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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마산교구 전사(前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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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1-01 ㅣ No.1549

마산교구 전사(前史) 1

 

 

마산교구 전사(前史) 재수록 - 교구 40주년 기념 특집으로 ‘마산주보’에 게재되었던 마산교구 전사(前史)를 수정하여 ‘가톨릭마산(교구보)’ 2023년 1월 1일 자부터 재수록 합니다.

 

 

조선의 천주교는 신앙의 대상이 아닌 학문으로 먼저 시작되었다.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서학(西學)을 통해 천주교 서적을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학은 중국에서 활약하던 예수회 신부들이 만든 용어다. 그들은 중국 선교를 위해 서구사상과 과학을 소개했고 이 과정에서 과감하게 천주교 이론을 중국 고전에 접목시켰다.

 

이러한 책들은 지식인들에게 인기 있었고 유행처럼 읽혀졌다. 그리고 중국을 오가던 사신을 통해 조선과 일본에도 전해졌다. 17세기 초부터 시작된 이러한 서학 열풍에 주도적 역할을 한 책은 천주실의(天主實義)였다.

 

이 서적은 예수회 소속 중국선교사 마태오 리치(Matteo Ricci, 利馬竇 리마두) 신부의 대표작이다. 상하 두 권으로 되어 있는데 중국인 학자와 서양인 학자가 서로 질문 대답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중국인 학자는 전통 유학의 입장에서 불교 도교를 논하고 서양인 학자는 중국 고전을 인용해 기독교 이론을 해설하고 있다.

 

천주실의에 대한 비판은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 처음 나온다. 그는 유교적 입장에서 상당히 부정적 자세를 취한다. 학자들 사이에 유행되고 있는 것이 불안했던 것이다. 서학을 통해 천주교에 대한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서학을 신앙의 대상으로 발전시킨 사람들은 기호(畿湖)지방 학자들이다. 이들은 1770년대 말부터 경기도 천진암(天眞庵) 인근에서 강학(講學)을 열며 학문연구를 하다 신앙을 깨닫게 된다. 강학이란 공동 주제를 정한 뒤 질문과 답변을 통해 토론하는 것을 말한다. 대표적 인물은 권철신, 권일신, 이가환, 이벽, 이승훈, 정약종, 정약용이었다.

 

강학파 한 사람인 이승훈은 중국 사신의 일행으로 북경으로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예수회 그라몽(Grammont, 梁棟材 량동재) 신부를 만나 1784년 세례성사를 받고 귀국한다. 따라서 이 해를 기점으로 1984년 조선 천주교 전래 200주년 기념대회가 열렸다.

 

이후 조선 천주교는 숱한 박해를 받게 된다. 사대(四大) 박해로 불리는 신유박해(1801), 기해박해(1839), 병오박해(1846), 병인박해(1866)와 비교적 규모가 작았던 신해박해(1791), 을묘박해(1795), 을해박해(1815), 정해박해(1827), 경신박해(1860) 등이다.

 

서울의 박해는 신자들을 지방으로 내몰았고 도시의 박해는 교우들을 산골짜기와 해안가로 내모는 결과를 낳았다. 이렇게 해서 경기지역 천주교는 충청 전라 지역과 경상도 북부지역으로 내려오게 된다. 결국 신자들의 이동은 박해를 피해 안전한 곳으로 숨어들면서 이루어졌고 마지막 귀착지가 경상도 쪽이었다.

 

마산교구가 속한 경상도 서부지역으로 신자들이 넘어오기 시작한 것은 1827년 정해박해 이후로 보고 있다. 전남 곡성에서 시작된 정해박해는 피난 교우들을 지리산과 백운산 덕유산 쪽으로 몰아넣었다. 살길을 찾다 보니 그들은 서부경남 깊숙이 들어왔고 남쪽 바닷가 해안지역까지 내려왔던 것이다.

 

마산교구에 처음으로 교우촌이 등장하기 시작하는 것도 이 무렵으로 추측할 수 있다.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1860년대 초반이다. 병인박해 이전에 마산교구 내에도 교우촌이 있었던 것이다. 당시 기록된 마산교구 교우촌은 다음과 같다. 거제도, 남해도, 통영, 고성황리(黃里), 사천의 배춘(培春), 진주소촌(文山), 칠원, 의령의 신반(新反)이다.

 

 

마산교구 전사(前史) 2

 

 

박해는 신자 확산을 막기 위한 정부 조치였다. 그러나 서울의 박해는 지방 교회 탄생의 원인이 된다. 피난 교우들이 생겨났고 그들이 관의 손길이 없는 곳으로 숨어들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강원 충청 전라 경상 지역으로 신자들이 퍼져나갔다.

 

한편 박해로 인해 귀양 가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그들은 자유의 몸이 아니었지만 유배지에서의 모범적 생활로 포교의 기틀을 만들기도 했다. 또 몇몇 신자들은 귀양 가는 이들을 뒤따라가 숨어지냈는데 이들의 노력으로 유배지에서도 신자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피난 교우들의 삶은 안정적이지 못했다. 더러는 괜찮은 환경을 만나 주저앉기도 했지만 대부분 떠돌아다녀야 했다. 신분 노출이 두려웠던 것이다. 약간의 살림살이를 모으면 지방 사람들의 고발을 걱정해야 했고 관의 추적이 의심되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떠나야 했다.

 

그들이 떠날 때는 언제나 남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유는 추운 겨울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이왕 떠돌아다닐 바에야 따뜻한 곳으로 가자는 것이었다. 그들이 남쪽으로 내려올 때는 대부분 강을 따라 내려왔다. 강가에는 노는 땅이 있었고 물이 있었고 그래도 먹을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경남 지역은 피난 교우들의 마지막 귀착지가 되었다.

 

경상도를 관통하는 강은 낙동강이다. 강원도에서 발원하지만 안동을 거쳐 구미와 왜관을 돌아

대구의 금호강을 흡수한 뒤 경남 창녕 땅으로 흘러든다. 피난 교우들의 흐름도 이와 비슷하다. 경북의 오래된 공소들이 왜관지역에 몰려 있는 것은 그 이유 때문이다. 대구교구 두 번째 본당인 가실본당은 낙동강 교우촌들이 모여 만들어진 본당이다(1894년 설립).

 

마산교구에도 낙동강 유역엔 오래된 교우촌이 있었다. 그중에는 현재까지 남아 있는 곳도 있다. 함안과 진영의 유서 깊은 공소들이다. 기록엔 등장하지만 지금은 없어진 교우촌도 있다. 1890년대 이후 급격히 사라졌다. 이 시기는 일본인들이 조선 땅에 대거 들어올 때다. 당연히 농촌 인구의 도시 유입이 시작되는데 이에 따른 변화가 큰 원인이었다.

 

창녕의 모래 늪, 시렴, 마천, 구개, 환곡 교우촌. 의령의 덕천, 성당, 우곡 교우촌. 함안의 토뫼, 탑실, 산하치, 율량 교우촌. 밀양의 초동, 백산 교우촌들이 여기에 속한다. 그러나 낙동강 근처의 수산, 명례, 생림, 양산의 교우촌들은 확고하게 남아 훗날 본당의 초석이 되었다.

 

교우촌에 관한 가장 오래된 자료는 리델(Ridel, 이복명) 신부가 남긴 기록이다. 1861년 조선에 입국한 그는 전국을 돌며 교우촌 지도를 만들기 시작한다. 원래 이 지도는 김대건 신부가 1845년부터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김 신부의 초본(初本)을 바탕으로 리델 신부가 완성한 셈이다. 이 지도는1866년 병인박해 이전에 있었던 교우촌(공소)을 알려주는 유일한 자료로 알 려져 있다(대구본당 100年史 127면, 대구교구 발행 ‘빛’ 1984년 4월 호 71면 참조).

 

이 지도에 의하면 1860년경 전국엔 153개 교우촌이 있었고 마산교구에 속하는 교우촌은 8개였다. 거제, 남해, 통영, 고성, 사천, 문산, 칠원, 의령이다. 따라서 이 교우촌이 기록상 가장 오래된 마산교구 교우촌인 셈이다.

 

칠원과 의령은 낙동강 인근에 있던 교우촌이다. 원본에는 칠원, 의령이 아니라 교우촌 이름을 적었을 것이다. 그러나 교우촌 이름만으론 어디 땅인지 알 수 없기에 교우촌이 속한 군(郡)을 표시했던 것이다. 지금은 칠원이 함안군에 속하지만 당시엔 칠원이 단독 군이었고 마산 일부도 칠원군에 속해 있었다. 칠원으로 표시된 교우촌은 죽청공소(現 칠북면 운서리). 의령은 덕천공소(現 유곡면 덕천리)로 추정한다. [2023년 1월 1일(가해)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세계 평화의 날) 가톨릭마산 4-5면]

 

 

마산교구 전사(前史) 3

 

 

피난 교우들은 낙동강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왔다고 했다. 경북지방 교우들은 왜관 근처에서 교우촌을 형성했고 이것이 낙산본당 출발이 된다고 했다. 경상도 첫 본당은 왜관 인근에 있던 신나무골본당이다. 로베르(Robert, 김보록) 신부가 초대 본당 신부로 부임하여 경상도 전역을 맡아 활동했다.

 

그가 본당을 왜관 근처인 신나무골로 정한 것은 그 지역에 교우촌이 많았기 때문이다. 낙산본당은 이 신나무골 본당이 옮겨간 것이다. 당시 낙산에는 낙동강 주변 마을은 물론 멀리 부산까지 왕래하는 선박의 선착장이 있었다고 한다.

 

거창과 합천지역도 낙동강 주변의 교우촌과 연관이 있다. 거창의 가북면 가조면에는 1890년대부터 공소가 있었고 합천의 대병면, 쌍백면, 삼가면에도 1900년대를 전후해 공소가 있었다. 낙동강 북쪽에서 내려온 피난 교우들의 흔적인 것이다. 결국 이 공소들은 거창과 합천본당의 한 뿌리를 형성한다.

 

교우촌은 언제부터 형성되기 시작했을까? 신유박해 이전으로 보고 있다. 1790년 북경의 구베아 주교는 조선교회에 사신을 보내 조상에게 제사 지내지 말 것을 명한다. 물론 이 조치는 한순간 내려진 것은 아니다. 80년 가까이 논쟁하며 중국의 선교사들이 반대했지만 교황의 칙서로 명령된 것이다.

 

북경 주교의 명령은 조선교회에 찬물을 끼얹는 결과를 가져왔다. 많은 교우들이 친척은 물론 가족으로부터 따돌림당했고 사사로운 박해를 받기도 했다. 더러는 향촌 마을에서 추방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고향을 떠나 낯선 산간 지방으로 숨어드는 교우들이 나타났던 것이다.

 

이것이 교우촌 형성의 출발이다. 신자들은 자연스럽게 모이게 되었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며 함께 살았다. 이런 상황에서 주문모 신부는 1794년 회장제도를 도입한다. 그렇게 해서 조선교회는 회장(공소 회장)을 중심으로 교회 유지와 발전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큰 교우촌도 있었고 작은 교우촌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들은 모여 살았다. 조선교회는 처음부터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며 살았던 것이다. 조상 제사 금지는 박해의 빌미를 제공했지만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열렬한 신자들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그러다 신유박해를 당한다. 가족을 잃은 교우들이 합세하면서 교우촌은 더 깊은 산골짜기로 숨어들었다. 그래서 초창기 교우촌은 배티, 살티, 한티 등 높은 산골의 명칭을 갖고 있다.

 

신유박해는 정치색 짙은 박해다. 정조가 죽자 그의 개혁 정치에 동조하던 세력도 몰락하게 되는데 이들을 몰락시키는 수단으로 신유박해가 이용되었던 것이다. 당시 개혁 세력 가운데는 영남 사람들이 많았다. 흔히 남인계로 알려진 분들인데 교인들이 더러 있었다.

 

정조 앞의 임금은 영조다. 그는 숙종의 아들로 왕자 때부터 수난이 많았다. 한편 숙종은 죽으면서 경종을 다음 왕으로 선언한다. 경종은 장희빈 아들로 영조와 배다른 형제였다. 그런데 재위 4년에 죽는다. 임금으로 있을 때 몸이 약했던 것이다. 한편 경종이 살아 있을 때부터 영조를 왕으로 앉히려는 세력이 있었다. 사색당파의 노론이다.

 

경종이 죽자 당시 집권 세력(소론)은 영조와 노론이 합심해 경종을 독살했다고 의심했다. 이후 소론 강경파를 대변하던 이인좌는 역모의 난을 일으킨다. 이인좌의 난이다. 그런데 반란에 영남의 남인계열이 합세했다. 당연히 영조는 대노했고 영남지방에 차별정책을 시도했다.

 

경남의 낙동강 주변 교우촌은 이 무렵 자리를 잡는다. 특히 남강과 낙동강이 합쳐지는 함안 대산지역엔 피난 교우들이 많이 모였다. 그들이 괄시와 냉대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은 관의 횡포에 반발하던 민중들의 무관심도 커다란 이유 중 하나였다.

 

 

마산교구 전사(前史) 4

 

 

병오박해는 1846년 일어났다. 김대건 신부 체포를 계기로 일어난 박해다. 그의 신분이 드러나자 놀란 조정에서는 신자 색출의 고삐를 죈다. 이런 와중에 프랑스 군함 세척이 제물포항에 나타나 무력시위를 한다. 조선에서 죽은 프랑스인 세 사람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던 것이다.

 

죽은 프랑스인은 기해박해(1839년) 때 순교한 세 분 성직자였다. 엥베르 주교, 샤스탕 신부, 모방 신부다. 이 사건은 가뜩이나 안 좋던 민심을 더욱 흉흉하게 만들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강공(强攻)으로 나왔고 김대건 신부의 처형을 서둘렀던 것이다. 군함 사건은 6월 하순에 있었고 김대건 신부는 9월 16일 한강 백사장에서 순교했다.

 

병오박해는 프랑스 군함 사건과 맞물려 더 이상 진전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신자들에 대한 감시와 고발은 끊이지 않았고 사사로운 박해는 여전했다. 이렇게 되자 한동안 잠잠하던 피난 교우들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시 조선의 교우는 6,000여 명이었다고 한다. 대부분 서울, 경기지역 교우들이었다. 병오박해를 지켜보면서 이들 중 상당수는 남쪽 지방과 한성 위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리 없는 변화였다. 이러한 이동은 병인박해(1866년)가 일어날 때까지 20년간 지속되었다.

 

병오박해(1846년)에서 병인박해(1866년)까지 20년은 철종 임금 재위 기간과 비슷하다. 강화도에 유배되어 있다가 급작스레 왕이 된 그는 무능했다. 임금으로 있던 14년(1849~1863)은 안동 김씨 세도정치가 절정을 이루던 시기다. 결과 탐관오리(貪官汚吏)의 횡포로 백성들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으로 신자들의 이동은 별다른 제지를 받지 않았다. 오히려 뜻있는 사람들은 신자들을 받아들였고 교우들은 그들과 합류해 살기도 했다. 마산교구의 교우촌은 이러한 철종 시대에 거의 자리를 잡는다. 대표적인 교우촌 지역은 크게 나누면 다음과 같다. 함양지역, 낙동강 주변 지역, 통영 거제지역, 진주시 일대, 곤양 서포지역 이렇게 다섯이다.

 

함양지역에 교우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1827년 정해박해 이후다. 호남지역 교우들이 넘어왔던 것이다. 전남 곡성에서 시작된 정해박해는 전북으로 옮겨갔고 신자들은 산간벽지로 숨어들면서 진안, 장수, 장계 등에 교우촌을 만들었다. 그리고 일부는 백운산과 덕유산을 넘어 함양, 거창지역까지 갔던 것이다.

 

기록에 나타나는 함양지역 첫 공소는 리우빌(Liouville, 류달영) 신부가 작성한 1883년 교세 통계표에 나오는 안의 대운암공소와 터골공소다. 리우빌 신부는 1881년부터 전라도 담당 신부로 있었다. 따라서 공소 신자 가운데는 피난 교우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대운암과 터골은 함양군 백전면에 있었다. 이곳엔 전라도와 경상도를 경계 짓는 백운산이 있다. 해발 1279m 꽤 높은 산이다. 피난 교우들은 백운산 주변에 모여 살았고 그들의 권면으로 신자들이 생겨났던 것이다. 현재도 이곳엔 함양본당 소속 백운공소와 운산공소가 있다.

 

한편 1900년 전북 진안군 마령면에 어은동본당이 설립되자 함양지역은 이곳 소속이 된다. 초대 김양홍 신부는 함양지역에 관심이 많았다. 능경이, 섭자리, 마평공소에 대한 기록은 김 신부 재위 시 등장한다. 아마 그 이전에도 있었을 것이다.

