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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한국 교회의 인물상: 인혁당 사건 진실의 등불, 진필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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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3-07 ㅣ No.1552

[한국 교회의 인물상 · 122] ‘인혁당 사건’ 진실의 등불, 진필세 신부

 

 

머리말 : ‘인혁당 사건’을 아시나요

 

50여 년 전인 1974년 5월 박정희 독재정권의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는 북한의 지령을 받아 남한 정부를 전복시키려 한 혐의로 도예종 · 서도원 · 하재완 · 송상진 · 우홍선 · 김용원 · 이수병 · 여정남 등 8명을 구속하였다. 이들 8명은 1975년 4월 9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후 19시간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른바 ‘인혁당 사건(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이다. 이 안타까운 비극은 박정희가 자신의 유신독재에 대한 국민의 저항과 반대를 억누르기 위해 조작한 사건이었다. 사형이 집행된 8명은 국가전복 기도는커녕 ‘인혁당’이라는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그런데도 박정희는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해 무자비한 고문으로 이들에게 거짓 자백을 강요하여 목숨을 앗아갔다.

 

다시 강조하여 말하지만, ‘인혁당 사건’은 박정희 정권에 종속된 중앙정보부와 사법부의 야합이 낳은 대한민국 역사상 대표적인 사법살인이자 부끄러운 현대사의 한 대목이다. 그렇다면 ‘인혁당 사건’의 조작 사실은 어떻게 알려졌을까. 조작 사실을 가장 먼저 제기한 이는 한국으로 파견된 메리놀 외방전교회(이하 메리놀회)의 어느 신부였다. 천주교 인천교구 영종(永宗) 본당 주임 진필세(陳必世, 야고보, James P. Sinnott, 1929~2014) 신부가 그 주인공이다. 진 신부가 영종 본당 주임으로서 10년간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던 영종도 주민들을 위해 어떻게 헌신하였고, 대한민국의 민주화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살펴보자.

 

 

진필세 신부와 영종도

 

진필세 신부는 1929년 6월 18일 미국 뉴욕시 브루클린(Brooklyn)에서 출생하였다. 진 신부는 1947년 워싱턴 D.C. 조지타운대학교에 입학하여 1951년 졸업 후 1952년 8월부터 1954년 8월까지 2년간 군 복무를 하였다. 전역 직후, 그는 메리놀회에 입회하여 1960년 6월 11일에 사제 서품을 받고 8월 한국 선교사로 파견되었다.1) 그는 1년간 한국어 공부를 마치고 1961년 인천교구 답동 본당 보좌로 본격적인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어 화수동 본당 임시 주임, 1964년 백령도 본당 제5대 보좌를 거쳐 1965년 8월 영종 본당2)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진 신부가 송림동 본당 공소에 불과하던 영종 본당 부임 후 가장 역점을 둔 사업은 새 성당 건축이었다. 그래서 서둘러 성당 대지(1,800평)를 매입하고, 2년여 만인 1967년 10월에 완공하였다. 그리고 영종도와 주변 도서 지역에 운서 · 용유 · 무의 · 시도 · 신도 · 삼목 · 뒷골 등 7개 공소를 설립하였다. 생활 형편이 어려운 신자들에게는 밀가루와 옥수수빵, 기름 등 생필품도 지원하였다. 한국전쟁으로 황폐해진 땅을 활용하기 위해 간척사업을 진행하였다. 여성들의 생활 자립을 위한 양재기술학원(洋裁技術學院)을 운영하고, 섬 주민들의 수입 증대를 위해 봉제협동조합(縫製協同組合)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그는 본당 사목 활동뿐만 아니라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영종 섬마을 주민들을 위해서도 헌신하였다. 자신의 사비와 미국의 지인들에게 받은 후원금으로 1965년 ‘예수 성심 영종 의원’을 개원하였다. 당시 영종도에는 보건지소 한 곳이 있었지만, 상주하는 의사 없이 간호사만 근무하였으므로 의료 혜택이 턱없이 모자랐기 때문이었다. 이 병원은 병상 20개와 상주 외과 의사 송석영을 통해 영종도를 비롯한 주변 7개 섬 주민들에게 의료 진료를 무상으로 제공할 수 있었다. 또한 미국에서 후원한 양질의 의약품을 처방하여 당시 신자들은 물론 영종도 주민들에게 큰 의료 혜택을 제공하였다.3) 이뿐만 아니라 보육원과 양로원을 설립하였으며, 영종도 주민들의 생활 향상을 위한 선착장 축조, 어선 건조, 위생시설 마련 등에 많은 공헌을 남기기도 하였다.4)

