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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조선후기 천주교와 정감록: 소문화집단의 상호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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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3-18 ㅣ No.667

조선후기 천주교와 《鄭鑑錄》 : 소문화집단의 상호작용

 

 

1. 문제의 제기 : 조선후기의 두 가지 ‘지하 소문화’(underground subculture) 

2. 천주교 교리가 정감록 소문화에 끼친 영향
3. 정감록 소문화가 천주교에 미친 영향
4. 천주교와 《정감록》 ‘청의’
5. 정감록과 천주교 소문화는 조선후기 사회문화운동의 중심


1. 문제의 제기 : 조선후기의 두 가지 ‘지하 소문화’(underground subculture)

조선시대의 예언문화를 연구하는 가운데 필자는 여러 개의 ‘小文化’(subculture)가 존재한 편린을 여러 종류의 문헌에서 발견했다. 소문화란 下位文化 또는 副次的文化라고도 불리는 것인데, 특정한 사회계층이나 집단이 향유한 독자적인 행동양식이나 가치관을 가리킨다. 이것은 이른바 ‘문화 속의 문화’이다.1) 조선후기 여러 소문화 집단 가운데서도 필자가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조정의 탄압으로 지하에서 활동한 집단들이다.

지하의 소문화 집단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벌였는지를 제대로 밝히기는 수월하지 않다. 무엇보다도 연구에 필요한 자료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 여기에 필자의 능력부족이 겹쳐 소문화 연구는 별로 결실을 맺지 못하고 있다.2) 이 글 역시 그 한계가 뚜렷하다. 이 논문은 실증에 입각한 정밀한 연구라기보다는 추론을 앞세워, 조선후기에 존재한 지하 소문화 집단끼리의 문화적 교류를 추정한 것이다.

이 글의 연구대상은 천주교와 정감록 소문화다. 알다시피 18세기 조선에서는 천주교를 ‘西學’이라 불렀다. 그런데 편의상 여기서는 천주교라고 통칭하기로 한다. 또 하나의 연구대상은 《鄭鑑錄》을 중심으로 한 소문화 집단이다. 보다 정확히 말해, 조선왕조의 멸망과 새로운 사회의 도래를 점치는 여러 종류의 예언서를 통칭하는 일반명사로서 필자는 정감록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것이다.3)

두 집단을 간단히 비교해 보면, 천주교는 오랫동안 서양 여러 나라의 국교로서 정연한 교리와 일관된 철학적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정감록은 체계적이지 못했다. 그러한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감록은 민간에 널리 유행하였고, 종교적 ·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일부 사람들은 정감록 예언을 근거로, 비밀조직을 만들어 반란을 꾀할 정도였다. 여기서 알 수 있듯, 지난 수백 년 동안 정감록을 매개로 한 소문화 집단이 엄연히 존재했던 것이다.

조선후기의 사회와 문화에 관심을 가진 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천주교와 정감록의 관계에 주목했다. 비교적 최근의 연구자로는 조광, 주명준, 김진소 및 스즈키가 이에 해당한다.4) 그들 가운데 조광과 스즈키는 김건순과 유관검 등 천주교 신자들이 입교하기 전에 정감록에 심취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한 주명준은 순교자 유관검의 경우를 예로 들어, 일부 신자들은 입교 후에도 계속해서 정감록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포교에 이용한 흔적도 뚜렷하다고 보았다. 그런가 하면, 김진소는 정감록의 유행이 당시 유행한 미륵하생 신앙과 직결되어 있었다고 추정했고, 미륵신앙이라고 하는 재래의 종교적 풍토에 힘입어 서구의 외래종교인 천주교가 쉽게 정착될 수 있었다고 짐작했다.

이러한 기존의 연구는 필자가 조선후기 사회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특히 외래종교인 천주교가 정감록과 모종의 긴밀한 관계에 놓여 있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어 흥미롭다. 필자는 기왕의 연구 성과를 계승하면서도 그들 소문화 집단의 관계를 약간 새로운 각도에서 접근하고 싶다.

기존의 연구에서와는 달리 필자는 우선 천주교와 정감록 신앙집단을 당시의 지하문화를 대표하는 두 개의 소문화 집단으로 이해한다. 조선후기 통치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양자는 조선의 지배질서를 위협하는 적대세력이었다. 그래서 그들 소문화는 심한 탄압을 받았으며, 결과적으로 천주교는 기껏해야 半 지하조직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정감록 소문화는 사정이 더욱 나빠 비공개 지하조직으로 유지될 수 있을 뿐이었다. 요컨대, 두 집단은 공권력의 탄압을 피해 가까스로 명맥을 이어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집단의 문화적 역량은 누구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컸다고 판단된다. 천주교의 신자는 각계각층에서 충원되었고, 특히 18세기에는 일부 진보적인 지식인들까지 포괄했다. 당시 유행한 ‘서학’이란 용어에서 짐작되듯, 천주교는 서양에서 들어온 새 학문으로 높이 평가되는 처지였다.

그에 비해 정감록 소문화의 경우는 당시의 지배질서에 불만을 가진 다양한 사회세력을 규합하는 하나의 구심점이었다. 19세기 후반에는 이 예언서를 바탕으로 다양한 신종교가 탄생하기도 했다. 그런 점을 보더라도 정감록이 문화계 전반에 던진 충격은 컸다고 하겠다. 조선의 통치자들이 예언서를 얼마나 두려워했으면, 그것을 소장한 사실이 발각되기만 해도 귀양이나 사형과 같이 극단적인 처벌을 동원했겠나 싶다.

두 집단은 근본적으로 다른 점도 많았다. 무엇보다도 그 종교 · 철학적 기반이 상이했다. 천주교는 서구 사회에서 1천 년 넘게 계승 발전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신학적 기반 위에 서 있었다. 그에 비해 정감록은 풍수지리와 음양오행설을 비롯한 고대 동양의 다양한 철학적 요소를 혼합한 것이라서, 철학적 토대가 단편적이고 산만한 점이 없지 않았다.5) 이 두 집단이 추구한 이상세계의 모습도 크게 달랐던 것 같다. 천주교가 일종의 종교적 이상세계를 추구했던 데 비해, 정감록 소문화는 조선왕조를 대체할 새 왕조의 건설을 목표로 삼았다. 한 마디로, 조선후기 천주교와 정감록 소문화는 각각의 지향점이 달랐다. 그러나 그들은 통치집단이 꺼리고 두려워한 지하의 반체제적 소문화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위에 지적한 사실보다 필자가 더욱 강조하고 싶은 점이 있다. 그것은 두 소문화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을 개연성이다. 한편으로, 천주교의 말세관은 정감록 소문화에 변화를 초래했다고 판단할 만한 요소가 발견된다. 그런가 하면, 일부 천주교 신자들은 정감록 소문화를 모방해서 《니벽젼》이라는 일종의 천주교적 예언서를 만들었다고 추정해 볼만한 단서도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정감록 소문화가 천주교 소문화의 영향으로 새로운 이방인 개념을 갖게 된 사실이다. 그것은 16세기부터 동아시아에 진출 중이던 서구의 상인들 또는 천주교 선교사란 존재가 투영된 ‘靑衣’라고 하는 개념이다. 이처럼 천주교와 정감록 소문화 집단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일종의 피드백(Feedback) 과정에 놓여 있었다.

서양 고대로부터 스스로 세계 유일의 보편 교회를 주장하는 천주교가 정감록과 같은 한 지역의 소문화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수용했을 리는 없다. 그러나 조선후기 사회에서 천주교 소문화가 처한 불안하고 위험한 비상상황을 고려해볼 때, 로마 천주교회의 공식적인 노선이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절대적인 유일한 기준으로 작용했을지는 다소 불분명하다. 당시 조선왕조는 천주교의 존립 자체를 부정하며 신자들을 혹심하게 탄압했고, 신자들을 돌볼 사제의 수가 크게 부족한 형편이었다. 게다가 조선은 서양과는 문화적 뿌리가 근본적으로 달랐기 때문에, 로마 교황청이 내려 보낸 가르침이 과연 얼마나 충실하게 이행되었을 지는 쉽게 단언하기 어려울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조선후기 뿐만 아니라 역사상 존재한 어떠한 종교적 또는 정치적 공동체라도 그 사정은 비슷할 것이다. 하나의 집단을 구성하는 성원들의 사고와 행동양식은 통일적이면서도 다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글에서 살피게 되는 천주교 소문화가 비록 교회의 공식입장과는 거리가 먼 것일지는 몰라도 일부 구성원들의 생각과 행위와 말을 대변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데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


2. 천주교 교리가 정감록 소문화에 끼친 영향

(1) 세상에 전파된 천주교의 교리지식


천주교는 조선왕조의 지배 이데올로기인 성리학과 갈등을 빚었다. 1839년(헌종 5) 丁夏祥(1795~1839)이 쓴 《上宰相書》를 보면, “천주교는 조선의 性理學의 전통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습니다”라는 언급이 보이지만, 이것은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둘러댄 말에 지나지 않았다.6) 천주교에서는 만유의 주재자인 천주가 우주자연과 인간을 창조했다고 보았고, 그런 점에서 천주교의 가르침이 기존의 유교, 불교 및 도교와 마찰을 일으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천주교 교리에 따르면, 세상의 죄를 대신해 죽은 예수그리스도가 사흘 만에 부활했고, 훗날 재림하여 선악을 심판할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생전의 공과에 따라 죄인은 지옥에, 착한 이는 천당에 간다고도 했다.

이러한 천주교의 기본 교리는 몇 가지 경로를 통해 조선에 전해졌다. 첫째, 교회 지도자들은 《천주실의》를 비롯해 《칠극》, 《주교요지》, 《상재상서》, 《성교요리문답》 등 천주교 교리를 정리한 여러 종류의 서적을 중국에서 수입했다. 둘째, 천주교 신자들 중에도 교리를 문답식으로 기록해 여러 종류의 글, 흔히는 〈천주가사〉라 불리는 글들을 지어 가족과 이웃들에게 보여주는 경우가 있었다.7) 〈천주가사〉 중에는 최후의 심판을 비롯해 천당, 지옥, 예수탄생과 부활, 성신강림 등 근본적인 교리를 담은 것이 많다. 셋째, 당시 조정에서는 천주교를 탄압하는 이유를 적어 〈척사윤음〉을 반포했다. 여기서 천주교의 교리가 논란의 대상이 되었으므로, 역으로 생각해 보면 〈척사윤음〉이 도리어 천주교에 대한 일반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경우도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려웠다. 이렇듯, 여러 경로를 통해서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천주교 교리에 접하게 되었다.

18세기 후반, 기호지방의 명문 양반가 자제들은 천주교의 교리를 대략 짐작할 정도가 되었다. 예컨대 강이천이나 김건순 같은 사람들은 천주교에 입교하기 여러 해 전부터 집안에 비장된 《천주실의》나 《三山論學記》와 같은 천주교 교리 서적을 두루 읽었다고 한다. 그들 집안의 장서 중에는 이런 책들이 여러 권 있었다.8) 굳이 천주교 신자가 될 생각이 없었다 해도 18세기 조선의 양반들은 하나의 비판적 교양으로서 천주교 교리서를 구해 읽는 풍조가 있었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천주교에 대한 조선 지식층의 관심은 얼마 지나지 않아 냉각된다. 1790년 조선 천주교회가 북경에 파견한 윤유일이 구베아 주교로부터 조상에 대한 제사 금지 명령을 접수하고 부터였다. 그 뒤 조선의 천주교는 이른바 ‘전례문제’로 위정자들과 정면충돌하였다. 이후 천주교는 조정의 심한 탄압에 직면했고, 성리학을 떠받드는 기성세력으로부터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사악한 집단으로 규정되었다.