 

리우빌 신부의 교세 통계표엔 함양공소가 아니고 안의공소로 나온다. 즉 안의 대운암이다. 왜 그랬을까? 원래 안의는 단독 군郡이었다. 그런데 영조를 반대했던 이인좌의 난(亂)에 안의 출신 정희량이 가담하자 안의는 군에서 면으로 강등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조치는 얼마 후 풀리지만 일제 때인 1914년 다시 함양군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따라서 선교사 시대의 백운산 일대는 안의 군에 속해 있었던 것이다. [2023년 1월 29일(가해) 연중 제4주일(해외 원조 주일) 가톨릭마산 4-5면]

 

 

마산교구 전사(前史) 5

 

 

우리나라 최초의 순교자는 누구일까? 최근 여러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최초의 순교자는 김범우(金範禹)다. 그는 서울의 역관(譯官) 집안에서 태어나 1784년 이벽의 권유로 입교한다. 1785년 자신의 집에서 이벽, 이승훈, 정약전, 정약용, 권일신 등과 함께 종교 집회를 갖던 중 형조의 관리에게 발각돼 체포된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명문의 양반이라 형조로부터 훈방 조치되지만 김범우는 혹독한 심문으로 배교를 강요당한다. 중인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끝까지 굴하지 않았던 김범우는 경상도 밀양 땅으로 유배된다. 이곳에서 일 년 남짓 살면서 선교에 힘쓰다가 1786년 가을에 선종했다. 형조에서 받은 고문 후유증으로 죽은 것이다. 비록 칼 아래 참수되는 죽음은 아니었지만 고문의 여독으로 죽었으니 분명 순교다. 이렇게 해서 그는 조선교회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충청도 단양을 유배지로 보는 견해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밀양군 단장면으로 확인되었다. 단장면 일대에는 이전부터 피난 교우촌이 많았고 김범우 선교로 입교한 사람들 후손이 지금도 살고 있다. 부산교구에서는 김범우 순교자의 무덤을 확인한 바 있다.

 

두 번째 순교자는 전라도 진산 출신의 윤지충(尹持忠)과 경상도 안동 출신의 권상연(權尙然)이다. 두 사람은 고종사촌 간이었다. 1791년 윤지충은 모친상을 당한다. 권상연에겐 고모였다. 두 사람은 정성으로 장례를 치렀지만 위패를 만들지 않았고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 1790년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내린 조상제사 금지령에 따른 행동이었다.

 

이런 사실이 지방의 유림(儒林)에 알려지자 그들은 지탄을 받게 된다. 그리고 끝내는 관가에 고발되어 체포된다. 이들은 진산 군수 앞에서도 당당하게 신앙을 드러냈고 전주 감영으로 이송돼 1791년 참수 치명했다. 윤지충과 권상연의 순교 사실은 정조실록에 실려 있다. 김범우는 1786년 사망했고 윤지충과 권상연은 5년 뒤 순교한 셈이다.

 

김범우는 경상도 밀양으로 유배 왔었다. 순교자는 일찍 죽었지만 그의 무덤은 밀양군 단장면에 있었다. 이 사실은 이곳으로 피난 교우들이 모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단장면과 하동면(현재의 삼랑진)에 있었던 용전, 붉은 독이, 웁실 등은 그 무렵 형성된 전통 있는 교우촌이다. 특히 삼랑진 우곡리에 있었던 웁실공소는 영남지방 첫 공소로 알려져 있다.

 

삼랑진은 단장면 남쪽에 있다. 밀양강 동쪽이기에 하동면(下東面)이라 했고 마을 이름은 삼랑리(三浪里)였다. 세 물결이 넘실거린다는 뜻이다. 낙동강과 밀양강이 만나고 밀물 썰물 차가 심할 때는 바닷물도 역류해 들어오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삼랑진은 여기서 유래한다.

 

삼랑진 일대는 피난 교우들의 잠정적 귀착지가 된다. 낙동강을 따라 내려오던 피난 교우들이 밀양의 초동면과 하남읍, 김해의 이북면, 생림면 일대에 교우촌을 형성하며 정착했던 것이다. 훗날 이 교우촌들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친교를 두텁게 했고 혼사도 더러 이루었다. 순교자 김범우 유배지에서 맺어진 결실이었다.

 

1897년 이 지역에 본당이 설립된다. 밀양의 명례공소가 본당으로 승격한 것이다. 경남 두 번째 본당이었다. 주임 신부는 강성삼 신부. 그는 김대건, 최양업 신부 다음으로 이어지는 조선의 다섯 번째 신부였지만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휴양을 겸해 명례에 거주했던 것이다.

 

명례본당은 낙동강 유역의 오래된 공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그 뿌리는 강을 따라 내려왔던 피난 교우들이었다. 강성삼 신부는 명례본당에서 선종한다. 그가 죽자 본당은 다시 공소로 환원되었고 완월동본당 소속이 되었다. 그러다 1926년 다시 본당이 되지만 4년 뒤인 1930년 교통이 편리한 삼랑진으로 본당이 옮겨간다. [2023년 2월 5일(가해) 연중 제5주일 가톨릭마산 2면]

 

 

마산교구 전사(前史) 6



명례본당 (1)

 

명례공소는 삼랑진본당에 속해 있었다. 1996년 수산본당이 신설되자 공소 역할을 접고 본당 관할구역이 되었다. 이후 성지로 조성되었고 2011년 이제민 신부가 전담 사제로 부임했다. 수산본당 주소는 밀양시 하남읍 수산리다. 마산교구로선 유일하게 밀양 땅에 있는 본당이다.

 

하남(下南)은 조선시대에 붙여진 이름이고 예전엔 지역 전체를 수산(守山)이라 했다. 수산이 하남보다 오래된 지명이다. 원래는 수산현(守山縣)으로 현감이 거주하는 큰 고을이었다. 고려 초 밀양에 병합되면서 현은 사라지고 인구도 줄었다. 조선이 되자 밀양 남쪽이란 의미로 하남면(下南面)이 되었고 현청(縣廳)이 있던 곳을 수산리라 했다.

 

명례는 하남읍에 속하며 남쪽으로 낙동강이 흐른다. 밀양에선 제일 남쪽이며 강을 건너면 김해군 이북면(二北面) 가동(佳洞)과 바로 연결된다. 현재의 김해시 한림면(翰林面) 가동리(佳洞里)다. 이런 이유로 명례엔 예부터 나루터가 있었고 명례 나루라 불렀다.

 

밀양에서 김해로 가는 길목이었던 것이다. 낯선 사람들이 늘 모여들었기에 새로운 것에 대한 반감도 적었다. 피난 교우들이 정착하기 좋은 조건이었다. 이렇게 해서 이곳은 일찍부터 교우들이 숨어들었고 그들에 의해 인근 지역으로 전교가 이루어졌다.

 

명례에 처음 신자들이 나타난 것은 정해박해(1827년) 이후로 보고 있다. 박해 후폭풍을 피해 명례로 들어왔던 것이다. 그들은 김범우 후손에 의해 입교한 인근 교우들로 알려져 있다. 김범우는 밀양군 단장면 법귀리(現 안법리)로 유배 왔다가 일찍 선종하고 아들 김인구와 손자 김동엽이 정착하면서 열심히 전교하여 많은 사람들을 입교시켰던 것이다. 영남지방 첫 공소로 알려진 삼량진 웁실(우곡)공소와 용전, 승진공소는 이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공소다.

 

정해박해 여파가 심해지자 밀양 교우들은 동쪽 양산지역으로 피신해 전교했고 일부는 서쪽으로 이동했다. 그들은 밀양군 부복면, 무안면, 초동면으로 숨어들었고 창녕군 부곡면, 수다리에도 전교한 흔적이 있다. 

 

남쪽으로 피신한 교우들은 명례에 터전을 마련했다. 그들은 김해군 이북면 술미와 노루목(한림)에 전교했고 생림면 봉림에도 영향을 끼쳤다. 한편 경북에서 내려온 교우들도 더러 있었는데 그들 역시 정해박해를 피해왔던 것이다. 아무튼 이들이 마산교구 동부지역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교우들이다.

 

이 지역 교우촌은 병인박해 속에서도 살아남는다. 순교자도 여럿 있다. 아마도 무명 순교자는 더 많이 있을 것이다. 그분들의 정성으로 이곳 명례에 본당이 서게 된다. 1897년 6월이었다. 명례본당 배경에는 강성삼(姜聖參 라우렌시오) 신부가 있다.

 

강 신부는 다섯 번째 한국인 사제로 충남 홍산(現 부여군 홍산면) 출신이다. 첫 사제 김대건 신부는 1845년. 두 번째 최양업 신부는 1849년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세 번째 사제서품은 1896년 4월 26일 서울 약현성당(現 중림동 약현성당)에서 있었다. 용산 신학교 1회 졸업생으로 강도영, 정규하, 강성삼 세분이다. 이들은 뮈텔 주교 주례로 서품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강성삼 신부는 건강이 좋지 않았다. 말레이시아 페낭 신학교에서 얻은 풍토병을 극복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서품직후 부산본당으로 갔다가 이듬해 휴양을 겸한 명례본당 신부로 왔던 것이다. 강 신부는 명례본당에서 7년간 사목하다 1903년 9월 선종했다. 37살 아까운 나이였다. 무덤은 부산 용호동 성직자 묘지에 있다. 이후 명례본당은 공소로 환원되었고 마산 완월동본당에 속했다가 삼랑진본당에 속하기도 했다. 현재는 수산본당에 속해 있다. 

 

 

마산교구 전사(前史) 7

 

 

명례본당 (2)

 

강성삼 신부는 명례에서 7년간 사목하다 1903년 37살로 선종하고 이후 명례본당은 다시 공소로 환원되었다고 했다. 왜 공소로 환원되었을까? 명례보다는 인근 삼랑진과 진영 쪽으로 사람들이 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때 명례는 낙동강을 이용하는 수상교통의 중심지였다. 밀양에서 김해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했던 마을이었다. 그러나 1900년대로 들어서면서 사정은 달라진다. 경부선(京釜線) 철도공사로 상권과 교통이 삼랑진 쪽으로 기울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1905년 마산선(馬山線) 철도가 개통되자 삼랑진은 교통의 요충지로 북적거리게 된다. 당시 삼랑진에는 일본인 상인들과 농장주들이 수백 명 살고 있었고 이들의 보호를 위해 파출소와 헌병대까지 있었다고 한다.

 

한편 마산선이 개통되자 진영에도 역(驛)이 생긴다. 조용하던 마을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농산물 집하장도 생겨났다. 이렇게 되자 명례는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떠나갔고 신자 수 역시 줄었다. 그러니 다시 본당을 세우려면 삼랑진이나 진영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명례 교우들은 본당으로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피난 교우들의 염원이 담긴 본당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밀양지역에도 본당이 있어야 함을 역설하며 줄기차게 신부 영입 운동을 펼쳤다. 그리하여 마침내 결실을 보게 된다. 재건 명례본당이 신설된 것이다.

 

설립일은 1926년 5월 10일(경향잡지 제20권 참조). 공소로 환원되고 13년 지난 뒤였다. 특히 이날은 진주본당(現 옥봉동성당)과 거제 옥포본당 설립일과 같다. 1926년은 대구교구에서 처음으로 11명의 새 사제가 탄생되는 감격적인 해였다. 그리하여 6개의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했는데 명례가 여기에 들었던 것이다.

 

당시 모든 공소의 간절한 소원은 신부님을 모시고 본당으로 승격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인사이동에 대한 관심이 대단했고 본당 승격 가능성이 있는 공소 회장들은 아예 주교관 근처에서 밤을 지새우며 소식을 기다리곤 하였다.

 

신설 여섯 본당은 밀양 명례와 경주, 전북의 부안과 장수, 거제 옥포와 진주본당이었다. 공소들이 밀집된 지역에 신설 본당이 선임된 것을 알 수 있다. 명례본당 신부는 권영조(權永兆 마르코) 새 신부였다. 본당 승격이 이루어진 공소 회장은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고 발표에서 빠진 공소는 내년을 기약하며 발길을 돌려야 했다.

 

권영조 신부는 1926년 5월 10일 발령받고 5월 30일 부임했다. 열정으로 선교하면서 낡은 공소건물 대신 새로운 성전 건립을 구상한다. 기성회를 조직해 성당건축을 시작했고 마침내 기와로 된 성당을 지었다. 낙성식은 1928년 8월 30일 있었다. 이후 권 신부는 미래 전망은 명례보다 삼랑진이 낫다는 생각을 갖는다. 갈수록 명례엔 인구가 줄고 삼랑진은 늘어났기 때문이다.  

 

1929년이 되자 권 신부는 본당 이전을 결정짓는다. 삼랑진 우곡리(牛谷里)에 대지 1500평을 매입하고 임시성당과 사제관을 짓기 시작한 것이다. 명례 신자들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1930년 1월 명례본당은 삼랑진으로 이전되고 권 신부는 삼랑진 초대 신부가 되었다.

 

권영조 신부는 김천 출신으로 1901년생이다. 명례본당 부임 때 25살 젊은 나이였다. 20대 젊은 나이였기에 결정도 빨랐던 것이다. 아무튼 명례본당은 본당 신부로 두 분을 모셨는데 권 신부님은 20대였고 강 신부님은 30대 초반이였다. 모두 사제생활 첫발을 내딛는 분들이었다. [2023년 2월 19일(가해) 연중 제7주일 가톨릭마산 4-5면]

 

 

마산교구 전사(前史) 8

 

 

명례본당 (3)

 

명례(明禮)란 신라 법흥왕이 이곳 사람들의 예의 밝음을 칭송하며 하사한 이름이라 한다. 일찍부터 낙동강의 평화스러운 마을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피난 교우들이 별 마찰 없이 모이고 훗날 성당까지 지을 수 있었던 숨은 배경이다.

 

명례본당은 경상도 네 번째 본당이다. 1886년 대구본당, 1890년 부산본당, 1894년 가실(왜관)본당, 그리고 1897년 명례본당이다. 임시 본당이란 조건이 제시되었지만 어떻든 정식으로 발령받은 신부가 7년간 사목했던 곳이다. 마산교구로선 잊을 수 없는 본당이다.

 

경남의 첫 본당은 부산본당으로 1890년 절영도(現 영도)에서 시작되었다. 이곳에 있던 조내기(潮落里)공소가 모체다. 초대 주임은 파리외방전교회 조죠(Jozean 조득하) 신부로 25살 젊은 나이에 부임했다. 지금의 청학성당 수녀원 자리에 초가집을 짓고 임시 성당으로 사용하면서 경남의 흩어진 공소를 돌봤다.

 

일 년이 지나자 조죠 신부는 본당 이전을 결심한다. 섬 안에 고립되어 있었기에 불편했던 것이다. 앞으로의 전망을 위해서도 부산항 중심지로 옮겨야 했다. 이렇게 해서 우여곡절 끝에 초량(草梁)에 대지를 마련하고 본당을 이전했다. 초량본당의 출발이다(1891년).

 

당시 부산본당 관할은 넓었다. 동으론 울산과 경주지역이었고 서쪽으론 밀양과 양산지역, 함안과 진주지역, 고성과 통영지역 그리고 거제도까지 갔다. 판공성사로 공소 방문을 하려면 시간과 체력이 너무 많이 소요되었다.

 

그래서 경남 중부지역에 본당을 신설해 서쪽지방 공소들을 전담시키고 싶어 했다. 소식이 알려지자 밀양 인근 공소들이 들뜨기 시작했다. 신부를 모신 본당으로 승격하고 싶었던 것이다. 본당 후보지로 압축된 곳은 밀양, 명례, 웁실(삼랑진) 세 곳이었다. 

 

한편 정보를 입수한 명례공소는 120냥을 주고 세 칸짜리 집을 샀다. 본당 승격을 대비해 사제관을 마련했던 것이다. 어떤 언질이 있었을 것이다. 어떻든 본당은 명례로 선택되었다. 발령이 나자(1897년) 강성삼 신부는 곧바로 명례로 가려 했다. 하지만 구매했던 집을 주인이 비워 주지 않아 부득이 부산본당에서 해를 넘기고 1898년 1월 명례에 부임했다. 

 

강 신부는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명례본당 구역은 밀양과 양산, 언양과 경주지역뿐이었다. 진주와 함안, 통영과 거제도는 여전히 부산본당 구역이었다. 1900년이 되자 김해와 창원지역이 명례본당 소속으로 들어왔다. 

 

명례본당은 사라졌지만 맥을 잇는 본당이 삼랑진과 진영에 등장했다. 앞서 언급했듯 명례본당 설립엔 피난 교우들의 헌신이 묻어 있다. 밀양 단장으로 유배 왔던 김범우 순교자 후손들과 그들에 의해 입교한 교우들이다. 한편 김범우 묘소가 있음을 알고 이왕 숨어 지낼 바에야 순교자 무덤 근처로 가자는 의도에서 밀양과 양산 인근으로 들어온 교우들도 있었다.

 

소백산맥 남단 일대의 신불산, 능동산, 고헌산, 대운산, 관월산 등을 무대로 피난 교우들은 곳곳에 모여 살았다. 그들은 옹기를 굽고 화전을 일구며 근근이 살아갔다. 이들의 만남이 공소로 발전하였고 그들을 흡수해 만들어진 첫 본당이 명례본당이었던 것이다.

