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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광복 70년 분단 70년1: 해방 그리고 천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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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6-01 ㅣ No.701

[사진 속 역사의 현장, 광복 70년 분단 70년] (1) 해방 그리고 천주교회


광복은 분단으로 이어지고 북녘 교회는 어둠 속으로

 

 

광복은 분단으로 이어졌다. 미군과 소련군의 진주로 얻어진 해방이었기 때문이다. 광복군은 한반도에 진주하지 못했고, 우리나라는 승전국 탁자에 앉지 못했다. 그래서 광복 70주년은 동시에 분단 70주년이다. 그 일흔 해는 기쁨과 희망, 슬픔과 절망이 교차한 ‘영광의 시대이자 비극의 시대’였다. 그럼에도 광복한 터전에서 겨레가 쓴 역사는 새로운 미래의 기억이 되고, 역사의 거울로서 자리한다. “기억과 희망의 지킴이가 되고 증언자가 되라”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을 곱씹으며 광복 70년, 분단 70주년 기획, ‘사진 속 역사의 현장’ 연재를 시작한다.



새 하늘, 새 땅이 열렸다. 서울엔 ‘축 선방’, 곧 조선의 해방을 축하하는 현수막이 내걸리고, 민중은 미군을 환영하는 깃발을 들고 기쁨에 차 걷고 있다. 출처=「건국ㆍ외교ㆍ민주의 선구자 장면」(분도출판사 펴냄)


1945년 8월 15일. 교회 전례력으로는 성모 승천 대축일. 해방된 서울, 곳곳엔 ‘축 선방(祝 鮮放)’, 곧 조선의 해방을 자축하는 한자 현수막이 내걸렸다. 미군을 환영하는 인파는 ‘웰컴(Welcome)’이라고 쓴 깃발을 들고 거리 곳곳을 누볐다. 조선은 ‘34년 11개월 17일’의 일제 강점에서 벗어난 기쁨을 만끽했다. 그야말로 ‘새 하늘, 새 땅’이었다. 민족에게도, 교회에게도 그날은 해방의 날이었다.

당시 서울대목구장 노기남 주교는 해방 이튿날 고유(告喩)를 발표한다. 하느님 백성을 깨우치고 알리려는 취지로 발표한 일종의 사목교서였다.

“…경솔한 언어와 행동을 삼가 피하여 극력 자중하는 동시 새로운 우리의 정당한 정부가 조선 내에 자리를 잡고 모든 정무를 완전히 인수할 때까지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기 위하여 천주 성신의 총광을 비는 뜻으로 매일 기구드리기를 명하노라.”

한반도의 주권 회복을 기원하는 기도로 막을 올린 해방 공간은 좌ㆍ우익의 갈등으로 얼룩졌다. 한반도에 단일 정부를 수립하려던 ‘미소공동위원회’가 무산되고 남북에 각각 단독정부가 수립되면서 양분되고 말았다. 북한은 좌익, 남한은 우익이 정치 세력의 주도권을 잡았다. 오스트리아(4개국 분할)나 옛서독(3개국 분할, 동독까지 합치면 4개국 분할)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분할 점령이 꼭 분단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남북이 분단됐다는 것은 외세와 함께 분단된 한반도 정치 세력 간 갈라섬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광복과 함께 분단된 한반도의 북녘에선 공산당이 서울·평양·함흥(덕원면속구 포함)·춘천대목구 등 4개 대목구 관할 본당 39곳과 공소 279곳, 교육기관 52개소, 사회의료복지기관 22개소를 모두 몰수하고 교회 박해를 본격화했다. 한국 교회에 속해 있던 연길대목구 또한 1945년 공산당에 의해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잡혀가 인민재판을 받고 총살당하는 비극이 벌어진다.