하지만 천주교는 일반의 관심을 계속 불러일으켰다. 교리상의 몇 가지 특이한 점 때문이었을 텐데, 특히 천지창조설을 비롯해 부활한 예수가 세상을 구한다는 내용, 말세에 최후의 심판이 반드시 있다고 하는 신앙이 격렬한 찬반양론을 일으켰던 것 같다. 사회 일각에서는 이로 인해 천주교를 더욱 배척하게 되었겠지만, 다른 한편에는 호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특히 당시의 사회현실에 비판적이었던 일부 지식인들과 하층민들로서는 천주교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말세와 구원에 관한 천주교의 설명은 엄밀하게 말해 유교나 불교 또는 도교에는 발견되지 않는 새로운 것이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彌勒下生說은 천주교의 말세관 또는 구원관과 상당한 유사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말세에 轉輪聖王이 등장하여 세상을 평정한 다음, 미래의 부처인 미륵불이 下世하여 모두가 부처되는 이상세계를 열기로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더라도, 고대 중국과 한국에서는 불교의 미륵신앙을 이용해 여러 차례 반란이 일어났다. 더러는 반란자가 미륵불을 자처한 경우도 있었다. 가령 후삼국 말기에 등장한 태봉의 궁예 정권은 그 대표적인 예가 된다.9)

이처럼 한국을 비롯해 동아시아에 널리 전파된 미륵신앙에는 장차 救世의 종교적 초월자가 등장하여 현세의 고통을 없애줄 것이라는 기대와 믿음이 깔려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불교의 경전에는 천주교의 교리에 보이는 최후의 심판(‘공심판’)과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사후세계에 관한 교리적 설명은 천주교와 비슷한 일면이 있다. 불교와 도교에서도 지옥과 극락에 해당하는 개념이 사용되고 있는데, 거기에도 생전의 행위에 따른 심판의 개념이 존재한다. 이미 고대부터 동아시아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한 종교 가운데는 심판, 극락, 지옥, 종교적 이상세계 등 천주교와 유사한 여러 가지 종교적 개념이 존재했다. 이러한 유사성은 천주교가 동아시아 문화권에 전파되는 데 유리한 요소로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엄격하게 말해, 천주교의 말세관은 불교나 도교와는 달랐다. 천주교에서는 산자와 죽은 자 모두를 대상으로 최후의 심판이 따로 존재한다고 가르쳤다. 천주교의 기본교리를 압축한 〈사도신경〉에는 ‘산 자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실 주님’의 모습이 보인다. 그 밖의 교리서에도 재림 예수가 지상에 축복을 가져다 주기로 약속되어 있다. 그러므로 말세와 구원에 관한 천주교 교리는 조선의 신자들에게도 당연히 복음 즉, 하늘나라에 관한 복된 소식이었다.

이와 같은 천주교의 말세관과 구원관이 조선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18세기 말, 丁若鍾(1760~1801)의 저술을 통해서였다. 1799년경 그는 《주교요지》라고 하는 최초의 한글판 교리서를 만들었다. 거기에 보면 예수의 부활과 승천 및 최후의 심판이 간단하지만 매우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이 책자는 인기는 대단했던 모양으로 신속하고 광범위하게 전파되었다. 1801년(순조 1)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관헌에 체포되어 순교했는데, 그들 가운데 대부분이 책에 실린 교리를 언급했다.10) 이러한 점으로 보아, 늦어도 19세기 초에는 천주교의 말세론이 조선사회의 일각에 구체적으로 소개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주교요지》가 유행하기 전에는 천주교의 말세론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고 단정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 저자인 정약종만 해도 이 책을 저술하기에 앞서 중국에서 들여온 여러 가지 교리서를 참조하여 말세관이나 구원관을 배웠으며, 중국인 신부 주문모에게 교리를 배우기도 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고대부터 천주교 미사 중에 늘 암송하게 되어 있는 〈사도신경〉에도 최후심판이 명확히 언급되어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천주교 신자라면 누구나 말세와 구원의 교리를 모를 리가 없는 것이다.

당시 조선의 천주교회가 조정의 탄압에 직면하여 지하의 소문화로 존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말세와 구원에 관한 천주교 교리가 신자들만의 전유물이었다고 단정하기란 쉽지 않다. 천주교 측은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항상 전교에 힘쓰고 있었다. 상당히 더딘 속도였지만 교회의 세력은 점차 확장되었다.11) 따라서 그들의 전교활동을 통해 말세관과 구원관을 포함한 교리가 점차 바깥세상에도 알려지게 되었다고 본다. 결과적으로 천주교의 교리는 정감록 소문화 같이 이질적인 집단에도 직접 간접적으로 다소나마 영향을 끼칠 수 있게 되었다.

(2) 말세에 관한 《정감록》의 예언

조선왕조의 미래에 관한 천주교와 정감록 소문화 집단의 기대는 서로 달랐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천주교는 가능하면 조선왕조의 법과 질서라는 기존의 틀 안에서 종교적 자유를 얻으려고 노력했다는 관점이 지배적이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천주교도들에게 말세란 보편적이고 종교적인 의미에서 본 세상의 끝 날이었다.

그러나 천주교 측의 입장을 한마디로 단언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이른바 황사영〈백서〉를 살펴보면, 거기에는 조선을 중국의 속국으로 만들어서라도 신앙의 자유를 얻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 있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둘 때, 조선후기 천주교 신자들의 일부는 조선의 정치적 변화를 강력히 희망했다고 추측된다.

정감록 소문화의 경우 말세에 대한 기대는 의심할 바 없이 명확했다. 그 점은 18~19세기에 유행한 여러 종류의 예언서에 잘 나타나 있다. 당시 조정에서는 예언서의 편찬과 보급을 엄격히 금지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사고비결》을 비롯해 《도선비기》, 《요람》 등 여러 가지 예언서가 범람했다. 문제의 예언서들을 전국적으로 퍼뜨린 장본인은 주로 서북 출신의 술사들이었다. 그들이 소지한 예언서에는 조선왕조가 멸망하기 직전에 여러 가지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 장차 나라가 셋으로 갈라진다거나 바다의 섬에서 진인이 나와 난국을 수습한다는 등의 예언이 여러 예언서에서 되풀이되었다.12)

그런데 바로 그 정감록 소문화 집단이 신앙의 대상으로 삼은 예언서에는 천주교의 말세관을 연상시키는 대목이 여러 군데 발견된다. 일례로, 흔히들 《정감록》의 원본이라고 여기고 있는 《감결》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어 눈길을 끈다.

申年 봄 삼월과 聖歲 가을 팔월에 仁川과 富平 사이에는 밤중에 배 1,000척이 정박하고, 安城과 竹山 사이에 시체가 산처럼 쌓일 것이다. 驪州부터 廣州까지는 인적이 영영 끊어질 것이며, 隨城과 唐城은 피가 흘러 내를 이루리라. 한강 남쪽 백리에 닭 우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사라지고, 인적이 영영 끊어질 것이다.13)

‘신년’이란 원숭이해요, ‘성세’는 태평성세, 즉 眞人으로 불리는 이상적인 군주가 등극할 시기를 뜻하는 것 같다. 19세기의 천주교 신자들 가운데는 이 ‘성세’를 성인인 예수가 태어난 ‘경신년’이라 해석하는 경향도 있었다. 하지만 인용문의 앞뒤 문맥을 살펴볼 때 ‘신년’이라기보다는 그 다음해인 巳年으로 풀이해야 자연스럽기는 하다. 예언서의 똑같은 해를 굳이 같은 줄에서 ‘신년’과 ‘성세’로 달리 표현한 예가 없다. 조선후기에 나온 여러 예언서를 필자가 조사해 보았더니, 진인은 뱀해에 출현하여, 이듬해인 午年 또는 그 다음해인 未年이면 세상의 모든 일이 바로잡힐 것이라고 언급한 것이 있었다.14)

위에 인용한 문제의 예언은 이미 1800년, 전라도의 천주교 신자 柳觀儉(1801년 사망)이 잘 알고 있던 표현이다. 그는 평소 이러한 내용을 친지들에게 들려주면서 장차 서양선박이 조선에 올 징조라고 말했다. 유관검은 주장하기를, 서양선박에는 구멍이 여러 개 뚫린 총이 있어 그것을 한번 쏘면 놀라지 않을 사람이 없다고 했다. 서양인들의 무력시위에도 불구하고 조선이 만일 그들과의 통상을 거부할 경우에는 ‘一場判決’이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15) 일장판결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 지에 대하여는 학자들 간에 약간의 논란이 있지만, 필자는 그러한 표현을 단순한 평화적인 시위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유관검이 하필 ‘시체’와 ‘피’를 예고한 예언서를 인용했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감결》에 보이는 말세의 참극은 천주교 측에서 주장하는, ‘敵그리스도’(Anti-christ)가 등장해 빚어질 대전란을 연상시킨다. 적그리스도는 예수가 지상천국을 실현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악의 화신이다. 알다시피 성경에는 재림 예수가 등장해 적그리스도를 물리치는 것으로 예정되어 있지만, 바로 그 직전까지는 여러 가지 환란이 일어나 무수한 생명이 희생된다고 예언했다. 《감결》에서 “시체가 산처럼 쌓일 것”이라거나, “피가 흘러 내를 이루리라”고 묘사한 것이 곧 이러한 천주교에서의 말세의 정황과 유사하다.16)

그밖에도 조선후기의 예언서에는 말세의 참상이 도처에 언급되어 있다. 여기서 일일이 다 소개할 수는 없어, 하나만 더 살펴보면 《慶州李先生家藏訣》에는 또 이러한 기술이 발견된다.

살아 있는 백성들이 달아나 숨으리니 三綱이 없어져 끊어지겠구나. 하늘의 재앙이 계속하여 혹독할 테니 벌레의 독을 어찌 다 말하리. 부유한 자가 먼저 죽으리니, 뒤늦게 아무리 뉘우쳐도 소용없으리라. 우물의 가운데 물이 이어져 紫微에는 저녁 무지개가 뜨겠구나. 다시 들러 매어 동쪽으로 나뉘리니 나라에 변괴가 생길 것이며 시체가 즐비할 것이다. 남쪽과 북쪽에서 전쟁의 조짐이 불과 같이 점점 일어나 번져올 것이다. 집 위의 土運이 하늘의 재앙에 때로 변하리라. 옛날에도 드물었고 지금 세상에는 아예 없는 일이다. 굶주린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을 것이며 저마다 서로를 짓밟으리라. 사람의 목숨을 마구 해치리니 이러고도 살 사람이 몇이나 될까. 또한 흉년마저 들어 쌓인 시체가 도랑을 메울 것이로다. 벼락같은 火運이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를 것이다. 먼 방향에서 움직여 와서 바람과 구름이 어두우리니 장차 이를 다시 어찌한단 말인가.17)

인용문에서 보듯, 조선왕조 최후의 모습은 아비규환 그 자체로 점쳐지고 있다. 전염병과 흉년 그리고 전란으로 인해 굶주린 이들이 서로 잡아먹고 시체가 도랑을 메울 것이라는 흉측한 예언이 난무했다. 비슷한 맥락이지만 《西溪李先生家藏訣》은 말세의 처참한 상황을 자연재해와 전염병에 말미암은 것으로 기술했다.