 

1926년 2대 본당 주임으로 부임했던 권영조(權永兆) 신부는 기와로 된 성당을 지어 낙성식을 가졌다(1928년). 하지만 1935년 태풍으로 전파되었고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1938년 무너진 자리에 축소 복원한 것이다. 지금의 명례성지 자리는 원래 낙동강물이 휘돌아 가며 부딪치던 언덕이었다. 2009년부터 실시했던 4대강 사업 결과로 육지에 솟은 땅이 되었다. [2023년 3월 5일(가해) 사순 제2주일 가톨릭마산 2면]

 

 

마산교구 전사(前史) 9

 

 

황강과 피난 교우촌 (1)

 

낙동강은 강원도에서 발원해 부산의 하단 쪽으로 흘러간다. 경남에 들어와선 강 셋을 흡수하는데 황강(黃江), 남강, 밀양강(密陽江)이다. 황강은 거창 쪽에서 흘러나와 합천군 청덕면 적포리(赤布里)에서 낙동강을 만난다. 적포에는 낙동강 건너는 다리가 있다. 강을 건너면 창녕군 이방면(梨房面)이다. 예전엔 배를 타고 건넜고 현창(玄倉)나루라 했다. 적포에서 낙동강 따라 내려가는 곳에 의령군 낙서면(洛西面)과 지정면(芝正面)이 있다. 

 

위에 열거한 지역에 놀랍게도 피난 교우들이 살았던 기록이 있다. 황강 발원지로 알려진 거창의 경우는 가섭(迦葉)공소다. 거창군 위천면 상천리에 있었다. 이곳은 전북 무주군과 경계를 이루는 곳이다. 이 오지를 1893년 파리외방전교회 조죠(Jozeau 조득하) 신부가 방문했다.

 

당시 조죠 신부는 전북지역 공소 순방을 마치고 서부경남을 거쳐 부산으로 가는 중이었다. 호남교우들 안내로 거창의 오지를 찾아갔던 것이다. 그리고 가섭마을 어떤 교우 집에 신자들을 모으고 판공성사와 미사를 집전했다. 6명의 어른에게 세례를 줬다는 기록까지 남겼다. 이 일대에 피난 교우들이 살고 있었다는 증거다. 그러나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황강이 지나는 합천지역에도 피난 교우들이 살았다. 가장 오래된 곳은 합천군 대병면 성리(城里)에 있었던 황개공소다. 기록은 1883년부터 등장한다. 당시 경상도 일대를 전담 사목하고 있던 로베르(Robert 김보록) 신부가 남겼다. 판공성사를 위해 황개공소를 방문했고 세 사람에게 세례를 줬다는 기록이다. 당시 교우 총수는 23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병면(大并面)은 거창군 남하면과 경계를 이룬다. 두 지역 사이를 황강이 흐르고 있다. 거창에서 합천으로 가는 길목이다. 오늘날 황개공소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교우들이 모여 공소예절 했던 위치도 알 수 없다. 대병면과 인근 봉산면에도 옛 피난 교우들은 남아 있지 않다.

 

합천군 쌍백면과 삼가면에도 피난 교우 기록이 있다. 특히 쌍백면 평지리(平地里)에 있었던 고무정공소는 조죠 신부의 1893년 교세통계표에 처음 등장한다. 교우 총수 36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무정공소는 현재 쌍백공소로 맥이 이어지고 피난 교우 후손이 지금도 살고 있다. 합천지역 다른 공소는 삼가면 어전리(於田里) 늘밭공소와 용흥리(龍興里) 호두(虎頭)공소다. 두 공소 역시 1900년 전후해 피난 교우들이 모여 살면서 등장했다. 훗날 늘밭공소는 어전공소로 명칭이 바뀌었고 지금도 남아 있다. 그러나 호두공소는 알려진 것이 없다. 

 

경남에 들어온 낙동강은 황강을 만나면서 완만한 모래밭을 만들며 넓어진다. 이 넓어진 강변을 경계로 의령군과 창녕군이 마주 보고 있다. 피난 교우들은 황강 따라 내려오다 이곳에서도 살았다. 창녕 대합면(大合面) 모래늪공소, 길곡면(吉谷面) 시름공소, 남지(南旨)에 있었던 수개공소가 피난 교우 흔적이다. 의령지역은 지정면 성당리(城堂里)에 있었던 성당공소와 유곡면의 덕천(德川)공소가 기록으로 남아 있다.

 

정해박해(1827년) 이후 호남의 피난 교우들이 덕유산을 넘어 서부경남으로 들어왔다고 했다. 그들 중 일부는 황강을 따라 낙동강 쪽으로 내려갔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강변의 노는 땅을 이용하며 살았다. 곡식이나 채소를 심어도 간섭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땅은 여름 홍수 때 바로 물에 잠기기에 지방 사람들은 내버려 뒀던 것이다.

 

그러나 피난 교우들은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씨를 뿌리고 곡식을 심었다.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어차피 언젠가 떠날 곳, 잠시 머문다는 생각으로 강변 땅을 가꾸며 살았다. 이렇게 해서 강 주변으로 피난 교우들이 모여 들었고 주일이면 조금 넓은 집에 모여 기도를 바쳤다. 선교사들은 그런 집을 방문했고 마을 이름을 공소 이름으로 기록에 남겼던 것이다.  

 

 

마산교구 전사(前史) 10

 

 

황강과 피난 교우촌 (2)

 

황강의 발원지는 두 곳으로 해발 1614m 덕유산(德裕山)이 경상도 쪽으로 펼쳐진 곳에 있다. 먼 줄기는 거창군 북쪽 고제면(高梯面) 삼봉산(三峰山)에서 시작되고 서쪽 북상면(北上面)에서도 한 줄기가 발원한다. 계곡에서 모인 물이 작은 내(川)를 형성한 것이다. 두 개천은 거창읍을 지난 뒤에 만난다. 그리고 황강이란 이름으로 불린다. 물이 불어나면 누런 황토 색깔로 바뀌기에 황강(黃江)이라 불렀을 것이다. 

 

거창의 가섭(迦葉)공소는 황강 발원지 북상면 인근 위천 골짜기에 있었다. 이런 오지(奧地)에 어떻게 신자들이 있었을까? 호남의 피난 교우들이 왔기에 가능했다. 박해를 피해 덕유산을 넘어왔던 그들 공동체가 가섭공소였던 셈이다. 1893년 조죠(Jozeau 趙得夏) 신부는 이곳을 방문하고 판공성사를 줬다. 6명의 어른 영세자를 냈다는 보고서도 남겼다. 신부의 방문이 있기 전부터 교우들은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가섭마을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인근 골짜기에도 흩어져 살고 있었다.

 

당시 북상면에 있었던 소정(蘇井)공소와 위천면 범바우공소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조죠(조득하) 신부가 왔을 때 이들 모두는 가섭공소에 모였을 것이다. 가섭공소라 해서 무슨 건물이 있었던 건 아니다. 당시 단독 건물을 가진 공소는 없었다. 비교적 큰 신자 집에 모였고 그 집을 공소로 사용하던 시절이다. 현재도 가섭마을은 위천면 상천리(上川里)에 있다. 옛날 이 마을에 가섭사라는 절이 있었기에 이름이 남았다고 한다.

 

하지만 가섭마을에 공소 흔적은 없다. 피난 교우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 1893년 조죠 신부 보고서가 없었다면 가섭공소는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북상면 소정공소와 위천면 범바우공소 역시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교우들은 어디로 갔을까? 조죠 신부 보고서는 1893년 한 번으로 끝난다. 거창지역을 더 이상 방문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듬해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전북에서 시작된 봉기는 금방 확산되었고 나라는 어수선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가섭공소 역시 영향권에 들었고 교우들이 머물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함양을 거쳐 단성, 진주, 고성 쪽으로 흩어졌고 거창읍을 지나 합천 쪽으로 갔을 것이다. 지역마다 피난 교우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합류해 주저앉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또 다른 곳으로 떠나갔다. 

 

당시 합천지역을 대표하는 교우촌은 대병면 성리(城里)에 있었던 황개공소다. 로베르(김보록) 신부의 1883년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기록 이전부터 교우들은 살고 있었을 것이다. 덕유산을 넘어왔던 교우들이거나 경북지역에서 내려온 피난 교우들이다. 하지만 황개공소 위치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대병면 성리(城里)는 임진왜란 때 곽재우 장군이 활약했다는 악견산성(岳堅山城) 아래쪽에 있다. 그런 이유로 성곽마을(城里)이라 불리었고 현재는 합천댐으로 마을 일부가 물에 잠겼다. 황개공소는 이곳 어딘가에 있었고 황강 따라 낙동강 쪽으로 이동하던 피난 교우들 중간 기착지였다. 로베르 신부 보고서엔 삼가(三嘉) 황개공소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대병면은 합천군이 아니라 삼가현(三嘉縣)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로베르 신부는 1882년부터 경상도 전담 사제로 있었기에 황개공소를 방문하고 기록을 남겼다. 1885년 12월 경상도 첫 본당으로 대구본당이 신설되자 로베르 신부는 초대 주임으로 발령받는다. 하지만 대구엔 못 들어가고 칠곡 신나무골에 거주하다 2년 뒤 대구로 들어갔다. [2023년 3월 19일(가해) 사순 제4주일 가톨릭마산 4-5면]

 

 

마산교구 전사(前史) 11

 

 

황강과 피난 교우촌 (3)

 

황강은 합천군 봉산면, 대병면, 용주면을 지나 합천읍에 닿으면서 흐름이 느려진다. 그러면서 넓은 강폭을 따라 희고 고운 모래밭을 만들었다. 황강 백사장이다. 지금은 둑을 만들어 강물이 넘쳐나지 않지만 1880년대엔 강둑이 없었다. 그러니 황강 언저리엔 노는 땅이 많았다. 평소엔 좋은 땅으로 무엇이든 가꿀 수 있지만 큰물이 들이치면 잠기는 땅이었다. 겉보기엔 멀쩡해도 홍수 때면 모든 것이 휩쓸려가는 고약한 땅이었다.

 

피난 교우들은 이런 땅을 붙잡고 살았다. 처음엔 몰라서 그랬고 나중엔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다 차츰 내륙으로 옮겨갔고 자연스레 한 지역으로 모여들었다. 1880년대 기록에 등장하는 합천지역 공소는 대부분 이런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다. 황개공소, 늘밭공소, 고무정공소 역시 이렇게 해서 교우들이 모여든 공소다.

 

늘밭공소 기록은 1888년 로베르(金保祿) 신부 교세통계표에 처음 등장한다. 어른 영세자 13명을 보고하고 있다. 그때의 상황으론 놀라운 기록이다. 그만큼 교우들 활동이 적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합천지역은 1885년 경상도 첫 본당으로 출발한 대구본당에 속해 있었고 로베르 신부는 본당 주임 사제였다.

 

한편 1887년엔 전국적으로 콜레라가 확산되어 많은 사람이 죽었다. 전염병이 돌자 모두들 두려웠을 것이다. 선교에 어려움도 있었지만 기회이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늘밭공소는 뿌리를 내린다. 지역 주민들을 대거 입교시킨 것이다. 훗날 피난 교우들만 남아있던 공소는 대부분 힘이 부치고 그들이 떠나자 와해된다. 대병면에 있던 황개공소는 그렇게 해서 맥을 잇지 못하고 사라졌다.

 

늘밭공소는 입교한 지역 사람들이 많았기에 최근까지도 활발했다. 산업화로 이농현상이 심화되던 1970년대 중반까지 합천본당 소속 공소로 큰 발자국을 남겼다. 늘밭공소는 삼가면 어전리於田里에 있었다. 늘밭이란 ‘널려있는 밭’이란 의미다. 이 지역엔 밭들이 널려있기에 널밭 동네라 불렀는데 로베르 신부는 늘밭으로 기록했다. 1914년 일본인들이 행정구역 통폐합을 하면서 널밭을 어전(於田)이라 한자표기 했다.

 

고무정공소는 1893년 조죠(Jozeau 趙得夏) 신부 보고서에 처음 등장한다. 신자 수 36명으로 큰 공소였음을 알 수 있다. 1890년 부산본당이 신설되자 합천지역은 대구본당에서 부산본당으로 이관되었고 조죠 신부는 초대 본당 주임이었다. 그는 1892년부터 서부경남 전역과 거제도까지 방문했고 알려진 공소는 대부분 찾아갔다. 대단한 열정이었다.

 

고무정공소는 합천 지역 동남쪽 산지인 쌍백면(雙栢面) 평지리(平地里)에 있었다. 조죠 신부의 방문이 있기 이전부터 이곳에 교우들이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어떻게 이곳까지 교우들이 들어와 살았을까? 피난 교우들이 모여들었기에 가능했다. 황강을 따라 내려왔던 교우들과 경북 쪽에서 내려온 신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권면으로 교우가 된 지역주민들이 있었기에 고무정공소는 최근까지 존속했다.

 

고무정이란 말은 높은 새미(샘) 즉 높은 우물(高井)이다. 지대가 높은 곳에 동네 우물이 있었기에 새미마을(고무정마을)이라 불렀다. 조죠 신부는 이곳의 어떤 교우 집에 교우들을 모이게 했고 성사를 집전한 뒤 고무정공소로 보고했던 것이다. 평지리에 모이던 교우들은 훗날 면사무소가 있는 평구리(平邱里)로 공소 건물을 지어 이전한다. 현재의 쌍백공소다. 합천본당 이전에는 문산본당에 속했고 그 이전에는 마산포(완월)본당에 속했다. 130년 이상의 역사를 간직한 유서 깊은 공소다. [2023년 4월 2일(가해) 주님 수난 성지 주일 가톨릭마산 2면]

 

 

마산교구 전사(前史) 12

 

 

낙동강과 피난 교우촌 (1)

 

황강은 합천군 청덕면 적포리(赤布里)에서 낙동강을 만나 흡수된다. 적포의 옛날 이름은 난비 마을이다. 남쪽 벼랑(절벽)이 심한 마을이란 뜻이다. 황강이 더해져 풍성해진 낙동강은 마을 아래쪽 산 밑을 치면서 흘러간다. 자연스레 강물 위로 절벽이 생겼고 십 리가량 뻗어있다. 그래서 생긴 말이라고 한다. 지금은 절벽 위로 버스가 다니는 도로가 나 있다.

 

강을 건너면 창녕 땅이다. 옛날부터 배를 타고 건넜고 현창(玄倉)나루라 했다. 현창은 창녕 쪽 나루터가 있는 마을 이름이다. 창녕 쪽에서 많이 이용했기에 이렇게 불렀다. 지금은 다리가 놓여있다. 적포 마을에 놓인 것이 아니고 훨씬 남쪽의 앙진리(仰津里) 마을에 놓여있다. 이곳에선 창녕군 이방면(梨房面)과 연결되고 의령군 낙서면(落西面)과 가깝다. 적포 마을과는 연관이 없지만 여전히 적포교(赤布橋) 또는 적교 다리라 부르고 있다.

 

황강을 따라왔던 마지막 교우들은 이곳에서 흩어진다. 의령 쪽으로 갔거나 강 건너 창녕 쪽으로 들어갔다. 일부는 낙동강을 따라가다 함안과 진영지역 교우촌에 흡수되었다. 창녕 땅은 경북 달성군과 청도군을 경계로 한다. 낙동강도 현풍을 지나면 창녕으로 흘러든다. 경북 청도 쪽에서 강을 찾아 나선 피난 교우들이 창녕지역에 머물렀음은 상상할 수 있다. 실제로 그들은 잠시나마 창녕 땅에서 교우촌을 이루며 살았다.

 

청도지역엔 일찍부터 교우들이 모여들었다. 대구 팔공산 일대와 영천과 경산지역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피난 교우들이다. 로베르(김보록) 신부의 1883년 교세통계표에 의하면 청도 인근에 구룡(九龍)공소가 있었는데 신자 수 60명 예비자 10명으로 보고되어 있다. 당시로선 대단히 큰 공소였음을 알 수 있다.

 

청도에서 낙동강으로 가려면 창녕군 대합면(大合面)을 지나야 한다. 이 길은 유명한 우포늪을 통과하게 되어 있다. 우포늪을 지나면 바로 현창 나루가 나오고 낙동강 건너 의령군과 함안 쪽으로 연결된다. 우포늪이 대합면에 물리는 이 인근에 교우촌이 있었다. 대합면 주매리(主梅里)에 있었다는 모래늪(砂旨)공소다.

 

지금은 공소의 흔적도 신자들이 있었다는 증언도 찾을 수 없다. 기록에만 나올 뿐이다. 명례본당에 거주하던 강성삼(姜聖參) 신부가 남긴 1902년 교세통계표다. 1901년 판공성사를 위해 창녕지역 두 공소를 방문하고 기록을 남긴 것이다. 대합면 모래늪공소와 길곡면(吉谷面)에 있었던 시름(曾山里)공소다. 교우들은 이전부터 어떤 교우 집에 모였을 것이다. 판공 때 그곳을 방문한 강 신부는 동네 이름을 공소 이름으로 보고한 것이다.