 

 

‘인혁당 사건’과 강제 출국 그리고…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자신의 장기 집권을 목적으로 10월 유신을 선포하였다. 이 ‘유신독재 체제’는 곧바로 박정희 독재정권에 대한 국민의 격렬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이 때문에 박정희 독재정권은 국민의 저항을 막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박정희 독재정권 반대 운동’이 한창이던 1974년 4월 초,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을 중심으로 유신 반대 투쟁이 거세지자 중앙정보부는 긴급조치 제4호와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는 명목으로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 240명을 체포하였다. 즉 민청학련이 민주화와 인권을 요구하며 수업 거부나 시위, 유인물 배포 등 민주화운동을 전개하자 박정희 독재정권은 4월 3일 긴급조치 제4호를 발동하여 학생들이 수업 거부 등의 집단행동을 할 수 없도록 막았다.

 

또한 독재정권은 그 배후세력으로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를 지목하였다. 민청학련이 ‘인혁당’ 등 불온 세력의 조종을 받아 반체제 운동까지 전개하였다는 명목이다. 이로 인해 1975년 4월 8일 도예종 등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관련자 8명에 대한 사형을 확정하였다.

 

1974년 춥고 눈 내리는 1월 말, 뚱뚱하고 행복에 겨운 44세의 독신인 나는 시골 섬에 있는 사제관에 앉아서 독재정권이 통제의 고삐를 죄는 것을 지켜보면서, 최근에 발표된 ‘긴급조치’에 반대하며 항변하다가 투옥된 한국 목사, 젊은 남편과 아버지들의 나라 기독교 한국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하였다.5)

 

진 신부는 1974년 이전까지 평범한 미국인 선교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그가 1974년 봄 ‘인혁당 사건’을 마주하며 ‘민주투사’로 바뀌어 갔다. 그는 ‘인혁당 사건’이 중앙정보부의 고문과 협박 등으로 조작되었다고 폭로하였고, 사형 선고를 받은 도예종 · 서도원 · 하재완 · 송상진 · 우홍선 · 김용원 · 이수병 · 여정남 등 8명을 구제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그러나 인혁당 관련자 8명은 1975년 4월 9일 대법원에서 상소가 기각된 지 20시간도 채 되기 전에 사형 집행을 당하였다.

 

그는 메리놀회와 외국 언론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전 세계에 폭로하였다. 진 신부는 당시 인천교구 총대리 신부이며 ‘인혁당 사건’ 구속자 가족협의회 공동대표직을 맡고 있었다. 그는 미사 강론과 각종 기도회를 통해 유신헌법의 철폐 그리고 ‘인혁당 사건’ 구속자 석방 운동을 벌이며 박정희 독재정권을 비판하였다. 이에 대해 법무부는 공공질서를 파괴하는 정치 활동이라는 사유로, 출입국관리법 ‘체류 연장 불허’를 적용하여 1975년 4월 30일까지 강제 출국을 통보하였다.

 

이에 대해 1975년 4월 25일 18시 30분, 진필세 신부는 명동 성당에서 기자회견을 하였다. “인권운동은 천부적 권리이다. 섬(영종)의 사제로서 한국 정부가 주도하는 세상의 흐름이 안타까워 (교회)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나는 한국에서 15년 가까이 선교 활동을 하면서 양심에 따라 행동하였을 뿐 누구를 미워하거나 정치적인 활동을 한 일이 없다.”라며 자신의 추방을 계기로 한국의 젊은 지성들이 종교와 교회의 가치를 인정하고 천주교를 알아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랐다.6)

 