9년에 걸친 흉년, 7년 동안의 물난리 그리고 3년간의 疫疾이 닥칠 것이다. 그리하면 열 집 가운데서 겨우 한 집이 살아남게 될 것이다. 이상하도다, 다가올 세상의 재난이여! 전쟁도 난리도 아니로되 가뭄 아니면 물난리요, 흉년이 아니면 돌림병이 문제로다!18)

방금 인용한 《경주이선생가장결》과 《서계이선생가장결》은 조선후기 천주교들의 말세관과 일치한다. 천주교 신자들이 애독한 정약종의 《주교요지》에는 말세의 정황이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세상이 장차 끝날 때에는 천하만국이 서로 싸우고, 서로 죽이며, 흉년이 들고, 나쁜 병이 크게 돌고, 재앙이 무수하여 사람이 많이 죽고, 바다가 뒤끓고, 산이 무너지며, 온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어지러이 흔들리며, 해와 달이 다 그 빛을 잃는다”고 했다.19)

이상에서 살핀 것처럼 정감록 소문화의 토대를 이루었던 각종 예언서에는 조선왕조가 파국을 맞을 때를 말세로 인식했고, 그때 사람들이 겪어야 할 고난이 끔찍하게 나타나 있다. 이런 환란이 다 지난 다음에 찾아오게 예정된 것은 그럼 무엇일까. 계룡산에서 정 씨가 왕이 된다고도 했고,20) 그 “즐거움이 당당하리라”고 예언했다.21) 특히 그 ‘즐거움’에 대하여 말해(임오년)에는 “비가 순하고 바람이 순조로워 곡식이 밭 가운데서 썩을” 정도로 풍성하고, 양해(계미년)에는 “한꺼번에 백 가지 경사가 생기고 노래와 춤이 길에 가득”하다고 예언했다.22) 요컨대 말세에 전란과 흉년과 재앙으로 인해 수많은 인명이 살상된 이후, 새 왕조가 성립되어 먹을 것이 풍족해지고 나라에 온갖 경사스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 정감록 소문화가 신봉한 예언의 골자였다.

이러한 예언 구조는 천주교 교리와도 일맥상통한다. 천주교에서는 장차 재림 예수가 출현해 ‘적그리스도’를 물리치고 최후의 심판을 집행한다고 했고, 그와 더불어 지상낙원이 열리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천주교의 교리에는 정감록 소문화 집단이 신봉한 미래의 태평성세와 유사한 점이 있다. 물론 천주교의 ‘적그리스도’는 일정하지 않아 해석에 따라 그 정체가 상당히 달라진다. 정감록 소문화의 경우에도 이상사회의 실현을 방해하는 적대세력 역시 예언서마다 모습이 일정하지 않다. 어떤 예언서에서는 그것이 ‘청의’와 ‘백의’로 나타나기도 하고, 다른 곳에서는 난리를 일으키는 반역자들, 또는 조선왕조의 마지막 지배자들로 상정되어 있기도 하다.

19세기 말이 되자, 천주교의 말세관은 한국의 신종교의 교리 가운데 더욱 분명한 모습으로 각인되었다. 특히 동학과 증산교가 그러했다. 예컨대 동학의 교조인 최제우는 〈몽중노소문답가〉에서 “십이제국 괴질운수 다시 개벽 아닐런가”라며 탄식했다.23) 짤막한 구절이지만 그가 정감록 소문화의 말세론을 이어 받은 동시에, 천주교의 교리도 수용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여기서 최제우가 전망하는 ‘개벽’은 천주교의 지상천국을 연상시키고 있으며, 그가 언급한 ‘괴질’은 말세의 고통을 상징한다. 사실 동학은 명칭만 가지고 보면 천주교, 즉 서학에 반대하는 것처럼 되어 있지만, 교리 면에서는 꼭 그렇게 대립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권학가〉에서도 최제우는 말세가 되면 ‘삼년괴질’ 또는 ‘연년괴질’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 대목 역시 “3년간의 역질이 닥칠 것”이라는 조선후기의 예언을 떠올리게 한다. 최제우는 〈몽중노소문답가〉에서 《정감록》 등을 빗대어 “괴이한 동국참서”라고 비난하는 듯했지만, 실은 예언서에서 ‘말세’와 ‘괴질’과 같이 중요한 개념을 차용했다.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 사실은 〈몽중노소문답가〉의 서사 구도 자체가 《감결》을 패러디한 것으로 이해된다.24)

말세의 징조를 ‘괴질’에서 찾으려는 경향은 증산교에도 있었다. 교조 강일순은 말세의 징후를 최제우보다 더욱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銅谷秘書〉에 따르면 대개 이런 식으로 되어 있다. 먼저 괴질이 최초로 출현하는 곳은 다름 아닌 전라도 군산과 순창이다. 그 뒤 49일 이내에 이 괴질이 전국 각지를 휩쓴다. 그런 다음, 외국으로 퍼져나가 3년 만에 전 세계를 위기에 빠뜨린다. 이를 고비로, 강일순의 주도 아래 ‘후천세계’가 다시 열린다.25) 강일순의 이와 같은 말세론도 두말할 나위 없이 정감록 소문화 집단과 천주교의 교리를 나름대로 원용한 것이다.

(3) 정감론 소문화의 말세론, 과연 천주교의 영향인가

위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정감록 소문화의 말세론이 하필 천주교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인지를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들의 말세관에 보이는 공통점이 어쩌면 단순한 우연이 아닐까 하는 반론도 제기될 가능성이 있다.

이 문제를 검토함에 있어 우선적으로 살필 점이 있다. 그 하나는 한국의 예언을 역사적으로 검토하여 정감록 소문화가 등장하기 이전, 다시 말해 17세기 이전의 예언서에도 비슷한 말세론이 포함되어 있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필자의 분석 결과, 정감록 소문화의 말세론은 18세기 이 후기에 등장한 새로운 경향이라는 점이 확인된다.26)

따지고 보면, 종래 고대 중국에도 先天이 끝나고 後天이 교대한다는 이른바 ‘선 · 후천 교대설’은 없지는 않았다. 고려 때도 비슷한 내용을 담은 예언이 나타나기는 했다. 하지만 과거의 교대설은 일종의 계기론적 순환론 즉,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변화로 인식되었다. 거기에는 ‘최후의 심판’을 의미하는 각종 환란이나 죄의 일괄적인 청산이라는 심판이 전제되지 않았다.

죄의 청산이나 심판 같은 이를테면 말세의 정화작업이 있고서야 비로소 이상세계가 열린다는 관념은 새로운 것이었다. 그것은 정감록 소문화 집단이 신봉한 예언서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그 뒤 이 개념은 동학과 증산교로 이어졌다. 말하자면, 18세기 이후 새로운 개념으로서 후천관념이 성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새로운 후천 관념은 이미 앞 절에서 간단히 살펴본 종래의 미륵신앙이나 도교의 심판, 지옥, 극락 등의 개념과 완전히 절연된 것은 아니었다. 특히 일반의 주목을 끄는 것은 역시 불교의 미륵신앙이다. 그 가운데서도 미륵불의 상생과 하생을 알리는 경전들이 주목된다. 《미륵상생경》에 따르면, 이미 오래 전부터 도솔천에는 미륵보살이 명상을 하고 있는 중이다. 장차 그는 현세에 내려와 龍華世界를 연다고 하는데, 일종의 종교적 신세계를 가리킨다.

미륵이 펼칠 신세계는 하나의 이상세계다. 그런 점에서 미륵신앙과 정감록 소문화와 적지 않은 연관성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필자 역시 지금까지는 그 입장에 적극 동조해왔다.27) 그런데 이 용화세계란 조선후기의 예언서에 묘사된 각종 환란을 반드시 거쳐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미륵하생경〉에서도 기술되어 있지만 불교적 이상세계를 선도할 미래의 轉輪聖王은 평화적인 방법을 통해 적들의 항복을 받는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정감록 소문화 집단이 애독한 말세의 참담한 풍경은 미륵사상의 정수인 불교 경전과는 일단 구별된다.

다만 중국과 한국의 과거 역사에는 미륵을 빙자한 반란 기도가 여러 차례 있어왔다. 그런 점에서 미륵세상의 도래를 반드시 평화적인 수순에 한정하기는 곤란하지 않는가 하는 반론이 성립될 여지는 남아 있다. 하지만 백보를 양보한다 해도, 위에서 인용한 것처럼 조선후기 예언서에 기술된 미래의 처참한 환란상은 당시 유행한 천주 교리서와 매우 흡사하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요컨대 천주교 소문화는 정감록 소문화의 예언서에 뚜렷한 영향을 끼친 것이다.

끝으로, 정감록 소문화 집단이 일으킨 정치적 사건에서 천주교 교리의 흔적을 찾아보는 작업도 양자의 관계를 점검하는 하나의 수단이 될 법하다. 필자는 1785년(정조 9)에 일어난 역모사건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이 사건의 주모자들은 장차 진인이 나타나 조선왕조를 멸망시킬 것이라며, 그 진인에게는 목숨을 마음대로 좌우할 능력이 있다고 말했다. 당시의 심문 기록을 살펴보면, 이미 진인의 명령에 따라 서 씨와 정 씨 두 사람이 세상 사람들의 잘잘못을 낱낱이 기록해 일종의 善惡籍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진인이고 보면 장차 그는 천주교 교리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과 비슷한 조치를 취할 것으로 예상되는 초월적인 존재였다.

덧붙여 말하면, 정감록 소문화의 영향을 받은 증산교의 경우, 천주교로부터 받은 영향이 더욱 명백하게 나타난다. 증산교 경전인 《도전》을 검토해 보면, 교주 강일순은 조선에서 출생하기 전에 로마 교황청 꼭대기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고 하며, 중국에 마테오 리치를 보내 선교를 하게 만든 장본인이라고도 했다.28) 아울러 그가 장차 건설하게 될 ‘후천’은 인간들이 죄 값을 치른 다음에 온다고 주장했다.

흔히 정감록 소문화라든가 동학 및 증산교 같은 신종교는 조선왕조의 기층문화를 충실히 계승한 것으로만 짐작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만 단정할 일은 아니다. 18세기 이후에 등장한 지하의 여러 소문화 집단들은 이미 조선사회에 뿌리 내리고 있던 천주교라는 외래의 소문화 집단을 주목했고, 크든 작든 그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를 강력히 시사하는 하나의 사례는 정감록 소문화 집단의 사상적 기둥이라 할 여러 예언서 가운데 전염병, 굶주림, 전란과 자연재해 등 말세를 가늠케 하는 징조가 먼저 나타나고, 뒤따라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식의 새로운 예언이 첨가된 사실에서 확인된다.


3. 정감록 소문화가 천주교에 미친 영향

(1) 《니벽젼》, 천주교의 예언서

19세기 후반 천주교 소문화 집단의 일각에는 《李檗先生夢會錄》이란 제목의 필사본 책자가 읽혀졌다. 흔히 이 책은 주인공 이벽의 이름을 따라 《니벽젼》이라고도 일컬어진다. 그 내용 가운데 새 하늘과 새 땅의 시작을 예고하는 대목이 포함되어 있어, 《새벽젼》이라 부르는 경우도 있는데 이본이 여럿이다. 여러 세대, 여러 지역에서 이 책자가 회람되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편의상 이 책자를 《니벽젼》이라 부를 생각이다.