 

이들은 어디서 왔을까? 모래늪공소는 청도 쪽에서 온 교우들 중심이었고 시름공소는 황강 따라 내려온 교우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래 머물지 못했다. 나이 든 교우들은 남았지만 젊은 교우들은 더 나은 곳을 찾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숫자가 줄자 교우들 모임도 줄었고 결국은 사라졌다. 시름공소의 경우 신자 수 22명이었고 판공성사 본 사람은 6명으로 보고되어 있다. 보고 당시에도 16명은 교적만 있고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강성삼 신부는 명례에서 1903년 선종한다. 이후 본당은 공소가 되었고 마산포(완월동)본당 관할이 되었다. 창녕지역 공소에 대한 기록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피난 교우들의 흔적은 결실을 맺는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새로운 공소가 만들어진 것이다. 지금의 창녕읍 신촌리에 있었던 고리실(環谷)공소와 남지읍 북쪽에 있었던 수개(樹介)공소다. 두 공소는 함안과 문산지역 공소들과 유대를 맺으며 최근까지 활발했었다. 고리실공소는 훗날 창녕본당 설립의 계기가 된다. [2023년 4월 23일(가해) 부활 제3주일 가톨릭마산 2면]

 

 

마산교구 전사(前史) 13

 

 

낙동강과 피난 교우촌 (2)

 

낙동강은 강원도에서 발원해 안동지역을 거쳐 대구의 금호강을 흡수하고 경남에 들어와서도 세 개의 강을 만나 몸집을 불린다. 황강과 남강(南江) 그리고 밀양강(密陽江)이다. 특히 남강은 진주시를 관통하며 흐르는 서부경남의 젖줄이다.

 

남강은 함양군 서상면 남덕유산에서 발원한다. 그러나 함양군과 산청군을 통과할 때 이름은 경호강(鏡湖江)이고 남강은 진주 쪽에서부터 부르는 이름이다. 진주 시내를 관통한 뒤 함안군 동북쪽을 서서히 돌아 낙동강 쪽으로 흘러간다. 마지막엔 함안군 대산면과 의령군 지정면 사이에서 군의 경계를 만들면서 흐른다.

 

이 지역 일대는 지대가 낮고 경사가 완만해 물의 속도가 늦어진다. 함안 쪽에서 흘러드는 함안천(咸安川)도 이곳에서 남강으로 유입되기에 넓은 저습지가 자연스레 펼쳐진다. 낚시꾼들에게 알려진 악양루(岳陽樓)는 함안천과 남강의 합수지점에 세운 누각이다. 조선 철종 때 중국의 악양루를 본떠 만들었다고 한다.

 

이 일대에 피난 교우들이 살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남강의 흐름이 약해지면서 넓은 들이 시작되는 강변지역이다. 이런 들판은 낙동강과 합류하는 곳까지 계속 이어진다. 의령 쪽엔 유곡면(柳谷面)의 덕천(德川)공소와 지정면(芝正面)의 성당(城堂)공소가 있었고 함안 쪽엔 동천(東川)공소와 가등(佳嶝)공소 그리고 동박골공소가 있다. 

 

이곳은 많은 비가 오면 남강 수위가 높아져 물이 범람하는 지역이다. 지대가 낮기에 늘 피해가 있었다. 따라서 지역민들은 잘 이용하지 않았다. 이런 토지였기에 피난 교우들이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악양루 인근엔 예부터 나루터가 몇몇 있었다. 쪽배를 타고 의령과 함안 쪽을 서로 건너다니는 곳이었다. 피난 교우들은 여차하면 이곳을 통해 움직일 수 있었고 새로운 정보를 얻기도 했다. 그래서 이 지역 교우촌은 오랫동안 활성화되어 있었다. 

 

지금은 1920년대 축조된 악양 제방과 백산 제방으로 홍수 피해는 사라졌다. 더구나 남강 상류에 진양호를 만들면서 다목적 댐을 건설한 뒤로 저습지와 천수답은 옥토로 바뀌었고 나루터 역시 현대식 다리로 교체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피난 교우촌에도 변화가 왔다. 여러 이유로 공소를 떠나는 교우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공동체 와해가 현실화되자 사라지는 곳이 생기고 큰 공동체에 흡수되기도 했다. 의령의 덕천공소와 성당리(城堂里)에 있던 공소는 이렇게 해서 역사에 묻힌 경우다. 1890년대 중엽까지 건재했던 공소가 증발해 버린 것이다. 선교사의 기록이 없었다면 공소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것이다.

 

덕천공소는 1893년 조죠 신부의 교세통계표에 나온다. 교우 31명 사규고백자(판공성사 본 사람) 25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로선 큰 공소였음을 알 수 있다. 덕천 마을은 유곡면에 있다. 마을 앞 냇가에 정자나무가 많아 떡징이 마을이라 했는데 일본인들이 한문 표기한 것이 덕천(德川)이다. 덕천에서 북쪽 산을 넘으면 부림면(富林面) 신반(新反)이다.

 

성당(城堂)공소는 지정면에 있었다. 예부터 이곳엔 나루터가 있었고 남강을 건너면 함안 대산 땅이다. 대산 쪽 교우들과 왕래가 많았을 것이다. 조선시대 문헌에도 성당진(城堂津)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앞은 강이고 사방이 산에 둘러싸인 천연요새 지형이기에 성당(城堂)이란 지명이 붙었다고 한다. 이곳의 교우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황강을 따라오다 합천 내륙에 정착했던 피난 교우들이거나 낙동강 따라오던 교우들로 추측할 수 있다. 1890년대 성황을 이루던 합천의 고무정공소와 덕천공소 그리고 대산지역 공소들이 서로 왕래했다는 기록이 있다. [2023년 5월 7일(가해) 부활 제5주일(생명 주일) 가톨릭마산 4면]

 

 

마산교구 전사(前史) 14

 

 

함안지역 교우촌 (1)

 

함안지역엔 일찍부터 피난 교우들이 모여 살았다. 경상도 북쪽에서 낙동강을 따라오다 주저앉았고 남강을 따라오던 교우들도 이곳에 머물렀다. 일부는 더 내려가 김해 쪽 교우촌에 흡수되기도 했다.

 

낙동강과 남강을 동시에 끼고 있는 대산면(代山面) 일대엔 피난 교우들이 유독 많이 모여 살았다. 당시 이 지역엔 저습지가 널려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엔 좋은 땅이지만 홍수가 나면 물바다로 바뀌는 섭섭한 땅이었다. 피난 교우들은 이 일대에 모여 살며 상호 연락망도 갖추고 있었다.

 

지방 사람들은 방목지로 방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피난 교우들은 움막을 치고 살았다. 어떻든 강은 먹을 것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대산면 저습지 인근엔 교우들이 조금씩 모여들었고 흩어져 있던 그들은 누군가를 중심으로 뭉쳤다. 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 홍수를 겪으면서 차츰 안전한 쪽으로 옮겨갔고 대산지역에 정착을 시도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정착했을까? 1866년 병인박해 이전부터 있었다. 뒷받침하는 기록이 치명일기(致命日記)에 나온다. 순교자 구한선 다두(타대오)에 관한 기록이다. 치명일기는 1895년 발간된 책으로 병인박해 순교자 877분에 관한 기록이다. 당시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가 4년에 걸쳐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치명일기에 등장하는 구 다두에 관한 원문(原文)은 다음과 같다.

 

함안미나리골즁인으로셔 리신부를뫼시고 거제도에 젼교ᄒᆞ엿더니병인년에진쥬포교의게잡혀매를만히맛고나와셔즉시병드러칠일만희죽으니나흔이십삼쎄러라.(함안 미나리골 중인으로서 이 신부를 모시고 거제도에 전교하였더니 병인년에 진주 포교에게 잡혀 매를 많이 맞고 나와 즉시 병들어 7일 만에 죽으니 나이 23세더라.)

 

순교자 구 다두(타대오)는 함안지역 교우촌에 속한 인물이었다. 기록에 나오는 이 신부는 리델(Ridel 이복명) 신부를 가리킨다. 그의 복사(服事)로서 거제도까지 갔던 것이다. 당시 선교사의 복사가 되려면 건장한 체격과 함께 신분이 확실해야 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함안 교우촌에는 구 다두(타대오)의 부모와 형제들이 살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리델 신부는 함안 교우촌에 머물며 미사 봉헌과 고해성사를 주며 활동했을 것이다. 그리고 신자들의 추천으로 젊은 구 다두를 복사로 데리고 갔을 것이다. 기록이 없을 뿐이다.

 

구 다두를 배출한 함안 교우촌은 어떤 공소였을까? 1939년 거제 옥포 주임이었던 김후상(金厚相 1901~1983) 신부는 ‘거제도 천주교 연혁’이란 필사본(筆寫本)을 남겼다. 책에 의하면 순교자 윤봉문의 부친 윤사우(尹仕佑)는 함안 논실(論實)공소에 살다가 1883년 11월 선종한다. 함안의 논실공소는 거제도 교우들과 연대를 가질 만큼 안정된 교우촌이었던 것이다.

 

경상도 남부지역 공소에 대한 첫 번째 보고서는 로베르(Robert 김보록) 신부가 파리외방선교회에 제출한 1883년 교세통계표로 알려져 있다. 이곳엔 함안지역 공소 3개가 등장한다. 동천, 논실, 밤대공소다. 그러다 동천공소는 1885년 자취를 감추고 밤대공소 역시 1889년부터 통계표엔 나오지 않는다. 논실공소만 끝까지 등장한다.

 

논실의 위치는 함안군 가야읍 산서리(山西里)다. 원래 이곳은 함안군 대산면에 속해 있었는데 1873년 가야면에 편입되었다. 논실은 답곡(畓谷) 마을이라고도 한다. 산서리에서 북동쪽에 있는 고개를 넘으면 평림리(가등공소)를 만나고 남강이 흐르는 쪽으로 가면 구(具) 다두의 첫 무덤이 있었던 하기리(下基里)를 만난다. 구한선(다두)은 논실공소 교우였던 것이다.

 

 

마산교구 전사(前史) 15

 

 

함안지역 교우촌 (2)

 

기록에 등장하는 함안지역 첫 공소는 동천, 밤대, 논실(論實)이라 했다. 로베르 신부의 1883년 보고서에 등장한다. 로베르 신부는 파리외방선교회 사제로 1876년 조선에 입국했다. 병인박해(1866년) 10년 뒤였다. 황해도에서 활동하다 1882년 경상도 전담 사제로 발령받는다.

 

경상도 전담은 그가 처음이다. 발령 후 그는 모든 공소를 방문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선교사들이 마음대로 다닐 상황이 아니었다. 조선과 프랑스는 1886년 한불조약을 체결하고 비준(批准)은 1887년 5월에 있었다. 따라서 공적인 박해는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1883년 보고서는 1882년 6월부터 1883년 5월까지의 사목활동 내역을 정리한 것이다. 이 기간 동안 로베르 신부는 경남지역 많은 공소를 가능한 가보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의 방문은 최초로 이루어진 사목자의 공적인 방문이었다.

 

그가 찾아간 공소는 1882년 이전부터 교우들이 살았던 마을을 뜻한다. 지금의 공소와는 개념이 조금 다르다. 공소 건물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누군가의 집을 모임 장소로 정하고 미사를 봉헌했다고 가정하면 된다. 따라서 1883년 보고서에 공소가 등장했다면 그 지역엔 훨씬 이전부터 교우들이 살고 있었다. 한편 선교사들 보고서엔 가끔 공소 이름이 바뀌고 있다. 이것은 앞서 말했듯이 일정한 장소에 공소 건물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임 장소가 바뀌면 보고서에도 이름이 바뀌었던 것이다.

 

1883년 교세 통계표에 나오는 마산교구 소속 공소는 8개. 함안(咸安) 동천, 논실, 밤대, 삼가(三嘉) 황개, 단성(丹城) 능구지, 진주의 소촌(召村), 창원의 잉애터, 김해(金海) 노루목이다. 물론 이 공소들 외에도 로베르 신부가 사정이 생겨 못 간 공소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논실(論實)공소 위치는 가야읍 산서리(山西里)라 했다. 그리고 이 지역은 원래 대산면(代山面)에 속했다고 했다. 1860년대 대산면은 꽤 넓었다. 지금의 법수면(法守面) 일부와 산인면과 가야읍 북부를 포함하고 있었다. 그런데 동천과 밤대 위치는 알 수가 없다.

 

다음 표는 선교사의 함안지역 보고서를 연도별로 나열해 본 것이다. 공소 이름이 바뀌는 것을 살펴보기 위해서다. 칸 안의 숫자는 당시 공소 교우 숫자. 동천과 밤대공소는 1885년과 1889년부터 사라진다. 그런데 빈자리를 읍, 토뫼, 율량공소가 채운다. 율량공소는 1891년 나타나 끝까지 등장하고 있다.

 

 

 

말산(末山), 가등(佳嶝), 동박(洞白)공소 방문은 늦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동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밤대공소는 읍, 토뫼, 율량공소와 연관이 있다. 율량의 율(栗)은 밤나무를 뜻하기에 더욱 그렇다. 선교사는 당시 함안 군수가 살던 곳을 읍이라 표현했다. 그리고 이곳 교우들은 사정이 생겨 공소로 사용했던 집을 몇 차례 옮겼을 것이다. [2023년 5월 21일(가해)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가톨릭마산 4-5면]

 

 

마산교구 전사(前史) 16

 

 

함안지역 교우촌 (3)

 

1890년대 후반이 되자 함안지역엔 새로운 공소가 보인다. 가등(佳嶝), 말산(末山), 죽청(竹淸), 동박(洞白)공소다. 특히 가등공소는 교우 수가 60명을 상회하는 큰 공소로 등장한다. 반면 논실공소는 신자 수가 급격히 줄어들다가 1900년부터는 교세 통계표에서 사라진다.

 

논실 교우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공소는 지금의 가야읍 산서리(山西里)에 있었다. 원래 이 지역은 대산면에 속했고 가야읍에 편입된 것은 공소가 사라지기 30년 전 일이다. 1973년 7월 대통령령에 의해 산서리는 가야면에 속했고 1979년 가야면은 읍으로 승격되었다.

 

논실에서 북쪽으로 고개 셋을 넘으면 대산면 평림리(平林里)가 나온다. 앞들에 숲이 많이 있었기에 평림이란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이 지역에 가등공소가 있었다. 논실 교우들은 서서히 숲이 많은 평림리 가등공소로 옮겨갔던 것이다. 원인은 두 가지였다. 가야읍이 있는 함안 방면의 발전과 가등공소의 확장이었다.

 

1894년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대해 유리한 입장이 된다. 그들은 기득권을 지키려 대거 조선에 입국했고 여러 이권(利權)에 개입했다. 일본인들은 부산을 통해 입국했기에 경남지역엔 그들의 영향력이 강했다.

 

더구나 경부선과 마산선 철도 개설을 위해 풍부한 물자와 사람들이 모여들자 경남지역 변화는 빨랐다. 이렇게 되자 마산 함안 쪽으로도 일본인들이 들어왔고 그들은 곧바로 상권을 형성했다. 한때 이 지역엔 일본 상인들과 농장주들이 수백 명 살았고 그들의 보호를 위해 파출소를 만들기도 했다.

 

마산과 함안의 도시화는 인근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논실공소가 사라진 것은 이 변화의 영향이다. 많은 사람이 떠나자 남은 교우들은 서서히 가등 쪽으로 옮겨갔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1900년 이후부터 가등공소는 함안지역을 대표하는 교우촌이 되었고 훗날 대산본당의 모체가 된다.

 

물론 가등공소에도 사람들은 빠져나갔다. 그러나 인근 공소의 나이 든 교우들은 오히려 가등 쪽으로 모였다. 왜 그랬을까? 이곳엔 피난 교우들의 무덤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연유에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가등공소 근처에는 신자들의 공동묘지가 형성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마도 가등공소 내에는 피난 교우들과 함께 입교한 지역 주민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나름대로 논밭을 지니며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들 중 누군가 선종하자 당연히 가까운 야산에 모셨고 이렇게 해서 교우들의 무덤이 하나 둘 생겨났을 것이다.

 

교우들의 공동묘지는 노년의 피난 교우들에게 마지막 안식처였다. 이러한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었기에 논실공소는 물론 인근의 쇠락하는 공소들에게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남아 있던 나이 든 교우들이 서서히 가등공소로 옮겨왔던 것이다.

 

의령지역에서 사라진 덕천(德川)공소와 성당(城堂)공소 교우들도 함안지역 공소로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 성당공소가 있는 의령군 지정면(芝正面)은 남강을 경계로 대산면과 마주하고 있다. 강을 건너면 바로 동박공소가 있다. 가등공소와 함께 동박공소 역시 1900년 이후 교우들은 늘어났다. 의령 쪽 교우들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1900년대 가등공소는 밀양의 명례공소와 진주의 소촌공소(現 문산본당)와도 가까웠다. 교우들끼리 혼인하도록 배려했던 것 같다. 황강을 거쳐 낙동강과 남강을 따라왔던 피난 교우 후손들이 함께 살았던 곳이 가등공소다. 순교복자 구한선(타대오)의 첫 무덤 역시 가등공소 인근에 있었다. [2023년 6월 4일(가해)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가톨릭마산 4면]

 

 

마산교구 전사(前史) 17

 

 

함안지역 교우촌 (4)

 

동박골공소는 타케(Taquet 엄택기) 신부의 1899년 교세통계표에 처음 등장한다. 1899년 보고서는 1898년 6월부터 1899년 5월까지의 사목활동 통계다. 타케 신부는 부산본당 3대 주임으로 1898년 5월 부임했다. 부임 즉시 공소 순방에 나섰음을 알 수 있다. 동박골 방문도 이때 있었다. 물론 공소 건물이 있었던 건 아니다. 교우 집에 머물며 성사를 집행하고 동박골공소로 보고한 것이다.

