산

 

천주교 구라회가 창설 10주년이 되던 해인 1965년, 서 요셉 신부의 건강이 악화되었다. 더욱이 천주교 구라회는 재정난도 겪게 되었다. 그리하여 경북 일부 지역 진료는 대구 파티마병원으로 이관되고, 진료 구역도 축소되어 경남과 충남으로 제한하였다. 여기에는 정부와 민간 구호 단체의 ‘나이동 진료반’ 설치로 전국 이동 진료 구역이 분할되어 축소된 이유도 있었다. 이듬해 1966년 11월 27일 서 요셉 신부가 선종하자 천주교 구라회는 그의 유언에 따라 모펫(Edward J. Moffett, 傅永發)17) 신부와 플레이밍(Alfred Fleming, 玄安心, 1931~2014)18) 신부가 계승하였다. 이후 천주교 구라회는 1967년부터 정부 시책에 따라 충남과 경남의 5개 군에서 조기 한센인의 발견과 치료, 한센병 역학 조사를 실시하였다.

 

1972년 4월 천주교 구라회는 본부를 한강성심병원으로 이관하고, 충남 6개 군(천원, 아산, 예산, 당진, 홍성, 서산)에서 이동 진료를 시행하였다. 이후 ‘대한나관리협회’ 충남지부로 이관하고, 1978년부터는 강원도 영서 일부와 영동지방 4개 시(강릉, 속초, 동해, 태백)와 7개 군(명주, 양양, 고성, 삼척, 정선, 평창, 영월)에 거주하는 재가 한센인 160여 명에 대해 2개월마다 정기적으로 이동 진료를 시행하였다. 1986년 모펫 신부가 선종하자 천주교 구라회는 더욱 위축되었다. 그 후 1986년부터는 즈웨버(Benedict A. Zweber, 최분도, 1932~2001) 신부, 1996년부터는 펠드마이어(Russell Feldmeier, 河有雪) 신부가 천주교 구라회의 사업을 계승하여 성 빈첸시오 사랑의 딸회, 가톨릭의대 만성병 연구소와 합동으로 경기 북부 지역, 강원도 동부지역을 맡아서 ‘나이동 진료반’을 계속 운영하였다.19)

 

천주교 구라회의 ‘나이동 진료반’ 운영 이전에는 소록도 갱생원이나 병원에 수용된 한센인들을 제외하고, 전국에 흩어져 있는 많은 재가 한센인을 치료할 방법이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이들은 지역민들의 혐오와 공포의 대상으로, 결국 ‘부랑 나환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천주교 구라회의 ‘나이동 진료반’은 이들에게 주목하였다. 이후 정부 및 다른 한센인 구호 단체들의 ‘나이동 진료반’ 설치로 이어졌다. 즉 천주교 구라회의 ‘나이동 진료반’은 한센인의 강제 격리 정책이 재가 치료 정책으로 전환하는 데 밑거름이 되어, 1962년 정부는 한센인의 격리정책을 공식적으로 해제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국제적으로 세계보건기구(WHO)의 격리 해제 권고라는 요인이 있었겠지만, 국내에서 한센인들을 강제 격리에 의존하지 않고도 치료할 수 있다는 ‘나이동 진료반’의 성공 역시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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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메리놀문서 No. 94 R18 F1, 28~29, OFFICIAL LISTENING POST FOR BOARD OF INFORMATION - REPUBLIC OF CHINA.

 

2) Wiest Jean-Paul, Maryknoll In China, Hutchinson, 1988, p. 161.

 

3) Wiest Jean-Paul, op. cit., pp. 172~173.

 

4) 서상요 편, 『성 라자로 마을 50년사』, 성 라자로 마을, 2000, 97~98쪽.

 

5) 『경향신문』 1955년 10월 29일 자, 「癩病患者를 救濟 죠셉 · 서 요셉 來韓」.