한편 한국 천주교회는 진 신부의 강제 출국을 막기 위해 노력하였다. 예컨대 4월 28일 한국 천주교 주교단이 진필세 신부의 추방이 타당하지 않으며, 출국 명령을 취소할 것을 박정희에게 요청하는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같은 날 오후 7시에는 서울대교구 김수환 추기경,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 등 120여 명의 사제와 1,200여 명의 신자들이 명동 성당에서 ‘진 신부를 위한 기도회’를 열어 그의 강제 출국을 막고자 하였다. 메리놀회 한국지부 신부들 역시 4월 29일 진 신부의 추방을 취소할 것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진 신부는 4월 30일 저녁 7시 “될 수 있는 대로 한국에 빨리 돌아오겠다.”라는 말을 남기고, 김포공항을 통해 출국할 수밖에 없었다.

 

진필세 신부는 미국으로 돌아간 후 한국의 인권을 위한 노력을 꾸준히 진행하였다. 그리고 추방 14년 만인 1989년 ‘3개월 관광비자’로 다시 입국할 수 있었으며, 2002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해외 민주 인사 초청으로 영구 귀국할 수 있었다. 재입국 후 북한 선교와 우리 민족의 화해와 일치, 평화 통일을 위해 큰 노력을 하였다. 그는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동의 메리놀회 한국 본부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2014년 12월 23일 선종하였다.

 

 

맺는말 :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인혁당 사건’이 있은 지 30여 년 가까이 흐른 뒤에야 2002년 9월 12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인혁당 사건’은 중앙정보부의 조작사건이라고 발표하며, 관련자들은 무죄라고 공식 발표하였다. 그리고 ‘인혁당 사건’ 재판의 재심 청구가 2005년 12월 27일에 받아들여져 2007년 1월 23일, 희생자 8명에 대한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 예비 · 음모, 선동 · 반공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가 선고되었다.

 

진필세 신부가 미국 메리놀 신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의 선교사로 파견된 해는 4 · 19혁명이 일어난 1960년이다. 어쩌면 이는 한국 민주화운동과 숙명처럼 얽히는 그의 미래를 암시한 하나의 예고이지 않았을까. 박정희 독재정권에 의해 대한민국의 인권이 가장 억압받던 시기에 선교사로 와서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였던 진필세 신부를 기억하고 되뇌었으면 좋겠다.

 

……………………………………………………………………………………

 

1) 메리놀 미션 아카이브 진필세 신부 약전(https://maryknollmissionarchives.org/deceased-fathers-bro/father-james-p-sinnott-mm/).

 

2) 1889년 답동 본당 설립 후 영종도 지역에 신자들이 조금씩 늘어나면서 답동 본당 주임 마라발(J. Maraval, 徐若瑟) 신부는 1901년 돌팍재에 영종 공소를 신설하였다. 송산과 돌팍재 등지에 신자 수가 증가하자 1910년 공소 신자들은 12칸의 공소 강당을 마련하였다. 이후에도 공소 신자 수는 꾸준히 증가했으며 1955년 9월 송림동 본당이 설립되면서 영종 공소는 송림동 본당 관할이 되었다. 1965년 6월 송림동 본당 제3대 주임 파퀘트(J. Paquet, 朴) 신부는 영종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시켰다(『한국가톨릭대사전』 9, 6298쪽).

 

3) ‘예수 성심 영종의원’은 1970년 당시 주한미국대사관 통신 미디어 국장의 부인 로라 매기(Laura Magee) 여사의 후원으로 증축할 수 있었다(Rev. Robert Martin Lilly, M.M., MISSION IN THE SOUTH, 오늘의 말씀, 2002, 190쪽).

 

4) 「15년간 복음 전파에 몸바쳐/출국령 받은 시노트 신부」, 『가톨릭시보』 1975년 5월 4일 자.

 

5) 진 시노트, 「제13장 신부님 이제 마음껏 이야기하십시오」, 『시대를 지킨 양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7, 347쪽.

 

6) 명동천주교회, 『한국가톨릭인권운동사』, 1984, 332쪽.

 

[교회와 역사, 2022년 3월호, 이민석 대건 안드레아(한국교회사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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