 

현재의 동박골 마을은 대산면 장암리(長岩里)에 속한다. 옛 지명은 장포리(長浦里). 포(浦)는 조수(潮水)가 스며드는 바닷가를 뜻한다. 따라서 이 지역은 예부터 강물이 범람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남강이 낙동강을 만나는 곳이라 낙동강이 불어나도 역류하는 곳이다. 지금은 거대한 비닐하우스 단지가 되어 있다.

 

동박골 한문 표기는 동백곡(洞白谷)이다. 동네가 하얗게 된다는 의미다. 옛날엔 아포(鵝浦)라고도 했다. 강변을 흰 거위가 덮고 있다는 뜻이다. 홍수로 범람한 들판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큰물이 지나고 나면 기름진 땅이 남는다. 피난 교우들은 그런 땅을 의지하며 살았다. 그러면서 강 건너 의령군에 속해 있던 성당(城堂) 덕천(德川)공소 교우들을 흡수 했을 것이다.

 

1890년대로 접어들면서 성당과 덕천지역 공소는 사라지고 동박골공소가 부상하는 이유다. 동박골에선 대산(代山) 신반(新反) 함안으로 가는 교통편도 좋았다. 낙동강을 건너면 바로 남지(南旨)였고 나룻배를 타면 창녕 쪽으로도 쉽게 움직일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함안지역은 가등이, 동박골, 말산, 죽청공소로 재편(再編)되었다.

 

말산(末山)공소는 가야읍에 있었다. 1898년 교세통계표에 처음 등장한다. 당시 주임 신부는 부산본당 2대 주임 우도(Oudot 오보록) 신부였다. 우도 신부는 1893년부터 부산본당을 맡았고 1898년 황해도로 이동했다. 그가 처음 함안지역에 왔을 땐 논실과 율량공소만 있었다. 앞서 말했듯 당시 공소란 무슨 건물이 덩그렁 하게 있었던 건 아니다. 교우 집 하나를 정해 신부가 교우들을 모이게 하고 성사를 집행하면 공소가 되었던 것이다. 대개는 공소 회장 집을 그렇게 했다.

 

논실은 대산지역을 대표했고 율량은 가야지역을 대표했다. 우도 신부는 1894년 칠원지역 교우촌도 방문한다. 성사를 집행하곤 죽청공소로 보고했다. 1897년에는 가야읍 교우들을 방문하고 말산공소로 보고했다. 우도 신부는 함안지역을 수차례 방문했다. 하지만 새롭게 방문하고 첫 공소로 보고한 곳은 죽청(1894년) 가등이(1896년) 말산(1897년) 세 곳뿐이다. 

 

그런데 말산공소가 등장하자 율량공소는 교세통계표에서 사라진다. 율량은 말산 가까이 있었던 것 같다. 말산공소가 커지자 율량 교우들을 말산공소로 오게 해서 판공성사를 주었을 것이다. 말산은 아라가야 고분(古墳)이 있는 지역이다. 그래서 머리산(頭山)이라 했는데 머리산이 말산이 되었다고 한다. 어떤 이는 산의 끝자락이기에 말산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아무튼 말산공소는 이 지역에 있었다.

 

지금의 함안성당은 도항리(道項里)에 있다. 도항은 한문 표기한 것이고 원래는 질목(길목)이라 했다. 말산과 검암(儉巖)을 연결하는 큰길의 목이었던 것이다. 1900년대 이 지역엔 사람들이 몰린다. 일본인들이 들어오면서 노동력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말산공소의 등장은 이 시기와 맞물려 있다. 율량공소는 여항산(餘航山) 쪽에 있었기에 말산공소에 자리를 내줘야 했던 것이다. 산서리에 있던 논실공소 역시 비슷한 이유로 1900년부터 자취를 감추었을 것이다. [2023년 6월 18일(가해) 연중 제11주일 가톨릭마산 2면]

 

 

마산교구 전사(前史) 18

 

 

칠원지역 교우촌

 

함안지역 교우촌 뿌리는 낙동강과 황강 그리고 남강을 따라왔던 피난 교우들이라 했다. 남강이 낙동강을 만나는 지역은 홍수가 반복되는 곳이다. 지역민은 알고 있었기에 강변 땅을 포기하고 살았다. 그러나 피난 교우들은 그 땅을 근거지로 모였고 귀착지로 만들었다.

 

황강 역시 해마다 낙동강에 홍수를 쏟았다. 그때마다 창녕 쪽은 물바다가 되었고 웬만한 제방으론 견딜 수 없었다. 철종 이후 국가 경제론 시골의 제방보수란 엄두를 못 낼 일이었다. 남강 역시 마찬가지. 장마철이 되면 낙동강을 넘치게 했고 창녕지역 유어(遊漁), 남지(南旨), 길곡(吉谷) 등지에 영향을 끼쳤다. 낙동강이 역류해도 못 빠져나간 남강물이 함안 쪽 저습지를 물바다로 만들곤 했다. 

 

이런 이유로 함안과 창녕지역에 피난 교우들이 머물 수 있었다. 홍수로 방치된 강변 땅을 일구며 살았던 것이다. 그러다 피난 교우들도 홍수를 체험하면서 차츰 내륙으로 이동했고 지역민을 입교시키기도 했다. 물론 강 따라 떠난 교우들도 많았다. 창녕 모래늪(沙池), 고리실(環谷)공소와 남지의 수개(樹介)공소 길곡의 시름(曾山), 마천(馬川)공소는 이렇게 형성되었다. 함안지역 동박골(洞白), 가등(佳嶝)공소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낙동강은 창녕과 함안 사이 경계를 만들며 흐른다. 두 지역은 나룻배로 왕래했고 여러 곳에 나루터가 있었다. 특히 대산과 남지를 잇는 웃개나루(上浦津)와 길곡과 칠북면(漆北面)을 연결하는 멸포나루(買浦津)가 유명했다. 교우들도 나루터를 이용했다. 뱃길을 통해 창녕, 남지, 길곡공소와 함안지역 공소들은 교류를 가졌다. 특히 길곡에서 낙동강을 건너면 바로 칠원 땅이다. 자연스레 교류가 이어졌을 것이다. 길곡의 시름공소는 강성삼 신부 1902년 보고서에 교우 22명, 예비자 27명으로 보고되어 있다. 당시로선 큰 공소였지만 지금은 흔적이 없다.

 

시름공소는 지금의 길곡면 증산리에 있었다. 마을 뒷산이 시루처럼 생겼다 해서 시름이라 했고 한문 표기한 것이 증산(甑山/曾山)이다. 시름공소 교우들도 대부분 강 건너 칠원 쪽으로 이동했거나 강 따라 밀양 쪽으로 내려갔을 것이다.

 

칠원에는 죽청(竹淸)공소가 있었다. 부산본당 2대 주임 우도(Oudot 오보록) 신부의 1895년 보고서에 처음 등장한다. 1894년 이전부터 죽청 마을엔 교우들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주소로는 칠원군 북면 운서리(雲西里) 구름실(雲谷) 서쪽이란 뜻이다. 무릉산과 작대산 사이를 구름실이라 했다.

 

죽청공소 역시 피난 교우들이 내륙 정착에 성공한 케이스다. 강을 건너온 교우들이 일익을 담당했던 것이다. 최근까지도 죽청공소는 맥을 이어오고 있었다. 100년이 훨씬 넘은 공소인 셈이다. 지금의 칠원면은 1908년까지 칠원군(漆原郡)으로 있었다. 현재의 마산합포구 구산면(龜山面)도 칠원군이 관장하고 있었다. 넓은 행정구역이었지만 1908년 함안군에 편입되어 칠원면으로 축소되었다. 

 

1870년대부터 작업이 시작된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엔 정서방(鄭書房)이란 분이 나온다. 원문(現代文)은 다음과 같다. ‘정서방은 경상도 칠원 돗섬서 살더니 정묘 정월에 진주 포교에게 잡혀 진주옥에 여러 달 갇혔다가 병들어 죽으니. 들은 이는 지금 익산 도화정에 사는 최 바오로와 프란치스코 형제더라.’ 진주 순교자 정서방은 당시 칠원군 구산면 돝섬(猪島)에 살았던 것이다. 포졸들이 잡으러 온 것으로 보아 이곳에 피난 교우들이 많이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속칭 콰이강의 다리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2023년 7월 9일(가해) 연중 제14주일 가톨릭마산 3면]

 

 

마산교구 전사(前史) 19

 

 

진주지역 교우촌 (1)

 

조선의 두 번째 사제는 최양업 신부님. 1849년 4월 15일 상하이(上海)에서 사제품을 받고 그해 겨울 입국했다. 곧바로 교우촌 방문에 나섰으며 서양 신부들이 가지 못한 산골짜기를 샅샅이 훑었다. 양산(梁山)과 동래(東萊)까지 왔던 그는 인근에 교우들이 있다는 정보를 접하면 가능한 방문했다. 최양업 신부는 경상도 남부지역 첫 사목자였다.

 

1859년까지 10년간 최양업 신부는 경상도 전역을 담당했다. 이후 1864년까지 5년간은 다블뤼(Daveluy 安敦伊) 신부가 맡는다. 두 번째 사목자였다. 1864년부터는 리델(Ridel 李福明) 신부가 담당했고 이때 병인박해가 있었다. 박해가 시작되기 전 순교자 구한선(다두)과 함께 거제도를 방문했던 사제는 리델 신부였다. 알려진 사실이다.

 

박해 후 경상도는 로베르(Robert 김보록) 신부가 맡는다. 1886년 경상도 첫 본당인 대구본당 주임 신부로 발령받지만 여러 사정으로 대구엔 들어가지 못했다. 대신 칠곡 신나무골에 임시 거처를 마련하고 2년간 머물렀다. 이곳에서 로베르 신부는 마산교구가 속한 서부 경남 공소들을 방문하고 기록을 남겼다.

 

리델 신부는 1861년 입국했다. 당시 그는 교우촌 지역을 표시한 지도를 갖고 있었다. 지도를 처음 만든 사람은 김대건 신부로 알려져 있다. 지도에는 교우촌 지역 153곳이 기재되어 있었고 서부 경남에 속한 지역은 8곳이었다. 거제, 고성, 통영, 남해, 사천, 소촌(現 文山邑), 칠원(現 龜山面), 의령(現 富林面)이다.

 

1861년이면 병인박해 전이다. 이 시기 남해안에 교우촌 지역 여섯이 있었다니 놀라운 일이다. 더구나 거제, 통영, 고성, 남해, 사천, 구산면은 연결되는 라인이다. 그러나 이 교우촌들은 병인박해와 무진박해(1868년)를 만나면서 없어지거나 흩어져 버린다. 남해에 교우촌이 있다는 기록은 이후 찾을 수 없다. 무진년(戊辰年) 박해는 세칭 오페르트 굴총(掘塚) 사건 결과다. 유태계 독일 상인이었던 오페르트(Oppert)는 당시 실권자였던 대원군의 부친(南延君) 묘를 도굴한 뒤 시신(屍身)을 담보로 통상을 관철시키려 했다.

 

그러나 실패한다. 그런데 사건에 프랑스 선교사와 신자들이 가담된 것이 발각되었다. 격노한 대원군은 해안지대 신자 색출을 엄명한다. 이것이 무진박해다. 당연히 남해안에도 검거 열풍이 불었고 교우들은 흩어졌다. 오페르트 사건 무대는 충남 예산이었다. 중국에서 배를 타고 아산만으로 들어와 삽교천에 상륙한 뒤 도굴 작전을 폈던 것이다. 그런데도 경남 해안지대 박해가 심했던 것은 경상도의 유림(儒林)이 격분했기 때문이다.

 

조선 말기 영남지역은 유학이 강했고 보수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양반 무덤이 도굴 당했다는 건 경악할 일이었다. 더구나 서양인과 천주교인이 함께 행동했으니 박해는 척화(斥和)와 동일시되었다. 대원군은 유림의 동조로 쇄국을 강화했고 곳곳에 척화비를 세웠다. 남해안 교우촌은 이렇게 해서 자취를 감췄다.

 

무진박해는 대원군 실각(1873년)으로 흐지부지되지만 바닷가 교우촌은 회복되지 않았다. 많은 교우들이 잡혀갔고 육지로 흩어졌기 때문이다. 이후 대원군의 몰락은 외세의 간섭으로 이어졌고 구미 열강은 조선에 통상을 요구했다. 결과가 1882년부터 체결되기 시작한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와의 통상조약이다. 덕분에 선교사의 공적 활동은 가능해졌다. 로베르 신부의 1883년 보고서(최초의 경상도 교세통계표)는 이렇게 해서 나올 수 있었다. 소촌공소는 교우 78명, 예비자 22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무진박해 이후 서부 경남 피난 교우들의 중심지는 소촌(문산)공소였던 것이다. [2023년 7월 30일(가해) 연중 제17주일 가톨릭마산 2면]

 


마산교구 전사(前史) 20

 

 

진주지역 교우촌(2)

 

1894년 동학란(東學亂)을 겪은 조선정부는 이듬해(1895년) 진주를 목(牧)에서 부(府)로 승격시킨다. 유화책이었다. 관할구역은 68개 면(面)이었고 소촌면(召村面)은 그중 하나였다. 1910년 조선을 합방한 일본은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한다. 전국을 시군(市郡)과 면동리(面洞里) 체제로 전환시킨 것이다. 1914년 실시된 일이다.

 

이때 진주는 군(郡)이 되고 휘하에 19개 면을 두게 된다. 문산면(文山面)은 이때 처음 등장했다. 소촌면, 조동면(槽洞面), 이곡면(耳谷面), 갈곡면(葛谷面)을 합쳐 문산면으로 개칭한 것이다. 이 조치로 소촌(召村)이란 이름은 사라진다. 그러니까 1914년 이전까지만 소촌이었고 그 뒤엔 문산(文山)으로 대체된 셈이다. 소촌이란 글자를 풀이하면 누군가를 부르는 동네다. 누굴 불러내는 동네였을까?

 

당시 소촌면은 진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다. 그래서 이곳엔 찰방(察訪)이 거주하고 있었다. 찰방은 지역 도로와 정보를 책임진 자다. 요즘으로 치면 국정원과 도로공사 지사장을 겸임한 인물이다. 서울과 지방을 잇는 주요 도로엔 역참(驛站) 시설이 있었는데 수십 필의 말(馬)과 관원이 찰방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경상도엔 찰방이 11명 있었고 서부 경남엔 소촌이 유일했다. 그러니 진주 양반들은 소촌 찰방을 무시할 수 없었다. 민심 파악이나 한양 소식에 접하려면 그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당시 소촌 찰방은 진주는 물론 남해, 고성, 통영, 거제, 진해(現 진동) 등 인근 15개 역참(驛站)을 직접 관할했다고 한다.

 

한편 찰방을 도와 일하던 하급 관리가 아전(衙前)이다. 아전은 대개 지역 사람들이 맡아했다. 그래서 향리(鄕吏) 혹은 이속(吏屬)이라고도 했다. 찰방은 바뀌어도 이들은 잘 바뀌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대대로 아전에 종사하는 게 상례였다. 따라서 자부심이 대단했고 나름대로의 세력도 갖고 있었다.

 

소촌은 이런 배경을 안고 있는 마을이었다. 양반 간섭이 적었던 만큼 자유롭고 활기가 넘쳤다. 자연스레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일자리도 많고 먹거리도 풍족했다. 피난 교우들 역시 이런 연유로 소촌과 인근 지역에 교우촌을 형성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럼 언제부터 피난 교우들이 살고 있었을까? 소촌공소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은 로베르(Robert 김보록) 신부의 1883년 보고서가 처음이다. 이 기록은 로베르 신부가 직접 소촌공소를 방문하고 성사를 집행한 뒤에 남긴 것이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신자 수 78명, 예비자 22명, 판공성사 본 사람은 62명이다. 이 정도 교세라면 오래전부터 교우들이 있었다는 증거다. 한편 리델(Ridel 이복명) 신부가 1861년 입국할 때 지참했다는 교우촌 지도에도 소촌은 등장한다. 따라서 병인박해 이전부터 이 지역엔 교우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의 뿌리는 정해박해를 피해 온 교우들일 것이다. 1827년 전남 곡성에서 시작된 정해박해는 신자들을 지리산과 덕유산 쪽으로 몰았고 많은 교우들이 함양과 산청 쪽으로 피신해 왔던 것이다.

 

그들은 남해안까지 퍼져 내려갔다. 서부 경남 일원에 교우촌의 씨앗을 뿌린 것이다. 특히 해안지대와 인접한 곳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기에 숨을 곳이 많았다. 바닷가에는 여인들도 당당히 일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되자 타 지역 피난 교우들까지 모여들었다. 그러다 병인박해와 무진박해를 겪으면서 소촌 지역이 상대적으로 안전한 곳으로 판단되어 교우들이 집단으로 이동해 왔을 것이다. [2023년 8월 6일(가해)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가톨릭마산 4면]

 

 

마산교구 전사(前史) 21

 

 

진주지역 교우촌 (3)

 

병인박해는 1866년 2월 시작되었고 1873년 11월 대원군 실각으로 종결된다. 하지만 박해의 여진은 남아 있었다. 특히 지방에선 정도가 심했다. 7년간의 박해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던 것이다. 1870년대 후반은 조선 교회의 또 다른 시련기였다.