기왕의 연구에서 이 책은 고전소설 또는 종교소설로 이해되어 왔다.29)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이 책은 한 권의 예언서라고 볼 수가 있다. 주인공 이벽을 통해 천주교에서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밝아올 시기를 예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니벽젼》의 등장인물은 두 사람이다. 18세기 조선 천주교회를 이끌었던 이벽(1754~1786)과 가상의 인물 丁學術이 그들인데, 이야기의 시작은 1846년(헌종 12) 6월 14일 밤 天上仙人으로 설정된 이벽이 정학술의 꿈에 나타나는 데서 시작된다. 정학술의 꿈속에서 이벽은 우선 천주교의 주요교리를 설명한다. 예컨대 우주창조의 원리를 비롯해 인류의 조상이 낙원에서 추방된 이유라든가, 장차 예수의 구원이 있게 된다는 등 여러 주제가 제시되고 그에 대한 핵심적인 교리가 하나씩 소개된다. 뿐만 아니라, 이 책에는 기존의 다른 종교에 대한 혹독한 비판이 따른다. 이벽은 유교, 불교 및 도교의 오류를 지적하고, 조상에 대한 제사와 우상숭배가 그릇됨을 역설한다. 이러한 내용에서 유추할 수 있듯, 저자는 소설의 형식을 빌려 천주교 신자가 숙지해야 할 신앙 지식을 차근차근 설명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일종의 교리서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필자의 관점에서 볼 때, 더욱 주목되는 사실은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이다. 주인공 이벽은 화제를 바꿔, 신유박해(1801)와 기해박해(1839)를 예언한다. 말세란 천주교에 대한 박해로 점철되겠지만 결국 머지않아 최후의 심판이 열린다는 예언이다. 작중 인물 이벽은 마침내 진리인 천주교가 승리한다고 선언한다.

병오 이후로 다음 세상이 되어 죄 있는 자는 모두 멸망하며, 착하고 하느님을 공경하는 사람들이 세상을 이어갈 때가 오느니라.

보기에 따라서는 이러한 작중 예언이야말로 《니벽젼》의 핵심적인 메시지로 간주될 만하다. 이처럼 《니벽젼》은 조선후기 천주교 신자들이라면 누구나 염원하던 신교의 자유와 그들이 주인되는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선포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필자로서는 《니벽젼》이 대체 교리서이자 종교소설인 동시에, 한 권의 종교적 예언서라고 말하고 싶다.

이 책의 예언적 성격은 작중에 《天主密驗記》라는 예언서가 등장함으로써 더욱 구체화 된다. 물론 《천주밀험기》라는 예언서가 별도로 존재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렇기는 해도, 작중 인물 이벽이 정학술에게 그 책을 주고 하늘나라로 되돌아갔다는 줄거리는 주목을 끈다. 이는 당시 천주교 소문화권 안에 예언서에 대한 강렬한 희구가 존재했음을 투영한다. 여러 차례 거듭된 천주교 박해사건을 겪으면서 그들 가운데 장래에 펼쳐질 여러 가지 상황을 예언하는 글이 등장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열망이 존재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작중 인물 이벽은 《래세 예언기》라는 또 다른 예언서를 저술한 것으로 기록된 곳도 있다. 그 실물은 아직 발견되지 못했지만, 천주교 소문화 집단이 예언서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 시대적 정황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 점은 박해를 받았던 서양 고대의 초기 교회공동체 역시 마찬가지였다. 예언서 《요한계시록》이 신약성서의 마지막 부분을 장식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런데 하필 이벽이 천주교 소문화 집단 일부에 유행한 문제의 예언서에서 주인공으로 설정된 까닭은 무엇일까. 그리고 이 책자의 맨 끝에 “뎡유 뎡 아오스딩 셔우등셔졍이라”되어 있는 것은 또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지도 궁금하다. 일반적으로 정 아오스딩은 순교자 丁若鍾(1760~1801)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마침 그의 세례명이 아오스딩인 까닭이다. 그런가 하면 정유년은 1777년, 정조 1년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런데 최근의 연구에서는 구한말에 활동한 정규하 신부로 보는 견해도 있다.30)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이 책의 실제 저자라든가 필사된 시기와 장소 역시 정확히 알 수 없다고 생각된다. 그러한 서지 사항들은 이 책을 이해하는 데 별로 중요하지가 않다. 아오스딩이라는 세례명에 현혹되어 필사자를 구한말에 생존한 정규하 신부로 단정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이 책의 작중인물이나 필사자의 이름은 종교적 상징의 하나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조선의 초기 천주교회를 대표하는 인물들을 내세워 익명의 필자와 일부 천주교 신자들이 서로 교감을 나누기 위한 일종의 비밀스런 유희요, 미래에 대한 은밀한 약속으로 해독해야 옳다고 믿는다. 이 예언서의 존재는 하나의 종교적 상징이며 의미부여라는 점에서 필사자로 등장하는 정 아오스딩은 익명의 저자가 정약종의 명성을 빌려 필사본에 권위를 부여한 것으로 해석하는 편이 도리어 자연스럽다. 요컨대, 이벽과 정약종이라는 천주교회 초기의 탁월한 두 인물을 예언자와 필사자로 간주함으로써《니벽젼》은 종교적 의미를 더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18세기 조선 천주교를 대표하는 학자들이었다. 이벽은 정약종 등에게 교리를 전해준 사실로 유명하다. 그는 또 당대의 석학 이가환, 이기양 등과 교리논쟁을 벌여 압도했다고 전한다. 이벽은 교리에 능통해 《聖敎要旨》라는 일종의 교리서를 남긴 것이 사실이다.

이벽이 이해한 천주교는 성리학적 천주교였다. 그는 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 등 유교적 가르침이 천주교의 교리와 일치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가 꿈꾼 지상천국은 유교 경전에 나오는 聖人과 聖君의 정치와 거의 일치했다. 이벽이 추구한 신앙의 목적은 天人合一, 즉 인간본성이 절대자의 의지에 부합되는 세계의 건설이었다. 이처럼 이벽은 초기 조선 천주교회를 대표하는 최고의 신학자였다. 따라서 그가 《니벽젼》의 주인공으로 설정되어 조선 천주교의 미래를 예언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고 풀이된다. 그런데 엄밀한 의미로 이벽은 순교자가 아니었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는 의아한 점이 없지 않다고 하는데, 아마도 가문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가족들이 희생시켰을 가능성도 있다는 견해가 있다.31) 설사 그렇더라도 초기의 천주교 신자들은 이벽의 죽음을 순교나 다름없이 생각했고, 그의 지도력과 신학적 지식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다.32)

그럼 정약종은 누구인가. 간단히 말해, 조선 최초의 본격적인 신학자로 평가될 만한 인물이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그는 《主敎要旨》라는 한글교리서를 저술해 신자들의 교리 이해에 기여했다. 정약전, 정약용의 형제이기도 한 그는, 1795년(정조 19) 청나라의 주문모 신부가 入京하자 직접 교리를 배웠다. 당시 천주교의 전교 조직인 明道會의 책임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1801년(순조 1) 2월 11일 관헌에 체포되었는데, 冊籠에 감춰둔 정약종의 일기 가운데 “나라에는 큰 원수가 있으니 임금이요, 가정에 큰 원수가 있으니 바로 아비다”(國有大仇君也 家有大仇父也)라는 글귀가 발견되어, 임금에 대한 불경죄와 모반죄가 추가되어 참형되었다. 정약종은 조선 천주교의 입장에서 볼 때 가장 탁월한 존재였다.

이쯤에서 다시 정약종과 《니벽젼》의 관계를 정리해 보자. 필사본 《니벽젼》의 내용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이벽이 정학술의 꿈속에 출현한 것은 1846년이다. 그러나 이를 기록한 것은 1777년이 되는 셈이다. 이미 1801년 신유박해로 사망한 정약종이 도저히 기록할 수 없는 꿈 이야기다. 더욱이 작중 인물은 신유박해뿐만 아니라 그 뒤에 일어날 기해박해까지 정확하게 예언하고 있다. 이러한 전후 관계를 가지고 판단할 때, 《니벽젼》의 필사자를 정약종으로 상정할 수는 없다. 물론 이벽이 정학술의 꿈에 나타나 정말로 온갖 예언을 직접 했다고 보기도 곤란하다. 이 모든 것은 익명의 저자가 상상해서 꾸미고 가탁한 것이다.

하필 이 책 필사자를 정약종으로 가탁하기까지는 나름대로 충분한 고려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정약종으로 말하면, 성리학적 지배질서의 중심인 忠孝의 상징인 임금과 아버지를 ‘원수’로 상정한 인물이었다. 더욱이 그는 죽을 때까지 천주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였다.33) 후대의 천주교 소문화 집단에서는 정약종을 뛰어넘을 만한 신앙의 모범을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천주교의 예언서라 할 《니벽젼》의 저자나 독자들은 이 책에 최고의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방편으로 정약종의 이름을 빌렸다. 작중 예언자로 이벽을 선택한 것도 역시 같은 맥락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니벽젼》은 한 권의 문학작품이자 천주교 교리서요, 또한 천주교 소문화 집단의 일각에 유행한 한 권의 예언서였다. 일부 천주교 신자들은 거듭되는 끔찍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천주교 신앙을 버리기는커녕 더욱 신실하기를 바라며 스스로를 고무 · 격려하려고 했다. 


(2) 《니벽젼》과 《정감록》

《니벽젼》은 여러모로 《정감록》을 모방했다. 첫째, 제목부터 닮은꼴이다. 《정감록》의 제목에는 정감이라는 예언가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있고, 《니벽젼》 역시 책의 주인공이 이벽임을 명시했다. 주인공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밝힌 점에서는 《이벽선생몽회록》이라는 원래 제목이 더욱 실감난다. ‘이벽 선생을 꿈속에서 뵌 일을 기록했다’는 것인데, 이는 《정감록》의 별칭인 《鄭李問答》과 유사하다. 즉 ‘정감과 이심이 묻고 대답했다’는 제목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니벽젼》은 신유박해를 비롯해 19세기 전반에 있었던 여러 박해사건을 연대기식으로 적어나간다. 기록방식이 편년체를 따르고 있는 셈이다. 이 점 역시《정감록》과 유사하다. 참고로 말하면, 조선사회에서 편년체 예언이 등장한 것은 대략 18세기부터였다.34)

둘째, 두 책 모두 미래에 일어날 사건을 대화체라는 서술방식을 통해 기술하고 있다. 《정감록》에서는 주인공 정감과 이심이 말세의 여러 가지 사정에 관해 의견을 나눈다. 《니벽젼》도 주인공 이벽이 정학술과 가진 대담을 기록하는 형식을 취한다. 이벽 등은 천주교의 본질과 미래를 논의하는데, 그 미래의 사건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처럼 두 책은 모두 미래에 관한 예언을 대화 형식으로 서술한 것이다.

셋째, 《니벽젼》은 《정감록》과 마찬가지로 말세의 환란을 넘어서면 새 세상이 전개될 것으로 전망한다. 《정감록》은 세속의 예언서인 까닭에 새 왕조의 개창이라고 하는 정치적 변화가 강조되고 있다. 《니벽젼》은 천주교인에 대한 박해를 예언하고 종국적으로는 지상천국이 실현될 것으로 전망한다.

이처럼 《니벽젼》과 《정감록》은 유사점이 적지 않았지만 근본적인 차이점도 있었다. 전자는 천주교라는 특정한 종교에 치중했고, 후자는 조선왕조의 멸망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하지만 더욱 깊이 생각해 보면, 두 책이 예언한 미래가 본질적으로 다르지는 않았다.

이미 제2장에서 살폈듯이, 《정감록》은 단순한 왕조교체가 아니라 이상적인 국가의 도래를 예언했다. 구체적으로, 의식이 풍족하고 온갖 경사가 모두 다 이뤄지는 이상적인 상태를 전망했다. 이런 새 나라는 사소한 정치적 변화만으로는 구현될 수 없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여러 방면에 걸쳐 보다 근본적인 일대변혁이 일어난 뒤라야 가능할 것이다.

