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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광복 70년 분단 70년2: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분단 고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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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6-01 ㅣ No.702

[사진 속 역사의 현장 광복 70년 분단 70년] (2)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분단 고착화


유엔 승인의 기쁨 뒤에는 장면의 땀과 신앙이 있었다



-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선포됐다. 세 달 뒤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로 승인되는 단초였고, 유엔의 승인은 6ㆍ25전쟁 중 유엔군 파병의 근거가 된다. 출처=「건국ㆍ외교ㆍ민주의 선구자 장면」(분도출판사 펴냄)


1948년 8월 15일. 일제 강점에서 해방된 지 3년 만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세계만방에 선포됐다.

지금은 헐렸지만 옛 조선총독부 건물, 곧 중앙청에 태극기가, 그 위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 국민 축하식’이라고 쓴 대형 현수막이 내걸렸다. 단 위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이시영 부통령 등 정부 요인들이 자리를 잡았고, 그 앞에는 각계 인사들이 앉았다. ‘감격의 날’이었다. 일제의 핍박과 강제 동원을 견디며 ‘광복의 날’을 기다렸던 온 겨레의 ‘축제의 날’이었다. 동시에 분단의 비극이 굳어진 날이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공표된 지 19일 만인 9월 3일 북한에 이른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이 선포된 것이다.

당시 대한민국의 정부 수립에 거는 교회의 기대는 조국 재건과 반공을 통해 남북 통일의 토대를 놓는 것이었다. 이 같은 취지는 5ㆍ10 총선거를 앞두고 서울대목구에서 발행된 「가톨릭청년」 1948년 5월호에 잘 드러나 있다. “조국 재건과 반공은 가톨릭 신자의 행동 목표가 아니 될 수 없는 것이다.… 나의 한 표로 남북을 통일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놓고, 무신 공산주의를 구축(驅逐)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어 놓자.”

이에 앞서 유엔은 1947년 11월 제2차 총회의 결정으로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을 구성, 이듬해 3월 31일 이전에 한반도에서 실시될 선거를 감시하고, 이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표들이 국민정부를 구성한다는 결정을 했다. 그러나 소련 측의 완강한 거부로 북한까지 포함한 자유 선거 실시는 불가능하게 됐다. 소련 측이 38선 이북의 입국을 거부하자 유엔은 다시 총회를 열어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의 총선거’를 가결했고, 이남에서만 5ㆍ10 총선거가 이뤄진다. 이어 7월 12일 제헌국회에서 헌법이 채택됐고,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시영이 각각 선출됐으며, 그해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이뤄진 것이다.

이렇게 분단은 굳어졌고, 현실적으로 한반도에는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섰다. 그랬기에 국제적 승인 여부가 신생 대한민국의 생존을 위한 관건이 됐다. 신생 대한민국은 수석 대표로 장면(요한) 박사, 차석 대표로 장기영, 고문으로 조병옥을 각각 임명하고 모두 9명으로 구성된 대표단을 제3차 유엔 총회에 파견했다.

제3차 유엔 총회 한국 측 수석대표인 장면 박사가 각국 대표들을 상대로 대한민국 승인에 표를 던져줄 것을 설득하고 있다. 출처=「건국ㆍ외교ㆍ민주의 선구자 장면」(분도출판사 펴냄)


대표단은 활동에 앞서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이준 열사 묘역을 참배하고 반드시 승인을 받아내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또한, 독실한 가톨릭 신자답게 장면 박사는 날마다 파리 성 요셉성당을 찾아 새벽기도를 드리고 미사에 참례했다. 대표단 또한 ‘발이 닳도록’ 각국 대표단을 찾아다니며 승인을 호소했다.

1948년 12월 12일 프랑스 파리 샤이요 궁. 마침내 운명의 날이 다가왔다. 총회 마지막 날인 그날따라 파리엔 장대비가 쏟아졌다. 비를 털어내며 제3차 유엔 총회장에 들어간 장면 박사를 비롯한 한국대표단 한 사람, 한 사람의 입은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드디어 표결이 이뤄지고 투표 결과가 공표됐다. ‘찬성 48표, 반대 6표, 기권 1표’. 회원국 58개국 가운데 세 나라가 불참한 가운데 이뤄진 표결에서 대한민국은 국제 사회의 승인을 받았다. 반면 북한에 대한 정부 승인 표결은 ‘승인 6표, 반대 48표, 기권 1표’로 부결됐다.

이로써 정부 수립 4개월 만에 대한민국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을 받았다. 그 이면에는 물론 중국 공산화 이후 동북아에서 공산권의 세력 확산을 막고 현상을 유지하고자 했던 미국의 지원, 더불어 공산주의에 반대했던 바티칸의 ‘보이지 않는 손’도 작용했다. 특히 비오 12세 교황은 교황청 국무장관 몬티니 대주교와 주 프랑스 교황대사 론칼리 대주교에게 한국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을 지시했고, 이에 앞서 1947년엔 당시 일본에 체류 중이던 전 평양교구장 번 주교를 교황사절로 한국에 파견, 국제 사회에서 최초로 한국을 외교적으로 승인하는 등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운도 따랐다. 장 수석 대표는 당시 서울대교구 혜화동본당 주임 생제 신부와 함께 파리 근처 성지를 순례했는데, 순례 중 우연히 만난 호주 시드니대교구 부교구장 오브라이언 주교의 도움으로 당시 총회 의장이던 호주 대표 에바트를 설득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이처럼 신생 대한민국의 국제적 승인을 얻어냄으로써 장면 박사는 일약 건국의 일등공신으로 떠올랐다. [평화신문, 2015년 5월 31일, 오세택 기자]



“장면 박사, 정부 수립에... 결정적 역할 했다”


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대한민국 단독정부 수립은 ‘반쪽이나마’ 한반도에서 자유 민주주의를 이룬 기반이 됐습니다.”

허동현(스테파노,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의미를 높이 평가했다. 일부 수정주의 사관은 미국을 38선을 그은 주범으로 지목하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분단을 고착화한 계기로 봤지만, 1945년 9월 런던 외상회의 등 냉전 시기 한반도 관련 구소련 문서가 공개되면서 실은 소련이 38선을 그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분단됐어야 할 일본의 죗값을 우리나라가 대신 치른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덧붙였다.

허 교수는 또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훗날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라는 유엔 총회에서의 승인과 6ㆍ25전쟁 중 유엔군 파병, 민주화의 꿈을 이루게 해준 ‘희망의 기억’이 됐다”고 말했다.

“당시의 국제사적 시각에서 보면 소련과 중국의 이해가 걸려 있었기에 한반도의 통합은 불가능했습니다. 최근 공개된 미ㆍ소 외교문서에서 다 드러난 사실입니다. 이미 통일이 물 건너간 상황이었기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한반도에서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가치를 지킨 든든한 토대가 된 것입니다.”

허 교수는 또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은 장면 박사였다고 전했다. 1948년 12월 유엔 총회에서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는 인정을 받는 데 있어서 미국과 바티칸이 지원을 이끌어 낸 주역이 장면 박사였기 때문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장면 박사가 없었다면 미국과 바티칸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만큼 역할이 컸지요. 광복 이후 가톨릭 신자로는 유일하게 5ㆍ10 총선거에서 당선돼 정계에 진출한 장면 박사는 교황청과 미국의 외교적 지원을 끌어냈고, 유엔이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했기에 6ㆍ25전쟁 때 북한의 침략이 남침으로 규정되고 유엔군의 파병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평화신문, 2015년 5월 31일, 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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