 

당시 조선엔 세 명의 프랑스인 사제가 있었다. 블랑(Blanc 白圭三), 두세(Doucet 丁加彌), 로베르(Robert 金保祿) 신부. 그러다 1882년 프랑스와 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선교사 입국은 조금씩 늘어났다. 1885년엔 10명의 사제가 있었다. 물론 조선인 신부는 없었다.

 

1873년 병인박해 종결 후 1882년 한불조약까지는 10년이다. 교우들은 안전한 곳을 찾아 유랑민처럼 떠돌아다녔다. 조선에 남았던 세분 사제도 활동에 제약이 많았다. 하지만 교우들은 떠돌면서도 외인 전교와 냉담자 회두에 열정을 드러냈다. 박해를 견디어낸 저력이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교우들은 일정 지역에 자리를 잡는다. 인근 교우촌과 연락망을 취할 조직도 갖춘다. 새로운 모습의 교우촌이 등장한 것이다. 생계수단은 막노동과 장사가 거의 전부였다. 장사도 옹기와 소금에 국한되어 있었다. 마산교구 지역엔 크게 일곱 군데 이런 교우촌이 있었다. 함양, 고성, 거제, 진영, 창녕, 함안 그리고 진주다.

 

다음은 진주와 인근 지역에 있었던 공소들이다. 이 기록은 훗날 선교사들이 찾아가서 한 번이라도 성사를 집행했기에 확실한 공소라 할 수 있다. 물론 이전부터 피난 교우들이 살고 있었기에 선교사 방문이 가능했을 것이다. 현재까지도 남아 있는 공소가 있지만 대부분 다른 공소와 합쳐지거나 사라졌다.

 

소촌(召村/문산), 시정골(시장곡屍葬谷/문산), 남산(南山/문산), 원당(元堂/문산 삼곡), 양전(良田/반성), 대내(대천大川/이반성), 곰실(熊谷/대곡), 덕평(德坪/금산), 석계(石界/금곡), 굼실(운곡雲谷/사봉), 비라실(非羅室/장재), 읍내(邑內/진주), 배춘(培春/사천), 양개(양포良浦/사천), 대야내(대야천大也川/하동 북천), 양산(陽山/고성 영오)

 

당시 공소는 따로 건물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선교사들은 대개 회장 댁이나 아니면 좀 넓은 집을 소유한 가정에서 미사 봉헌을 했고 판공성사도 주었다. 그리고 그곳을 공소 이름으로 사목 보고했다. 이 때문에 한 지역에 여러 공소가 등장하는 것이다. 예컨대 소촌의 경우 소촌, 남산, 시정골로 공소가 나눠지는데 세 군데 공소가 독립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남산(南山)은 문산읍 남쪽에 있는 작은 산이다. 산 너머에 교우들이 살고 있었을 것이다. 시정골은 사람을 묻은 골짜기(시장곡屍葬谷)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피난 교우들이었기에 그런 곳에 살았을 것이다. 그러다 점점 소촌 중심지로 내려왔고 본당이 설 무렵 시정골엔 신자가 별반 없었기에 서서히 사라졌을 것이다.

 

문산본당 초대 주임 신부는 파리외방선교회 쥴리앙(Julien 권유량) 신부다. 1882년 프랑스에서 태어났고 1905년 4월 사제품을 받고 그해 6월 한국에 왔다. 24살 젊은이였다. 입국 후 그는 곧바로 마산포본당으로 배치되었다. 당시 본당 주임은 무세(Mousset 문제만) 신부였고, 쥴리앙 신부는 이곳에서 조선말을 익혔다.

 

한편 무세 신부는 소촌(召村)본당 신설을 청원해 놓은 상태였다. 당시 교구장 뮈텔 주교가 젊은 새 신부를 그에게 보낸 것은 소촌본당 신설에 대한 허락이었다. 소촌공소는 1905년 9월 22일 자로 본당이 되고, 초대 주임은 쥴리앙 신부였다. 발령이 났지만 쥴리앙 신부의 부임은 해를 넘기고 1906년 1월에 있었다. 그는 삼곡리에 초가 세 채를 매입해 임시 성당으로 사용하다가 1907년 지금의 성당이 있는 소문리에 부지를 매입했고 1908년 성당을 신축했다. [2023년 8월 20일(가해) 연중 제20주일 가톨릭마산 4면]

 

 

마산교구 전사(前史) 22

 

 

진주지역 교우촌 (4)

 

순교자 정찬문(鄭燦文)은 진주시 사봉(寺奉)에서 태어났다. 옛 지명은 상사면 중촌리(中村里). 부인은 칠원 윤(尹)씨로 함안 대산(代山) 출신이며 피난 교우 따님이다. 부인 권면으로 정찬문은 입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윤 씨 부인은 가등공소 회장을 지낸 윤성학(尹聖學) 바오로와 같은 문중이다. 윤 회장은 순교자 구 다두(타대오)의 무덤을 확인해 준 분이다.

 

정찬문은 아내가 교우인 줄 모르고 혼인했을까? 아닐 것이다. 추측건대 사봉지역에도 피난 교우들이 살았고 그들이 다리를 놓았을 것이다. 소촌과 함안 교우들은 병인박해 이전부터 내왕하며 소식을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사봉은 원래 함안군 상사면(上寺面)에 속한 지역이다. 1914년 일본의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인근 상봉면(上奉面)과 함께 진주군(郡)에 편입되었다. 상사와 상봉에서 한자씩 따와 사봉면이 되었다. 사봉은 1914년 이후 만들어진 지명이다. 사봉 교우촌은 훗날 굼실(雲谷)공소로 맥이 이어진다. 현재의 공소는 문산본당 설립 100주년을 맞아 정찬문 순교자 묘소 옆으로 새 성전을 지어 이전하였다.

 

천주교 회보(現 가톨릭신문) 13호에는 문산본당 탐방 기사가 실려 있다. 천주교 회보 13호는 일제 강점기인 1928년 4월 1일 대구교구에서 발간한 것이다. 다음 구절은 내용의 일부를 간추린 것이다. ‘문산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것은 1863년이며 함안(咸安)에서 이주한 구 다두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구경수(具敬守)씨 부친이다.’

 

문산(소촌)에 처음 전교한 분을 구경수(具敬守)의 부친 구 다두라고 소개한다. 시기는 병인박해 前 1863년으로 보고 있다. 한편 김구정(金九鼎) 선생이 1967년 발간한 ‘천주교 경남 발전사’에 의하면 구 다두의 실명(實名)을 구한선이라 적고 있다.

 

이렇게 보면 구한선은 치명일기에 등장하는 구 다두와 같은 인물이다. 그는 병인박해가 일어나기 전에 리델(Ridel 이복명) 신부 복사(服事)로서 거제도를 방문했다. 당시 선교사의 복사가 되려면 신심 깊고 지리에 밝으며 신자들 사이에 잘 알려진 인물이어야 했다. 구 다두는 소촌 공동체와 연결되어 있었기에 거제도 신자들은 그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렇듯 병인박해 이전에는 거제도에도 교우들이 살고 있었다. 대부분 육지에서 들어간 피난 교우들이었고 섬 밖의 교우촌과 연결되어 있었다. 예컨대 윤봉문 순교자 부친은 노년을 함안의 논실과 가등공소에서 지내다 선종한다. 거제와 함안 교우촌이 연락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실제로 교우끼리 혼담을 위해서도 정보는 필요했을 것이다.

 

거제도 교우촌은 병인박해와 무진박해를 겪으면서 사라진다. 특히 무진박해는 도서지방과 해안지대를 철저히 뒤졌기에 대부분 거제도를 떠났다. 훗날 윤봉문 가족이 들어왔을 땐 교우들이 거의 없는 상태였다. 무진박해로 유랑민이 된 피난 교우들은 서서히 고성과 함안 그리고 소촌지역 교우촌에 합류했을 것이다.

 

이 시기 소촌엔 교우촌이 둘 있었다. 두 지역에 교우들이 밀집해 살고 있었던 것이다. 남산(南山)과 시정골(屍葬谷)이다. 초기 선교사들은 두 지역 교우들을 한 곳에 모아 판공을 치렀고 소촌공소로 보고했다. 이후 교우들이 늘어나자 두 지역을 따로 방문한다. 이렇게 해서 남산과 시정골공소가 새롭게 기록에 등장했다. 원당(元堂)공소는 문산읍 삼곡리(三谷里)에 있었다. 이곳은 이곡면(耳谷面)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문산면이 된 지역이다. 쥴리앙(Julien 권유량) 신부는 문산본당 초대 신부로 발령받자 원당공소가 있던 삼곡리에 초가집 세 채를 매입하여 임시 성당과 사제관으로 사용했다. [2023년 9월 3일(가해) 연중 제22주일 가톨릭마산 4면]

 

 

마산교구 전사(前史) 23

 

 

진주지역 교우촌 (5)

 

소촌(文山)에서 사봉을 지나면 반성班城이다. 소재지를 벗어나면 넓은 들을 만나고 그 끝에 발산재가 있다. 옛 이름은 바리고개다. 지형이 바리때(중 밥그릇)처럼 생긴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한문 표기한 것이 발산(鉢山)이다. 

 

발산재를 넘으면 진전면(鎭田面)이다. 이곳 어딘가에 양전(良田) 교우촌이 있었다. 1900년 타케(Taquet, 엄택기) 신부는 자신의 교세 통계표에 양전공소 기록을 남겼다. 당시 신자 수 22명, 외인 영세자 1명, 예비자는 14명으로 보고되어 있다. 1900년 보고서는 1899년 6월에서 1900년 5월까지의 사목활동을 보고한 것이다.

 

기록을 미루어 보아 이전부터 양전엔 피난 교우들이 살고 있었다. 교우촌이 있었기에 타케 신부도 방문했을 것이다. 타케 신부는 1898년 부산본당 3대 주임으로 부임했다. 1년간 사목하다 서부경남에 본당이 있어야 함을 알고 진주본당 신설을 청했고 뮈텔 주교의 허락이 떨어지자 본인이 부임했다(1899년 6월). 그러나 사정이 여의치 않자 다시 마산본당 신설을 청한 뒤 허락을 받고 본당을 옮겼다(1900년 6월). 이렇게 해서 진주와 마산의 첫 본당 신부가 되었다. 당시 28살의 젊은 사제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이유로 타케 신부는 서부경남 지리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양전 마을이 속했던 진전면(鎭田面)은 진주와 마산 사이를 잇는 도로가 지나간다. 타케 신부도 몇 차례 지나갔던 길이다. 발산재 인근에 있었던 양전마을 교우촌을 풍문으로 듣고 있었을 것이다. 양전 교우촌은 지금의 어느 곳에 있었을까?

 

원래 양전면은 진주군에 속해 있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군면 통폐합으로 진해군(鎭海郡)의 진서면과 합쳐진다. 진서(鎭西)와 양전(良田)이 합쳐 진전이 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진해는 지금의 창원시 진해구가 아니고 마산시 진동면 일대를 가리키는 지명이다. 

 

진동(鎭東)은 진해현(鎭海縣) 동쪽이란 의미다. 따라서 진동 서쪽에 현이 있었다. 지금의 고현리다. 현이 있었기에 고현(古縣)이란 지명이 남아 있다. 고려 때는 우산현이라고 했고 조선 때 진해현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진전은 1914년 이후 지명이고 이전엔 진서(鎭西)였다. 

 

한편 진주군 양전면 봉암(鳳巖)과 양촌(陽村) 지역이 진해군 진서면과 통합되어 진전면 소속이 되었다. 따라서 교우촌이 있었던 위치는 지금의 봉암리와 양촌리 일대로 추측할 수 있다.

 

특히 봉암 쪽에서 여항산(餘航山)으로 가는 길은 예전부터 있었다. 고개 몇을 넘으면 함안군이다. 지금은 차도가 트여 있다. 그리고 여항산 함안 쪽 자락엔 피난 교우들이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조죠(Jozean, 조득하) 신부의 1891년 교세 통계표에 등장하는 율량공소다.

 

조죠 신부는 1890년 부산본당 초대 신부로 부임했는데 첫 공소 방문 때 율량공소를 찾은 것이다. 그만큼 율량엔 교우들이 많았다는 의미다. 아마도 양전과 율량 교우촌은 연결되어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양전은 진주와 마산의 중간이며 고성, 통영으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었다. 율량 교우들은 양전에 들렀다가 떠났을 것이다. 훗날 도시 팽창으로 사람들이 빠져나가자 교우촌은 사라졌을 것이다. 양전과 율량의 공소 위치는 현재 알 수가 없다.

 

진전면은 진동본당 관할이기에 양전공소는 진동본당 뿌리 중 하나인 셈이다. 양전공소가 등장하는 공적 기록이 1899년이기에 그 기록만으로도 100년이 넘는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양전 교우촌엔 순교자도 있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진주로 잡혀가 순교하셨다고 한다. 순교자의 시신은 양전 교우들이 모셔 와 공소 인근에 모셨다고 한다. 무덤이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기록이나 증언자를 아직 만나지 못했다. [2023년 9월 17일(가해)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 가톨릭마산 4면]

 

 

마산교구 전사(前史) 24

 

 

고성지역 교우촌 (1)

 

경상도 첫 본당은 1885년 12월 설립된 대구본당이다. 두 번째는 부산본당. 1890년 4월 초대 주임 조죠(Jozeau 趙得夏) 신부가 영도(影島)의 조내기(潮洛里)공소에 부임하면서 시작되었고 이듬해 초량(草梁)으로 옮겼다. 관할구역은 방대하고 넓었다. 동쪽은 언양과 울산까지, 서쪽은 함양, 진주까지. 중앙은 경북 청도에서 거제도까지 이르는 지역이었다.

 

당연히 진주 쪽 공소들은 본당 신설을 원했다. 공소 회장들은 자금을 마련해 장차 성당으로 사용할 집을 마련한 뒤 뮈텔 주교에게 보고했다(1897년). 이듬해 여름에는 신부님을 보내주시길 간절히 청하는 탄원서(歎願書)를 제출하기도 했다(1898년 7월).

 

사정이 이렇게 되자 당시 부산본당 3대 주임이던 타케(Taquet 嚴宅基) 신부는 자신이 진주로 가겠다고 주교에게 알린다. 신설 본당을 자원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진주본당은 탄생하게 되었고 타케 신부는 부산본당을 떠나 1899년 6월 3일 진주에 부임했다.  

 

진주지역 교우들이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에게 보낸 1898년 7월 21일 자 탄원서는 남아 있다. 문서에는 공소 회장들의 서명書名이 있다. 양산, 소촌, 삼가, 곤양, 비라실, 원당, 배춘공소다. 그리고 대표는 양산공소 회장 박 요한으로 되어 있다.

 

그가 대표 자리에 있었던 건 나이가 많아서 그랬을까? 아니면 그가 주도를 했을까? 아무튼 양산공소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다. 다른 공소는 회장 한 사람의 서명만 있지만 양산공소는 박 요한 회장 외에 세 사람의 서명이 더 있다.

 

양산(陽山)공소는 어디에 있었을까? 여러 정황으로 보아 고성군 영오면(永吳面)에 있었다. 원래 이 지역은 진주군 영이곡면(永耳谷面)이었고 양산은 여기에 속했다. 그러다 일본이 식민통치를 위해 군면 통폐합을 실시할 때(1914년) 진주군 오읍곡면(吾邑谷面)과 합쳐 영오면으로 개칭되고 고성군에 편입된다. 영이곡과 오읍곡의 첫 글자를 따서 명명한 것이다. 

 

그러니까 양산지역은 1914년 이전엔 진주에 속했던 땅이다. 지금의 고성군 영오면 양산리는 진주시 진성면과 경계를 이루는 지역으로 문산읍에서 고성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훗날 고성읍과 통영의 공소 교우들이 문산(소촌)본당으로 나올 때 그들이 일박(一泊) 하면서 묵을 수 있었던 교우촌이 양산공소였던 것이다.

 

고성에는 병인박해 이전부터 교우들이 살고 있었다. 치명일기에 의하면 파리외방선교회 리델(Ridel 李福明) 신부는 병인박해가 일어나기 직전에 순교복자 구한선(타대오)을 복사로 대동해 거제도를 사목 방문한 적이 있다. 거제도에 교우들이 있었다면 고성과 통영에도 교우들은 분명 있었다. 그들의 도움 없이는 거제도에 들어갈 수 없었을 것이다. 

 

리델 신부는 1861년 조선에 입국했다. 당시 31살의 프랑스인 선교 사제였다. 입국할 때 그는 전국의 교우촌이 표기된 지도를 갖고 있었다. 지도에 등장하는 교우촌은 153개였고 서부경남은 8곳이었다. 거제, 통영, 고성, 사천, 남해, 진주, 칠원(창원 구산면), 의령(신반)이다.

 

1861년이면 병인박해 5년 전이다. 기록보다 훨씬 앞서 고성엔 교우들이 살고 있었을 것이다. 한편 거제, 통영, 고성, 사천, 남해, 창원, 구산면은 바닷가로 연결되는 라인이다. 어떻게 이곳에 교우촌이 형성되었을까? 뿌리는 호남에서 시작된 정해박해(1827년)를 피해 온 교우들이다.