 

6) 미국 천주교 주교회의 공식적인 해외 원조 기관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의 난민 구호, 전쟁 희생자, 빈민을 돕기 위해 1943년 조직되었다. 한국에서는 1946년 처음으로 구호사업을 시행하였다. 주요 사업은 양곡 사업, 의료사업, 사회경제개발사업, 지역사회개발사업 등에 대한 후원이었다.

 

7) 1931년 2월 1일 메리놀회 사제로 서품된 후 한국 선교사로 자원하여 같은 해 8월 한국에 입국하여 평양 지목구 마산, 안주, 운향 등지에서 사목 활동을 하였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제에 구금되어 이듬해 1942년 6월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가톨릭 구제회 한국 지부장으로 재입국하여 한국전쟁 이후까지 사회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8) 해방 후 천주교의 한센인 구호사업은 가톨릭 구제회 한국 지부장 캐롤 몬시뇰이 미군정의 요청으로 시작하였다. 그는 1950년 6월 2일 경기도 시흥군 서면 광명리 신기촌에 성 라자로 마을을 설립하여 한센인 100여 명을 수용하였다. 뒤이어 대구대교구가 경북 의성에 신락원(信樂園), 고령에 은양원(恩養園)을 설립하고, 광주교구가 1953년 전남 나주에 현애원(玄愛園)을 설립하며 천주교의 한센인 구호사업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9) 『경향잡지』 1223호(1970년 2월호), 「평생을 나환자와 더불어 - 고 서 요셉 신부 구라사업기」.

 

10) 서 요셉 신부는 성 라자로 마을 성당 뒤편에 간이 목조 건물을 짓고 1966년 선종할 때까지 그곳에서 거주하였다. 이는 한센인들과 같은 사회적 타자의 생활을 자처했음을 알 수 있다(『가톨릭시보』 1960년 1월 31일 자, 「가톨릭 나병봉사회」).

 

11)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문화위원회, 「Leper Circuit」, 『The Field Afar - Articles on Korea』 5, 330쪽.

 

12) 『가톨릭시보』 1960년 1월 31일 자, 「가톨릭나병봉사회」.

 

13) 이후 강경 성 요셉 병원, 옥천 성모병원, 포항 성모병원, 고성 성애병원 등으로 발전하였다.

 

14)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문화위원회, 「INTERVIEW Father Sweeney : “Leprosy is not Inheritable”」, 『The Field Afar - Articles on Korea』 6, 206쪽.

 

15)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문화위원회, 「OUR FIGHT AGAINST LEPROSY」, 『The Field Afar - Articles on Korea』 6, 112~113쪽.

 

16) 한국 가톨릭 나사업 연합회, 『천주교 구라사』, 2001, 221~222쪽.

 

17) 1922년 2월 12일 미국 뉴저지(New Jersey)주에서 태어났다. 메리놀회 신학대학을 졸업한 후 1947년 6월 12일 사제 서품을 받고, 1948년 중국 광둥성에서 선교 활동을 하다가 1953년 추방되었다. 이후 1958년 10월 한국에 와서 백령도에서 병원과 고아원을 설립하였고, 성 라자로 마을 원생 자녀들의 진학을 위해 맡아 기르면서 초 · 중 · 고등학교에 보내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8) 1931년 1월 18일 뉴저지(New Jersey)주 뉴브런즈윅(New Brunswick)에서 태어났다. 1960년 6월 11일 메리놀회 신부로 사제 서품을 받고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었으며, 1961년 6월 청주교구에서 사목 활동을 하였다. 1966년 11월 서 요셉 신부가 선종한 후 모펫 신부와 함께 천주교 구라회 책임자를 역임했으며, 1968년 가톨릭 한센병 노동자 협회 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19) 한국 가톨릭 나사업 연합회, 위의 책, 222쪽.

 

[교회와 역사, 2022년 11월호, 글 이민석 대건 안드레아(한국교회사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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