반면 남녘 교회에선 미 군정과 우호적 관계를 맺으며 반공 노선을 걸었다. 노 주교는 1945년 9월 9일 서울대목구 명동대성당에서 미국 뉴욕대교구장이자 미군 군종단장인 스펠만 대주교와 미군 장병, 조선인 사제들과 신자들이 함께한 가운데 한미 친선미사를 봉헌했고, 9월 26일엔 미군 서울 입성 환영행사를 거행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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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9월 26일, 미군 서울 입성 환영회에 참석한 노기남 주교와 장면 박사. 출처=노기남(한국교회사연구소 펴냄)


미 군정 사령관인 24군단장 존 리드 하지 중장 역시 교회를 통해 많은 양의 원조 물자를 제공하면서 교회가 사회복지활동을 강화하는 기반을 마련하도록 도왔다. 하지 중장은 나아가 자신의 정치 고문을 노 주교에게 보내 남한의 지도급 인사 명단을 작성해달라고 요청했고, 노 주교는 이에 응해 김구와 송진우, 김성수, 장덕수 등 60명을 적은 명단을 작성해 보내기도 했다.

다만 이 시기 일본 교회는 물론 한국 교회에 일제 강점시기에 저지른 잘못에 대한 참회가 없었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랬기에 55년의 세월이 더 흘러 2000년 12월 3일에 이뤄진 한국 교회의 참회는 의미가 깊다. 2000년 대희년을 보내며 한국 천주교회는 과거사에 대한 참회 예식을 거행하고 그중 일부로 일제 강점 당시 침략전쟁에 협력하고 독립운동에 앞장선 신자들을 단죄한 잘못을 참회했다. 1947년 독일 교회가 슈투트가르트 선언을 통해 독일 그리스도인들이 나치 침략에 동원돼 주변국의 여러 형제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겸허하게 사과하고 용서를 청한 것과 같은 의미였다. [평화신문, 2015년 5월 10일, 오세택 기자]



“남북이 서로 용서하고 ... 화해하기 바랄 뿐”


김상진 신부가 전하는 해방 당시 기억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김상진(스테파노) 신부는 해방 당시 5세였다. 어렴풋이 기억은 나지만 선명하지는 않다. 당시 그의 집은 서울시 중구 입정동 223번지. 외가 또한 입정동 221번지로, 바로 뒷집인 데다가 외할아버지(정남규 요한 세례자)가 명동본당 총회장이어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명동성당에서 주로 놀았다.

“노기남 주교님 방에 놀러 가 심부름도 하고 사탕도 얻어먹었는데, 다 외할아버지와 아버지(김경훈 아마토), 어머니(정은준 로사) 덕이었죠. 좌ㆍ우익 갈등으로 혼란스러웠다고는 하지만 저희야 그런 건 몰랐지요. 해방되고 나서 우리말을 공부하던 기억은 납니다. 교회는 당시 계성초등학교나 동성중ㆍ고등학교 등을 통해 교육을, 보육원이나 양로원 같은 시설을 통해 사회복지활동을 했는데, 일상은 평범했어요. 민족의 파탄을 불러온 건 6ㆍ25전쟁이었지요. 이전엔 평온했어요. 일제강점기보다 교회도 안정을 얻었지요. 사회도 미 군정의 영향을 받아 행정적으로 민주화됐고요.”

김 신부는 특히 1906년 1월 대한제국 당시 탁지부(오늘날 기획재정부)에 들어가 일제강점기 때 관료로 살다가 1924년 서울대목구의 ‘경성구 천주교회 유지재단’을 설립했고 이후 명동본당 총회장으로 봉사의 삶을 산 외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되살렸다.

김 신부는 “외할아버지께선 6ㆍ25전쟁 중이던 1950년 9월 16일에 정치보위부원들에 의해 납북돼 행방불명됐는데, 이게 다 해방 이후 분단과 그 갈등 때문에 빚어진 비극이었다”며 “얼마 전 근ㆍ현대 신앙의 증인 80위와 함께 하느님의 종에 선정돼 시복이 추진 중이어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김 신부는 또 “제가 20년 넘게 가톨릭국제의료협력단과 함께 라ㆍ선가톨릭병원 설립과 운영에 함께하는 것도 명동본당 총회장으로 봉사하시면서도 양로원 ‘애긍회’를 설립 운영하신 외할아버지의 삶에서 영향을 받은 것 같다”며 “분단 70년인데,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온 겨레가 서로 용서하고 남북이 화해하기를 바랄 뿐”이라고 기원했다. [평화신문, 2015년 5월 10일, 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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