《니벽젼》이 전망한 미래의 모습 역시 순수하게 종교적인 측면에서만 바라볼 것은 아니다. 당시 천주교는 조정으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인정받지 못하고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그런 판국에 천주교 신앙이 공인되고 나아가 지상천국이 실현된다고 하면, 그것은 당연히 정치적으로 큰 변화가 일어난 뒤라야 가능할 것이었다. 《니벽젼》의 필사자로 가탁된 정약종이 생전에 조선왕조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상징하는 임금과 아버지를 원수로 규정했다는 사실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얼핏 보기에 《니벽젼》이 신자들에게 제시한 미래상은 종교적 이상향에 국한된 것처럼 생각되지만 실은 암암리에 정치적인 변화를 꿈꾸었던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병오 후로? 내세가 림?여 죄 잇? 자 모두 토멸 당?야 선?고 텬쥬 공경??자 혹 세상을 니어갈 때가 오고 잇?니라 ?드라.

이러한 이벽의 몽중 예언은 결코 예사롭지가 않다. 죄 있는 사람은 모두 죽임을 당하고, 착하고 천주를 믿는 사람이 “세상을 이어 간다”는 예언은 장차 세상이 바뀌어도 근본적으로 바뀐다는 뜻으로 해석되어 무방하다. 그 말 그대로라면 지상천국이 실현된다는 예언으로 볼 수도 있다. 이 경우 천주교를 박해한 조선왕조의 멸망은 언외의 기정사실이 되고 말 것이다.

(3) 《니벽젼》은 천주교의 《정감록》

이상의 논의에서 확인된 것처럼, 19세기 천주교 소문화권 내에서는 《니벽젼》과 같은 일종의 예언서가 저술되어 열람되고 있었다. 이것은 일단 천주교에 대한 대규모 박해사건이 연달아 자칫하면 교단이 멸절될 위기에 빠졌기 때문에, 내부의 안정을 위한 자구책이 등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달리 보면, 정감록 소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했다. 18세기 후반부터 정감록 소문화 집단을 중심으로 한 크고 작은 사건이 간헐적으로 되풀이되었고, 그런 가운데 자연히 다양한 부류의 불만 계층이 그 집단의 사고와 친숙하게 되었다. 더러는 그들이 신봉하는 예언을 이용해 정치질서를 재편하려는 시도까지 한다.

이런 와중에 정감록 소문화의 영향권에 있던 사람들이 천주교에 들어가기도 했다. 김건순과 유항검의 사례는 이미 기왕의 연구를 통해 입증된 경우이다.35) 그들을 비롯한 일부 천주교 신자들은 조선후기에 유행한 예언을 이용하여 신자들을 결속시키고자 했으며, 포교에도 이용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필자는 《니벽젼》이 천주교 소문화 집단 일각에서 유행한 일종의 신앙 비결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기해박해를 고비로 세상이 종말을 맞게 되며, 착한 천주교 신자들이 다스리는 세상이 올 거라는 예언이 주목된다. 이것은 바다의 섬에서 정진인이 나타나 드디어 조선왕조를 무너뜨리고 장차 계룡산에 도읍한다는 《정감록》의 예언과 표현은 달라도 근본적인 취지는 비슷하다.

《니벽젼》이 염원하는 지상천국은 19세기 말 동학이 선포한 ‘後天開闢’과도 일맥상통한다. 동학에서는 장차 새 세상이 열리면 君子들이 지상천국을 다스리게 된다고 보았다. 한 마디로 말해, 정감록 소문화 집단의 영향을 받으면서 천주교와 동학 등 여러 소문화권에서는 그들 나름의 신앙 비결을 만들어냈다고 하겠다.36)


4. 천주교와 《정감록》 ‘청의’

(1) ‘청의’의 정체는 서양인, 천주교 신부


조선후기 지하에서 활동한 정감록과 천주교라는 두 개의 소문화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있었다. 제2장에서는 천주교가 정감록 소문화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검토했고, 제3장에서는 방향을 바꿔 정감록 측이 천주교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았다. 이번 장에서는 그들 두 문화가 지속적으로 상대방에게 영향을 준 지점을 찾아보려고 한다.

여기서 필자가 주목한 것은 조선후기의 예언서에 등장하는 ‘靑衣’, 즉 ‘푸른 옷’이란 존재다. 우선 《道詵秘訣》을 보면, ‘청의’는 미지의 외부인을 가리킨다. “푸른 옷을 입고 남쪽에서 오니 오랑캐도 아니요, 왜적도 아니다”라는 표현에서 보듯,37) 청의는 흔히 오랑캐라고 불리는 청나라 사람도 아니요 일본인, 즉 ‘왜’와도 확연히 구별되는 존재였다. 뿐만 아니라 고대 중국인들이 南蠻이라 불러온 베트남이나 필리핀 사람들과도 구별되는 남방 출신의 이방인이었다. 17세기 이후 중국 및 일본사람들은 무역을 목적으로 동아시아에 진출한 포르투갈과 스페인 상인을 남만에 포함시켰고, 이점은 조선의 지식인들도 잘 알고 있었다. 서양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 관한 조선 지식층의 견해를 가장 잘 정리한 이는 아마도 趙秀三(1762~1849)일 것이다. 그는 1795년(정조 19)에 지은 《外夷竹枝詞》에서 무려 83개국의 이름과 물산 등을 기록하였다.38)

예언서에 등장하는 청의란 남방의 새로운 이방인 즉, 서양인이었다. 역사 기록을 자세히 검토해 보면, 늦어도 이미 18세기 후반부터 그렇게 간주하는 경향이 존재했다. 1787년(정조 11) 음력 6월 14일자 《조선왕조실록》 기사에는 “靑衣가 남쪽에서 오는데 倭人과 비슷하지만 왜인은 아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말은 당시 정감록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조사를 받던 김서달이 세상에 떠도는 소문이라며 조사관들에게 알려준 것이다. 요컨대 늦어도 18세기부터 조선 사람들은 청의라 불리는 미지의 이방인이 침략해 올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본래 청의란 도교의 개념으로, 옥황상제의 시종 따위를 가리킨다. 일종의 종교적인 개념인 것인데, 필자는 우연히 고려 예종 때 郭輿(1058~1130)가 지은 한 편의 시에서 청의에 이러한 뜻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39)

그러나 청의의 개념은 다른 뜻으로 이해되기도 했다. 조선후기에는 한동안 일본군을 상징하는 용어로 이해되었다. 편년체 예언서인 《오백론사》에 그 단서가 있다. “임진년 : 푸른 옷을 입은 큰 도적이 동쪽에서 일어나 산천의 혈기가 물로 변해 쉴 새 없이 흐를 것이다.”40) 두말할 나위 없이 위 구절은 임진왜란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왜란 이후 일본의 재침에 대한 민간의 우려가 적지 않았고, 그와 같은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는 구절이 《남격암산수십승보길지지》에 있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삼남은 다섯 차례나 푸른 옷을 입은 도적의 침입을 받을 것이다. 이 뒤로도 만년 동안이나 전쟁이 그칠 새 없을 것이다.”41)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조선사회에 미친 영향은 컸고, 그 결과 본래는 종교적 의미를 가졌던 청의라는 용어가 외부의 침략자, 구체적으로 말해 일본군으로 둔갑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청의가 깃든 종교적 성격이 완전히 사라지고 만 것은 아니었다. 《無學秘訣》에 이를 유추할 수 있는 단서가 남아 있다. 푸른 옷 입은 인물이 남쪽에서 (쳐들어) 오는데 그들이 “스님 같되 스님은 아니라”는 것이다.42) 만일 스님이 아닌 스님이라면, 이것은 조선역사에서 찾아 볼 수 없던 새로운 종류의 성직자가 바로 청의라는 뜻이 된다. 이런 조건에 해당되는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천주교 신부 또는 서양의 선교사들이다. 조선후기, 남쪽 바다에서 출현할 인물로서 미지의 이방인인 동시에 종교적인 기능을 수행할 사람들은 그들뿐이었다. 여기서 분명해지는 것처럼 정감록 소문화에서는 청의를 서양사람, 나아가서는 서양의 선교사 또는 신부들로 간주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에는 ‘청의’가 서양인으로 정의될 만한 계기가 있었다. 서양 사람들이 탄 무역선 즉, ‘이양선’의 출몰이 그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이양선에 관한 기록을 검색해 보면, 1794년(정조 18) 11월 5일 충청도의 마량진에 이양선이 표착했다고 되어 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조선의 지식인 사회에는 서양인이 탄 ‘이양선’ 또는 ‘대박’(큰 배)이란 존재가 널리 알려져 있었다. 19세기가 되면 이양선의 출몰에 관한 기록이 더욱 빈번해진다. 이런 가운데 정감록 소문화에서는 청의를 통해 낯설기만 한 서양인들이 조선사회에 가져올지도 모르는 변화를 상상했던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서양 배, 즉 이양선의 존재는 이미 17세기부터 조금씩 알려졌다. 1653년(효종 4)에는 네덜란드 사람 하멜이 표류해왔다. 동인도 회사 소속이었던 그는 일행 36명과 함께 상선 스페르웨르를 타고 대만을 거쳐 일본의 나가사키로 항해하던 도중 제주도에 漂着했다. 그들은 이듬해 서울로 압송되어 훈련도감에 편입되었다. 나중에는 전라도 강진에 있는 全羅兵營과 여수의 全羅左水營에 배치되기도 했다. 그러다 1666년(현종 7) 하멜은 동료 7명과 함께 일본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고, 1668년에는 본국으로 돌아가 유명한 《하멜표류기》를 저술했다.43)

하멜의 경우에서 드러나듯이 이미 17세기부터 네덜란드 상인들은 일본의 나가사키를 오가며 무역에 종사했다. 그들은 당시 조선의 배와 비교할 수 없이 큰 거함을 타고 대서양과 인도양을 가로질러 항행을 계속했다. 이들 서양 상인들은 중국과도 통상하였으므로, 조선의 서남해상에는 이따금 서양의 거함이 모습을 드러냈다. 18세기 후반이 되면 그 빈도수는 더욱 커져 웬만한 사람들도 이양선에 관한 소식을 알 정도였다. 실학자 박제가 같은 이도 서양의 거함에 관해 듣고 깜짝 놀랐다 한다.

서양 배 안에는 조선 사람과는 생김새도 다르고, 언어와 습관도 전혀 다른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이런 서양 사람들이야말로 조선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유래를 제대로 알 수 없는 이방인이었다. 얼마나 먼 곳에서 왔는지는 몰라도 초대형 선박을 끌고 서남쪽 바다에 나타나는 신기한 존재였던 것만은 틀림없다. 이러한 서양 배의 출현은 조선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인 동시에 신비로운 존재였다. 그들 서양인은 19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아직은 직접 조선을 직접 침략한 일이 없었다. 따라서 그들 ‘청의’는 예언서에 기록된 것처럼 두려운 존재이면서도 어딘가 신비스러운 대상이었다. 그런 가운데 18세기 후반 조선에 천주교가 전파되어 서양 배의 주인공들이 천주교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결과적으로 청의는 서양 사람 또는 천주교 신부를 의미하게 된 것이다.