 

전북 장수에서 함양으로 건너온 피난 교우들은 문산, 고성, 통영을 거쳐 바닷가로 내려갔고 일부는 산청을 통과해 곤양과 남해 쪽으로 흩어졌다. 당시는 먹을 것이 귀한 때였다. 흉년이 겹치면 예사로 굶어죽었다. 그러나 바닷가는 노력하면 살 수 있었다. 여자들도 쉽게 일할 수 있었고 신분의 규제도 느슨했다. 피난 교우들이 정착하기 좋은 조건이었던 것이다. [2023년 10월 1일(가해) 연중 제26주일 가톨릭마산 4면]

 

 

마산교구 전사(前史) 25

 

 

고성지역 교우촌 (2)

 

기록에 처음 나타나는 고성지역 교우촌은 계동(桂洞)공소다. 로베르(Robert 金保祿) 신부의 1888년 보고서에 등장한다. 1887년 6월부터 1888년 5월까지의 사목활동을 본부에 보고한 것이다. 아마도 1887년 성탄 판공을 겸해 고성지역을 방문했을 것이다. 신자 수는 불과 5명. 그러나 예비신자는 13명이다. 당시는 아직까지 드러내놓고 신앙생활을 할 수는 없던 시기였다. 

 

특히 1888년(戊子年)은 거제 순교자 윤봉문(요셉) 복자님이 진주에서 순교한 해다. 고성 교우들도 사건을 전해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13명의 예비신자가 보고되고 있다. 이전부터 계동엔 교우들이 살았고 신심 깊은 회장들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물론 1886년 한불조약으로 천주교에 대한 인식은 많이 바뀌어 있었다. 

 

계동은 계화동(桂花洞)이라고도 했다. 계화(桂花)란 계수나무 꽃이다. 향이 강한 은목서(銀桂木)와 금목서(金桂木)를 가리킨다. 속칭 천리향 만리향 나무다. 예전부터 계동지역엔 이 나무들이 많이 있었던 것 같다. 안정된 고을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계동 교우촌은 어디에 있었을까? 현재의 고성읍 기월리(基月里)에 있었다. 그러니까 계동은 지금의 기월리에 속하는 곳이다. 그런데 기월리란 지명은 1914년 이후 등장했다. 예전에는 이 지역이 신기동(新基洞)과 신월리(新月里)로 나누어져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을 하면서 신기와 신월에서 한 글자씩 따와 기월리로 부르게 한 것이다. 

 

한편 신기동은 신기부락 혹은 새터(新村)라고 했다. 신월리 역시 새리(新里) 새 동네란 이름을 갖고 있었다. 모두 새롭게 뜨는 마을을 뜻한다. 그런데 계동의 예전 이름은 잿골이었다. 평범한 이곳에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잿골이 새터(新村) 새 동네란 이름으로 바뀐 것이다. 

 

어떻게 이곳에 사람들이 몰려들 수 있었을까? 당시 상황으로 보아 흉년이나 난(亂)을 피해온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철종 이후 관(官)의 횡포는 심했다. 중앙정부의 무능으로 권력을 가진 자들은 예사로 재물을 약탈했고 사람들을 잡아 가두었다. 여기에 천주교인 박해까지 겸하자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물론 그 속엔 피난 교우들도 있었다. 이들 중 일부가 고성지역에 주저앉으면서 계동 일대를 새터(신기부락)로 만든 것이다. 더구나 병인박해(1866년)와 무진박해(1868년) 후폭풍이 거제도 일대를 강타하자 교우들은 다시 육지로 피신하게 된다. 이때 많은 교우들이 통영과 고성지역으로 피신했고 계동 교우촌에도 합류했던 것이다.

 

1888년 윤봉문이 잡혀 진주로 압송될 때 이 사건을 로베르(Robert 金保祿) 신부에게 알린 사람이 있다. 한인두(韓仁斗 타대오)다. 그의 부친 한필서(韓必西 토마스)는 윤봉문과 함께 잡혔다가 풀려난 교인이다. 한인두 역시 대구로 가는 도중 잡혔다 풀려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대구로 갈 때 고성 기월리에 있는 조재권(趙在權 다윗) 회장 집에서 일박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거제도 복음 선포 경로와 군란기’ 1936년 한덕화 지음.

 

한덕화(韓德華 모세)는 한인두 아들이다. 그는 거제도에서 문산의 배명학교를 다닐 때 부친과 함께 기월리 교우 집에 머물렀던 기억이 많다고 했다. 기월리 교우들과 거제지역 교우들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 문산에 있었다는 배명(倍命)학교는 1908년 2대 주임으로 부임했던 김명제 신부가 설립한 사립 야학교로 본당 내에 있었다.

 

1913년 기월리공소에선 견진성사가 있었다. 당시 대구교구장 드망즈(Demange 安世華) 주교가 방문해 주례했던 것이다. 그만큼 기월리는 알려진 교우촌이었다. 현재 이곳 남쪽 기슭에는 고성본당 묘원도 있다. 기월리에선 마산교구 사제 세 분이 배출되었다. [2023년 10월 15일(가해) 연중 제28주일 가톨릭마산 4면]

 

 

마산교구 전사(前史) 26

 

 

고성지역 교우촌 (3)

 

고성지역 첫 공소는 계동(桂洞)공소라 했다. 모체는 고성읍 기월리(基月里) 교우촌이고 큰 규모라고 했다. 두 번째 공소는 종생(宗生)공소다. 대가면 갈천리(葛川里)에 있었다. 로베르(Robert 金保祿) 신부의 1890년 보고서에 처음 등장한다. 당시 신자 수 6명, 예비신자 12명으로 보고되어 있다. 이 작은 지역을 어떻게 선교사는 방문했을까?

 

갈천리 옛 이름은 갈내 마을이다. 개천이 갈라지는 곳에 마을이 있었기에 이런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종생공소는 갈내 마을 인근에 흩어져 있던 피난 교우를 누군가가 모으면서 시작되었다. 아마 그 사람이 자기 집을 공소로 제공했을 것이다.

 

당시 로베르 신부의 거주지는 대구였다. 판공성사를 주려면 먼 길을 떠나야 했다. 동쪽은 경주, 울산까지, 서쪽은 산청, 진주까지 가야 했다. 그야말로 머나먼 고생길이었다. 진주(소촌)지역 공소 방문이 끝나면 다음 코스는 거제도였다.

 

소촌(문산)에서 거제로 가는 지름길은 고성군 대가면을 지나 통영시 광도면 황리 쪽으로 가는 길이다. 현재 대전·통영 간 고속도로가 이 라인을 따라 건설되어 있다. 종생공소는 거제로 가는 길목에 있었기에 로베르 신부의 방문이 가능했던 것이다. 훗날 이 길은 문산(소촌)에 본당이 서자 거제, 통영, 고성 신자들이 본당으로 판공성사 보러 가는 길이 된다.

 

종생공소 기록은 1894년부터 보이지 않는다. 대신 계동공소 신자 수가 갑자기 불어난다. 종생의 교우들은 기월리에 있던 계동으로 가서 판공성사를 봤기 때문이다. 1890년 부산본당이 신설되자 고성지역은 부산본당에 속하게 되었다. 선교 사제는 부산 쪽에 가까웠던 계동공소로 교우들을 모이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계동(桂洞)공소 기록도 1895년부터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장동(長洞)공소가 등장한다. 고성의 세 번째 공소다. 장동은 기월리와 맞붙은 대평리(大坪里)에 있었다. 이곳엔 넓은 들이 많았는데 장동 역시 들 가운데 있는 마을이었다. 특히 장동이 있는 들판을 건천(乾川)들이라 했다. 아마 이전엔 강바닥이었던 모양이다. 나중에 장동은 건천동으로 이름이 바뀐다.

 

장동공소 기록은 1895년 등장한다. 신자 수 66명이다. 사라진 1894년 계동공소 신자 수는 64명이었다. 그러므로 이렇게 추측할 수 있다. 고성을 방문한 선교사는 1894년까지는 계동에서 교우들을 만났고 1895년부터는 장동 마을에서 판공성사를 주었던 것이다.

 

왜 그렇게 했을까? 교우들이 모일 수 있는 장소 때문이었던 것 같다. 당시는 독단적인 공소 건물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했다. 대개는 회장 댁이나 비교적 큰 교우 집에서 사제를 모시곤 했다. 고성지역 교우 수가 많아지자 넓은 집이 요구되었는데 마침 장동에 그런 집이 있었을 것이다. 

 

1899년 타케(Taquet 嚴宅基) 신부 교세통계표엔 장동공소 교우 수가 91명이다. 비교적 넓은 집으로 옮겼지만 장동공소 역시 교우들이 모이기엔 비좁은 장소가 된 것이다. 그래서 다음 해엔 계동공소가 다시 부활한다. 타케 신부 1900년 보고서엔 장동 신자 45명, 계동 교우 50명으로 나와 있다. 두 곳을 따로 방문한 것이다.

 

계동과 종생공소를 첫 방문한 선교사는 대구본당 로베르 신부였다. 1890년 부산본당이 서자 조죠(Jozean 趙得夏) 신부가 두 번째로 방문했다. 세 번째는 장동공소와 황리공소를 만든 우도(Oudot 吳保祿) 신부가 방문했고 마산포본당이 세워지면서 타케 신부가 네 번째로 방문했다. 타케 신부는 틈실공소 기록을 남겼다.

 

 

마산교구 전사(前史) 27

 

 

고성지역 교우촌 (4)

 

고성지역 첫 본당은 고성읍이 아닌 황리(黃里)에 먼저 신설된다. 1935년 6월 16일이다. 초대 주임은 명례(明禮) 출신 신순균(申順均 바오로) 새 신부였다. 같은 날 거제본당도 신설되고 이명우(李明雨 야고보) 신부가 부임했다. 그 역시 갓 서품된 새 신부였다. 신순균 신부는 명례 순교자 신석복(마르코)의 증손자(曾孫子)다. 부친 신 이냐시오는 신석복 순교자 외아들이었고 신순균 신부는 4형제 중 막내였다. 1949년 38세 젊은 나이로 선종했고 대구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황리는 통영군 광도면(光道面)에 속해 있었다. 엄밀히 따지면 고성지역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원래 황리는 고성군 광삼면(光三面)에 속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인 1914년 통영군에 강제 편입되었다. 이때 고성군 도남면(道南面)도 함께 넘어간다. 광삼과 도남이 합쳐 광도면이 된 것이다.

 

고성 사람들이 못마땅해 한 것은 당연하다. 더구나 당시 황리는 마산에서 통영으로 가는 뱃길의 요지였다. 행정만 바뀌었을 뿐 상권과 인맥은 모두 고성 사람들이 좌우하고 있었다. 황리는 여전히 고성 땅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황리에 본당이 섰지만 실제로는 고성본당으로 여겨졌고 피난 교우들에겐 오랜 숙원이 이루어진 셈이었다.

 

황리에는 언제부터 피난 교우들이 있었을까? 공식 기록은 우도(Oudot 吳保祿) 신부의 1897년 보고서에 처음 등장한다. 신자 수 17명, 예비신자 3명이다. 우도 신부는 부산본당 두 번째 신부로 1894년부터 고성지역을 방문했고 장동공소를 만든 분이다. 열정이 있었던 그는 황리 교우촌 소식을 듣고 방문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황리에 교우들이 나타난 것은 병인박해와 무진박해(1868년) 이후로 여겨진다. 거제도와 통영 인근 섬에 살던 교우들이 뱃길이 용이한 황리로 숨어들었기 때문이다. 여차하면 그들은 육로를 통해 고성, 사천 쪽이나 문산 쪽으로 피신하려 했을 것이다.

 

이런 연(緣)으로 훗날 황리공소는 문산과 거제공소를 연결하는 중간 지점이 된다. 특히 당시는 가능한 교우끼리 혼인하던 시기였다. 선교사들이 적극적으로 권했고 신심 깊은 교우일수록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문산, 고성, 거제, 황리의 구 교우들은 혼인 관계로 서로 얽혀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황리(黃里)란 지명은 화리(花里) 즉 꽃마을이란 이름에서 유래한다. 마을을 싸안고 있는 면화산(綿花山) 때문이다. 해발 414m의 면화산은 계속해서 꽃 피고 꽃 지는 산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이어질 면(綿) 꽃 화(花) 면화산인 것이다. 당연히 산 아랫마을은 꽃마을(花村)로 통했고 화촌이 화리로 변하면서 황리가 되었다는 해석이다.

 

황리에 본당이 섰지만 고성 쪽에도 신부를 보내줄 것을 꾸준히 요구했다. 오래된 계동과 장동공소 회장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황리본당을 고성읍으로 이전해 줄 것을 간청했다. 그러던 중 자동차의 등장으로 황리지역은 갑자기 사양길을 걷게 된다. 뱃길에 의존하던 교통이 육로 중심으로 바뀌면서 사람들이 떠나갔기 때문이다.

 

황리본당의 고성읍 이전은 1939년 5월 14일 자로 발표된다. 첫 본당 신부는 서정도(徐廷道 벨라도) 신부였다. 황리 주임 고군삼(高君三 베네딕도) 신부는 김천으로 이동되고 황리는 다시 공소가 되었다. 신순균 신부는 부임 후 2년 뒤(1937년) 대구 계산동 보좌로 갔고 제주 출신의 고군삼 신부가 왔던 것이다. 황리본당은 4년 만에 재위 신부 두 분으로 끝났다. [2023년 10월 29일(가해) 연중 제30주일 가톨릭마산 4-5면]

 


마산교구 전사(前史) 28

 

 

통영지역 교우촌 (1)

 

파리외방전교회는 1658년 창설된다. 당시 아시아지역 선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독점했고 선교사들이 무역정책에 이용당하고 있다는 비난이 많았다. 이에 교황청은 순수 선교 단체를 원했고 이렇게 해서 등장하게 된 수도회가 파리외방전교회였다.

 

그들은 선교지 언어를 직접 배우고 가르쳤다. 선교지에 파견되면 그곳에서 평생을 살다가 죽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현지 교회를 조직한 뒤에는 현지인 성직자를 양성해 그들에게 모두 맡기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았다. ‘떠나라 그리고 돌아오지 말라.’ 파리외방전교회 모토(motto)였다고 한다. 

 

이렇게 시작한 파리외방전교회는 1841년부터 매년 한 권의 보고서를 발간한다. 세계 각국에 파견된 외방전교회 신부들의 활동상황을 종합한 연보(年報)다. 우리나라 조선에서는 전국에 흩어진 사제들이 주교에게 보고서를 보냈고 주교는 이를 종합해 다시 파리 본부에 보냈다. 꽁트랑뒤(Compte Rendu)라 불렸던 보고서다. 교구연보(敎區年報)라고 번역되어 있다. 조선에 관한 기록은 1846년부터 등장한다.

 

꽁트랑뒤 1895년 판에 통영지역 교우들에 관한 뮈텔 주교의 기록이 있다. “저는 거제도에서 항상 많은 위안을 받고 있습니다. 흉년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는 개종 운동이 계속되고 있으며, 중략, 올해(1895년)는 기쁘게도 우리 종교가 통영(統營)과 동래(東萊)에도 뿌리내리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부산 교구사 자료집 1권 324면 참조)

 

위의 기록이 통영 교우촌을 언급한 최초의 기록이다. 그들은 1895년 어떤 형태로든 신앙 모임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미루어 보아 훨씬 이전부터 모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통영 어느 지역인지 알 수는 없다. 통영 소식을 알려준 선교사는 우도(Oudot 吳保祿) 신부다. 당시 그는 부산본당 두 번째 주임 신부였고 통영과 거제도는 그의 관할구역이었다.

 

우도 신부 자신의 통영 기록은 1898년 보고서에 처음 등장한다. 교우 9명, 영세자 5명, 사규 고해자 3명의 작은 공소였다. 뮈텔 주교 기록은 1895년인데 우도 신부 보고서는 3년 뒤에 나타난 셈이다. 왜 이렇게 늦어졌을까?

 

우도 신부는 1893년 여름부터 고성과 거제도를 방문하고 있었다. 통영에도 교우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찾아갔다.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조치를 취하곤 당시 상황을 뮈텔 주교에게 보고했던 것이다. 하지만 우도 신부는 통영 교우들을 한곳에 모아 판공을 치르지 못했다. 교우 대부분이 육지의 통영이 아니라 인근 섬에 흩여져 살았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에서 우도 신부는 황해도로 발령 나서 떠나게 된다.(1898년 4월)

 

이동을 예감한 우도 신부는 통영지역 교우들을 처음으로 한곳에 모았다. 외딴섬의 교우들까지 오게 한 것이다. 이것은 1898년 보고서다. 1898년 보고서는 1897년 6월부터 1898년 5월까지의 활동을 말한다. 우도 신부가 통영 교우들을 모아 첫 판공을 치른 것은 1897년 성탄 판공이었을 것이다. 통영엔 언제부터 교우들이 있었을까? 가장 오래된 자료는 리델(李福明) 주교가 1861년 입국 때 지녔다는 교우촌 지도다. 지도엔 당시 교우촌 153개가 분포된 지역이 나온다. 마산교구엔 8곳. 남해, 사천, 고성, 통영, 거제, 소촌(문산), 칠원(구산), 의령이다.