(2) 희망의 상징인 남쪽 바다 섬

조선후기에 유행한 예언서에서는 청의의 본거지라고 볼 수 있는 남쪽 바다에 대한 기대가 나타나 있다. 남쪽 바다의 어느 섬에서인가 장차 ‘眞人’ - 또는 ‘聖人’이라고도 했다 - 이 출현해 조선왕조를 무너뜨리고 새 세상을 열 것이라고 했다. 예언서에 나오는 진인은 일종의 구세주로 인식된 것이 틀림없다. 진인은 “세금과 부역을 면제하고”, “태평성대”를 선사할 인물이었다. 영웅의 출현을 알리는 《정감록》 두 대목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병진년 : 바위가 바다 밖으로 나오면 성인이 남쪽에서 나온다. 임금의 수레가 이르면 백성들이 태평성대를 누릴 것이다.44)

계해년 : 진인이 남쪽에서 나오고 도읍을 花山에 정하면 백성이 세금과 부역을 면하고 깃발이 길을 덮을 것이다.45)

《정감록》에는 진인이 청의와 무슨 관계인지를 제대로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앞뒤 문맥을 살펴보면 모종의 깊은 관련이 있어 보인다. 청의든 구세의 영웅으로 설정된 진인이든 그들은 모두 남쪽 바다에서 출현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서다.

본래 한국 역사를 일별해 보면, 세상을 구할 영험한 존재라든가 이상향 같은 것은 하늘에 있는 것으로 상정되었다. 단군, 주몽 및 혁거세는 모두 하느님의 자손이라고 믿어졌다. 또는 금강산, 지리산, 태백산, 오대산과 같은 명산도 이상향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들 지역은 부처와 보살이 상주한다거나 신선이 노닐던 곳이라는 숱한 전설이 아직도 남아있다.

그런데 이런 전통과 무관하게 《정감록》에서는 전혀 뜻밖에도 남쪽 바다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역사상 이렇다 할 주목을 받지 못해온 남해의 섬이 진인의 고향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서양 배가 출몰하는 서남쪽 바다가 경이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이것은 한국문화사에 있어 일대 전환을 의미한다.

《정감록》에서만이 아니라 《허생전》과 같은 소설에서도 남쪽 바다는 새 희망의 근거지로 등장한다. 아마도 섬이 백성을 괴롭히는 기성의 정치권력이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일종의 힘의 공백 공간이라는 점이 작용했을 법하다. 권력의 공백 지대에는 피지배층의 꿈이 무르익을 수 있기 때문이다.46)

현실적으로도 조선후기에는 무인도의 가치가 새롭게 평가되었다. 당시 뭍에서는 이미 쓸 만한 농지의 개발이 거의 끝난 상태였다. 가난한 백성들은 삶의 터전을 무인도에서 찾으려 했다. 한번 그들의 눈길이 바다 쪽으로 쏠리자 수십 개의 무인도가 곧 유인도로 바뀌었다. 이런 가운데 율도국이니 무석국이니 하는 상상의 섬들이 갑자기 인식의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이상향으로 알려졌다.47)

방금 말한 조선후기의 사회 문화적 맥락을 염두에 둘 때만 비로소 “眞人이 남해에서 계룡산으로 나오면 새 왕조가 창업할 줄을 알게 된다”라는 말의 의미를 알 수 있다.48) 남쪽 바다에 무인도가 개척되고 정체 모를 서양의 이상한 배들이 왕래한다는 소식에 접한 조선 사람들은 거기서 진인이 나오리라고 믿게 된 것이었다. 조선후기 정감록 소문화는 이상에서 검토한 국내외의 사회 문화적 변화 속에서 진인과 청의라고 하는 존재를 상상하게 되었다. 이렇게 추정해도 별로 무리가 없을 것이다.

(3) 청의, 무찔러야 할 조선의 적

서양의 거함과 거기 타고 있을 ‘청의’, 즉 서양인에 대해 정감록 일파 이상으로 큰 기대를 걸게 된 사람들이 조선 내에 존재했다. 천주교라는 지하 소문화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정감록》이 창출해낸 ‘청의’에게 원조를 요청할 정도가 되었다. 천주교의 입장에서 보면 ‘청의’란 큰 배를 타고 조선에 찾아와서 신앙의 자유를 얻게 해줄 서양 선교사에 해당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사이에 여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서양에 함대의 파견을 요청했다. 가장 대표적인 존재는 黃嗣永(1775~1801)이었다. 전라도 전주 출신의 柳恒儉(1756~1801)과 충청도 내포 출신 李存昌(1752~1801)도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서양 함대의 도래를 원했다. 조선에 와 있던 중국인 신부 周文謨(1752~1801)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49) 이들 가운데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황사영이었다.

1801년(순조 1) 이른바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黃嗣永은 중국 北京에 있던 알렉산드르 드 구베아(Alexandre de Gouvea) 주교에게 밀서를 보내기로 작정했다. 도중에 발각되어 무위에 그치긴 했지만 내용의 심각성으로 말미암아 사회적으로 커다란 물의를 일으켰다.

편지에서 황사영은 5개 항으로 된 조선교회 재건 방안을 제시했는데, 제5조는 큰 배 수백 척에 도합 5~6만 명의 정예 군사와 대포를 싣고 조선 해안으로 와서 선교를 위한 배라 일컬으며 포교를 공인하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런 내용은 조야를 경악하게 만들었고, 그로 말미암아 천주교는 서양과 내통하여 국운을 위협하는 불순한 집단이라는 관념이 생겨났다.50)

그 뒤 19세기 중반이 되면 실제로 프랑스 함대가 조선을 공격해 온다. 설상가상으로 통상문제를 빌미로 미국 함대도 쳐들어 왔다. 이른바 洋擾가 그것이다. 《정감록》에는 병인양요라고 하는 역사적 현실을 반영하는 구절도 발견된다. “赤虎(병인년) : 이인이 남쪽에서 나오니, 한곳에 소동이 일어난다. 왜인 같으면서도 왜인은 아닌데 화친을 주장한다.”51) 예언서에서 말하는 ‘이인’이란 곧 청의와 같은 것으로, 처음에는 난리를 일으키지만 결국 화약을 맺어 사태가 종결될 것으로 예언되어 있다. 실제로 병인년(1866)에 프랑스는 함대를 보내 강화도를 일시 점령하는 듯 했지만 결국 퇴각했다. 위 인용문은 아마도 병인양요를 겪은 뒤 그 사건을 예언의 형태로 소급해서 기록한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조선사회는 황사영의 帛書 사건을 아직 잊기도 전에 프랑스라는 서구열강이 침략의 장본인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분개하는 분위기였다. 조선후기 예언서에는 이러한 여론이 상당 부분 반영되어 있다. 《土亭家藏訣》에, “푸른 옷과 흰 옷이 서쪽, 남쪽에서 동시에 침략한다. 이때 정씨가 바다 섬에서 군사를 이끌고 나온다”라고 말한 대목이 그러하다.52) ‘정씨’가 청의와 백의를 격퇴할 거라는 예언인데, 여기서 갑자기 등장한 ‘흰 옷’, 즉 백의가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그 역시 청의와 함께 조선을 침략해올 적으로 상정되는 것은 부정하기 힘든 사실이다. 그런데 바로 그런 국가적 위기를 타결할 이가 다른 예언서에서는 진인이라고도 말한53)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바로 그 진인은 조선사회의 미래 운명을 손에 쥔 주인공이다. 그러므로 진인이 외부의 침략자인 청의와 백의를 물리치는 존재로 상정된 것이 《정감록》의 구조상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이쯤에서 다시 백의가 무엇일지를 생각해 보면, 그것은 아마도 서구열강을 가리키는 또 하나의 상징일 것도 같다. 음양오행에서 흰색은 서쪽을 가리킨다. 공교롭게도 《정감록》에 등장하는 백의 역시 서쪽에서 침략하는 존재이다. 요컨대 위 인용문에 나오는 청의와 백의는 각기 남쪽과 서쪽에서 조선을 공격해올 외세이며, 정씨 진인에 의해 격퇴될 존재란 뜻으로 해석된다.

아마도 이러한 해석은 조선후기 정감록 일파 또는 그들이 이룩한 소문화권에서는 일반적인 견해였을 가능성이 있다. 일례로 《경주이선생가장결》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어 참고 된다.

? 장군이 요동의 군사를 거느리고 방씨와 두씨 성을 가진 장수와 힘을 합쳐 왜와 서쪽 남쪽의 오랑캐를 멸하리라. 그들은 청나라를 쫓고 명나라를 도우며, 정씨를 돕고 이씨를 칠 것이라. 이씨는 제주로 들어갔다가 도로 북쪽 땅으로 옮겨 3년 만에 망할 것이다.54)

이 대목은 조선왕조와 청나라의 멸망을 예언한 것으로, 특히 요동 출신 곽 장군의 역할이 강조되어 있다. 곽 장군 등이 일본(왜)은 물론 서쪽과 남쪽의 오랑캐를 정벌하여 정씨 세상이 되게 만든다는 내용이다. 정씨를 새 세상의 주인으로 예언한 점은 위에서 살핀 《토정가장결》과 일맥상통한다. 그와 더불어 서쪽과 남쪽의 오랑캐를 토벌한다고 말한 것도 남쪽과 서쪽에서 쳐들어오는 청의와 백의를 이긴다고 한 것과 마찬가지다.

지금 이 시점에서 필자에게 중요한 것은 두 가지다. 첫째, 예언서에는 청의를 백의와 마찬가지로 격퇴되어야 할 오랑캐, 즉 외부의 침략세력으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19세기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서구열강이었다. 둘째, 서구열강을 무찌를 만한 능력을 가진 정씨 또는 곽 장군의 존재가 흥미롭다. 특히 그들의 출신지 설정이 눈에 들어온다. 본래 17~18세기 이래로 진인 정씨는 남쪽의 섬에서 나오기로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씨의 출신은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나중에 만들어진 예언서에는 곽 장군이라는 새로운 영웅이 등장하고, 그는 한국의 과거 영토 중에서도 최북단인 요동 출신으로 되어 있다.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서구열강의 침략 위협이 커졌고, 그러자 남쪽 섬이며 청의의 위상이 낮아졌다. 인용문은 그러한 사정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상에서 살핀 것처럼 ‘청의’에 관한 정감록 소문화 집단의 입장은 두려움과 호기심에서 출발해 마침내 敵意로 변화되어 갔다. 한때 일부 천주교 신자들은 조선후기 예언서에 청의로 나타나 있는 서구세력의 도움을 통해 신앙의 자유를 쟁취할 뜻을 가졌던 적도 있다. 심지어는 주문모 신부를 ‘해도진인’이라 주장한 경우도 있었다.55) 하지만 19세기 말이 되자 정감록 소문화 집단에서는 ‘청의’를 ‘해도진인’으로 인식하기도 했다. 또는 그와 정반대로 구세의 영웅 곽 장군에 의해 제거되어야 할 대상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이처럼 정감록과 천주교 두 소문화는 시대적 환경이 변화할 때마다 그에 알맞게 상대방에게 영향을 주거나, 아니면 각자의 입장을 수정했다고 볼 수 있다.


5. 정감록과 천주교 소문화는 조선후기 사회문화운동의 중심

이 글은 조선후기의 지하 소문화들 사이에 문화적 교류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부각시키려는 시도였다. 필자는 조선후기 소문화 집단 상호간에 은밀한 형태로나마 문화교류가 상당히 활발했다고 믿고 있다. 아울러 이 같은 문화교류는 특정 개인이 주도한 것으로 보기는 어려우나 당시 사회문화적인 분위기 속에서 은연중에 촉발된 것이라 생각한다.

소문화 간의 교류는 각 집단의 생존을 위한 일종의 전략으로서 사회문화운동의 성격을 가진다. 정감록 소문화 집단은 천주교의 교리를 원용함으로써 말세의 참혹한 모습을 더욱 비참하게 묘사할 수 있었다. 천주교 측에서는 정감록 소문화의 예언기법을 차용해, 조정의 탄압과 박해에 신음하고 있던 신자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을 수도 있었다. 이러한 쌍방향의 문화적 교류를 통해 정감록과 천주교 두 소문화 집단은 각기 그들이 목표로 삼고 있던 바를 끈질기게 추진했다고 판단된다.

구체적으로 말해, 정감록 소문화 집단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대대적인 신종교 운동으로 변모해 갔다. 동학과 증산교의 탄생을 필자는 그 결과로 인식하고 있다. 천주교 소문화 역시 숱한 박해를 견뎌내고 19세기 말 신앙의 자유를 획득한다. 이 과정에는 프랑스를 비롯한 외세가 개입되기는 했다. 하지만 오랜 고난의 역사 속에서 배양된 천주교 소문화의 자체 역량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글에는 당초 기대와는 달리 미흡한 부분이 적지 않다. 우선 조선후기 지하 소문화 집단을 연구한다고 했지만 바로 그런 비밀결사를 특징짓는 정치적 성격과 종교 단체로서의 기능에 관해서는 거의 아무런 언급도 하지 못했다. 연전에 문양해의 《정감록》 역모사건을 분석하면서 종교 지도자의 카리스마가 조직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점을 잠시 깨닫기는 했다. 지도자의 역량이 탁월하면, 전국 각지에 걸쳐 인맥이 형성되고, 신분의 장벽을 뛰어넘어 계층 간의 연합도 가능한 것 같았다. 그러나 소문화 조직의 구성과 운영에 관한 정밀한 연구는 아무래도 미래의 과제로 남을 수밖에 없다.

또 한 가지 미해결의 과제가 있다. 천주교든 정감록 소문화든 지하의 비밀결사라면 어느 조직이나 그에 속한 여러 주체들의 입장이 복잡 다양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소그룹 또는 각 개인이 내심 확신하고 있었을 진실의 다중성에 대해서도 이번 연구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말았다. 가령 소문화 집단으로서 천주교 신자들 가운데는 신앙의 자유를 지상목표로 설정한 교단의 입장이 있었는가 하면,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교단을 이용하려는 신자들도 전혀 없었다고 단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또한 지역적 배경과 신분이 다른 여러 소규모 신앙공동체를 일사분란하게 운영하려는 중앙집권적 의지도 있었겠으나, 독립적이고 분권적이며 배타적인 성향도 천주교 소문화 내부에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앞으로의 연구에서는 소문화 집단 내부에 존재한 다양한 이해관계와 다중적인 정체성을 깊이 있게 구명하고, 그것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절충되고 조율되었는지를 검토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예언과 역사적 현실을 비교 대조하는 작업도 이 글에서는 시도되지 못한 채 지나갔다. 적중한 예언은 사실 예언이라기보다 예언이라는 이름으로 장식된 역사적 기록일 가능성이 크다. 가령 조선후기 예언서에는 말세에 자연재해와 전염병이 창궐한다고 되어 있지만, 그것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예언이라는 이름 아래 기록한 것이다. 예컨대 《조선왕조실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1821년, 1822년, 1858년, 1886년, 그리고 1895년에 콜레라가 유행해 전국적으로 인명피해가 많이 발생했다. 1858년 한 해만도 무려 50만 명이 전염병으로 죽었다. 그런가 하면 1807년에는 서해안 일대에 해일이 발생해 큰 피해가 속출했고, 1815년과 1817년의 대홍수 역시 큰 피해를 남겼다. 이런 여러 가지 자연재해 사례가 말세의 예언으로 둔갑하였을 개연성도 부인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예언이란 현실사회가 겪은 집단적 고통의 한 기록이기도 하다.

만일 이처럼 예언이 집단의 고통과 공포의 기록이라면, 정감록 소문화집단이 중시한 예언기록은 변형된 역사기록으로 볼 수도 있다. 미래의 연구에서 필자는 예언의 역사성에 관해서도 심각한 고민을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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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문화’는 전체 문화와 구별되는 독자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집단에 속한 사람들이 사회를 지배하는 전체 문화로 충족하지 못하는 욕망이나 특수한 기호를 채워주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소문화는 사회를 지배하는 주류 문화에 대립 · 저항하는 대항문화(counter culture)로 기능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대하여는 다음의 책들이 참고된다. Hebdige, Dick, Subculture: The Meaning of Style, Routledge 1979; Negus, Keith, Popular Music in Theory: An Introduction, Wesleyan University Press 1996. 조선시대의 경우 기생 · 깡패 · 무당 등도 일종의 소문화를 향유했다고 볼 수 있다. 소문화는 그 기능상 ‘비주류문화’라고 부를 수 있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이장우 실장이 내게 이런 견해를 제시했다. 하지만 그것은 ‘하위’ 또는 ‘부차적’이라는 수식어와 마찬가지로 대상을 비하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필자는 연구대상이 소집단의 문화라는 점을 강조하는 뜻에서 ‘소문화’라고 명명한다.

2) 지난 수년 동안 필자는 《정감록》을 중요한 소문화 현상으로 이해하여 약간의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백승종, 《정감록 역모 사건의 진실게임》, 푸른 역사, 2006; 백승종, 《한국의 예언문화사》, 푸른 역사, 2006; 백승종, 《예언가 우리 역사를 말하다》, 푸른 역사, 2007 등. 이 가운데 특히 《정감록 역모 사건의 진실게임》은 정감록의 종교 철학적 이념을 토대로 조직된 조선후기 지하조직의 활동을 집중적으로 검토했다. 이 글에서는 조선후기부터 전파된 여러 종류의 정치적 예언서를 《정감록》이라는 명칭으로 통칭한다. 20세기 초부터 《정감록》은 사실상 모든 예언서의 대명사가 되었기 때문에 허다한 예언서의 명칭에서 야기되는 혼란을 줄이기 위해 그렇게 통칭한다. 아울러 이 글에서는 《정감록》을 바탕으로 하나의 소문화를 이룬 집단에 대해서도 ‘정감록 집단’ 또는 ‘정감록 일파’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3) 《정감록》이 한국의 정치적 예언서를 대표하는 하나의 일반 명사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엄밀히 말해 1920년대부터였다. 이 점은 백승종, 《한국의 예언문화사》, 푸른 역사 200, 260쪽에 요약되어 있다.

4) 천주교와 《정감록》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을 것으로 짐작한 것은 조선시대부터였고, 일제시대에는 그에 관한 학문적 연구가 없지 않았다. 노용필과 같은 연구자는 필자와의 토론에서 일제시대의 연구 성과가 중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천주교와 《정감록》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이후로 생각되며, 그 선구자는 조광이었다. 그 뒤에 여러 연구자가 이 대열에 합류했는데, 중요한 연구 성과는 아래 소개하는 것과 같다.
조광, 〈黃嗣永帛書의 社會學的 背景〉, 《史叢…》 21 · 22, 1977, 347~371쪽 및 《조선후기 천주교사 연구》,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8, 161~162쪽; 주명준은 〈천주교의 전라도 전래와 그 수용에 관한 연구-윤지충 유항검의 가계와 전도활동을 중심으로〉, 전북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89, 140~141쪽에서 유항검이 ‘참언’을 포교에 이용했을 가능성을 논의했다. 김진소 역시 〈신유박해 당시 서양선박 청원의 특성〉, 《신유박해와 황사영 백서사건》,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 2003, 127~136쪽에서 《정감록》이 천주교의 포교에 미친 긍정적인 영향을 포괄적으로 논의했다. 수년 전에 발표된 鈴木의 연구는 《정감록》과 천주교의 관계를 더욱 구체적으로 밝혔다. 鈴木信昭, 〈朝鮮後期天主敎思想と〈鄭鑑錄〉》, 《朝鮮史硏究會論文集》 40, 2002, 67~95쪽. 스즈키의 이 논문은 1797년(정조 21)에 일어난 姜彛天과 金健淳의 사건을 자세히 다루었다. 스즈키는 《정감록》에 나오는 ‘해도진인’을 믿은 사람들과 평소 서양선박의 출현에 호기심이 컸던 사람들이 천주교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점을 자세히 논했다. 그런데 강이천과 천주교의 관계를 좀 더 깊이 연구한 이는 박광용이었다. 그는 다른 학자들과는 달리 강이천을 천주교도로 간주하고 그가 천주교를 수용하게 된 이유는 조선중화주의, 북벌론 및 이용후생의 방편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박광용, 〈정조대 천주교회와 重庵 姜彛天의 사상〉, 《민족사와 교회사 - 최석우 신부 수품 50주년 기념 논총》 1, 2000을 참조.

5) 역사상 정감록 소문화는 단일한 조직체 안에서 활동한 적은 없고, 크고 작은 여러 단체에 포섭되어 있었다. 심지어 특정한 조직에 소속되지 않은 경우도 많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정감록 소문화’를 정의하기란 여러모로 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하나의 문화현상 또는 종교현상이었다는 점에서 필자는 이를 소문화라고 일컫는다. 정감록 소문화의 윤곽을 정확히 상정하기가 어렵다는 점은 한국교회사연구소의 조현범 선생과 토론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주제로 부각되었음을 적어둔다.

6) 1601년 중국에서 출판된 교리서 《天主實義》부터 시작하여 이후에 나온 교리서들도 유교와의 관련을 강조했다. 물론 이것은 포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였다.

7) 다양한 〈천주가사〉를 집대성한 자료집도 나와 있다. 하성래, 《천주가사자료집》 (상, 하),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00과 2001.

8) 당시 서적을 많이 소장한 양반 가문에서는 대체로 천주교 관련 서적도 몇 권씩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천주교를 믿어서가 아니라, 새로운 학문인 서학에 대한 관심의 표현이었다. 이 점은 위에 소개한 스즈키(2002), 74쪽(강이천)과 76쪽(김건순)을 보면 짐작된다.

9) 2008년 3월 22일 한국교회사연구소의 월례발표회에서 이 글의 토론자로 나온 종교학자 장석만 선생은 불교와 도교에는 구전으로만 내려오는 것이지만 천주교의 최후심판론과 유사한 것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곰곰 생각해 보니, 그것은 멀리 당나라 때 천주교의 일파인 景敎가 전해진 결과이든가 또는 16세기 이후 중국에 천주교가 들어온 뒤로 여러 종교 단체에 암암리에 어떤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닐까 짐작되기도 한다. 明淸 시기 중국에는 〈寶卷〉이라 불리는 종교관련 문서가 많이 작성되었다. 혹시 그런 문서들 가운데 장석만 선생이 말하는 것과 같이 흥미로운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나 않을까 기대되기도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잘 알 수가 없다.

10) 《주교요지》에 관한 대표적인 연구로는 《韓國思想史學》, 18집, 2002가 있다. 특히 徐鍾泰, 〈丁若鍾의 《주교요지》에 대한 문헌학적 검토〉; 元載淵, 〈丁若鍾 《쥬교요지》와 漢文西學書의 비교연구〉; 韓健, 〈丁若鍾의 神學思想〉; 노용필,〈丁若鍾의 《쥬교요지》와 利類思의 〈主敎要旨〉 비교 연구〉가 있다. 그 밖에 鄭杜熙, 〈정약종의 《주교요지》가 한국 사상사에 미친 영향〉, 《敎會史硏究》 20, 한국교회사연구소, 2004도 있다.

11) 방상근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18~19세기 조선의 천주교도 수는 1~2만 명에 달했다. 특히 1865년에는 2만 3천 명이나 되었다 한다(방상근, 《19세기 중반 한국 천주교사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6, 57쪽).

12) 그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백승종, 〈18~19세기 정치적 예언서의 내용과 그에 대한 당시대인들의 해석〉, 《한국의 예언문화사》, 107~150쪽을 참조할 것.