 

1861년이면 병인박해 5년 전이다. 기록보다 앞서 남해안엔 분명 교우들이 살고 있었다. 박해에 떠밀려온 피난 교우들이다. 당시 임금은 철종이었다. 1849년 보위에 올랐지만 왕권은 추락했고 세도정치가 전국을 휘젓고 있었다. 살길이 막연했던 민중은 떠돌기 예사였고 피난 교우들 역시 이 틈에 끼어 해안가 정착을 시도했던 것이다. [2023년 11월 19일(가해) 연중 제33주일(세계 가난한 이의 날) 가톨릭마산 4면]

 

 

마산교구 전사(前史) 29

 

 

통영지역 교우촌 (2)

 

훗날 조선교구 6대 교구장에 임명되는 리델(Ridel 李福明) 신부는 1861년 3월 조선에 입국한다. 당시 31세. 충청도 공주公州를 본거지로 선교사의 삶을 시작했다. 그러다 1864년 여름부터는 경상도까지 담당하게 된다. 남부지역 교우 수가 불어났던 것이다. 치명일기에 의하면 이 무렵 함안의 순교복자 구한선(具漢善 타대오)과 함께 거제도를 방문했다. 병인박해가 일어나기 이전이었다.

 

거제도를 가려면 고성 바닷가와 통영을 거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소촌(문산)에 거주하던 구한선(타대오)을 복사(服事)로 채용한 것은 그의 안내를 받기 위해서였다. 가는 도중의 숙박(宿泊)은 안전한 교우촌이 아니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고성과 통영 교우촌에 리델 신부가 머물렀음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한편 리델 신부는 입국할 때 조선의 교우촌이 그려진 지도를 갖고 있었다. 지도의 초안은 김대건 신부가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도엔 고성과 통영, 거제 교우촌이 표기되어 있었다. 마음먹고 경상도 남해안까지 내려온 리델 신부가 이 교우촌들을 그냥 지나치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소촌과 함안, 고성, 통영, 거제 교우촌을 최초로 방문한 선교사는 리델 신부임이 틀림없다. 공적 기록인 치명일기(致命日記)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사목 방문은 분명 병인박해(1866년) 이전에 있었다.

 

리델 신부는 통영 교우촌에 머물렀다. 정확하게 말하면 통영의 어떤 교우 집에서 고백성사와 미사 봉헌을 했다. 그곳은 어디였을까? 우선 당시 교우촌을 신자들이 집단으로 모여 사는 부락으로 생각해선 안 된다. 연락이 가능한 곳에 흩어져 숨어살던 교우들. 그러다 연락이 닿으면 서로 만날 수 있었던 교우들. 이 정도로 생각해야 한다. 당시는 공적으로 천주교를 금하고 있던 시대였다.

 

통영이란 지명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한다. 지금의 통영시 일대가 행정적으로 독립한 것은 1900년부터다. 그 이전엔 고성현 춘원면(春元面)에 속해 있었다. 그렇지만 선교사들은 춘원 교우촌이라 하지 않았다. 리델 신부의 교우촌 지도에도 통영으로 나온다. 일찍부터 이곳은 통영이란 특별 이름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 수군(水軍) 본부였던 통제영(統制營)은 1603년 이곳에 자리 잡는다. 이듬해엔 통제사 집무실 세병관(洗兵館)이 지어졌다. 예전의 이곳은 그야말로 한산한 갯마을이지만 이렇게 해서 군사도시가 되었던 것이다. 군인 가족들이 오고 상인들이 따라와 정착하자 사람들도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이곳을 통영이라 불렀다. 훗날 피난 교우들이 숨어들기에 좋은 조건이었던 것이다.

 

리델 신부를 모셨던 교우는 장사를 했거나 군인들에게 노동력을 제공하며 살았을 것이다. 통영의 피난 교우들 대부분이 그런 직업이었을 것이다. 그들 중 누군가가 집을 제공했다면 세병관에서 멀지 않은 지역일 것이다. 지금의 서호동 일대가 아니었을까? 어디까지나 추측이다.

 

이렇듯 병인박해 이전엔 통영과 인근에 피난 교우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들이 들어온 경로는 두 가지다. 정해박해를 피해 서부경남으로 왔다가 문산, 고성을 거쳐 온 교우들. 다음은 낙동강을 따라오던 교우들이 함안을 거쳐 고성지역으로 들어온 경우. 일부 교우들은 거제도까지 갔다. 그러나 1866년 병인박해와 1868년 무진박해 때 이곳 교우들은 완전히 흩어진다. 특히 무진박해는 남해안 교우 색출이 주된 임무였기에 피해는 더 클 수밖에 없었다. [2024년 1월 7일(나해) 주님 공현 대축일 가톨릭마산 8면]

 

 

마산교구 전사(前史) 30

 

 

통영지역 교우촌 (3)

 

최양업 신부는 전교 여행 도중 문경 새재(鳥嶺) 인근에서 1861년 6월 15일 선종한다. 과로와 식중독 그리고 장티푸스가 원인이었다. 당시 41세.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최 신부는 공적으로 경상도를 담당했던 첫 사목자였다. 후임은 다블뤼(Daveluy 安敦伊) 신부. 1861년 여름부터 맡았다. 그러다 3년 뒤 리델 신부가 경상도 사목을 전담한다.

 

리델(Ridel 李福明) 신부는 1865년 판공성사를 주기 위해 서부경남을 찾았다. 마산교구 지역을 방문한 첫 사목자였다. 순교복자 구한선(타대오)은 복사로서 안내를 맡았다. 리델 신부는 거제도까지 방문한 뒤 충청도로 떠났고 구한선(타대오)은 본가가 있는 소촌(문산)에 남았다. 그런데 이듬해(1866년 2월) 병인박해가 일어난다. 구한선(타대오)은 순교하고 리델 신부는 중국으로 피신했다. 이후 경상도엔 선교사 방문이 끊어졌다.

 

11년 뒤(1877년) 리델 신부는 6대 조선교구장 주교로 임명되어 다시 입국한다. 병인박해 때 순교하신 5대 교구장 다블뤼(安敦伊) 주교 뒤를 이은 것이다. 하지만 리델 주교 입국은 곧바로 알려져 체포되었고 중국으로 추방되었다. 잠시 입국했던 리델 주교는 그 와중에 로베르(Robert 金保祿) 신부를 경상도 전담으로 임명했다. 그렇지만 여러 사정으로 로베르 신부는 1882년에야 서부경남을 찾아갈 수 있었다. 리델 신부 이후 16년 만의 방문이었다.

 

병인박해 후 경남지역 교우촌은 엄청난 변화를 겪는다. 특히 해안지대와 거제도 교우촌은 완전히 해체된다. 박해가 워낙 심해 관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모두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지역에 남으려면 교우 생활은 포기해야 했다.

 

통영도 예외가 아니었다. 교우들은 고성, 문산 쪽으로 피신하거나 인근 섬으로 몸을 숨겼다. 당시 통영은 군사도시로 인구가 많았다. 일거리도 풍부했고 지방민의 텃새도 덜했다. 그만큼 피난 교우들의 정착이 용이했던 지역이다. 이런 곳이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해안지대 교우촌에 박해의 광풍이 불어닥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우선 병인박해 때는 이 지역에 피해가 적었다. 그러나 2년 뒤 무진박해 때는 달라진다. 바닷가 마을을 샅샅이 뒤져 교우들의 그림자까지 찾아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통영과 거제 교우촌은 무너진 것이다. 훗날 거제 교우촌은 순교복자 윤봉문 일가와 숨어있던 교우들에 의해 복구되지만 통영 교우촌은 회복되지 못했다.

 

무진박해 배경에는 오페르트 사건과 박근기(朴根基) 사건이 있다. 오페르트 사건은 대원군의 부친 묘를 도굴해 통상에 이용하려다 실패한 사건이다. 배후에는 프랑스 선교사와 충청도 교우들이 있었다. 분노한 대원군은 해안지대 교우 색출을 엄명했던 것이다. 체포령은 무진년(戊辰年 1868년) 5월에 있었기에 무진박해라 한다.

 

그런데 불과 한 달 뒤인 6월에 박근기 사건이 일어난다. 당시 부산 초량에는 일본인 거류지가 있었고 초량왜관(草梁倭館)이라 불렀다. 놀랍게도 그곳엔 일본인 신자들이 있었다. 동래에 살던 교우 몇몇이 이곳 일본인 신자들과 비밀접촉을 가지다 발각된 것이 박근기 사건이다.

 

교우 박근기가 잡혔을 때 그에게서 비밀문서가 나왔다. 조선에도 종교 자유가 있도록 일본을 통해 서양에 호소하자는 내용이었다. 당시 조정은 오페르트 사건으로 골치를 앓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을 통해 서양 세력을 끌어들이자는 문서가 발견된 것이다. 박근기는 사형 당했고 해안지대엔 신자 체포령이 강화되었다. 통영 교우촌엔 치명타였다. 당시 통영엔 조선수군사령부 우수영이 있었기에 신자 색출은 군명(軍命)이었던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교우들은 피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서둘러 고성 내륙이나 먼바다 섬으로 몸을 숨겼던 것이다. [2024년 2월 4일(나해) 연중 제5주일 가톨릭마산 4면]

 

 

마산교구 전사(前史) 31

 

 

통영지역 교우촌 (4)

 

병인박해 이전부터 경남의 바닷가엔 교우들이 살고 있었다. 마산, 고성, 통영, 거제로 이어지는 해안지대다. 그때까지 이 지역을 방문한 선교 사제는 없었다. 당연히 세례성사도 미사도 없었다. 그런데도 교우들은 있었다. 박해를 피해 다른 지역에서 이곳으로 숨어 들어온 피난 교우들이었다.

 

이 사실은 리델(Ridel 李福明) 신부의 교우촌 지도와 치명일기(致命日記)가 입증한다. 리델 신부는 1861년 조선에 왔다. 병인박해 5년 전이다. 입국 때 그는 전국의 교우촌이 그려진 지도를 갖고 있었다. 이 지도에 서부경남 교우촌 8개가 표시되어 있었던 것이다. 남해, 사천, 고성, 통영, 거제, 문산(召村), 칠원(龜山面), 의령(芝正面)이다.

 

문산과 의령의 지정면을 제외하면 모두 바닷가 마을이다. 지금의 칠원은 함안군에 속해 있지만 1860년대는 단독 군郡으로 마산지역 구산면(龜山面)을 관장하고 있었다. 1908년까지 구산면의 육지와 바다는 칠원군 소속이었던 것이다.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에도 구산 순교자 정서방에 관한 기록이 있다. ‘정서방은 경상도 칠원 돝섬서 살더니 정묘 정월에 진주 포교에게 잡혀 진주 옥에서 여러 달 갇혔다가 병들어 죽으니…’(병인 순교자 증언록 308면)

 

정묘년은 병인년 이듬해인 1867년이다. 칠원 돝섬서 잡혀온 교우가 진주 옥에서 순교했음을 증언하고 있다. 돝섬은 현재의 구산면 구복리(龜伏里) 저도(猪島)를 말한다. 당시 이곳은 칠원군 소속이었기에 칠원 돝섬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듯 병인박해 이전에도 경남의 해안지대 곳곳에는 피난 교우들이 흩어져 살고 있었다. 그러기에 리델 신부는 위험을 무릅쓰고 이 지역 교우촌을 찾아왔던 것이다. 그의 방문은 치명일기 구 다두(타대오) 편을 통해 알려져 있다.

 

치명일기는 1895년 발간되었다. 민비가 살해된 을미사변이 일어났던 해다. 병인박해 순교자 877분의 명단과 약전(略傳)을 기록한 책이다. 구 다두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함안 미나리골 중인으로서 이 신부를 모시고 거제도에 전교하였더니, 병인년에 진주 포교에게 잡혀 매를 많이 맞고 나와서 죽으니(치명일기 831번).

 

이 신부는 리델 신부를 말한다. 경상도 남쪽 방문이 처음인 그에게는 지리에 밝고 신심 깊은 협조자 즉 복사(服事)가 필요했다. 구 다두는 충실했던 적임자였기에 기록이 남았을 것이다. 당시는 교통수단이 빈약했다. 두 사람은 남의 눈을 피해 밤에만 이동했으며 대부분 걸어 다녔다. 리델 신부는 가능한 모든 교우촌을 찾아봤을 것이다. 거제도가 최종 방문지였다.

 

당시 남해 바닷가 중심지는 통영이었다. 통제영이 있는 군사도시였기에 사람들이 많았고 일거리도 넘쳐났다. 자연스레 교우들도 모여들었다. 진주와 함안 쪽에서 온 피난 교우들이 정착해 있었기 때문이다. 일부는 거제도로 건너가 거제 교우촌을 형성하기도 했다. 윤봉문 순교자 가족이 오기 훨씬 전 이야기다. 이 시기가 통영 교우촌 전성기였다. 리델 신부는 통영에 오래 머물다 거제도로 갔을 것이다.

 

통영에 교우들이 다시 등장하는 것은 1890년대 이후다. 박해로 떠난 교우들이 돌아왔던 것이다. 그중에는 섬으로 피신했던 교우들도 있었다. 연화도(蓮花島) 교우들이다. 1899년 진주본당 신부로 부임한 타케(Taquet 嚴宅基) 신부의 기록에는 연화도 교우들에 대한 언급이 많다. 1904년에는 당시 마산본당 2대 주임 무세(Mousset 文濟萬) 신부가 연화도를 방문해 유아세례를 주었다는 기록을 남겼다. 통영공소는 1900년 소재지에서 시작되었고 읍내공소라 했다. [2024년 2월 18일(나해) 사순 제1주일 가톨릭마산 5면]

 

 

마산교구 전사(前史) 32

 

 

거제도 교우촌 (1)

 

치명일기(致命日記)는 1895년 발간된다. 뮈텔(Mutel 閔德孝) 주교가 4년에 걸쳐 모은 병인박해 순교자에 관한 자료다. 서문에서 이 책자는 순교자들을 성인품에 올리기 위한 작업이라고 밝히고 있다. 시복 준비 자료임을 선언한 것이다.

 

등장하는 순교자는 877명이다. 그들의 명단과 약전(略傳)이 지역별로 실려 있다. 경상도 순교자는 37명으로 마산교구와 연관된 분은 신 말구(마르코), 오 야고보, 구 다두(타대오), 정 안당(안토니오) 4명이다. 다음은 구 다두(타대오)에 관한 기록이다.

 

‘함안 미나리골 중인으로서 이 신부를 모시고 거제도에 전교하였더니 병인년에 진주 포교에게 잡혀 매를 많이 맞고 나와 즉시 병들어 7일 만에 죽으니 나이는 23세러라.’(치명일기 831번)

 

기록에 나오는 이 신부는 리델 신부(Ridel 李福明)다. 그는 1864년 여름부터 경상도 사목을 맡았는데 이듬해(1865년) 구 타대오의 안내로 거제도를 방문했던 것이다. 당시 그는 충청도에서 사목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경남의 섬 지방까지 찾아왔으니 대단한 열정이 아닐 수 없다.

 

충청도의 리델 신부가 어떻게 거제도까지 갈 수 있었을까. 당시 상황으로 탈것은 없었다. 대부분 걸어가야 하는 여정이었다. 그의 여행은 경북을 통과해 서부경남을 거쳐 거제도로 가는 코스였다. 그러면서 도중의 교우촌을 방문한다는 계획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각 지역에 있던 교우촌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다시 말해 교우촌에서 만나는 안내자인 복사(服事)에게 전적으로 의뢰하는 여행이었다. 그러한 복사 중의 한 분이 구 다두(타대오)였다.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에 의하면 당시 구 다두(타대오)는 소촌(文山)에 살고 있었다. 리델 신부는 소촌의 교우촌에서 구 다두(타대오)를 만났고 그와 함께 사천, 고성, 통영 교우촌을 거쳐 거제도까지 방문했던 것이다.

 

따라서 치명일기에 등장하는 구 다두(타대오)에 관한 기록은 거제도 교우촌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다. 병인박해 이전에도 거제도에 피난 교우들이 살고 있었음을 치명일기를 통해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한편 리델 신부는 구 다두(타대오)와 함께 다른 교우촌도 방문했을 것이다. 문산에서 거제도까지 걸어가려면 보름은 족히 걸린다. 서양인 선교사였기에 남의 눈을 의식해야 했다. 그러니 고성, 통영 교우촌에 머물렀음은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더구나 거제도엔 배를 타고 가야 했는데 통영 교우들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치명일기엔 거제도만 등장한다. 그곳이 마지막 방문지였기 때문이다.

 

당시 거제도에 살던 교우들은 어디서 왔을까? 통영에서 건너온 피난 교우들이었다. 이 무렵 통영은 군사도시였기에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겨울엔 더할 수 없이 따뜻한 곳이었다. 따라서 품을 팔거나 바다에 의지해 살려는 떠돌이들이 많았다. 피난 교우들도 이들 틈에 끼어 통영에 모여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의 일부가 바다 건너 거제도로 옮겨갔고 리델 신부는 그들을 방문했던 것이다.

 

그러니 통영 교우촌에서 정보를 주지 않았더라면 거제도 방문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당시 거제도 교우들은 통영에서 가까운 곳에 살았을 것이다. 여차하면 통영으로 되돌아올 수 있는 지역이다. 지금의 옥포까지 갈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아마도 통영 쪽과 마주하는 둔덕면 일대가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2024년 4월 21일(나해) 부활 제4주일(성소 주일) 가톨릭마산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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