13) 인용문은 이민수의 번역본을 참고해 필자가 번역한 것이다. 저자 미상, 이민수 역, 《정감록》, 홍신문화사, 2004, 11쪽. 참고로 말하면 강이천과 같은 사람도 18세기 말에 인천과 부평 사이에 난리가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추안급국안》 25, 326쪽).

14) 《삼한삼림비기》에도 救世가 완성되는 해를 午年으로 보아 때가 되면 해당 예언서가 사라진다고 보았다(《정감록》, 59쪽).

15) 그것이 평화적 시위라는 점은 주명준의 박사논문 143쪽 참조. 그밖에 고을희의 석사논문은 정조대의 서양 선박 영입이 순전히 평화적인 선교 목적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고을희, 〈정조대 윤유일의 서양 선교사와 양박 영입 시도〉, 서강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2, 30~54쪽). 이 논문은 고을희, 〈정조대 서양선교사와 양박 영입시도〉, 《교회사연구》 25, 2005, 263~315쪽에 게재되었다.

16) 한국교회사연구소의 방상근 선생에 따르면, 신유박해 때 순교한 신자들의 교리 지식은 지옥 천당설이 주를 이루었고, 최후의 심판에 관한 언급은 사실상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귀중한 연구 결과를 알려준 데 대하여 감사드린다. 그런데 필자가 짐작하기로, 당시 신자들의 교리지식은 官憲에 붙들려가 진술한 것 이상이었을 것이다. 최후심판이라든가 재림예수에 관한 교리를 모를 리 없는 오늘날의 신자들도 ‘왜 예수를 믿느냐?’는 질문이 나오면 ‘심판’이나 ‘재림’ 때문이라고 대답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어떤 상황에서 질문이 주어지느냐에 따라 대답의 내용이 달라질 것은 당연한 이치다.

17) 《정감록》, 198~199쪽.
18) 《정감록》, 146쪽.
19) 정약종, 《주교요지》, 성 황석두 루가서원, 1986, 81~82쪽.

20) 같은 책, 58쪽에 “(나라를) 奠邑인 외성에게 빼앗길 것이다”라고 했다. 수도가 계룡산이라는 점은 같은 책, 99쪽을 볼 것.

21) 같은 책, 79쪽.
22) 말해와 양해의 이러한 운수는 《정감록》, 87쪽.

23) 최제우의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는 천도교 홈페이지에서 검색이 가능하다. http://
www.chondogyo.or.kr/

24) 동학과 조선후기 예언서의 관계는 차후 별도의 논문에서 더욱 소상히 밝힐 예정이다.

25) 이런 내용은〈동곡비서〉에 나온다. 그 출처는 다음과 같다. http://www.yongdam.net/data/sacred_book/donggokbiseo/dong_main.htm

26) 필자가 이미 검토한 한국의 예언서는 《한국의 예언문화사 연구》, 34쪽에 언급된 21종
을 말한다.

27) 이 점은 필자의 《한국의 예언문화사 연구》, 261~306쪽을 참조할 것.

28) 이미 17세기부터 조선의 지식인들은 마테오 리치의 활동에 주목했다. 그들은 리치를 비롯한 서양 선교사들이 큰 배에 각종 보물과 과학 기구를 싣고 천하를 두루 다니면서 선교에 종사한다고 믿었다(고을희, 같은 논문, 34쪽, 주 85).

29) 예외가 있다면 《니벽전》을 토대로 천주교 역사의 일단을 밝히려고 한 윤민구의 논저일 것이다. 윤민구, 〈니벽전 연구〉, 《논문집》, 수원가톨릭대학교, 1989; 윤민구, 《한국천주교회의 기원》, 국학자료원, 2002. 특히 〈제6장 《만천유고》와 《니벽젼》에 나오는 강학관련 내용과 그 비판〉의 제2절에 해당하는 《니벽젼》이 참고 된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니벽전》을 천주교의 예언서로 본 연구는 경우는 없는 것 같다.

30) 조연숙, 〈류한당언행실록연구〉, 《아시아여성연구》 44, 숙명여대아시아여성연구소, 2005, 365~395쪽과 김영수, 〈한국 가톨릭 전승의 형상화 방식 - 이벽과 〈여니벽선?몽?록〉을 중심으로〉, 《교회사학》 4, 수원교회사연구소, 2007, 43쪽.

31) 이벽의 죽음에 대해 논의한 논문으로는 서종태와 최선혜 등이 있다. 서종태, 〈이벽, 이승훈, 권철신의 순교여부에 대한 검토〉, 《한국천주교회 창설주역과 천주신앙》, 수원교구 평신도사도직협의회 및 청주교구 양업교회사연구회, 2002, 52~53쪽; 최선혜, 〈조선후기 가장의 천주교인 박해와 인간관의 변화〉, 《교회사연구》 25, 2005, 330쪽.

32) 이벽의 천주교 이해에 관해서는 다음 논저를 참조하라. 金玉姬, 〈西學의 受容과 그 意識構造-李蘗의 聖敎要旨를 中心으로〉, 서울대학교 석사논문, 1972; 이성배, 〈광암 이벽과 그리스도교 사상의 철학관 Ⅰ: 이벽이 수용한 그리스도교의 철학적 바탕〉, 《東洋哲學硏究》 27, 2001; 이경원, 〈포천지역 종교인물탐구 - 광암 이벽의 생애와 사상〉 1, 《인문학연구》 1, 대진대학교, 2006.

33) 정약종에 관하여는 많은 논저가 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아래의 글이 참고된다. 車基眞, 〈丁若鏞의 교회 활동과 신앙〉, 《교회사연구》 15, 2000; 徐鍾泰, 〈丁若鍾의 《주교요지》에 대한 문헌학적 검토〉; 元載淵, 위의 논문; 송석준, 〈정약종과 유학사상〉, 《韓國思想史學》 18, 2002; 趙珖, 〈丁若鍾과 初期 天主敎會〉, 《韓國思想史學》 8, 2002; 주명준, 〈丁若鍾家門의 天主敎信仰實踐〉, 《韓國思想史學》 18, 2002; 韓健, 〈丁若鍾의 神學思想〉, 《韓國思想史學》 18, 2002; 노용필, 위의 논문; 鄭杜熙, 위의 논문; 조한건, 〈≪쥬교요지≫와 漢譯西學書와의 관계〉, 《敎會史硏究》 26, 2006.

34) 이 점은 백승종, 《한국의 예언문화사》, 150쪽을 참조할 것.
35) 이 점에 있어 특히 주명준(1989), 스즈키(2002) 및 김진소(2003) 등이 참고 된다.

36) 김영수는 앞에서 인용한 논문에서 《니벽젼》이 자연재해, 기상이변, 전쟁 등 세계의 종말과 심판의 징조를 알리고 있는 데다가 예수의 재림을 예언한 점에서 “여타의 비기류와 변별성을 지닌다”라고 했다(52쪽). 그러나 이 논문의 제1장에서 밝힌 것처럼 《정감록》에는 종말의 징조와 심판의 징조가 없지 않다. 한편, 김영수는 《니벽젼》을 “가톨릭의 《정감록》적 표현”(51쪽)이라고 했는데, 그 점은 필자와 같은 의견이다. 다만 그는 《니벽젼》과 《정감록》의 상호관계를 구체적으로 검토하지는 않았다. 김영수의 논문을 전해 준 방상근 선생에게 감사한다.

37) 《정감록》, 99쪽.

38) 신하윤,〈18세기 문인의 세계 인식과 문학적 형상화 - 추재의 《외이죽지사》를 중심으로〉, 《조선후기 지식인의 일상과 문화》,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07, 205~209쪽.

39) 곽여의 시에는 “나무 아래 靑衣童子 알리는 말, 옥황상제님이 인간에 오셨다고. 鰲宮이 모두 적막한데 龍馭가 짐짓 배회하셨네”라는 구절이 있어 청의동자의 역할을 추측하게 한다. 그 원문은 《신증동국여지승람》 권5, 개성부(하)를 참조할 것.

40) 《정감록》, 84쪽.
41) 《정감록》, 115쪽.

42) 같은 책, 79쪽. “스님 같되 스님은 아니다”라는 표현에 대해 한국교회사연구소의 조현범 선생은 “승도 아니고 속도 아니다”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겠다고 했다. 탁견이라 생각되지만, 이것은 지금 필자가 시도하는 일종의 가설을 입증하는 데 장애가 되므로 쫓지 않는다. 이 논문은 구체적 사실에 대한 정밀한 검증 작업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대담한 가설을 세워놓고 그 가능성을 타진하는 데 불과하다. 비판적인 의견을 많이 제시해준 조 선생에게 감사드린다.

43) 하멜의 표류사건과 일본 천주교회의 관계를 다룬 논문이 있어 참고된다(손승철, 〈17세기 耶蘇宗門에 대한 朝鮮의 인식과 대응〉, 《史學硏究》 58 · 59, 1999).

44) 《정감록》, 87쪽.
45) 같은 책, 같은 쪽.

46) 조선후기에 무인도가 이상향으로 인식되었다는 점을 지적한 글로는 정석종의 〈朝鮮後期 理想鄕 追求傾向과 三峰島 - 燕巖 《許生傳》의 邊…山群盜와 無人島 實在性 여부와 관련하여〉, 《碧史李佑成敎授定年退職紀念論叢… 民族史의 展開와 그 文化》 하, 1990, 51~95쪽.

47) 율도국과 무석국에 대한 간단한 설명은 다음 논문을 참조할 것. 白承鍾, 〈18~19세기 《정감록》을 비롯한 각종 예언서의 내용과 그에 대한 당시대인들의 해석〉, 《震檀學報》 88, 1999.

48) 이런 내용은 《정감록》의 일부인 〈징비록〉에 실려 있다. 원문은 아래의 웹사이트에서 확인된다. http://www.cosdev.net/ak/chingbi.htm

49) 주명준, 〈天主敎 信徒들의 西洋船舶請願〉, 《敎會史硏究》 3, 1981; 주명준 · 유병기, 〈忠淸道의 天主敎 傳來 - 李存昌의 活動을 中心으로〉, 《崔奭祐神父 華甲紀念 韓國敎會史論叢…》, 1982; 한건, 〈正祖代 周文謨 神父의 西洋船舶 迎入 試圖〉, 서강대학교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1998; 鈴木信昭, 〈一八世紀末朝鮮天主敎信徒の西洋船舶要請計劃 - 信徒らの西洋觀と關聯して〉, 《朝鮮學報》 171, 1999. 특히 스즈키의 논문은 서양배를 요청한 것이 신앙의 자유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서구문명을 받아들여 이상사회를 만들고자 한 염원의 표현이라 본 점에서 흥미롭다(스즈키, 앞의 논문, 28쪽).

50) 황사영의 편지에 관해서는 특히 다음의 여러 논문을 참조할 것. 趙珖, 〈黃嗣永帛書의 社會思想的 背景〉, 《史叢…》 21 · 22, 1977; 이원순, 〈黃嗣永帛書의 問題〉, 《敎會와 歷史》 182, 1990; 박현모, 〈세도정치기 조선 지식인의 정체성 위기 - 《황사영백서》를 중심으로〉, 《東方學志》 123, 2004.

51) 《정감록》, 144쪽.

52) 같은 책, 127쪽.
53) 鄭氏海島眞人說의 유래와 변천에 관하여 필자는 별도의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54) 《정감록》, 199쪽.

55) 그 점은 鈴木信昭, 〈朝鮮後期天主敎思想と《鄭鑑錄》〉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필자의 〈‘정감록’은 조선후기 한국에 전파된 천주교와도 만났다?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2회〉(《서울신문》, 2005. 6. 9)도 참조.

[교회사 연구 제30집, 2008년 6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백승종(경희대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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